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중식이 밴드가 ‘때론’ 여성 혐오적이라는 혐의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현재 비판받고 있는 지점이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은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딱히 중식이 밴드를 감싸려고 한다기보다, 비판의 타격을 정교하게 설정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비판하다가 비판 전체가 부인되고 조롱받는 게 싫기도 하고.
먼저 비판을 받고 있는 네 곡, [야동을 보다가], [아기를 낳고 싶다니], [선데이 서울], [좀 더 서쪽으로]를 중심으로 말해보고 싶다. 위근우 씨가 ‘해석의 문제는 결국 얼마나 성실하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라고 말했듯 [1], 조금은 성실하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중식이 밴드, 논란의 곡들
[야동을 보다가]
내가 처음 중식이 밴드를 알았던 것은 몽키 비즈니스라는 경복궁 근처의 한 라이브 카페였다. 그때 나는 [꽃과 벌]의 공연을 하러 갔었다. 우리 차례가 끝나고 좀 지나서 [중식이 밴드]가 올라왔다. 그때 처음 [야동을 보다가]를 들었다. 그때 첫 감상은 ‘고흐의 소로우 같군.’이었다.
고흐, Sorrow (pencil & ink)
고흐가 한 매춘부를 그린 그림이다. 제목은 [슬픔]이다.
축 처진 가슴과 부른 배, 주름지고 망가진 몸매,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고, 자세는 일반 그림에서의 여성 모델이 취할 법한 아름다운 자세도 아니다. 르네상스에 유행하던 것처럼 여신으로 그려주지도 않았다. 왜? 매춘부라서? 어리지 않아서? 몸이 안 예뻐서? 그래서 여신으로까지 그릴 가치가 없어서?
화가가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을 그린 그림이란 걸 몰랐다 하더라도 [2], 적어도 이걸 그린 화가가 모델이 매춘부라는 사실과, 망가진 몸매를 판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린 이걸 매춘부를 비하하는 그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흐는 흉한 점을 미화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그림으로써 그녀의 슬픔과,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야동을 보다가]의 가사에는 여러 개의 감정의 흐름이 교차되는데, 전 여자친구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야동을 찍고 배포한 놈에 대한 분노, 카메라를 통해 눈을 마주치는 순간 현실을 마주하기 힘들어하는 고통, 자신이 그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과 부끄러움이다. 이 감정들은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답게 갑작스럽게 교차되곤 하는데, 이 기법이 매우 세련되었다.
잠시 나의 눈을 의심했어, 네가 앞에 나타나니까. 잠시 커버렸던 나의 그것도 고개를 숙이며 울었어.
첨엔 네가 아닐 거란 생각에, 멍하니 널 쳐다보다가 유두 옆 쪽에 큰 점이 있더군.
맞아 기억나는데, 너의 유방 삼국지. 나의 전 여자친구의 야동.
손으로 가린 얼굴, 설레어 아는 얼굴, 이제는 늙어버려 주름이 늘었구나.
그래도 예쁜 얼굴, 그리운 아는 얼굴, 내 품을 떠난 너는 나쁜 놈 만났구나.
조용히 카메라를 보는 너, 모니터를 보는 나.
우린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전혀 상관없는 남이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너를 사랑했던 내가, 그때 그 시절 네가 떠올라.
담배 꺼내 물어봐. 한숨에 연기 뿜어봐.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전혀 상관없는 남인데, 왜 자꾸 성질이 나지?
너를 사랑했던 나는, 지금 화가 나서 가슴이 타올라.
아직 나는 백수로 살고 있어,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술 먹으면 개가 되지, 너와 헤어진 지금도.
‘너는 나랑 헤어지길 잘했다’ 생각했었는데도, 너의 남자친구는 씹할 놈인 것 같아.
얼굴 찍지 말래도, 지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카메라를 보는 너, 모니터를 보는나.
우린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전혀 상관없는 남인데. 왜 자꾸 성질이 나지?
너를 사랑했던 내가, 그때 그 시절 네가 떠올라.
담배 꺼내 물어봐, 한숨의 연기 뿜어 봐.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전혀 상관없는 남인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너를 보고 있는 나를, 아마 잊었겠지 나를.
카메라를 보지 마, 그런 눈을 하지 마. 네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지 마.
왜 자꾸 성질이 나지?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 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
네가 나를 떠나 만난 사람, 존나 작은 변태 새끼야.
야동 보는 나도 뭐 그래. 나는 외로워서 그래. 밤에 잠 안 와서 그래.
그래..
고흐가 흉한 모습 그대로 그림으로써, 그녀의 슬픔과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달한 것처럼, 중식이도 어떤 기막힌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그대로 서술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의 슬픔을 전달했다.
화자는 전 여자친구에 대해 연민을 느꼈고, 야동을 찍은 놈에게 분노했지만, 심각한 범죄 피해 현장을 보고 있다는 파악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그녀 자살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있나?’ 정도를 걱정할 레벨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연민은 ‘나쁜 남자 만났다’로 말할 만큼 어리석고, 분노에는 지지리 못나게도 ‘질투’가 섞여 있다. 범죄 현장을 관음하고 앉았다. 그러니까 이 화자는 어리석어서 속이 터지는 동시에, 그래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화자의 정서 레벨이 감상하는 이보다 낮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 스토리에서 흔히 사용하는 캐릭터 기법 중에 하나다. 중식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는 훌륭하게 연민을 이끌어내는 반푼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사형 당하러 가는 길의 아Q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구경꾼들 앞에서 노래 좀 불러야 멋진데’만 걱정하듯이.
리벤지 몰카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남에겐 일상의 공포로 다가오는 심각한 범죄적 일을, 자신의 예술적 영감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안이한 소재 선택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 비판은 이해하지만 그런 소재를 선택했기 때문에 웃음기 하나 없이 심각하게만 다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코미디 영화가 심각한 사회 범죄를 다루며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드는 기법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아Q는 불쾌하고 못난 놈이지만, 그래서 연민을 일으킨다. 그는 권력자에게 굽신거리면서, 지나가는 여승의 머리를 만지고 강제로 희롱하며 분풀이를 한다.
그래서 난 이 노래에 대해서는 중식이가 뭘 고쳐야 한다고, 뭘 잘못했다고까지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피해 여성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건 사실이지만, 화자가 밤에 혼자 야동을 보고 있다는 설정의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그런 설정 자체는 현실 반영이니까. 설정이 그러니, 여기에 균형감 있고 적절한 반응을 할 줄 아는 화자가 등장해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야동을 보다가]라는 작품이 충분히 있을 법한 -100만 소라넷 한국 사회에서라면 더더욱 개연성 있는- 상황에서의, 가상의 화자가 설정된 작품이란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p.s )이 가사를 가지고 ‘남자들만 아는 찌질함과 가슴 아픔’ 운운하는 사람을 피할 수 있는 리트머스도 되고 말이다. 고흐의 [슬픔]을 가지고 ‘애인이 몸 파는 걸 바라보는 능력 없는 나<-‘를 슬퍼할 놈들 말이다.
이 가사에서 속 터지는 포인트는, 이는 이 가사 속 화자가 미욱하고 어리석고 상황 판단을 못하고 찌질한 캐릭터라는 걸 일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발생한다.
처음엔 자기가 받은 야동이 전 여친이란 걸 막 깨달았을 때에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을 못하는 듯, 당시 여친과 사귀던 시절의 농담이었을 ‘유방 삼국지’란 단어를 쓴다. 여성은 최악의 범죄를 당한 심각한 상태인데, 말장난 같은 유방 삼국지나 운운하며 정말 내 전 여친인지 확인하는 모습은 속이 터지는 동시에, 얼마나 가사 속 화자가 미욱한 캐릭터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남의 범죄 피해 장면을 보며 저 혼자 갑자기 그리움에 빠져 버렸다던가, 범죄자한테 꼴랑 ‘나쁜 놈 만났다. 씹할 놈인 것 같다’로 그냥 나쁜 남자 취급을 한다던가. 그 와중에 그 나쁜 놈이랑 섹스하는 것에 대해 질투하면서 내 것이 더 크다며 정신 승리하려는 지지리도 못남까지.
그러다가 갑자기 자각한다. 그간 ‘일반인 야동을 받아보던 자신은 뭐 다른 놈인가?’ 하는 각성이다. 그러나 솔직히 반성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설정된 ‘찌질한 캐릭터’가 할 법한, 모호한 변명으로 끝을 맺는다. ‘나도 뭐 그런 놈이긴 한데, 난 외로워서 그래, 밤에 잠 안 와서 그래. 그래…’
마지막에 ‘그래…’를 한 번 더 쓰며, 마치 이 초라하고 궁색한 변명 외에 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이 노래도 끝맺는다.
[아기를 낳고 싶다니]
[아기를 낳고 싶다니]는 화자가 왜 결혼과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가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가사다. ‘삼포세대’ 정책에 예민한 정의당이 선택하기 알맞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가사에서는 아기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여친에게, 남성 화자가 우리가 왜 아이는커녕 결혼도 할 수 없는지를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는데, 거기에 사회가 날카롭게 반영되어 있다.
아이를 낳고 싶다니, 그 무슨 말이 그러니? 너 요즘 추세 모르니?
헤어지잔 말이 아니야. 나 지금 네가 무서워. 너 우리 상황 모르니?
난 재주도 없고 재수도 없어.
집안도 가난하지, 머리도 멍청하지, 모아 둔 재산도 없지.
아기를 낳고 결혼도 하잔 말이지? 학교도 보내잔 말이지?
나는 고졸이고 너는 지방대야, 계산을 좀 해 봐.
너랑 나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어. 뭐, 애만 없으면 돼.
이대로 우리는 계속 사랑하며 살기로 해.
맞벌이 부부 되면 집에서 누가 애를 봐? 우리는 언제 얼굴 봐?
주말에 만나거나 달 말에 만나거나, 뭐 다들 그리 살더라.
아기를 낳고 나면 그 애가 밥만 먹냐? 계산을 좀 해 봐.
너랑 나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어.
너 개도 못 키우면서 주제에 우리가 무슨 누굴 키우냐?
만약 애가 커서 대학을 갈 때쯤 난 이 세상에 없겠지.
그때 나의 보험금 탔을 때 그 돈으로 둘이 먹고살겠지.
나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마. 나도 막 살아온 걸 후회한다고.
책임지지 못하면 안아주지 마. 지금도 내 인생 하나만으로도 벅차.
만약에 내 삶에 여유가 있을 때, 나의 삶에 여유가 있을 때
우리 둘만의 아기를 낳겠지…
가사 자체의 예리함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비판하는 이들이 뭘 말하는지는 들어볼 가치가 있다. 한국은 결혼과 출산 후 여성의 경력이 대부분 단절된다. 그런데 그런 건 ‘아몰랑’ 하는 듯이 아이 낳자고 조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설정상 그리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를 낳고 싶다니]의 뮤비에 나오는 오프닝. 여성 쪽이 해맑게 설정되어 있다.
여성이라고 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고, 여성이라고 다 모성이 있고, 여성이라고 다 웨딩드레스가 로망이고, 여성이라고 다 따뜻한 가정이 꿈이고, 날 때부터 살림이 체질이겠는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야망이 있고, 일에 대해 성취욕이 있고, 경쟁심이 있고,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그간 얼마나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던가. 얼마나 많은 미혼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지겨운 방해물로 생각하는지 몰라줘도 너무 모른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자료들만 봐도, 여자들이 더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하다. 그럼에도 ‘여친이 나한테 결혼을 조르면 어떡하지 ㅎㅎ 난 아직 한 사람한테 매여 살 생각 없는데 ㅎㅎ 아직 더 자유분방하게 놀고 싶은데 ㅎㅎ 결혼한 선배들이 그러는데 결혼은 무덤이라는데 ㅎㅎ 그러고 보니 넌 언제 결혼해? 여자는 너무 늦으면 시집 못 가, 슬슬 긴장 타라ㅎㅎ’라는 한심한 농담을 웃기다고 시전 하는 남자들에게 웃어주기까지 해야 하는 사회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여성들은 결혼과 아이가 로망이잖아요?’라는 식의, 고민도 없고 반성도 없는 구태의연한 캐릭터 설정에 신물이 나 있고 그만큼 예민하다. 그런데도 이 곡을 선거송으로 채택하는 순간, ‘여성들은 결혼과 아이가 로망이지만, 남자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 삼포세대의 (남성) 청년들 힘내라!’란 의식에 생각 없이 탑승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의당, 너까지 이러기임? 하는 배신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아기를 낳고 싶다니]가 선거송이 아닐 때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라도 결혼과 출산을 원하는 여자가 있을 수 있으며, 그녀들은 ‘반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그녀들의 그런 욕망을 후려쳐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결혼과 출산이 한국에서 왜 힘든지를 말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고. 듣는 대상이 여친으로 설정된 건 아쉽지만, 또한 그게 형식미적으로 최선책이었던 것도 인정한다. 부모님에게 ‘아이를 낳으라니요. 아버지 요즘 추세 모르세요?’ 한다면, 품짝거리는 촌스런 내 노래 특유의 분위기가 망가지니까! 궁지에 몰린 남성이 여친을 무서워하며 변명만은 청산유수처럼 줄줄 쏟아내는 웃픈 상황으로 읽으면 그만이다.
다만 이걸 정의당 선거송으로 채택된다면, 설명해야 할 대상은 중식이 밴드가 아니라 정의당이다. 나는 중식이 밴드에게 이 곡으로 죄를 묻는 건 반대한다.
물론 정의당 입장에서는, ‘아기를 갖고 싶다니, 네가 가사 반 분담할 거고, 나 회사 다닐 동안 네가 애를 볼 거고, 임신했다고 회사 잘리면 다른 회사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말하는 여성의 곡은 한국 사회에서 없으니, 다른 선택지도 없었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정의당은 애초에 미처 몰랐다. 정의당은 ‘몰랐어염…’ 해선 안 된다. 중식이는 ‘몰랐다’고 해도 되지만.
여담이지만, 예전에 중식이 밴드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여자 친구가 ‘결혼은 힘들겠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라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을 때, 중식이는 옆에서 죄지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그의 사죄문에서처럼 정말 단순하게 자기의 상황을 기반으로 곡을 썼고, 이 곡을 정의당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저 ‘구태의연한 남녀 역할 설정이 촌스럽다’가 죄의 전부였을 것이다.
[선데이 서울]
논쟁적인 [선데이 서울]이다. 소녀들 이야기만 없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가사다.
친구야, 꿈이 있고 가난한 청년에겐 사랑이란 어쩌면 사치다.
나는 힘없는 노동자의 자식, 낭만이란 내겐 무거운 사치다.
…
빚까지 내서 대학 보낸 우리 아버지, 졸업해도 취직 못 하는 자식.
오늘도 피시방 야간 알바를 하러 간다. 식대는 컵라면 한 그릇.
…
빚까지 내서 성형하는 소녀들, 빚 갚으려 꿈 파는 소녀들,
빨간 집 붉은빛이 나를 울리네.
그는 스스로 흙수저 밴드라는 별명이 싫다고 했지만, 흙수저의 인생이 직설적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소녀들은 ‘빚내서 성형하고 그 빚을 갚으려고 매춘을 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중식이는 그 소녀들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여기까지는 고흐의 [슬픔] 같다.
하지만 이 곡은 그것과는 다르다. 이 곡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 전체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소재의 선택은 작가의 세계관이다. 어떤 소재를 취사선택하는지에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중식이는, 남성 청년의 아픔으로써 알바를 하며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선택했고, 아버지 세대의 아픔으로써 빚내서 자식을 대학 보낸 상황을 선택했고, 여성 청년의 아픔으로써 성형한 뒤 빚을 갚으려 매춘을 하는 상황을 선택했다.
이 곡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래서 ‘소재 선정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도 똑같이 똑같은 것으로 아파한다. 야망이 좌절되고 가난해서 아파한다. 그런 점에서 재봉질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사계’가 훨씬 세련되고 쌈빡하게 느껴질 정도다.
만약에, 외모 자본의 유무가 여성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면, 예를 들어 ‘취업 성형을 위해 빚을 내는 소녀들’ 정도로만 가사가 섬세했더라도 이런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성형에 대한 소재를 사용할 때는, 외모 자본이라는 맥락을 거세하면 한없이 여성에게 불공평해진다. 중식이가 어떤 의도로 이 가사를 썼는지는 알 수없지만, 설명 없이 현상만 취하는 바람에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음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중식이 세계에서의 여성이란 ‘빚내서 성형하거나 출산하자고 조르는 여자들이 전부’라는 분노도, 그래서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의 소재 선정이 불공평해서 불편함을 느끼지만, 있을 수 있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하자면, 그런 소녀들이 자기가 보기에 제일 불쌍해 보여서 소재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다분하고. 다음엔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여기 힘들다고 생각없이 던져대는 돌에, 돌 들 힘도 없는 사람들이 맞아죽고 있는 판국이 됐으니까.
[좀 더 서쪽으로]
너에게 밥을 사고 술을 사도, 거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넌 내게 맘을 절대 안 줄 것 같다.
너에게 꽃을 주고 반지를 줘도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넌 내게 맘을 절대 안 줄 것 같다.
넌 비싸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고 싸구려가 아니라 말한다.
난 말이 통하게 명품을 줘도 쉬운 여자 아니라 말한다.
얌마 내가 이래 봬도, 저기 저 서쪽을 향해 가면 갈수록 훈남이야, 나 집에선 장남이야.
내 고향은 경남이야, 그래 내가 너무 비만이야, 남들보단 병맛이야, 그래서 난 총각이야.
어쩔 거야, 정나미가 떨어져도 내 맘이야.
이것도 난 낭만이야, 인생은 마 실전이야, 이번에는 정말이야, 여기서는 양반이야.
난 말이야 중년이야, 좀 있으면 마흔이야, 죽기 전에 마 나도 장가 한 번 가야지.
세우지 않아도 오똑한 코와 독특한 향기, 똑똑한 그녀.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아나? 나를 껴안아 영어도 몰라 나.
시골에 살아도 꺼리지 않아, 작은 일 하나, 착한 너와 나.
가난히 살아도 아프지 않아, 슬프지 않아 날 사랑하나 봐.
개인적으로 위의 세 곡은 여성 혐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 창작의 범위 안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중식이는 인디 뮤지션이고,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 자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 곡은 아무리 봐도 논쟁적이다.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한국 여성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된장녀 클리쉐로 묘사했다. 비싸 보이기 위해 치장하고, 싸구려가 아니라고 말하며, 명품을 선물해도 쉬운 여자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까지, 클리쉐도 이런 클리쉐가 없다. 나중에 20대 꽃다운 네팔 처녀와 결혼해서는 ‘세우지 않아도 코가 오뚝하고, 똑똑하고, 시골에 살아도 꺼리지 않고, 가난히 살아도 날 사랑해주는 예쁘고 착한 여성’이라서 행복하다고 노래한다. 전형적인 된장녀와 개념녀의 구분이다. 추가 설명은 유튜브에 있다 [3].
그녀들이 왜 거절했는지는 자세히 알 생각도 하지 않는다. 화자가 어떤 사랑을 나누고자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저 가진 재화로 교환이 되는 여성과 안 되는 여성, 오로지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뉘어 있을 뿐이다. 이 가사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했다 해도, 표현이 너무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그녀들을 오로지 교환 가치로만, 재화로만 묘사한 건 중식이라는 한 뮤지션이지 않은가?
나는 이런 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소녀를 공략하는 미연시 게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군대 간 여성이 개념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판타지와 모에로 점철한 작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처럼. 불쾌한 현실을 아무런 고민 없이 뚝 끊어서 보여주는 기안84의 웹툰처럼.
못생긴 여선배가 예쁜 후배들을 더 미워하며, 그 이유는 남자 선배들에 있다고 표현된 기안84의 웹툰
개인적으로 중식이 밴드에서 보이는 일부 안일한 현실 반영을, ‘통찰이 없는 관찰’이라고 부른다. 통찰 없는 관찰류의 작품들도 나름의 역할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정한다.
중식이의 다른 모든 곡을 좋아하고, 중식이 밴드를 아낀다고 해도, 이 곡만은 더는 안 듣겠지만.
적어도 어떤 지점에서 분노하는지는 알았으면 한다
나는 중식이를 비판하는 화살들의 일부는 타깃 범위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만,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어떤 지점을 비판하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좀 알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다.
중식이의 곡들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여성주의자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그간 모든 예술 작품에서처럼 남자들이 유독 자신만을 연민하는 모습 그대로란 점이다.
‘산업화 시대의 가장으로서 능력 없는 아버지를 그린 뭐’ 라던가, ‘능력 없어서 처자식을 때리면서 때리는 자신을 더 연민하는 아버지’라던가, ‘다이아몬드에 팔려간 애인을 후려 차는 순정남’이라던가, ‘마음 약하던 소년이, 사랑하던 소녀가 강간당하는 걸 보고 각성해서 이방지가 됨’ 이라던가, 우린 이미 지긋지긋하게 많이 보아왔다.
여자를 이용해서 제 비극만을 전시하던 남성 입장에서의 작품은 동서고금간의 력사가 유구하기도 하다.
남성이 여성이나 어린 자식을 장치로 삼아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는 구도를 잡고 어리광을 부려대는 작품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신호를 얼마나 많이 보내왔는가. ‘작가가 남자니까 당연히 남자 입장에서…’라는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변명도 얼마나 지겨운가. 입장이고 자시고 애초에 여성을 자기 연민, 또는 변명의 장치로 좀 써먹지 말라고.
그런 세계에서 여성은 창녀 아니면 성녀밖에 할 게 없다. [좀 더 서쪽으로]에서처럼 말이다. 많은 남성 예술가들이 헛발질을 하는 것은, ‘나는 여자를 좋아하며 성녀로 숭배하는데 왜 여성 혐오냐’는 것이다. 일단 여성을 주인공의 각성을 돕거나 위로하기 위한 장치, 물건,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여성 혐오의 혐의를 각오해야 한다.
결론
나는 중식이 밴드를 아낀다. 그 특유의 찌질한 감성도 좋아한다. 쿨하지 못한 냄새도 좋아한다. 하지만 [좀 더 서쪽으로] 같은 가사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다. 다만 언급했듯이 이런 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그리고 어떤 가사들이 불편하다고 지인들에게 밝힐 정도로의 활동 외에는, 더 크게 벌일 생각도 없다.
다만 중식이의 곡을 선거송으로 사용할 때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중식이가 아니라 당에서. 왜냐면 중식이는 창작물에서 가능한 기법인, ‘반편짜리 화자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용납 가능한 설정’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게 그리 냉철하고 균형감각 있는 목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책을 위한 목소리라면 적어도 공평해야 할 것 아닌가. 정의당이 그것을 ‘왜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 그 정도의 요구는 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와서 ‘미처 몰랐어염…’이라고 말해서 탈력이긴 하지만.
그리고 적어도, 중식이 밴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조금은 진지하게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주었으면 한다. 중식이 밴드나, 아니면 그 밖의 사람들도. 하지만 그 모든 걸 중식이가 다 책임져야 할 것으로 몰리는 것 같은 분위기는 우려스럽다. 중식이 곡들 중 일부 가사가 ‘구태의연하게 성차별적 설정이 안일하다’고 창작물에 대한 문법으로 평론하는 것과, 중식이 밴드 자체가 여혐 밴드라고 낙인찍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반대로, 가사에 대한 해석도 조금 더 성실했으면 한다. 어떤 비판들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중식이에게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창작물을 비평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다. 비판의 범위 설정을 온당하게 했음에도, 정의당 당게에서 ‘예민하다!’며 실드를 친다면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는 것이다.
한참 잘못하고 있는 중.
창작물이 구태의연한 것 자체는 당연히 비판될 수 있다. 창작물이니까! 그리고 창작물에서 읽을 수 있는 ‘그간 한국 남성 창작자들의 반성 없고 고민 없던 의식’을 끄집어 내보여주는 시도도 막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걸 막으려 드는 순간, 중식이는 그저 ‘의식에 한계가 좀 있던 인디 뮤지션’에서, 한국 남성의 견고한 카르텔의 방패가 되고, 모든 공격은 중식이게 가서 꽂힐 수밖에 없게 된다.
세 단락 요약 :
1. 중식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조금은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그들을 페미나치라고 하는 순간, 모든 건설적인 토론은 끝난다.
2. 창작물로서, 중식이의 언어 일부는 여성혐오 혐의를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자체는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물에 대한 비평과 사회적 책무에 대한 비평은 구분되어야 한다.
3. 어떤 창작물을 선거홍보물로 이용할 때는 새로운 기준이 적용된다. 그래서 새롭게 생기는 책임은 져야 한다. ‘일부를 위한 은밀한 카타르시스’로만 존재하고 있던 중식이를, 사회적 메세지의 위치로 끌어올린 건 정의당이 아닌가?
원래 브런치에는 스타트업과 업무, 비즈니스 등에 관련된 이야기로 작가를 신청했는데,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 블로그가 이것밖에 없음을 깨닫고 여기다 씁니다… (브런치 팀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