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흘 동안 생각한 일들, 다시 기억하기

||: 지난 열흘 동안 생각한 일들, 다시 기억하기 :||
 
 
x. ☹ ㅡ 메갤: 메갤에 대해 마지막 정리글로 하여금 더이상 코멘트 남길 일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워마드는 물론, 메갤을 더이상, 조금도,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었고, 나아가길 바랐지만, 메갤은 도리어 반여성주의적인 행동들을 보여왔으며, 여성의 권리 쟁취, 젠더 간의 수평적 사회를 바라기보다 여성의 권력화가 가장 주된 동력이었다. 반년 가까이 메갤을 보면서, 그들의 시작을 응원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비판적 지지를 보냈지만, 이제는 더이상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 더욱이 젠더학을 연구하는 선생님들이나 메갤을 매개로 ‘자칭’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분들이 메갤에 대해 단 한마디의 비판도 하지 못하는 것에 크게 실망했고, ‘기계적 중립’,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유사과학 수준의 엉터리 수사학에 더이상 함께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여기에 아무런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며, 본인들의 권력화를 바라는. 심지어 그 마이너 사회, 가운데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권력투쟁, 혹은 인정투쟁, 이들에게 과연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기나 한가 싶다.
 
 
x. ㅡ 함께 하는 것: 사유와 향유. 무엇인가를 할 때, 이 둘 중 한가지라도 빠졌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둘 중 한가지에 심취하다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맹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x. ㅡ 방법론: 직설화법은 대개 정치와 교육에서, 간접화법은 문화와 예술에서 온당하게 사용 되어야 한다. 만약 정치인이, 교육자가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기보다 감상적인 수사를 다량 사용하는 화법을 구사한다면, 우리는 그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다른 경우로 아재의 풍유법, 알레고리. 그것들이 우리에게 핵노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재들이 간접화법을 가장한 직설화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같은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하고 싶은 미생의 오상식 과장과 그를 자처하는 현실세계의 과장님. 반대의 경우로 이해가 가능한 것은 안티파들의 히틀러 풍자를 예로 들 수 있는데, 히틀러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 같은 직설화법을 가장하면서 파시스트들을 비꼬는 간접화법이 바로 그 예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아재들의 말들이 조금도 풍자적 비판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 아재들이 실제로 여성을 차별하거나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구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러한 행동에 긍정하지 않기 때문. 미러링 또한 일시적일 때에는 간접적으로 풍자적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일상화 될 때에는 더이상 간접적 풍자가 아니라 일상화된 폭력이 되어 버린다.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위안부나 되어버리라는 그런 믿기지 않는 농담들처럼.
 
 
x. ☹ ㅡ 바로 1년 전, 오늘과 같을 날을 맞이하기: 오한, 고열, 두통, 근육경련, 마른기침, 편도선염, 연하곤란, 구토, 괜찮은 척 수 편의 영화를 보다 기절하듯 잠에 들고나선 신들린 사람처럼 헛소리하며 잠에서 깨어나기. 이것이 지난 며칠간, 내가 한 모든 일.
 
 
x. ㅡ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이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이들이 스스로를 고통으로 내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이 정말 저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도망치는지 모르는걸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스스로 고통을 우리의 원죄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x. ㅡ Disease is not their weapon,
Our fear and our interests are their weapons: 우리가 해야할 일들은 서로를 억압하는 곳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정체성을 익히고, 그들과 함께 억업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축제에 도취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야 말로 압제자가 우리들로부터 원하는 것이다.
 
 
x. ㅡ 타인의 도덕을 저울질 하는 사람들: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타인의 도덕을 저울질 하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쳐진다. 타인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양심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의 금기를 부수며, 자유를, 권리를, 다양성을, 예술을, 더 나은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 과연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경험과 위치, 기억, 느낌, 이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늠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정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정합하지도, 부정합하지도 않는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움도 자유로움도 없다.
 
 
x. ㅡ 20대의 그 고민들, “나는 누구인가”: 직접 확인컨데.. 나라를, 대륙을 막론하고 절대 다수의 20대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조차. 이 시기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 앞을 결정한다. 심지어 예술가들까지도. 특히나 20대의 남성들은 세상 모든 것을 아는 80대 노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오랜 흥미를 못 느끼는 것처럼, 이미 아는 지루한 것처럼 여긴다. 마초적인 성향이 짙을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며, 방어적인 성향을 띈다. 서른 살이 넘어서랄까, 이러한 것들이 보이는 관점에서 이들을 볼 때마다 나오는 것은 William B. Yeats의 <A drinking song, 술 노래>(http://dx3.a-revolt.org/2016/01/22/william-b-yeats-a-drinking-song-with-korean-translate/)를 읊조리며 나오는 실소와 같을뿐.
 
 
x. 영화 <The Way We Were>, 1973: 3년 전, 썼던 리뷰를 다시 읽으며..
혼자 술잔을 홀짝이며, 영화를 보는 일은 너무 좋다. 먹먹함에 콧등이 시큰 거릴 때 혼자가 되어야만 마음껏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물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에 의구심을 갖는다.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여기저기에 감상을 남겨두기엔 난 충분히 긍정적 사고의 배신을 맛보았고, 나는 불온한 회의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통속적이긴 해도, 그런 감상은 짧으니까.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어제 친구들과의 밤마실 역시 좋았다. 낯선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낯설게 무엇인가를 대할 수 없다면, 그처럼 비통한게 또 있을까.
 
그런 느낌을 이어 보자면 나는 영화 ‘The Way We Were’, 1973. 응, 그래 이 영화를 보고 꽤나 찔끔거렸다. 물론 Barbra Streisand 때문에라도 다시 볼 이유가 충분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요즘 다시 보고 있는 고전들 중 썩 괜찮은 느낌. 극 중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학생운동을 하는 반전주의자. 아니 한술 더 떠, 프랑코 왕정의 폭거를 비난하고 소비에트를 열렬히 지지하다 못해.. 집 안에 레닌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타겟이기 때문에 좀 물렁한 표현들이 있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인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도 흥행을 위해 애정전선이 한 부분을 자리 하는데, 이 부분이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해군장교이자 반정치적인 남자친구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내는데 힘을 주는 것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안일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매카시즘이 미국을 강타하는 시대 속에서도 늘 힘겨운 투쟁 속에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냥 포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와의 갈등. 이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을 빛내 주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과 사랑 사이에서 결국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우연찮은 재회. 남자친구는 결국 상업 예술 작가로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끝까지 운동 속에 남아 혼자가 되었다. 여러분 끝까지 혁명을 추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도 그런가 봅니다. 우왕ㅋ 이런 식의 끝맺음은 그리 나쁘지 않지.
 
 
x. ㅡ 지난 주 베르그하인, 클룹나핰트: 주문하지 않아도 기억해주는 바텐더. 펑크, 테크노,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또 죽였나를 생각하던 중 새로 만난 사운드 아티스트들. 새 작업, Urban Shamanism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이 친구들은 흥미를 보이며, 당장이라도 샤머니스트가 될 수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1차원적으로 샤머니즘을 대입하여, 우리 스스로 샤머니스트가 것이 아니라 구조적 접근을 해야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후 생각치 못했는데, 오히려 영감을 얻었고, 바로 잡아 고맙다며, 함께 작업하고 싶다 의사를 밝혀왔다.
 
 
x. ㅡ Reason of bike pants: 단벌신사. 언제나 검은 와이셔츠에 딱 붙는 나시, 넝마같은 커다란 크러스티 셔츠, 7부로 잘린 블랙진, 바이크 팬츠, 그리고 등산화. 그 중에서도 바이크 팬츠에 대해서 오해와 묻는 사람이 많아 이야기 해볼까 하면, 으레 사람들은 “저기, 죄송한데.. 왜 스타킹 신으시는거에요?”부터 시작해서 “조깅, 트레킹, 혹은 바이크 라이등을 좋아하시는군요?”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활동량이 많은 내게 바이크 팬츠가 조여주는 그 탄력감은 다리 근육을 조금 더 긴장되게 만들어주기 때문. 오해마세요. 가끔 여자친구들 파티에서 친구들 따라 치마를 입기도, 잘 벗기도 하지만, 스타킹은 아니랍니다.
 
 
x. ☹ ㅡ 빈곤한 삶: 우리의 주머니가 아니라 우리의 사상이, 사고와 철학이 빈곤해졌다는 것이 슬프게 한다. 서투른 것은 늘 괜찮다. 하지만, 목적으로 가기 위한 방편이 목적보다 중요시될 때, 우리는 목적과 더욱 멀어진다. 야구선수의 취미는 야구가 야구가 아니라 낚시이거나 야구와 다른 무언가들이다. 요리사의 취미는 요리가 아니라 역사이거나 또 다른 무언가들이다.
 
 
x. ☹ ㅡ 캐쥬얼 섹스, 다자간 연애: 보통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다자간 연애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해 받는 것에 익숙하지만, 피곤한 것이 사실이기에 잠깐 이야기 해보자면, 다자간 연애를 한다고 해서 모두와 자고 싶거나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자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거나, 캐쥬얼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그러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즘 시쳇말로 케미도 있겠지만, 나는 우연성에 더 큰 부분을 두고 있다. 누구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것을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 좀처럼 마주할 수 없었던 그런 것들을 나누고 싶다.
 
 
x. ㅡ 도발과 압도의 역사: 미명 속에 함몰 되지 않도록.
 
 
x. ☹ ㅡ 내가 화나 보였나요? 하지만 나는 그저 당신을 놓치지 않고 싶었을 뿐이에요.
 
 
x. ㅡ 사람들을 바라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새로운 내일은 바라면서 어떻게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살려하나.’, 그리고 작은 외침을 전해주고 싶다. “여러분 그에게 키스하세요, 그녀에게 키스하세요. 뭔가 어제와 다른 무엇인가라도 하세요.”
 
 
쓰기로 했던 글은 거의 마쳤거나, 아직 정리중입니다.

William B. Yeats – A drinking song with korean translate

A Drinking Song
술 노래

 

 

Wine comes in at the mouth,
술은 입으로 들고,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사랑은 눈으로 드나니;

Before we grow old and die
우리가 늙어 죽기 전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알게 될 진실은 그 것뿐.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나는 술잔을 입에 들고,

I look at you, and sigh.
그대 바라보며 한숨 짓네.

영화 리뷰: The way we were

 

시답잖은 영화 리뷰.

 

혼자 술잔을 홀짝이며, 영화를 보는 일은 너무 좋다. 먹먹함에 콧등이 시큰 거릴 때 혼자가 되어야만 마음껏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물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에 의구심을 갖는다.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여기저기에 감상을 남겨두기엔 난 충분히 긍정적 사고의 배신을 맛보았고, 나는 불온한 회의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통속적이긴 해도, 그런 감상은 짧으니까.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어제 친구들과의 밤마실 역시 좋았다. 낯선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낯설게 무엇인가를 대할 수 없다면, 그처럼 비통한게 또 있을까.

 

그런 느낌을 이어 보자면 나는 영화 ‘The Way We Were’, 1973. 응, 그래 이 영화를 보고 꽤나 찔끔거렸다. 물론 Barbra Streisand 때문에라도 다시 볼 이유가 충분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요즘 다시 보고 있는 고전들 중 썩 괜찮은 느낌. 극 중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학생운동을 하는 반전주의자. 아니 한술 더 떠, 프랑코 왕정의 폭거를 비난하고 소비에트를 열렬히 지지하다 못해.. 집 안에 레닌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타겟이기 때문에 좀 물렁한 표현들이 있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인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도 흥행을 위해 애정전선이 한 부분을 자리 하는데, 이 부분이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해군장교이자 반정치적인 남자친구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내는데 힘을 주는 것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안일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매카시즘이 미국을 강타하는 시대 속에서도 늘 힘겨운 투쟁 속에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냥 포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와의 갈등. 이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을 빛내 주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과 사랑 사이에서 결국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우연찮은 재회. 남자친구는 결국 상업 예술 작가로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끝까지 운동 속에 남아 혼자가 되었다. 여러분 끝까지 혁명을 추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도 그런가 봅니다. 우왕ㅋ 이런 식의 끝맺음은 그리 나쁘지 않지. 어쨋거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재해석하는 duck sauce의 노래 하나: http://www.youtube.com/watch?v=9M55_JuOrZc

 

잡스러운 기억을 뒤로하고, ‘Murmur Of The Heart’, 1971. 이건 시바ㅋ 욕을 안 할 수가 없게 근친상간까지 담고 있으면서도 뭔가 선정적이라던가 더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작품이다. 그리고 ‘Passion Play’, 2011. 고전이 아니지만, 미키 루크를 좋아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그의 노년 연기에 감탄. 이 사람이 청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기 전, 중년 시절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하고 방황하지 않았다면 이런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Jim Jarmusch의 ‘Coffee and Cigarettes’, 2003. 이 영화도 고전은 아니네?ㅋㅋ 아무튼 나는 사실 흑백 필름을 굉장히 싫어했다. 고전적이라기보다 상투적인 느낌이라.. 그래서 사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도 굉장히 싫어했다. 어디 구석에 쳐박아 둔채 보지 않다가.. 다시 본 느낌이란… 뭐 이런 연출이 유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Tom Waits와 Iggy Pop의 겉도는 대화는 그냥 좋았다. 왜냐면 내가 그 둘을 이유없이 좋아하니까.

 

 

ㅡ 2013년 1월 19일
뒤로 재껴놨던 30~ 50년대 영화들도 다시 보는데, 예상 그대로 였지만 다시 봐두면 좋다는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