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쟁이들이나 열심히 읽는 ‘역경’이란 책이 있다.
주역이란 학문을 담고 있는 그 책은
원래, 서당을 다니며 글을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던 필수과목이었다.
동양역사에서 주역은
사방의 특성과, 물질의 요소, 별의 흐름을 가르치던 과학이었고
카오스이론을 내재하고 있는 수학이었으며
‘나는 알파이고 오메가라’ 말하던 서양의 개념을 앞선 철학이었다.
그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이해하느라 머리가 아주 복잡해질 수도 있지만
‘아하!’하고 명쾌하게 배울 수도 있는 특징을 가졌다.
대부분의 글을 알던 선비와 몰래몰래 숨어 글을 배우던 아낙들이
도덕경과 주역을 달달 외우며 기본 과목으로 습득했으니
이런 사람들에게 국가의 개념이나 애국정신을 심기는 어려웠을게다.
이때는 정말 오래 산 사람들이 당연히 지혜로웠다.
이론으로만 알던 것들을 몸으로 겪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보면 어쨌거나,
철학관 아저씨들이 거드름 피우며 담배에 재를 떨굴때
그 재떨이 밑에 슬그머니 끼워져있는 책인게다.
뜬금없이 주역 얘기를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우민화 정책은 알고 있겠지만
70~90년대에 태어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세대가
구체적으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다.
몇 만년간 수많은 한국인이 정자와 난자를 만나게 하면서
유전적인 정보를 교환하며 DNA에 새겼다.
그 몇 만년간 한국의 정서를 배우고 한국의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돌봤고
할머니는 집안의 대소사를 봤고
아버지는 아이들과 쥐불놀이를 했다.
엄마가 콩을 발효시켜 된장 간장을 만들었고,
같이 살던 이모와 삼촌은 또다른 언니 오빠였다.
물론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모두들 보릿고개가 오면 체면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갓 임신한 동서 몰래 누룽지 긁어먹던 형님도 있었을테고
옆집 순이네 닭 잡는 냄새를 맡고 몰래 월담도 했을것이다.
그것이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며 시작된
이승만 시절의 친미정책으로 모두 뒤바뀌었다.
모든 것이 산업화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연신 경제적으로 성공한 아빠의 모습과
수동적이고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엄마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려냈다.
할머니는 엄마를 시집살이 시키는 마귀였고
할아버지는 고리타분한 늙은이로만 나왔다.
희망찬 내일을 가지고 경제권을 쥐기 시작한 젊은 세대가
늙은 이들과 대립구도를 띄기 시작했고
늙다 = 쓸모없다의 개념이 착실히 잡혀갔다.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가족들은 떨어져나가 핵가족을 이루었다.
아빠와 엄마는 돈을 벌러 나갔고
아이들은 집에 방치되거나, 학원에서 덜 방치되었다.
어른들을 만나지 못하며 자란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었고 텔레비전에 열광했다.
보릿고개의 걱정에서 해방되었지만
모두 정서적으로 굶주린 상황이 오게 되었다.
빙고~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속으로 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비 광고에 미인이 나와 말했다.
이 화장품을 바르면 넌 완벽해져.
저 집에서 살면 남편도 매일 꼬박꼬박 들어올거야.
엄마아빠가 놀아주지 못한 아이들은
이 광고를 보며 자라온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돈이면 사랑도 살 수 있다 말했을때
80년대 대학생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다시 원래 할 말로 되돌아가서
당신의 모든 것은 이미 예견되어있다.
괜찮은 여자를 보면 섹스하고 싶어할 것이고
멋진 자동차를 보면 가지고 싶을 것이다.
혼자 있을 때 배가 고파지면 라면을 끓여먹을 테고
친구를 만나면 술을 마실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랑은 본지 아주 오래 되었거나 이미 돌아가셨고
어머니랑 전화하면 미안함만 쌓이고
.. 아버지는 당신에게 전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지하철에 있으면 불안하고 외롭고
집에 있어도 불안하고 외롭고
친구들 속에 있어도 불안하고 외롭다.
이런 불안이 자본주의의 원동력이다.
어딘가 모자란 듯한 이 감정이 소비를 부추긴다.
응? 정말이야? 하는 마음이 있다면
교육방송에서 5부작으로 방송했던 [자본주의]라는 다큐를 보길 바란다.
잃어버린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교과서같은 소린 안할란다.
그것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이미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라구?
내 예상을 뛰어넘어달란 얘기다.
자, 이제 시작할 때 꺼낸 주역 이야기로 마무리해보자.
그 사상에서 보면,
삶을 가지는 것들은 생겨나면서부터 命을 받는데
그 본질은 방향, 시기,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쌍둥이가 아닌 이상 모든 사람들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역경이 그토록 길고 장황한데도 애매하게 보이는 이유가 여기있다.
100명이 읽으면 100명의 이해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옛 사람들이 그 애매한 책을 공부하면서
기본적으로 배운 것은
다른 삶과 입장을 학습하여 인지하고
유아기적인 호불호를 초월해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었다.
어? 아나키즘이랑 비슷한데?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다.
사실 비슷할 것이다.
어차피 외계인도 아니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생각들인데
동서양이 어디있고 시대가 어디있겠는가.
이렇기에 주역을 한번쯤 구다보길 권한다.
모두 궁극적으로는
“나 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자아가 이미 천민자본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에 빠져있다면
그저 5초만에 알기 쉬운 가벼운 사람으로써 명을 다하게 될 것이며
후손들에게도 그저그런 유전자를 물려줄 뿐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꿈을 놓지 말길 바란다.
언젠가 펄쩍 하고 뛰어오를 수 있게.
마지막으로 꽤나 훌륭한 영화 이디오크러시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