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성을 2등시민으로 만들고 있는가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 같은 자극적인 언사를 하며 ‘여성들을 위한’ 무엇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주장이 미숙한 사람들을 상대로 선동하는 것, 넷-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은 반페미니스트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먼저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동일한 주장을 하는 젠더학자나 페미니스트, 또는 논리적 근거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유사한 것으로는 경찰학, 또는 경찰예방학, 경찰수사학, 경찰범죄예방학에서 부모들의 유아학대에 대한 징후를 찾기위해 잠재적 가해자를 규정하기 위한 연구가 있었을 뿐이고, 다른 일례로는 캘리포니아의 공공교육 캠페인이 알콜을 위시로한 성범죄가 일어나는 바의 화장실과 대중교통센터에 “It’s not sex when she’s wasted, 그녀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다면, 그건 섹스가 아니다”와 “It’s not sex when he changes his mind, 그가 마음을 바꾸었다면, 그건 섹스가 아니다”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캠페인이 있었을 뿐. 남성 전체를 가해자로 확증편향 시키는 주장에는 근거나 사례가 없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어떤 연구나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주장들을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다를바 없는 이런 엉터리 주장을, 어떤 남성들이 계속해서 한다면, 같은 논리로 내가 그들을 ‘잠재적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에도 그들은 감수해야만 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 같은 주장은 실제로 남성운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운전자들이 미숙한 경우가 두드러진다고 하여, 여성운전자 모두를 ‘김여사’라고 일반화 시켜 조롱하는 것이나 같은 논리이다. 이를테면, 꽃뱀과 같은 범죄 유형처럼 여성범죄자가 남성을 노리는 특정된 범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여성을 꽃뱀으로 상정하는 것이 억지 논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하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흐리고,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 시선을 불러모으는 반여성주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여성들을 위한’ 무엇을 주장하는 것 또한 페미니즘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지난 수 십년 동안 남성과 여성의 동등함을 말해왔다. 따라서 여성이 ‘배려 받아야할 존재’, ‘보호 받아야할 존재’같은 약자화 프레임을 극복해야할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서 인식하도록 남성, 여성 모두에게 이야기 해온 것이다. 여성을 도와야할 대상, 특혜를 주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을 2등시민으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Lady first”와 같은 과잉친절 같은 맥락에서 근절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반여성주의적이고, 때로는 악랄한 의도까지 보이는 이런 주장을 근절해야한다고 작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번 사건과 맞물려 정치적 주장이 미숙한 사람들을 상대로 관심을 모으기 위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유감이다. 부디, 사람들을 속이지 말라.

정말로 당신이 여성차별과 혐오에 분노를 한다면, 사람들의 인식 이전에 여성을 약자로, 2등시민으로 규정하는 당신의 인식부터 다시 재고 해보길.

강남역 살인사건, 살인의 동기가 밝혀지기 전 우리가 고민해야할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공개된 정보는 한정 되어있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벌써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렸거나 너무 많은 의견을 낸 상태라 생각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살인범의 정신병력이 드러났고, 여성을 특정했다고 이야기 했다지만, 이것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신병력의 문제인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이루어진 범죄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하고, 예리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뤄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살인범의 동기가 여성혐오 때문이라면,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해결방안일 수 있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사건을 둘러싼 우리의 해석은 더욱 끔찍한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사회의 벌어지는 일상적인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는 사회전반에서 노력하여야할 지점이다. 그러나 내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경찰이 발표한 내용중 ‘2008년 여름부터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이래 2008년 수원 모 병원에서 1개월, 2011년 경기 부천 모 병원에서 6개월, 2013년 충남 조치원 모 병원에서 6개월, 지난해 8월부터 올 1월까지 서울 모 병원 6개월 등 4번 입원치료’라는 것이다.

내가 놀란 점은 입원치료 횟수와 기간(너무 잦은 거주지 이전, 불안정한 거주지가 이상한 것은 나뿐인가?). 아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신병원 입원은 보통 2개월로 하고 있으며, 치료를 목적으로한 입원은 대개 3개월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3차례나 6개월 입원치료를 받을 정도라면 심각한 중증 정신분열환자라는 것이다.
(물론, 입원 최대기간은 법적으로 6개월이지만, 최근 법 개정을 통해 3개월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병원은 감금죄로 처벌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인신구속이나 마찬가지인 폐쇄병동 입원 중, 행려자를 제외한 강제입원이 가족이나 친인척 등의 사적인 과정에서 결정되고, 이의제기 장치가 사실상 없는데, 지자체 심판 위원회가 치료내용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으면서 6개월마다 기계적으로 퇴원이냐 연장이냐를 심사만한다. 이마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퇴원 신청자의 5%만이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

일단 정신분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정신분열은 갑자기 등장한 검색어인 싸이코패스와 완전히 다르다. 정신분열은 기본적으로 망상장애를 갖는데, 이중 피해망상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살인범이 자백한대로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은 확실하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 살인범은 3월말 가출하면서 임의로 치료를 중단한 상태라고 하는 지점에서 나는 정신분열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조금 더 기울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자는 감정을 느낀다. 그 말은 즉 죄의식 또한 느끼는데. 내 생각에는 살인범이 벌써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살인범은 경찰에게 여성을 혐오했음을 말했음에도 기자의 질문에는 일체의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이 살인범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킬 논리 또한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정신병과 달리, 정신분열은 완치되는 병이 아니다. 환자가 스스로의 문제를 인지하고,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는다면,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아무 문제 없어보이지만, 재발률을 기록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 재발은 거의 확실한 병이다. 투약을 중단할 경우, 1년 후의 재발률은 약 70%에 육박하며, 지속적으로 항정신성약물을 투여 할 때도 30~ 40%의 재발율을 보인다. 하지만, 25~30년의 치료 추적기간 동안의 조사에 따르면 환자의 1/3만이 회복 또는 증상이 소실된 병이고, 그 밖의 환자는 주증상이 지속되고 있거나 여전히 입원치료를 하고 있는 병. 때문에 정신분열증은 보통 333룰로 대변되는데, 전체 환자의 3분의 1은 약물과 상담 치료만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지고, 다른 3분의 1은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병원을 주기적으로 들러야만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약조차 듣지 않아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고, 심하면 병원입원조치를 반복해야만 한다.

원인 또한, 선천적, 후천적으로 규명하려 신경정신학계에서 노력하고 있음에도 원인을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병이기도 하다. 때문에 지금의 정신분열 약들은 실제로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신체적, 정신적 동기를 떨어트리는 효과를 갖는, 일종의 사회적 감옥에 넣는 수준이라 말하여도 과한 비유라 비난할 수는 없다. 현재 정신분열증은 정부에서 희귀성, 난치질환으로 등록하여, 특별관리대상으로 두고 있는 그런 질병.

이택광 선생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미국 버지니텍 총기난사 사건의 조승희도 “여자가 나를 무시했다”라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희생자들은 남녀가 따로 없었다. (정신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는 조승희에 대해서 신경정신학자들은 편집증적 정신분열일 것이라 의견을 모았다) 살인범에게 칼이 아니라 총이 범인에게 들려 있었다면, 조승희와 마찬가지로 힘 없는 여성 한 명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 살인을 벌였을지 모른다.

때문에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여성혐오만으로’ 범행동기를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증환자가 망상장애, 피해망상을 보이며, “링컨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환자의 정신분열이 링컨을 말미암아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존파가 부자들을 원망하며, 살인을 하고 인육을 먹었을 때, 우리는 부자들이 밤길을 조심해야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정상적이지 않은 분노표출을 하려는 사람들을 사회적 불만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격리하려하지 않았고, 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할 방법을 전사회적으로 고민했다. 이외에도.. 정신분열은 재발 1~ 2주 전에는 재발징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경찰수사과정 이외에도 신경정신학자가 이 부분에 대한 심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제 한국과 일본의 문화, 정치에 대해서, 베를린서 조직되는 세월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참여하는 독일 친구와 이야기를 했는데,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로만 보기 어려운 불편한 공백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 피해의식과 피해망상,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된 사건들이 급격히 압축성장 한 나라에서 두드러진다는 것인데, 일본은 80년대, 90년대부터 겪고 있으며, 아직 해결 방법을 못 찾았고, 지금 홍콩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제 그런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존파를 포함할 수 있지만, 빈도 측면에서 2000년 이후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개인주의적인 사회와 달리 집단주의적인 사회다. 이 사회가 행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 한국의 집단주의 사회가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있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극단적으로 이번 살인사건처럼 타인을 향한 잘못된 분노를 터트리는 비극이 되고, 또다른 극단으로는 일개 연예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몰랐다며, 대마초를 피웠다며, 연애를 숨겼다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내밀고, 질타하고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1년 365일, 집단주의의 광끼, 분노의 카니발. 타인의 잘못을 찾아 광장에 매달고 전시하고, 비난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책임이냐를 강박적으로, 한편으로는 도착증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살인범의 동기여부가 무엇이던, 이번 일은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를 분노의 카니발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인지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단순히 전시되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변화의 동기가 주어지고, 함께 사는 공동체라는 인식이 생기길 바라본다. 범죄와 차별, 혐오에 대한 이 분노가 대립항을 만들거나 방향을 잃지 않길. (그녀가 겪었을 극한의 공포를 생각하니 손발이 떨리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

ㅡ Am Tag, als Conny Kramer starb 중.. 일부…..

Am Tag, als Conny Kramer starb
코니 크라머가 죽던, 그 날
Und alle Glocken klangen
모든 종이 울려요
Am Tag, als Conny Kramer starb
코니 크라머가 죽던, 그 날
Und alle Freunde weinten um ihn
그리고 모든 친구들이 그를 위해 울었죠
Das war ein schwerer Tag
정말 힘든 날이었어요
Weil in mir eine Welt zerbrach
왜냐면 내 안의 세계가 부서졌거든요

Beim letzten Mal sagte er
마지막에 그는 말했어요
“Nun kann ich den Himmel sehen”
“마침내 지금 하늘을 볼 수 있어”
Ich schrie ihn an: “Oh komm zurück!”
내가 그에게: “오 돌아와!”라고 외쳤죠
Er konnte es nicht mehr verstehen
그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Ich hatte nicht einmal mehr Tränen
나는 더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었죠
Ich hatte alles verloren, was ich hab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어요
Das Leben geht einfach weiter
삶은 계속 될거에요
Mir bleiben nur noch die Blumen auf seinem Grab
나는 그의 무덤 위에 있는 꽃들과 머무를 뿐이죠

x. 불특정 다수가 공유하고, 제게 욕설이나 협박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 불편해서 부득이하게 포스팅에 음악이나 비디오 링크를 포함하여 포스팅하고 있습니다. 공유를 원하시면, 내용을 복사하시면 되고, 태그만 따로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ㅡ 본 글은 살인범의 동기가 밝혀지기 이전에 작성된 글 입니다.

ㅡ 본 글은 직썰에도 편집되어 실렸습니다.

정치 스펙트럼, 페미니즘, 음악, 문화운동

잘못을 지적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일단 배제하는 것으로는 아무 것도 안 바뀔거다. 반성의 기회도 주어야겠지만, 그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성주의, 페미니즘 밴드의 등장이다.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담긴 음악이 생기기 전까지는 “들었어? 그 밴드 멤버가 데이트 폭력을 했대”, “그 밴드는 여성혐오 밴드야” 수준의 이야기만 공허하게 맴돌거다.
 
지금 이 밴드들에 문제제기 하는 사람들 중 Riot Grrrl이나 페미니즘,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밴드나 음악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감히 추측컨데 열에 하나정도 밖에 없을거라 생각한다. 왜냐면 빌어먹을 한국 음악씬의 유구한 전통이 정치와 음악을 떼어놓기였기 때문이다. 간간히 이주노동자, 새만금, 대추리 등의 이슈에 연대 공연을 하던 밴드, ‘익스플로드’는 이른바 진보정당 사람들에게 의해 제대로 들려지지도 않은채 음악이 시끄러워 폭력적으로 들린다며, 곡의 의도와 관계없이 배재 됐었다. ‘데들리 태권도 보이’가 마초이즘을 사정없이 비꼬은 가사도 도리어 여성혐오라며 배제 되었다. 기준은 그들의 취향이었고, 이러한 마이너 음악들은 너무 정치적이라는 이유거나, 너무 마이너한 익스트림 음악이란 이유로 오래 전에 배제 되었다. 실제로 연대를 꿈꾸던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진보정당들의 마이너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제스쳐를 통해 포지션을 취하고 싶을 뿐, 실제로는 그런 스탠스가 아니라는 것. 평등한 착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지, 실제로 평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일례로 진보정당 내에도 새누리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파벌, 계급, 학벌주의가 있다.
 
아무튼 한국에도 2000년대 초중반 두어 밴드가 Riot Grrrl을 바라보고 있었긴 했다. 결국 그와는 거리가 생기거나 소리 없이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아나코, 크러스트 펑크 씬을 이야기 하자면, 북미에서나 유럽에서는 여성중심의 아나코, 크러스트 펑크 페스티발이 있다. 아나코, 크러스트 펑크 페스티발이 아니더라도 여성중심의-, 성소수자 중심의 연대 이벤트, 파티들이 곧잘 열린다. 성별에 구애 받지 않고, 이성애자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다.
 
그럼 당장 이런 파티를 열기만 하면, 만사해결 되는 일 일까? 아니, 그 전에 주체적이고, 조직화된, 학습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페이스북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여혐들을 패주겠어’ 하는 마음만으로는 현실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앞선 사람들 이외에 또 어떤 누군가가 여성혐오를 저질렀다고. 그럼 또 다시 그 사람을 배제 시키는 것에서 만족 해야하는 걸까?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여성혐오에 “안돼!”라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내게 누군가를 배제 시키는 일이란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다. 중학교 때, 도덕 교과서의 모순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나에게 발언권을 뺏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 뒤에 서있게 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발언을 하거나 발표할 기회를 갖을 수 없었다.
 
 
늦기야 했지만, 이를테면 나는 선거 전 새누리당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여성범죄, 청년실업 문제에 관한 위원회를 당사자들과 함께 만들고, 관련 법안 입법을 약속한다면, 더민주당이나 국민의당,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을 선택하지 않고, 새누리당에 표를 던지겠다고. 나는 이것이 정치라고 본다. 좌파정당들은 대개 공약 실현 의지만 있지, 실현 가능성이 낮다. 그런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보다 여당에게 요구를 하고, 여당을 바꾸는 일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려면 더민주당의 지금과 같은 좌파 이름표를 단 우파 스탠스를 보이는 삽질이 필요하다. 어차피 둘다 국회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표를 구걸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정당들이므로 새누리당에게 딜을 해볼 수 있지않나. 물론 한국 거대여/야당들은 선거철에만 장사를 하는 정당들이란 변수가 있지만..

정의당, 중식이밴드, 낙인찍기

조선시대도 아니고, 집단이 개인을 혐오로 낙인찍어 내리기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정의당의 선거운동이 좋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패배하는 젊은 남성의 피해의식의 자조적인 이야기가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이의 제기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여성혐오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이런 식의 찍어내리기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중식이는 이 노래를 통해 어떤 특권을 얻었는가. 정의당은 중식이의 노래를 통해 어떤 특권을 얻었는가.
 
나는 이런 일을 목격할 때마다 인간 자체에 회의감을 갖는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라는 헤겔의 말만을 허공에서 채집할 뿐이다. 단 한달 간, 죽을 힘을 다해 민폐 끼치기 위해 수 년을 땅 속에서 잠드는 매미가 된 느낌이랄까.
링크의 본문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중식이 밴드가 ‘때론’ 여성 혐오적이라는 혐의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현재 비판받고 있는 지점이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은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딱히 중식이 밴드를 감싸려고 한다기보다, 비판의 타격을 정교하게 설정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루뭉술하게 비판하다가 비판 전체가 부인되고 조롱받는 게 싫기도 하고.

먼저 비판을 받고 있는 네 곡, [야동을 보다가], [아기를 낳고 싶다니], [선데이 서울], [좀 더 서쪽으로]를 중심으로 말해보고 싶다. 위근우 씨가 해석의 문제는 결국 얼마나 성실하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다.’라고 말했듯 [1], 조금은 성실하게 해석해보고자 한다.

중식이 밴드, 논란의 곡들

[야동을 보다가]

내가 처음 중식이 밴드를 알았던 것은 몽키 비즈니스라는 경복궁 근처의 한 라이브 카페였다. 그때 나는 [꽃과 벌]의 공연을 하러 갔었다. 우리 차례가 끝나고 좀 지나서 [중식이 밴드]가 올라왔다. 그때 처음 [야동을 보다가]를 들었다. 그때 첫 감상은 ‘고흐의 소로우 같군.’이었다.

 고흐, Sorrow (pencil & ink)

고흐가 한 매춘부를 그린 그림이다. 제목은 [슬픔]이다.

축 처진 가슴과 부른 배, 주름지고 망가진 몸매, 얼굴은 보여주지도 않고, 자세는 일반 그림에서의 여성 모델이 취할 법한 아름다운 자세도 아니다. 르네상스에 유행하던 것처럼 여신으로 그려주지도 않았다. 왜? 매춘부라서? 어리지 않아서? 몸이 안 예뻐서? 그래서 여신으로까지 그릴 가치가 없어서?

화가가 자신이 사랑하던 연인을 그린 그림이란 걸 몰랐다 하더라도 [2], 적어도 이걸 그린 화가가 모델이 매춘부라는 사실과, 망가진 몸매를 판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린 이걸 매춘부를 비하하는 그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흐는 흉한 점을 미화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그림으로써 그녀의 슬픔과,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야동을 보다가]의 가사에는 여러 개의 감정의 흐름이 교차되는데, 전 여자친구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야동을 찍고 배포한 놈에 대한 분노, 카메라를 통해 눈을 마주치는 순간 현실을 마주하기 힘들어하는 고통, 자신이 그것을 보고 있다는 자각과 부끄러움이다. 이 감정들은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 사람답게 갑작스럽게 교차되곤 하는데, 이 기법이 매우 세련되었다.

잠시 나의 눈을 의심했어, 네가 앞에 나타나니까. 잠시 커버렸던 나의 그것도 고개를 숙이며 울었어.
첨엔 네가 아닐 거란 생각에, 멍하니 널 쳐다보다가 유두 옆 쪽에 큰 점이 있더군.
맞아 기억나는데, 너의 유방 삼국지. 나의 전 여자친구의 야동.

손으로 가린 얼굴, 설레어 아는 얼굴, 이제는 늙어버려 주름이 늘었구나.
그래도 예쁜 얼굴, 그리운 아는 얼굴, 내 품을 떠난 너는 나쁜 놈 만났구나.

조용히 카메라를 보는 너, 모니터를 보는 나.
우린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전혀 상관없는 남이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너를 사랑했던 내가, 그때 그 시절 네가 떠올라.
담배 꺼내 물어봐. 한숨에 연기 뿜어봐.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전혀 상관없는 남인데, 왜 자꾸 성질이 나지?
너를 사랑했던 나는, 지금 화가 나서 가슴이 타올라.

아직 나는 백수로 살고 있어,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직 술 먹으면 개가 되지, 너와 헤어진 지금도.
‘너는 나랑 헤어지길 잘했다’ 생각했었는데도, 너의 남자친구는 씹할 놈인 것 같아.
얼굴 찍지 말래도, 지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카메라를 보는 너, 모니터를 보는나.
우린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전혀 상관없는 남인데. 왜 자꾸 성질이 나지?
너를 사랑했던 내가, 그때 그 시절 네가 떠올라.
담배 꺼내 물어봐, 한숨의 연기 뿜어 봐.
서로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전혀 상관없는 남인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너를 보고 있는 나를, 아마 잊었겠지 나를.

카메라를 보지 마, 그런 눈을 하지 마. 네가 다른 누군가와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지 마.
왜 자꾸 성질이 나지?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 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
네가 나를 떠나 만난 사람, 존나 작은 변태 새끼야.
야동 보는 나도 뭐 그래. 나는 외로워서 그래. 밤에 잠 안 와서 그래.
그래..

고흐가 흉한 모습 그대로 그림으로써, 그녀의 슬픔과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달한 것처럼, 중식이도 어떤 기막힌 상황을 설정하고 그 상황을 그대로 서술하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의 슬픔을 전달했다.

화자는 전 여자친구에 대해 연민을 느꼈고, 야동을 찍은 놈에게 분노했지만, 심각한 범죄 피해 현장을 보고 있다는 파악까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그녀 자살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있나?’ 정도를 걱정할 레벨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연민은 ‘나쁜 남자 만났다’로 말할 만큼 어리석고, 분노에는 지지리 못나게도 ‘질투’가 섞여 있다. 범죄 현장을 관음하고 앉았다. 그러니까 이 화자는 어리석어서 속이 터지는 동시에, 그래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화자의 정서 레벨이 감상하는 이보다 낮게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 스토리에서 흔히 사용하는 캐릭터 기법 중에 하나다. 중식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는 훌륭하게 연민을 이끌어내는 반푼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사형 당하러 가는 길의 아Q가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구경꾼들 앞에서 노래 좀 불러야 멋진데’만 걱정하듯이.

리벤지 몰카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남에겐 일상의 공포로 다가오는 심각한 범죄적 일을, 자신의 예술적 영감으로 이용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안이한 소재 선택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 비판은 이해하지만 그런 소재를 선택했기 때문에 웃음기 하나 없이 심각하게만 다뤄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코미디 영화가 심각한 사회 범죄를 다루며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드는 기법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

아Q는 불쾌하고 못난 놈이지만, 그래서 연민을 일으킨다. 그는 권력자에게 굽신거리면서, 지나가는 여승의 머리를 만지고 강제로 희롱하며 분풀이를 한다.

그래서 난 이 노래에 대해서는 중식이가 뭘 고쳐야 한다고, 뭘 잘못했다고까지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피해 여성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건 사실이지만, 화자가 밤에 혼자 야동을 보고 있다는 설정의 어리석은 사람이니까. 그런 설정 자체는 현실 반영이니까. 설정이 그러니, 여기에 균형감 있고 적절한 반응을 할 줄 아는 화자가 등장해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야동을 보다가]라는 작품이 충분히 있을 법한 -100만 소라넷 한국 사회에서라면 더더욱 개연성 있는- 상황에서의, 가상의 화자가 설정된 작품이란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p.s )이 가사를 가지고 ‘남자들만 아는 찌질함과 가슴 아픔’ 운운하는 사람을 피할 수 있는 리트머스도 되고 말이다. 고흐의 [슬픔]을 가지고 ‘애인이 몸 파는 걸 바라보는 능력 없는 나<-‘를 슬퍼할 놈들 말이다.

이 가사에서 속 터지는 포인트는, 이는 이 가사 속 화자가 미욱하고 어리석고 상황 판단을 못하고 찌질한 캐릭터라는 걸 일관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발생한다.

처음엔 자기가 받은 야동이 전 여친이란 걸 막 깨달았을 때에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을 못하는 듯, 당시 여친과 사귀던 시절의 농담이었을 ‘유방 삼국지’란 단어를 쓴다. 여성은 최악의 범죄를 당한 심각한 상태인데, 말장난 같은 유방 삼국지나 운운하며 정말 내 전 여친인지 확인하는 모습은 속이 터지는 동시에, 얼마나 가사 속 화자가 미욱한 캐릭터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남의 범죄 피해 장면을 보며 저 혼자 갑자기 그리움에 빠져 버렸다던가, 범죄자한테 꼴랑 ‘나쁜 놈 만났다. 씹할 놈인 것 같다’로 그냥 나쁜 남자 취급을 한다던가. 그 와중에 그 나쁜 놈이랑 섹스하는 것에 대해 질투하면서 내 것이 더 크다며 정신 승리하려는 지지리도 못남까지.

그러다가 갑자기 자각한다. 그간 ‘일반인 야동을 받아보던 자신은 뭐 다른 놈인가?’ 하는 각성이다. 그러나 솔직히 반성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설정된 ‘찌질한 캐릭터’가 할 법한, 모호한 변명으로 끝을 맺는다. ‘나도 뭐 그런 놈이긴 한데, 난 외로워서 그래, 밤에 잠 안 와서 그래. 그래…’

마지막에 ‘그래…’를 한 번 더 쓰며, 마치 이 초라하고 궁색한 변명 외에 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이 노래도 끝맺는다.

[아기를 낳고 싶다니]

[아기를 낳고 싶다니]는 화자가 왜 결혼과 아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가를 직설적으로 말하는 가사다. ‘삼포세대’ 정책에 예민한 정의당이 선택하기 알맞은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가사에서는 아기를 낳고 싶다고 말하는 여친에게, 남성 화자가 우리가 왜 아이는커녕 결혼도 할 수 없는지를 속사포처럼 쏟아내고 있는데, 거기에 사회가 날카롭게 반영되어 있다.

아이를 낳고 싶다니, 그 무슨 말이 그러니? 너 요즘 추세 모르니?
헤어지잔 말이 아니야. 나 지금 네가 무서워. 너 우리 상황 모르니?
난 재주도 없고 재수도 없어.
집안도 가난하지, 머리도 멍청하지, 모아 둔 재산도 없지.
아기를 낳고 결혼도 하잔 말이지? 학교도 보내잔 말이지?
나는 고졸이고 너는 지방대야, 계산을 좀 해 봐.
너랑 나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어. 뭐, 애만 없으면 돼.
이대로 우리는 계속 사랑하며 살기로 해.

맞벌이 부부 되면 집에서 누가 애를 봐? 우리는 언제 얼굴 봐?
주말에 만나거나 달 말에 만나거나, 뭐 다들 그리 살더라.
아기를 낳고 나면 그 애가 밥만 먹냐? 계산을 좀 해 봐.
너랑 나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어.
너 개도 못 키우면서 주제에 우리가 무슨 누굴 키우냐?
만약 애가 커서 대학을 갈 때쯤 난 이 세상에 없겠지.
그때 나의 보험금 탔을 때 그 돈으로 둘이 먹고살겠지.

나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마. 나도 막 살아온 걸 후회한다고.
책임지지 못하면 안아주지 마. 지금도 내 인생 하나만으로도 벅차.
만약에 내 삶에 여유가 있을 때, 나의 삶에 여유가 있을 때
우리 둘만의 아기를 낳겠지…

가사 자체의 예리함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비판하는 이들이 뭘 말하는지는 들어볼 가치가 있다. 한국은 결혼과 출산 후 여성의 경력이 대부분 단절된다. 그런데 그런 건 ‘아몰랑’ 하는 듯이 아이 낳자고 조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설정상 그리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기를 낳고 싶다니]의 뮤비에 나오는 오프닝. 여성 쪽이 해맑게 설정되어 있다. 

여성이라고 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고, 여성이라고 다 모성이 있고, 여성이라고 다 웨딩드레스가 로망이고, 여성이라고 다 따뜻한 가정이 꿈이고, 날 때부터 살림이 체질이겠는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야망이 있고, 일에 대해 성취욕이 있고, 경쟁심이 있고, 자아실현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그간 얼마나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던가. 얼마나 많은 미혼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인생의 지겨운 방해물로 생각하는지 몰라줘도 너무 모른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자료들만 봐도, 여자들이 더 결혼을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하다. 그럼에도 ‘여친이 나한테 결혼을 조르면 어떡하지 ㅎㅎ 난 아직 한 사람한테 매여 살 생각 없는데 ㅎㅎ 아직 더 자유분방하게 놀고 싶은데 ㅎㅎ 결혼한 선배들이 그러는데 결혼은 무덤이라는데 ㅎㅎ 그러고 보니 넌 언제 결혼해? 여자는 너무 늦으면 시집 못 가, 슬슬 긴장 타라ㅎㅎ’라는 한심한 농담을 웃기다고 시전 하는 남자들에게 웃어주기까지 해야 하는 사회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여성들은 결혼과 아이가 로망이잖아요?’라는 식의, 고민도 없고 반성도 없는 구태의연한 캐릭터 설정에 신물이 나 있고 그만큼 예민하다. 그런데도 이 곡을 선거송으로 채택하는 순간, ‘여성들은 결혼과 아이가 로망이지만, 남자들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 삼포세대의 (남성) 청년들 힘내라!’란 의식에 생각 없이 탑승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의당, 너까지 이러기임? 하는 배신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아기를 낳고 싶다니]가 선거송이 아닐 때는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라도 결혼과 출산을 원하는 여자가 있을 수 있으며, 그녀들은 ‘반 페미니스트’가 아니며, 그녀들의 그런 욕망을 후려쳐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결혼과 출산이 한국에서 왜 힘든지를 말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고. 듣는 대상이 여친으로 설정된 건 아쉽지만, 또한 그게 형식미적으로 최선책이었던 것도 인정한다. 부모님에게 ‘아이를 낳으라니요. 아버지 요즘 추세 모르세요?’ 한다면, 품짝거리는 촌스런 내 노래 특유의 분위기가 망가지니까! 궁지에 몰린 남성이 여친을 무서워하며 변명만은 청산유수처럼 줄줄 쏟아내는 웃픈 상황으로 읽으면 그만이다.

다만 이걸 정의당 선거송으로 채택된다면, 설명해야 할 대상은 중식이 밴드가 아니라 정의당이다. 나는 중식이 밴드에게 이 곡으로 죄를 묻는 건 반대한다.

물론 정의당 입장에서는, ‘아기를 갖고 싶다니, 네가 가사 반 분담할 거고, 나 회사 다닐 동안 네가 애를 볼 거고, 임신했다고 회사 잘리면 다른 회사 알아봐 줄 수 있겠냐?’고 말하는 여성의 곡은 한국 사회에서 없으니, 다른 선택지도 없었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정의당은 애초에 미처 몰랐다. 정의당은 ‘몰랐어염…’ 해선 안 된다. 중식이는 ‘몰랐다’고 해도 되지만.

여담이지만, 예전에 중식이 밴드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여자 친구가 ‘결혼은 힘들겠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라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을 때, 중식이는 옆에서 죄지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는 그의 사죄문에서처럼 정말 단순하게 자기의 상황을 기반으로 곡을 썼고, 이 곡을 정의당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저 ‘구태의연한 남녀 역할 설정이 촌스럽다’가 죄의 전부였을 것이다.

[선데이 서울]

논쟁적인 [선데이 서울]이다. 소녀들 이야기만 없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가사다.

친구야, 꿈이 있고 가난한 청년에겐 사랑이란 어쩌면 사치다.
나는 힘없는 노동자의 자식, 낭만이란 내겐 무거운 사치다.

빚까지 내서 대학 보낸 우리 아버지, 졸업해도 취직 못 하는 자식.
오늘도 피시방 야간 알바를 하러 간다. 식대는 컵라면 한 그릇.

빚까지 내서 성형하는 소녀들, 빚 갚으려 꿈 파는 소녀들,
빨간 집 붉은빛이 나를 울리네.

그는 스스로 흙수저 밴드라는 별명이 싫다고 했지만, 흙수저의 인생이 직설적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소녀들은 ‘빚내서 성형하고 그 빚을 갚으려고 매춘을 하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중식이는 그 소녀들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여기까지는 고흐의 [슬픔] 같다.

하지만 이 곡은 그것과는 다르다. 이 곡은 이 사회에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 전체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소재의 선택은 작가의 세계관이다. 어떤 소재를 취사선택하는지에는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중식이는, 남성 청년의 아픔으로써 알바를 하며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선택했고, 아버지 세대의 아픔으로써 빚내서 자식을 대학 보낸 상황을 선택했고, 여성 청년의 아픔으로써 성형한 뒤 빚을 갚으려 매춘을 하는 상황을 선택했다.

이 곡을 비난하는 이들은 그래서 ‘소재 선정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성도 똑같이 똑같은 것으로 아파한다. 야망이 좌절되고 가난해서 아파한다. 그런 점에서 재봉질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사계’가 훨씬 세련되고 쌈빡하게 느껴질 정도다.

만약에, 외모 자본의 유무가 여성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는 상황이 설명되어 있다면, 예를 들어 ‘취업 성형을 위해 빚을 내는 소녀들’ 정도로만 가사가 섬세했더라도 이런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성형에 대한 소재를 사용할 때는, 외모 자본이라는 맥락을 거세하면 한없이 여성에게 불공평해진다. 중식이가 어떤 의도로 이 가사를 썼는지는 알 수없지만, 설명 없이 현상만 취하는 바람에 불편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음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중식이 세계에서의 여성이란 ‘빚내서 성형하거나 출산하자고 조르는 여자들이 전부’라는 분노도, 그래서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해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의 소재 선정이 불공평해서 불편함을 느끼지만, 있을 수 있는 가사라고 생각한다. 그냥 그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하자면, 그런 소녀들이 자기가 보기에 제일 불쌍해 보여서 소재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다분하고. 다음엔 안 그랬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여기 힘들다고 생각없이 던져대는 돌에, 돌 들 힘도 없는 사람들이 맞아죽고 있는 판국이 됐으니까.

[좀 더 서쪽으로]

너에게 밥을 사고 술을 사도, 거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넌 내게 맘을 절대 안 줄 것 같다.
너에게 꽃을 주고 반지를 줘도 아무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넌 내게 맘을 절대 안 줄 것 같다.
넌 비싸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고 싸구려가 아니라 말한다.
난 말이 통하게 명품을 줘도 쉬운 여자 아니라 말한다.

얌마 내가 이래 봬도, 저기 저 서쪽을 향해 가면 갈수록 훈남이야, 나 집에선 장남이야.
내 고향은 경남이야, 그래 내가 너무 비만이야, 남들보단 병맛이야, 그래서 난 총각이야.
어쩔 거야, 정나미가 떨어져도 내 맘이야.
이것도 난 낭만이야, 인생은 마 실전이야, 이번에는 정말이야, 여기서는 양반이야.
난 말이야 중년이야, 좀 있으면 마흔이야, 죽기 전에 마 나도 장가 한 번 가야지.

세우지 않아도 오똑한 코와 독특한 향기, 똑똑한 그녀.
말하지 않아도 내 맘을 아나? 나를 껴안아 영어도 몰라 나.
시골에 살아도 꺼리지 않아, 작은 일 하나, 착한 너와 나.
가난히 살아도 아프지 않아, 슬프지 않아 날 사랑하나 봐.

개인적으로 위의 세 곡은 여성 혐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 창작의 범위 안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사라고 생각했다. 중식이는 인디 뮤지션이고,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 자체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 곡은 아무리 봐도 논쟁적이다.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 한국 여성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된장녀 클리쉐로 묘사했다. 비싸 보이기 위해 치장하고, 싸구려가 아니라고 말하며, 명품을 선물해도 쉬운 여자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까지, 클리쉐도 이런 클리쉐가 없다. 나중에 20대 꽃다운 네팔 처녀와 결혼해서는 ‘세우지 않아도 코가 오뚝하고, 똑똑하고, 시골에 살아도 꺼리지 않고, 가난히 살아도 날 사랑해주는 예쁘고 착한 여성’이라서 행복하다고 노래한다. 전형적인 된장녀와 개념녀의 구분이다. 추가 설명은 유튜브에 있다 [3].

그녀들이 왜 거절했는지는 자세히 알 생각도 하지 않는다. 화자가 어떤 사랑을 나누고자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저 가진 재화로 교환이 되는 여성과 안 되는 여성, 오로지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뉘어 있을 뿐이다. 이 가사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했다 해도, 표현이 너무 자기중심적이지 않은가? 그녀들을 오로지 교환 가치로만, 재화로만 묘사한 건 중식이라는 한 뮤지션이지 않은가?

나는 이런 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소녀를 공략하는 미연시 게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군대 간 여성이 개념녀가 되어가는 과정을 판타지와 모에로 점철한 작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처럼. 불쾌한 현실을 아무런 고민 없이 뚝 끊어서 보여주는 기안84의 웹툰처럼.

못생긴 여선배가 예쁜 후배들을 더 미워하며, 그 이유는 남자 선배들에 있다고 표현된 기안84의 웹툰

개인적으로 중식이 밴드에서 보이는 일부 안일한 현실 반영을, ‘통찰이 없는 관찰’이라고 부른다. 통찰 없는 관찰류의 작품들도 나름의 역할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정한다.

중식이의 다른 모든 곡을 좋아하고, 중식이 밴드를 아낀다고 해도, 이 곡만은 더는 안 듣겠지만.

적어도 어떤 지점에서 분노하는지는 알았으면 한다

나는 중식이를 비판하는 화살들의 일부는 타깃 범위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만,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어떤 지점을 비판하는지는 다른 사람들도 좀 알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다.

중식이의 곡들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는, 오랫동안 여성주의자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그간 모든 예술 작품에서처럼 남자들이 유독 자신만을 연민하는 모습 그대로란 점이다.

‘산업화 시대의 가장으로서 능력 없는 아버지를 그린 뭐’ 라던가, ‘능력 없어서 처자식을 때리면서 때리는 자신을 더 연민하는 아버지’라던가, ‘다이아몬드에 팔려간 애인을 후려 차는 순정남’이라던가, ‘마음 약하던 소년이, 사랑하던 소녀가 강간당하는 걸 보고 각성해서 이방지가 됨’ 이라던가, 우린 이미 지긋지긋하게 많이 보아왔다.

여자를 이용해서 제 비극만을 전시하던 남성 입장에서의 작품은 동서고금간의 력사가 유구하기도 하다.

남성이 여성이나 어린 자식을 장치로 삼아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는 구도를 잡고 어리광을 부려대는 작품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으며,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신호를 얼마나 많이 보내왔는가. ‘작가가 남자니까 당연히 남자 입장에서…’라는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변명도 얼마나 지겨운가. 입장이고 자시고 애초에 여성을 자기 연민, 또는 변명의 장치로 좀 써먹지 말라고.

그런 세계에서 여성은 창녀 아니면 성녀밖에 할 게 없다. [좀 더 서쪽으로]에서처럼 말이다. 많은 남성 예술가들이 헛발질을 하는 것은, ‘나는 여자를 좋아하며 성녀로 숭배하는데 왜 여성 혐오냐’는 것이다. 일단 여성을 주인공의 각성을 돕거나 위로하기 위한 장치, 물건,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여성 혐오의 혐의를 각오해야 한다.

결론

나는 중식이 밴드를 아낀다. 그 특유의 찌질한 감성도 좋아한다. 쿨하지 못한 냄새도 좋아한다. 하지만 [좀 더 서쪽으로] 같은 가사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다. 다만 언급했듯이 이런 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그리고 어떤 가사들이 불편하다고 지인들에게 밝힐 정도로의 활동 외에는, 더 크게 벌일 생각도 없다.

다만 중식이의 곡을 선거송으로 사용할 때는,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중식이가 아니라 당에서. 왜냐면 중식이는 창작물에서 가능한 기법인, ‘반편짜리 화자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용납 가능한 설정’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게 그리 냉철하고 균형감각 있는 목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책을 위한 목소리라면 적어도 공평해야 할 것 아닌가. 정의당이 그것을 ‘왜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 그 정도의 요구는 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와서 ‘미처 몰랐어염…’이라고 말해서 탈력이긴 하지만.

그리고 적어도, 중식이 밴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는 조금은 진지하게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주었으면 한다. 중식이 밴드나, 아니면 그 밖의 사람들도. 하지만 그 모든 걸 중식이가 다 책임져야 할 것으로 몰리는 것 같은 분위기는 우려스럽다. 중식이 곡들 중 일부 가사가 ‘구태의연하게 성차별적 설정이 안일하다’고 창작물에 대한 문법으로 평론하는 것과, 중식이 밴드 자체가 여혐 밴드라고 낙인찍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반대로, 가사에 대한 해석도 조금 더 성실했으면 한다. 어떤 비판들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중식이에게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다시 말하지만, 창작물을 비평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도 없다. 비판의 범위 설정을 온당하게 했음에도, 정의당 당게에서 ‘예민하다!’며 실드를 친다면 잘못해도 한참 잘못하는 것이다.

한참 잘못하고 있는 중. 

창작물이 구태의연한 것 자체는 당연히 비판될 수 있다. 창작물이니까! 그리고 창작물에서 읽을 수 있는 ‘그간 한국 남성 창작자들의 반성 없고 고민 없던 의식’을 끄집어 내보여주는 시도도 막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걸 막으려 드는 순간, 중식이는 그저 ‘의식에 한계가 좀 있던 인디 뮤지션’에서, 한국 남성의 견고한 카르텔의 방패가 되고, 모든 공격은 중식이게 가서 꽂힐 수밖에 없게 된다.


세 단락 요약 :

1. 중식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조금은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그들을 페미나치라고 하는 순간, 모든 건설적인 토론은 끝난다.

2. 창작물로서, 중식이의 언어 일부는 여성혐오 혐의를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자체는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물에 대한 비평과 사회적 책무에 대한 비평은 구분되어야 한다.

3. 어떤 창작물을 선거홍보물로 이용할 때는 새로운 기준이 적용된다. 그래서 새롭게 생기는 책임은 져야 한다. ‘일부를 위한 은밀한 카타르시스’로만 존재하고 있던 중식이를, 사회적 메세지의 위치로 끌어올린 건 정의당이 아닌가?


원래 브런치에는 스타트업과 업무, 비즈니스 등에 관련된 이야기로 작가를 신청했는데,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 블로그가 이것밖에 없음을 깨닫고 여기다 씁니다… (브런치 팀 죄송합니다)

Woori Alsim님의 메갤에 대한 입장에 대해

1. 인권이란 단어를 꺼낼 필요조차 없다. 혜은씨가 이런 의도적인 집단 린치의 희생양이 될 이유는 없으며, 해당 폭력행위를 중지키 위해서는 전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방법을 더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다. 더이상 인권의 영역이나 운동의 방향성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집단폭력, 범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메갤을 페미니즘과 결부해서 이야기 하시는 분들을 나로서는 폭력의 방조자로 볼 수 밖에 없다.

+ ‘200명이나 가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런 한가한 소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이해도 안되지만, 지금의 가해를 당연한 의사개진으로 보시는 분들께 돌려 드려야할 것은 유감과 함께 법적 처벌뿐이다. 굳이 벌금이 아니라 수갑차고 신체가 구속되는 것을 원하신다면, 그렇게도 해드려야 한다. 2명이 아니라, 무려 200명이 집단 괴롭힘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지금 페미니즘과 메갤 사이의 언어및 행동은 하등 관계가 없다. 이대로 두면, 진짜 누가 수갑차고, 누가 죽어나야 끝나는 비극을 우리는 뉴스 헤드라인을 통해 보게 될 것이다. 이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집단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모두가 이 집단 폭력의 가해에 연루되었거나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걸 지금이라도 상기해야만 한다.

3. “실험은 끝났다”라는 말로도 끝낼 수 없었던 실험, <Die Welle>에서 다뤄진 파시즘 실험을 통해 어떻게 파시즘이 발현하는지는 모두들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집단주의, 소속감 따위를 통해 어떻게 파시즘이 발현되고, 범죄까지 이어지는지 내 눈 앞의 현실에서 목도할 수 있으리라 생각치 못했지만, 지금 그 일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써클 내부에 있으면, 내부 전체를 볼 수 없다. 되돌릴만큼 여유가 없는 것은 이미 열성적 가담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4. 나는 지난해 9월 초, 덕분에 메갤에서 완전히 관심에서 끊었다. 그리고 이후 11월에는 내가 메갤의 연장선상인 소수자-친화 하부 커뮤니티를 떠났다. 그 이유는 메갤이 전투적으로 싸우지 않아서가 아니었고, 페미니즘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아서만도 아니다.

소수자-친화 커뮤니티였지만, 구성원들은 경쟁적으로 pc함을 다루었고, 다들 몸이라도 투신할 것처럼 신앙간증이 이어졌다. 운동과도 전혀 관계없는 친목 위주의 집단주의였고, 이 소속감이 가져다 주는 힘에 큰 힘을 입고, 구성원들을 커뮤니티 내부에서 하나의 목소리만이 가능해졌다. ‘내부에서의 인정투쟁’을 위해 커뮤니티 밖, 특정 다수를 향해 레이블링 하기 시작했다. 소수자들을 차별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친 소수자 커뮤니티 안에서 주류 의견이 일정하게 고정-형성되고, 의견을 주고 받는 대화란게 사라졌다. 파시즘은 이렇게 소리 없이 시작된다.

5. 기본적으로 나는 이런 것을 운동으로 볼 수가 없다. 적어도 나는 마치 우월성을 자랑하듯이 세상의 모든 여성혐오 사례를 경쟁적으로 찾아 누가 더 페미니스트인지 겨루는 것이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의 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전투보다는 여성 권리의 당위성을 이해하는 동조자들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운동은 다르기 때문이다. 운동을 정화, 사상-문화적 전투라고 보았던 중국의 문화혁명이 초래한 결말이 기억하면, 우리가 할 일은 당연한 너무도 분명해진다.

6. 지금 메갤에는 학습이나 자정및 조직능력이 없고, 행동과 적만이 존재한다. 베를린에도 노동절만 되면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운동과 시위의 간극을 이해하지 못한 10대 청소년들이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는 곳에 난입해 투석전을 하고, 화염병을 던지고, 은행 유리창을 깨면서 ‘혁명’을 외치며 자랑스러워 한다. 이들은 왜 충돌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 물리적 투쟁에만 집중할 수록 손쉽게 우리가 왜 싸우는지를 잊을 수 있다.

이들이 외치는 ‘혁명’에 의해 운동과 시위는 오락거리로 전락한다.

7. 다시 메갤로 돌아와서 정말 메갤 때문에 누가 죽어나가야 메갤과 페미니즘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는걸 마침내 인정할텐가. 페미니즘에 대한 스스로의 학습도, 조직도 없는 메갤에는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며, 페미니즘의 레토릭을 이용해 자신들을 권력화하는 맹신자들만 남았을 뿐이다. 지금은 파시즘의 혐의까지 함께 우리 모두 목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실험은 끝났다”라는 말이 왜 필요한지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 별개로 Woori Alsim님께서 ‘유사과학’에 불과한 ‘피해자중심주의’를 실제 이론처럼 서술하시는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 ‘피해자중심주의’, 유사과학에 불과하다. 대체 어느 나라의 사법부가, 대체 어느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런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단 말인가?

오히려 한국에서만 있는 ‘피해자중심주의’ 때문에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이 몇 년에 걸쳐 무죄가 증명 되었음에도 죽음에 이른 사건들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 피해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지만, 가해는 이렇게도 쉽게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 이들은 대체 이런 ‘명예살인’과 다를바 없는 이런 ‘유사과학’을 왜 인권 운동에 가져오는 것일까. 인권운동을 와해 시키시려는 의도가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종교에서 구원을 바라보고 계신 것일까.

++ 명예훼손, 모욕죄를 별개로 이 일에서 처벌 가능한 법령은 다음과 같다.
경찰관직무집행법 제6조(범죄의 예방과 제지)

경범죄처벌법 제3조
제 1항: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1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科料)의 형으로 처벌한다.
제 1항, 제 41호 (장난전화 등):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전화·문자메시지·편지·전자우편·전자문서 등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괴롭힌 사람
제 1항, 제 42호 (지속적 괴롭힘):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하여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잠복하여 기다리기 등의 행위를 반복하여 하는 사람

제 2항: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람은 2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의 형으로 처벌한다.

제 2항, 제 3조 (업무방해): 못된 장난 등으로 다른 사람, 단체 또는 공무수행 중인 자의 업무를 방해한 사람
제 2항, 제 4조 (교사ㆍ방조): 제3조의 죄를 짓도록 시키거나 도와준 사람은 죄를 지은 사람에 준하여 벌한다.

 

 

 

Woori Alsim 님 글 전문

<인권을 이야기하는 분들의 인권침해>
.
※ 이 글은 아래 언급한 그룹의 대표분들과 상의해서 수정한 내용입니다.
특히 학교에 전화통화했다는 부분 등에 대해서, 그룹 대표들과 상의하여 문장을 수정하였습니다.
.
저는 청소년들과 상담하는 일을 많이 합니다.
요즘 제가 가장 관심 있는 일은
성폭행 당한 청소년의 고소를 돕는 일입니다.
.
페이스북으로 도움 받은 분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중 한 사람이 홍혜은 님입니다.
.
단순히 제가 페친이라는 이유로
실제로는 친분이 없음에도
자문을 구했을 때 이 일을 많이 도와주었고,
지금도 도와주시고 있습니다.
.
제가 오늘 이 일 때문에 연락할 일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다가 황당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본인이 다니는 학교에 본인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학교와 학과장에게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찾아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
도대체 그분들이 어떤 피해를 어떻게 입었기에
그분들이 그렇게 까지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제가 이해하는 것은 홍혜은님이 쓴 글 중에
자신의 페이스북 개인타임라인에 쓴
‘소수자 인권을 무시하는 인권운동을
인권운동이라 할 수 있는지’를 문제제기하는 글 때문이었습니다.
.
이는 메갈리아 출신의 페미니스트라는 분들이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들과 댓글로 토론하던 중
남성들을 옹호하는 여성들에게 외모지적을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
그런데 이 글에서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최근 활성화가 되지 않는 것을
“메갈은 죽었다”고 말하거나
“(소수자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
이 발언으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크게 두 가지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
1. 메갈리아와 인터넷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메갈은 죽었다’는 말과
‘소수자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라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혔다.
.
2. 메갈리아에서 파생된 어떤 그룹이 여성혐오를 하는
남성들에게 홍혜은씨의 글을 본 남성들이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여
커뮤니티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기 때문에
홍혜은이 피해를 사과해야한다.
.
저는 개인적으로 홍혜은님이 평소에
남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자신의 신념에 대한 글을 많이 써오셨기 때문에
기분이 나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에 있어
소수자 인권을 이야기 무시하는 것은
인권운동이 아니라는 말은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개인타임라인에 올린
개인의 의견이 사과해야하는 피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또한 어떤 남성들이 공격해서
본인들 커뮤니티의 상황이
안 좋아졌다면 공격을 한 남성들의 문제인 것이지
왜 홍혜은님의 글이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
이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
저는 그분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그러나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생각의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그 이후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페이스북에서 어떤 비밀그룹을 만들어
홍혜은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본인들의 상처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
그 비밀그룹은 홍혜은과 대화를 위한
그룹이라고 써 놓았지만,
이 사안을 보는 자신과 다른 관점의 글이 올라오면
1분에 10~20개씩 비아냥과 악성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저도 어떤 분에게 초대되어
그 비밀그룹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
그 그룹에는 홍혜은님에게 사과를 요구하셨던 분들 중심으로 모아져서
현재는 200명의 넘는 인원이 그 그룹에 있습니다.
그중에는 홍헤은님에게 악감정을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분들을 대하는 모습은
대화를 하려는 분들의 모습이 아닌,
사이버 집단린치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분 그룹에 속한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고 특정인 분들이 주도한 것이었습니다.)
.
그 곳에서 어떠한 의견을 남길 수 있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연일 악성댓글과 메시지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게 되었고,
지하철에서 페이스북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 같고,
페이스북을 여는 것이 두렵다고 합니다.
하루하루가 죽고 싶다고 합니다.
.
그리고 얼마 전 이 상황과
본인이 생각하는 사건의 전말을 자신의 타임라인에 올리고,
자신에게 요구하는 사과가 무엇인지
공동의 입장문을 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피해가 무엇이고 어떤 사과를 요구하는지를
뚜렷하게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그 글마저도 비아냥과 악성댓글로 도배되었고,
거기에 해당 글은 어느 분의 페이스북 신고로 인해 지워져
정황설명을 위한 사진들을 모은 사진첩만 남게 되었습니다.
.
‘왜 글을 지웠냐’는 사람들의 말에
홍혜은님의 동생 분은
‘언니가 글을 지운 적이 없고,
누군가 신고한 것 같다.
언니가 다시 입장문을 올리고 싶지만
페이스북을 켜는 것이 두려워서 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동생 분에게도
악성댓글과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
심지어, 홍혜은님이 다니는 학교에도 전화를 해서
본인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전화를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홍혜은이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혔으니
책임지라는 말을 학교에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저는 전화를 건 분(들)은 해당 그룹에 속한 사람일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하구요.
홍혜은 씨는 내일 이 일로 인해 학교에 가야한다고 합니다.
.
그 분들 모두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해 사실은 명확하고, 그 분들 중에 일부가 그러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 사건을 보면서 저는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제기하시는 분들, 학교에 전화까지 거신 분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성평등 인권운동을 이야기하신다는 분들입니다.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좋은 분들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한 개인을 파멸하려고 한다는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
저는 자신의 피해를 주장하시면서
동시에 사이버폭력을 휘두르는 분들을 보면서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은
서울대에 다니던 어떤 이가
‘담배를 피며 이별을 통보한 것이 성폭력’이라고
말하며 성폭력 피해로 이를 학내에 고소했으나
이는 성폭력이 아니라 개인사적인 문제임을 밝히며
제소를 기각한 학생회장에게
피해자 중심주의를 이야기 하며 주변인들과
‘당신은 명예남성이고 2차 가해자야’라고 외치며
학생회장에 대한 언어폭력을 계속하여
학생회장이 자진사퇴한 사건입니다.
https://we.snu.ac.kr/index.php
.
청소년의 성폭력사건을 도와주면서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피해자중심주의는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피해사실 등이 분명하지 않은 사항에서
자신의 피해만을 주장하고 상대방을
가해자로 낙인찍는 피해자 절대주의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과연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개인의 일상을 파괴하는
인권운동이 유효한지 궁금합니다.
.
심적으로 충분히 고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낙인찍고 파괴하는 방법이 아닌,
중재자와 함께 생각의 차이를 이야기를 해보시고
실질적인 보상을 논의해 보셨으면 합니다.
.
아무쪼록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메갈리아에 대한 작가 낢의 대처

작가 낢의 공식 입장

 

나는 워마드가 끝이 아닐거라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왔고.. 워마드 이전에도 워마드가 나타날 것을 우려 해왔고…..

 

메갤의 반여성주의를 용인하면서 페미니즘을 외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을 뿐이다. 꼭 이런 일이 터져야만 자성의 목소리를 낼건가. 아니 자성도 아니고, 사실은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정도의 발뺌. 뭐, 명예훼손, 모욕죄 이런 수준이 아니라 기어코 누가 정말 이런 집단 폭력에 희생 당하고, 메갤의 누군가가 수갑 차야지만 변화를 해야한다고 말하시려나. 정말 2016년판 폭스파이어라도 찍겠단 말인가.

 

메갤을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고, 메갤이 조금 더 조직화된 운동을 하기 위해 비판을 받아들이고, 자성하고, 학습하고, 조직하자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 실수로 떨어트린 아이스크림을 보고 바닥에 널부러져 우는 아이 같아 안쓰러워 보일 뿐이다.

 

솔직히 메갤 통해서 페미니즘을 접근하게 된 사람이 많은데는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오히려 페미니즘을 곡해하고 편리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유아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동시에 마치 정의를 구현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고취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는 측은했지만, 지금은 한심하다. 투쟁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없다. 나의 고충을 들어줄 사람만 찾고, 나를 보다 낫게 대해줄 사람을, 그런 구원자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내일이 있겠는가? 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메갤의 반여성주의에 대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일체 비판을 하지 않은 젠더학 연구자 선생님들께 “대체 왜 그러셨어요?” 하고 묻고 싶다..

Great things never came from comfort zones

 

 

메갤 멍청이들이 반여성주의적인 행동을 하면서 꿋꿋이 페미니즘이라고 맹신하는 태도로 살아가면, 평생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읽지 않고 교회라는 우상을 숭배하길 떳떳이하며, 약자를 괴롭히고, 호가호인하는 교인이 되거나.. 언젠가 귀와 볼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아래로 떨구겠지.

 

모르고 실수하는건 부끄러운게 아니지만, 모르면서 뻔뻔하게 아는 척하는 것은 앞으로 스스로의 알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미안해야하며, 하찮아 보일지 모르는 이 작은 변화를 일구어내기 위해 있었던 수 많은 희생에 미안해야한다.

 

작은 변화.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유럽에서조차 민주주의는 불법이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병원과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사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독일에서 사민주의가 등장한 것도 고작 150년, 모든 남성의 참정권은 고작 1차대전, 여성도 참정권을 갖게되는 오늘의 민주주의 체제는 2차대전과 68혁명을 지나면서 가능해졌다. 이 작은 변화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고, 아직도 이 작은 변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이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시 메갤러들의 반여성주의적인 인식과 여성주의 문제로 돌아와서.. 여성을 위한 안전구역, 이른바 ‘핑크존’은 헌법이 보장하는 ‘누구나 어디에서든 안전할 권리’를 위배하고, 역설적으로 ‘여성은 특정 시설물, 구역에서만 안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위계폭력에서 발생하는 차별은 물론이고, 모든 폭력은 피해자의 부주의나 피해자가 약해서가 아니라 가해자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인데, 여성을 위한 안전구역은 마치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이 당연하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나는 대중교통 내의 노약자석을 반대한다. 노인들의 실버잡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노인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노인들이 약자로서 보호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사회안전망과 사회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인식으로 어디서나 안전하고 배려받을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지, ‘강제된 도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의 무게. 도덕은 법과 같이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매너없는 사람을 감옥에 쳐넣을 수 없듯이,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갖고있는 사람을 감옥에 쳐넣을 수 없으며, 오직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만을 감옥에 쳐넣을 수 있다. 도덕은 타의로 선택하는 행동이 아니라 하지않을 수도 있는데, 자의로 선택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한다. 도덕을 강제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자율성과 자유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 된다.

캐서린 한나에 대한 다큐를 보다

캐서린 한나에 대한 다큐를 보면서 상기되는 사람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공주 페미니스트’들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저항하려면, 보호받아야만 하는 예쁜 공주, 하우스 와이프 같은 여성이 되길 스스로 거부해야한다. 그렇지 않고서 그 같은 편견들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학교가 가기 싫어 가출하는 10대만도 못하기 때문에 별로 들어줄 가치조차 없다.

 

하위문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거야 얼마든 이해할 수 있지만, 서구의 페미니즘과 아시아의 페미니즘은 다르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애들은 정신차리라고 사력을 다해 따귀 한대를 때려주고 싶다. 그러는 동시에 김치남/백인남성 프레임으로 백인남성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실제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일 일뿐만 아니라 삼호쥬얼리호를 납치, 석해균 선장에게 총격을 가해 무기징역과 13~ 15년의 징역을 판결 받은 해적들이 한국 귀화를 희망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만약 아랍 여성들이 한국의 여성인권만으로도 만족한다며, 한국 귀화, 혹은 난민신청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백인남성의 구원을 기다리는 한국여성들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페미니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의 한국남자를 김치남으로 규정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김치남/백인남성의 프레임으로 백인남성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2등시민으로 규정받길 거부하고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2등시민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페미니스트 남성을 만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과 관련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반여성주의로 악용될 수까지 있다.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 해줘도 이해가 안된다는 년/놈들은 당신들이 구원을 바라는 서구남성-페미니스트들에게 “김치남이 이래서 저래서 백인남성과만 교제하고 싶다”면서 동시에 “내가 페미니스트다”라고 주장해보라 권하고 싶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 이따위 주장을 할리가 없겠지만, 백인남성에게 구원을 구하는 행동이 지금의 주장과 하등 다를게 하나 없다.

 

+ 흥미로운 사실은 캐서린 한나와 비스티 보이스의 아담 호로비츠가 결혼한 사이며, 아담은 종종 공식 석상에서 한나가 하는 라이엇 걸 무브먼트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아담의 비스티 보이스가 어떤 그룹인지, 캐서린의 비키니 킬, 줄리 루인, 르 티거가 어떤 그룹인지 안다면, 문화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힘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 알 수 밖에 없다. 이걸 모르는, 혹은 무시하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의 중요성’, ‘사랑과 평화’ 따위에 대해서는 나는 조금도 신뢰할 수 없다.

++ 90년대 초반 비키니 킬과 비스티 보이스는 언더그라운드를 강타한 마이너들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더이상 마이너가 아니라 한 시대의 가치로 자리 잡고, 다른 문화와 사상, 사고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독일에서 유학시 밥솥 문제

밥솥에 대한 질문이 계속 올라와서 케이터링, 워크샵, 그리고 키친클래스를 종종하는 입장에서 간략히 정보를 공유할까해요. 독일에서만 6년을 했습니다..

1. 냄비밥
물론 냄비밥 맛있습니다. 하지만 가스불이 아니라면 숙련자들도 조절하기 어려워서 종종 태워먹거나 설익게 되요. 그리고 가스불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요리와 같이 하다보면 바닥 긁는 일이 왕왕 생깁니다.

2. 독일전기밥솥
독일 전기밥솥을 2년가량 써봤는데, 잘 알려진 Tristar 제품은 보이는 크기와 달리 500그람까지는 밥이 되는편이지만, 그 이상의 양을 하면, 위에는 설익고, 아래는 누룽지 비슷하게 됩니다. 이유는 독일전기밥솥은 아무래도 밀시라이스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죠. 사용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욱 심해지는데, 바닥 부분은 누룽지라고 말하긴 애매모호하지만, 집에서 우리가 먹기엔 그런대로 괜찮아요. 물론 유럽 사람들 중에 누룽지를 아는 사람이 간혹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레스토랑에서는 절대 서빙 불가능해요.

온도를 감지하고 자동으로 보온으로 바꾸는 센서 때문에 여러번 연달아 밥을 하면 설익는 빈도가 더 늘어납니다. 물론 일반 집에서는 손님들 많이 오실 때 말고는 걸 일이 없겠지만요. 가장 문제점은 사용기간이 지날수록 온도조절센서가 간혹 문제가 생기고, 가열하는 퓨즈가 자주 끊어져서 고쳐줘야 한다는건데요. 하도 갈다보니 1유로에 퓨즈 가는 법을 터득했지만, 여간 귀찮은게 아닙니다.. 저는 한번만 더 고쳐서 국 보관용으로 쓸까해요. 또 고장나면.. 그 때는 파괴기념 비디오라도 찍을까 생각 중입니다.

3. 한국밥솥
결국에 깨달은건 한국의 쿠쿠나 쿠첸같은 한국밥솥이에요.

– 전기밥솥은 아마 여기에서도 자취를 해보신 여러분들이 사용해보셨을텐데 자취하는 이들에게 딱 맞지만, 밥이 오래 보관되지 않습니다. 안에서 마르거나 물이 생기고, 깜박 잊고 며칠 집을 비우면, 밥솥 안에 새로운 은하가 만들어져있죠. 완전 밀폐되지 않기 때문인데, 혼자 자취하기에는 1~ 3인용 밥솥만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 압력밥솥, 역시 한국 압력밥솥이 최고입니다. 가스렌지에서 조리하는 압력밥솥은 독일에서도 팔지만, 여기서는 전기압력밥솥에 대해서만 이야기 드릴게요. 일본에서도 괜찮은 제품이 나오지만, 가격대 성능을 생각하면, 최고는 한국제품이라고 생각해요. 일본 사람들도 한국을 여행할 때, 쇼핑하는 것들 중 하나가 압력밥솥이기도 하죠.

– 가격, 여기서 사기에는 터무니 없이 비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한국에 주문하자니 세금이 많이 깨지는거 아닐까하고. 결국 저는 12월 말에 한국 온라인 쇼핑몰에서 10인용 최신 쿠쿠를 지릅니다. 친구 오는 편에 포장을 모두 풀어서 중고라며, 세금을 덜 내는 방법을 택했죠. 10인용 최신 쿠쿠를 12만원이 채안되는 가격에 구했습니다. 물론 저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이어서인데, 여러분이 사용하시면, 3~ 4인용만 사셔도 굉장히 편할거라고 생각해요. 가격을 비교해보면, 쿠쿠가 쿠첸보다 비싼데, 후기들보니까 쿠첸이 잔고장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구요. 수리하려면 한국에 보내기 번거로워서 저는 그냥 쿠쿠를 질렀습니다. 선택은 여러분이..

결론. 한번 샀더니 진짜 밥맛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밥하는걸로 스트레스 안 받아요. 몇 달만 사용하신다면 모르겠지만, 그냥 구매하는게 정신건강에 이롭습니다…

한번은 일본 친구들과 커리 200인분의 케이터링 일을 할 때, 냄비 6개-가스불로 밥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하루 이벤트는 무사히 끝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평소 시간 여유가 있어도 쉐프들에게조차 매일 냄비밥 해먹으려고 하면, 자꾸 케밥이나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음식에 손이 갑니다. 식비도 더 들고, 건강도 나빠집니다. 결국 기승전-한국압력밥솥이네요.

저도 몇 달 중고를 노렸지만, 살벌한 경쟁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ㅠ 여러분께 도움되는 글이었길 바랍니다. 일하고, 혹은 공부 마치고 집에 와서 혼자 밥 먹는 것도 서러운데, 밥이라도 잘 챙겨먹어야 타지에서 아프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이 좀 늦긴 했는데, 다들 맛있는 저녁 식사하세요!

영화 리뷰: The way we were

 

시답잖은 영화 리뷰.

 

혼자 술잔을 홀짝이며, 영화를 보는 일은 너무 좋다. 먹먹함에 콧등이 시큰 거릴 때 혼자가 되어야만 마음껏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물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에 의구심을 갖는다.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여기저기에 감상을 남겨두기엔 난 충분히 긍정적 사고의 배신을 맛보았고, 나는 불온한 회의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통속적이긴 해도, 그런 감상은 짧으니까.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어제 친구들과의 밤마실 역시 좋았다. 낯선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낯설게 무엇인가를 대할 수 없다면, 그처럼 비통한게 또 있을까.

 

그런 느낌을 이어 보자면 나는 영화 ‘The Way We Were’, 1973. 응, 그래 이 영화를 보고 꽤나 찔끔거렸다. 물론 Barbra Streisand 때문에라도 다시 볼 이유가 충분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요즘 다시 보고 있는 고전들 중 썩 괜찮은 느낌. 극 중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학생운동을 하는 반전주의자. 아니 한술 더 떠, 프랑코 왕정의 폭거를 비난하고 소비에트를 열렬히 지지하다 못해.. 집 안에 레닌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타겟이기 때문에 좀 물렁한 표현들이 있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인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도 흥행을 위해 애정전선이 한 부분을 자리 하는데, 이 부분이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해군장교이자 반정치적인 남자친구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내는데 힘을 주는 것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안일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매카시즘이 미국을 강타하는 시대 속에서도 늘 힘겨운 투쟁 속에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냥 포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와의 갈등. 이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을 빛내 주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과 사랑 사이에서 결국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우연찮은 재회. 남자친구는 결국 상업 예술 작가로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끝까지 운동 속에 남아 혼자가 되었다. 여러분 끝까지 혁명을 추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도 그런가 봅니다. 우왕ㅋ 이런 식의 끝맺음은 그리 나쁘지 않지. 어쨋거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재해석하는 duck sauce의 노래 하나: http://www.youtube.com/watch?v=9M55_JuOrZc

 

잡스러운 기억을 뒤로하고, ‘Murmur Of The Heart’, 1971. 이건 시바ㅋ 욕을 안 할 수가 없게 근친상간까지 담고 있으면서도 뭔가 선정적이라던가 더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작품이다. 그리고 ‘Passion Play’, 2011. 고전이 아니지만, 미키 루크를 좋아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그의 노년 연기에 감탄. 이 사람이 청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기 전, 중년 시절 그렇게 마음 고생을 하고 방황하지 않았다면 이런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Jim Jarmusch의 ‘Coffee and Cigarettes’, 2003. 이 영화도 고전은 아니네?ㅋㅋ 아무튼 나는 사실 흑백 필름을 굉장히 싫어했다. 고전적이라기보다 상투적인 느낌이라.. 그래서 사실 이 영화가 나왔을 때도 굉장히 싫어했다. 어디 구석에 쳐박아 둔채 보지 않다가.. 다시 본 느낌이란… 뭐 이런 연출이 유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Tom Waits와 Iggy Pop의 겉도는 대화는 그냥 좋았다. 왜냐면 내가 그 둘을 이유없이 좋아하니까.

 

 

ㅡ 2013년 1월 19일
뒤로 재껴놨던 30~ 50년대 영화들도 다시 보는데, 예상 그대로 였지만 다시 봐두면 좋다는걸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