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cert Review: Crowskin, Wolfbrigade

<Wolfbrigade와 Crowskin의 Flyer>

전 날까지 Staatlichen Akademie der Bildende Kunst Stuttgart의 Rainer Ganahl 교수님과 Kontak을 위해 시간을 보냈는 데, 몇 일 고생 끝에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Wolfbrigade의 공연을 보기 위해 Potsdam을 찾았다. Black Fleck이라는 클럽은 Potsdam의 펑크들에게 사랑받는 공연장으로 알려져 있다. Potsdam은 생각보다 굉장히 작은 도시였고, 주변에 무너진 건물들이 거의 복구 되지 않은 채 방치 되어있었다. Mitfahren 웹사이트에서 단 35유로에 Stuttgart에서 Berlin까지 가는 친구를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일반 왕복 버스가 찾기 어렵고 그마저도 최소 330유로에서 400유로 이상 하는 데에다가 기차도 이와 마찬가지 혹은 더 비싼 가격이니 나에게 Mitfahren 웹사이트는 독일 생활에 필수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Stuttgart에서의 Rainer Ganahl 교수님과의 Kontak에 대해서도 이야기 더 하고 싶지만, 많은 사람들의 요청 속에서도 나의 귀찮음과 이 포스팅의 본연의 의도로 돌아가 후 일을 기약하겠다.
아무튼 Crowskin과 Wolfbrigade의 이 공연이 단 돈 5€라는 사실이 믿겨지는가!

<Die Straße vor Black Fleck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이 날 공연은 Potsdam을 Local Scene으로 활동하는 Cyness라는 Grind Band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공연이 열려야만 했을 것 같은 Berlin이 아닌 Potsdam에서 열렸다. 물론 이 포스팅도 Cyness와 Crowskin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만 하겠지만, 나는 사실 Crowskin에 대해서 그다지 잘 알지 못하므로 그에 대한 포스팅은 나중에 Potsdam의 Crustie, Punks 모임인 Cancer Clan 친구들과 만난 이후에 하겠다.

 

 아무튼 이 엄청난 공연을 앞두고 Black Fleck을 찾아가는 길에서 나와 새봄이는 많은 무리의 Berlin 펑크들이 무리지어 Black Fleck을 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길 찾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ㅡ 사진에 보일지 모르겠지만 ㅡ 도착한 그 곳에서는 공연 시간이 멀었는데도 어림잡아 100명 이상의 펑크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냥 딱봐도 아시안은 나와 새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고, 우리가 가진 커다란 등산 가방들을 대뜸 바에다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보통은 이럴 때 팁을 요구 하는데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Wolfbrigade의 Merchandise를 뒤적뒤적, 과거의 앨범 CD와 LP들 티셔츠들을 보고 곧장 새 앨범 <Damned>와 Wolfpack 시절의 티셔츠를 구매! 그러나 바로 입는건 좀 오타쿠 같은 짓이라 느껴져서 여행자 차림의 모습으로 놀기로 결정하고 맥주를 퍼마셨다.
 이윽고 여성 보컬을 필두로한 Crowskin의 공연이 시작 되었는데 Crowskin은 상당히 질척거리며 절규하는 음악을 기반으로 Potsdam에서는 꽤나 알려진 밴드였다. 나도 좁은 공연장에 가득찬 무리들 속에서 맥주병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놀기야 했지만, 사전에 미리 좀 알아보지 않고 간 것이 밴드에게 미안.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땀에 흠뻑 젖어 보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ejlK5ki428s&fs=1&source=uds]
<Crowskin의 영상은 찍지 못했기 때문에 2년 전 라이브>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과 티셔츠.. 맥주 한병 들고 잠시 열기를 식히기 위해 공연장 앞으로 나갔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왠지 친근한 모습의 아시안이 보였다. 무작정 다가가서 독일어로 말을 걸었는데 잘 하지 못했다. 독일에 가족과 함께 Potsdam에 온지 몇 달 안 되어 아직 독일어를 배우는 중이라 하였고, 우리 또한 독일어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Dodi. 그의 이름은 Dodi였다. 인도네시아 Crust Scene에서 날라온.. 우리는 베를린에 산다며 자주 보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밴드들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R.A.M.B.O 의 투어 이야기를 조금 했고, Clust Bomb Unit 의 투어 이야기도 나누었다. 금새 친해진 이 친구와 맥주를 몇 병 마시고 담배를 몇 개비 연거푸어 피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작은 공연장이 좀 전의 Crowskin 공연 때보다 더 미어터진다. 한번 나가면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상황. 어떻게 보게 된 공연인데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밀고 들어갔다. 안에서 Köpi와 Tommyhaus에서 만난 크러스트들과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선 당연히 Berlin을 제치고 Wolfbrigade를 위해 Potsdam에 와야하지 않겠냐며 서로 씨익 웃었다. 이윽고 Wolfbrigade가 시작하고.. 비좁은 공연장에서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어졌다. 흔들리는 관중의 물결 속에서 가만히 힘을 빼고 있어보니 발이 공연장 바닥에 안 닿았다. 한미FTA 반대 시위에서 겪었던 일을 Potsdam에서 다시 겪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괜스레 울컥했다. 비장한 Wolfbrigade의 음악이 나를 더욱 때리기 때문이었을까?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z9wNMqFvgFw&version=3&f=user_uploads&c=google-webdrive-0&app=youtube_gdata]
<Wolfbrigade in Potsdam>
ㅡ 아쉬운 19초.
<Wolfbrigade in Potsdam>
ㅡ 공연장의 앞부분 밖에 찍지 못했다.
뒤쪽으로는 사람들이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할정도.

 

<Wolfbrigade in Potsdam>
ㅡ Micke.

 

<Wolfbrigade in Potsdam>
ㅡ Erik이 늑대 무리들을 선동하고 있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이 때쯤 나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고 있었음.
 공연은 굉장했다. 아쉽게도 나는 놀아야만 했고, 내 Handy에는 Mape 작업 때문에 용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 19초의 영상과 사진 몇 장 밖에 찍지 못했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누가 Wolfbrigade의 공연을 보면서 멍하니 영상이나 찍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어두운 공간에서 저들은 사냥을 앞둔 늑대떼들처럼 으르렁 대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 대부분이 흔들렸고, 어쩌다 나도 모르게 터진 플래시가 전부.. 나도 아쉽지만, 그 순간의 살아있는 사진은 새봄이 찍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Erik, Johan.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Potsdam Scene에 반가이 화답하는 Erik, Johan, Micke.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대장 늑대 Micke의 포효에 왼쪽 하단에서 Tom Götz가 함께 으르렁 거리고 있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Micke 앞의 가운데 친구는 나와 새봄이 Obscene Extreme Festival에 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
친구인데 온라인에서 본명을 쓰지 않으므로.. Hammerheadphil이라고만 밝혀둔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직업이 Tattooist인 드러머 Dadde.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이 좁은 곳에서 사람들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자유이지만, 내려올 때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왼쪽이 Cyness 드러머, 마치 늑대 대장의 growling에 함성을 외치는 늑대무리 같은.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잠시 멈추고 세팅중에 Johan.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뜨거운 피가 끓는 Micke와 드럼치는 Dadde.
 위 사진들은 새봄이가 필름으로 찍어낸 순간들이다. 나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사진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모양. 어떻게 찍은 사진 모두가 이렇게 굉장한지.. 아무튼 마지막 곡인 것처럼 잠시 Wolfbrigade가 연주하지 않을 때 다른 녀석들이 벌써 끝나면 안된다고 동요할 때쯤 나는 당연히 <Awakening>을 기다리며 “Awaken me! Awakening us! Please!” 를 외치며 growling.. 역시나 Wolfbrigade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Awakening을 포효!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OtK5y4iSedc&fs=1&source=uds]
<Wolfbrigade의 Awakening과 가사>
 공연이 끝나고 나와 새봄 Dodi는 모두 지쳤다. 특히나 나는 땀에 온 몸이 젖었다.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있는데, Berlin 사는 펑크들이 차가 끊길새라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간다. 나와 새봄은 그냥 노숙하기로 작정한터라 남아서 술을 더 마시기로 했는데, 새봄은 별로 마시지 않았고 나는 맥주를 두세병 더 비워버리며 취하기 시작했다. 내가 새봄이에게 오늘은 취하지 말자는 약속을 다 마셔버렸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였다는 핑계를 대보지만 결국 나에 대한 반성과 새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이 든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Jocke와 Erik.. “뭐 오늘 공연은 괜찮았어..” 라는 듯.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Dadde가 Johan과 Micke에게 “나 오늘 드럼 치는거 봤어?”라고 자랑하는 듯.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단란한 늑대가족.. Dadde는 어디가고, Johan, Jocke, Erik, Micke.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다음 일정을 이야기 중인듯 한.. Johan, Micke, Erik
 그 사이에 Wolfbrigade 사진을 새봄이가 찍었는데, 실수로 기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하니 기타가 조금 당황 했었다고 한다. Wolfbrigade는 역시 크러스트들의 살아있는 전설답게 주르륵 넷이 벽에 기대 앉아 팔짱 끼고 입을 다문채 맥주만 마셨다. 나는 Dodi와 Wolfbrigade와 함께 사진을.. 그러나 드럼은 공연장을 찾은 다른 여자 펑크와 이야기하느라 바빳기 때문에 네 멤버만이 사진에 나왔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진탕 취한 나는 Wolfbrigade를 앞에 두고 필름이 끊겼다. 집에 어떻게 온지 잘 기억도 안 나는데 Potsdam 친구들이 도와주고, 새봄이는 진땀을 뺐다고..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문제의 사진..
사진만 보면 내가 공연을 하고, Wolfbrigade가 나의 공연을 보러온 것 같지 않은가?
Johan, Jocke, Erick, 나, Micke, Dodi.
다시는 이렇게 취하면 안 될 듯하다.
 이 사진 찍은 후에 새봄이가 Neonazi에 대한 플라이어를 몇 장 줏었고, 나는 당연히 아닐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새봄이가 궁금해 함에 따라 그곳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는데 Potsdam은 매우 작은 도시라 펑크들이 공연할 만한 곳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Black Fleck 공연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크러스트 공연 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했다.
공연은 정말로 굉장했으나..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의 기억들을 나누고 싶은 욕심을 이렇게나마 아쉬움으로 드러내본다. 그러나 나는 추억하지 않겠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에 묻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포스팅을 쓰는데만도 거의 한시간 반이 걸렸으므로.. Obscene Extreme Festival과 Schöneweide에서의 Anti-Neonazi 시위에 관한 포스팅은 뒤로 미뤄둔다.

Handy로 찍은 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은  Saebom Lee 의 사진이므로 사진의 상업적 사용및 편집, 재가공 등의 2차 저작은 Saebom Lee에게 문의할 것.

ㅡ 2012년 5월 17일

인물 소개: 호머 헐버트

호머 헐버트(미국 1863~1949)

 

미국 버몬트 주에서 태어나 1886년 대한 제국의 초청으로 왕립 영어학교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어 1889년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판했다. 1903년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의 연례보고서에 14쪽의 기고문 <한국어The Korean Language>를 통해 ‘발음기호가 별도로 필요한 영어와 달리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쉬워 조직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평가하고 대중연설의 수단으로 한글이 더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고종 황제의 외교 자문관으로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미국 전역에서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1949년 7월 29일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려 내한했다가 6일만에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의 바람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그리고 호머 헐버트는 한글의 띄어쓰기를 고안해냈다.

Concert Review: Bambix, The Stattmatratzen

 

독일 애들이 원래 그런건지 아님 얘네가 별 관심이 없는건지 플라이어 좀 달라는 말에 “나도 플라이어 없어”라는 답변들이 좀 무성의하게 돌아오는데, 그래도 자주 오는 유일한 아시안이라고 꽤 친절하긴 하다.

 

어쨌던 베를린의 스쾃에서 본 공연들 중 대부분이 그 날 공연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공연 리스트에조차 오르지 않은 밴드들이 허다하다. 밴드 이름 좀 알려달라고! 알려달라고.. 알려달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스티커를 쥐어주는 애들도 있긴 한데… 아무튼 이 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Bambix라는 밴드의 베를린 투어. 밴드는 89년에 결성했고, 풀랭쓰 앨범만 무려 9개 이상이 된다. 보컬/기타 아줌마는 40대 초중반인데 불구하고 미친 듯이 점프했다. 게다가 팬이 가져다 준 예거마이스터를 단숨에 들이키고 벽에 빈잔을 집어던지며 “밤새도록 파티!(Party! Ganzen Nacht!)”를 연신 외쳐댔다. 이 밴드가 공연할 때는 애들이 과격하게 하도 과격하게 놀고 미칠듯이 커서 사운드가 너무 커서 이틀동안 이명현상을 겪었다. (..앞으로 그 대역대의 주파수는 못 듣겠지ㅠ 상관없샤!)

 

아무튼 같은 날 두번째 밴드였던 The Stattmatratzen이라는 밴드를 봤는데.. 진짜 좀 짱. 이 밴드 이름 알고 싶어서 사방에 묻는데, 애(새1끼)들이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해서 비틀대고 답변은 커녕 몸도 잘 못 가누는 애들도 많고, 북적대고 사람들이 죄다 흥분해서인지 “Wie heißt diese Band?(이 밴드 이름 뭐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물었는데, 이 (미7)놈들이 내게 “Prost!(건배!)”라고 대답한다. 이 망할 자식들! 그게 아니고 밴드 이름 물어본거라고 하며 나는 잔이 비었다고 하니까, 지 잔을 내게 넘겨준다. 하아아아ㅏㅏㅏ 펑크들 술 사랑은 세계 공통이구나..

 

펑크들 술 사랑은 이쯤 각설하고, 당연히 멤버 전원이 Antifa인 Riot grrrl 밴드다. 중간에 ‘Eiszeit’라는 곡을 할 때에 “Katastrophe! Kellerkind! Oh Oh Oh!(대재앙! 히키코모리! 오오오!)”가 적힌 피켓 같은 걸 들면서 공연 하는데, 그러면서도 연주는 틀리지 않고 대단했다. 그 노래는 독일판 히키코모리에 대한 비판적인 노래였다. 이 밴드가 모두에게 사랑 받는 가운데 특히 왼쪽의 모호크 머리의 기타가 귀엽게 생겨서인지 인기가 굉장했다. 멘트들은 뭐 안티파 밴드들이 늘 줄줄 외듯 스쾃(Besetzer Haus)을 철거로부터 막아내자고 이야기하고, 관용주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 날 내가 본 공연만한 영상이 없어 아쉽지만 첨부한 링크의 영상을 보면 조금이나마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전원이 여자 멤버인데 오프닝 걸펑크 밴드에 비해 딱히 귀척도 하지 않는데, 새봄이도 멋지기도 귀엽다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Tommyhaus에서 본 공연 중 가장 큰 공연. 사람이 너무 꽉차서 한번 나갔다 오면 다시 들어오기도 힘들정도. 물론 더 큰 공연은 Koepi의 20주년 공연이었다. 그 때는 거의 천여명이 공터에 불 피우고, 가득찬 공연장 3개와 댄스홀, 아나키스트들이 운영하는 인포샵.. 아무튼 그랬습니다. 하아ㅏㅏㅏ

 

ㅡ 2012년 3월 29일

Concert Review: Life

x. 토요일, Life.
물론 베를린 로컬씬의 터줏대감 Pig//Control 과 베를린 로컬 2인조 하드코어-펑크 Mülltüte, 처음 보는 Absurd S.S., 그리고 함부르크에서 날아온 하드코어 Argh Fuck Kill 도 볼 수 있었다.
10시에 칼시작한다고 했지만, 나는 전 날의 세련된 숙취를 즐기며, 11시까지 방구석에 있다가 슬슬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보니 11시 15분인데 시작도 안함. 역시 펑크타임은.. 범지구적 현상인 것이다. 누가 나보고 시간 약속 안 지킨다고 막 까면서 시간 약속 지키라 잔소리 대따했는데, 그 친구는 펑크타임과 같은 범지구적 현상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지 “일찍 나온 놈이 병1신!”

 

이 날 존나 빡친게 두가지 있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거. 왜 Life 의 공연을 AGH 가 아닌, Koma F 에서 했냐는거다. Koma f 작다. 존나 더럽게 작다. 50명 들어가면 못 움직인다. 근데 내가 보기론 어제 최소 150명은 왔다. AGH 에서 했더라도 150명이 오면 간신히 수용할텐데, 대체 얘네는 뭐가 문제라서 AGH 를 개방하지 않은 것일까. 페이스북 이벤트 페이지는 당연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이 고작 50명이라고 되어있었지만, 살아있는 일본 크러스트의 전설 Life 가 베를린에서 공연 한다고 하면 당연히 포츠담은 물론이고 함부르크 같은 도시에서도 올텐데 말이다. 쾨피 내부의 일은 더이상 이야기할 수 없지만, 진짜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는 Life 공연할 때 터지고 만다.

 

이전에 다른 밴드들이 할 때도 공연장이 가득찼고, 답답함을 느끼는 애들은 밖에서 불 쬐고 있었다. 나는 스테이지 앞 쪽에서 Life 의 투어를 돕기 위해 Augsbrug 에서 온 아스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공연 시작하니까 밀려들어오는 관객에 아예 움직일 수 없었고, 더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밀고 들어오려 했다. 그렇다고 어떻게 관객을 탓하랴. 아무튼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술렁이고 있었다. 따닥따닥 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데 Life 의 음악은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고, 나와 몇 남자애들이 돌아가며, 스테이지 앞을 막으면서 놀아야 했다. 몸으로 버티기야 하는데, 결국 일이 터진게 중간에 케이블로 고정시켜놓은 스피커들이 Life 의 기타 멤버 쪽으로 무너졌다. 다른 멤버들은 공연을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했는데, 일단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나와 몇 친구들이 스피커를 다시 올리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지만, 케이블이 잔뜩 엉켜있는데다 스피커의 무게도 상당해 쉽지 않았다. 다행히 곧 공연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해맑게 웃는 Life 의 멤버들을 보니 공연 기획한 친구에게 더 짜증이 났다.

 

또 달리 빡쳤던 일, 어떤 미친놈 하나가 과격한 모싱을 하는거다. 여긴 펑크 공연장이고, 크러스트 공연장이다. 과격한 모싱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러 친구들이 그 놈에게 자제할걸 이야기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Koma f 에서 벌어질 수 있냐는 사실이다. 결국 다른 한 친구가 그 놈을 쓰러트려 물리적으로 제압했다. 사람들은 싸움이 난 줄 알고 말리려 했지만, 펑크들은 쾨피에서 주먹질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우리들의 자율주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놈을 밖으로 끌어내고 여럿이 달라붙어 진정시켜 돌려 보냈다.

 

공연이 끝난 이후에는 Life 와 아스카와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에 Scumraid 와 같이 소중히 지켜주고 싶은 밴드가 있는데, 투어 어떠냐 물었다. 게다가 좀 유치할지 몰라도 내가 일부러 신경써서 Scumraid 티셔츠 입고 갔었다! 근데 Scumraid 티셔츠가 어두운데서는 잘 안보여서 말해주기 전엔 아무도 못 알아봄.. (시무룩..) 아무튼 System Fucker 도 한국 투어 하지 않았냐며, 관심을 드러내보였다.

 

일단 공연이 끝났으니 한잔 할겸 그런 이야기는 후일로 미루고 맥주 한잔하자며, 연락처만 받았다. 사실 유럽 펑크/하드코어나 아나키스트 씬에 아시안이 워낙 없다보니 신기해서 아스카와 이야기 하다 연락처를 받아두었는데, 아스카가 고맙게도 아일랜드의 Easpa Measa 와 본인의 밴드 Nemetona 스플릿 7인치를 주었다.. (독일 아나코 펑크 Nemetona 아니고, 일본 크러스트 Nemetona)

 

같이 이야기 하며 마시다보니 나도 너무 치했고, Life 는 바로 다음날 덴마크 공연이 있어 갔다가 다시 라이프찌히 공연을 하러 온다고 하길래 금방 일어나야지 생각을 했다. 게다가 운전해서 간다길래, 크.. 코펜하겐까지만 최소 7~ 8시간은 운전해야 가는데 걱정이 되었다. 코펜하겐서 라이프찌히까지 또 10시간… 작년 2월 베를린서 예테보리까지 17시간 버스 탔던게 기억났다.

 

어제 존나 웃겼던 일, Life 가 공연하기 전에 독일애들 몇몇이 날 힐끔 힐끔 쳐다보더니 “혹시 Life 멤버?” 하고 물어봄. “미친놈아! 아니라고! 나도 그냥 Life 좋아서 온거라고!” 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으나 “아님, 아님. 나 베를린 산지 3년 됐음.” 이라며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해주었다. 왜냐면, 한 손으로도 셀 수 있는 베를린 씬의 아시안인 날 모르는거보니 다른 도시에서 온 애들 같은 생각이 들어서.. (’12 OEF 때, Yuying 이가 Wormrot 으로 오해받고 사진 찍히던게 기억났다)

 

그리고 Life 의 공연이 끝나고 내 일본어가 짧아 생각나는 말이 단 하나 밖에 없어 “아리가토” 라며 악수를 청했었다. 그러자 멤버들이 날 일본인으로 생각했는지 일본어로 몇마디 대답을 받았다. 알아듣는 척 해볼까 했다. 그런데 되돌려줄 말이 없었다. 잠깐 벙쪄 ‘뭐… 뭐라고 해야하지?’ 생각하다 “미안, 나 한국사람.. 아는 일본어가 ‘아리가토’ 밖에 없음ㅠ” 이라 대답하자 다들 끌어안고 진탕 웃었다.
결론: Life, 크.. 형님들 사랑합니다!

 

펑크 공연들은 다른 음악과 다르다. 단지 내게만 그럴지 모르지만, 펑크 공연에 있을 때는 많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다. 특히나 어제 라이프 공연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얻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 특히나 전자 음악과 함께할 내 새 작업도 펑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펑크를 단지 한낱 흥미거리로 보는 먹물들이나 힙스터들이 이래서 불쾌한 것이다. 차별을 반대한다는 이 사람들은 여전히 본인의 관념 속에서만 대상을 활자화 시키며, 마음을 열고, 눈을 뜨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 속에서 우리는 함께 공존할 수 없으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파괴는 승리하면서 전진한다.

Concert Review: Cockschlag

x. 금요일, Cockschlag

 

 
친구 덕택에 Cockschlag 공연 봄. 존나 좋았음. 가사 때문에 더 좋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 전부를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웠으나 사운드를 강조하는 북미 펑크에 비해 가사에 큰 의미를 두고, 전달력이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독일 펑크는 언제나 흥미롭다. 때문어 비독일어권 사람들이 독일 펑크를 접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Cockschlag 은 굉장했고, 고정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링크하고 싶어도 인터넷에서 아무런 자취도 찾을 수 없다. 다행이도 친구가 LP를 갖고 있어 가사를 설명해주겠다고 씨익 웃더라. 그래서 그냥 빌려주면 내가 읽어보겠다고 하니, 독일어 자체가 그렇겠지만, 독일 좌파/펑크/아나키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는 정치/사회들을 둘러싼 관용표현이 굉장히 많은데 그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저 독일어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예전에 번역한 것들 중 Ernst Busch 같은 정도야 독일에서 공부하는 인문학도들은 다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Ton Steine Scherben, DAF, Grauzone, Across the border 같은 것은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며, Die Ärzte, Gleitzeit, Ratten 07 같은 것은 배경을 모르면 조금도 이해할 수 없거나 정반대로 이해하게 된다.

아무튼 목요일은 글 따위를 읽고 구석에 끄적거리느라 밤을 샜고, 금요일 저녁은 민중의 식탁을 위해 4시간 동안 혼자 20명 분의 요리했기 때문에 조금 지쳐있었다. 게다가 자전거가 또 말썽이라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향기로운 그 애가 나가자고 며칠 전부터 일러둔지라 아무 기대 없이 따라 나섰다.

내가 얼마나 피곤하고 공연에 관심이 없었냐면, 심지어 첫 밴드가 시작한지 10분 만에 구석에서 졸고 있는 것이 친구들에게 발견되었다. 용케 맥주는 안 떨어트리고 들고 있었다. 향기로운 애가 날 더러 피곤해보이는데 끌고나와 미안하다길래, “ㄴㄴ너때문 아님. 내가 왜 널 위해서?” 라고 변명을 내던지고선 곧바로 스피드를 조금 했다.

공연 이후에는 디스코 파티가 있었는데, 나는 춤추는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자꾸 그 애가 날 일으켜 세웠다.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웃고 떠들며 시간 보내다 잠시 둘이 빠져나왔다. 밖에 있던 다른 친구놈들이 “오.. 너 혹시?ㅎㅎ” 이러길래 “ㄴㄴ아님, 그냥 친구임” 이라 말하고, 여긴 아니다 싶어 결국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꽤나 추운 새벽이라 누구의 방에서 마실까 하다 결국 “나는 더 마시고 싶어” 라며 내 방으로 돌아와 두어병 더 비우다 잠듬.
한줄요약: 과연 이것이 공연리뷰란 말인가!

SNS: 좌절감, 분노, 그리고 미소

x. SNS: 좌절감, 분노, 그리고 미소

sns가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건과 사고가 단 반시간 만에 널리 퍼지는 시대가 열렸다. 때문에 부조리에 대해 대중들이 성토하여 바로 잡기도 하고 있다. 반면, 대중들은 작은 일에도 심판하려고 처벌하려 드는 경향이 생겼다. 공인(공법인)이 아닌 일반인(자연인)의 신상을 턴다든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범죄도 어렵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범죄를 저지른 기업가들과 공직자들의 권력 앞에서는 볼멘 야유만을 내고 있다. 그런 좌절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엔터테인먼트 이슈라던가 일반인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영상이나 글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이 사회를 건강하게 할 수 있을까?

좌절감, 분노, 그리고 미소.

‘나의 좌절감이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되지 말아야하며, 누군가의 좌절감이 나의 미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 라 답하고 싶다.

고려대 총학의 언론사 대학순위평가 거부와 투명가방끈

x. 고려대 총학의 언론사 대학순위평가 거부와 투명가방끈

나는 고등교육 필요성의 가장 주요한 근거로서 ‘사회적 분업’ 을 통해 사회적 피로와 갈등, 비용을 줄임과 동시에 발전을 목표로한 ‘공공의 것’ 이라 생각한다.

고등교육에서 사회적 분업의 개념이 빠지면, 특정 계층의 독점이라는 개념이 남는데, 독점이라는 개념만이 남게 되면 결국 고등교육은 부의 축적과 동시에 대학 서열화 문제와 같은 경쟁체제를 낳게 된다. 결국 사회적 피로와 갈등, 비용이 줄어들기는 커녕 그러한 부조리들이 늘어난다. 또한 교육의 공공성이 떨어지게 될 수록, 지금의 한국처럼 자연스레 기업식 대학재단이 들어서며 공공의 것이 아니라 사적영리를 위한 것으로 남게 된다.

독일의 대학:
– 100퍼센트 민간소유의 사립대학이 단 하나도 없음.
– 사립대학 비율 3퍼센트.
– 2009년 독일에서는 등록금(입학등록비및 학생회비)을 50만원 수준에서 80만원 수준으로 올리는 것에 항의하는 25만 독일 대학생이 참가한 대규모 저항이 있었음.
– 학생파업, 철야농성, 가두행진, 대학 점거, 철도점거, 법원과 의회점거, 바리케이트, 화염병, 투석전이 연달아 이어졌고, 그 때 나온 구호중 하나가 “교육은 서비스가 아니다” 였다.
– 결과: 정치인들이 새 선거공약으로 등록금 폐지를 내세우고, 이후 등록금 제도 폐지. 외국인 학생도 등록금 없음.
–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교육부 장관, 테레지아 바우어: “빈부와 상관없이 공부할 기회를 균등하게 주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야 국가가 번성한다. 이를 막는 모든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다.” 라고 발언.
(참고: 지난 칼럼 ‘학벌주의에 대한 단상’)

사실 ‘대학’ 이라는 제도 자체가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생겨난 것이도 하다. 독일도 과거 25퍼센트였던 대학진학율이 현재 35퍼센트까지 늘었는데, 이는 유로금융위기와 더불어 사회적 불평등에 가속화됨에 따라 대학생 신분의 세금, 복지 혜택을 누리고자 졸업하지 않는 학생과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례들을 참조한다면 더욱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나는 대학진학율이 높아지는 것이 그 사회의 불평등과 계급간 격차가 그만큼 커진 것이라고 본다.

한국이 서열화라는 그 한계를 극복하려면, 대학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 대졸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별을 줄여야만 한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 좌파들 사이에서도 아니, 진보정당과 운동권 사이에서도 ‘-사’ 짜 타령하는 사람들이 한 둘 아니고, 그렇게 앞, 뒤 줄을 세운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쾌한 경험은 열에 아홉은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인사 5분 만에 학교와 전공 질문 받는 것들이다. 왜 한국에서 대학물을 먹은 식자들은 이러한 무례한 행동을 일상으로 삼은 것일까. 그게 한국의 교육의 부조리라고 이해하려 하지만, ‘악!’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 매번 든다. 심지어 독일에서 대학 평준화 혜택 받고 다니는 한국 유학생들조차 서열 나누기 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MC 몽과 병역제도

x. MC 몽과 병역제도

법대로 엠씨몽 군대 못 가는게 맞다. 발치가 의도였건 아니건, 이 상태의 치아로는 병역법에 근거해 군대 못간다. 억울하고 분통하면 너도 어금니 쪽 치아 11개를 발치하고, 남은 인생을 온전히 씹지 못하고 살아가면 된다.

연예인은 ‘공인’ 이 아니다. 공직자들이 공인(공법인)이다. 이런 이들의 부정부패와 비리에는 볼멘소리를 내던 대중들이 일개 개인인 연예인에게 이런 폭발적인 반응을 퍼붓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MC 몽의 잘못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 전, 병영 내에서 연달아 일어난 사건과 사고, 조직적 범죄들을 향해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군에 보내나”, “병역법이 무너졌다” 라고 이야기 했다. 우리 모두 지금의 병영문화와 징병제도, 군내 범죄들의 분노하고 위험성을 느끼면서도 MC 몽은 다른 문제다?

군대 가는 놈들이 호구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것은 MC 몽이 아니라 얼마 전 병역제도의 희생양이 되어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윤일병이다.

때문에 MC 몽을 까는 것보다 정치인을 쪼고, 압박해 망가진 병역법을 개선하는 것이 오로지 유효한 답일 것이다. 그의 잘못이야 알겠지만, 그럴 더 대차게 까서 밥줄을 끊어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에게만 분노를 쏟아 붓는 것만으로는 잘못된 관행과 병역법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그 증거가 유승준 이후로 바뀌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병역 부조리와 비리이며, 군내에서 의문사 당한 희생자이고, 되려 성희롱 따위의 모욕을 받는 유족들이다. 결국 한국의 병역제도는 15년 전이랑 조금도 다른 없는 같은 자리에 있다.

10월 24일, 오스트리아의 빈의 영웅광장에서 ‘나치 독일의 군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싸우기를 거부해 탈영했다 붙잡혀 처형된 군인을 기리는 기념비’ 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인츠 피셔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제막식에서 “히틀러의 군대는 우리의 군대가 아니었다”면서 이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렸다. 이 발언이 있던 영웅광장은 1938년 당시 약 25만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모여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장소였다. 히틀러 치하에서 수 십만의 오스트리아 젊은이들이 참전했으며, 2009년에서야 당시의 전투 거부가 무죄라고 받아들여졌다. 발터 모노세크 빈 대학교 역사교수에 의하면 “아주 최근까지도 이들 탈영병은 배신자 또는 동지들의 살인범으로 많은 사람이 여겼다” 고 한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는 한국의 징병제를 노동착취의 관점으로 바라본다고 한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한국의 병역제도는 징병과 양심적 병역거부, 대체복무를 비롯하여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군인 월급, 폭력적인 병영문화, 군내 조직적 범죄, 비리 그리고 부정부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 문제 뒤로 밀쳐두고서는 한국에서 영국처럼 왕자가 파병에 자원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다른 MC 몽이 나타날 것이고, 또다른 윤일병, 또다른 임병장이 나타날 것이다.

곽정은, 섹드립 혹은 성희롱

x. 곽정은, 섹드립 혹은 성희롱

상당히 의미 없는 논쟁. ‘여성의 섹드립은 위협이 되지 않을만큼 여성의 지위는 “위협적이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상태다.’ 라는 주장도 보았지만, 빈약한 변명일 뿐이다. ‘내가 8000km 정도 떨어진 한국 여성에게 어떠한 섹드립을 치더라도 실질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없기에 하등 문제 없다’ 라는 것도 통약될 수 있단 말인가? 판단은 읽는 이에게 맡기겠다.

곽정은의 발언이 섹드립이냐 성적 희롱이냐, 혹은 ‘장기하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르다’ 와 관계없이 곽정은의 발언은 촌스러운 농담이었다는 이야기 아닐까. 섹드립이란 단어로 통용되는 무언가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묘한 섹스미가 있어야 하는데, 곽정은의 발언은 아저씨가 하는 짖굳은 농담 같이 들린다. 이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희롱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별개로 이 사람들이 그 아저씨들의 곽정은과 이번 발언과 같은 것을 이와 같이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지 묻고 싶다)

그러한 지점에서 곽정은의 이번 발언은 ‘연애 칼럼니스트’ 로서의 곽정은이 생각보다 쿨하지 않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누군가는 곽정은의 이번 발언을 두고 도발적인 섹드립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또한 ‘대본에 쓰인 대로 읽었다’ 라고 가정하더라도 곽정은은 섹시즘이나 페미니즘에 크게 무게를 두고 있는 ‘연애 칼럼니스트’ 는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녀사냥에서 미디어에 노출된 곽정은은 그저 자유주의 커리어 여성의 연애 관점을 갖고 있을뿐, 독립적인 여성의 연애 관점이 없었다. 더욱이 금기도 아닌 일상적인 것들이 판도라 상자 안의 것들처럼 포장되었기 때문에 나는 흥미를 잃었다.

내가 이 발언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이 촌스러운 섹드립에 벙찐 표정으로 화답했을 것이다.

결론: 이번 논쟁보면 사람들이 성관념에 대해서 유연하지 못하고, 경직 되었있다는 것이다. 섹드립 치고 싶어도 성희롱을 신경쓰느라 유머감각이 없는 나무토막이 되거나, 섹드립과 성희롱 사이를 착각하고 반시간 만에 개새끼로 낙인 찍히거나.
섹시즘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여성을 보호받을 존재로만 규정하는 ‘고전적 페미니즘’ 만이 강요된 사회가 사람들을 구석으로 몰아세우는 느낌이 든다.

Acid Film Club – 3

x. 길고 잡다한 글과 최근 본 영화 단평, 그리고 찰스 부코우스키의 ‘불타는 꿈’ 번역 – 며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요리도 하고, 푹 쉼.

x. ‘클라우스 만’ 을 읽고 싶은데, 독일어로된 소설 따위 읽기는 아직도 영 늘지 않음. ‘클라우스 만’ 정보가 너무 없어서 독일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젊은 친구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음. 1920년대, 30년대, 이른 나이에도 널리 이름을 날렸지만, 사회가 터부시하는 것들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날선 작가, 그의 아버지 ‘토마스 만’ 의 명성에 일부 가려지기도 했으며, 아버지 ‘토마스 만’ 을 불편해했던 브레히트 등에 의해 평가절하된 면도 상당하다고 한 것 같음. 어느 마약 중독자의 고통에 대해 잔혹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쓴 그의 마지막 소설, <화산> 은 분명 그의 몰핀 중독의 영향이 컸을거라 알려져있음. 아무튼 읽던 책이나 마저 읽어야겠음.

x. 며칠 전 ‘카야 야나르’ 의 독일 사회비판, 풍자코메디를 보고 독일식 유머가 돋보이는 캬바레-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어려움. 친구에게 설명을 부탁했는데, 독일식 코메디는 사회전반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영어권 사람들도 잘 이해 못한다고 함. 독일의 이런 문화가 어렵지만 평소 내 글을 읽어오던 친구의 눈에 내가 비판적인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쉬울거라고 함(=이게 칭찬인가… 독일인의 눈에도 김민주는 반골ㅋㅋㅋ). 아무튼 요즘 번역 하려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영어임. 시발. 독일어 늘고 싶다.

x. 최근 본 영화 단평.

– <킬 유어 달링, Kill your darling>, 2009: 독일 사람들도 요즘 독일 영화들이 할리웃 물 먹은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이 영화가 그런 영화. 베를린이 배경 이유: 시의 촬영협조와 베를린 지하세계에 대한 도시괴담 때문.

– <헌팅 파티, The Hunting Party>, 2007: “이 영화에서 가장 황당한 부분만 사실입니다” 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거의 모두 황당한 이야기들만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세계에서 ‘전쟁에 반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 <마인드스케이프, Mindscape>, 2013: 잘 만들었다고 하고 싶은데, 너무 다 알려줘서 한 방이 없다. 아이고- 의미 없다…

– <라운더스, Rounders>, 1998: 어머, 맷 데이먼 이 자식은 천재로 캐스팅 되는 재주가 있네.

– <제보자>, 2014: 애런 소킨의 뉴스룸은 저널리즘의 중요성을 잘 묘사하였고, 제보자는 황우석 사태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간만에 박해일의 괜찮은 영화. 임순례 감독.

– <마녀, The Wicked>, 2013: 세상에 이렇게 공포, 스릴러 영화가 아무런 긴장감이 없는 경우는 처음! 연기, 시나리오, 연출… 이렇게 모든 것을 중2병으로 끝내는 작품은 드물다. 제작 의도가 궁금.

– <제로법칙의 비밀, The Zero Theorem>, 2013: 역시 테리 길리엄.. 그는 이제 삶의 진리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본인의 영화들을 통해 배운 삶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려 한다. 두번 보면 좋은 영화. 별 다섯개. ‘시간과 관계없이’ 촌스럽지 않은 테리 길리엄의 영화다. 벌써 두 번이나 봤지만, 또 볼 생각이다.

– <조지 오브 정글, George Of The Jungle>, 1997: 할리우드 백인 감독의 편견, 쓸데없이 과장된 것 이외에도 너무 시끄럽다. 킬링 타임으로도 다신 보고 싶지 않음.

– <작별들, Farewell>, 2011: 장률 이후 북한을 다루는 영화가 많아짐. 유럽의 한국 작가들이 아이디어가 없어 너도 나도 북한 소재로 작업하는걸 보는 느낌. 어떤 감정을 느끼게 만드려는 노골적인 의도 때문에 짜증.

– <백야행, Into The White Night>, 2009: 한석규, 그러나…. 아이고 의미 없다.. 잠이 온다.

– <제로 다크 써티, Zero Dark Thirty>, 2012: 오사마 빈 라덴을 둘러싼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실화,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 <해커스, Paris under watch>, 2012: 블레어위치 이후로 이런 식의 핸드헬드 + cctv 영화들 존나 식상한데도 계속 나온다. 다시는 만들지 마라.

– <시간 도둑들, Time Bandits>, 1981: 또 봄. 아아.. 테리 길리엄. 흥행에 성공만 하였더라도. 그러나 그의 영화는 항상 옳다.

– <황제를 위하여>, 2014: 이태임 가슴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영화. 이민기 연기 존나 못한다. 어설픈 사투리. 왜 몽땅 부산 몰려 가서 깡패 영화 찍고 지랄이야. 씹노답. 그만해라 많이 쳐무따.

– <더 퍼지, The Purge>, 2013: 존나 기대했는데, 시나리오도 빈약, 어설픈 상황 전개, 수준 떨어지는 폭력물.

– <타짜-신의 손>, 2014: ㅈ같은 영화. 이 영화 때문에 헤어진 사람이 다시 생각난다. 영화도 별 볼일 없는 중2병 시나리오. 탑 새끼 영화에서 좀 안 보이게 해라. 몰입이 안 된다.

– <디스키얀, Dishkiyaoon>, 2014: 적당한 클리쉐라도 가져다 쓰라고 감독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