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ECHLESS, FUCK! HAVE NO TIME TO SAY WHAT I DOING NOW!
SHIT, EVEN I HAVE NO SPARE TIME TO SICK!
* missing child, missing child!
ㅡ 2016년 2월 24일, 아침 8시 반.
SPEECHLESS, FUCK! HAVE NO TIME TO SAY WHAT I DOING NOW!
SHIT, EVEN I HAVE NO SPARE TIME TO SICK!
* missing child, missing child!
ㅡ 2016년 2월 24일, 아침 8시 반.
일은 일이고, 오늘은 슬픔과 세련되게 만취ㅇㅇ
씨발스러움도 세련되게ㅇㅇ
ㅡ 2014년 2월 26일, 아침 8시..
…어머니, 어머니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어진 대로만 살아야하는 걸까요?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나의 인생을 내가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상당히 호전적인 사람이기 때문인지 빌어먹을 운명따위 따르고 싶지 않아 나는 거스르기로 했습니다, 어려우면 손을 내밀어 주세요. 내 힘껏 손을 내밀게.
ㅡ 2014년 2월 10일, 바람소리가 거친 새벽 4시.
A Drinking Song
술 노래
Wine comes in at the mouth,
술은 입으로 들고,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사랑은 눈으로 드나니;
Before we grow old and die
우리가 늙어 죽기 전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알게 될 진실은 그 것뿐.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나는 술잔을 입에 들고,
I look at you, and sigh.
그대 바라보며 한숨 짓네.
시답잖은 영화 리뷰.
혼자 술잔을 홀짝이며, 영화를 보는 일은 너무 좋다. 먹먹함에 콧등이 시큰 거릴 때 혼자가 되어야만 마음껏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물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에 의구심을 갖는다.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여기저기에 감상을 남겨두기엔 난 충분히 긍정적 사고의 배신을 맛보았고, 나는 불온한 회의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통속적이긴 해도, 그런 감상은 짧으니까.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어제 친구들과의 밤마실 역시 좋았다. 낯선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낯설게 무엇인가를 대할 수 없다면, 그처럼 비통한게 또 있을까.
그런 느낌을 이어 보자면 나는 영화 ‘The Way We Were’, 1973. 응, 그래 이 영화를 보고 꽤나 찔끔거렸다. 물론 Barbra Streisand 때문에라도 다시 볼 이유가 충분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요즘 다시 보고 있는 고전들 중 썩 괜찮은 느낌. 극 중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학생운동을 하는 반전주의자. 아니 한술 더 떠, 프랑코 왕정의 폭거를 비난하고 소비에트를 열렬히 지지하다 못해.. 집 안에 레닌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타겟이기 때문에 좀 물렁한 표현들이 있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인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도 흥행을 위해 애정전선이 한 부분을 자리 하는데, 이 부분이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해군장교이자 반정치적인 남자친구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내는데 힘을 주는 것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안일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매카시즘이 미국을 강타하는 시대 속에서도 늘 힘겨운 투쟁 속에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냥 포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와의 갈등. 이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을 빛내 주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과 사랑 사이에서 결국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우연찮은 재회. 남자친구는 결국 상업 예술 작가로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끝까지 운동 속에 남아 혼자가 되었다. 여러분 끝까지 혁명을 추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도 그런가 봅니다. 우왕ㅋ 이런 식의 끝맺음은 그리 나쁘지 않지. 어쨋거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재해석하는 duck sauce의 노래 하나: http://www.youtube.com/watch?v=9M55_JuOrZc
잡스러운 기억을 뒤로하고, ‘Murmur Of The Heart’, 1971. 이건 시바ㅋ 욕을 안 할 수가 없게 근친상간까지 담고 있으면서도 뭔가 선정적이라던가 더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작품이다. 그리고 ‘Passion Play’, 2011. 고전이 아니지만, 미키 루크를 좋아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그의 노년 연기에 감탄. 이 사람이 청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기 전, 중년 시절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하고 방황하지 않았다면 이런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Jim Jarmusch의 ‘Coffee and Cigarettes’, 2003. 이 영화도 고전은 아니네?ㅋㅋ 아무튼 나는 사실 흑백 필름을 굉장히 싫어했다. 고전적이라기보다 상투적인 느낌이라.. 그래서 사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도 굉장히 싫어했다. 어디 구석에 쳐박아 둔채 보지 않다가.. 다시 본 느낌이란… 뭐 이런 연출이 유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Tom Waits와 Iggy Pop의 겉도는 대화는 그냥 좋았다. 왜냐면 내가 그 둘을 이유없이 좋아하니까.
ㅡ 2013년 1월 19일
뒤로 재껴놨던 30~ 50년대 영화들도 다시 보는데, 예상 그대로 였지만 다시 봐두면 좋다는걸 확인.
+ 워마드 아웃팅 프로젝트 관련: 아웃팅은 증오범죄, 인격살인, 개인정보유포, 명예훼손 등의 범죄이며, 미연방법원은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서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방송통신법, 개인정보유포, 명예훼손으로 민형사상 처벌을 받습니다. 프로젝트 같은 소리 마시고, 워마드의 아웃팅에 참여하는 사람, 그리고 이 아웃팅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 신상을 캐서 공개하면, 그 분들의 범죄에 대해 모두 신고하여 수갑 채워드릴 생각입니다. 벌금으로 끝날거라고 생각마세요. 수갑 차고서 선처를 구하실 때는 이미 늦습니다. 본인이 하고 계신 일이 약자에 대한 범죄라는 것을 인지하시길.
+ 메갤의 입장: 메갤도 이 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메갤과 워마드는 시작을 같이한 동지적 관계고, 약간의 방법론적 차이만 있을뿐, 이 범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범죄를 방관하게 되는 셈이 됩니다. 메갤이 페미니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고민을 하고,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란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워마드에 선 긋는 것 이상으로 워마드의 범죄 행위를 방관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 메갤의 반여성주의적인 아이디어들에 대한 제 비판에 대해 ‘메갤은 운동이 아니다’라거나 ‘메갤 일부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항변하신 분들 지금이라도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세요. 메갤이 정말 페미니즘인지, 왜 비판할 수 없는지. 그 일부가 지금의 범죄를 모의하는 집단, 워마드가 되었고, 그 문제가 메갤에서 떨어져나간 워마드로 끝날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이게 끝일거라고 생각하시면, 제가 드릴 말은 “이제 운동에 첫 발을 들이신 것을 환영합니다.” 밖에 없군요.
오케이큐피트를 보다가, 또 페이스북에서 일어나는 pc, 메갤에 대한 논쟁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서는 내가 6년 전, 베를린에 처음 와서 활동가들, 펑크들과 만났을 때부터 주로 다루던 이야기인데, 그 필요성, 중요성, 당위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스웨덴 등, 국가를 막론하고,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pc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경쟁적으로 다가서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용어는 없지만, 나는 베를린서 이에 대해 처음 논의하던 때부터 일종의 ‘자위’, ‘pc도착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 젊은 친구들을 설명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독일 안티파 시위에서도 보인다. 10대~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이 시위에서 계획된 시위들을 무시하고, “경찰, 이 돼지, 나치, 파시스트놈들 다 죽여버린다”면서 거꾸로 솓는 젊은 피를 주체하지 못한 채, 정의감에 불타 투석전, 화염병을 던진다. 물론, 투석전과 화염병이 전략상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이 어린 친구들은 그걸 놀이문화로 소비한다. 이들을 단순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꾸준히 싸워온 친구들도 아니며, 이제 연대한지 고작 1~ 2년 뿐이 안 되어, 운동의 역사는 물론, 방향도 이해하지 못한채 ‘보수주의자들만 없으면 세상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라고 단순하게 믿는 친구들이다.
시위에서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반자본주의’와 ‘혁명’이라는 단어를 수시로 언급하는 이들의 방에는 제 3세계 국가의 아동들을 착취해 수익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들의 제품들이 때묻지 않은 채있고, 그 중 몇은 나이키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는 것으로 혁명에 가까워졌다고 착각하기 일쑤, 또한 부모님을 마치 ‘보수, 괴물, 꼴통’으로 그려넣기도 일쑤다. ‘나이키 대신 반스(Vans)를’ 소비하는 것을 지적한 Joseph Heath와 Andrew Potter가 <The Rebel Sell: Why the Culture Can’t be Jammed>에서 밝힌 반문화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레토릭으로 소비된다.
이에 독일 안티파는 일찍이 “War starts here” Camp 등을 통해 시위에서 투석전, 화염병을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 스스로부터 바뀌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왔다. 하위문화 등을 통해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저항적인 삶들을 소개해왔다. (한국의 많은 좌파들이 막연히 기성제품-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점에서 부족하다) 그리고, 운동이 하위문화와 만났던 뜨거운 80년대 이후, 90년의 3세대 페미니즘과 함께 대중문화에서도 운동의 두각을 드러냈으며, 더 많은 지지자들과 연대를 하게 되었다.
다시 ‘메갤 이후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분’들, 마치 ‘외로이 세상을 변혁 시키고 있다’며 정의감에 불타 계신 분들의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지금의 메갤이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닌 것은 2008년 여시, 밀덕, 그리고 진중권-진보신당 등등 여러 주체가 급격히 관심 받으며, 확산된 촛불집회에서 전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앞에 거론된 주체보다 더 큰 곳에서 “독재타도, 이명박은 하야하라”를 외친 ‘꼬꼬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은 마치 대한민국이 뒤집혀, 혁명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기억하듯, 2008년의 그 일은 차후에 일베의 시발점이 되었다.
본인들께서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청년활동가’라고 믿는데, 내 눈에는 ‘인권감수성’ 같은 수사에 경도된 감성적이신 분들일 뿐이다. 이 분들의 레토릭은 노인층의 보수성 운운하다 대선 빠이빠이한 정동영이나 며칠 전의 문재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새누리당 때려부수고, 여혐종자들 때리면, 대한민국에 좌파가 집권하고, 여혐이 사라질거라고 믿는 존~~~나 단순한 친구들. 그게 그렇게 간단했으면, 왜 세상이 이모양, 이꼬라지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온라인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프랑스 국기를 걸고, 무지개 프로필을 장식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소개하고, 여혐에 반대한다며, 남성을 조롱하는 농담들, 짤방들을 올리고 낄낄거리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니 조심해라,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여성의 말에 ‘우선적으로’ 귀기울여라라고 말하는 것, 그저 ‘반자본주의’, ‘혁명’이란 단어를 외치는 것만으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너무 나이브한 것은 아닐까?
당신 부모 세대, 68세대만 하더라도 싸이키델릭 음악에, 애시드, 대마를 피우며,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며, 나체로 뒹굴고, 시위에서 경찰들에게 꽃을 건내주었고, 때로는 연행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지, 그런데도 왜 이 세상은 이모양인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안 될까.
오케이큐피트, 그 데이트 웹사이트를 왜 연관짓냐고? 나는 이 데이트 웹사이트를 종종 이용하는 편인데,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이 요즘의 어떤 사람들과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케이큐피트에서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에 거주하며, 사회불평등 이슈에 관심을 두고 있고, ‘베를리너를 희망하는 미국인’이라고 밝히는 것과 ‘메갤 이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사람’들이 놀랄만치 같은 레토릭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Christian Lander가 <Stuff white people like>에서 말한 ‘도덕적이고 진보적인 백인으로 이해되고 싶어 그러한 백인 문화를 소비하는 백인’과 ‘도덕적이고 진보적이며, 보수적인 한국 문화를 비판할 줄 아는 이성적인 한국인’으로 인정받는 것, 그 둘 모두 그 좁은 세계에서만의 도덕성을 확보해 쿨해지고 싶어하는 힙스터이기 때문이다. 이 들의 바람은 힙스터, 그 자체로 현실세계에서 그 이미지로 소비되길 바라는 것이지, 실제 변혁이 아니기 때문.
만약 실제 변혁을 바란다면, 그 소비하는 이미지에 대한 재고가 진작에 있었겠지. 오직 주어진, 한정된 미디어 소비를 통해 “Sex, Drug, and Rock’n Roll”를 외치는 록스타 워너비는 향유자가 아니라, 소비자일뿐이다.
아무튼, 나는 1월, 50 Weapons의 마지막 공연과 Siouxsie & The Banshees를 만나러 갈 것이라네. 그리고 혹여라도 오케이큐피트에서 날 만나면, 가볍게 말을 걸어줘.
지금 워마드의 아웃팅 프로젝트는 인격살해를 모의하는 범죄에 불과하고, 이에 참여는 하지 않지만, 이들의 방관하는 메갤러들 모두, 이 범죄의 공모자나 마찬가지다.
이 일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은 dx3에서 ‘성소수자를 때리며, 분열된, 혹은 붕괴된 매갤이 할 수 있는 일’의 글에 게이를 아웃팅 시키는 일이 정당하다는 논지의 반론이 다긴 댓글 때문이다. 이 사람의 논조는 마치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자신의 테러를 성전으로 포장하는 것과 꼭 닮아있다.
게이를 아웃팅 시키겠다는 이 프로젝트는 2세대 페미니즘 중반, 80년대에 페미니즘이 모든 약자와의 연대를 외치며, 녹색운동, 성소수자, 반전운동과 합류했던 역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째서 메갤과 관련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페미니즘 투쟁사를 거스르려하는지 왜 반여성주의적인 아이디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투쟁에 대한 이해 없이, 아무 맥락 없이 아무때고 pc함에 도착증적으로, 경쟁적으로 다가서는 행동에 가슴을 칠 뿐이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100년 전, 맑시스트-페미니즘 선전물에 도취된 것 같은, 이러한 소영웅주의는 레닌이 꺼냈던 ‘좌익소아병’마저 떠오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대체 이들이 어떠한 자격으로 타인을 심판하겠다는걸까. 대체 무슨 권위로, 권력으로 타인의 인격살해를 도모하시겠는걸까? 그러고도 이들이 여성의 권리를 외칠 수 있다는 말인가? 메갤 이후 너도 나도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사람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면서, 여성의 권력화를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정말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런 이들이 자신들의 가해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필요한대로 페미니즘의 언어를 가져다 쓰지만, 그것은 결코, 결코 페미니즘이 아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나의 우려와 의견에 철저하게 반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격을 살해하고, 인생을 파멸로 몰고가는 심판할 권리가 없다.
아웃팅은 증오범죄로 미국 연방법원(http://goo.gl/PWjYFm)은 물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에서 범죄로 다루어지고 있다. 대체 어느 페미니즘 운동가가 어떤 논리로 아우팅을 운동으로 규정한단 말인가.
한국에서는 법이 다르다고 할텐가? 한국에서도 타인의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유포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http://goo.gl/XRfF61 / http://goo.gl/3kvOkh)에 위배되는 중대한 범죄다. 지금 아웃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조만간 경찰서에서 수갑차고 선처를 구하실 것이다. 개인정보유포는 알권리와 하등 관계가 없는 범죄일뿐이기 때문이다. 2015년에 폭스파이어가 재현된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해야할까. 우리의 갈 길은 얼마나 먼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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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방송통신위원회나 한국인터넷진흥원은 제2항에 따른 신고를 받거나 제1항을 위반한 사실을 알게 되면 다음 각 호의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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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x3는 사상의 자유를 갖지만, 약자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차별에 동의하지 않는다. ‘야내가메퇘지’가 남긴 댓글의 아이피는 내가 갖고 있지만, 그 정보를 전제로 신고한다거나 불법적인 추적을 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로서는 이러한 ‘계획적 범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다.
날더러 ‘구태 페미니즘’이니 말같지도 않은 악담을 하는데, 당신이 ‘구태 페미니즘’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비웃는 그 페미니즘 투쟁의 역사를 통해 많은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여성에게는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2등 시민에 불과했다. 조금도 고민 해보지 않았으니, 지금 고작 반년 간의 메갤 가지고 성취감에 도취되어 무엇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들, 당신들이야 말로 여성권리의 적들이다.
이들이 지금 ‘계획적 범죄’를 모의하고 있다는 심각한 사실을 인지하길 바란다. 범죄를 계획하고, 모의했다면, 그 때부터는 우발적 범죄에 대한 정상참작의 여지는 조금도 주어지지 않고, 오히려 중범죄로서 가중처벌 된다.
베를린 교통공사(BVG)의 커머셜 광고.
한국의 친구들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말타는 장면만 빼놓고, 모두 베를린 지하철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일들이다. 한국 공공기관들의 문화정책이 후지다느니 뭐니 하는데, 베를린을 예로 들 것 같으면, 공공기관보다 굉장한 시민들이 있다.
훌리건들이 하도 극성을 부리니, 베를린 시는 전철내 흡연, 금연, 취식 금지법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퇴근 길에 맥주 하나에 피로를 달래며, 주말에는 왁자지껄 샴페인을, 맥주를, 와인을, 독주 섞인 싸구려 음료를 들고, 처음 보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방긋 웃는다. 평일 아침에도 불구하고 밤새 질펀하게 놀다 약에, 술에 흠뻑 젖은 얼굴로 집으로 향하는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데,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라는 말을 남긴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도 헤도니스트의 성지라 불리우는 베르그하인을 찾던 파티피플, 게이이다. 또한 가끔 난데없는 지하철 노동자의 파업이나 잦은 고장으로 인한 운전중지의 불편에도 역무원들에게 고함치거나 불평하지 않고, 다른 대체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이 있다. 내가 들은 비밀스런 소식에 의하면 1월 초에는 베를린의 젊은이들이 난데 없이 하의를 벗고, 지하철을 탈 계획을 세우고 있기도 하다.
물론 밝은 모습만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하철에는 매일 같은 곡을 부르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있고, 지하철 역사에는 코가 시큰거릴 정도의 대마 냄새와 오줌지린내를 풍기는 노숙자, 지나치게 취해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들, 사지가 멀쩡하고 나라에서 생활보조금을 받는데도 구걸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처없이 떠도는 집시들이 있다. 또 지하철 요금을 내지 않으려고 티켓을 사지 않거나, 복제하다 걸려서 벌금신세, 경찰에게까지 불려가는 처량한 신세들이 있다.
우리 모두가 알지만 좀처럼 말하지 않는 삶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 아니라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겹기까지 하다.
공공 선, 상호부조.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것. 위험에 놓인 사람들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런 가치가 베를린이나 서울에도, 또 다른 도시에도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낙원 꿈꾸기를 끝내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