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유학생에 최저임금 안준 호주 편의점주인 벌금 3억6천만원
길게 말 않겠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베를린 벼르고 있다. 어디 어디가 유학생들 등쳐먹는지. 다행히 내가 알고 지내는 사장님들은 그러진 않는데.. 잘 알고 있다. 나야 늘 비난 받는게 일상이지만, 당신이 유학생들 등쳐먹다 다시는 가게문 열지 못하게 되더라도 원망말라.
“널 찌른건 내 칼이 아니라 네 과거다” ㅡ 몬테크리스토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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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유학생에 최저임금 안준 호주 편의점주인 벌금 3억6천만원
길게 말 않겠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베를린 벼르고 있다. 어디 어디가 유학생들 등쳐먹는지. 다행히 내가 알고 지내는 사장님들은 그러진 않는데.. 잘 알고 있다. 나야 늘 비난 받는게 일상이지만, 당신이 유학생들 등쳐먹다 다시는 가게문 열지 못하게 되더라도 원망말라.
“널 찌른건 내 칼이 아니라 네 과거다” ㅡ 몬테크리스토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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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참조: https://www.facebook.com/212667045793913/videos/212815595779058/
1. 브렉시트를 두고, 영국이 진탕에 빠진듯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재투표로 갈지, 아니면 재투표 없이 민방위법(Civil Defence Act, 1948)이 폐지되면서 재정된 *시민 우발적취약사태 대처법(Civil Contingencies Act, 2004)과 같은 법을 통해 국가비상사태의 일환으로 긴급조치(Emergency Regulations)를 발효할 수 있다. 시민 우발적취약사태 대처법은 일종의 계엄령으로 전쟁이나 테러를 대비해 재정된 법이기도 하지만, 사회, 복지, 환경에 대한 치명적인 위험에 대한 대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법적 근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준-계엄령 수준의 효력을 갖고 있는 법이기 때문에 실제로 발효되려면 그만한 문제인식이 있냐는 것이 중요하다.
0. 나는 지난 6년 간, 베를린서 가능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려 해왔고,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과의 접점을 찾기위해 애써왔다. 그렇게해서 얻은 것은 외부로의 그리고 스스로의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물리적은 물론, 사회적 폭력을 수반하지 않고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가능성,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였다.
2.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2001년 비폭력투쟁 노선을 선언한 블록쿠피, 그 블록쿠피 시위대가 작년 유럽중앙은행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신청사 개관식에 맞춰 1만 7천여명이 모여 화염병을 던져 경찰차를 불태우고, 시가투석전을 벌이며 “폭력없이는 해답도 없다”라고 외치던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시위대의 폭력은 만장일치로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체제의 폭력을 무시하고 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대의 폭력은 경멸하면서, 왜 우리는 체제의 폭력은 허용하는 것일까”라고 논평한 슈피겔의 야곱 아우그슈타인의 말을 되새겨본다.
2- 1.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폭력 없이는 변화도 없다” ..다소 급진적이고 과격한 구호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폭력 없이 보다 나은 내일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스스로를 과신한 것이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너지는 건물에서 겁에 질려 책상 밑에 숨어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게 해야만 하는 것이지, 무너지는 건물 속에서 밖으로 나가면 어떻겠냐고 단상 위에서 열변을 쏟아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고, 오히려 그런 기믹의 기술이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3. 다시 브렉시트로 돌아가서, 남는 방법은 재투표거나 긴급조치를 통해 유럽국가들에 용서를 구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냥 용서를 구하는 것만으로는 유럽 국가들이 용서를 받아줄리 없다. 오히려 좋은 본보기를 만들기 위해서 파운드화를 포기하고 유로화를 수용하도록 강제할지 모른다.
4. 왜 꼭 남아야만 하냐고? 사람들은 브렉시트를 심각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심각한 사태의 시점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된다. 70년대에 영국의 제조업은 이미 망했고, 1973년 European Economic Community(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면서부터 물류와 금융, 문화로 먹고 살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EU에서 나가게 되면,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고, 유럽과 단절되면서 물류와 금융 강국의 의미를 잃게 된다. 장기적으로는 브리튼은 더이상 강대국이 아니게 될 것이고,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스코틀랜드 독립의 명분은 물론, 사실상 독립국으로 생각해야한다. 스코틀랜드는 웨일스, 아일랜드와 달리 잉글랜드와 많은 사안에 대해 이미 의견이 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잉글랜드는 가난해질 것이고, 국제무대에서의 위상은 커녕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바쁠 것이다.
5. 앞으로 브리튼의 위상이 어떻게 될지는 차마 이야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로 유추해볼 수 있다. 약 6400만명의 브리튼 인구,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예상되기 때문에 잉글랜드만 생각하면 5300만명으로 5100만명의 남한인구와 비슷해진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자립할 수 있는 내수시장을 갖고있지 못하다는걸 의미하며, 브리튼은 심각한 고령화를 겪고 있다. 고령화 문제로 인력난을 겪던 브리튼은 이민자 증가로 젊은 브리튼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으나 브렉시트로 인해 이 희망이 좌절될 것이다. 브렉시트를 지지한 사람들 중 다수는 이민자를 혐오하기도 하지만, 근면하지도, 창의적이지도, 미래지향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브리튼이 남한처럼 될 것이라고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공용어가 영어이기 때문에.
5- 1. 몇 백년이 지나면, 브리튼은 한때 부귀를 누렸던 아마 영어를 사용하는 작은 섬나라로 인식되지 않을까 싶다. 대영제국이랑는 말은 앞으로 역사책에서나 보게될 것이고, 혹여라도 “the Great Britain”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영국인은 과거에 집착하는 자존감 낮은 사람으로 인식될 것 같다. 스코틀랜드가 독립하게 되면, 아일랜드도 독립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때문에 UK라는 이름도 언젠가는 바꾸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5- 2. 어제 같이 마시던 영국친구에게 나는 차마 브렉시트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옆에 있던 독일친구가 결국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를 꺼냈는데, 영국친구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슬픈 표정의 친구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너무 혼란스러울 뿐이라고.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브렉시트가 가져올 여파는 굉장히 크다. 그리스가 EU에서 나가는 것을 고려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 우리는 역사의 전환점을 목도하고 있다. 지금의 브렉시트는 다른 국가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귀감이 될 것이고.
00. 그라운드 제로. 지난 6년간 베를린서 가능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려 해왔고,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과의 접점을 찾기위해 애써왔다. 종종 온전한 대화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아시아와 유럽의 정서적 차이의 문제, 혹은 언어의 문제일까 하고 나를 의심하고, 더욱 노력할 것을 스스로 다독여왔는데, 이제는 그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그 원인은 이 영상 안에 모두 담겨있다. 이 영상은 너무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ㅡ 앞으로 그레이트 브리튼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추측은 나 혼자만의 추측이다. 내 생각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할 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읽는 이에게 달려있다. 나의 생각은 너무도 어둡고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ㅡ 2016년 6월 26일 오후 3시 22분,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분노에 이글거리는 ‘페이스북-혁명가’들이 너무 많아서 오랜만에 우리가 갖고 있는 편견, 혹은 시차적 관점에 대해서 가벼운 잡글을 적어볼까 한다.
얼마 전, 독일 유학생 그룹에 룸메이트를 구하는 독일인에 대한 분노의 글이 올라왔다. 이유인 즉, 룸메이트를 구하는 독일인이 한국인 유학생분께 메일을 보내왔는데 그 메일 내용은 대략, 자신의 이름, 나이 등을 소개하고, 한국인 유학생분이 월세는 부담하지 않되, 잠자리를 같이하는 그의 섹스 파트너가 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몇 분들은 성희롱, 혹은 명예훼손을 이야기 하셨는데, 실제로 독일에서는 이런 일들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고, 법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다. 계약 이전에 이야기를 했으니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동거조건일 뿐이고, 아무런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소 사유조차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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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보편적인, 그리고 주류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문화라고 이해하지 않고, 범죄라고 단정짓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사회는 집단의 이해가치에 따른 보편적 정서에 동화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집단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나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최근에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신자유주의 때문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독일에는 공개적으로 스윙어클럽, 스와핑클럽, 섹스 혹은 페티쉬 클럽들이 있다. 베를린에서는 특히나 더더욱 흔하게 볼 수 있다. 베를린이나 함부르크는 유명한 섹스 관광지이기도 한데, 이런 조건으로 동거자를 찾는 남녀가 많다. 유럽 헤도니스트들의 성지라고 불리우는 베를린에서는 아주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라는 말로 베를린을 경제난으로부터 구한 그 유명한 시장,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도 게이였고, 그는 베를린의 그 악명 높은 섹스 프렌들리, 페티쉬 클럽인 벨카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때문에 나는 오픈릴레이션쉽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벨카인이나 킷캣같은 곳을 권하지 않는다. 헤도니즘과 오픈릴레이션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공간에 있다면, 서로를 존중하는 암묵적인 약속들이 파괴되어 공간 자체가 무너질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해당 공간에서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클럽들은 도어에서 세큐리티들이 거절해서 돌려보내는 경우가 클럽마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된다. 거짓말 안보태고, 벨카인에서 하루에 돌려보내는 관객만 적어도 500명은 될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클럽들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공간 자체가 가져오는 안락함, 그리고 그 말없는 약속들이 지켜지기 때문이고, 무례한 관객이나 투어리스트들이 없기 때문이다. 베를린 클럽에 간다면서 가장 멍청한 놈들은 섹스프렌들리 클럽이라고 해서 섹스만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이런 곳을 찾으면, 섹스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와서는 춤도 추지 않고, 그저 등대처럼 두리번거리며 섹스 상대만 찾는 사람들이다. (사진 찍는 놈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쫒겨난다)
그런 곳이 베를린이다. 테크노의 도시, 베를린의 클럽에서 진짜 즐긴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다. 모든 클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베를린의 악명 높은 유명 클럽들은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다른 도시의 클럽들과 차별된 베를린 클럽의 가치를 표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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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인데, 서구문화 전반으로 신문지면상이나 온라인데이트 상에서 단기, 장기,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 것이 평범한 일이다. 혹여 어학원을 다닌다면, 어학원 선생에게 물어봐도 같은 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문화는 한국에서 돈을 주고 성을 거래하는 것처럼 절대 이상한게 아닐뿐 아니라, 취향이 맞는 사람들 간의 합의된 건전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줄리안 어샌지도 오케이큐피트 같은 웹사이트에서 자신을 ‘위험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할정도. 이런 웹사이트들은 자신의 정치성도 반영하는데, 베를린을 예로 들자면, 그 특성상 성적 기호에 대해서 이를테면 판섹슈얼, 바이섹슈얼, 오픈릴레이션쉽이라던가, 채식, 혹은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만나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진다.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면서도 페미니스트 남성만을 찾겠다는 메갤의 그 이율배반적인 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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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정리해보자면, 룸메를 구할 때, 자기와 기호, 취향, 라이프 스타일 등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독일에 와서 룸메를 구하기 위해 인터뷰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학업이라던가 삶의 태도라던가 자기와 성향이 맞는 사람을 찾는게 일반적이다. 아니 함께 사는데 서로 자주 마주치지 않길 원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지만, 일단 룸메이트라는 정서가 함께 살아가며 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반자적 관계를 의미하고, 따라서 같이 자주 식사하고, 같이 놀러다니고, 이런 것들이 일반적이다. 이런 것들을 싫어하는 사람을 비사교적이라고도 하기도 하지만, 반사회적 a-social로 보기도 한다. 관심사에 대해서 서로 이해가 맞아야하기 때문에 독일인, 혹은 유럽 사람들과 룸메이트가 되기는 한국인들에게 쉬운 일은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독일에서 룸메이트를 구하면, 이게 얼마나 힘들고 까다로운지 알게 될 것이다. (룸메이트 하나 구하는데 10명 인터뷰는 흔한 일이다. 그들 조건과 마음에 들어야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과 룸메가 되는 일도 드물지만, 집 하나 구하려고 이런 수고를 해야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해당 유학생의 이야기 같은 일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해야할까. 매우 간단하다. 메일 받고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안하던가 그냥 거절하면 된다. 그 분께서는 처음이라서 놀라셨을거라는 생각한다만, 너무 기분 나빠 말았으면 좋겠다. 지구는 둥글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많다. 그 중에서 자신과 맞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큰 기쁨중 하나 아닐까 싶다.
좋은 친구를 찾고, 진탕 마시며, “널 너무 찾아다녔어!”라고 말하는게 진짜 재미지! (내가 사는 하우스는 방이 스무개가 넘는 각자의 방에서 서로 다른 친구들이 살아가고, 매주 회의를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회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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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점이나 누군가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때로 유효한 결론과 거리가 먼 곳으로 귀결된다. 내가 어떤 곳에 서있냐에 따라 나무 그림자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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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8ecLZtPssQ
베를린의 디제이 Adana Twins가 The Doors의 ‘People are strange’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 ‘Strange’.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베를린의 아주 유명한 테크노 그랜드파 두분 중 한 분, 올해 67세의 Bernhard Enste. 아주 와일드한 파티를 즐기시는데, 진짜 왠만한 젊은 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매력 터짐 때문에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시다. 실제로 만나보면 왜 그런지 단번에 이해하게 됨!
ㅡ 2016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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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어리 – 51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낄 때, 낯선이가 된다. 거울로 다가서 당신의 얼굴을 보라. 당신은 단지 그들이 낯설다고하여 누군가를 혐오할 수 없다. 낯선이가 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거울이 대답한다, 당신이 무언갈 알고 싶을 때.
ㅡ 2015년 2월 13일, 지난 며칠 간, 한바탕 소동을 겪고서..
강남역 살인사건에 5명의 범죄심리전문가들이 2차례 심리한 결과나 사건을 지켜보던 범죄심리학자, 프로파일러들이 정신분열이라는데 입을 모으고, 오히려 여성혐오에 기인한 살인이라는 근거없는 주장이 쏟아져나오게 된 것에 경찰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 (정신분열이 아니라 신경증이나 도착증, 또는 분노조절장애였다면, 정신질환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과 여성혐오는 다른 것인데도 여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혐오범죄라고 단정짓고 시작하던 사람들은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텐가. 정신분열증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사회를 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한국사회에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만연하다고 해서 뭐든지 이런 식으로 가져다 붙이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바로 잡히기는 커녕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된 시선들만 가져오게된다. 경희대 서정범교수 명예살인사건이 생각나는건 나뿐인가. 그 때도 운동에 누가 될 수 있다면서 끝까지 사과를 안 했었다. 앞뒤를 따져보지도 않고, 결과를 정해놓고 감정적으로 다가서는 이런 주장들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별개로 지금 정신보건의 구조적 폐해로 법을 개정하려는데, 정신질환자를 구속하는 대책만을 내세우는 경찰서장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순간만 모면하려는 작자들이 법을 집행하고 있다는게 이런 사건을 더욱 방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성혐오와 차별을 막기 위해 차별금지법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나의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서 혐오론자들과 같은 논리로 상대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행동들이 분노를 일으키지만, 나는 혐오론자가 아니고, 그들의 베푸는 배려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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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 때문에 내가 평소와 너무도 다른 주장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친구들 때문에 나 또한 마음이 아팠다. 며칠 고민을 하며 친구들에게 마음이 아플 때는 무엇이 좋을까 조언을 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이 당연히 사회의 기본 가치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위해 없는 사실을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목적에 동의하고, 함께 연대한다는 이유만으로 논리적으로 결함있는 방법론을 지지할 수는 없다. 한국과 멀리 있다고 당신이 뭘 아냐며, 또 남자인 당신이 무엇을 아냐며 논점과 무관한 말들로 질타하는 것을 듣고만 있어야했다. (내가 여성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고, LGBT운동에 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는데도 빌어먹을 매번 똑같다) 베를린의 친구들은 오히려 내게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격려해주었지만, 이렇게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실망이 큰 것도 사실이다.
여성혐오를 끝장내기 위해 얼마든지 언제든지 싸워야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여성을 ‘소수자’라고 말하는 엉터리 여성주의 신문에 신물이 난다. (소수자가 무슨 뜻인지, 한국어도 모른단 말인가) 여성을 약자화 시키지 않고, 남성과 동등한 주체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 얼마나 웃지 못할 촌극인가.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학습하려기보다 감정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비위나 맞춰가며, 그저 관심이나 끄는 것에 만족하고, 욕설이나 지껄이는 것이 운동으로 생각한다니 이런 언어도단이 또 있으랴. 페미니즘은 여성의 편익을 추구하거나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주체로 동등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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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는 베를린의 로컬들만을 위한 유명한 클럽 about blank가 난민들을 위한 베네핏 파티의 포스터.
+ 물론 정신분열증자를 구속하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하지만 정신분열병이 어떤 병인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는 정신보건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다. 신경정신과에 가는 일만해도, 그런 병력만 있어도 그들을 하대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일상다반사니..
슬로우뉴스에는 처음이네요. ‘베를린의 노동절과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공유경제의 그림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오늘의 교육>에 기고한 스웨덴과 독일의 정치교육에 관한 글은 아직 게제시점 약속이 있으니 가능해질 때 공유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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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테러로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그 때, 내게 기고를 제안해주셨으나 나의 관점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니 루쉰 선생이 혁명운동을 하는 문필가이자 사회운동가, 그리고 아내인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나서 노력해보겠다고만 이야기 드리고 더이상 답을 드리지 못했다.
늘 술을 들이키고, 잡념에 빠지고, 작은 메모들을 끄적거리고, 그것들을 한구석에 쌓아두기만을 하다 이번 노동절 하루 전날 친구들과 ipse에서 가장 좋아하는 디제이중 한명인 Phon.O를 즐기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 이렇게 혼자 좋아도 되는걸까..”
파티가 끝나고, 잠시 지쳐 허공을 바라보다 구석에서 혼자 짧은 잠에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고맙게도 그가 우리에게 인사하기 위해 찾아 다니고 있었다. (크ㅠ 고마워ㅠ)
각설하고,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글이지만, 앞으로 나누기 위한 마음으로 썼다. 함께 즐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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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는 말은 늘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왜 그러한지는 <외침>에 쓴 것처럼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전달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전달하고 싶지 않은가 하면,
나의 사상은 너무 어둡고, 스스로도 정확한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ㅡ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
<양지서> 1집 편지 24.
ㅡ 이하 내용: 그러나 해당 페이지를 방문하셔서 읽으시길 권합니다.
베를린을 향한 당신의 다음 휴가 계획을 위해 아파트 렌트를 찾고 있다면, 그 생각을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노동절을 기점으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 임대인이 단기 방문자에게 임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베를린시가 에어비앤비(Airbnb)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을 어겼을 때 실질적인 벌금은 10만 유로(약 11만3천 달러; 약 1억3천만 원)로 임차하는 손님이 아니라 임대인에게 부과한다. 물론 아직 여기에는 휴가용 아파트 임대를 허용하는 몇몇 허점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천문학적으로 늘어가는 에어비앤비와 다른 단기 임대 웹사이트들에 충분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베를린의 전반적인 거주지 부족 문제는 법 개정을 유발할 정도로 충분한 사유가 되었다. 장기거주를 원하는 세입자들 대신에 수익성만 따지며 단기거주 임대만 찾는 임대인들에게 독일의 임대법은 다른 유럽국가에 보다 더욱 엄격한 기준이 되었다.
성장하는 도시에서 저렴한 아파트를 구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휴가용 아파트들은 도시의 주요한 지점들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거주민들의 주택시장은 냉각되기 시작했다. 휴가용 아파트 수는 몇이나 될까? 최근 기사에 따르면, 총 190만 개의 주택지에서 14,393개의 휴가용 아파트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를린의 조치는 상당히 늦었지만, 환영할만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난 6년간 새로 거래되는 임대 주택의 집세가 최소 15%에서 많게는 30%까지 올랐는데, 에어비앤비가 그 주범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일선에서는 이러한 조치에 대해 ‘독일은 공유경제가 통하지 않는 나라’라며 힐난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에어비앤비가 정말 ‘공유경제’를 의도하고 있다면, 지금 에어비앤비가 일으키고 있는 베를린 주택시장 교란과 탈세라는 금융범죄를 전제로 하는 불법 숙박업에 대한 답변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다주택 소유주들과 부동산업자들은 다가구 주택을 사들여 에어비앤비를 목적으로 개조해 조직적으로 숙박업을 하면서 조금의 세금을 내지도 않는다. 이 에어비앤비들은 주택공급이 부족한 베를린 시장에서 장기임대를 원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더 비싼 가격으로 단기임대를 하므로 베를린의 임대주택 시장의 평균 시세가 급속도로 상승하게 하는 주원인이 되고 있다.
원거주민이 거주권을 위협받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탈세는 자본이 사회에 환원되지 않고, 일부 사람들이 자본을 독점하는 심각한 금융범죄이기 때문에 ‘공유경제’라는 말이 허구에 불과해 보인다.
개인적 목적으로 주택을 에어비앤비에 제공하더라도 이는 여전히 논쟁적이고, 위험한 부분이 있다. 원거주민들이 기존의 경제활동이 아닌 부동산 투기를 조장할 수 있는 경제활동에 수입을 의존하지 않고서는 소득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회의 경제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불법적인 소득이 용인될 경우 이후로는 탈루·탈세뿐 아니라 불법적인 금융사업이 뒤따를 수도 있다.
개인적 목적의 에어비앤비 폐해가 바로 서브-렛(Sub-let)이다. 서브-렛은 본래 세입자가 또 다른 세입자에게 임대인과 거래한 계약과는 별도로 이중으로 세를 주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이 단계에서 세입자가 2차 세입자에게 더 많은 월세를 요구하고, 본인은 실질적으로 거주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 부당 이익을 편취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진다.
게다가 서브-렛의 과정이 합법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1차 세입자가 2차 세입자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부당한 대우나 계약위반 심지어 강제로 물리적 퇴거를 하더라도 2차 세입자가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서브-렛을 통한 부당이익과 소득활동에 대한 탈세는 명백히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서브-렛 이외에 쯔비쉔(Zwischen)을 통해 단기 임대를 하는 세입자들이 거주지 등록은 못 하게 하면서 주로 관광객들에게 시세보다 비싼 임대료를 받고, 여름용 휴가 주택을 운영하는 숙박업자들이나 서브-렛 하는 세입자가 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에어비앤비가 베를린에서 공유경제를 주도한다는 주장들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거주지 등록을 하지 못하면 실제로 거주한다고 보기 어려운데, 아무런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쯔비쉔이라는 거주민이 휴가 등의 사유로 집을 비우는 동안, 타인에게 소정의 금액을 받고, 거주민의 방, 혹은 집을 임대를 하는 문화가 있다.
이렇게 베를린 주택시장이 혼란을 겪는 가운데 베를린시는 책임감을 느끼고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관용과 다문화의 도시로서 밀려드는 난민들에 대한 거주지 해결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고심하던 베를린시가 꺼내 든 카드는 베를린의 자랑인 템펠호프 공원에 난민수용시설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집단수용시설이 난민들을 베를린의 새로운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이들을 분리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뒤따르는 문제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현명하게도 시민들은 이 문제를 에어비앤비 문제와 함께 풀고자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에어비앤비 숙박업소를 적발하여 난민들에게 임대하자는 의견에 지지를 보냈다. 그럼으로써 난민들을 베를린의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부당이익을 취하며 탈세를 하는 에어비앤비 불법숙박업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가 기존 이민자들에게 해오던 것처럼 난민들에게 언어 습득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응 기간을 준다면 결과적으로 난민들은 독일 사회에 경제적으로 편입되고 기여할 수 있지만, 에어비앤비 불법숙박업자들은 탈세하며 부동산 시장 교란을 가중화해 원거주민의 거주권을 위협할 뿐이다.
에어비앤비 등장 이전에도 독일 통일 이후 10여 년간 많은 예술가와 거주민이 베를린을 현대미술과 도시문화가 조화로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도시로 발돋움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후 베를린은 10여 년간 주목받는 국제 관광도시로 도약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이 밀려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베를린에는 공식적으로만 연간 130여 개 이상의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으며, 특히나 여름에는 오픈 에어(Open Air), 야외 음악 페스티벌들이 연달아 있어 베를린을 상당수의 유럽 관광객들이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간의 ‘장기간 휴가’를 즐기러 오는 편이다. 하지만 이 장기간 휴가가 역설적으로 월세를 폭등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독일의 임대법상 임대인이 월세를 올리려면 세입자와 합의를 해야 하며,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임대인 혼자만의 결정으로 올릴 수 없다. 그나마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더라도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데, 임대인들은 이를 이용하여 ‘6개월 단기세입자와 장기 휴가자’만을 상대로 임대해 월세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임대인들이 지역 거주민들의 전통을 가진 슈퍼마켓 등 삶의 터전인 곳들과 문화 중심지들에 법률적 퇴거 소송전을 벌이며 갈등이 발생했고, 원거주민들이 주도하여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2003년 베를린에는 경찰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조직된 노동절 문화 페스티벌인 마이페스트(MyFest)가 등장했다. 베를린 로컬 뮤지션들과 세계의 유명 뮤지션들이 거리에서 공식적으로는 10여 개, 비공식적으로는 최대 40~50여 개의 무대에서 노동절에 연대하는 문화행사를 시작했다.
마이페스트를 통해 많은 시민이 평화적으로 시위와 문화공연 등을 사유하고, 향유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노동절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경찰은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마이페스트의 등장은 새로운 베를린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였던 만큼 마이페스트는 국가위원회로부터 폭력과 범죄를 예방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에 ‘예방상’을 수상했다.
마이페스트(MyFest)는 독일어의 5월(Mai)과 영어의 나의(My)가 동음이의라는 것에 착안해 지은 이름으로 베를린의 노동절을 대표하는 축제이자 시위이며 지역 중심의 문화 운동이다.
하지만 마이페스트는 하루 최대 25만 명이 찾는 페스티벌로 변모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이페스트가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오면서 노동절에 시민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는 줄어들고, ‘하룻밤의 페스티벌’로 전락했으며, 결국 젠트리피케이션을 가중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지역거주민들은 수년 전부터 마이페스트를 통해 노동절을 함께 사유하고 향유하는 게 기쁜 마음이라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며 ‘CDU(집권우파정당)의 페스티벌’, ‘부자들의 페스티벌’이라 비판을 했다.
수년간의 비판과 토론 속에서 결국 마이페스트는 거주민의 의견을 더욱 수용하겠다며, 2016년 초 “더 많은 정치를, 더 적은 방문자를(Mehr Politik, weniger Besucher)”이라는 목표를 언론에 발표했다. 공식 무대를 6개로 축소하였으며, 그중 하나는 정치적 발언을 중심으로, 더 많은 지역민의 목소리가 닿도록, 그리고 로컬 뮤지션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물론 이번 법률 개정은 일부 임대인들이(서브-렛을 하는 세입자까지 포함해서) 이것으로 이익을 얻고 있지만, 베를린에서 거주할 보금자리를 찾으려는 많은 사람에게 환영받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늦은 밤 클럽·파티문화를 즐기는 관광객들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용은 컸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 되었다.
하지만 파티 관광에 문제가 없는 지역에서 단기 아파트를 임대하는 많은 임대인은 법의 변화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상원의 판결은 집을 찾기 어려워지는 도시의 전반적인 정서를 반영해 판결을 내린 것이고, 만족할만한 결과와 함께 이제 베를리너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되돌려 받기를 원한다.
2016년 2월, 에어비앤비에 등기된 단기 임대 아파트는 11,000여 개에 달했지만, 법이 시행된 후 3월, 그 숫자는 6,700여 개로 하락했다.
이 새로운 법률에 관한 뉴스는 베를린의 홈스테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거주공간의 50%를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임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임대인은 지역 자치구를 통해 단기 임대 허가를 공식적으로 신청할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의 지원서는 아파트 단기임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세심하게 조사되어 거부될 것이다. 이런 절차로 승인된 임대인들도 지역 평균 임대료보다 비싼 임대료로 임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급증하는 관광객들의 숙박료를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이 될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다소 위압적이거나 과감한 선택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베를린에서는 절대다수가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도시에 따라서는 주택을 투자 자산으로 볼 수 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심화하고 있는 베를린의 경우는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법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통과된 것은 2014년이었으며, 베를린의 임대인들에게는 영구 거주자를 찾거나 자신의 임대주택을 매매할 수 있도록 2년간의 유예기한을 줬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간 이러한 법적인 변화를 앞두고 휴가용 주택에 대한 임대료가 빠르게 동결되는 효과가 있었다. 앞에서 본 것처럼 2016년 2월만 해도 에어비앤비 베를린에는 11,000여 개의 아파트가 등록되어 있었지만, 3월에는 6,700개 수준으로 하락했다. 상업적 사용을 목적으로 임대를 추구하던 곳들은 같은 기간 동안 2천여 곳에서 1천여 곳으로 더욱 빨리 감소했다.
하지만 휴가용 임대주택의 감소가 장기 거주자들을 위한 주택의 증가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다. 베를린시는 현재 몇 달 내로 1천여 개의 신규 장기 임대주택들이 등장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새로운 법안에 따라 1만여 개의 장기 임대 주택이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법이 적용되면서 진통도 예상이 된다. 소문에 의하면 휴가용 임대 주택업자들이 그렇게 쉽게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베를린시는 이 법안 외에도 다른 무기를 갖고 있다. 향후 10~15년간 5만여 개의 새로운 아파트를 지을 것이다. 이는 최근 10년간 급속도로 늘고 있는 베를린 인구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은 효과가 모호했음에도 제약받지 않는 부동산 정책과 임대료 상승에 대한 임대법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베를린에서는 앞으로 더욱 저렴하게 주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움직임이 장기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지켜볼 가치가 있다.
좌파 엄기영이나 페미니스트 엄기영이 너무 많다. 나는 그가 한국에서 가장 억울한 누명을 쓴 정치인이자 가장 짧은 정치 생명을 살았던 사람이란 것을 안다.
당신들이 엄기영의 정치 데뷔부터 그가 눈물을 흘리고 좌절하던 끝까지 약 45일간을 찾아볼리 만무하지만, 그는 내가 아는 한국 정치인 역사상 최고로 정직했다. 다만 손에 꼽히는 멍청한 정치인, 혹은 순박한 정치인이었단 오점이 남았을 뿐.
+ 엄기영은 새누리당으로 출마했다.
++ (정황상) 새누리당한테 뒤통수를 맞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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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변호사 고용 절차 들어갔다. 이제 정면 논쟁 피하지 않겠다.
적당히 횡설 수설해야 어느 정도 들어주려고 노력을 할 수 있지.
야ㅡ 니들 논리대로 말하자면, 니들이 좋아하는 젠더학자나 페미니스트들이 서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ㅆ발아ㅡ 너는 백인이니까, 잠재적 인종차별자란걸 잊지마 섀끼야ㅡ 조심하고 다녀” 라고 목에 칼 들이내밀고 말 해야줘야하고, 버지니아 울프 읽을 때도, ‘야이 모자란 백인년.. 지구는 둥근거야. 아시안을 잊지마’라고 되새기며 읽고, 주디스 버틀러를 읽을 때도 ‘못된 년이 아시안은 부속품이야?’ 라고 속삭여줘라. 당신들의 언어들대로 말이다.
크리틱-칼에 쓰인 정강산씨의 글을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강남역 살인사건에 분노를 느낀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보길 권한다.
모두가 힘을 내어 여성의 권리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도 스스로 여성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 말하지 않는다. (맞다. 심지어 마초이면서 가부장적이던 사람들 마저도 자신은 여성을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은 피해자라며, 남성들이 가해의 혐의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여성이 위치해야할 곳, 그 상(image)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이 없다.
내가 Ostkreuz 역에서 집에 오는 길에는 난민들에 연대하는 ‘We are the Image from the Future’라는 유명한 벽화가 있다. 난민들이 전쟁으로 울부짖는 모습이나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닌 이 사회에서, 이 공동체에서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 함께 공존하는 상(image)이 그려져있다.
여성들이 빼앗긴 자리로 돌아와 정당히 권리를 누려야할 그 자리, 그 모습(image)은 어디에 있는걸까.
분노만으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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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뿐이 아니다. 우린 적어도 이정희의 분노와 비난의 정치적 결말이 어땠는지 잘 알지 않는가. (박근혜에 대한 비판이 유효했음에도 불구하고)
링크를 꼭 읽어보세요.
학교를 비롯한 교육및 보건 시설에는 기본적으로 항상 구비되어 제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한국처럼 빈곤 때문에 기본권이 위협받을 정도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구비가 되어있진 않고, 임금 대비 물가로 쳐도 한국보다 싸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에서 구비를 하는 것은 이상할지 모른다. 또한 베를린 같은 경우는 필수 구비는 아니지만, 몇몇 안티파 바/크나이페들은 페미니즘 연대의 일환으로 여자화장실에 탐폰이 구비되어있다. 왜냐면, 하다못해 애연가도 상시로 태우는 자신의 담배와 불을 깜박깜박하는데, 그것이 꼭 정해진 날, 몇시, 몇분, 몇초에 일어나도록 정해지지 않은 일을 위해 늘 생리대에만 신경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필요한 상황이 생겼을 때는 당황하지 않고, 쓸 수 있어야 함께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한 친구를 데려갔던 날, 여자화장실을 보고선 이런 배려는 처음본다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었는데, 사실 페미니즘, LGBT 관련 이벤트가 상시로 열리는 안티파 크나이페라서 구비 되어있었을 뿐이다. 길거리도 아니고, 바나 크나이페에서 술 마실 돈이 있는 사람들이 콘돔이나 생리대 구매할 돈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메르스 쌖끼 때문에 고산 암자에서 목탁이나 두드리고 염불이라도 하고 싶던 *ㅈ같은 마음으로 좌절되었던 작년 페스티발을 준비하면서 내가 사실 신경썼던 부분도 여자화장실에 탐폰을 구비할 예산을 적극적으로 배정해야한다는 것과 여러 회사들로부터 후원받아 콘돔을 남녀화장실 모두에 구비하는 것이었다. 놀러왔다가 갑자기 생긴 일에 놀라 당황하고 집에 돌아가거나 갑자기 신경쓸 것이 많아져 함께 즐기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면, 남아있는 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인식을 바꾸기 때문이다. 작년에 여러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친구들이나 참석한 사람들의 어깨를 주물러주거나 마그네슘을 챙겨주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우리와 함께하면, 낙오하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도록. 함께 즐기고, 함께 성장하도록.
이러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이타적으로 베푸는 배려가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 함께 즐겁기 위해 함께 나누는 최소한의 것일 뿐이다. 그걸 우리는 공동체라고 부르고.
+ 며칠 속상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 지언정 내가 상처 받을 일은 조금도 아니었다. 지금 개빡쳐서 얼굴이 시뻘개져 길길이 날뛰는 사람들이 좀 한심하고, 안쓰럽게 보인다. 왜냐고?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해도 성교육시간에 나눠주던게 ‘순결캔디’다. 박하캔디 하나 빨면서 애들이 “선생님 섹스는 어떻게해요?” 같은 질문을 던지고, 책상을 두드리고, 괴성지르다 끝나는게 성교육이었다. 그게 불과 15년 전이다.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순결캔디’ 먹고 성장한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 밑에서 성장했던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어떻게 보이겠나. 아는체, 고고한체, 혼자만 도덕적 우월함을 누리는 선민이겠지. 당신의 주장이 맞다한들 방법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무뢰배인지 당신이 멍청한건지 그 답은 확실하다. 저들인가, 당신들인가? 답은 당신 손에 있다.
++ 유아적인 사람들에게 정말 질려버렸다.
ㅡ 상단의 *ㅈ은 ‘중’을 초성으로만 표기한 것이다, 오해하는 *ㅈ같은 사람들 없길.
전경은씨 댓글을 읽다보니 댓글로 쓰기엔 부족한 것 같아 이렇게 답을 해볼까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편가르기 식으로 나의 친구니까, 잘못을 눈감아주고,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결말은 어떤지 정말 끔찍합니다. 나의 잘못을 용인해주는 친구, 계속해서 잘못되는 나의 실수. 결국 나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요.
ㅡ
제 글이 정말로 “인터넷에서 분노와 두려움을 터뜨리는 여성들을 모두 한심하고 우매한 존재”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걸까요. 제가 주장하는 바가 틀리기 때문 일까요? 아니면 방향 잃은 분노를 비판했기 때문 일까요. 경은씨는 방향 잃은 분노들에 대해서도 순수한 추모로 보고 있는건 아닐까요. 실제 사건과 관련없이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식의 물타기 주장을 통해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을 선동하고, 관심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관용해주고 있는건 아닐까요.
그게 실제로는 페미니즘에 대한 더욱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거고, 페미니즘이 바라는 것이 아닌데도 여성혐오론자들은 페미니즘을 곡해하는 수단으로 사용할거에요. 마치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혜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특혜를 바라고 떼나 쓰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일베와 같은 극우 커뮤니티들이 세월호의 본말을 왜곡하는 것처럼요.
아시겠지만, 저는 메갤이 더욱 학습하고, 스스로 조직화된 정치운동을 해야한다고 계속해서 주장해왔어요. 보다 조직화된 정치운동을 해야한다고 했죠. 하지만, 메갤러들은 도리어 제게 비난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방향 잃은 분노를 터트리고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극한의 대립항으로 두어 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상위로 하거나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주체라고 주장하는 것임에도 지금 사람들은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 대립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서울 서부에는 남자만 거주하고, 서울 동부에는 여자만 거주하는 것이 옳다라는 식의 주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제가 쓴 글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한 개인이 일으킨 우발적인 범죄라기보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신분열증자의 살인이고, 그 배경이 압축성장한 국가, 집단주의적 사회가 무너트리는 개인의 자존감 같은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 장애인, 성소수자 등, 약자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일은 뻔한 일이에요. 이 사건이 단순하게 여성이 싫어서 여성만을 향한게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 저는 더 걱정이 됩니다.
ㅡ 아래는 제가 다른 글에서 썼던 글 일부입니다.
“피해의식과 피해망상,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된 사건들이 급격히 압축성장 한 나라에서 두드러진다는 것인데, 일본은 80년대, 90년대부터 겪고 있으며, 아직 해결 방법을 못 찾았고, 지금 홍콩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제 그런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존파를 포함할 수 있지만, 빈도 측면에서 2000년 이후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ㅡ 압축성장한 국가들에서 두드러지는 사건, 원인규명이 되지 않고 있음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개인주의적인 사회와 달리 집단주의적인 사회다. 이 사회가 행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 한국의 집단주의 사회가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있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극단적으로 이번 살인사건처럼 타인을 향한 잘못된 분노를 터트리는 비극이 되고, 또다른 극단으로는 일개 연예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몰랐다며, 대마초를 피웠다며, 연애를 숨겼다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내밀고, 질타하고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1년 365일, 집단주의의 광끼, 분노의 카니발. 타인의 잘못을 찾아 광장에 매달고 전시하고, 비난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책임이냐를 강박적으로, 한편으로는 도착증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ㅡ 한국 집단주의사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 폭력
“저는 개인적으로 의심하는 부분이 국가마다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왜 압축성장한 국가들에서 최근 30년 간 이런 일들이 두드러지냐거든요. 이 국가들 모두 교육수준이 낮냐하면, 그게 아니라 상당히 높은 국가라는 거에요. 반대로 선진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거든요.
아시겠지만, 정부가 감청하여 피해보고 있다고 호소하는 정신질환자 블로그들도 사실 꽤 많구요. 지하철만도 타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주장을 하면서 난동을 피우는 일들이 유튜브에 올라오기도 해요. 저는 이게 여성혐오보다 더 무서운 문제가 될거라 생각합니다. 원인 자체를 알 수가 없거든요. 일본도 해결은 커녕 이거 원인도 못 찾고 있으니.. 문제가 더 복잡한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ㅡ 방치된 정신분열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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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야기 드리건데, 압축성장한 국가들에서 두드러지는 극단적인 사건들, 집단주의가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사회. 살인범의 중증 정신분열. 이런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작동하는데 큰 혐의를 두고 있는데, 여성혐오보다는 제 추측이 맞다면, 사건은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인, 외국인, LGBT 등 한국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을 향한 범죄가 앞으로 수백건의 이런 사건들이 예상된다는거죠.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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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모두 잠재적 범죄자”, “한남충은 모두 재기해라”, “한국남자는 멸종이 답이다”와 같은 남자와의 대립항을 의도하는 구호. 그리고 여성들이 지금 겪는 공포. 이것이 동시에 벌어지는 이유는 모두 다 사건수사도 전에 여성혐오에 의한 살인이라고 결론 내려졌기 때문이죠. 지금 공개된 한정적인 정보만 가지고 서구의 판결들을 비교해보면, 대개 이런 일들을 정신분열에 원인을 두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사건을 벌인 살인범에 대한 심리조차 하지 않고, “이건 다 여성혐오 때문이야!”하고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범죄 사실이 확실하더라도 재판과정을 거쳐 범인의 죄를 묻는 것이 일반적인데, 재판과정을 생략하고 범죄재발방지대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모두 잠재적 범죄자”라고 모는 것이 지금 일반적인 여론이 되려고 합니다. 작년 메갤에 그런 주장이 등장할 때도 비판을 했지만, 그런 문장들이 또 페이스북에서 보이고, 수 천번 이상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살인범에 대한 심리조차 하지 않았는데, 모두 다 신경정신학자로 된 마냥 벌써 혐의를 단정짓는 글을 수 만명이, 수 십만명이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유치원 교사가 어린 아이를 폭행했다고 해서 아이의 문제라거나 여성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정신분열증환자의 동기가 무엇인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는게 지나친 주문인가요?
여성이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상정함으로서 이익을 얻으려하거나 보호를 받는게 정말 경은씨 마음이라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여성의 위치는 2등시민이 되지만 말입니다. 그런걸 정말 원하신다면,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길 바라지도 말고,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 하지 말아요. 앞으로는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지도 마세요.
하지만, 나는 경은씨가 그런 마음이 아니란걸 압니다. 저는 여기에 있지만, 제 어머니는 사고 당해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혼자 사는 여성이고, 제 동생도 위계질서에 의한 성폭력이나 성추행 사건이 빈번히 겪는 간호사로 일하며, 혼자 살고 있어요. 피해여성의 죽음은 어디서 안타깝게 죽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가족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의 여자친구들이, 그리고 제 가족이, 아니 그 누구더라도,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안전함을 보장 받아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은 그걸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해서 목소리를 계속해서 높여야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건의 원인이 여성혐오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해야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인과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판단을 내리려고 하고 있어요. 만약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어 이 사건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하면, 대체 그 때의 희생들은 누가 책임질까요? 저는 그래서 이 사건이 약자를 상대로한 폭력임에는 조금의 의심을 하지도 않으면서도 여성혐오가 원인인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분노와 슬픔의 크기가 해결할 수 있는 거리와 비례한다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 바람일 뿐이에요. 이 비극이 분노의 카니발로 끝나지 않고, 한국사회가 약자의 희생을 방관하지 않도록 변화하길 원한다면, 이 잔악한 살인의 원인을 하나도 빠짐없이 생각해봐야한다 생각합니다.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단순히 전시되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변화의 동기가 주어지고, 함께 사는 공동체라는 인식이 생기길 바라봅니다.
+ 가사 때문에 사랑받는 곡이에요.
ㅡ 경은씨의 답변
답변이 늦었습니다. 오늘 하루 바쁘기도 했고, 사실 내가 건드리기에 너무 복잡하고 심층적인 주제를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약간의 후회가 들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내 글이 얼마나 우스워보일까를 생각하면서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정성어린 민주씨의 답변에 답하기 위해 내 나름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 방향을 잃은 분노, 분노를 위한 분노는 페미니즘에 대한 더욱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여성혐오론자들이 페미니즘을 곡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다. 메갤은 더욱 학습하고 스스로 조직화된 정치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메갤은 남성은 모두 잠재적 가해자, 한국 남자는 멸종이 답이라는 과격한 워딩 등을 통해 남녀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
=> 미수다의 이도경이 키 180이하는 루저라는 발언을 했다가 개인의 직장까지 그만둘 정도로 공격을 받았고, 식사 후 할인카드를 챙기는 남자는 찌질해보인다는 발언을 한 여자 연예인이 ‘된장녀’가 되어 공격을 받은 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그 이후 김치녀 맘충 김여사 보슬아치 등등 여성혐오를 함의한 단어들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각종 여성혐오 자료들이 조작되어 남성들의 광기어린 분노의 표출 대상이 되었죠.
오늘날 메갈을 비롯한, 인터넷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이들은 왜 그리 공격적이고 남성혐오적인지를 이해하려면 그 이전의 여성혐오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어떤 식으로 자행되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혐오를 멈추기 위한 어떤 합의점을 찾기 위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메갈이 좀 더 정치적이고 조직적이며 온건해보이는 방법으로 운동을 해나간다면 너무나 좋겠죠. 이상적이겠죠.
하지만 민주씨가 걱정하는 것은 메갈의 이 분노가 단지 분노에서 끝나는 것이죠? 대안이 없는 분노, 그 다음이 없는 분노, 단지 “한국남자 다 죽어라”에서 끝나는 분노. 그래서 다시 남성의 분노를 일으키는 그 분노와 혐오의 연쇄현상.
저도 생각은 그래요. 메갈이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남성을 적대시하거나 일반화해서 혐오하지 않고 점잖게 이야기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듣고, 변화를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된장녀 김치녀를 입에 올리는 이들과 이야기할 때, 아무리 공손하고 점잖게 이야기해도 그네들은 이미 “한국은 여성상위시대이고 한국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기생해서 편하게 살려고 한다”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아무리 공손해도 그네들에게 난 ‘김치녀’일 뿐이었고, 내게 욕을 퍼부었고 내 부모를 욕했죠. 나는 더이상 세련되게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엔 저도 “한강 물도 녹았는데 가서 죽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주씨는 그네들을 세련되게 설득하는 방법을 알고 있나요?
“한남충 재기해”라는 말이 너무나 끔찍한 말이고, 폭력적인 말이고, 남성에게 극도의 반항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결코 세련된, 조직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말이 심정적으로 이해가 돼요. ‘애미애비 뒤진년’이라느니 ‘허벌보지’같은 욕설을 들은 맥락에서요.
먼저 시작한 남성의 분노도, 이렇게 방향을 잃고 날뛰는 여성의 분노도모두 그 맥락과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앞서 남성의 분노가 지극히 폭력적이고 실제로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해온 것에 비해 지금 여성이 보여주는 분노는 폭력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남성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고 봐요. 오히려 남성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여성의 분노는 예민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다시 조롱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왜 앞선 남성의 여성혐오와 그에 대한 반동적 현상으로 등장한 여성의 남성혐오가 같은 결로 다루어지는지. 오히려 후자가 더욱 어리석고 폭력적인 것으로 다루어지는 지가 궁금합니다.
결국엔 이 사회를 바꿀 키는 남성이 가지고 있으니 메갈 입장에선 남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주 목적인데, 메갈의 방법은 효과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갈등만을 부추기고 있다_ 이건데, 그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메갈만이 학습하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남성 스스로는 좀 변화할 수 없을까요?
또한 실재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범죄, 혐오보다 메갈의 ‘남성혐오’가 더 큰 사회적 갈등인가요? 왜 민주씨와 민주씨 친구들은 여성에 대한 실재하는 폭력보다 메갈의 ‘남성혐오’를 더 큰 사회적 위험으로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2. 제가 메갈의 모든 면을 지지하는 게 아닙니다. 메갈 안에 분명히, 도를 넘은 이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일전에 같은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도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휴머니즘 안에서의 페미니즘을 강조한 한 페미니스트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지요. 저도 분명 그네들의 광기어린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네들의 섭섭한 지점을 이해했지만 나중에 그들이 가해자라고 지목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조롱하는 걸 보면서 저도 섬뜩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저 또한 5.18이 문제냐고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5.18이 문제냐고 하는 메갈을 보면 아득해져요. (물론 그 글이 조작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메갈 사칭이거나)
하지만 그 안에서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 메갈이 워마드 계열과 분리되어 나간 것처럼, 여성의 분노가 심화되는 그 지점에서 분명 문제의식을 느끼고 변화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거에요. 페미니즘의 페자도 관심없던 제가 우에노 치즈코나 록산게이의 책을 사서 보겠죠, 애들을 가르치는 제가 “우리 누구누구는 진짜 사나이라서 이런 걸로 안 삐지지~~”하고 골난 아이의 마음을 풀어주던 걸 다른 방식으로 하게 되고요.
민주씨가 페미니즘에 오랫동안 관심이 있었고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메갈이 하는 게 너무 한심해보이고 답답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답을 모르고 방황하는 건 메갈이나 민주씨나 누구나 똑같다고 생각해요.
한국에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는 것을 인정하시잖아요. 여성이 실질적으로 위협과 차별을 받고있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메갈의 방법론을 비판하고 싶다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시켜주고 싶다면 “우리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긴다. 효과적인 설득이 안 된다. 어떻게 어떻게 하자.”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요.
“메갈은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페미니즘에 위배된다. 메갈은 위험하다.”라고만 말씀하시잖아요. 근데 그 말은, 그 뉘앙스는, 대안없는 비판이고, 페미니스트이고 싶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민주씨가 비판하는 메갈하고 똑같은 모습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말하죠. 설득을 하고 싶으면 상대방을 설득하는 법을 탐구해야 한다고. 그건 메갈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3. 강남역살인사건은 글쎄요. 전 프로파일러도 정신분석학 박사도 아니니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성혐오적 맥락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맥락도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더해 그 사건에 대해 여성이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단편적인 그 사건 하나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 이후에 그 사건을 대하는 많은 남성들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김치년들이 살인유발자라느니, 흔들고 다니니 먹힌다느니, 피해자는 얼굴이 못생겼을 거라고 그러니 가해자가 성폭행 안 당하고 그냥 죽인 거라느니, 그러게 왜 밤늦게 다니냐느니.. 실제로 포털 사이트 기사에서 이런 댓글을 봤구요.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살인이든 간에 한 정신이상자의 범행이든 간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행이든 간에 중요한 건 민주씨가 말씀하신 대로 이번 한 번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겠죠.
만약 여기서 여성이 우리를 향한 차별과 폭력에 침묵한다면, 여전히 ‘김치녀’ ‘된장녀’ ‘맘충’같은 말을 ‘써도 되는’ 사회에 머무른다면, 그 다음 타겟은 다른 약자 즉 성소수자나 노인, 아이들이 범죄의 대상이 될 거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가해자는 남성 뿐이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탈북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가해자는 여성과 남성 성별을 떠나 모두이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사건을 여성혐오범죄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민주씨 마음은 알겠어요. 한 사건이 일어난 데에는 그의 개인사적인 맥락도 사회적인 맥락도 여러가지 이유와 맥락들이 있는데 그것을 섣불리 한 가지 범주의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전문가들 판단에 이 사건이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 한들 한국사회에 여성혐오가 없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그걸 민주씨도 인정하셨구요.
메갈이 이 사건을 ‘여성혐오범죄다’라고 단정짓는 한편 그 사람들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다’라고 쉽게 단정짓고, 그것을 정신분열자의 소행으로 치부하는 데서 더 나아가 이 사회에 여성혐오가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혐오’를 얘기하는 이들을 분탕종자로 취급하고 있어요. 여성들은 그 지점에 대해서도 점점 분노를 더해가고 있다고 봅니다.
4. 마지막으로 여성이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상정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하거나 보호를 받고 싶다고 절대로. 생각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정말 남자친구가 집에 바래다주지 않아도 두려움없이 귀가하고 싶고, 친구를 택시 태워보낸 뒤 꼭 잘 들어갔는지 확인 안하고 싶고, 주차장에서는 주차하자마자 문 잠그고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내리지 않고 싶어요.
민주씨는 여성이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상정함으로써 어떤 이익과 보호를 받는다고 보세요? 여성전용주차장이나 여성안심택시, 데이트 할 때 여자를 인도 쪽에 걷게 하는 거, 군대 안 가는 거.. 뭐 이런 거요? 남자니까 무거운 거 들어주고, 그런 보호를 받고 싶어서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상정한다고 믿어요?
아아_제발. 그런 이익이나 보호같은 거 하나도 안 바라니까 제발 여자라고 차별받지 않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어요.
(무거운 거 들어주는 거 진짜 별 거 아니잖아요. 내가 못드는 무거운 걸 남자가 들어주길 바라면 그 사람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격이 없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전 기차를 많이 타는데, 할머니들은 대게 유모차같은 것에 무슨 짐을 바리바리 넣어서 다니세요/ 기차타고 오르내릴 때 저는 그걸 항상 들어다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착하다고 어필하려는 게 아니고 성별의 문제를 떠나서 신체가 더 건강하고 힘이 세고 자유로운 사람이 아프고 힘이 약하고 신체가 자유롭지 않은 사람을 돕는 건 제겐 그냥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정말이지, ‘된장녀’ ‘김치녀’ ‘여자는 회와 같아서 싱싱할 때 쳐야 제맛인데 그게 삭으면 또 홍어회가 되서 맛잇기도 하고 남으면 매운탕 끓여먹어도 된다’ 이런농담하면 남여 불문하고 성차별주의자 취급받고 무식하다고 욕먹고 그런 사회가 오면. 취업할 때 남자친구 있는지 결혼계획 있는지 결혼했으면 아이계획 있는지 그딴 거 안 물어보는 사회가 오면. 남자는 3년 하면 대리, 여자는 5년 하면 겨우 계장 요런 승진 체계를 갖고 있는 회사가 없어지면. 여자에게만 유독 엄격한 외모잣대가 드리워지는 현실이 개선되면. 그걸 문제시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이 되면.
그러면 저도 진짜 군대도 가고싶어요. 모든 것이 평등해졌는데 의무도 평등하게 안 질 이유가 없어요.
5. .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아이를 폭행한다고 해서 그것을 여성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하셨죠?
지난 세월 여성도 사흘에 한 번씩 남자친구나 남편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고, 남성에 의해 성폭행 사건이 그렇게 많이 발생해도 그걸 ‘남성’의 문제로 치환해서 보지는 않았어요. 미친놈, 또라이의 소행으로 생각했죠.
이번 강남역살인사건에 이르러서, 이제 여자들은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지금까지 여성이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맞고, 헤어지자 했다는 이유로 염산테러를 당하고, ‘안전이별하시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나돌고, 여성을 상대로 한 성추행과 성폭행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은단지 남성 개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의 불평등한 젠더관계와 폭력적인 남성성, 여성혐오와 맞닿아있다는 것을요.
그것을 강하게 어필하려고 하다보니 “남성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 “살녀주세요 살아남았다”이런 문구가 등장한 것 같은데.
그것이 주는 반감이나 긴장감, 거부감, 그것이 유발하는 갈등보다 더 심각하고 더 위협적인 갈등이 여성 앞에 존재해요.
남성이 왜 여성을 혐오하는 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연구와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있었어요. 표창원 교수도 이에 대한 견해를 내놓은 적이 있고, 신문 기사에서도 여러가지 사설을 내놓았습니다. (주로 경쟁사회에서 도태된, 남성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에 있는 이들이 자기의 열등감이나 불안감을 여성 탓으로 돌려 위안받고자 한다는 분석을 많이 봤는데. 취업이나 경제적 갈등은 남성만 겪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남성만 여성을 때리거나 위협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토록 분노하는 여성들에 대해서, 왜 여성이 이토록 분노하는 지에 대해서는 분석을 하지 않네요. 그저 “메갈과 일베는 동급이다”라고 할 뿐. 저는 그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서럽기도 하고요.
참 길이 글죠. 미안해요ㅠㅠ 그냥 이야기하듯이 쭉 써내려갔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건드릴 깜냥이 아닌 걸 건드린 기분입니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 상대방 의견을 듣지 않고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비하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해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메갈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각자 얼마나 똑똑하게, 세련되게, 지혜롭게 자기 자리에서 페미니즘을 위해 애쓰는 지는 모르겠어요. 오늘 강남역 살인사건 추모현장에 포스트잇을 쓰고 꽃을 놓는 사람들에게 “너네 싸우자는 거지?”라고 얘기하는, 메갈보다 현명하고 지혜롭고 똑똑한, 진정한 페미니스트들은 이 나라의 여성혐오를 멈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나는 메갈의 모든 방법론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광기어린 폭력성을 우려하면서도 그들을 계속 지지하려 합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에 이렇게 여성혐오가 문제시된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오늘 강남역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꽃을 놓는 이들을 따듯하게 바라보려 합니다.
여성 뿐 아니라 앞으로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 성소수자나 탈북자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등이 이러한 류의 범죄의 피해자가 될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제 나름의 다짐은 여성 뿐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그네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거, 그들 편에 서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건데.
일단 오늘은 여성이 죽었고 여성이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드는 위협 앞에 직면해있으므로 전 여기 있겠어요.
모두에게 따듯한 밤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살인범이 정신분열증이란 것을 왜 간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서구에서는 정신질환자, 그 중에서도 특히나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자가 벌인 살인사건에 대한 판례가 많은 편인데, 대개는 살인범이 쾌락을 위해 살인하지 않았다는게 증명되고, 동기가 정신분열 때문이라고 판결나면, 사형은 커녕, 징역도 보내지 않고, 병원에 치료감호 시킨다. 때문에 살인죄에 대해서 아예 무죄판결이 나는 경우도 있다. 대신 수 십년 단위의 치료감호거나, 무기감호를 받는다.
너무 결론 지어놓고 몰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정말 나뿐인가?
약 20년 동안의 중증 정신분열증자. 게다가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고, 행려병자와 다를바 없이 지내던 살인범. 그 살인범이 경찰에게 진술한 몇 마디. 그 진술을 경찰로부터 전해들은 기자가 쓴 살인범에 대한 정보 몇 줄. 그것만 가지고 바로 여성혐오가 범죄동기라고 진단 내린 서천석씨. 다들 서천석씨 주장만 보고, “전문가가 맞다고 하니까 맞는거다” 식의 주장을 하는데, 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그래, 모두가 저 살인범이 정신분열증자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정신분열증자가 “여자가 날 무시해서”라는 진술 한마디까지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정신분열증자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해 여성혐오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정신분열증자의 말을 그대로 납득하기 어렵다. 어떤 정신분열증자가 “이게 다 주님 때문이야!” 라고 한다고해서 우리가 기독교 교회들을 둘러싼 불신과 혐오에 대해 각성을 촉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프로파일러, 오윤성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여성혐오를 너무 강조하는 것이 사건의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별개로 나는 서천석씨가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정신분열증자에 대한 심리를 하는지 그 새로운 심리기술에 대해 학계에 보고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술이 한국인 특유의 관심법은 아닌지 의심스럽지만, 그 부분은 서천석씨가 학계에 보고해야겠지.
아무튼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자가 진술한 몇마디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더라도 상대를 향해 무자비한 칼날을 휘두르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자의 정신분열이 아닌, 여성혐오가 범행동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아무리 누군가가 혐오스러워도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또한, 모든 정신분열증자가 피해망상 장애에 빠져있다고 해서 살인을 하진 않는다.
+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정신병원 불법감금, 강제입원을 다루는 <추적 60분: 7년간의 감금, 나는 미치지 않았다>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