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일베의 딸과 메갈리아의 아들들 via 박가분

꽤 긴 글입니다. 본 링크에서 읽을시에는 댓글도 함께 읽길 권합니다. ㅡ via 박가분

<일베의 딸과 메갈리아의 아들들>

0. 일베의 사상 3쇄를 찍은 기념으로 씁니다.

1. 한국에서 시사적인 문제나 문화에 대한 비평은 넘치지만 지나고 나면 사실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바뀌는 구조도 아니다. 예전부터 ‘비평’과 ‘논객’의 무용성에 대해서 인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비평의 목적은 사건의 일회성에서 반복성과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비평의 형식이 시작되었던 문학작품이든, 혹은 시사적인 사건이든 마찬가지이다. 일회성과 우연성 그리고 정보소음은 현대의 대중사회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럴수록 그 배후의 구조와 반복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비평의 역할은 필자 개인의 (과잉된) 자의식과 주관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사건 자체의 참신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정보소음에 소음을 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참신하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사건은 알고 보면 진부한 것들이 많다. 어찌 보면 그 진부함이 새삼스레 참신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단지 시의성이 지나면 아무도 다시 비평의 대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이다.

2.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리로 나온 일베’ 사건이다. 작년 일베회원 일부가 폭식시위를 전개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조롱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 사건을 통해 알지 못하는 기자들로부터 전화공세를 받아야 했고, 언론지면상에서도 ‘드디어 넷우익이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에 커다란 의미가 부여되었다. 물론 SNS도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환기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큰 의미가 없는, 불모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오히려 폭식투쟁에 나선 ‘일베’에서 바뀐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드러내고 무언가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공론장에서 누군가가 내세우는 이념과 당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것을 조롱하는 일베 특유의 행동방식은 여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일본의 재특회나 프랑스의 국민전선처럼) 그들이 내세우는 적극적인 이념이나 강령상의 주장 따위는 없다. 당시 폭식시위가 단지 ‘세월호 사건’이라는 커다란 상징성 때문에 더욱 더 조명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 하나하나의 이력과 자격을 문제삼는 인터넷 여론공세를 보면서, 이곳에서 진지한 주의주장을 공론장에서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유가족들이 교황 정도는 되어야 말할 자격이 생기는가, 하는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황방한으로 정신승리하는 진보좌파들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일베가 행한 퍼포만스는 그러한 일상적인 ‘정치혐오’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제기하는 ‘미학’적인 방식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적었고, 기사화되기에 좋은 멘트도 아니었다.

3. <일베의 사상>에서 누차 반복했듯이, 일베의 멘털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애국보수’라는 슬로건이나 ‘행동하는 일게이’라는 정치적 자기표상을 동원하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유행했던 메갤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그들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고 ‘너의 페미니즘은 잘못되었다, 악용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베라는 커뮤니티 내에서도 애국보수에 대한 내용상의 합의는 의식적인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빌리면 n개의 애국보수, 혹은 복수의 애국보수들이 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사실 은 애국보수 따위는 자신의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일베의 미학은 바로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타인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생활방식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제기를 해 보았자, 알다시피 그들에게서 되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조롱어린 퍼포먼스는 진보진영에서도(혹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많이 하지 않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도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정투쟁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에 안 것이지만, 자신이 무언가에 분노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그러한 인정투쟁의 형식은 메갤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4. 이른바 디씨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잘못된 정보(홍콩에서 젊은 여성 보균자들이 보건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감염을 확산시켰다는)와 관련하여 여성혐오 언행이 일고, 이후 정정보도를 통해 역풍이 불자, ‘씹치남’, ‘실좆’, ‘자들자들’이라든가, ‘삼일한’ 등 종래의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그대로 패러디하는 언행들이 만연했다. 혹자는 이것을 기존의 혐오의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전사하고 ‘미러링’하여 그 혐오의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주는 획기적인 ‘퍼포먼스’로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메갤에서 시작된 여성혐오의 ‘미러링’의 방식은 애초에 일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게이들이 자칭하는 ‘애국보수’나 ‘행게이’는 진보진영의 깨시민 담론에 대한 ‘패러디’에 불과하다. 그 슬로건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일베 내에서도 바보취급을 당한다. 한편 메갤과 메갈리아 페이지에서는 ‘혐오범죄에 상처입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조롱을 되돌려주는 멋진 사람(혹은 여성)이 되겠다’는 인상적인 신앙고백과 선언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획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 ‘깨시민’이었다가 일베로 전향하게 된 계기를 토로한 같은 형식의 고해성사와 신앙고백을 검색만 하면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오히려 그 ‘미러링’의 방식은 일베의 미학이기도 했다. 예컨대 일베 유저들이 ‘애국보수’를 자칭하고 ‘행동하는 일게이들’이라고 자평하는 것은 사실,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진보진영의 자기표상에 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는 것 자체가 일베프레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인터넷 일각의 그 진보적인 위선에 대한 환멸도 환멸이지만, 그 보다는 그러한 위선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오히려 일베 유저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는 중요하는 기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상처를 입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주는 쪽이 되겠다는 결의. 그것을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물론 매겔의 탄생배경은 이해할만하다. 복수의 여신이 그들의 편에 서 있다고 평해도 딱히 반론할 여지는 없다. 게다가 그들의 조롱은 (일부에게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보이면서도 재미있기까지 하다. 확실히 인터넷은 오래전부터 여성혐오의 진앙지였다. 늦게 잡아도 군가산점제 폐지 이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그러나 실은 아무 위협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하필 이 시점에 메갤이 등장했느냐이다. 그 열쇠는 일베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 동안 있었던 여성혐오 일변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베의 새로운 점은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차라리 (자기들끼리의)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유희했던 데 있다. 그들은 여성에 관한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도 자신의 혐오정서를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작 ‘된장녀’, ‘고추장녀’, ‘스타벅스녀’ 등등 몇 개의 단어들이 유명세를 떨쳤던 2005~2012년의 과거와 달리 일베라는 커뮤니티 단독으로만 여성혐오 언어들의 사전을 따로 만들어도 될 지경이다. (메갤은 그 혐오사전을 여성에게도 호환가능한 번역사전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더 이상 오늘날의 젊은 남성들이 가부장제에 대한 호교론을 설파하면서(내가 남자로서 얼마나 인생을 책임있게 열심히 사는지 어필하면서) 여성혐오를 표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내가 “일베를 하는 잉여ㅂㅅ이지만”하는 정서가 주류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가부장제의 일반적인 붕괴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한편 만일 메갤이 어쨌든 이해할만한 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똑같은 논리로 일베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지역에 대한 경멸과 혐오의 언어가 만연했고, 특정인의 블로그 계정등에 몰려가 악플을 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논객문화에서 자주 반복되어왔던 상대의 지적수준에 대한 경멸과 무시는 매우 고질적이었다. 그러한 것을 침묵 속에서 견디다가 이후에 ‘나는 더 이상 그러한 것으로 상처 입지 않는다’며 더 심각한 위악으로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무장한 집단이 출현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 현실에서 젊은 남녀가 처한 권력관계는 그때그때의 장소마다 다르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일상에서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드러나는 권력관계는 현실과 전혀 다르다. 우선 커뮤니티 내의 권력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관리자 혹은 유명닉을 둘러싼 ‘친목질’이다(여초 커뮤니티 한정으로 말하면 여시나 ㅇㄷ의 관리자 친목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친목질 금지나 닉언급 등의 금지가 적용되기 시작하면 좋을대로 떠드는 분위기가 되고 커뮤니티 내 권력관계는 형해화된다. 단지 분란이나 법적인 시비를 피하기 위해 룰을 제정하는 사람이 있을뿐 그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가시적인은 커뮤니티 간의 권력다툼이라고 할만한 것인데,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내가 (가라타니의 말을 빌려) “부정적인 호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쉽게 말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원칙이다. 가령 커뮤니티 간에는 거의 영구적 반목과 항쟁의 상태가 존재한다. 홉스의 ‘자연상태’라고 할만한 것이다. 예전에는 없이 못살 것만 같았던 여시와 오유간의 우호관계가 (다소 신뢰하기 힘든 오유회원을 상대로 한 여시회원의 성폭력 사건 폭로 및 잠수사건 이후) 틀어지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반목의 계기는 여성혐오나 가부장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되로 주고 말로 되받는다는 것이 인터넷의 유일한 도덕적 현실원칙이다.

6-1. 무엇보다 인터넷은 그 자체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아즈마 히로키)로서 타인의 신상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해 말했듯이 “망각을 모르는”, 그러면서도 “시간적 논리적 관계도 모르는” 공간이다. 인터넷에서도 타인의 신상을 털때 그 전후관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이것은 이미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꿈에 대해 진단을 내린 바이다. 인터넷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의식이 꿈에서 그렇듯이) 타인에 대한 “공격충동”의 무궁무진한 ‘내용상’의 소재를 제공하는 보고이다. 그리고 ‘형식상’으로 인터넷의 관계망은 패러디에 무한한 영감을 부여하는 곳이다. 예컨대 일베의 방약무인한 혐오언어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일베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당사자에게 되돌려주었던 최초의 방식은 과거 2012년에 일어났던 ‘일베대첩’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일베가 여러 커뮤니티에서 조롱글(일명 어그로)을 일삼은 것이 공분을 사서 여러 커뮤니티가 연합해서 일베의 ‘산업화’를 비꼰 ‘농업화’ 글로 일베 게시판을 도배하며 테러를 가한 바 있었다. 그때에는 일반인들에게 일베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다. 타인의 사상을 제멋대로 “응축하고 전치”해서(프로이트) 패러디에서 미러링하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방식은 커뮤니티 간 분쟁에서 자주 쓰였던 방식이고 메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6-2. 일베대첩과 같은 일회성 사건과 달리 메갤이 새로워 보이는 것은 무의식에서 출발한 혐오정서가 일베와 유사하게 ‘애국보수’와 짝을 이루는 ‘여성주의’의 이념으로, 다시 말해서 “현실원칙(프로이트)”으로 스스로를 차츰 무장하기 시작한 데 있다. 그러나 일베와 마찬가지로 이념의 정당성은 그 내용상의 허술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가령 ‘김치녀 프레임’이 여성을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처럼 ‘개념녀’와 ‘김치녀’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일방의 잣대라고 비평하는 인상적인 게시글을 보았지만, 실은 그러한 (보통 여성과 다르고 깨어 있다는) ‘개념녀’ 프레임은 ‘삼국카페’ 등의 여초커뮤니티에서 오히려 만연했던 것이고, 그것이 ‘나꼼수 비키니’ 논란을 낳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메갤 신드롬에 숟가락을 얹었던 일부 페미니스트들 생각과 달리 일베에서의 김치녀 프레임은 (과거 가부장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규범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김치녀에 대응되는 개념녀라는 칭찬 같은 것은 애초에 일베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그녀들에게 열녀문을 하사하면서 개념녀의 모범을 사회규범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일베어서 본질적인 것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사상을 공격하는 데서 얻는 ‘재미’이다. 사실여부와 별개로 재미있고 상대를 성공적으로 패러디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일베의 사상=미학이다. 메갤도 일베의 사상=미학을 미러링 하는데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 보자. 넷상의 ‘여성혐오’는 결코 결코 현실의 규범적인 가부장적인 권력관계 같은 것이 아니다. 재미만 있다면 다른 혐오코드에 의해 얼마든지 역전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처럼 인터넷에는 현실의 젠더와 지역 그리고 계급에 입각한 일방의 권력관계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의 권력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실질적인 임금차별을 당하고, 유리천장을 겪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터넷 상의 논란은 오히려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눈을 돌리고 여흥을 즐기게 하는 좋은 맥거핀일 따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7. 인터넷 커뮤니티 간에 존재하는 이 ‘부정적 호수성’이라는 기제는, 특히 커뮤니티 내 친목질과 결합되면서 어떻게 일상에서 하지 않을 짓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터넷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평등한 공간(일베왈, 너도 나도 똑같은 ㅂㅅ다)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지름길임을 납득하게 할 수 있다. 특히 매겔의 주된 유입경로인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일부의 인식과 달리 여시는 오히려 메갤의 유입경로가 아니라 그 영향에 감화받은 쪽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의 담화와 관계망, 그리고 “페페페” 내에서 있었던 그들끼리의 분란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이제는 어느 정도 시들해진) 메갤 신드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리라 생각한다. 일베를 과거의 정사갤과 촛불시위에 대한 반동 그리고 그 내부의 반목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성주의자들의 교훈대로 페미들이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가정하지 않듯이(오오 여성주의는 복수의 n개의 여성주의로 존재한다! 마치 Thousands of Marxism들이 존재하듯이!), 일베, 남성 섹슈얼러티, 여성혐오가 결코 동질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간주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신에 대해 요구하는 예민함을 타인에 대해 발휘하는 데는 인색한 것으로 보인다.

8.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처럼 누군가가 분노와 혐오에 취약한 사회일수록, 그 탈출구를 박탈당한 채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발산할 기회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 방식의 새로움을 찾고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차라리 해당 커뮤니티에서 일상적으로 댓글을 달면서 노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하겠다.

우선 차분하고 이성적인 반론글에 감사드립니다. 요새는 메갈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면 죄다 씹치남이 되어버리더라고요(웃음). 각설하고. 데이터 부분에 대한 지적은 확실히 뼈아픕니다. 저도 각종 커뮤니티 폐인질을 하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습득한 것을 기반으로 대충 졸글을 썼습니다.

제가 필력이 모잘라서, 본문을 좀 더 부연하자면 제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메갈이 옳다, 틀리다’도 아니고, ‘혹은 일베와 동급이다’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물론 결국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또 역으로 ‘그래서 동급이어서 뭐 어떻다는 건가, 둘 다 따지자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는 심정도 있습니다. 근데 그건 지금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제가 저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미러링’이란 그다지 참신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화법을 비꼬고 패러디하고 사안마다 진영을 나눠서 병림픽을 벌이고 다수의 관객들이 팝콘을 먹으면서 그것을 즐기는, 그런 통상의 커뮤니티 문화가 미러링의 기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느 순간 폭주하기도 하고요. 메갈은 그러한 커뮤니티 문화의 일반적인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일종의 사회신드롬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그것이 신드롬화된 데에는 커뮤니티 외부의 요소(이 사회의 불평등한 성문화 등등)를 간과할 수 없고, 그 부분을 제가 축소해서 다룬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메갈도 기본적으로 커뮤니티 문화의 동학에 입각해서 바라봐야 쓸데 없는 환상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베에 참신함이 있다면 커뮤니티의 일반적 병림픽 문화와 조롱 등에 정치적 대의를 가미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일베의 사상>에서 주장했듯이) 일종의 ‘인터넷 미학’일뿐, 사실 거기에는 어떠한 진지한 주의 주장 내용도 없습니다. 애국보수라고 해도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도 없고 정작 일베충들도 그것을 진지하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메갈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메갈이 내세우는 여성주의는 일종의 ‘미학’일뿐입니다. 결국 자신의 (물론 지금까지는 공공연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공격적인 성적 판타지와 평소의 증오의 대상에 대한 발화를 쏟아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묘한 공동체감, 일체감이 있지요. 메갈=일베 이런 등식을 내세우기보다는 저는 오히려 일베가 형성한 일종의 인터넷 문화지형이라고 해야 할까요. 메갈=일베 라기보다는 메갈은 그런 지형 속에서 나타난 포스트-일베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메이즈둠님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관해서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겨냥하는 대상은 님께서 말씀하시는 “일베라는 방패 뒤에 숨어 여성 혐오를 소비하는” 그런 형편없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메갈의 남혐 미러링”이 님께서 말씀하신 도촬과 강간 데이트 폭력과 강간 염산뿌리기 증오발언 등을 없애냐, 이 사회를 보다 성평등한 곳으로 만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 메갈의 공식입장처럼 일종의 충격요법으로써 유효하다.

(2) 메갈은 오히려 혐오를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제가 잠정적으로 택한 답변은 세번째 (3) 애초에 메갈을 그런 여성주의적 고민을 하는 주체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메갈에 여성주의나 운동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우병 시위를 겪은 이후의 젊은이들은 이미 냉소적 주체들입니다. 메갈의 기본적인 입장은 ‘왜 지금까지 여혐에는 침묵하면서 이제 와서 선생질’이냐는 냉소주의입니다. 그런데 그게 일베를 포함한 젊은세대의 화법인 것 같습니다. 절대 바뀌지 않아요. 따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애초에 운동일 필요도 없고 그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철이 지난 이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메갈이 ‘잘못되었다’, ‘또 다른 일베이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메갈은 그저 새로운 파자마 파티식 여성 커뮤니티 문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할뿐입니다. 거기에 이념을 부여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저 한국에 결핍된 또래 공동체 문화를 대체하는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국 어떤 결핍의 증상에 불과한 것에,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커뮤니티부심을 형성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과정이 일베를 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커뮤니티부심은 정신건강에 해롭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문제의 증상을 치료책이나 해법으로 오인하기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님께서 지적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고 저도 조금 더 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지적하신 메갈 페이스북 페이지는 제가 봐도 메갈 저장소와 결이 다르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그 둘이 (정신분석에 거칠게 비유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조야하게 말하면, 의식은 자신의 무의식을 때로는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듯이 말입니다.

스크랩/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원문 링크;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10409400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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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월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년.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연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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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日기자 ‘일베, 韓사회 일부, 방관 말아야’

(서울=News1) 정윤경 기자 = 일본의 프리랜서 기자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베(일간베스트)’에 대해 “‘일베’는 한국 사회의 일부다”며 현실을 인정하고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재일(在日)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이라는 일본의 반한(反韓) 넷우익 단체에 관한 책 ‘거리로 나온 넷우익’을 펴낸 야스다는 지난 3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서 강연회를 열고 “‘일베’는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한국인들의 본심 중 일부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넷우익’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애국, 반 한국, 반 좌익’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인종차별적 주장까지 펼친다. 재특회는 지난해 배우 김태희를 광고 모델로 기용한 화장품 회사에 위협을 가해 그녀가 나온 광고를 중단시킨 바 있다.
재특회가 생겨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야스다는 2002년 월드컵과 고이즈미 전 총리의 북한 방문을 꼽았다. 일부 일본인은 일본의 단독 개최에 한국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2002년 고이즈미 전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0~80년대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사건을 인정하면서 일본인들은 북한에 반발했다고 설명했다.
야스다는 “월드컵 전까지는 일본의 온라인 게시판에서 한국을 비판하는 글은 별로 없었다”며 “(월드컵 이후)’한국인의 강제 연행은 거짓말이다’, ‘종군 위안부는 없었다’는 등의 글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언론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무시했다”라며 “언론은 이들을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커다란 세력이 됐다. 언론도 무척 후회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야스다는 또 ‘넷우익’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매우 평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재특회 회원들의 대부분은 과격한 언동을 제외하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거리에서 ‘죽여’라고 외치지만 단 둘이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노래방을 좋아하고 동물을 좋아하는 착한 젊은이들이다”라고 했다.
야스다는 ‘무시’가 아닌 ‘관심’을 통해 그들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민의 힘으로 그들을 무너 뜨려야 한다”며 “그런 폭언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 시민 운동이 앞으로 활발해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언론에서도 (그들에 맞서는)목소리를 내야한다”며 “나는 재특회 항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 호세 무히카

* 1935년 출생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냄.
1. 1960년대,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서 활동하며 쿠바 혁명을 지원한 탁월한 지도자로 알려졌으며,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로빈후드 게릴라라는 별명을 얻었음
2. 1970년대, 군사정권과 싸우다 여러차례 투옥되고, 총상을 입었으며 결국 14년간 수감됨. 그러나 옥중에서 정치활동을 계속함.
3. 1985년, 민정 이양후 석방 이후, 민중참여운동 활동.
4. 1994년, 하원의원 선출
5. 1999년, 상원의원 선출
6. 2004년, 광역전선 후보 대통령 선출에 기여 – 총선에서도 과반 이상의석 확보
7. 2005년~ 2008년, 농업 분야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목축수산부 장관 취임
8. 2008년, 높은지지도로 대통령후보 선출
9. 2009년, 대통령 당선
10. 2010년, 대통령 취임 – 넥타이 없는 대통령의 행보
11. 우루과이 정부 관보에 의하면 소유 재산이 집, 트랙터, 87년 폭스바겐 한대 뿐. 매달 월급의 90%를 사회에 기부.
12. 취임하자마자 대통령궁을 개방해서 노숙자들의 쉼터로 써버리고 대통령 별장 매각
13. 무히카 집권이후 우루과이는 꾸준히 5퍼센트의 경제성장을 보임
14. 정치적 노선 – 실용주의자, 채식주의자, 무신론자, 낙태 찬성, 동성결혼 합법화
15. 마리화나 합법화및 개인적 재배 허용. 반면 대기업의 담배산업 강력한 규제. 담배 광고 규제및 모든 담배회사의 담뱃값 디자인을 똑같이 하는 ‘담배단순포장법’ 시행 -> 필립 모리스가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WHO와 함께 국제분쟁재판소에 제소.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MIT 경제학 박사, 클린턴행정부 경제자문회의 의장인 스티글리츠 교수마저 “필립 모리스가 우루과이 국민을 죽일 권리를 달라고 제소했다. 미국과 무역하지 말라” 며, 무히카 대통령을 지지함.
16. 개인생활 – 2005년 결혼 당시, 상원의원 생활을 하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공동거주. 이후 외곽지대에 국화농장을 열어 현재까지도 국화 농장을 하고 있음.
17. 2013년 12월, 세르비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무히카에 대한 다큐 <정치의 마지막 영웅>을 촬영에 들어감.
18. VICE 리포터와 호세 무히카의 인터뷰 당시, 리포터 앞에서 마리화나를 흡연. 피델 카스트로에게 받은 것이라며 리포터에게 시가를 선물함: http://www.youtube.com/watch?v=1BwVxmJPies
19. 우루과이에 태풍이 왔을 때, 동네 사람들 집 고쳐주러 다니다 나무쪼가리에 얼굴 찢어짐
20. 트랙터 운전중 실수로 개를 치어, 개가 다리 하나를 잃음. 너무 미안해서 개와 같이 살기로 함
21. 브라질 월드컵때 우루과이선수단이 패하고 들어오니까 공항에 나가서 카메라 앞에서 피파개썌끼들 하고 욕했다고 함.
22. 며칠 전 무히카의 폭스바겐을 100만엔에 파는데 제안 받아 경매에 올려 노숙자를 지원하는 주택 제공 프로그램을 위해 쓰기로 함.
23.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무히카 대통령의 연설 전문: http://www.huffingtonpost.kr/2014/04/15/story_n_5150195.html
24. 현재 거주하는 집: 방 1개, 부엌 1개, 거실 1개. 가정부 고용 안함, 직접 가족과 개의 식사를 준비함. 일흔 여덟임에도 트랙터 몰아 농사지음. 농장, 밭, 트랙터 등은 모두 부인 소유이고, 개인 재산은 200만원대의 87년형 폭스바겐 한대뿐.

 

https://www.youtube.com/watch?v=EzaBW8iSztE

 

제4장 1930년대 중반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출처: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558
제4장 1930년대 중반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운동
민족전선운동과 임시정부의 참가
1. 비밀결사운동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분열을 지양하고 연합을 도모하였지만 세력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아나키스트운동 전반을 검토하고 새로운 노선을 수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은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을 제창하고 혁명을 지도할 조직을 결성하는 등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했다.

1. 일본무정부공산당의 참여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일본의 아나키스트운동은 쇠퇴기에 들어갔다. 이에 일본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는 아나키스트운동 쇠퇴의 원인이 강력한 지도조직의 부재에 있다고 보고, 아나키스트운동을 재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도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33년 12월 초기 무렵 이견민웅二見敏雄·상택상부相澤尙夫·입강범入江汎·식촌체문植村諦聞·사미실寺尾實등은 회합을 가지고, 아

나키스트운동 쇠퇴의 원인이 무조직·무계획의 조직과 활동방침에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결점을 극복하고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운동 전 전선을 지도·통제할 중앙집권적 전국적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비밀결사체로서 평상시에는 아나키즘을 선전·계몽하는 것과 함께 노동자·농민 등의 경제투쟁을 조직·지도하여 그것을 정치투쟁으로까지 끌어올리도록 노력하고, 사회혁명 시기에는 노동자·농민·무산시민 등을 일거에 무장봉기시켜 현 사회제도를 파괴하고 일시적으로 독재정치를 행함으로써 반혁명세력으로부터 혁명을 방어하며, 민중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도우면서 점차 자신의 권력을 폐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이는 공산주의 이론을 차용하여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당면의 방침을 전선의 정비강화에 두고 먼저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와 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의 합동을 추진하였다.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1934년 1월 30일 일본무정부공산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을 제기하였다.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은 종래의 아나키스트운동에서의 자유연합주의, 무조직·무계획 방침을 버리고, 강제력 있는 중앙집권적 전국적 조직을 갖추어야 하며, 계획적 집중적 활동방침으로써 아나키스트운동의 전 전선을 정비·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사회정세가 절박해져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을 경우에는 노동자·농민·무산시민 등을 선동·지도하여 일거에 무장봉기시켜 현 사회제도를 파괴하고, 또 일시적으로 변혁사회에서의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독재정치를 통해 반혁명세력의 공격을 배제하고,

민중의 이상사회 건설활동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재정치는 장기간 지속되어서는 안되고, 이상사회 건설이 진척되면 적극적으로 자기의 권력을 폐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아나키스트의 이상인 일체의 권력이 없고 사유·착취가 없는, 자유코뮨을 기간으로 하는 자주·자치·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1)간단히 말해서 중앙집권적 조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의 지도 아래 정치투쟁을 전개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민중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할 동안 반혁명세력의 반격을 분쇄하기 위하여 ‘민중독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무정부공산당은 아나키스트 전선통일운동을 전개하여 각 노동조합들을 통합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운동자금 확보와 무기 구입 등을 위한 방도를 모의하였다.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와 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를 통합하고자 노력한 결과, 1934년 4월 정식으로 결합되었고, 이로써 오랫동안 양분되어 있던 일본 아나키스트운동계는 통합되었다. 조직확대 작업 또한 전개하였는데, 이를 통해 1934년 8월 말 관동지방위원회, 1935년 2월 초 관서지방위원회준비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그리고 1934년 9월 8일 제16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권력정치와 자본제 폐지, 완전한 지방자치제 확립, 사유제 폐지, 생산수단과 토지 공유, 임금제도 철폐, 노동자·농민에 의한 생산관리, 교육문화 향유, 인위적 국경 철폐 등의 8개조의 강령과 자본제 폐지 외 10개조의 테제와 함께 약 30개조의 규약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1935년 11월 6일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전농상은행高田農商銀行을 습격하였던 사건으로 인해 당원들은 일제히 검거되어 일본무정부공산당은 붕괴되고 말았다.2)

일본무정부공산당에 참여한 이동순의 활동

일본무정부공산당은 재일본 한국인 사이에도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입당시키는 한편, 재일본 한국인 3단체 즉 조선동흥노동동맹·조선일반노동조합·조선노동자합동조합을 통합시켜 전선통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3단체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일본무정부공산당은 이등열태랑伊藤悅太郞을 책임자로 하는 조선인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통해 3단체 합동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3)이등열태랑은 1935년 9월 28일 『재일 조선 동지 제군에게 고한다』라는 제목의 팜플렛 약 50부를 집필·발행하는 한편, 당원인 이동순과 함께 재일본 한국인 3단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당조직을 확대할 목적으로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대책, 한국에서의 아나키스트운동 재건, 재상해 한국인 아나키스트와의 연락 등에 대해서도 협의하였다.4)대서정웅大西正雄도 이등열태랑과 연락하에 전선통일을 위해서 재일본 한국인 3단체 합동을 기도하고, 조선일반노동조합원 이종문·오우영 등을 설득하고자 노력하였지만,5)결국 실패하

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무정부공산당의 조직확대 작업에 의해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 중 일부가 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조선동흥노동동맹의 한국동韓國東은 1934년 11월 3일 당원 전소무남田所茂男·매본영삼梅本英三등의 권유로 입당하였으며, 동월 하순 이후 일본무정부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 확립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입당시킨 지기의청志岐義晴및 관서지방 오르그 입강범入江汎과 함께 관서지방위원회준비회를 결성하고, 1935년 10월까지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1월 11일 대검거 때 대판에서 체포되어, 12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대판지방검사국에 송치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6)

이동순은 1933년 이후 자유연합신문사, 이등열태랑, 기타 일본 아나키스트와 연락하여 아나키스트운동 전선통일을 위해 재동경 아나키스트계 한국인 단체를 연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35년 10월 15일 이등열태랑의 권유에 의해 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일본무정부공산당 관동지방위원회 식민지부에 소속되었다. 이등열태랑 등과 수차의 회합을 거듭하여 한국인 아나키스트계 3단체 통일,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선전·선동, 한국 내에서의 운동방침 확립, 재상해 동지와의 연락, 아나키즘으로서의 민족운동과 식민지대책 등에 대한 강령, 기타 등을 협의·결정하는 등 당을 확대·강화하는데 전념하였다. 재상해 한국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간부 이달·양자추 등과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들로부터 보내져온 이달과 양자추의 원고 등을 『흑색신문』에 게재하고, 양자추의 요청에 의해 이종봉李鐘鳳

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이처럼 해외 동지와의 연락과 동지 획득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35년 11월 6일 경시청에 검거되었다.7)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한 한국인은 이들 외에 홍성환洪性煥·이수룡李壽龍·진녹근陳綠根외 수명이 있었다.8)

이처럼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자신들이 주체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무정부공산당에 참가하여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을 차용하였던 비밀결사운동은 선전활동·노동운동·반공산주의활동 등과 함께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의 한 조류를 이루었으며, 1940년대 건달회建達會결성으로 이어졌다.

2. 건달회 결성

중일전쟁 발발 이후 객관적 정세의 불리와 당국의 철저한 탄압으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은 계속 쇠퇴하여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대부분 자유노동·잡업 등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곤란하였으며, 단체적 행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는 1935년 무렵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 들어 조선노동자합동조합이 해체한 것을 비롯하여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의 해체가 줄을 이었다. 1938년 1월 31일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을 최후로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9)

이처럼 아나키스트운동을 포함한 재일본 한국인의 사상운동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하여 1939년까지 침체일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재일본 한국인들은 국제정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일본의 패전을 필지의 사실로 여겼다. 그리하여 사상운동은 1940년에 들어서서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검거인원이 말해준다. 1930년대의 검거 인원은 1933년 1,802명, 1934년 884명, 1936년 193명, 1938년 117명, 1939년 50명으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하지만 1940년은 165명으로 1939년의 3배를 능가하였으며, 1941년은 257명으로 급증하였다.10)이 사실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재일본 한국인들의 사상운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재일본 한국인 사상운동이 활성화되는 것과 함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또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문성훈文成勳등은 아나키스트단체들을 해산시킨 기존 활동가들의 운동태도를 임시방편적인 것이라 비판하고 비밀리에 운동 재건을 꾀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까지 발발하자, 국제정세는 갈수록 일본에 불리하게 나아가고 있으며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1940년 3월 무렵부터 아나키스트 조직 재건을 기도하였다.

문성훈·이종문李宗文·정갑진鄭甲振등은 1940년 3월 31일 회합을 개최하여 다음의 사실에 합의하였다. 즉 일본이 패전하면 필연적으로 일본 국내에는 혼란이 생길 것이고, 이때 한국인 특히 사상운동 전력자는 학살 또는 감금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오히려 이것을 호기로 하여

재일본 무정부주의자의 단체 건달호의 취조내용

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 건설을 위해 봉기하고, 이때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면 볼셰비키계에 기선을 제압당하여 그들의 지배에 굴복당하기 쉬울 것이므로 속히 활동을 개시해야 할 것으로 보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을 결집하여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일본이 패전하면 일본에는 혁명적 상황이 전개될 것이고, 그 혁명적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장봉기를 계획·지도할 전위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위조직으로서 결성된 것이 건달회이다. 건달회는 이종문·문성훈·정갑진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1940년 5월 하순 이들은 회목현栃木縣염곡군鹽谷郡율산촌栗山村소재 귀노천수력전기발전鬼怒川水力電氣發電공사장 빈본합숙소濱本合宿所로 이주하여 인부로 취로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누차 협의를 거듭한 결과, 동년 6월 상순에는 대체적으로 다

음의 사항을 결정하고 동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① 이종문·문성훈·정갑진이 중심이 되어 조직계획을 수립하고, 도쿄 동지를 설득하여 일단 본 직장으로 옮겨와 살게 할 것

② 동지 결집은 인부 모집으로 위장할 것

③ 계획의 비밀과 조직 확충을 완수하기 위해 동지들로 하여금 조선주장朝鮮酒場을 설립케 하고, 동 주장에서 회합하고 표면을 위장하는 것과 함께 이익금은 운동자금으로 충당할 것

6월 11일 빈본합숙소 부근의 옥외에서 문성훈·이종문·정갑진 등 중심인물 5명이 비밀회합을 가지고, 일단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회의 명칭은 건은 아나키스트계 조직 재건과 달은 목적달성의 의미로 정하였다. 건달회는 일본무정부공산당의 무장봉기 전술을 채택하였으며, 6월 중순 무렵부터 폭력봉기 계획을 수립하여 습격목표, 폭력봉기의 시기, 습격방법 등을 결정하였다. 건달회의 폭력봉기 계획은 다음과 같다.

① 습격목표:ㄱ. 궁성宮城이중교二重橋를 습격하여 천황제를 타도하고 일본 국내를 완전히 무정부주의 상태에 빠뜨리는 것, ㄴ. 참모본부·육군성·해군성을 습격하여 군대의 최고 지휘기관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 ㄷ. 내무성·경시청을 습격하여 경찰력의 발동을 정지시키는 것, ㄹ. 대장성·일본은행을 습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

② 폭력봉기의 시기:일본 국내의 물자결핍으로 일반 대중이 빵을 구하러 가두에 밀집할 1941년 3·4월 무렵

③ 습격방법:동원할 수 있는 인물을 확보하고, 봉기시 그들을 일정 장소에 집합시키고 목적을 명시하여 강제적으로 폭동에 참가시킬 것

건달회원들은 폭력봉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무기를 입수하고 자금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1940년 12월 24일 검거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문성훈文原成勳·이종문岩本宗文·정갑진佐久間辰雄·이종식李鐘植, 李宗植·김동륜金東輪, 金村東輪·김석영金錫永, 金村錫永·김완金莞, 金瑬昌, 金岩瑬昌등이 공판에 회부되었다.11)

하지만 정철鄭哲에 의하면, 건달회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무죄석방되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전야라는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일망타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건달회사건을 조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12)이로 보아 건달회 결성은 사실일지라도 폭력봉기 계획은 일제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건달회의 폭력봉기 계획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1930년대까지의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들은 공산주의단체와는 달리 공개단체로서 합법적 잡지를 통한 선전활동 등 공개활동에 전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건달회는 일제의 전시체제하 극도의 탄압 속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면서 결성된, 이들 단체들과는 다른 전위조직을 지향한 비밀결사체였다. 그리고 일본무정부공산당에 이어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추구하면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의 한 조류를 형성하였다. 건달회가 경찰에 의해 검거됨으로써 일본에서의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註 1]「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高麗書林, 1991, 21~22쪽).
[註 2]이상의 日本無政府共産黨에 대한 서술은 「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에 근거하였음.
[註 3]「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59쪽).
[註 4]「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122~123쪽).
[註 5]「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135쪽).
[註 6]內務省警保局, 「在留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5年)(『資料集成』 3, 360쪽) ; 『朝鮮人の共産主義運動』(吉浦大藏 報告書), 33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420쪽.
[註 7]『朝鮮人の共産主義運動』(吉浦大藏 報告書), 33~34쪽 ; 內務省警保局, 「海外不逞鮮人と連絡する朝鮮人の檢擧」, 『特高月報』, 1936년 4월, 499쪽(『資料集成』 3, 629~630쪽) ; 內務省警保局, 在留朝鮮人の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5年)(『資料集成』 3, 362~363쪽).
[註 8]내무성경보국, 「在留朝鮮人の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5年)(『資料集成』 3, 360~361쪽).
[註 9]내무성경보국,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8年)(『資料集成』 4, 1976, 102~103쪽) ; 內務省警保局, 「在京アナ系朝鮮人團體の解消」, 『特高月報』, 1938년 1월, 108쪽(『資料集成』 4, 153쪽).
[註 10]내무성경보국,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0年)(『資料集成』 4, 399쪽) ; 內務省警保局,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1年)(『資料集成』 4, 612쪽).
[註 11]內務省警保局,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1年)(『資料集成』 4, 652~658쪽) ; 內務省警保局,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0年)(『資料集成』 4, 442쪽) ; 內務省警保局, 『特高月報』, 1940년 12월, 443쪽(『資料集成』 4, 564쪽) ; 內務省警保局, 「朝鮮人運動の狀況」, 『特高月報』, 1943년 11월(『資料集成』 5, 1976, 261~263쪽).
[註 12]鄭哲, 「建達會事件の眞相」(農村靑年社運動史刊行會, 『農村靑年社事件資料集』 3, 黑色戰線社, 1994, 394~395쪽).

알프레드 자리, ‘우부 대왕’ 1896년 작

『알프레드 자리, ‘우부 대왕’ 1896년 작.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갑자기 “똥이나 처먹어라!” 하고 외쳤다. 그 이후 미래파 행위예술가 들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약을 올렸다. 화가난 관객들은 감자나 오렌지를 잡히는 데로 무대를 향해 집어 던졌으며, 일부 다혈질의 관객들은 근처의 상점을 습격하여 꺼내온 물건들을 무대 위의 행위자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때 카를로 카라는 이렇게 외쳤다. “감자 대신 너희들의 사고 방식을 던져라, 멍청이들아!” 그 공연 이후 대부분의 행위자들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하루나 이틀씩 구류를 살았다.』

TAZ – Hans-Christian Ströbele über Flüchtlinge with korean translate

This music isn’t related with this article.

 

Today, my evening appointment was canceled, then I just sat on 3rd kitchen and listened house music with house friends, and I translated a TAZ article by a leeeeeeeeeeeeeeeeegendary politician (maybe?) of german green-party as well-known as Hans-Christian Ströbele talk about Refugees in Germany. This is how I learn german myself.

오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고, 하우스 거실에 앉아 하우스 음악을 들으며,
녹색당의 전설적인 정치인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가 망명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번역했다.

 

 

 

//// 아래는 번역문, 원 기사는 여기(Hans-Christian Ströbele über Flüchtlinge ㅡ http://taz.de/Hans-Christian-Stroebele-ueber-Fluechtlinge/!146630/)를 클릭! ////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가 망명자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명자들의 온당한 거처를 위해 150만 유로가 승인 되어야만 합니다. 녹색당 정치인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의 주장입니다.

 

 

타쯔: 스트뢰벨레씨, 독일은 망명자들의 늘어가는 숫자를 과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 아니오. 당연히 많은 망명자들이 있고, 공동체를 위해서는 그게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것은 아닙니다. 90년대 초반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40만 명을 상회하는 망명자들이 있었어요. 시리아와 이라크에 끔찍한 전쟁을 안겨주었던 우리는 그보다 더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얼마나 더 많은 망명자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건 아마도 지금 숫자와 상한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지중해에서 수 백명이 익사하고 있다면, 유럽과 특히나 독일에 상대적인 번영을 받은 우리는 단지 그것을 추모하는 시간만을 갖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최소한만이라도 유럽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인도적인 대우 속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세르비아,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와 같은 국가들이 안전해질 수 있도록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가고 있긴 하죠.

맞습니다. 그게 바로 반루마니아인 법의 핵심입니다. 브란덴부르그 개선문 가까이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는 Sinti와 로마에서 살해 당한 사람들에 대한 승전 기념식을 했다는 것이 끔찍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선문 가까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로마와 Sinti는 매우 나쁘게 다루어졌죠.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좀 더 인도적인 망명자 정책을 맞을 수 있을까요?

EU 국가들은 그들의 경제적 힘에 따라 그 열쇠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추가로 그리스나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망명자들은 어디서든 그리고 어떻게든 망명을 하거나 거주할 수 있도록 적용되어야 합니다. 더 많은 정보들과 그들이 불행하게도 돌려보내지게 되어 망명자들이 어떻게든 알프스를 넘어로 숨어버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독일 연방 정부는 더 많은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도록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하며, 지역 주민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대우해야 합니다.

 

인터뷰: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

그는 201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크로이쯔베르그 지역의
’90년 동맹/녹색당’을 위해 세 번째 ‘직접 위임직’을 지냈으며,
법률사무위원회와 국회통제정보위원회의 회원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나쁘지 않도록하며, 시민사회에 가능성을 열어주고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죠.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로 더 적은 사람들이 오도록 노력하는 것과 실용적인 것에만 노력하는 것들 때문에 말씀하신 일들은 줄어들게 될 겁니다.

이거 왠지 막연한 불안감이 드는군요. 사람들을 불명예스럽게 셋방에서 간신히 잠만 자도록 몰아 붙이는거네요. 그리고 독일의 비 따위가 그 위에 내리면 이 사람들은 그냥 더러워지고, 그 지역 안에서만 그들의 비용을 지불하는거구요.

 

바덴-뷰어템베르그 장관 크렛쉬만의 협상안에 의해 이렇게 해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다 적은 사람들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에 있어요, 우리는 그것보다 좀 더 효과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클렛쉬만 역시 녹색당 정치인이지만, 망명자 문제에 있어 보수적이며 같은 당 정치인 스트뢰벨레와 대립하고 있다)

그건 이미 충분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온당한 거처와 치유를 달성하기 위한 돌파구가 아니라구요.

 

녹색당은 클렛쉬만의 투표를 막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주장관에게는 그럴수가 없겠죠.

 

다른 많은 좌파 정당들 역시 망명자들의 기금 역시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 직면 했습니다.

나는 여기 베를린-크로이쯔베르그 지역의 망명자들을 위해 시위했고,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하고 양보했습니다. 거기엔 많은 원-거주민들의 연대가 있었어요. 문제는 ㅡ 클렛쉬만과 같이 망명자 문제에 보수적인 ㅡ 사람들이 서로 간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왜냐면 거기에 너무 적은 돈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컨데 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크로이쯔베르그 지역은 곧 망명자들이나 청년들 혹은 교육을 위해 쓸 예산을 결정해야 하는 ㅡ 녹색당 내부 ㅡ 선거에 직면했습니다. 물론 베를린 사람들에게 맡겨질 일이죠. 시민사회는 망명자들과 청년들, 교육을 위해 쓸 돈이 더 필요합니다. 그 후엔 더 많은 분노들이 이 지역민들에게 돌려질거에요.

 

하지만, 만약 좌파-자유주의자들이 망명자들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한다면, 이 정책에서 압력이 어디로 가해질까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청년 프로젝트들은 망명자들의 인도적인 대우에 반대하고 있는 꼴이라구요! 그건 거대한 액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독일은 무엇인가를 위해 더 많은 돈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망명자들의 거주를 위해 150만 유로를 승인해야만 하기 때문 입니다. 거기엔 어떤 재정상의 문제도 없어요.

 

그래서 그게 단지 정치적 의지에 관한거란겁니까?

맞습니다.

 

혹시 독일에 남 돕길 그만두자는 유행 같은게 있나요?

아니오. 90년대와 비교하면 망명자들의 권리에 대한 녹색당의 의지에 반하는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망명자들이 처한 공경을 더 이해가 더 있습니다. 거의 다다랐어요. 만약 어떤 저녁에 이라크와 시리아의 수전, 수백 망명자들의 끔찍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게 베를린이라면, 그 다음엔 400명은 당연히 충당할 수 있을거고, 그 다음엔 누구든지 호의를 베풀거에요.

 

그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이네요.

물론, 사람들은 화를 낼겁니다. 만약 거기에 경찰과 도로봉쇄 같은 문제들이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 문제들 모두 스스로 만든 것뿐이에요. 내가 말했듯이, 당신은 조금의 돈으로 그 문제를 피할 수 있어요.

 

어떤걸 예측하고 계시죠?

저 너머에는 아직도 많은 망명자들이 독일로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부정적 의견입니다. 오로지 시리아를 위해서 다른 예외를 만들 수 있어요.

만약 우리가 이라크나 시리아, 리비아의 전쟁에 문제제기를 한다면, 그 다음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없겠죠: 그래, 서구는 전쟁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도왔어 – 하지만 당신은 지금 집에 돌아가려 하지. 당신은 그래선 안돼.

 

정부는 그 나라들이 정말로 안전하면 돕지 말아야 합니까? 독일은 발칸반도 국가들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코소보에서는 많은 루마니아 사람들이 독일과 나토가 배치된 곳으로 피신하고 있으며, 다인종 사회에 필요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사람들의 상황은 재앙이에요. 그들의 집들은 불 타버렸고, 여기저기로 팔려가며 모욕 당하고 있습니다. 헝가리나 루마니아와 같은 나라들 역시 EU 회원국이에요. 여기서 독일은 차별금지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요.

유리 로뜨만의 중 ‘폭발의 국면’에 대하여

x. 우리가 지금 타임머신을 사용해 2008년 리먼 브라더스로 촉발된 금융위기 이전인, 2000년대 초반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더라도 사람들은 금융위기를 만든 주된 원인과 같은 길을 택하고, 같은 금융위기 겪게 될 것이다. 유리 로뜨만의 ‘문화와 폭발’ 중 그에 딱 일치되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을 강조해본다.

 

 

“폭발의 국면은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표지한다. 자기자신의 메커니즘이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과정들의 경우에 이는 결절의 국면이 된다. 의식은 마치 폭발 이전 단계들로 역으로 되돌려지듯이, 지나온 모든 과정을 회고적으로 의미화한다. 행위 참여자의 의식을 거쳐 생성된 모델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찰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 곧 ‘역사적으로 예비된 중심적인 것’으로 선언된다. 당연히 일어나지 않은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며, 모든 우연적인 것에 합법칙적이고 필연적인 성격이 부여된다.”

 

“폭발의 국면에서 임박한 최후의 심판이나 세계 혁명 따위의 종말론적 사유들, 혹은 그와 유사한 역사적 사실들(그것이 파리에서 발생했는지 페테부르크에서 발생했는지는 관계없다)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사유들이 마침내 지상천국을 불러올 ‘결정적인 최종 투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주목받는 이유는, 민중의 힘에 전대미문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외견상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평면에 역동성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국면들을 스스로에게 익숙한 범주를 통해, 즉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가는 단지 그것들을 명확히 가리키고,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충분하다.”

 

 

____
유리 로뜨만의 ‘문화와 폭발’ 에서 앞서 이야기 한 부분을 보다 넓게 옮겨본다.
____

체호프의 단편 <일등석 승객> 에 나오는 저명한 기술자(지금껏 살면서 그는 수 많은 다리를 건설했으며, 갖가지 기술을 발명한 바 있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격분한다.

“나는 이제껏 살면서 러시아에 20여 개의 훌륭한 다리를 건설했고, 세 도시에 수도관을 매설했으며, 러시아와 영국, 벨기에에서 일한 바 있소(……) 두 번째로, 나는 내 분야에 관련된 많은 전문 학술서를 남겼소(……) 나는 유기산의 채취 방법을 개발했으며, 따라서 당신들은 모든 외국의 화학 교과서에서 내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거요(……) 이제껏 얘기한 내 업적과 저술로 당신들의 관심을 바라지는 않겠소. 다만 한 가지 말할 것은, 나는 다른 어떤 저명한 자보다 더 많은 걸 행했다는 거요. 그런데 뭡니까? 보시다시피 난 늙었고, 아마도 곧 저세상으로 가게 될 거요. 그런데 난 저쪽 제방에서 자빠져 있는 저 검둥개만큼도 알려져 있지 않단 말이오.”

뒤이어 이 인물은 지방 도시의 재능 없는 여가수인 그의 연인이 명성을 누리며 잡지에 이름이 여러차례 언급되고 있음에 또한 분개한다.

“텅 빈, 변덕스럽고 탐욕스러우며 게다가 멍청한 계집이오.”

주인공은 분통을 터뜨리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이야기한다.

“지금 기억이 났소만, 재건된 다리를 공개하는 성대한 개통식이 있었소 (……) 이제 군중들이 온통 나만 쳐다보겠거니 생각했지. 어디로 몸을 숨기면 좋을까? 그런데 웬걸,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거요.”

주인공은 군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갑자기 군중이 동요하기 시작했소. 수근수근…… 사람들이 미소 짓기 시작하고 어깨는 들썩거렸소(……) 분명히 나를 본거야, 난 생각했소. 어쩌면 좋을까, 그렇지, 거만하게 행동해야지!”

뒤이어 군중의 동요는 그가 그토록 비아냥거렸던 바로 그 여가수의 출현 때문이었음이 밝혀진다.
체호프의 주인공은 군중의 무지와 무교양을 비난하지만 사실 그는 매우 희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 상대가 자신도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지극히 저명한 학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화자는 불공평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체호프가 포착한 현상의 본질은 보다 심오하다. 체호프가 간파한 불공평함은 사회의 피상성과 무교양에만 기인하는 게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심지어 저열한 여가수의 창작조차도 그 본질에서 개인적인 것인 반면에, 훌륭한 기술자의 창작은 기술의 무인칭적 과정 안에서 그저 묻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다리가 무너진다면, (그건 진기한 사건이기 때문에) 아마 기술자의 성이 기억될지도 모른다. 훌륭한 다리의 가치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극히 아름답게 장식된 게 아니라면). 그 기술의 발전은 대체로 예측 가능하며, 이점은 과학 판타지 예술 작품의 성공 사례들이 증명한다. 이런저런 새로운 발견은 그것이 이어지는 발전의 합법칙적 과정에 포함되기 전까지, 아직은 기술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폭발의 국면은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표지한다. 자기자신의 메커니즘이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과정들의 경우에 이는 결절의 국면이 된다. 의식은 마치 폭발 이전 단계들로 역으로 되돌려지듯이, 지나온 모든 과정을 회고적으로 의미화한다. 행위 참여자의 의식을 거쳐 생성된 모델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찰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 곧 ‘역사적으로 예비된 중심적인 것’으로 선언된다. 당연히 일어나지 않은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며, 모든 우연적인 것에 합법칙적이고 필연적인 성격이 부여된다.

(…중략)

폭발의 국면에서 임박한 최후의 심판이나 세계 혁명 따위의 종말론적 사유들, 혹은 그와 유사한 역사적 사실들(그것이 파리에서 발생했는지 페테부르크에서 발생했는지는 관계없다)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사유들이 마침내 지상천국을 불러올 ‘결정적인 최종 투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주목받는 이유는, 민중의 힘에 전대미문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외견상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평면에 역동성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국면들을 스스로에게 익숙한 범주를 통해, 즉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가는 단지 그것들을 명확히 가리키고,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A Cyberspace Indepencence Declaration) with korean translate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문(A Cyberspace Indepencence Declaration)

산업세계의 정권들, 너 살덩이와 쇳덩어리의 지겨운 괴물아.
나는 마음의 새고향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미래의 이름으로
너 과거의 망령에게 명하노니 우리를 건드리지 마라. 너희는 환영받지
못한다. 네게는 우리의 영토를 통치할 권한이 없다.

 

우리는 우리가 뽑은 정부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가 명하는 대로 네게 말하겠노라. 우리가 건설하고
있는 전지구적인 사회공간은 네가 우리에게 덮어씌우려는 독재와는
무관한 것이다. 너는 우리를 지배할 도덕적 권리도 없고 우리가 무서워
할만한 강제적인 방법도 갖고 있지 못하다.

 

정부는 시민의 동의에서 자신의 정당한 권력을 얻는다.
너희는 우리의 동의를 얻지도 않았고 부름받지도 않았다. 우리가 너희를
언제 초정했느냐? 너희는 우리에 대해서도 우리의 세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는 너의 관할권 바깥에
있다. 사이버스페으스를 마치 공공건설 사업쯤으로 생각하여 너희가
그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는 만들 수 없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자연의 움직임이며 우리의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스스로 성장한다.

 

너희는 우리의 위대한 대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우리 시장의
부를 만들지도 않았다. 너희는 너희의 법률이 얻는 것보다 훨씬
질서정연한 우리의 문화와 불문법에 대해 모른다.

 

너희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으니 너희가 개입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우리 구역에 침범하기 위한 구실로
이런 주장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갈등이 있는 곳, 문제가 있는 곳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어 우리의 방법으로 그것을 밝히겠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사회 계약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집행은 너희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조건에 따라 생겨날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너희의 세계와 다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웹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意思疏通)의 물결처럼
계약과 관계 그리고 사유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세계는 모든
곳에 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없으며 우리의 육체가 거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인종 경제력 군사력 태어난 곳에 따른 특권과 편견이 없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비록 혼자일
지라도 침묵과 동조를 강요당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어디에서나 우리의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다. 너희가 생각하는
재산, 표현, 정체성, 운동, 맥락에 의한 법적인 개념들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며 사이버스페이스에는
아무런 물질이 없다.

 

우리의 정체는 너희와 달리 육체가 없기 때문에 물리적 강제력으로
질서를 만들 수 없다. 우리는 윤리와 개명된 자기이해, 그리고
공공복지에서 우리의 정체가 나타나리라 믿는다. 우리의 정체는 너희의
관할권을 벗어나 널리 퍼질 수 있다. 우리의 선거인 문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법률은 황금률이다. 우리는 이 근거에서 우리의 특수한
해결책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너희가 부과하려는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

 

너희는 미국에서 오늘 통신개혁법안을 만들었다.
그것은 너희의 헌법을 모독하는 것이며 제퍼슨, 위싱턴, 밀, 에디슨,
드 토크빌, 브랜다이스의 꿈을 욕보이는 짓이다. 이들의 꿈은 이제
우리 속에서 새로 태어나야 하다.

 

너희 자녀들이 아주 친근한 그 세계에서 너희는 항상 이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네 아이들을 두려워하고 있구나. 너희가 그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에 부모의 책임이라는 미명하래 관료제를 신임하지만
너희는 너무 어리석어 너희 자신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세상에서는 미천한 것에서 천성의 것에 이르기까지 휴머니티(humanity)
의 모든 감정과 표현이 연속적인 전체의 부분이며 비트의 전지구적인
대회이다. 우리는 우리의 날개가 움직이는 공기와 우리를 질식시키는
공기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중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싱가포르, 이탈리와 미국에서 너희는
사이버스페이스의 프론티어에 검문소를 세워 자유의 바이러스를
격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당분간 전염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비트를 지닌 미디어로 뒤덮힐 세상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될 것이다.

 

너희의 진부한 정보산업은 미국이나 다른 곳에서 전세계적으로
연설권을 확보하려는 법률을 제안함으로써 존속될 수 있다.
이들 법률은 아이디어를 쇳덩어리와 똑같이 취급하여 이것이 또하나의
산업생산물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이 복제되고 아무런 비용없이 무한히 배분될 수
있다. 이러한 사고가 전지구적으로 퍼지는 것은 너희의 공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날로 늘어가는 적대적이고 식민지적인 조치들은 자유를 사랑하고
스스로 결단했던 자율적인 우리의 선조처럼 우리에게 먼 곳에서
온 제복의 권위를 거부하도록 만든다. 비록 우리의 육체는 너희의
지배를 받아들이지만 이제 너희의 지배에 견딜 수 있는 우리의
가상 주체를 선언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구 전체로
퍼뜨려 아무도 우리의 생각을 추적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마음의 문명을 건설할 것이다.
그것은 너희 정부가 이전에 만든 것보다 더 인간적이고
공정한 세상이 될 것이다.

 

스위스, 다보스
1996년 2월 8일
John Perry Barlow가

 

 

 

* 필자 주 : ‘존 페리 바를로’는 누구인가
전자프론티어재단(EFF)의 설립자인 존 페리 바를로는 1996년 2월6일 클린턴이 통신법 수정안에 서명하는 날 이 보스턴항(인터넷)에 차(통신품위법)를 폐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결단했다. 바를로가 독립선언문을 올리자 인기있는 전세게 수 백개의 사이트에서 이 독립선언문을 복사해 재빨리 게재했다. 천지사방에 뿌리지는 종이전단처럼 인터넷 곳곳에 디지털 전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록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작사자였고 히피이자 카우보이였던 바를로는 1990년에 미쉘 케이포와 함께 전자 프론티어 재단을 공동으로 설립했으며 사이버스페이스의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운동가이다.  그가 사이버스페이스에 그처럼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인간공동체에 대한 1960년대의 낭만과 열정이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무소유의 유토피아를 갈망하던 1960년대의 히피는 재산과 인종, 계급을 가리지 않는 인터넷 공동체와 유사하다.

 

그가 꿈꾸는 세상은 ‘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인 가르시아가 1967년에 밝힌 다음과 같은 세상과 통한다.
“우리가 그리는 세상은 평화가 넘치는 지구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권력을 꿈꾸지 않아요. 투쟁같은 것은 머리 속에 없어요. 전쟁이나 혁명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도 다치지 않고 남을 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단순한 삶이 좋은 삶입니다. 전인류가 몇발짝 더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ㅡ 어디서 스크랩된지 기억이 없습니다.
번역하신 분이 저작권에 대해서는 비영리 목적이니 관대하게 생각하시리라 믿고 일단 올립니다.

Hipster: The Dead End of Western Civilization with korean translate

힙스터, 서구 문화의 죽음
on 어드버스터스.org
by 더글라스 해도우
1.
우리는 하위문화가 미학의 부재와 일종의 자학으로 변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힙스터 문화는 앞서 존재했던 하위문화의 종말임과 동시에 그것이 가졌던 체제전복적인 힘과 원형이 제거된 형태다.
나는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에 있었다. 그곳은 일명 마약소굴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나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바 뒤편에 앉았다. 내 앞에는 피시 그런지 펑크 스타일의 건들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는 자기네들끼리 떠들면서 담배를 몰래 펴가며 금연법을 어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사소한 방항을 하고 있었으나 술에 취한 직원들은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디제이는 자신의 맥북에서 음악을 골라 믹싱을 하기 시작했다. 디제이는 디엠엑스에서 돌리 패트런에 이르기까지 왕년 빌보드를 휩쓸었던 부류의 음악에 어설픈 테크노 박자가 입혀 사운드를 뽑아냈다.
“그러니까 이게 힙스터 파티가 맞나요?” 나는 내 옆에 앉은 여자애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클럽 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겨울용 울코트와 커다란 장식이 달린 귀걸이와 아메리칸 어페럴 브이넥, 도수가 없는 안경을 하고 있었다.
“맞아요. 주변을 봐요. 여기 있는 99퍼센트가 힙스터예요.”
“당신도 힙스터인가요?”
“시발, 난 아니구요.”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하더니 댄스 플로어로 사라졌다.
2차 대전 이후부터 서구 문화에는 언제나 현황에 반대하는 하위문화 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전후 세대가 지나는 몇 십 년 동안은 정부와 시민사회, 음악과 같은 많은 측면에서 변혁을 위해 싸우고 저항하여 사회적 잣대를 거부했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나 펑크문화가 정형화되고 힙합이 사회에 도전하는 힘을 잃어가면서 하위 문화를 지배했던 거대한 흐름은 하나로 혼합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이러한 문화가 변형되면서 대륙과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하나의 혼합문화가 되었는데, 이것의 취향과 행위는 일반적으로 정의되기 어려운 ‘힙스터’ 문화로 명명된다.
다른 시대에서 발생한 다양한 스타일을 인위적으로 혼용함으로써 힙스터는 서구 문화의 마지막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문화는 과거 문화의 피상적인 형태로 전락했고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힘을 잃었다. 문화는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해적인 형태가 되었다. 이전에 있던 젊은 세대의 문화 운동이 기성세대의 무능과 타락에 도전했다면 오늘날 힙스터는 주류 사회에 대한 얄팍한 이해를 반영하는 하위문화이다.
2.
북미나 유럽의 대도시를 걷다보면 당신은 패션에 꽤나 신경 쓴 듯한 이십대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은 식상하리만치 전형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스키니 진이나, 코튼 스판덱스 레깅스, 픽시 자전거, 빈티지 플란넬, 무도수 안경, 카피예 같은 것들이 그들의 취향이다. (사실 카피예는 유대인 학생들이나 개신교도들이 팔레스타인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카피예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힙스터의 상투적 패션 아이템으로 전락했다.)
아메리칸 어패럴 브이넥 셔츠와 펩스트 블루 리본 맥주, 팔리아먼트 담배는 노동계급 또는 혁명의 아이콘이었다. 이러한 코드는 힙스터 문화에 차용되었고 그 의미를 잃었다. 10년 전만해도 어떤 사람이 평범한 브이넥 티셔츠에 펩스트 맥주를 먹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절대 유행을 좇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도가 되자 이러한 코드는 노동자 계급의 미학을 흉내 내어서 자신의 부와 특권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낯간지럽고 상투적인 문화가 되었다.
유행에 대한 집착은 힙스터들이 이동수단으로 애용하고 있는 픽스드 기어 바이크에서 들어나는데, 이는 힙스터가 가진 부조리한 면모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픽스드기어를 주요한 운동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한 짝만 달려 있기 때문이다.
건성건성 사는 태도와 모순의 화신인 힙스터들은 세계적인 패션 추세를 알려주는 온라인 블로그나 샵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만들거나 창의적인 형태의 작업에 그다지 열성적인 않은 형태로 참여하며 예술 파티에 참가하고 아날로그 카메라로 저해상도의 사진을 찍으며 밤이면 자전거를 타고 나이트클럽에 가 디스코-콜라 파티에서 춤을 춘다. 힙스터는 매일 블로그에 시시콜콜한 자기 이야기를 적고 바이스나 월페이퍼 같은 종합잡지를 가볍게 읽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피상성과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힙스터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힙스터 좀비들은 패션잡지의 우상이며 바이럴 마케터가 제일 좋아하는 부류들,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호구들이다.” <타임 아웃 뉴욕>지의 크리스찬 로렌첸은 이러한 기사를 낸 바 있다. ‘힙스터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이 기사에서는 그는 말한다. “그 인간들은 파묻은 다음에 다시 갱생시켜야 한다.”
힙스터 문화는 전방위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변명이나 옹호, 포용의 여지도 없다. 이것은 진정성의 모순적인 결여이어며, 이것은 서구 하위문화의 중요한 정수를 소모하는 국제적 현상을 야기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힙스터들의 몰개성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명료함이야 말로 이전 세대들과 그들이 다른 점이었다. 이러한 몰개성성은 힙스터 추종자들이 다른 사회적 운동과 서브컬쳐, 라이프스타일을 손쉽게 혼합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원인이었다.
3.
나는 예술행사를 나왔다. 행사장 옆에는 자물쇠가 걸린 픽시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나는 힙스터의 전형적인 예로 보이는 두 소녀에게 다가갔다. 나는 그중 한 명에게 무도수 안경을 쓰고 레깅스와 플란넬 셔츠를 입은 사람이 힙스터인지 아닌지를 물어보았다.
“글쎄요, 나는 그런 질문에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대답했다.
대답했던 여자의 친구가 적대적인 눈빛을 깜빡이며 여기에 응수했다. “맞아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런 말을 사용하면 안돼요. 그건…”
“공격적이라서요?”
“아뇨. 꼭 그렇진 않아요. 뭐랄까. 그 단어를 왜 쓰면 안 되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어쨌든 그 말을 사용하면 안돼요.”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파티 끝나면 뭐할 거예요?”
“음… 우리는 이차 갈 건데요.”
4.
바이스 잡지의 설립자이나 최근 퇴사를 한 게이브 매킨스는 힙스터 현상을 만든 주요한 사람들 중에 한 명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미디어들과 달리 맥킨리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에는 10년 전부터 힙스터 패션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규명해놓고 있다. 그리고 매킨리는 힙스터들이 비난받아야 할 점을 신랄하게 비평했었다.
“‘힙스터’라는 단어는 다소 상대를 경멸하는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힙스터라는 용어는 성행위를 하지도 않고 할 일 없는 뚱뚱한 블로거들이 사용한 것이었요. 그들은 패셔너블해 보이고 재미있어 보이는 것을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애들에 대해 분노하지요. 그런데 그들도 그러한 면모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힙스터의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펑크족들은 다 떨어져가는 옷을 걸치고 징 박힌 가죽 자켓을 입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다. 그들은 자신의 혁명성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자기표현과 반항의 저렴한 표식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비보이들과 비걸 역시 배치 팬츠와 박스티로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냈다. 그러나 자신이 힙스터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이상한 자기동일성의 뒤틀림이다. 힙스터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옷차림을 하고도 자신은 그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행위 말이다.
5.
“재는 17살인데, 영화배우가 꿈이래요.” 한 소녀가 나에게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청소년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소년은 파티가 끝나고 희미한 담벼락 구석에서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살짝 정신이 나가보였고, 펑크족 머리를 했으며 타이트한 청바지와 가죽 자켓, 핀티지 펑크티와 하히톱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사진 찍어줘요.” 그는 담배를 문 채 나에게 다가와 포즈를 취했다. 그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표현력을 보여주었고 나는 두어 차례 다른 앵글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사진의 결과물을 보여주자 그는 살짝 들뜬 눈치였다.
“래드, 고마워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음악에 집중하면서 펑크를 들으며 열광하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힙스터들의 춤판은 마치 인용된 요소들로 가득 찬 것 같다. 펑크나 디스코 힙합과 같은 음악은 정신적인 상태에서 춤추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힘차면서고 친숙한, 강력한 힘이 있다. 예를 들어 비보이들의 헤드스핀이나 펑크쇼의 파괴 행위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힙스터는 다소 실없는 춤을 춘다. 기만적인 셔플 동작은 그 춤이 갖고 있는 정신을 모욕하며 또는 이상하게 경련하는 듯한 동작으로 알 수없는 공포를 표현하는 행위다. 힙스터 댄스를 추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빠져서 해방의 어떤 형태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자신을 아무런 의식 없이 지속적으로 어깨를 흔들고 있을 뿐이다.
6.
아마도 그들이 일부러 무관심한 척하는 행동 배후에 있는 진짜 동기는 파티장에 따라다니는 사진가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일 것이다. 포토그래퍼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군중들 사이를 다시면서 스팟을 터뜨리며 그 순간을 영원한 기록으로 남긴다.
파티장의 화장실에서 플래시가 새어나오고 나는 가벼운 수준의 포르노 그래피를 찍어줄 포토그래퍼를 찾는 한 사람과 조우했다. 두 명의 아가씨들과 한 남자는 옷을 업고 뻔한 에로틱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한참동안 낄낄대고 웃었다. 그러다가 한 여자가 다른 여자의 머리를 밀어젖히면서 소리를 쳤다. “네년은 90년대 뉴욕에 클럽녀가 아니라고. 이건 너무 힙스터스럽잖아!” 두 여자는 곧 싸우기 시작했고 나는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힙스터의 라이프스타일은 상당히 의례적이다. 많은 파티 참여자들은 포토블로거의 대상이 되며, 내일 오전 즈음에 침대에서 기어나올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날밤의 방탕함은 즉각적으로 다시 경험된다. 그들은 충혈된 눈과 몽롱한 초점으로 랩탑 앞에 앉아서 완전히 힙스터스러운 순간이 주는 스릴을 찾으러 온갖 유사한 것들의 바다를 방황한다.
마케터들과 파티 프로모터들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택해 돈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 문화에 이윤을 붙여 다시 그들에게 팔아먹는다. 결국에는 힙스터는 그들이 발명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 구매한 셈이며, 사전에 포장된 문화적 생활을 누군가에게 받아먹고 있는 것이다.
힙스터는 산업의 섬세한 광고가 만든 최초의 하위문화다. 광고는 지속적으로 힙스터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힙스터를 추종하는 이들의 관심과 소속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힙스터는 하위문화라기보다는 소비자 집단이었다. 그들은 공허한 진정성과 방항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썼다. 그 순간 유행과 밴드, 음악, 스타일이나 감상 과 같은 것들은 지차지게 많이 노출되었고 이런 것들은 곧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힙스터는 자신이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문화적 소속감이나 충성심을 가질 수 없는 무리들이다.
힙스터가 가진 역사성이 혼합되면서 서구의 젊은 세대들은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쿨한 소비자로 남았다. 과거에 있던 문화적 시대정신은 어떤 분노와 반동적인 운동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힙스터의 자기애 또는 자기 소속감은 문화적 혁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구의 문화가 갖고 있던 양분은 말라버렸다. 이러한 사회적 실패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지금의 모습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길 뿐이다.
7.
날밤을 샌 사람들과 삼차, 사차 파티를 다녀온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기 시작한다. 힙스터들은졸린 눈을 비비면서,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서 헤어지기 시작했다. 몇몇은 자전거에 올랐고, 몇은 택시를 잡았으며, 몇몇은 울타리를 넘고 산업용 공터를 가로질러 근처 콘도 개발지구로 갔다.
나는 밝은 색 핑크 키피예를 입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소녀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저들이 카메라가 아니라 돌멩이를 들고 있었다면, 그들은 혁명단체처럼 보였을 테지.” 우리는 발 앞에 놓인 무기를 들지 않은 대가로, 문화에 멸망의 순간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는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우리는 현실감을 일깨워주는 것에 의존하지만 그것 자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겁을 낸다. 우리는 실패한 세대이다. 우리는 우리시대 이전에 있던 위선을 체념하며, 한때 저항을 외쳤던 자들이 이제는 반항정신을 우리에게 팔아치우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세대다. 이전에 있던 문화들의 정점에 서서 우리의 문화는 그것의 상투성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힙스터는 서구 문화의 종말을 대변한다. 힙스터 문화는 분리되고 단절되었으며, 새로운 것을 잉태하는 활동을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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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어드버스터의 ‘힙스터, 서구 문화의 종말'(http://www.adbusters.org/article/hipster-the-dead-end-of-western-civilization/)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자, 함문수 – 글 (https://www.facebook.com/dora21c/posts/573457399436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