조서연 선생님의 글에 대체로 동의합니다만, 남성의 강제징집, 군복무로 인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조금도 서술하지 않으셨군요. 국방부는 여성이 강제징집 능력도 없고, 추진한다하더라도 ‘신체적 차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징병을 반대해 역차별 할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징병제는 조금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오히려 현실화가 되면, 남성들, 국방부가 반대할 것입니다.
선생님, 여성은 사회 공동체의 일부가 아닙니까? 남성들 중 일부는 개인적 사유로 그에 맞는 기준으로 공익근무, 병역특례, 산업기능요원으로 배치되거나 장애의 경중에 따라 면제가 되고 있는데, ‘한국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군대에 대한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들이 왜 여성복무를 주장할까요? 강제징집으로 인해 2년이나 신체가 구속되는 차별과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군복무가 부당하다고 이야기 하시려면 적어도 반전주의적인 태도로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노동력이 국방의 의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착취되고 있음을 함께 목소리 내야합니다. 여성징집은 이유도 없이 그냥 안된다뇨. 이를 빼놓고서 군대로 하여금 한국여성이 2등시민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은 앞뒤가 맞지도 않거니와 페미니즘 논리와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추가된 댓글 일부입니다.
+ 1세대 페미니즘 참고해보세요. 왜 여성들이 전선으로 갔는지. 후방이 아닌 전방으로 자원을 했는지. 여성을 약하다는 이유로 사회 공동의 책무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2등 국민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여성의 징병을 반대하지만, 여성의 징병여부는 다뤄져야할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시는 분들중 한국 남성들이 신체의 자유가 구속 당하고,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이야기 하시는 분이 있기는 한가요? 여성이 약하니까 징병의 대상에서 제외 되야 한다는 논리가 페미니즘에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가 어떠냐구요? 장애는 부끄러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장애인 딱지를 차에 붙이고 세금을 감면 받고, 주차 우대를 받으면 안 되는거죠. 혜성님은 여성들이 전부 장애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여성들은 주차도 못하는 머저리들이라 핑크색으로 주차공간을 1.5배나 크게 그려서 주차 시켜야 하는?
+ 지금과 같은 논리로 여성 징병제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남성의 징병제의 부당함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해야한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남성 강제징병 또한 반대하며, 징병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가산점과 같은 것으로 보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산점 보다는 병영환경 개선및 최저임금과 생명수당을 보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성은 사회 공동체로서의 책무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부분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들 중 하나인데요. 그게 페미니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구요. 한국여성은 한국시민이 아니에요?
+ 굴절된 체제에 참여하라는게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성이 징병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남성 복무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나요? 지금 상황은 도리어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작자들이 남성만 강제징집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는데요. 대체 어떤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런 주장을 볼 수 있나요? 아니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긴 하나요?
+ 저는 징병제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지만, 여성이 일시적으로 참여하는 (사실은 실현 가능성 없는) 징병제를 찬성합니다. 더불어 양성이 모두 지금의 강제징병에 심각성을 느끼고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성만 강제징병의 대상에서 빠져야 한다는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에요.
별개로 이다지 강사를 후들겨까는 매갤들이 많은데, 이다지 강사가 잘못한게 아니라, 실제 유럽에서 시작한 페미니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제가 이다지 강사였으면, 메갤이고 뭐고 다 고소했을거에요. 비난이라고도 보기 역겨운 그 저열한 조롱들 보면 말이죠.
+ 메갤이 뭐든지 일베, 여성혐오의 미러링이라고 핑계대는 것들 보면, 이제는 역겨워요. 내가 일베입니까? 내가 언제 여성혐오한 적 있습니까? 왜 메갤에 대한 비판은 모조리 여성혐오라는 라벨링을 하는거죠? 일베는 당연히 상대 가치도 없지만, 메갤도 그보다 약간 나을 뿐이에요. 왜냐구요? 메갤이 일베, 여성혐오의 레토릭을 사용하는 ‘미러링’이란 전술을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제 담벼락에서 메갤이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조직해야한다고 했던게 한 두번이 아닌데 말이죠. 자기들이 무슨 열사인지 아는데, 지금 메갤이 하는건 사실 1세대 페미니즘이라고 말하기도 모호해요.
최근 좋아하는 라이엇걸 밴드, ‘완벽한 보지’의 곡을 들으며, 몇 마디 적어 본다. 요즘 페미니즘 기사를 준비하면서 메갤의 충격효과, 미러링은 이제 약발이 다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충격효과를 받아야할 사람들에게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여성혐오에 맞서 유대감을 공유할 공동체가 생겼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힘이 될지 모르지만, 그 이야기는 동시에 고립이 되고 있다는 것이기도하다. 우려하던대로 놀이로 전락해버린 메갤의 피해사례들이 거의 모든 커뮤니티에서 투정따위가 되었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미성숙한 방어기제, 어디서든 피해를 받고있다는 생각에 잠기어 구원을 기다리는 퇴행.
이제는 오히려 자신조차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아무 것에나 닥치는대로 차별이란 프레임을 씌우는 어설픈 계몽주의를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굳게 믿는 오류가 보인다. 이들의 대화는 전형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아마츄어리즘. 그 자체만으로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고가, 사회와 선을 긋고, 자학하고, 외롭게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험하다.
이들은 ‘정의를 구현한다’는 믿음이 자발적인 맹신자, True Believer가 되도록 이끈다. 또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 지속적으로 신념화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세계는 외로운 늑대들과 매우 유사한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몰아붙인다는 것에 대한 위험을 인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올바른 것,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지젝의 책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서 역자 한보희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으로 ‘비민주적이거나 반민주적인 우중들’을 ‘민주적 시민’으로 훈육하려는 전체주의적 기획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라 했다. 그의 말을 빌려 이들의 계몽주의를 설명하자면, 이런 이들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전체주의’, 기괴한 관념, ‘민주파쇼’라는 지점과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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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기사 때문에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을 얻으려면 당연히 메갤 소개를 해줘야하는데, 메갤 이야기만 꺼내면 존나 피로해한다. 한국에는 페미니스트 그룹들이 없냐고 묻는데, 그 사람들이 자기 할 일이 뭔지 알았으면(특히나 문화담론 측면에서) 메갤 같은 현상이 생기지도 않았지, 씨발.
+ 포스팅 이하, 추가 댓글 일부
메갤이 잘 조직되지 않은건 이해한다고 해도 메갤 안에서 도는 이야기 모두 항상 피해자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 하니까요.
“너는 남자라서 여자의 피해를 모른다”, 이것만 봐도 미성숙한 방어기제, 퇴행이죠. 여자는 피해자, 남성은 가해자라고 결론지어놓고 ‘구원자를 기다리며’ 감정에 호소만 하니 종교의 구조는 다 갖췄습니다. 그러니까, 피해를 고귀한 희생으로보고 여성혐오의 순교자를 찾는거죠. 그런 면에서 굉장히 자학적입니다.
저는 메갤이 일베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베와 달리 메갤은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가진 공동체거든요. 그런 점에서 비판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하는데, 실제로는 일베에 비해 비판기능이 잘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일베보다 나아야한다’라는 전제 자체가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거죠. 그런 점에서 일베미러링이 아니라 대중운동을 해야합니다. 일베를 미러링 하니까, 일베와 비교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는 일베랑 달라”라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이라고 봅니다. 애초에 일베랑 비교조차 되지 말아야하는데 말이죠.
남성메갤러가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라는 일종의 신앙간증과 함께 ‘페미니스트 남성을 만나는 방법’ 같은 글에 대한 여성 메갤러의 태도가 ‘착한 페미니스트 남성’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죠.
저 너무 화가나서 그러는데, 말 낮춰서 몇 마디만 더 해볼게요.
혼자 pc한척, 쿨내터지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 안달난 ㅈ같은 허약한 중생은 지가 하고 있는 짓이 인종차별인지도 모르면서 어설픈 계몽주의, 훈장질. 차라리 마빡에 ‘꼬레아’라고 문신을 하고 다니지 그러냐? 무슨 어버이연합 대화하는 줄 알았다. 농담과 진담, 해야할 말과 못할 말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는 맹신자들. 맥콜에 알코올 섞는다고 그게 맥주 되냐?
윤성호가 그랬다: “이런 사람들이랑 어떻게 혁명을 해!”
송곳의 구고신이 그랬듯이 나는 사람들의 ‘무임승차’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가는 차에 혼자 들이박고, 차에 치였다며 자해공갈 하진 말아야지. 사상이 백화점 쇼윈도에 반짝이는 구두처럼, 시계처럼 소비되다 못해 요즘에는 모두가 인권운동가가 되라고 강요하는 시대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불안감에 사람들 모두를 도착증자로 몰고간다. 그게 빌어먹는 이 시대의 정신이다.
1. ‘미안하지만 나는 남자 페미니스트는 없다고 생각한다’ ㅡ http://www.megalian.com/free/301393
2. ‘여자친구 얘네도 로리타 컨셉 쩌는거 같다’ ㅡ http://www.megalian.com/free/278923
x.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음악은 동성애,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함께 정치적인 음악을 하는 스웨덴의 일렉트로닉 그룹 ‘The Knife’의 곡, ‘Pass This On’. (짷 좋읗!)
x. 메갤이 여성의 권리, 페미니즘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이유가 위 두 링크에서 보여진다. 내 경험이 모든 메갤이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메갤하는 사람 중에’ 페미니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 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선 몇 분 외에 본 적이 없다. 도리어 페미니즘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페미니즘의 가고자하는 방향을 한국의 특수성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즘의 가치를 뭉개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꾸 메갤의 일부가 메갤을 대표하는게 아니라는데, 이 놀라울정도의 추천수와 반대수를 확인해보시길. 페미니즘 기사를 쓰려고 유럽 페미니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메갤을 (빼놓고, 오늘 한국의 페미니즘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로 피로해하며 메갤 말고 한국에 페미니즘 운동은 없냐고 묻는다.
한국에 페미니즘 운동? 있지, 있다. 그런데 나는 좀 난처한 답을 갖고 있다. 그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했으면 메갤 현상까지 생기지도 않았을거고, 여성혐오도 분명 줄었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종종 피로해하지만, 꾸준히 기사는 (내 자비로) 함께 준비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 메갤과 같은 현상이 폭발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이 곳 친구들도 이해하고 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했어야 여성혐오가 줄었을거라 말하냐고? 일일히 다 열거하기 어렵지만, 아주 기본적인 몇가지만 이야기 해볼까? 그 사람들이 문화담론을 무시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했어야 하는 일들.
1. 여성운동 이야기만 꺼내면, 여성부 이야기를 꺼내는 한심한 사람들에게 여성부의 문제는 여성이 아니라, 빌어먹을 관료주의이고. 2. 여성이 로리 스타일로 입건, 헐벗건 성폭력 자체가 범죄이지, 로리라던가의 개인의 성적 취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물론 페도필리아에 대한 입장은 여기서 논할 가치조차 없다). 3. 섹시즘은 성차별이 될 수 있지만, 성폭력과 같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 4. 여성이 보호 받아야할, 여성을 약자화 시키는 것에 반대해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것. 5.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주체가 되는 운동. 6. 젠더롤에 반대. 7. 여성과 남성, 동일노동, 동일 임금. 임금격차와 노동환경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할 것. 8. ‘착한 남성’이 주는 선물, 구원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가 함께 혐오에 대항해 싸워가야할 것. 9. 모든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극단적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범죄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할 것. 10. 여성이던 남성이던 성적 욕구가 천박하다거나 죄의시 되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11. 성매매에 대해 비판적이더라도 성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해야할 것. 12. 자기성결정권. 13. 여성을 특정해 일어나는 범죄로 인해 여성전용시설을 만들 것이 아니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및 관련 행정, 사법부를 압박해 헌법이 보장하는 것과 같이 모든이가 어디에서건 안전할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해야한다, 당장! +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보장과 대우를 목표로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우대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이 되어야한다. 헌법에 다 적혀있는거다, 혐오론자 쌖끼들아!
적고 보니까, 이건 한국 페미니즘 운동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보운동 전체가 문화담론을 옆 동네에서 유행하는 로컬인디밴드 정도라고 생각하는듯.
x. 요약: 미친놈들이랑 싸우기위해 나까지 미친짓하면, 우리가 왜 미친놈들이랑 싸우는거지? IS가 무고한 사람들에게 테러를 한다고해서 이슬람 전체를 비난하고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 되잖아. 혐오론자는 분명 많지만, 아직 혐오가 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에게 혐오론자라 라벨링 하기 전에 어떤 행동이 혐오인지 이야기 해주자. 그리고 함께 혐오에 맞서자.
이번 민중총궐기를 두고서 폭력시위라 비난하는 분들에게 왜 국가가 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리어 위헌, 폭력을 일삼는 것은 용인하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헌법 일부를 정리함과 동시에 올 ECB의 긴축안에 항의하던 시위 논평을 소개합니다. 링크된 영상은 ECB의 긴축안에 항의하던 2만명의 블록큐피 시위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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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블록큐피 논평>
“시위대의 폭력은 만장일치로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체제의 폭력을 무시하고 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대의 폭력은 경멸하면서, 왜 우리는 체제의 폭력은 허용하는 것일까.
We unanimously condemn the the violence of the demonstrators. But we ignore the violence of the system. During we contempt the violence of demonstrators that happens on streets, why we accept the violence of the system?” ㅡ Jakob Augstein, Spiegel
(기사: S.P.O.N. – Im Zweifel links: Gewalt gegen Gewalt)
유럽중앙은행이 내놓은 긴축안에 90여개의 독일조직들이 연대하는 Blockupy(블록쿠피)가 거센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 17,000여명의 시위대와 10,000여명의 경찰간에 격렬한 물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2001년에 이미 비폭력투쟁 노선을 선언했지만, 체제의 폭력을더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습니다. 또한 높은 청년실업으로 무너져가는 스페인과 긴축안으로 고통받는 그리스는 혼자가 아니라며 독일 사람들이 연대를 표명하며, 유럽중앙은행의 긴축안에 분노를, 독일정부에게 이 사태의 해결의지를 보내라 압박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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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 폭력시위, 국가의 의무, 체제의 폭력, 그리고 헌법>
민주주의국가 최상위법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헌법가치보다 중요한 사법, 민법, 형법은 없음.
시위대 요구안및 이번 시위 정리.
1. 헌법 제 4조 이행; 대북적대정책폐지
–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2. 헌법 제 5조 이행; 일본자위군 한국본토 상륙허가 철회, 사이버사 부정선거 재수사및 처벌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
3. 헌법 제 7조 이행; 국정원, 선관위의 범죄가 밝혀진 이상 이에 대한 재수사및 관련자 처벌
①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②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4. 헌법 제 8조 이행; 통진당은 국가내란선동만 유죄였으며, 내란음모사실은 가능성조차 없어 무죄였다. 독일도 공산당을 해체했으나, 정부가 사과하고, 명예를 복권시키며 재창당했다.
① 정당의 설립은 자유이며, 복수정당제는 보장된다.
②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
③정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정당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보조할 수 있다.
④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5. 헌법 제 11조 이행; 국정원, 사이버사 부정선거및 정재계 인사 비리 관련자 처벌, 세월호 관련자 처벌.
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훈장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6. 헌법 제 12조 이행; 시위자 체포시 경찰이 준수하여야 할 사항 (경찰직무법까지 하면, 경찰의 이번 체포들은 더 엄격히 다뤄져야함)
③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다만, 현행범인인 경우와 장기 3년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고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사후에 영장을 청구할 수 있다.
7. 헌법 제 13조 이행; 세월호 참가자 연좌제식 처벌
①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
8. 헌법 제 17조 이행; 경찰과 국정원의 불법 사찰과 도감청, 카카오톡 감시.
–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9. 헌법 제 18조 이행; 카카오톡 감시.
–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10. 헌법 제 19조 이행; 2015년 유엔 제네바 총회의 권고안을 따라 양심적 병역거부자, 양심수를 석방하고 사회대체복무를 신설한다.
–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11. 헌법 제 21조 이행; 집회시위권 보장, 집회시위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인데도 경찰이 위헌을 저지르고 있으며, 정부가 개입해 방송에 검열을 가하고 있음. 심지어 조선일보를 받아쓴 일본 산케이 지국장을 고소하여 징역을 때림(국가가 단순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언론인의 신체를 구속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④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12. 헌법 제 22조 이행; 칼 맑스의 <Das Kapital> 등은 연구서적으로 어디서나 읽히는데도 대학생들이 <Das Kapital>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 됨. 또한 헌법이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사회주의, 공산주의학문을 연구하는 학문 연구하는 자, 심지어 북한체제를 풍자하는 작업을 내놓는 예술가들을 구속함.
①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13. 헌법 제 27조 이행; 증거인멸및 도주의 우려가 없는 인권활동가들을 장기간 구속수사하며,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배함.
③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형사피고인은 상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지체없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④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14. 헌법 제 28조 이행; 제대로 보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음.
– 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서 구금되었던 자가 법률이 정하는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무죄판결을 받은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에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15. 헌법 제 29조 이행; 공무원및 공직자의 불법행위에 대한 피해를 보상 받지 못함.
①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공무원 자신의 책임은 면제되지 아니한다.
16. 헌법 제 31조 이행; 역사교과서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다고 헌법이 밝힘에도 국가가 개입해 국정교과서를 만드려고함. 국가의 평생교육 진흥의무를 져버리고, 사립재단들과 공조하여, 대학생들에게 과중한 교육비를 부담시킴.
④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
⑤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
17. 헌법 제 33조 이행; 노조 설립권, 노동자의 기본 3권 보장해야하나 재계, 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고 있음.
①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②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18, 헌법 제 36조 이행; 현재 정부는 LGBT, 성소수자의 자기성결정권과 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 또한 미혼모가 자립할 수 있는 정책을 지원하지 않으며,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국민을 뒤로 하고 고소득자들만을 위한 사립병원, 사보험들을 준비하는 정책을 만들고 있음.
①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
②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③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19. 헌법 제 37조 이행; 앞의 헌법들을 이행할 의무가 있음에도 이행하지 않거나, 도리어 헌법을 위배하며, 공공을 위해 일부 법률로 제한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음에도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며 협박을 일삼고 있음.
①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20. 헌법 제 38조 이행; 부, 처, 장관 등의 공직 후보자 탈세에도 제대로된 처벌은 커녕 오히려 기용하고 있음.
–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
21. 헌법 제 123조 이행; 농어민및 중소기업, 지역간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할 의무가 있음에도 FTA와 TPP 등의 무역조약으로 이들의 업과 생계를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오직 다국적 대기업 중심의 정책을 수립함.
① 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
②국가는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③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
④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
⑤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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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헌법 전문에 의거해 지금 현정부가 헌법을 위배하고 있는 사항이다. 헌법은 민주주의 국가의 최상위법, 국가의 근간으로, 형법, 민법, 사법보다 높은 권한을 갖는다. 이를 지키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국가도 없다.
헌법 부정 세력이 누구인가 따져, 그들을 처벌해야한다. 마음 같아서는 헌법 부정세력 모두, 그들이 원하는 시위 없는 국가 부카니스탄의 아오지탄광으로 보내주고 싶다.
타임라인을 보니, 뉴스들을 훑어보니 국제쇼팽콩쿠르에서 조성진씨가 ‘한국인 최초’ 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고 한다. 클래식 언급 한번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온통 클래식을 이야기 하길래 무슨 소란인고 싶어 위키를 뒤져보니 지금까지 상은 폴란드와 소비에트(러시아)가 상을 휩쓸었더라. 사람들은 또다른 박지성과 김연아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축구와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다. 사람들은 이제 피아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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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 응원 영상을 보았다.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환호를 질렀지만, 당시 그런 사람들에게 질려버렸던 나, 그리고 오늘은 그런 사람들이 측은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진다. 집단 광끼는 소리없이 일상을 삼키지만, 정작 우리의 삶을 휘두르는 정치는 날로 듣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소음을 낼 뿐이다. TV를 켜면 모두 즐거워하고, 떠오르는 미디어에선 모두 최근의 요리 이슈에 몰두하고, 우리의 삶을 휘두르는 정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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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로 주방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주방은 언제나 미디어에 실려있는 요리들 같지 못 하다. 우리의 식탁은 대개는 시간에 쫒겨서,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천정부지로 치솟는 월세와 물가로, 허나 너무나 작은 화분 탓에 성장을 멈추고, 생기를 잃은 꽃을 닮아가는 우리의 임금처럼.. 우리의 식탁은 대개는 빈곤하다. 왜 우리가 인스턴트를 즐겨 찾게 되고, 엄마의 밥을 그리워하는지, 왜 유학생들이 파스타나 스테이크가 아닌 그저 물에 말은 누룽지 밥에 신김치를 그리워하는지.. 우리는 말하지 않았고, 말할 곳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 “잘 지내냐, 밥은 먹고 다니냐”는 어머니의 안부전화가 반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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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제국 집권 당시, 히틀러는 스포츠를 활성화 시켰다. 국민의 관심을 정치가 아니라 스포츠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체력은 국력”이라며 씨름을, 전두환은 야구에 모든 이들의 눈을 주목 시켰다. 88올림픽을 보면서 우리는 굴렁쇠 좀 굴려봤고, 영문도 모른채 또래 남자애들과 태권도장을 다니고, 여자애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학원을 다녔다. 장영주의 첼로를 모두 숨죽여봤고, 부모님들은 우리를 또다른 황영조, 이봉주, 박세리로, 박찬호로, 박지성으로, 박태환으로, 장미란으로, 김연아로 혹은 활이나 탁구라켓을 우리 손에 쥐여주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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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년째,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한다. 우리 가운데 몇몇은 또다른 황영조, 이봉주, 박세리나 박찬호, 박지성, 박태환, 장미란, 혹은 김연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MTV는 북미 젊은이들에게 누구나 락스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주었다. 하지만 이젠 우리 모두가 락스타가 될 수 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또다른 박지성과 김연아가 필요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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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싫다고 하면서도 백년 전, 일본이 생각하고 말하던 ‘탈아입구’에 목을 매고 있다. ‘한강의 기적’ 같은 서사와 ‘세계 속의 한국’ 같은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우리는 못 나지 않았어!” 하고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충족하려 하지만, 타인들의 욕망은 이 한국 사람들이 욕망하는 바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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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하야하라” 외쳤던 이명박 대통령 이전에는 바다가 3면이었지만, 이명박 이후 바다가 4면이 된 한국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감동실화나 기적 같은 것으로 포장된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아무도 이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x. 내년부터 유치원생에게도 안보, 반공교육하겠다는 정부와 국방부도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하겠다는 기사를 보고 뒷목을 잡으며 “그만해 미x놈들아!”를 육성으로 외치던 찰나에 낙태에 관한 게시글을 보다가 조금 적어봅니다. (..는 베를린의 흔한 설명충)
x. 링크된 음악을 들으면, 결핍이 당신의 도파민을 막습?? 아니, 당신의 도파민의 결핍을 막고, 항암제 역할을 합니다. (손을 잡아요)
x. 독일의 경우는 통일 직후, 독일에서 벌어진 2년 간의 낙태 논쟁은 사실상 동독을 흡수한 서독의 법을 계승하느냐, 아니면 옛동독법을 인정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비롯해 극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전 서독에서는 낙태를 ‘생명에 대한 범죄’로 규정했고, 동독에서는 임신 12주까지는 무제한으로 낙태를 허용했었고, 이를 두고 여성운동에서는 이 문제에 한해서는 동독의 진보적 유산을 지키자라는 결의 아래 서독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깨어놓겠다고 총력전을 펼쳤고, “태아의 생명보호를 최우선으로 어떤 낙태도 허용할 수 없다”는 극보수 가톨릭 세력은 ‘아일랜드식 낙태 완전 금지법’을 목표로 총력전을 펼쳤습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정당은 물론이거니와 이념, 그리고 남성과 여성 국회의원의 극심한 분열을 겪다, 완전 낙태자유를 목표로한 여성운동의 주장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합의 과정에서 서독의 사민당이 동독의 낙태법이 여성의 인권을 더욱 보장한다고 힘을 실으며, 낙태를 범죄시 하던 분위기를 뒤집고, 1995년 10월부터 “4일간의 숙려기간을 거친후 증명서 발급을 통해 임신 3개월 이내의 낙태가 허용된다”는 골짜의 낙태법이 발효 됩니다. 물론 지금 한국의 법처럼 임부가 원치 않는 강간, 준강간 등의 임신을 할 경우 낙태는 보장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x. 이후 독일에서는 2002년 7월 2일부터 기존의 보수적인 규정을 개정한 새로운 낙태규정이 발효 되는데, 이 또한 ‘임신중절에 대한 기한규정(Fristen-lösung)’을 따르고 있습니다. 낙태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여진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베를린리포트: http://berlinreport.com/bbs/board.php?bo_table=lifeqna&wr_id=1062&page=1132)
1. 임신 12주안에 낙태는 일반적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2. 임신12주 이후에도 임신여성이 중대한 육체적 손상이나 중대한 영적 곤경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낙태는 처벌대상이 아니다.
– 이로써 임신12주 이후의 낙태도 더이상 감정소견서가 필요하지 않다. 낙태의사가 있는 여성은 그녀가 “중대한 영적인 곤경과 위험”에 놓여 있음을 확신하는 낙태시술의사를 찾아내는 것으로 족하다. “중대한 영적인 곤경”(“schwere seelische Notlage”)이란 법적으로 볼때 사실상 얼마든지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고무줄같은 개념(“Gummibegriff”)으로서 이로서 낙태의사가 있는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어쨌든 낙태를 관철할 수 있다. 낙태여성과 의사간에 쿵짜쿵 짜고치는 고도리를 해도 이를 감독하는 법적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늦장 낙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사실상 낙태가 가능한 것이다.
3. 동법에 따르면 낙태의사가 있는 여성은 서류상으로 자신의 “곤경”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곤경은 일방적으로 선언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곤경이 진짜인지를 검토하는 과정은 없다. 그러므로 이 “곤경”의 서류화는 알리비를 만들어내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에 다름 아니다.
4. 판단력이 없는(nicht Urteilsvermögen) 여성은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를 테면 만 16세 이하의 미성년자)
– 낙태반대자들은 이로써 동법이 16세이하의 소녀가 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부모에게 사실을 통보함이 없이 낙태를 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비판.
5. 개정된 의료보험관련규정 – 1994년 3월 18일 발효된 의료보험법은 다음과 같이 개정된다. 위법이 아닌 낙태의 경우 의무간병의료보험(die obligatorische Krankenpflegeversicherung)이 비용을 떠맏는다.
– 낙태반대자들은 이로써 동법이 모든 시민들이 낙태를 반대하건 찬성하건간에 상관없이 의료보험금고를 통해 낙태를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다고 비판.
6. 위의 전제규정을 어기고 낙태를 하거나 낙태를 도운 자는 최고5년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7. 임신한 여성의 동의없이 낙태를 강제하거나 도운 자는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8. 정확한 통계 산출을 위해 허가된 보건당국에 낙태를 신고해야 하며 이때 해당여성의 익명성과 의사의 직업비밀은 보장된다.
또한 이 법안은 월 수입이 900유로 이내인 경우 보험회사에서 수술 비용을 전액 부담해 주며, 임신 7주 이내는 약물로 중절할 수 있고 그 이후에는 전신 마취를 한 뒤에 수술을 하게 됩니다.
x. 관련 판례로서는 2007년, 독일법원은 낙태를 반대하는 선동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55세의 루터교 목사에 대한 구속을 결정하는 판결이 있습니다. 요하네스 렐레 목사는 독일의 에를랑겐 법원으로부터 1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는데,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낙태행위를 2차 대전 당시, 나찌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대학살, 즉 홀로코스트에 비유하는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을 한 것이 유죄의 이유이며, 낙태에 대한 그의 견해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낙태에 반대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낙태에 대해 편파적 인신공격을 하면 유죄의 사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는 전에도 낙태론자들을 ‘전문 킬러’에 비유했다가 8개월 간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기도 하며, “법원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이를 아직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본다”며 법원을 모욕한 전력이 있습니다. 2004년부터 독일의 또 다른 법원은 “낙태 클리닉을 운영하는 병원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여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생명을 살해하는 곳”이라고 주장한 생명운동가(낙태반대론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기도 했는데, 귄터 안넨이라는 생명운동가(낙태반대론자)는 지난 2005년 법원으로부터 50일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선고의 이유 역시, “낙태술은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의료 기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며, 당시 그는 “의롭지 않은(Unjust)”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는 이미 있는 합법적인 일들을 불법인(Illegal)과 동의어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처럼 선동했지만, 현행법상 낙태는 불법이 아니므로 그는 허위사실을 주장했다는 것이 유죄의 주요 근거였습니다.
〈혁명가의 교리문답〉은 흔히 바쿠닌이 작성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바쿠닌이 편집했을 가능성은 크지만, 그 글은 바쿠닌의 사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네차예프는 〈혁명가의 교리문답〉에서 혁명이란 모든 것에 우선하는 목적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것은 철저하게 행동적이며 철학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혁명가는 민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도록 촉진하고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교리문답에서 나타나는 관점은 이와 다르다. 혁명가는 혁명에 필요한 움직임을 불러일으키고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며 억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민중은 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수단이며,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할 뿐이다. 〈혁명가의 교리문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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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 대한 혁명가의 자세
혁명가는 죄인이다. 그에게는 사적 이해도, 개인적인 일도, 사사로운 감정이나 집착도, 사유재산도, 심지어 이름조차 없다. 그는 모든 관심과 생각과 열정을 혁명에 바쳐야 한다.
혁명가는 공적 질서나 문명사회, 그리고 모든 법과 관습과 일상적인 삶의 조건과 도덕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아야 하며, 이를 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그는 문명사회의 무자비한 적이다. 그가 이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사회를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혁명가는 모든 교조주의를 경멸해야 한다. 그는 평화를 위한 과학을 포기하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한다. 그가 아는 과학이라고는 파괴를 위한 것뿐이다. 기계공학, 물리학, 의학을 공부하고, 밤낮으로 인간, 인간의 특성과 상황, 인간 사회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계급의 사회질서를 연구하는 것도 모두 파괴를 위해서이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이 비열한 질서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파괴하는 것이다.
혁명가는 여론을 경멸해야 한다. 그는 기성의 도덕에 숨어 있는 모든 의도와 그것을 드러내는 모든 방식을 경멸하고 증오한다. 그는 혁명의 승리에 기여하는 도덕만을 인정하며, 그의 시각에서 혁명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부도덕하다.
혁명가는 죄인이다. 그는 국가와 사회를 대표하는 모든 것에 대해 냉혹해져야 하며, 그가 사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연민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와 혁명가 사이에 화해란 가능하지 않다. 오로지 갈등만이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끊이지 않고 일어날 뿐이다. 둘중 어느 한 쪽의 죽음만이 둘 사이의 갈등을 끝낼 수 있다. 혁명가는 매일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는 견뎌낼 수 있을 때까지 고문에 익숙해져야 한다.
혁명가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만큼 남에게도 엄격해야 한다. 그는 가족애, 우정, 사랑, 감사, 명예와 같이 나약한 감정을 혁명가다운 냉철한 열정 하나로 억눌러야 한다. 그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쁨이나 위안은 혁명의 성공에서 온다. 그는 언제나 가치없는 파괴라는 단 한 가지의 생각과 목표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목표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스스로를 희생할 준비를 하고 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없애버릴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혁명가라면 낭만, 감수성, 격한 감정, 충동, 심지어는 사적인 증오심과 원한까지도 배제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 열정이 그가 가진 제2의 본성이긴 하지만, 그것은 가장 냉철한 계산에 의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어디로 향해 있는지가 아니라 혁명의 이해에 부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언제 어디에서나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동지들에 대한 혁명가의 자세
혁명가는 자신처럼 투철한 혁명적 활동을 보여주는 자만을 아끼고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우정과 헌신을 비롯해서 동지들에 대한 다른 의무가 갖는 비중은 그것들이 파괴적 혁명을 이루기 위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혁명가들 사이의 연대가 중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혁명 행동의 모든 힘은 연대에서 나오단. 저마다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는 혁며아 동지들은 가능한 한 모든 중요한 사항을 다같이 토론하고 모두의 의견을 따르는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만 계획을 실해엥 옮길 때만큼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파괴 행동에 힘해야 하며,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만 다른 동지들의 조언이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모든 동지는 제 2·3의 계층에 속하는, 즉 비공식적으로만 혁명단의 일원인 혁명가들을 가까이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는 그들을 자신에게 할당된 혁명 자금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 이 자금은 경제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혁명가는 가장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혁명가 자신 역시 혁명의 대의를 이루기 위한 자금으로 이용되어야 하는데, 단 이 자금의 사용은 모든 내부 구성원의 동의를 거친 것이어야 한다.
한 동지가 불행에 처해 있고 그를 도울 것인가 말 것이가를 결정해야 할 때, 혁명가는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혁명의 대의에 이익이 되는 것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때 혁명가는 한편으로 그 동지가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 다른 한편으로 그 동지를 돕기 위해서는 다른 혁명가들이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해야 하는지를 고려해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회에 대한 혁명가의 자세
새로운 사람을 영입하고자 할 때에는, 그 사람이 자신의 열의를 행동이 아닌 말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만큼, 조직 내 구성원들 사이에서 투표를 실시하여 만장일치가 이루어졌을 때에만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
혁명가는 오직 완전하고도 신속한 파괴라는 목적 하에서만 국가, 계급, 그리고 소위 문명화된 사회 내에 침투해야 한다. 그는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 세계에 대한 미련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과의 상황과 관계가 계속 그를 주저하게 만든다면(그 세계의 모든 것이 그에게 가증스러운 것이어야 할진대), 그는 진정한 혁명가라고 볼 수 없다. 그 세계 내의 부모, 친구, 연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계들 때문에 행동을 주저하게 된다면, 그는 진정한 혁명가라고 할 수 없다.
혁명가는 가차없는 파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회 한 가운데서 살면서 현실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을 찾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혁명가는 상점, 교회 고급 호텔, 관료 사회, 군대 뿐 아니라 문단, 참모본부, 심지어 겨울궁전까지, 모든 곳에, 모든 계급내에 침투해야 한다.
이 모든 비열한 사회는 몇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 부류는 즉시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리는 혁명의 대의 완수를 저해한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등급을 매긴 명단을 작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일순위를 차지한 첫 번째 부류는 가장 먼제 제거될 것이다.
명단을 작성할 때 개개인의 과오나 잘못을 저지른 개인에게 민중들이 품게 된 증오심에 연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오나 증오심이 민중의 봉기를 불러일으키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잠정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혁명의 대의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개인의 죽음을 불사하는 한이 있다 해도 이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혁명가 조직에 해가 되는 자라면 그 누구보다도 먼저 그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의 돌연하고도 비참한 죽음은 정부를 엄청난 공포에 떨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지식하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물러나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정부의 권력에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 부류에서는 잠시나마 우리의 피땀으로 먹고 살았던 사람들이 포함될 것이다. 그들의 무자비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민중의 봉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 번째 부류는 폭정을 행사한 상당수의 고위직 인사들로, 이들은 타고난 조건으로 부, 인맥, 영향력, 권력 등으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설자리를 빼앗고, 무릎을 꿂게 하고, 노예로 만들어야 하고, 또 그들의 하찮은 비밀을 폭로해야 한다. 그들의 영향력과 인맥, 그리고 그들이 가진 부와 힘은 혁명가 조직에 있어서 귀한 보물이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네 번째 부류는 야심을 품은 정치가들과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자를 포함한다. 이들과 결탁하여 이들의 계획에 공모하는 것은 허용된다. 이는 이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들을 굴복시키고, 이들의 비밀을 알아내고, 결정적으로 이들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들을 통해 국가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다섯 번째 부류에는 정치적인 모임이나 저작들을 통해 장광설에 여념이 없는 이론가, 음모자, 그리고 혁명가들을 포함한다. 이들을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길들이고, 단호하고도 위험한 선언을 하게끔 부추겨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들 다수에게는 결정적인 실패를, 혁명가들에게는 교육적인 효과를 안겨주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여섯 번째 부류는 여성이다. 이 부류는 아주 중요하며, 세 가지의 하위 부류는 나뉜다. 하나는 연약하고, 어리석고, 영혼이 없는 여성들로 이들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부류의 남성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용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지만 우리와 한 편이 될 수는 없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관념을 구상하지 못하며, 또 혁명의 대의를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 여성들은 다섯 번째 부류의 남성들과 같이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강령을 전적으로 따르는 여성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 편이요, 우리 혁명단의 정식 회원이요, 우리의 동지이다. 우리는 그들을 아주 소중한 보물처럼 대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 없이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중에 대한 혁명단의 자세
혁명단은 민중, 즉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과 행복 외에 그 어떤 다른 목표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행복과 해방이 모든 걸림돌을 일소해버릴 민중 혁명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며, 이를 위해 모든 힘과 모든 자원을 바칠 것이다. 혁명단은 민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총궐기를 할 수 있도록 부추기기 위해서 민중에게 가해진 고통을 배가시키고 확산시키는 일까지도 불사할 수 있다.
혁명단이 이해하는 ‘민중 혁명’은 서구 사상만을 따르거나 사유재산·전통·사회질서 혹은 일반적으로 문명이나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들 앞에서 주저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이제껏 기존의 정치체제를 전복하는 데 그쳤고, 이는 단지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혁명적이라 불리는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민중은 국가를 그 근본부터 파괴하고 러시아의 모든 전통과 계급과 기성 질서까지 제거할 혁명만을 환영할 것이다.
게다가 혁명단은 민중에게 상부의 하달에 따르는 조직을 강요할 의향이 전혀 없다. 미래의 조직은 분명 민중의 운동과 삶 그 자체로 구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다음 세대의 몫이다. 우리의 과제는 끔찍하고, 가차없고, 완전하고, 총체적인 파괴이다.
또한 민중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민중들의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 민중은 모스크바 정부가 설립된 이래로 귀족, 관리, 기업가, 상인 등 권력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모든 이에 맞서 말뿐 아니라 행동으로 항거했다. 이 용감무쌍한 무법자들과 함께 하자.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러시아의 혁명가들이다.
저지할 수 없는 힘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이 무리들과 통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조직의 과제요, 우리의 음모요, 우리의 목표가 될 것이다.
1. 한국에서 시사적인 문제나 문화에 대한 비평은 넘치지만 지나고 나면 사실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바뀌는 구조도 아니다. 예전부터 ‘비평’과 ‘논객’의 무용성에 대해서 인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비평의 목적은 사건의 일회성에서 반복성과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비평의 형식이 시작되었던 문학작품이든, 혹은 시사적인 사건이든 마찬가지이다. 일회성과 우연성 그리고 정보소음은 현대의 대중사회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럴수록 그 배후의 구조와 반복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비평의 역할은 필자 개인의 (과잉된) 자의식과 주관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사건 자체의 참신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정보소음에 소음을 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참신하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사건은 알고 보면 진부한 것들이 많다. 어찌 보면 그 진부함이 새삼스레 참신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단지 시의성이 지나면 아무도 다시 비평의 대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이다.
2.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리로 나온 일베’ 사건이다. 작년 일베회원 일부가 폭식시위를 전개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조롱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 사건을 통해 알지 못하는 기자들로부터 전화공세를 받아야 했고, 언론지면상에서도 ‘드디어 넷우익이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에 커다란 의미가 부여되었다. 물론 SNS도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환기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큰 의미가 없는, 불모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오히려 폭식투쟁에 나선 ‘일베’에서 바뀐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드러내고 무언가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공론장에서 누군가가 내세우는 이념과 당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것을 조롱하는 일베 특유의 행동방식은 여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일본의 재특회나 프랑스의 국민전선처럼) 그들이 내세우는 적극적인 이념이나 강령상의 주장 따위는 없다. 당시 폭식시위가 단지 ‘세월호 사건’이라는 커다란 상징성 때문에 더욱 더 조명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 하나하나의 이력과 자격을 문제삼는 인터넷 여론공세를 보면서, 이곳에서 진지한 주의주장을 공론장에서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유가족들이 교황 정도는 되어야 말할 자격이 생기는가, 하는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황방한으로 정신승리하는 진보좌파들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일베가 행한 퍼포만스는 그러한 일상적인 ‘정치혐오’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제기하는 ‘미학’적인 방식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적었고, 기사화되기에 좋은 멘트도 아니었다.
3. <일베의 사상>에서 누차 반복했듯이, 일베의 멘털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애국보수’라는 슬로건이나 ‘행동하는 일게이’라는 정치적 자기표상을 동원하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유행했던 메갤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그들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고 ‘너의 페미니즘은 잘못되었다, 악용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베라는 커뮤니티 내에서도 애국보수에 대한 내용상의 합의는 의식적인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빌리면 n개의 애국보수, 혹은 복수의 애국보수들이 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사실 은 애국보수 따위는 자신의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일베의 미학은 바로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타인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생활방식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제기를 해 보았자, 알다시피 그들에게서 되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조롱어린 퍼포먼스는 진보진영에서도(혹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많이 하지 않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도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정투쟁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에 안 것이지만, 자신이 무언가에 분노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그러한 인정투쟁의 형식은 메갤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4. 이른바 디씨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잘못된 정보(홍콩에서 젊은 여성 보균자들이 보건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감염을 확산시켰다는)와 관련하여 여성혐오 언행이 일고, 이후 정정보도를 통해 역풍이 불자, ‘씹치남’, ‘실좆’, ‘자들자들’이라든가, ‘삼일한’ 등 종래의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그대로 패러디하는 언행들이 만연했다. 혹자는 이것을 기존의 혐오의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전사하고 ‘미러링’하여 그 혐오의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주는 획기적인 ‘퍼포먼스’로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메갤에서 시작된 여성혐오의 ‘미러링’의 방식은 애초에 일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게이들이 자칭하는 ‘애국보수’나 ‘행게이’는 진보진영의 깨시민 담론에 대한 ‘패러디’에 불과하다. 그 슬로건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일베 내에서도 바보취급을 당한다. 한편 메갤과 메갈리아 페이지에서는 ‘혐오범죄에 상처입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조롱을 되돌려주는 멋진 사람(혹은 여성)이 되겠다’는 인상적인 신앙고백과 선언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획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 ‘깨시민’이었다가 일베로 전향하게 된 계기를 토로한 같은 형식의 고해성사와 신앙고백을 검색만 하면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오히려 그 ‘미러링’의 방식은 일베의 미학이기도 했다. 예컨대 일베 유저들이 ‘애국보수’를 자칭하고 ‘행동하는 일게이들’이라고 자평하는 것은 사실,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진보진영의 자기표상에 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는 것 자체가 일베프레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인터넷 일각의 그 진보적인 위선에 대한 환멸도 환멸이지만, 그 보다는 그러한 위선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오히려 일베 유저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는 중요하는 기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상처를 입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주는 쪽이 되겠다는 결의. 그것을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물론 매겔의 탄생배경은 이해할만하다. 복수의 여신이 그들의 편에 서 있다고 평해도 딱히 반론할 여지는 없다. 게다가 그들의 조롱은 (일부에게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보이면서도 재미있기까지 하다. 확실히 인터넷은 오래전부터 여성혐오의 진앙지였다. 늦게 잡아도 군가산점제 폐지 이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그러나 실은 아무 위협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하필 이 시점에 메갤이 등장했느냐이다. 그 열쇠는 일베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 동안 있었던 여성혐오 일변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베의 새로운 점은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차라리 (자기들끼리의)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유희했던 데 있다. 그들은 여성에 관한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도 자신의 혐오정서를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작 ‘된장녀’, ‘고추장녀’, ‘스타벅스녀’ 등등 몇 개의 단어들이 유명세를 떨쳤던 2005~2012년의 과거와 달리 일베라는 커뮤니티 단독으로만 여성혐오 언어들의 사전을 따로 만들어도 될 지경이다. (메갤은 그 혐오사전을 여성에게도 호환가능한 번역사전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더 이상 오늘날의 젊은 남성들이 가부장제에 대한 호교론을 설파하면서(내가 남자로서 얼마나 인생을 책임있게 열심히 사는지 어필하면서) 여성혐오를 표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내가 “일베를 하는 잉여ㅂㅅ이지만”하는 정서가 주류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가부장제의 일반적인 붕괴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한편 만일 메갤이 어쨌든 이해할만한 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똑같은 논리로 일베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지역에 대한 경멸과 혐오의 언어가 만연했고, 특정인의 블로그 계정등에 몰려가 악플을 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논객문화에서 자주 반복되어왔던 상대의 지적수준에 대한 경멸과 무시는 매우 고질적이었다. 그러한 것을 침묵 속에서 견디다가 이후에 ‘나는 더 이상 그러한 것으로 상처 입지 않는다’며 더 심각한 위악으로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무장한 집단이 출현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 현실에서 젊은 남녀가 처한 권력관계는 그때그때의 장소마다 다르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일상에서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드러나는 권력관계는 현실과 전혀 다르다. 우선 커뮤니티 내의 권력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관리자 혹은 유명닉을 둘러싼 ‘친목질’이다(여초 커뮤니티 한정으로 말하면 여시나 ㅇㄷ의 관리자 친목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친목질 금지나 닉언급 등의 금지가 적용되기 시작하면 좋을대로 떠드는 분위기가 되고 커뮤니티 내 권력관계는 형해화된다. 단지 분란이나 법적인 시비를 피하기 위해 룰을 제정하는 사람이 있을뿐 그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가시적인은 커뮤니티 간의 권력다툼이라고 할만한 것인데,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내가 (가라타니의 말을 빌려) “부정적인 호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쉽게 말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원칙이다. 가령 커뮤니티 간에는 거의 영구적 반목과 항쟁의 상태가 존재한다. 홉스의 ‘자연상태’라고 할만한 것이다. 예전에는 없이 못살 것만 같았던 여시와 오유간의 우호관계가 (다소 신뢰하기 힘든 오유회원을 상대로 한 여시회원의 성폭력 사건 폭로 및 잠수사건 이후) 틀어지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반목의 계기는 여성혐오나 가부장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되로 주고 말로 되받는다는 것이 인터넷의 유일한 도덕적 현실원칙이다.
6-1. 무엇보다 인터넷은 그 자체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아즈마 히로키)로서 타인의 신상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해 말했듯이 “망각을 모르는”, 그러면서도 “시간적 논리적 관계도 모르는” 공간이다. 인터넷에서도 타인의 신상을 털때 그 전후관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이것은 이미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꿈에 대해 진단을 내린 바이다. 인터넷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의식이 꿈에서 그렇듯이) 타인에 대한 “공격충동”의 무궁무진한 ‘내용상’의 소재를 제공하는 보고이다. 그리고 ‘형식상’으로 인터넷의 관계망은 패러디에 무한한 영감을 부여하는 곳이다. 예컨대 일베의 방약무인한 혐오언어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일베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당사자에게 되돌려주었던 최초의 방식은 과거 2012년에 일어났던 ‘일베대첩’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일베가 여러 커뮤니티에서 조롱글(일명 어그로)을 일삼은 것이 공분을 사서 여러 커뮤니티가 연합해서 일베의 ‘산업화’를 비꼰 ‘농업화’ 글로 일베 게시판을 도배하며 테러를 가한 바 있었다. 그때에는 일반인들에게 일베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다. 타인의 사상을 제멋대로 “응축하고 전치”해서(프로이트) 패러디에서 미러링하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방식은 커뮤니티 간 분쟁에서 자주 쓰였던 방식이고 메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6-2. 일베대첩과 같은 일회성 사건과 달리 메갤이 새로워 보이는 것은 무의식에서 출발한 혐오정서가 일베와 유사하게 ‘애국보수’와 짝을 이루는 ‘여성주의’의 이념으로, 다시 말해서 “현실원칙(프로이트)”으로 스스로를 차츰 무장하기 시작한 데 있다. 그러나 일베와 마찬가지로 이념의 정당성은 그 내용상의 허술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가령 ‘김치녀 프레임’이 여성을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처럼 ‘개념녀’와 ‘김치녀’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일방의 잣대라고 비평하는 인상적인 게시글을 보았지만, 실은 그러한 (보통 여성과 다르고 깨어 있다는) ‘개념녀’ 프레임은 ‘삼국카페’ 등의 여초커뮤니티에서 오히려 만연했던 것이고, 그것이 ‘나꼼수 비키니’ 논란을 낳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메갤 신드롬에 숟가락을 얹었던 일부 페미니스트들 생각과 달리 일베에서의 김치녀 프레임은 (과거 가부장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규범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김치녀에 대응되는 개념녀라는 칭찬 같은 것은 애초에 일베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그녀들에게 열녀문을 하사하면서 개념녀의 모범을 사회규범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일베어서 본질적인 것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사상을 공격하는 데서 얻는 ‘재미’이다. 사실여부와 별개로 재미있고 상대를 성공적으로 패러디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일베의 사상=미학이다. 메갤도 일베의 사상=미학을 미러링 하는데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 보자. 넷상의 ‘여성혐오’는 결코 결코 현실의 규범적인 가부장적인 권력관계 같은 것이 아니다. 재미만 있다면 다른 혐오코드에 의해 얼마든지 역전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처럼 인터넷에는 현실의 젠더와 지역 그리고 계급에 입각한 일방의 권력관계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의 권력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실질적인 임금차별을 당하고, 유리천장을 겪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터넷 상의 논란은 오히려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눈을 돌리고 여흥을 즐기게 하는 좋은 맥거핀일 따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7. 인터넷 커뮤니티 간에 존재하는 이 ‘부정적 호수성’이라는 기제는, 특히 커뮤니티 내 친목질과 결합되면서 어떻게 일상에서 하지 않을 짓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터넷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평등한 공간(일베왈, 너도 나도 똑같은 ㅂㅅ다)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지름길임을 납득하게 할 수 있다. 특히 매겔의 주된 유입경로인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일부의 인식과 달리 여시는 오히려 메갤의 유입경로가 아니라 그 영향에 감화받은 쪽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의 담화와 관계망, 그리고 “페페페” 내에서 있었던 그들끼리의 분란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이제는 어느 정도 시들해진) 메갤 신드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리라 생각한다. 일베를 과거의 정사갤과 촛불시위에 대한 반동 그리고 그 내부의 반목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성주의자들의 교훈대로 페미들이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가정하지 않듯이(오오 여성주의는 복수의 n개의 여성주의로 존재한다! 마치 Thousands of Marxism들이 존재하듯이!), 일베, 남성 섹슈얼러티, 여성혐오가 결코 동질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간주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신에 대해 요구하는 예민함을 타인에 대해 발휘하는 데는 인색한 것으로 보인다.
8.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처럼 누군가가 분노와 혐오에 취약한 사회일수록, 그 탈출구를 박탈당한 채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발산할 기회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 방식의 새로움을 찾고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차라리 해당 커뮤니티에서 일상적으로 댓글을 달면서 노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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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차분하고 이성적인 반론글에 감사드립니다. 요새는 메갈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면 죄다 씹치남이 되어버리더라고요(웃음). 각설하고. 데이터 부분에 대한 지적은 확실히 뼈아픕니다. 저도 각종 커뮤니티 폐인질을 하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습득한 것을 기반으로 대충 졸글을 썼습니다.
제가 필력이 모잘라서, 본문을 좀 더 부연하자면 제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메갈이 옳다, 틀리다’도 아니고, ‘혹은 일베와 동급이다’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물론 결국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또 역으로 ‘그래서 동급이어서 뭐 어떻다는 건가, 둘 다 따지자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는 심정도 있습니다. 근데 그건 지금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제가 저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미러링’이란 그다지 참신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화법을 비꼬고 패러디하고 사안마다 진영을 나눠서 병림픽을 벌이고 다수의 관객들이 팝콘을 먹으면서 그것을 즐기는, 그런 통상의 커뮤니티 문화가 미러링의 기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느 순간 폭주하기도 하고요. 메갈은 그러한 커뮤니티 문화의 일반적인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일종의 사회신드롬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그것이 신드롬화된 데에는 커뮤니티 외부의 요소(이 사회의 불평등한 성문화 등등)를 간과할 수 없고, 그 부분을 제가 축소해서 다룬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메갈도 기본적으로 커뮤니티 문화의 동학에 입각해서 바라봐야 쓸데 없는 환상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베에 참신함이 있다면 커뮤니티의 일반적 병림픽 문화와 조롱 등에 정치적 대의를 가미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일베의 사상>에서 주장했듯이) 일종의 ‘인터넷 미학’일뿐, 사실 거기에는 어떠한 진지한 주의 주장 내용도 없습니다. 애국보수라고 해도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도 없고 정작 일베충들도 그것을 진지하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메갈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메갈이 내세우는 여성주의는 일종의 ‘미학’일뿐입니다. 결국 자신의 (물론 지금까지는 공공연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공격적인 성적 판타지와 평소의 증오의 대상에 대한 발화를 쏟아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묘한 공동체감, 일체감이 있지요. 메갈=일베 이런 등식을 내세우기보다는 저는 오히려 일베가 형성한 일종의 인터넷 문화지형이라고 해야 할까요. 메갈=일베 라기보다는 메갈은 그런 지형 속에서 나타난 포스트-일베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메이즈둠님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관해서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겨냥하는 대상은 님께서 말씀하시는 “일베라는 방패 뒤에 숨어 여성 혐오를 소비하는” 그런 형편없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메갈의 남혐 미러링”이 님께서 말씀하신 도촬과 강간 데이트 폭력과 강간 염산뿌리기 증오발언 등을 없애냐, 이 사회를 보다 성평등한 곳으로 만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 메갈의 공식입장처럼 일종의 충격요법으로써 유효하다.
(2) 메갈은 오히려 혐오를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제가 잠정적으로 택한 답변은 세번째 (3) 애초에 메갈을 그런 여성주의적 고민을 하는 주체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메갈에 여성주의나 운동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우병 시위를 겪은 이후의 젊은이들은 이미 냉소적 주체들입니다. 메갈의 기본적인 입장은 ‘왜 지금까지 여혐에는 침묵하면서 이제 와서 선생질’이냐는 냉소주의입니다. 그런데 그게 일베를 포함한 젊은세대의 화법인 것 같습니다. 절대 바뀌지 않아요. 따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애초에 운동일 필요도 없고 그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철이 지난 이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메갈이 ‘잘못되었다’, ‘또 다른 일베이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메갈은 그저 새로운 파자마 파티식 여성 커뮤니티 문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할뿐입니다. 거기에 이념을 부여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저 한국에 결핍된 또래 공동체 문화를 대체하는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국 어떤 결핍의 증상에 불과한 것에,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커뮤니티부심을 형성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과정이 일베를 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커뮤니티부심은 정신건강에 해롭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문제의 증상을 치료책이나 해법으로 오인하기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님께서 지적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고 저도 조금 더 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지적하신 메갈 페이스북 페이지는 제가 봐도 메갈 저장소와 결이 다르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그 둘이 (정신분석에 거칠게 비유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조야하게 말하면, 의식은 자신의 무의식을 때로는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듯이 말입니다.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흑인민권운동을 떠올렸다. 그 가운데 제임스 메러디스가 떠올랐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더라도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연방병력까지 투입한 케네디 정부, 미국은 이런 사건들을 통해 국가의 변혁을 이루어냈다. 차별받는 흑인들을 바라본 ‘착한 백인’들이 그저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메러디스가 어떻게 투쟁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언급이야기를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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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의 미시시피 대학및 미 남부의 여러 교육시설들은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차별정책을 철폐해야만 했다. 1962년, 기나긴 법정 투쟁 끝에 연방법원은 미시시피 대학교가 퇴역 공군인 James Meredith, 제임스 메러디스의 입학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실제로는 인종차별적이었던 보수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시민위원회의 주도로 판결 집행에 대한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케네디의 당선을 위해 애썼던 로스 바넷 주지사는 초기 케네디의 편에 섰으나 자신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남부의 차별금지정책에 반발해 1954년 미시시피 인디애놀라에서 처음 발족된 인종차별적인 시민단체, ‘시민위원회’의 손을 들고, 차별정책폐지를 거부했다. 이후 로스 바넷 주지사는 9월 13일 TV에 출연을 필두로 공공연히 법원이 명령한 차별 폐지를 거부하고, 이에 들고 일어날 것을 선동했다. “인종차별을 철폐하느니 주립대학의 문을 죄다 닫아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로스 바넷 주지사와 존 케네디 대통령, 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오랜 시간동안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연방정부가 개입해 강제로 법원 판결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집행관의 호위를 받으며 메러디스가 옥스퍼드에 등교하려 하자, 라디오에서 연신 KKK, 백인우월주의 발언을 떠들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물리적 반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어버이 연합외 몇 개 극우단체의 스멜이 난다) 메러디스가 입학 등록을 하기 하루 전, 9월 29일, 연방 법원 집행관이 대학 교정에 진입해 본관을 포위했다. 2,500명 정도의 인종차별주의적 시민단체들은 결국 폭동으로 사태를 몰고 갔는데, 연방정부 집행관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지만, 시위대들은 곧 바로 총을 쏘며 연방정부 집행관들을 공격했다.
결국 같은 날, 로스 바넷 주지사가 메러디스의 입학을 막으면서, 주정부군을 철수 시키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시위대를 선동하자, 존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의 결단 아래, 연방 정부가 개입, 연방군이 투입되어 강제로 법원 판결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투입된 연방군만 2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었고, 1만 1,000명의 주 방위군이 옥스퍼드로 재투입되었다. 시위대 중 30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가 진압된 뒤에도 메러디스는 학업을 결심해, 등교하는 내내 살해 협박을 당하면서도 연방 법원 집행관과 군인, 총인원 300명의 보호를 받으며 결국 정치학 학사를 따냈다.
이후 2년 동안, 아프리칸 미국인 학생들이 차례로 대학에 입학하여, 1963년 6월, 클리브 맥도웰은 법률 학교에 등록하고, 그는 메러디스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메러디스가 수업을 마친 7월 이후, 연방 보안관은 학교를 떠났다. 클리브 맥도웰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호신용 무기 소지 권한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했다. 어쨌거나 맥도웰 또한, 법학 학사를 따고, 미시시피주에서 민권 변호사와 국선 변호사가되었다. 결국 맥도웰은 19세 백인 청년의 총에 맞고 1997년에 죽고 만다.
1963년의 맥도웰 입학 당시와 달리, 1964년 클리블랜드 도널드 주니어는 연방 정부의 보호 명령과 함께 대학에 입학하여, 1966년 역사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1978년, 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이후 흑인 역사, 문화사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가 되었다.
메러디스는 정치과학에 초점을 두고 학업에 열중해, 장학금을 받고 나이지리아의 대학 수업에 참여하다 1965년 돌아와 콜럼비아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다. 1966년부터 메러디스가 시작한 민권투쟁행진은 15000회가 넘는 민권투쟁행진으로 이어졌고, 미시시피 주 역사사 최고의 민권행진이 되었다. 이는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러디스는 1967년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민권운동을 하는 정치인의 삶을 살게 된다. 표를 의식한 공화당이 메러디스를 민주당에 뺏기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2002년, 미시시피 대학은 메러디스의 입학 4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열었고, 그의 가슴이 조각되어 캠퍼스 명예의 전당에 설치되었다. 당시 메러디스는 “인권의 개념보다 나에게 모욕적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 인권이 나와 같은 흑인들을 영원한 2등 시민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유인 즉, 메러디스는 스스로를 “전쟁에 참전한다는 마음이었다”라며, “자신의 목표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것인데, 미정부의 군사력에 의해 강제로 보장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2년, 미시시피 대학은 역사적인 입학 50주년을 기념해 예술, 강의, 강연, 세미나 등으로 확대해 행사를 치뤘다. 같은 해, 메러디스는 하버드 교육 대학원’에서 교육에 영향을 준 인물로 선정되었다.
독일의 전설적인 힙합그룹, Freundekreis의 곡, 에스페란토입니다.
여러 언어가 섞여 번역이 꽤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석이 많습니다. 하단을 참고하세요.
Freundeskreis ’99
mit Esperanto international verständlich, yeah, yeah
국제적으로 이해되는 에스페란토, 예- 예-
Wir besetzen Botschaften in totgesagten Wortschätzen
우리는 죽은 어휘라고 선언된 것으로 대사관들을 점거한다
Esperanto hält Einzug in bundesdeutschen Vorstädten
에스페란토는 서독의 교외 지역에 정착했고,
Und Freundeskreis wird zu Amikaro
프로인데크라이스는 아미카로*에 이른다
Der tupac Amaru des Stuttgarter Barrios
슈튜트가르 스페인 구역의 투팍아마루운동*이다
Unser Lingo ist der Ausdruck dieses Schmelztiegels
우리의 언어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기 위한 시련의 표현이다
Wir bringen euch Hip-Hop Sound in dem sich die Welt spiegelt
우리는 세계를 반영한 힙합 사운드를 당신에게 가져다준다
Weil wir den Blick bewahrten und wir selbst blieben
왜냐면 우리 통찰력을 보존하고, 또한 우리 스스로 머물기 때문이다
Das ist für die heads die raps aus 0711 lieben
이것은 0711*(슈튜트가르트)로부터 온 랩을 위해서다
Miliano mondano mit der mischpoke
가족과 함께 밀라노의 세속화된 사회
Don philippo und frico dem discjockey
DJ 돈 필리포와 프리코
Die philosophie streetpoetrie
철학적인 길거리의 시들
‘ne lingua franca für alle linken und einwanderer
모든 좌파들과 이민자들을 위한 링구아 플랑카*
Wir schreiben ’99 heut’ is rap universell
우리는 ’99년 오늘’ 전세계적인 랩을 적어내려간다
A&r’s sehn aus wie B-Boys die kultur zerschellt am geld
비보이 문화와 같은 아트앤 레파토리들은 돈 위에서 산산조각나는 것처럼 보인다
Die mediale definition von hip-hop is ne farce
힙합의 깊숙한 정의는 광대극이 아니다
Wir tun was wir immer taten nur der kontext is im arsch
우리는 오로지 빌어먹을 문맥 안에서 우리가 늘 해온 것들을 한다
Ich krieg Kopfschmerzen von zuviel Popkonserven
나는 너무 많은 팝콘서빙*으로 두통을 겪고 있다
Doch FK lässt sich nicht in diesen Topf werfen
하지만 우리 프로인데크라이스는 이 냄비 속으로 던져일 수 없다
Es gibt nichts was uns zügeln kann, nichts was uns hält
무엇도 우릴 막을 수 없으면, 어떤 것도 우릴 붙들 수 없다
Wir spreaden’s über stuttgarts Hügel in die Welt, Esperanto
우리는 세계 속의 슈튜트가르트 언덕에 대해서 전파한다
Esperanto, c’est la langue de l’amour
에스페란토, 그 사랑스러운 언어
Tour à tour vient à parler
우리에게 돌아오는 그 말
Esperanto
에스페란토
Et à ce jour l’espoire est né
희망으로 태어난 그 것
Esperanto, standpunkt unsresgleichen
에스페란토, 우리와 같은 관점
Von denen die die und nicht nur sich an der Kultur bereichern
그 혼자서만 부유해지려하지 않는 그 것
Ein Synonym für lasst hundert Blumen blühn
백송이의 꽃들을 피워나게 하는 것과 같은 동의어
Hundert schulen in rapcyphers miteinander wetteifern
랩으로된 암호 속의 백 개의 학교에서 서로 겨루는 일
Esperanto, antwort auf den kulturellen bankrott
에스페란토, 문화적 파산에 대한 응답
Musik ist weltsprache, keine schnelle geldmache
음악은 세계의 언어, 돈을 재빨리 만들지 않는
Esquchar el lenguache raps belcanto
벨칸토* 같은 언어의 랩을 들어봐
Fiedel dem biz wie castro die erste geige zu seinem letzten tango
카스트로같은 비즈니스의 피델의 첫 바이올린에서 그의 마지막 탱고까지
Esperanto, eloquente definition:
에스페란토, 설득력 있는 정의:
Ein schnellerlernter lingo zur verständigung der nation’n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언어
Basiert auf romanisch, deutsch, jiddisch, slawisch,
기본적으로 로만어, 독일어, 이디쉬어*, 슬라비쉬,
Kein sprachimperialismus oder privileg des bildungsadels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언어거나 숭고한 언어의 특권
Esperanto, kein manko wenn ihrs nicht gleich versteht
에스페란토, 당신들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때, 결점 없는 언어
Wichtiger ist dass ihr zwischen den Zeilen lest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문장의 중간을 읽을 수 있다는 것
Euch unser style beseelt fühlt was mein input ist
내 조언 따위를 너희들과 우리들의 스타일에 영감을 주는 것.
Ich sei lyricist internationaler linguist
나는 작사가였고, 국제언어 여러가지에 능통한 사람
Miliano soulguerillo
밀라노, 영혼의 게릴라
Der texterpartisane der letzte mohikaner
텍스트의 파르티잔, 마지막 남은 모히칸족
Am mikro, amigos, estaj representanto
아주 작은 것으로, 친구여, 대표자
Fk amikaro motto esperanto.
우리 프로인데크라이스, 아미카로, 모토는 에스페란토
Esperanto, c’est la langue de l’amour
에스페란토, 그 사랑스러운 언어
Tour à tour vient à parler
우리에게 돌아오는 그 말
Esperanto
에스페란토
Et à ce jour l’espoire est né
희망으로 태어난 그 것
Pour tous les gens de tous pays
모든 국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Pour tous les gens qui sont ici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Esperanto neuf neuf
에스페란토 99
Les temps vient changer avec ce son neuf
이 새로운 것과 변혁을 일으킬 때가 다가왔다
Et si tu aimes ce son là
만약 네가 이 사운드를 사랑한다면,
Amikaro et déborah c’est qu’un debut
아미카로와 데보라*
Tu peut conter la dessu, tu peux conter là-dessus
그것은 시작일뿐, 당신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Nous on croit en esperanto
우리는 에스페란토를 믿고 있다
* 아미카로: 아미카로는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자원 봉사 단체로, “Amikaro” 에스페란토이며, 독일어로 “Freundekreis”, “친구들 모임”을 의미한다. 소외된 지역 사회의 참여 기회 확대와 사회 정의를 증진, 파트너 국가에서 일자리 창출및 교육 훈련, 파트너 국가 뿐만 아니라 사우스 티롤에서 시민참여, 건강증진, 서로의 문화를 학습하는 조직이다.
* 투팍 아마루 운동: 1983년 페루의 노동 운동가 출신인 빅토르 플리이어가 창설하였다. 투팍 아마루(Tupac Amaru)란 1780년 에스파냐 식민 통치에 대항한 무장 폭동을 주도하다 처형된 호세 가브리엘의 가명이다. 청년들을 혁명 전사로 양성하여 정부 요인 암살, 외국 기업인 납치 및 암살 등 전형적인 도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최근 핵심 간부들이 차례로 사살되거나 투옥되고,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부의 소탕 작전이 강화되면서 1995년부터 본거지를 볼리비아로 옮겨 활동하고 있다.
레닌주의를 신봉하고 쿠바의 카스트로 혁명 운동을 추종하는 이들의 목표는 부패한 정부를 전복시켜 노동자·농민이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창설 당시 대원의 숫자가 1,000여 명이 넘었으나 지도자를 비롯한 대원들의 투옥 이후 세력이 위축되자 현재는 페루 중심 지역의 정글 지대로 잠입한 상태이다.
1992년 일본계인 후지모리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 강경한 테러 진압 정책에 대항, 1996년 12월 17일 세계 최대의 외교관 인질 납치 사건으로 기록된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 사건을 벌였다. 게릴라 30여 명이 일본 대사 관 정문을 무혈 진입하는데 성공, 파티장으로 접근하여 한국 이원형 대사를 비롯한 페루 각료 3명 등 40여 명의 주요인사를 인질로 억류하였다. 석방 조건은 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는 MRTA 지도자와 동료 게릴라 5,000명의 석방과 몸값 지불이었다.
1997년 4월 23일 오후 4시 6분 후지모리 대통령은 페루 특공대원 150여 명을 전두지휘하여 인질 구출작전에 성공, 인질 71명을 구출하였고 인질 1명, 게릴라 14명이 사살되면서 이 사건은 발생 126일만에 막을 내렸다.
* 0711: 슈튜트가르트의 슬랭
* 링구아 프랑카: 혼종(混種) 언어(어원적으로는 Frankish Language에서 옴).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터키어가 이탈리아어와 섞인 언어.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무역상들이 쓰던 언어. 여기서 어떤 언어든 다른 나라 말과 혼합된 언어를 일컫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 언어는 어느 한쪽 사람의 모국어이거나 또는 제3의 언어이거나 상관이 없다. 좁은 뜻에서는 어느 한쪽의 모국어도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양쪽 국어가 혼합되고, 문법이 간략한 언어를 말한다. 이 언어를 피진어(pidgin)라고도 하며, 피진잉글리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링구아프랑카라는 명칭은, 십자군시대에 레반트지방에서 사용되던 프로방스어를 중심으로 한 공통어에서 유래한다. 식민지시대 이후 세계 각지에서 많이 생겼다.
* 팝콘서빙: 음악가들이 음악에 전념하지 못하고, 라디오와 티비에 들락거리는 것을 비판하는 슬랭
* FK: 텔레비젼 카메라
* 벨칸토: 매끄럽고 부드러운 창법을 중시하던 19세기 오페라 스타일
* 이디시어: 원래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쓰이던 유대인 언어
* 데보라: (Deborah)는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제 4의 판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