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의 세금에 대한 생각

 

빌게이츠와 워렌버핏의 세금에 대한 생각

미국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빌 게이츠와 워렌버핏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적게 가진 사람이 더 적게 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무어라 말하고 있나요?

Houseparty and cooking

x. 하우스 파티.
1년에 한번 뿐인 하우스 파티라 요 며칠 하우스가 분주하다. dj와 밴드 섭외 이외에도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할 6개의 화장실과 3개의 부엌을 점검하다 발견된 부실한 것들. 예를 들어 좌변기를 새로 설치하는 중이고, 화재에 대비해 소화기 16개를 배치하고, 이 밖에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부분을 수리하고 있다. 우리 하우스 파티는 베를린의 안티파-아나키스트 플래너에 공지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그렇게 하지 않고도 하룻밤 사이에 500~ 600명이 찾기 때문이다.

 

작년만 해도 연달아 들어오는 주민신고와 만취한 손님들을 통제해야했고, 건물 밖에서 괴성을 지르거나 오줌 싸는 녀석들을 건물 안으로 인도해야했다. 그래서 하우스 친구들 서른명과 하우스와 친한 친구들까지 모두 파트 타임으로 건물 입구부터 시작해 3개의 바, 채식 푸드 코너, 공연장, 디스코파티, 계단은 물론 건물 밖까지 순찰을 돌아야 한다.

 

물론 하우스 파티는 안티파와 아나키즘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호모포비아나 인종차별, 섹시즘 등의 폭력에 반대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물론 발언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경고를 하고 이후에 퇴장조치 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하우스가 모든 종류의 하드드럭에 반대하지만, 이 날은 특히나 하드드럭에 취한 사람들은 받지 않는다. 뜨거운 파티에 취한 사람들을 위한 칠-아웃 룸도 준비되고, 또한 이 파티에서 사랑을 찾은 사람들을 위한 dunkel raum도 마련되는데, ‘어두운 방’ 이라 불리는 이것은 베를린의 독특한 문화랄까 어두운 구석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소.

 

이 하룻밤동안 소비되었던 술만해도 맥주 40짝에 보드카 스무병, 위스키 스무병, 와인 열병, 샴페인 10병. 나는 친구들과 두부스테이크버거를 끼워넣은 채식버거 150개를 만들었었다. 워낙 요리를 좋아하다보니 올해는 무슨 요리를 할까 생각하던 찰나에 아쉽게도 내 다른 스케쥴로 올해는 친구들의 기대를 부흥할 수가 없다.

 

x. 아쉽게도 요리할 수 없는 이유.
몇 주 전부터 나는 하우스 파티에서 할 요리들을 고민 고민하며 메모 해오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작은 미소를 머금은 내 소소한 즐거움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하우스 파티와 같은 날 저녁 두개의 케이터링 오퍼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리퀘스트가 맞지만, 내가 하기 싫음 그만이므로 나는 오퍼라고 생각한다. 끌려다니면서 일하고 싶지 않다)

 

치프 오피서, 휴고 ㅈㅇㅁ 씨의 오퍼: 1시간 동안 스물 다섯명의 독일 사람들 앞에서 초밥을 접는 퍼포먼스.
꽤 오랫동안 직접 회뜨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었더랬다. 식사 보다는 bar munchies 스타일의 것을 하고 싶었는데, 내 바람에 완벽히 부합하지는 않더라도 스타일 자체는 나쁘지 않다. 에이전시에 커미션을 주고 나면, 준비비용까지 합쳐 220유로 정도니 큰 돈도 작은 돈도 아니다. 그래도 내 칼들과 도마, 토치를 제외하고는 그 쪽에서 주방 기구는 제공하겠다고 하니 썩 나쁘진 않지만, 그동안 고대하던 하우스 파티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그보다 걱정이 되는 것은 따로 있다. 쉐프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칼과 불 앞에서면 감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를 하는 나로서는 요리 하는 앞에서 웅성거리며, 와인을 들고 카메라를 들이내밀 것을 생각하니 회를 뜨고, 초밥을 쥐는 1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질 것 같다.
물론 종종 요리하면서 맥주를 마시기도 하지만, 요리하는 날에는 되도록이면 속을 비우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도록해 혀가 무뎌지지 않도록 노력하는데, 요리를 맛보지않고,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쁘다.
사람들이 그러지 않도록 당부해줄 것을 에이젼시를 통해 요청해야겠지만, 사람들이 내 규칙에 강제될 이유도 없고, 무례함과 규칙 파괴를 통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온 것이 이 땅 위의 문명 아닌가. 내가 요리를 통해 배워야할 것이 아직도 많다.

 

ㅁㄹㅇㅋ ㅋㄹㄱ 바클레이 씨의 오퍼:
한식, 에이젼시 말로는 소개된 베를린의 여러 쉐프들 프로필을 보다가 나의 프로필을 보고 꼭 내가 요리했으면 한다고 연락을 했단다. 나에겐 어디 요리학교를 댈 정도의 장황한 경력은 없지만, “항상 커스토머의 취향과 식도락 경험에 맞춰 한국의 맛을 비틀지 않고 요리하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다” 라 올려둔 프로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때문에 같이 사는 친구들 이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요리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독일 밀시라이스랑 스시라이스랑 같은 쌀이니까, 김밥 말때 비싼 스시라이스 사지 말라고! 제발! 그렇게 요리에 돈을 들이고 싶으면, 중식-참기름 말고, 한국 참기름 사라고!” 늘 외친다)
사실 냉장고에 남아있는 막재료로 하는 초간단 요리도 좋아하지만, 되도록 퓨젼요리는 생각하진 않는다. 나 말고도 그거 할 사람 많으니까. 동북아시아 음식, 특히나 한식은 짧은 시간 내에 조리가 불가능한데,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또띠아에 불고기나 김치를 넣어 래핑하는 방법들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찾고 싶다. 다른 양식을 따라서지 않고, 한식을 패스트푸드로 만드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고민은 계속 된다.
다들 알다시피 술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에 맥주 마이스터 친구가 새 맥주를 만들거나 다른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의 맥주를 가져와 서로 맛을 보고, 어떤 것이 아쉬운지, 어떤 것이 마음을 훔치는지 이야기를 종종 즐기기까지.
아무튼, 바클레이 씨의 오퍼. 베를린에서 할 수 있는 한식 150~ 200개의 레시피와 십여가지의 일식, 중식 레시피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날 이전에 잠시 만나 이야기 하길 요청해두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루 저녁 70~ 80만원 선의 근사한 저녁을 선물하고 싶었던 바클레이 씨는 레스토랑에 가는 것이 ‘편리한 사랑방식’ 같았다고 한다. 케이터링할 때나 가이드 일을 할 때, 나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바클레이 씨와 같은 사람들이다. 페이를 떠나 그런 마음인 사람들을 만날 때는 나의 마음도 겨울을 이겨낸 풀잎처럼 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에이전시에서 또 하나의 오퍼가 왔다. 나흘 뒤의 결혼기념일에 둘만을 위해서 저녁식사를 해달라는 것. 페이도 나쁘지 않은데 일단 거절했다. 왜냐면 나는 내일 저녁 민중의 식탁에서 요리 해야 하는데, 일요일은 마켓이 열지 않으므로 마켓에서 재료를 확인하고, 준비하는데 단 하루 밖에 없다. 물론, 월요일에 해도 되겠지만, 이 오퍼는 결혼기념일을 위해서 아닌가. 그 둘을 위해 내가 요리하고 싶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다른 쉐프가 요리하는 것이 내가 준비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더이상 이야기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을 축복하며 깔끔하게 단념하는 것이 좋다.

정어리 – 44

 

열흘 동안 쓰려던 글을 매듭지을 수가 없어 아무 글도 쓰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가슴치던 와중에 지루가 베를린을 방문했다. 덕분에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기운을 되찾았다. 아직도 글을 매듭짓지 못했지만, 마음이 가뿐하다. 나에게 이런 근사한 선물을 안겨준 지루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어느 사회과학 연구에 따르면, 비관론자가 낙천론자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한다. 인생, 그 모든 것이 전부 헛소리다. 나는 이 세계를 비관하고, 이 세계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당신들의 밝음 앞에서 나의 어둠은 비록 비루하고, 남루한 넝마주이일지 모른다한들 나는 나를 바닥에 매친 돌부리를 걷어차고, 또 다시 나를 넘어트릴 다음 돌부리를 찾아해맬 것이다.

한 여름 밤의 꿈, 백일몽 같던 밤이 지나고 눈부신 아침과 함께 들이닥친 이 숙취가 무엇이 두려우랴, 또다시 다가올 숙취들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우리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우리는 더욱 더 우리의 절망과 좌절을 울부짖으면 되는 것이다.

 

“pessimists are always nice.”

 

 

ㅡ 2014년 11월 27일

Concert Review: Catharsis

 

공연 후기라는거 정말 쓸데없는 일이란거 잘 알지만, 어제를 다시 기억하고 싶어서 몇자 적어본다. 월요일 밤, 쾨피에서의 카타르시스 공연. 사실 나는 카타르시스를 전혀 알지 못했고, 두 친구가 꼭 가자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 이유가 있을듯 싶어 가기로 했다. (머저리 같은 위키피디아는 이 밴드가 해체했다고 이야기 한다.)
사실, 첫 밴드가 끝날 쯤 도착한 나는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다. 조용한 월요일 밤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멍청하게도 나는 이들의 공연이 시작하면서 이들의 사운드에 주목을 했었다. 연주도 굉장히 좋기야 했지만, 공연에서 한번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알게된 것은 공연만이 다가 아니였다. 물론, 드러머 Alexei Rodriguez 한국에도 잘 알려진, Walls of Jericho 는 물론 Prong 과 KMFDM 같은 쟁쟁한 밴드들을 했던건 사실이지만, 보컬의 멘트를 들으면서 나는 눈시울이 젖어버렸다. 모두 다 이야기 할 수 없겠지만, 보컬은 모든 시위에서 싸우는 사람들 특히 지금 이 순간 베를린 올라우어슈트라쎄의 학교를 점거하고 싸우는 망명자들을 잊지 말고, 도와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이 싸움은 몇 달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경을 없애야만 한다고.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의 한 월마트에서 한 소년이 부당하게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마이클 브라운과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목이 졸려 숨진 에릭 가너를 잊지 말자고도 이야기 했다. 보컬 브라이언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멘트를 잊지 않았는데, 종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지도 이야기 했으며, 우리는 신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삶이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면도칼로 손목을 자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이 곳에 모여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이야기 했다. 모두 혼자가 아니라고.
공연장에 빗다운이나 쳐 들을 것 같은 미친 하드코어 씨발놈들이 마초 모쉬핏을 만들었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했다. 왜 빗다운이냐고? 빗다운 하는 애새끼들 치고 풍선 근육이나 멍청한 그 브랜드 옷 따위를 과시하는 놈들이 한둘인가? 그래, 이건 모두 각자의 취향이라고 하자. 아무튼 보컬은 공연장의 친구들에게 잠시 마이크를 넘겼고, ‘마초 모쉬핏’ 을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 했다. 애석하게도 그 멍청한 놈들은 자기를 이야기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해서 그 따위 짓을 했고, 결국 보컬이 ‘우리가 서로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고 다시 한번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그 놈들이 계속해서 그 따위 짓을 했는데, 결국 몇몇 친구들이 그들을 핏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밀어넣으며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탁컨데 뉴욕 하드코어, 빗다운 흉내 내고 싶은 애들은 제발 뉴욕 가서 해라. 그런 취향의 애기들은 다 뉴욕에서 놀면 되잖아? 얘네가 진짜 멍청한건 카타르시스 공연을 보면서 카메라를 들었고, 게다가 그 장소가 쾨피였다. 물론 당장 애들이 카메라 든 손을 내리게 만들면서 더 촬영하는 일은 없었지만, 관객이 공연장에서 촬영하는 일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공연이 끝날 때 쯤 보컬이 내 친구에게 마이크를 쥐여줬고, 친구는 공연이 끝나면 우리 다 망명자들이 점거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연대를 하자고 외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했고, 보컬 브라이언도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쳤다. 안타깝게도 나는 거기에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어 바에 남아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베이스 치는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 했다. 오늘 알게된 사실은 카타르시스가 CrimethInc. 의 멤버라는 것과 아침에 깨보니 하우스로 돌아오는 빗길에 넘어져 턱이 찢어져 친구들이 응급조치를 해놨다는 것.

 

ㅡ 2014년 9월 2일

정어리 – 43

“첨예하게 의식한다.
내가 나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파괴는 승리하면서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ㅡ 2010년 1월 27일, 나를 노크하다

 

 

 

정어리 – 42

 

지금 내 키에 반만 하던 때에 나는 영화들을 통해 세계를 배웠다. 나는 거기에 평등 따위가 있을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했었다. 그렇게 나는 삶과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종종 아버지가 내 따귀를 때리던 날들이 그립다. 왜냐면 그 때 두려웠던건 오로지 아버지와 나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두렵다. 이제 나는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 ‘토요명화’ 와 ‘주말의 명화’ 들을 보고 자랐다. 지금 그 때를 기억한다, 나는 영화들을 너무 사랑했고, 이 시그널 음악을 들을 때면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전쟁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ㅡ 2012년 어느 겨울 밤

정어리 – 41

일 안하고, 남이 흘린 빵부스러기나 주워먹으며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며칠 째, 나의 외침은 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울부짖고 있다.

 

ㅡ 2014년 10월 25일

정어리 – 40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말하며 더러워진 영혼을 맥주와 노이즈로 씻어내었다.
내일부터는 차라리 일 안하고, 밥 안 쳐먹고, 남이 흘린 빵부스러기나 주워먹으며 살거여요. 밥은 먹어서 뭐하나요, 먹고서 이따위 일만 하는데.. 영화만 있ㅇ어도 됩니다! 선지맛 페인트 같으ㄴ 꿈을 꿀테다! 치즈맛 플라스틱 내일을 맞이 해야지! 애환으로 점철된 애시드 필름 크럽… 크……….”

 

ㅡ 2014년 10월 20일

 

 

‘노동이란 무엇인가’

정어리 – 39

“tragic drug, marvelous sad. okay, it’s my life.”

 
“비련한 마약, 근사한 슬픔. 그래 좋아, 그게 내 삶이지.”

 

ㅡ 2014년 9월 8일

 

루쉰 –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x. “The greatest pain in life is to wake up after nowhere.” ㅡ 《Dawn Blossoms Plucked at Dusk》, a collection of autobiographical essays by Lu Xun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ㅡ 루쉰,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