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식, 권리

“한국 이민자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이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평생 대다수의 일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소수라는 그 개념조차 없습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봤을 뿐 자신들이 소수민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ㅡ 인구통계학자, Leo Estrada

 
독일 유학생들의 네트워크나 내 최근 글에 대한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 스스로의 인식을 생각해보면, 일련의 일들이 다 설명되기는 한다. 그 중 확실한 것 한가지는 한국인들은 대개 우리가 서로 동등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등하지도 같은 위치에 서있지도 않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차별 받지도, 행하지도 않는, 폭력의 고리를 끊는 일에 대해 말하고,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평등이나 권리는 권력자가 어느날 갑자기 피권력자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가 주체의식을 갖고, 자신의 권리만큼 다른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것 또한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

한국은 공동체 사회라고들 한다. 하지만 여기에 공동체란 없다. 이들의 사회는 특정 권력이나 계층이 집단을 통제하고, 개인이 집단에 속하기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헌신해야만 하는 사회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집단들이 형성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홀롭티시즘은 권력에 동화되어 특정 권력을 위한 복종의 임무를 ‘대의’라는 이름으로 매우 성실히 수행한다. 이 곳에 개인의 주체는 없다.

유럽에서는 나, 개인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규범, 규약, 또는 관습의 형태로 남았다. 하지만, 이 것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또는 통제하는데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전자의 예가 바로 ‘얀테의 규범’이며, 후자는 ‘독일의 관료주의’이다. 후자로 인해 좌절되는 개인들을 보면서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비판하였는데, 그 말이 현재에는 ‘Kafkaesk’라는 단어로 남았다.

“프라하의 한 엔지니어가 런던의 학술 토론에 초청되었다. 그는 런던으로 가 학회에 참석한 후 프라하로 돌아온다. 돌아온 지 몇 시간 후 그는 사무실에서 당 기관지 <루데 프라보>를 읽는다. 거기에는 런던의 학술 대회에 파견되었던 한 체코인 엔지니어가 서방 신문들에 사회당을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서방 세계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러한 성명과 결부된 비합법적 망명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십여 년의 감옥 살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그 엔지니어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사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그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가 말한다. 맙소사, 당신이 돌아오시다니! 현명하지 못한 처사예요. 당신에 대한 글을 읽었죠?

엔지니어는 비서의 겁에 질린 눈을 보았따. 그는 <루데 프라보>편집장을 찾아간다. 편집장은 미안해하지만, 기사 내용은 내무성에서 보내왔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엔지니어는 내무성을 찾아간다. 그들은 런던 주재 대사관 비밀 정보원으로부터 이 보고서를 받았다고 말하며 정정 기사를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엔지니어의 생활은 이제 조용해질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엄중하게 감시당하며, 전화를 도청당하고 길에서는 미행당한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이제 그는 잠조차 잘 수 없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불법적으로 자신의 조국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진짜 망명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ㅡ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중에서..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첫째,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는 관료들의 착오로, 십 년 전의 초청장을 받고 성에 도착한다. 그의 실존 전체가 하나의 착오이다. 카프카적 세계에서 서류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흡사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서류상 착오의 그림자.

셋째, 벌 받는 자는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부조리를 감당할 수 없어서 벌 받는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합리화한다. 벌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벌은 죄를 찾아낸다. 카프카의 <심판>에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발당했는지 모르는 K는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아주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모두’면밀히 검토해보기로 결심한다. 피고가 자신의 죄를 찾는 것이다. <성>에서 아밀리아는 성의 고관으로부터 음란한 편지를 받고 그것을 찢어버린다. 성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밀리아의 가족을 피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변호하고자 하지만 누가 선고를 내린지 알 수 없거니와 사실상 선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성에다가 딸의 죄를 선고해달라고 청한다.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는 먼저 죄인이 되어야 하므로 벌받는 자가 사람들에게 죄를 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벌은 죄를 찾아낸다.

넷째, 프라하의 엔지니어 이야기나, 카프카의 이야기는 농담 같은 성격을 띤다. 카프카적인 것은 우리를 코믹한 것의 무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것은 비극적인 것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것을 알의 상태에서 깨뜨려버린다. 엔지니어는 조국을 잃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모두 웃는다.”

“무서운 것은 카프카적인 것이 전체주의나 관료적인 상황 아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늦잠을 잔 아들로 인해 지나치게 상심하고 화가난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의 아들이 말한다.

“어머니가 심한게 아니에요. 그래요. 제가 늦잠을 잤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나무라시는 것은 더 깊은 이유 때문이에요. 저의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꾸짖으시는 겁니다.”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매우 일상적이고 더할 수 없이 인간적이며 친숙한 상황을 지배하는 메커니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많이 봤는데, 사람들은 싫어하기로 한 사람에게서는 싫은 이유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것은 괜찮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싫다는 것과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꼭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대신 상대에게서 기어코 어떤 원인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정말로 벌은 죄를 찾아내고야 만다. 일상적이고 친숙한 상황에서 매우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가정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직장 동료에게서 흔한 일이다. 아이를 실수로 혼내놓고, 아이로부터 잘못을 고백하도록 했던 일이 나만해도 몇 번 있었으니까. 이런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인 것 같다.” ㅡ 출처: http://blog.naver.com/snowclose/220421352392

 

ㅡ 2016년 8월 29일 오후 4시 57분, 권리로의 투쟁..

♥♥♥♥ Kein Platz für nazi in der koreanischen Punk und Hardcore Szene! Auch! ♥♥♥♥

Kein Platz für nazi in der koreanischen Punk und Hardcore Szene! Auch!

코리안 펑크 하드코어 포스트: 링크

 

(한국어 번역 밑에) Many people took notice of the anti-Nazi picture that accompanied last week’s list of shows. Others also noticed that one of the bigger shows from last weekend was missing from the list. We would like to take a moment to explain both. For years, there has been a very small group of bands and individuals in the Korean punk and hardcore scene who have used racist/Nazi symbolism and ideas in their music and live performances. At best, these things have been done for shock value. At worst, these are things that these bands actually believe. In the past, it has been argued that these groups are merely nationalistic and not racist or supporters of Nazism, and their actions have been largely ignored. Recent events have led to a larger discussion throughout the scene about how to respond to these things. There have been incidents of bands doing the “sieg heil” Nazi salute on stage, creating merchandise with obviously racist slogans, and intimidation towards bands refusing to appear on a bill with these bands. The moderators of this page had a long discussion about how to address this situation. A vote was taken, and we have decided that we will no longer list shows that include these few, specific bands. We will also no longer list shows sponsored by record labels who support these bands and try to defend their unacceptable actions. This was not an easy decision and not one that was reached unanimously. We are not here to promote censorship or tell people what they can or cannot do. However, we have decided that we will no longer aid in promoting shows that expose people to the glorification of some of the worst ideology the world has ever seen. Feel free to further the conversation by sharing your thoughts and opinions in the comments section of this post. -Korean Punk & Hardcore Facebook page moderators
많은 분들이 지난주 공연 소식 포스팅에 함께 올린 “안티 나치”사진을 보셨을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공연 소식중 한개의 공연이 저희 리스트에서 누락되어 포스팅되었습니다. 이 두가지의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몇년동안 이 씬에서 몇몇의 소수 밴드들과 소수의 사람들이 인종차별과 나치를 상징하는 행동과 언행을 그들의 음악과 무대위에서 공연중 표출하곤 했습니다. 그 행동들은 의도했던 아니던간에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또한 그들이 나치와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지지한다는 것에 대하여 알리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저희 코리안 펑크앤 하드코어 페이지 운영자들사이에서 많은 의견이 오가며 이들이 과연 왜 이러는 것일까에 대하여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들은 단순히 지극한 국수주의자들이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혹자는 나치지지자들이다 등 이야기가 오갔으나 일단은 결론을 낼 수 없어 상황을 무시하고 큰 목소리를 내지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심각하게 다시한번 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지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무대위에서 “Sieg Heil(어깨위로 한쪽팔을 들어 경례하는 나치의 전형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너무나도 뻔한 인종차별발언이 담긴 머천다이즈를 발매한다거나, 나치성향의 밴드와 함께 공연하지 못하겠다는 밴드를 오히려 역차별한다거나 하는 등의 말도안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본 페이지의 운영자들은 이 현상과 사건들에 대하여 어떠한 행동과 태도를 취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오랜시간의 토론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의견을 취합하여 결정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몇몇 나치성향의 특정 밴드들과 그들의 파시즘을 지지하고 동조하며 그 밴드들을 옹호하는 레이블의 공연정보는 더이상 저희 페이지에 리스트하지않으며 그들의 공연을 지지하지않기로 하였습니다.
여기까지의 결정을 내리는 일이 확실하게 말씀드리지만 분명히 쉬운일이 아니었으며, 운영자 모두가 만장일치 합의하에 결정된사항도 아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펑크록는 모두의 의사와 자유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정신임을 우리는 알고있습니다. 이 페이지의 운영자들로서 어떠한 특정한 것에 치우쳐 검열하는 자세로 여러분들께 이건 하고 이건 하지말라고 할 권리도 없으며 그럴 의사도 절대로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전세계를 상대로 끔찍한 일을 자행하던 존재와 사상들이 멋지고 쿨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은 옳지않다고 판단하였고” 저희는 더이상 이에 관련한 공연포스팅을 하지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이 논제와 결정사항에 대하여 이 글 밑에 코멘트로 토론하거나 의견을 나누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코리안 펑크 앤 하드코어 페이지 운영자들 올림.

니 하오는 인종차별이 아니야

베를린소개서 포스트:

서양 사회 그리고 차별에 민감하다고 널리 알려진 독일 사회에서도 동아시아인의 외모를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일상적인 인종차별과 성희롱, 성추행은 만연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시아권 이민자가 많았던 미국 등의 영어권 국가에서는 이 문제가 그나마 수면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지만, 유럽 대륙 내에서의 동양인 인종차별은 악의가 없이 발생하는 심각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 정도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악의 없는 행동 자체도 분명한 인종차별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일상의 인종차별부터 심각한 인종차별 범죄에 대한 경험을 누군가 작업을 하고 공론화를 해주었으면 싶었는데, 얼마 전 구글 문서를 통해서 해외 생활 도중 인종차별 경험을 겪은 사연을 수집하고, 내년에는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작업은 독일에는 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그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이자, 일상적으로 차별을 느꼈던 이들에겐 아픔을 공유하고, 동시에 동아시아인의 외모를 지녔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일상의 인종차별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의미있고,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시아인에게 백인들에게 당신들이 하는 중국인사 “니 하오”는 인종차별이라고 문제제기 하는 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인종차별인가 하고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나 또한 수 없이 겪었고, 이런 것을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어왔다. 하지만 정말 백인에 의한 중국인사 “니 하오”를 인종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주장을 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분명 몇가지 이유와 오류가 함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유럽 45개국과 아프라카 53개국, 아시아 53개국, 남미 12개국, 오세아니아 14개국, 아랍 22개국 등의 사람들을 외모만으로 인지하고, 해당 국가의 인사정도는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

백인들이 아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니 하오” 혹은 “곤니찌와”를 말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영향력이 있는 국가들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 태국, 인도 등이기 때문.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앞서 말한 유럽 45개국과 아프라카 53개국, 아시아 53개국, 남미 12개국, 오세아니아 14개국 등의 사람들을 외모만으로 인지할 능력은 고사하고, 과연 몇 개국의 이름과 인사들을 알고 있을까? 외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북한 독재자 ‘Kim Jong Un’과 함께 한국인 중 약 21퍼센트가 성씨 ‘Kim’을 갖고 있는 것을 흥미롭게, 혹은 기묘하게 느끼는 것만큼 우리는 해당 국가들의 이름관계들은 잘 알고 있을까?

The Columbia Encyclopedia, 2000년 판에 의하면, ‘Muhammad’라는 이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름으로 현재 150만명 정도가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검색을 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Muhammad’라는 아랍식 이름이 ‘Mohamed’, ‘Mohammed’, ‘Mihemed’, ‘Muhameti’, ‘Мұхаммед (Mukhammed)’, ‘Mamadou’, ‘Mahometus’, ‘Maometto’, ‘Μωάμεθ (Moameth)’, ‘Mahoma’, ‘Maomé’, ‘Mamede’, ‘Mahomet’, ‘Муха́ммед (Mukhammed)’, ‘Магоме́д (Magomed)’, ‘Магоме́т (Magomet)’, ‘Моха́ммед (Mokhammed)’, ‘Муха́ммад (Mukhammad)’, ‘מוחמד (Mukhammad)’ 등으로 불리우고, 중국어권에서는 성자는 ‘穆罕默德 (Mù hǎn mò dé)’으로, 일반 사람들은 ‘买买提 (Mǎi mǎi tí)’으로 불러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을까. 한국보다 더 많은 영향력은 갖고 있는 아랍권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이 이름 마호메트 또는 모하메드는 무함마드를 영어로 쓴 것을 번역한 표현한 것이라는 정도, 그리고 이슬람의 예언자였다는 것이며, 아브라함, 노아, 모세, 다윗과 같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선지자이다.

다시 “니 하오”, 차별 논란으로 돌아와서.. 칭챙총도 아니고, “니 하오” 같은 중국인사마저 아시아인에 대한 타자화나 차별이라고 규정한다면, 한국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방송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은 민족주의에 기반한 동화주의로 하여금 김치와 같이 매운 음식부터 시작해서 한국인들 일부도 꺼려하는 청국장이나 삭힌 홍어와 같은 발효 음식을 반강제로 먹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은 한국이 세계에서 알려지거나, 영향력 있는 국가라고 여기는 것인데, 지금의 사드, THAAD 논란과 맥을 같이하여, 한국은 미국에 의해 식민지와 전쟁에서 겨우 벗어나 한국전쟁을 통해 분단을 겪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세번의 독재, 그리고 네번의 IMF(1차 : 1964 2차: 1974 3차: 1982 4차: 1998)를 겪고, 해외여행자유화가 된지는 고작 만 27년 밖에 안 된 아시아 끝의 작은 나라이다. 최근에서야 ‘유튜브’와 같은 미국 인터넷 미디어 서비스를 통해 ‘싸이’와 같은 스타와 삼성의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이 한국이 국제사회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이 한국인인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많은 한국인들이 코피 아난 전-유엔사무총장이 가나인인지 모르는 것과 더불어 유엔사무총장은 특정 국가를 대표하는 직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2007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위원장 레지 드 구테)는 ‘한국 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하고, 한국이 실제와는 다른 `단일 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짜로 ‘교육, 문화, 정보 등의 분야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특히 한국내에 사는 모든 인종.민족.국가 그룹들 간의 이해와 관용, 우의 증진을 위한 인권 인식 프로그램 뿐 아니라 서로 다른 민족.국가 그룹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정보들을 초.중등 학교의 교과목에 포함시킬 것’을 한국정부에 권고했다. 보고서에서 위원회는 “당사국(한국)이 민족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영토내에 사는 서로 다른 민족.국가 그룹들 간의 이해와 관용, 우의 증진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한 뒤, `순수혈통’과 `혼혈’과 같은 용어와 그에 담겨 있을 수 있는 인종적 우월성의 관념이 “한국 사회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데 유의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위원회는 “조약 관련 규정에 따라 인종적인 동기에서 저질러진 형사 범죄를 금지.처벌하는 특별한 법적 조치들을 도입할 것을 권고한다”면서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차별금지법’의 신속한 제정을 촉구하고, 이와 관련, 위원회는 “인종 차별 행위들을 처벌하는데 활용 가능한 현 형법 조항들이 한국의 법정에서 한 번도 적용된 적이 없는 것에 우려를 갖고 주목한다”고 말하고, 한국내에서 인종 차별 관련 진정이 없는 배경과 관련해 ▲관련 법제의 미비 ▲법적 구제 가능성에 대한 인식 부족 ▲기소 당국의 의지 부족 등이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및 이를 위해 경찰관, 변호사, 검사, 판사를 포함해 형사 사법 체제내에서 일하는 관계 공무원들에 대한 특별 교육을 제공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했다. (한겨례 기사, ‘유엔, 한국 ‘단일 민족국가’ 이미지 극복 권고’
인용: http://www.hani.co.kr/a…/society/society_general/229825.html) ([국문]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최종견해 (2007): http://upr2012.tistory.com/29)

이러한 유엔의 권고는 한번에 그치지 않았다. 2012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대한민국의 인종차별철폐협약 이행상황을 심의하는 회의에서 공익인권법재단의 변호사들로 이루어진 NGO ‘공감’의 보고서를 참가토록 하였고, ‘인종차별적 외국인 혐오발언이 공개적이고 조직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에도 정부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위원회에서 수차례 권고를 하였음에도 인종차별철폐협약에서 정의하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정의가 한국법에 없고, 차별금지에 관한 기본법이나, 인종차별이나 혐오에 기반을 둔 범죄에 가중처벌이 없는 법 제도가 이행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한국 정부 심의에서 “차별 별로 없다”는 정부 발표에 위원회는 조목조목 지적했다. (“인종차별 별로 없다”는 정부에 유엔이 내린 권고는? – 인종차별철폐위원회 2012 대한민국 심의 관련 NGO 대응활동: http://withgonggam.tistory.com/922)

다시 “니 하오”의 문제로 돌아와서 흥미로운 것은 브리즈번의 한 한식 레스토랑 이름이 ‘니 하오’이며, 오너의 국적을 알 수는 없지만, 짜장면을 비롯한 메뉴들을 미루어볼 때, 한국식으로 조리된 중국음식을 파는 한국식 레스토랑이란 것이다. 만약 “니 하오~”같은 중국인사가 차별이라면, 이런 것도 차별금지법에 의거해 처벌해야 하는 것일까? https://www.yelp.com.au/biz/ni-hao-brisbane

2009년 7월부터는 인도네시아에서 인구 6만의 소수민족 찌아찌아 족에 한글 수출을 시작했고, 2010년 7월부터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찌아찌아족 한글 사용을 공식 승인, 같은 달 필리핀 민다나오섬의 다바오시와 볼리비아에서 인구 200만의 아이마라 족이 시범 교육이 시작되고, 2012년 10월부터는 호주의 동북쪽 태평양의 섬나라 솔로몬제도의 콰달카날주에서 인구 5만의 토착민족인 카리족에게 시범 교육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한글 수출’이라는 단어로 ‘국위선양’을 말하는 한국인들을 볼 때면 이 사람들이 1000년쯤 후에도 “우리가 너흴 도와준거야”라고 말할 한국인들이 떠오른다.

내가 베를린 처음 왔을 때, 참 고맙게 느껴졌던 것은 “나 아직 독일어 잘 못해”라고 이야기 했을 때, “괜찮아, 나는 한국어 아예 못해”라고 미소를 화답했던 친구들이다. 그런 경험을 가진 입장에서 언어 능력 때문에 상대를 불쾌한 존재로 보는 것, 또한 도덕적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 하오”가 인종차별이라면, 영어를 우선시 하는 풍조 또한 영어제국주의, 사대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지 않을까. (https://en.wikipedia.org/wiki/Linguistic_imperialism…)

한편으론 일본기업으로 인식되고 싶어했던 이건희 회장이 또 다시 상기된다. 한국이 중진국이라고는 하지만 중진국이라는 것은 모호한 개념이고 엄밀히 말하면, 한국은 국제적 영향력이 낮은 제 3세계 국가 맞다. 그런 한국이 예전보다 돈 조금 벌었다고,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비교되길 거부하거나 하대하고, 타자화하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같은 것들을 보면, 아니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 Anerkennungskampf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주체의식은 아직 어려운 이야기 일까.

2015년 통계에 의하면, 독일 인구는 약 8천만인데, 그 중에 한국인은 약 3만명 정도 밖에 안 된다. 반면 터키이민자는 벌써 3세대, 4세대가 나왔고, 인구가 800만명이 넘는다. 단순한 인구통계만 보더라도 독일에서의 한국 영향력은 작을 수 밖에 없고, 한국인에 대한 인식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독일에는 스페인 디아스포라, 그리고 히스패닉계나 폴란드, 이탈리아, 로마니아, 그리스계 등이 북미, 영국처럼 영어권 거주자 보다 많으며, 참고로 특히나 독일의 남부, 그리고 이탈리아의 사우스 티롤은 오랜 독일지역이었기 때문에 독일어-이탈리아 구사자가 많다. 베를린 인구에서도 이탈리아 인구는 물론 이탈리아 식당 비율이 상당히 높은 이유가 그런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반면 정치적인 이유로 하여금 북한은 남한보다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두 유 노 싸이/김연아/박지성/김치?” 등의 질문들을 던지는 이유는 일종의 열패감이기도 하다. ‘한국을 알려야한다’ 내지는 ‘한국을 알아야한다’는 오히려 국가주의,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100여년 전, 조선을 식민지화 시키던 일본이 탈아입구를 열망하던 것과 같은 기제에 불과하다. 한국이 좋은 국가라면, 묻지 않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들 알겁니다. BBC에서 한국인들이 자조적으로 자국을 부르는 헬조선을 보도 하지도 않았지 않을까.

한국인으로써 겪는 차별에 대해 아카이브 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의미있고,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프로젝트라 생각되어 응원한다. 하지만 차별에 대한 정의조차 이해가 부족한 사례들이 인종차별 사례로 소개가되어 독일어로 출판된다면, 독일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수의 아시안을 중국인으로 인식하고, 한국인에게 “니 하오”라고 하는 것은 ‘문화적 무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문화적 무지’가 불쾌감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무지’를 ‘차별’이라고 규정지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들을 향한 편견을 먼저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의 바르고 정직하고 친절하고 착해요. 하지만 못된 사람도 있어요. 시끄러운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끄러운 것을 못 참는 사람도 있어요. (…) 똑같은 일에도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울어요. (…)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도 모두 달라요. 어떤 곳에서는 맛있게 먹는 요리를 다른 곳에서는 먹기는 커녕 만지지도 않아요. 어떤 나라에서는 맛있게 먹는 음식이 다른 나라에서는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기도 하지요. (…) 사람들은 아주 복잡하고 이상한 계급과 지위를 만들었어요. 하지만 계급과 지위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모두 지구에 살면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햇살을 받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모두 죽어요.” ㅡ 피터 스피어의 <온 세상 사람들> 중에서..

+ 의문점: 해당 구글독스에 실린 사람들의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인과관계를 알 수 있는 자세한 서술은 없고, 막연히 “나(우리)를 조롱했다”라는 식으로 소위 말하는 ‘(인터넷의) 카더라’식 증언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사실상 증언으로서 효력이 인정 될 수 없거니와 이렇게 인과관계를 따질 수 없는 이런 사례들마저 차별로 규합한다면, 이 프로젝트가 의도한 차별과 아주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설마 이 프로젝트 진행자가 ‘피해자 중심주의’같은 비논리적인 유사과학을 가져오진 않겠지. 개인적인 견해로는 사례들의 서술 능력이 인터넷의 ‘카더라 통신’과 같거나 그보다 못해서 실망인데, 차별에 대한 아카이브및 프로젝트를 만들기 전에 어떤 프로토콜이 있는지가 있긴한가 의심스러울 정도. 한국인 유학생, 여행객들의 국어 수준이 이정도란 말인가.

 

 

ㅡ 2016년 8월 22일 오후 7시 3분, 독일 한인유학생들의 인지능력과 서술능력에 참담함을 느낀다

다자연애자들이 질리도록 듣는 15가지 말들

번역기사 링크: 다자연애자들이 질리도록 듣는 15가지 말들

 

놀라울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모두 다 여기 있다. 다자간 연애는 바람 피우는게 아닙니다. 아무나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와 섹스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개인으로써 존중 받으려 하면서도, 왜 내가 당신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ㅡ 2016년 8월 11일

베를린, 벨카인, 슬로우뉴스에 비판에 대해 짧은 답변

MixMag 기사:
네덜란드의 Beyond 페스티벌에서 베를린 테크노 성지 Berghain 미니어처 도어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문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입장을 거부당합니다.
http://www.mixmag.kr/824

 

유일하게 한국어로 작성된 친절한 벨카인 가이드와 베를린 기사에 암것도 모르면서, 도리어 아는 척 거품 물며 제게 분노를 쏟아내던 분들 다 어디 가셨습니까? 제가 비록 페이스북 호전광이지만, 여러분께 끝까지 친절을 베풀고자 별 말은 안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발 본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아는 척,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가장 큰 소리로 떠들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방향 잃은 분노들을 보면서 속상해야 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만 말입니다.

함께 나누고, 즐기고자 했던 사람에게 비난하는 일은 쉽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한지 깨달았을 때의 멘탈은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으니까요. 분노를 하기 전에는 내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왜 분노하는지, 그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번만 숙고를 해주세요.

하나 더, 재미삼아 즐겨보시라고 벨카인 트레이너 웹사이트를 공유합니다. 마이크와 카메라를 켜주세요. 랩탑에서만 가능합니다: https://berghaintrainer.com

저는 이번주 Klubnacht에 Midnight Operat과 Octave One의 라이브를 즐기러 갑니다. 물론 Don Williams mojuba와 Henning Baer도 기대하고 있구요. 같은 날 Kantine에서 잠비나이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Octave One을 포기할 수는 없거든요. 그리고 다음 주에는 당연히 OSTGUT TON NACHT를 불사르러 갈겁니다. 그 전 날, Lightning Bolt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만.

그 이틀 뒤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언더그라운드 페스티발에서 일하는 겸, 놀러갈 계획입니다.

 

ㅡ 2016년 8월 4일 오전 9시 7분, 여러분을 보고, 저는 그저 웃습니다..

오늘의 교육 기고, 스웨덴과 독일의 정치교육

기사: [31호/2016년 3·4월호] 부당한 지배 –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다시 묻는다

 

조금 늦었는데, 사실 ‘오늘의 교육’에 기고한 글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감사하게도 오늘의 교육은 책을 판매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고자의 의사를 반영하여 인터넷에 공유하기도 하는데, 해당 링크에 들어가셔서 해당 목차를 클릭하면, 드롭박스를 통해 pdf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단체나 기관에서만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단권으로 구입하고 싶으시면, 인터넷서점을 통해 구입 가능하고, 동네서점의 경우도 별도로 주문요청하면 입고 된다고 합니다. 또한 교육공동체벗 웹사이트에서 조합원 가입하여 구독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해당 링크(http://goo.gl/SslVnM)를 참조하시면, <오늘의 교육 – 31호/2016년 3·4월호 ㅡ 부당한 지배 –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다시 묻는다조회 수>를 보실 수 있고, 아래 링크를 통해 제 글을 바로 읽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 해외 사례

100 스웨덴의 오늘을 만들어 낸 노동운동 – 스웨덴의 정치교육 김민주: https://goo.gl/Cmq4kP
ㅡ 다음은 스웨덴 교육청, Skolverk이 밝히는 학교의 교육 지침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학교는 민주적 가치를 기반으로 인간의 삶, 개인의 자유 및 무결성, 평등, 약하고 취약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연대 불가침, 그리고 개인으로서 자신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이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그 책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격려한다. 또한 성별, 인종, 종교 또는 다른 신념이나 성적 정체성, 성적 취향, 연령, 장애 등으로 굴욕적인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특히나 외국인 혐오와 편견은 공개 토론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 스웨덴 사회가 국가의 국경을 넘어 성장하기 위해 문화적 다양성은 높이 요구되는 조건이며, 공통의 문화유산에 스스로의 인식과 참여를 통해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동등한 교육을 위해 학생의 배경, 이전의 경험 등의 능력과 요구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학습, 증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따라서 학교는 적극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기회를 갖도록 장려하기 위해 여성과 남성의 전통적인 성역할을 방해할 책임’이 있다. 학교는 학생들이 주도권과 책임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ㅡ 스웨덴의 정치교육 중 일부

106 누구도 폭력에 희생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한다 – 독일의 정치교육 김민주: https://goo.gl/8XGCpA
ㅡ 다음은 독일 교육학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잡지,
《Zeitschrift für Pädagogik》에서 1973년 평화교육을 주제로 다루었을 때 제시되었던 평화교육의 영역과 주요 내용 일부이다.
· 학생들이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해방을 가능하게 사회를 민주화하는 조건으로 파악하도록 배우는 것
· 학생들이 자신들의 사고와 행위가 사회의 영향에 따라 형성되고, 자신들의 행위의 자유가 사회 안의 일정한 영역에 제한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과 학생들이 자신들을 사회적 과정의 주체로서 인식하도록 배우는 것
· 학생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 학생들이 평화에는 개인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 구조적 폭력이 파괴적이고 몹시 고통스럽고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
· 학생들이 갈등을 파악하고, 해결이 가능한 전략을 분석하도록 하는 것
· 학생들이 사회 체계가 공격성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
· 학생들이 인간의 공격성이 학습된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는 것
· 학생들이 자신들의 공격성과 타인의 공격적 행동의 사회적 원인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
· 학생들이 자신들의 공격성이 타인의 조종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거나 표출되지 않도록 배우는 것
· 학생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파악하고,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임을 깨닫고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
· 학생들이 인종적이고 국수적인 충성심을 버리도록 하는 것
· 학생들이 전쟁이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인간이 저지른 재해라는 점을 아는 것
· 학생들이 평화를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로만 이해하는 것이 짧은 생각임을 인지하고, 평화가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
ㅡ 독일의 정치교육 중 일부

 

ㅡ 2016년 8월 3일

베를린, 관계, 슬로우뉴스 기고 후폭풍

 

글을 읽지도 않고, 반론부터 가능한 어떤 능력을 가진 분들께 놀라고 있습니다. 내일 낮에 마실 그 카페의 커피와 케이크가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고 품평할 수 있다는 그 어떤 분들의 능력이 매우 놀라울 따름인데요. 배우고 싶습니다, 한수 가르쳐 주십시요.

그런데 글은 제발 읽고 반론을 하셔야 제가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습니다” 하고 반박을 하죠. 본인께서들 뭘 읽고, 말하는지조차 기억 못하시면 제가 어떻게 반론을 합니까.

또한 반론을 하시기 전에는 본인께서 알고 계신 것이 맞는지 어느정도 검색정도라도 하셔서 시간낭비를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거론한 내용 중 상당 수가 롤링스톤즈나 바이스와 같은 유명 음악, 문화 매거진은 물론이거니와 베를린에서 유명한 커뮤니티, 블로그들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거나 아예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해 마찰, 문제를 겪고 있는걸 지켜보면서 저는 더욱 친절하게 쓰고자 했던 것 뿐이구요.

링크한 몰리 닐슨은 베를린 노이쾰른서 데뷔한지 10년이 되어 이제는 유명한 싱어이자 디제이, 프로듀서입니다. 아픔을 같이했기 때문에 노이쾰른, 크로이쯔베르그, 프리드리히샤인에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애틋한 사람이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이 곡 제목만 보고, 제가 고의로 여자를 비하했다고 말하실까봐 미리 이야기 드리는데, 글을 못 읽겠으면, 듣기라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ㅡ 2016년 7월 20일 오전 7시 20분, 글을 읽지 않아도 해당 내용에 대한 반박이 가능하다는 분들께.

베를린, 관계, 그리고 슬로우뉴스 기고에 대한 비판

슬로우뉴스 페이스북 페이지의 댓글에서 나에게 쏟아지는 질투와 원망 섞인 구질구질한 댓글들에 일일히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들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린 베를린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26년을 서울에서만 살아가면서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웠던 그런 것들. 나의 정체성, 이를테면 정치와 사상, 성적 지향성, 문화담론, 삶의 태도, 윤리, 또는 라이프 스타일, 심지어 패션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나는 늘 비난을 받아왔다. 비난을 받는데 익숙하다고 해서 그 비난을 늘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 내게 베를린은 손을 내밀어주었고, 나는 그런 베를린을 사랑한다.

내게 서울은 술에 취해 내 모호크를 잡아당기고,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하던 무례한 사람들을 만나기 일쑤였고, 심지어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맥주병에 얻어맞고, 병원에 실려가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의 행색 때문일까, 경찰은 언제나 가장 먼저 내게 잘못을 추궁하였었다.

나는 어디서나 소수자였고, 소수자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나는 펑크고, 문신이 있고, 피어스가 있고, 사람들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고, 오래도록 입어 넝마처럼 된 검은 옷들을 기워입길 좋아한다. 이것만 하여도 구직 인터뷰에서 1분조차 대화를 잇지 못하고 쫒겨난 적이 허다했다. 그래서 나는 한여름에도 언제나 검은 와이셔츠를 입어야만 했다.

내가 하는 밴드를 위해 제발 토요일만이라도 야근하지 않게 해달라고 사장에게 부탁을 하다 결국 주제 넘는다며 따귀를 맞고 해고 당해야만 했다. 물론 사장도 젊었을 때는 좀 놀았다며 스스로를 소개하던, 요즘 속된 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아재’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철이 없다며 조롱을 받아야했다.

나의 정치성은 어떠한가? 어린 시절 펑크를 접하면서 아나키즘에 관한 서적을 읽고, 여러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펑크가 말하는 변화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만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 앞 까르푸 불매운동에 엄마와 함께했고, 평택, 새만금에서 공연하고, 여러 시위들에 참여했다. 여러 진보정당 당원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지만, 한국에서의 아나키스트는 베를린에서 ‘자율주의자(Autonomen: 오래된 맑시스트에서 포스트-구조주의자가 된 좌파들과 아나키스트들)’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허약한 이상주의자이고, 조롱의 대상이다. 나의 정치성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는 다수의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존재와 활동을 조롱당해야만 한다. 그런 가운데 페이스북에서 ‘페이스북 프로필-아나키스트’를 만나는 일은 굉장히 지치는 일이다.

나는 성매매에 반대하면서도 더 직접적인 폭력을 막기위해 성노동을 인정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도 진보정당원들과 부딪혀야했고, 이런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인식이 없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한남충이라고 매도 당해야만 했다. 내가 베를린서 여성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굳이 말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래도 돌아온 말은 역시나 한남충이라는 단어뿐이었다. 굳이 운동이 아니더라도 도덕을 비난 받는 일은 늘 흔했다. 한국의 회식문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성매매에 참여하지 않아 회사를 다니면서도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했는데, 결국 자진퇴사 해야만 했다.

사실 회사를 다니기 보다는 일용직을 전전하면서도 가끔은 일용직에서마저 쫒겨나길 반복하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나에게 가장 끔찍한 시기는 2000년 말쯤 석면해체 일을 할 때였다. 석면(Asbestos)은 그 입자가 보석처럼 아름답다하여 그리스어 ‘불멸’에서 유래된 단어로 폐암, 석면폐증, 악성중피종 등으로 죽음을 불러온다. 석면의 위험이 대두 되면서 서구에서는 70년대말, 80년대 초쯤 석면해체 사업이 완료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 끝을 알 수 없다. 약 10년 째, 석면해체 사업이 활발히 진행중이고, 그 해체 작업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많은 석면해체 노동자가 천식과 진폐증으로 고통 받고 있고, 산재 인정도 잘 되지 않아 투쟁 중에 있다. 나는 일용직조차 구하기 어려워 석면해체 일을 시작했는데, 결국 나는 천식 때문에 세레타이드, 벤톨린을 달고 살아야했고, 점점 불어나는 약값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시 석면해체 일을 해야만 했다. 매일 밤, 잠에 드는 일은 끔직할 정도로 기침을 했었고, 그럴 때마다 작업반장은 끝나고 “기름칠 하면 다 괜찮아진다”며 으레 “우리 팀 오늘 삼겹살 하러 갈까?”를 이야기 했었다. 당시 만나던 친구는 고통스러워 하던 나 때문에 함께 힘들어했었고, 나는 석면해체 일을 그만두고, 더 가난해지길 선택했다.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그 친구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2009년 여름에는 또다른 질병코드를 가진 희귀성 난치질환자가 되었다. 주치의가 일하지 말고, 집에서 요양하기 만을 권하는 그런 환자. 그럼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고. 얼마나 일상적 가난에 시달려야 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열살쯤 현장사고로 평생 일만하다 떠나버린 아버지, 그 이후로 차별적 임금을 받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익숙한 경제적 어려움. 나는 초등학교 사무보조원으로 한달 월급 55~ 60만원쯤을 받으며, 힘겹게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밑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도 방학이 되면, 월급이 없어서 어머니는 쩔쩔매곤 하셨다. 나는 그래서 안다. 편부모 가정에 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필요한지. 어쨌거나 빚을 져서 대학을 가는 일은 내게 무책임한 일처럼 보였고, 바보 같은 일로 보였다. 이 경제적 어려움이 나를 요즘의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처럼 빚에 허덕이지 않게 하였다고 좋아해야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대학 나오지 않은 사람은 일종의 투명인간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과 또 대출이 거절되어 창 밖으로 던져 훔쳐 읽던 책들을 놓을 수 없었다. 오직 대학 도서관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논문과 책들은 나의 친구들과 내게 선의를 베풀어주신 몇 선생님들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이 갖는 학벌주의로부터 멸시는 물론, 학벌사회에 반대한다는 진보정당들조차 고등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책임하거나 멸시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학벌이 조금 부족해도 경제적 성공, 즉 돈만 있으면 학벌에 대해서는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좌파들 틈에서는 경제적 빈곤도, 학벌에 대한 것도 같이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분명 빈곤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도.

오늘까지도. 오늘까지도.

며칠 전 만해도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사실로 날 더러 누구의 장학생 아니냐며 빈정거리시던 분이 있으셨는데, 아는 것만 말씀하시라 하였더니 날 차단하셨다. 물론 그 분께서는 평소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하시며, 자신의 고급 취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력과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좋은 집안인지를 이야기 하시던 분이었다. 몇 달 전의 학벌없는 사회의 논란을 잠깐 복기해보자면, 그 분들은 자신들의 학벌이 존중받지 못함에 학벌주의의 부당함을 이야기 하셨지만, 교육의 기회를 갖을 수 없었던 소수자를 대변하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학벌없는 사회의 자진 해산에 대하여 어떠한 단서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배제된 사람이었으므로.

키가 반만하던 시절, 여자친구건 남자친구건 손잡고 이야기하길 좋아했던 내가, 기쁠 때면, 누구에게든 키스하길 좋아했던 내가 받았던 조롱에 대해서까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이만큼 사생활을 드러냈으면 됐지, 내가 더 새상활을 드러내야할 의무가 있으랴. 하지만 소수자는 나 혼자만도 아니고, 당신 혼자만도 아니란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당신의 권리도 소중한 것처럼. 배제하고 배척하는 정치는 자멸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베를린은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6년 전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친구들은 나를 안아주며,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고 했다. R 교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대한 글을 보시고선 나를 석사수업에 초대 작가로 불러주시고선 학생으로 받아주겠다 하셨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입학 자격이 없는 미수능생이었고, 고등학교 자퇴생이었다. 아시아 정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셨기 때문에 약간의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 독어에 능한 교수님께서는 한국과 같이 상당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을 모르셨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감사했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와 일들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 베를린은 내게 태어나 자랐던 서울과 완연히 다르다. 누구나 기쁜 일을 함께 즐거워들 하고 싶어하지만, 베를린은 기쁜 일은 물론, 힘든 일을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련 기사는 아니었지만, 슬로우뉴스 페이지의 댓글에서는 메갤 내지는 워마드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떤 베를리너들의 자유로운 관계와 성소수자들을 조롱하는 그 배타성, 그 자신들의 배타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이 기사가 쓰여진 그 이유, 베를린의 다양성과 관용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본인들이 관용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주류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문화라고 이해하지 않고, 범죄라고 단정 짓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 사회는 집단의 이해가치에 따른 보편적 정서에 동화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집단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나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나는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에서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와 보편적 정서, 위계질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에도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내가 이들의 폐쇄성에 대해서 분명히 짚은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혹은 내가 너무 경박스러운 것일지도.

이른 아침, 잠시 잡스러운 생각을 적어본다. 나의 생각을 누구에게 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은 이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므로.

 

ㅡ 2015년 7월 20일 수요일 오전 8시 23분, 저들의 자유가 침몰하는 것을 보면서..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

아래는 종전에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기사인데, 이제서야 공개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경험한 베를린의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주의에 관해 서술한 글입니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몇몇 분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하고 소수의견으로 매도됐던 필자의 경험 등이 그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최종 발행이 됐습니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토론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반론과 보론, 비판 기고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 MASAYOSHI SUKITA

데이빗 보위가 사랑했던 도시 베를린. 그는 베를린의 한 지역구인 노이쾰른(Neukölln)을 위해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 MASAYOSHI SUKITAㅡ Time to put Masayoshi Sukita in the limelight.

작년부터 연이은 여성혐오 때문인지 분노에 이글거리는 ‘페이스북-혁명가’들이 너무 많아서 오랜만에 우리가 가진 편견, 혹은 시차적 관점에 대해서 가벼운 잡글을 나눠볼까 한다.

한 달 전쯤, 독일 한국 유학생 그룹에서 룸메이트를 구하는 독일인에 대한 분노의 글이 올라왔었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독일인이 한국인 유학생분께 메일을 보내 왔다. 그 메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이름, 나이 등을 밝혔다.
  2. 룸메이트에게 월세는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3. 더불어 잠자리를 같이하는 섹스 파트너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당연히 그 독일인이 룸메이트 겸 ‘섹스 파트너’를 한국 여성을 대상으로 구했기 때문이다. 이 메일을 읽으신 몇 분께서는 성희롱, 혹은 명예훼손을 거론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본다.

독일에서는 이런 조건으로 동거인을 구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계약 이후가 아닌 계약 이전, 계약 조건에 대해 조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동거조건일 뿐이다. 더불어 아무런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며, 고소 사유가 될 수가 없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주류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문화라고 이해하지 않고, 범죄라고 단정 짓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 사회는 집단의 이해가치에 따른 보편적 정서에 동화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집단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나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최근에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신자유주의 때문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 명제 1. 독일은 성매매가 합법이고, 성노동자가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명제 2. 공개적으로 스윙어클럽, 스와핑클럽, 섹스 혹은 페티쉬 클럽들이 있다.
  • 명제 3. 베를린과 함부르크는 유명한 섹스 관광지며, 함부르크는 관광상품엽서에 섹스와 관련된 상품을 판다.
  • 명제 4. 함부르크의 점거운동으로 유명한 하펜슈트라쎄 바로 옆에 홍등가가 있고, 독일 안티파들과 함께 권리를 위한 연대 투쟁을 한다.
  • 명제 5. 베를린의 번화가인 놀렌도르프플랏쯔에는 나치 때 학살당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추모비와 게이클럽, 게이호스텔들이 즐비하다. 베를린은 LGBT들의 성지다. LGBT 없는 베를린은 상상하기 힘들다.
  • 명제 6. 베를린은 또한 유럽 헤도니스트(hedonist, 쾌락주의자)의 성지다.

2003년 베를린이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을 당시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Berlin ist arm, aber sexy)” 라는 한마디로 베를린을 구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시장도 게이고, 그 역시 베를린의 그 악명 높은 섹스 프렌들리, 페티쉬 클럽인 벨카인(Berghain)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베를린 시의 공식 관광 프로그램에 퀴어들을 위한 투어리즘이 포함되어 있다)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게이,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 (출처: abbilder, Klaus Wowereit, CC BY) https://flic.kr/p/9HEcbh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게이,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 (출처: abbilder, “Klaus Wowereit”, CC BY)

나는 베를린의 자랑인 다문화, 다양성, 관용주의를 이야기하며, 한국 사람들이 베를린의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베를리너의 정신을 느끼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베를린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을 구석 구석으로 인도하지만, 오픈릴레이션쉽(Open relationship: 자유로운 연애, 다자간 합의된 연애)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벨카인(Berghain)이나 킷캣(Kitkat)같은 곳을 권하지 않는다.

LGBT, 헤도니즘(Hedonism, 쾌락주의)과 오픈릴레이션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공간에 있다면, 서로를 존중하는 암묵적인 약속들이 파괴되어 일차적으로는 해당 공간에서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공간 자체가 갖는 공동체에 균열이 가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클럽들은 보안요원들이 방문자 입장을 거부하고 돌려보내는 경우가 클럽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을 훌쩍 넘는다. 대략 벨카인에서 하루에 돌려보내는 관객만 적어도 500명에서 1천 명쯤 될 것이다. 인종차별이 아니냐는 많은 방문자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인종차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 테크노 퍼레이드에서 여성을 괴롭힘으로부터 지켜낸 그 유명한 테크노 바이킹도 베를리너다.

베를린의 클럽 문화 

Nicola Napoli, "벨카인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Vom Berghain zum Inferno)

Nicola Napoli, “벨카인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Vom Berghain zum Inferno)

1.

이곳은 클럽이 아니라 테크노사원 벨카인이다. 벨카인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반이 좀 넘어서였는데 200여 명 이상이 줄을 서고 있었다. 한국 사람이 둘 보였고, 아시아 사람은 대개 일본이나 홍콩 사람이었다. 그 한국 사람들은 너풀거리는 옷을 실로 매어 물감을 들인 옷을 입고, 홍대에 자주 드나들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들어갈 수 없다고 확신했고, 그 예상은 맞았다.

1-1.

물갈이로 악명이 높은 클럽, 벨카인. 대체 어떻게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비EU는 물론 EU시민들로부터까지 인종차별 오해를 사고 있는 베르그하인과 어바웃 블랭크 등의 클럽 입장 및 내부 정책,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토록 만드는 이 빌어먹을 것에 대해 그리고 클럽 내부 규칙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 아마도 한국어 사용자에게 열광 받을만한 친절한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신이 이 가이드를 가지고서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누구도 탓할 수 없고, 들어가서도 벨카인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거의 매주 가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주 만나 친해진 친구들이 있고, 누가 자주 오는지, 가끔 한국 관광객이 와서 적응하지 못하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즐기는지는 완벽하게 글로 서술할 수 없다. 혹여라도 당신이 베를린서 나와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날이 되겠지.

a) 술 취하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당히 흥을 돋우는 정도는 좋다. 하지만 벨카인은 당신이 없어도 충분히 잘 돌아간다.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 취한 당신이 망쳐 놓을 분위기는 사양한다.

b) 너무 많은 약은 안돼.

a)와 같은 이야기다. 당신이 약에 취해 분위기를 타지 못할 것이라면 당신이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인지 그런 것은 관계없다. 그냥 사양한다. 에고이스트는 집에 돌아가 당신의 빈 잔이나 채워라.

당신이 당황하거나 두리번거리거나 흥분에 도취해 있다면, 보안요원들은 약에 취한 당신의 동공을 주시할 것이다. 아무리 벨카인이 섹스, 마약, 술로 물든 곳이라고 하더라도 열린 공간에서 약을 하는 일은 공개적으로 “나를 쫒아내 주세요”라고 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은 속인주의 법을 통용하는 국가이므로 독일에서 약을 했을지라도 한국에 돌아가면 엄연히 범법행위이다.

c) 4명 이상은 안 돼.

사실 3명도 너무 많다. 당신이 LGBT이고, 섹스에 대해 개방되고 우호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떤’ 특혜가 따르겠지만, 여성-남성 조합이 좋다. 혹은 남성, 여성, 여성 정도의 3인 조합은 괜찮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친구들끼리 클러빙을 할 생각이라면 다른 클럽을 알아봐라. (들여보내 줄 일도 없겠지만, 제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꺼져줘) 한국인은 물론 모든 국가의 클러버들에게 다소 낯설거나 불쾌할 수 있는 정책이지만, 베를린 몇 클럽들이 고수하는 이 정책은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다.

생각해보자. 여럿이 입장한다면, 그들끼리 한구석에서 쑥덕거릴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무리 지어 놀게 된다. 그럼 자유로운 대화 같은 것은 애초에 사라진다. 그런 친목을 즐기는 관객들은 오히려 클럽 분위기를 망친다. 낯선 이와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라.

d) 지나치게 알려 하지 마라.

안의 분위기가 어떤지 묻지 마라. 이러한 무례한 행동이 클럽의 분위기를 망친다. 상대를 평가하려 하지 마라.

e) 사진 촬영은 안 돼.

베를린의 몇몇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벨카인 내의 사진 촬영은 금물이다. 입장 시 당신의 카메라 핸드폰에 스티커를 붙인다. 발각 시 강제 퇴장된다. 경고는 없다. 그래도 당신이 항변하며 정황을 남기겠다고 찍으려고 한다면, 당신의 카메라 렌즈는 이미 부서져있을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클럽은 사적소유 재산이고, 그 클럽 내부에 몇몇 규칙이 있다. 이에 법적 하자는 없다. 그래 보상받는다고 해도 당신이 얻을 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사실과 몇 주 후에 수리받는 스마트폰 정도? 카메라는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가져오지 마라. 반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f) LGBT.

사실 이 부분은 크게 말할 것이 없다. LGBT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당장 베를린을 떠나는 것이 좋다. 베를린이 어떤 도시냐고? LGBT 시위해봐야 백여 명 단위밖에 안 온다. 드레스덴이었다면 천 단위의 시위대가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은 그런 도시다. 전 베를린 시장도 게이였으며, 베를린은 게이들의 성지다.

또한, 베를린의 게이들은 여성스럽고 허약한 것이 아니라 근육질에 경제적으로도 약자가 아니다. LGBT 없는 베를린은 상상하기 힘들다. 따라서 게이인 경우 입장이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입장이 허용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베르그하인 관객의 10~20%는 건장한 근육질의 대머리 게이들이다. 이들은 언더웨어만 입거나, 상반신을 탈의하고 노는 편인데, 나보다 약간 크니까, 185cm에서 2m가량 되는 근육질 대머리들이 몰려다닌다. 정신없이 놀다 이들 가운데 갇힌(?!) 적이 있는데, 힘이 세더라. 힘이 세다. 그것만 알아두자.

g) 건강한 마인드.

이들은 멋진 사람들을 원한다. 열린 마음, 그러니까 외모로 상대를 평가하는 행동은 물론, 발언하면 들어간다 하여도 온전히 살아남기 어렵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며, 건방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없다. 입구에서부터 센척을 하는 친구들은 벨카인의 보안요원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조심히 집에 들어가세요.”
“Pass auf, wenn du nach Hause gehst.”

h) 나이?

나이 같은 것은 상관없다. 당신의 마음이 중요할 뿐. 독일에서 크라프트베어크 이외에도 수많은 일렉트로닉, 테크노뮤지션들은 80년 대부터 활동해왔다.

베를린에서는 하다못해 동네 호프집에 준하는 크나이페(Kenipe, 동네 선술집), 게다가 40~ 50대 아저씨, 아줌마들이 가는 곳에서도 크라프트베어크나 큐어, 모터헤드를 들으며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i) 뒷돈은 안돼.

당신이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가기 위해 보안요원에게 돈을 주려고 했다간 당신은 영원히 벨카인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이라면 예의를 갖춰라, 지폐 몇 장 말고.

j) 스탬프 복사.

혹시 지난번에 사용했던 스탬프를 보여준다든가 이미 입장한 친구로부터 팔을 맞대 스탬프를 복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모험은 포기하는 것이 좋다. 영구 입장 불가가 될 수 있다.

k) 피크 시간.

베를린의 클럽들은 일반적으로 새벽 2시부터 5시 사이가 가장 피크 시간이다. 따라서 이 시간을 피하는 것이 좋다. 벨카인과 마찬가지로 밤새, 아침, 낮까지 하는 클럽들은 오전 5시~ 오전 8시가 입장이 수월하며, 음악 또한 보장할 수 있다. 또한, 벨카인은 토요일 밤 12시부터 월요일 점심 12시까지 쉬지 않는다.

하드코어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Hardcore will never die.

l) 섹스.

베를린에는 둥켈라움(Dunkel Raum: 어두운 방) 이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화장실에서의 섹스는 물론, 어둡지만, 열려있는 좁은 박스에서 섹스를 한다. 그것이 베를린의 문화.

종종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하면, 베르그하인, 킷캣 등의 클럽에서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며 서로를 끌어안기도 한다. 게다가 벨카인을 비롯한 몇 유명 클럽들은 악명 높은 섹스 파티를 하는 곳이다.

게이, 레즈비언은 물론 헤도니스트들의 파티다. 당신의 연인과 다자간 연애가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누군가 당신의 연인에게 키스할 때, 질투를 느낀다면, 다른 클럽을 추천한다.

물론 섹스를 거절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절하는 것도 당신의 능력이다. 불쾌하다는 듯이, 불편하다는 듯이 거절하면, 모두 당신과 미소 짓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이와의 키스를 두려워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거절하면 다시 시도 하지 않는다.

다 떠나서 베르그하인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클럽이므로 종종 우발적으로 낯선 이가 당신의 가슴이나 성기를 만지는 일이 있다. 특히나 서구 남성들은 동양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가 크다. 고분고분하며, 복종하는 그런 판타지 말이다. 여성들은 이를 유념해두는 것이 좋다.

m) 드레스 코드.

드레스 코드는 아주 중요하다. 몇 가지 단어들을 나열해 본다.

  • 펑크
  • 사이버펑크
  • 크러스트
  • BDSM
  • 구속복
  • 비키니
  • 수영복
  • 속옷
  • 젖이 드러나는 옷
  • 몸이 드러나는 옷
  • 가죽
  • 라텍스
  • 개목걸이
  • 부츠
  • 오컬트
  • 아방가르드
  • 모피
  • 상반신탈의
  • 하의 속옷 외 전신탈의
  • 검은색
  • 약간의 네온컬러
  • 찢어진 스타킹
  • 망사
  • 편한운동화
  • 문신
  • 피어싱
  • 닭머리
  • 독특한 헤어컷
  • 스카프
  • 중절모
  • 털모자
  • 비유행성 패션 등

이 단어들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캐릭터가 분명할 것. 유행을 따르지 말 것. 따라서 브랜드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옷이나 정장, 구두 등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n) 언어.

베를린의 몇 유명한 클럽들은 젠트리피케이션(Getrification: 낙후된 지역이 고급화되는 현상) 현상이 가속화됨에 따라 이에 연대하고 항의하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다.

당신이 운이 좋다면, 벨카인에 들어갈 능력이 되는 좋은 로컬 친구가 있을 것이고, 함께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이러한 클럽들은 예의상 포기하는 게 좋다. 현지인이라고 하여도 언어가 잘되지 않는다면, 혹은 이러한 로컬 클럽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아주 좋은 생각은 아니다.

심지어 다른 도시에서 베를린의 테크노를 즐기러 왔다가 입장이 거절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신 거주지가 베를린이라고 해서 로컬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유념해야 한다. 인종차별할 필요 없다. 베를린에서는 아무도 당신을 차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별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관광객일 것이다.

o) 입장이 불가능해질 때.

친구가 안에 있다고 호소하지 말자. 구질구질한 인상으로 다시는 못 들어가게 될 수 있다. 낙심하지도 말자. 가까이 Tresor, Watergate, Ritter Butzke, Club Weekend 등 입장이 무난하면서도 재미있는 클럽들이 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그리고 또 나쁜 의미에서 그 클럽들과 벨카인은 비교될 수 없다.

  • 안에서의 인연이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클럽을 나서게 되면 되도록 클럽 안의 일을 모두 잊는 것이 좋다. 베를린에서는 클럽에서 연락처를 주거나 받는 일이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답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당신과 섹스를 몇 차례 했다는 것이 당신과 사귀고 싶어라는 뜻도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났다간 다치는 건 당신뿐이다. 스스로 상처받지 말라. 규칙이란 것은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하는 약속일 뿐,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킷캣 클럽. (출처: Kit Kat Club / Berlin) http://euro-clubs.blogspot.de/2013/05/kit-kat-club-berlin.html

킷캣 클럽. (출처: Kit Kat Club / Berlin)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클럽들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공간 자체가 가져오는 안락함, 그리고 그 말 없는 약속들이 잘 지켜지기 때문이고, 무례한 관객이나 관광객들이 없기 때문이다.

베를린 클럽에 간다면서 가장 멍청한 놈들은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클럽이라고 해서 섹스만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이런 곳을 찾으면, 섹스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는 춤도 추지 않고, 그저 등대처럼 두리번거리며 섹스 상대만 찾는 사람들이다. (사진 찍는 놈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쫓겨난다/)

WIMDU에서 만든 베를린 클럽 지도. 지도는 유명 클럽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언더그라운드 클럽까지 하면, 수 백개에 달한다. http://wimdu.de/berlin

WIMDU에서 만든 베를린 클럽 지도. 지도는 유명 클럽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언더그라운드 클럽까지 하면, 수백 개에 달한다. (출처: WIMDU)

그런 곳이 베를린이다. 테크노의 도시, 베를린의 클럽에서 진짜 즐긴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다. 모든 클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베를린의 악명 높은, 그리고 가장 핫한 클럽들은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다른 도시의 클럽들과 차별된 베를린 클럽의 가치를 표상하기도 한다.

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 서구 문화 전반으로 신문 지면상이나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단기, 장기,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혹여 어학원을 다닌다면, 어학원 선생에게 물어봐도 같은 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문화는 한국에서 돈을 주고 음성적으로 성을 거래하는 것과 달리 취향이 맞는 사람들 간의 합의된 건전한 관계라고 통용된다. 그 유명한 줄리안 어샌지도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큐피트’에서 자신을 ‘위험한 사람’이라며 스스로 소개하기도 했다.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큐피트에서 활동했던 줄리안 어샌지.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큐피트에서 활동했던 줄리안 어샌지.

줄리안 어샌지처럼 이러한 웹사이트들은 단순한 성적 교제만이 아닌 자신의 기호, 철학, 정치성, 주체성, 삶의 태도 등을 반영한다. 베를린을 예로 들자면, 도시 특성상 성적 기호에 대해 범성욕주의(pansexual), 양성애, 다자간 연애라던가, 채식, 혹은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만나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진다.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면서도 페미니스트 남성만을 찾겠다는 메갤의 그 이율배반적인 글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럽 게이들의 성지로 불리우는 클럽 고야(출처: Goya Berlin) http://www.ue30-party-portal.de/event-location/Goya-Berlin

유럽 게이들의 성지로 불리우는 클럽 고야 (출처: Goya Berlin)

돌아와 정리해보자면, 룸메이트를 구할 때, 자신의 기호, 취향, 라이프 스타일 등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독일에서 룸메이트를 구하기 위해 인터뷰해본다면 누구나 익히 알겠지만, 학업, 삶의 태도 등을 목표 지향성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일반적이다.

함께 살면서도 서로 자주 마주치지 않길 원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기야 하지만, 일단 룸메이트라는 정서는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반자적 관계를 의미하므로 같이 자주 식사하고, 같이 놀러 다니고,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이다.

이런 것들을 싫어하는 사람을 비사교적, 혹은 반사회적(A-Social)으로 보기도 한다. 관심사에 대해 서로 이해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독일인, 혹은 유럽 사람들과 룸메이트가 되는 일은 한국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비EU 문화권인 사람들만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일에서 룸메이트를 구해본 사람이라면, 이 일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일인지, 까다로운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룸메이트 하나 구하는데 10명 정도의 인터뷰는 정말로 정말로 흔한 일이다. ‘룸메’ 하나 구하려고 인터뷰를 수십 명씩 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클럽을 가는 젊은 친구들도 있다. 그렇게 잘 놀고도 룸메이트가 못 되는 일도 허다할 정도로 그들과 호흡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과 룸메이트가 되는 일이 드물지만, 집 하나 구하려고 이런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렇다면, 해당 유학생의 이야기 같은 일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매우 간단하다.메일을 받고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안 하던가 그냥 거절하면 된다.

그분께서는 처음이라 놀라셨을 거라 생각한다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지구는 둥글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많다. 그중에서 자신과 맞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 아닐까.

좋은 친구를 찾고, 진탕 마시며, “널 너무 찾아다녔어!”라고 말하는 게 진짜 재미지! 내가 사는 하우스 프로젝트는 어떤 정치적 이상향을 함께하는 공동체지만, 스무 개가 넘는 각자의 방에서 서로 각기 다른 기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함께 살아간다.

누군가 공동체의 독점하지 않고, 수평적이며 능동적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수많은 토론과 회의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아니라면 아닌 거야! 강간은 절대 재미있지않아.

아니라면 아닌 거야!
강간은 절대 재미있지않아. (출처: No Means No)

+ No means No.

이 글은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에 동의하는 글이 아닙니다. 누구든 ‘안된다’, 혹은 부정의 의사를 표현했는데도 관계를 이어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폭력입니다.

나의 관점이나 누군가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때로 유효한 결론과 거리가 먼 곳으로 귀결된다. 내가 어떤 곳에 서 있냐에 따라 나무 그림자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의 디제이 아다나 트윈스(Adana Twins)가 더 도어스(The Doors)의 ‘사람들은 이상해(People are strange)’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 ‘Stranger.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베를린의 아주 유명한 테크노 할아버지 두 분 중 한 분, 올해 68세의 베른하르트 엔스테(Bernhard Enste). 아주 와일드한 언더그라운드 파티를 즐기시는데, 웬만한 젊은 친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매력 터짐 때문에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시다.

실제로 만나보면 왜 그런지 단번에 이해하게 됨! 최근 미국에서 테크노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우리 동네 할아버지 베른하르트 엔스테를 모시고 싶어서 야단이라고 한다.

이 글 본문 중 독일의 클럽 문화에 관한 서술 부분(특히 ‘벨카인’)은 ‘긱가이드(코리아)’에 필자가 썼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편집자)


  1. Kraftwerk: 테크노 음악의 아버지,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
  2. Cure: 78년 결성된 영국 밴드로 고딕 음악의 시초
  3. Mötörhead: 75년 결성된 영국 헤비메탈밴드

페이스북 활동가 앤드류씨께 전함

앤드류씨도 이렇게 갔군요. 본인 스스로 아나키스트, 활동가로 지칭하면서 타인의 도덕을 품평하는데 그쳤던 그 분에게 제가 대체 무슨 활동을 하시냐 몇차례 물었건만, 단 한번도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뚜렷이 이야기 하지 못하셨죠. 이해합니다. 어찌 무슨 염치로 스스로 “나는 어떤 도덕적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라고 선전하고 다니겠습니까. (물론 본인은 몇 메갤러, 워마드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추궁하여 베를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본인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을 여러가지 하셨습니다. 제가 누구 장학생이라구요? 공교롭게도 저는 학교와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오스트리아 교수님이 독일서 저를 받아주시겠다 하실 때도, 그 교수님은 제가 진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걸 모르셨고, 저는 만나뵙고 돌아와서 감사하지만, 죄송하게도 혼자 공부하겠다고 이야기 드렸습니다. 그게 무려 5년도 더 되었습니다. 제가 홍대에서 무얼했다구요? 실제 당사자의 이야기는 들어보셨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지 모르시지만, 상상하고 계신 일을 사실인 마냥 하시길래, 누가 그런 이야기 했는지는 이름 거론하지 않아도 좋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이야기 해보시라니까, 결국 차단하고 도망 하셨군요. (증거를 내놓으라면, 증거를 드릴수도 있고, 당사자와도 최근 만나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둘다 베를린에 살고 있고, 서로를 격려했지요. 그 자리에 함께하던 여러 사람들은 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시나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시면서 페미니즘의 가치에 역행하는 이야기들을 종종하시던데.. 저는 앤드류씨, 당신이 왜 버릇처럼 스스로를 “나는 아나키스트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로 종종 글 시작을 해왔는지 압니다. 본인 스스로께서도 아시겠죠. 왜냐면, 본인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그건 당신이 얻고 싶은 부활절 달걀과 같은 것이니까요. 야구는 잘 모릅니다만, 우리는 누군가 공을 던지거나 받거나, 또 쳐내는 모습만으로도 이 사람이 취미로 야구를 하는지, 혹은 그보다 높은 가치를 두는 리그에 참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앤드류씨, 당신이 어떤 꿈에 잠겨 사는지는 내 알바 아닙니다만,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에 한 것처럼..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를 아는 것마냥 뒤에서 수근 거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타인의 도덕을 논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조차 모르는 것을 태연히 아는척 내뱉지는 마세요. 당신이 내게 ‘참는다’느니 뭐니 하셨는데, 당신이 아는 바에 확신 하신다면, 참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신도 모르는 이야기, 확인도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내 뒤에서 수근거린, 그 부끄러운 일을 얼떨결에 자백한 자체가 한심스럽고, 부끄러우시겠죠.

나는 서울에 가게 되면, 만나뵙고 싶다고 이야기 드렸었는데, 당신은 만나보지도 않은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군요. 당신을 믿고 있는 당신의 친구들이 안쓰럽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만 그러겠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있겠지요. 당신 덕에 당신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그런 혐의 속에 함께 합니다. 스스로 외로운 사람 되지 마시길.. 진심으로 전함.

ㅡ 페이스북 활동가 앤드류씨께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