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청년단은 네오나치 그룹같은 것을 원해

서북 청년단

 

서북청년단은 이제 대놓고 네오나치가 되자고 말한다.

‘서북청년단, Seobuk-choeungnyundan, Westnorth-youth association’ organized ca. 70 years ago in Seoul, South Korea. They terrorized and killed people with name of anti-communism. It was similar ‘Hitlerjugend’, but this group wasn’t government organize. Also some right-wing politicians supported them. However it was just totally crime and very shameful history in South Korea. 2 years later, they dissolved and part of them joined another right-wing groups.

Today, they trying to reorganize this group again. Read this what they saying now.
Lee Chang-woo, executive vice-president of 서북청년단 saying: “These days are very similar ‘After Korean War’ as 70 years ago. People feeling so much anxiety. So I thought we need radical group for figure out this social problem. IN GERMANY, THEY HAVE EXTREME RIGHT GROUP as ‘NEO-NAZI’. Both of USA and Japan, also they have. These groups assume the helm, part of government for the nation. In this moment, South korea has right group, but not extreme right group. This group what I mean, work without law and government power for the nation. (*This meaning about terror, kidnap, torture and lynch.) All developed countries have extreme right group. For that reason, their countries are all safety.”

What the fuck happening in South Korea. Even they have a ‘Commander’ like a paramilitary organization for action. Few months ago, they started action at the square against Ferry Sewol Victims. And 2 weeks ago, they tried to rebuild ceremony at Seoul Public Youth Center. A public official who allowed their using Youth Center, didn’t know what they want to do in Youth Center. When official knew what they want to do, canceled reservation of using Youth Center by 서북청년단. But 서북청년단 tried to keep rebuild ceremony, and public official beaten up by 서북청년단.

그리스, 아덴에서 아나키스트 니코스 로마노스에 연대 시위 – 2

https://www.youtube.com/watch?v=bRwg9E9ARPA

 

며칠 전, 그리스에서 아나키스트 니코스 로마노스에 대한 연대-단식투쟁과 연대- 평화시위에 대해 이야기 드렸습니다. 어제도 그런 대규모 시위와 행진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경찰이 무리하게 진압하려하면서 시위 현장은 겉잡을 수 없이 폭력적인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경찰들은 무방비 상태로 묶여 연행 중인 시민들을 가격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영상입니다.

에릭 가르너와 마이크 브라운, 미국 공권력 남용에 대한 폭발

에릭 가르너를 죽음으로 이끈 경찰의 불기소 처분이 이뤄지자, 미국 전역에서 지금 벌어지는 시위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어떤 국가에 살고 있습니까? 에릭 가르너의 죽음은 바다 건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권력에 희생되는 모든 개인,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또한 마이크 브라운에 대한 경찰의 살해혐의 역시 불기소 처분 되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대한 논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방인 알자스에 사는 프란츠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어 수업에 지각을 한다. 혼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에 교실을 들어서는데, 선생님도 평소와는 달랐고, 교실 뒤 쪽으로는 프랑스어 책을 보는 마을 주민, 어른들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프란츠에게 선생님은 “오늘이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다”라고 말한다. 이유인 즉, 알자스 지방이 프로이센(지금의 독일)과 분쟁중인데, 1871년 당시 프랑스가 패배해 독일이 알자스를 점령하였고, 더이상 알자스에서 프랑스어를 쓰지 못 하도록 법이 제정되어 마지막 수업이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군의 나팔이 울리는 12시에 선생님은 ‘프랑스 만세!’라고 칠판에 쓰고 교실을 나가며 소설이 끝난다.

이 소설은 한국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나라와 말, 이름, 전통 등을 규제 당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한국어 버젼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내용은 대략, 일제 강점기 시절 한글 수업에 들어가니깐, 선생님이 오늘이 마지막 한글 수업이라고 한다. 뒤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개화기 국어학자 주시경 같은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며, 아름다운 한글을 잃어버림에 대해 비통히 운다.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이제 한글을 쓰지 말라고 했던 것이고, 선생님은 ‘조선 만세!’라고 쓰고 교실을 나가버린다.

설움이 담긴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논란거리가 있다.

사실 알자스 지방은 원래 독일 영토였다는 것. 알자스-로렌지방은 독일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독일의 영토였는데, 프랑스가 그걸 잠시 뺏었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해서 내줘야 했던 영토였다. 게다가 ‘마지막 수업’, ‘별’등을 통해 서정작가로 알려진 알퐁스 도데는 사실 왕당파에 내놓으라는 지독한 우파중 한명이다.

알자스어에 대해 알아보면 좀 더 세밀하게 역사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다.
알자스어는 프랑스의 북동부 알자스(Alsace)지방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의 지역 방언중 하나로서, 그러나 알자스가 지금의 프랑스 영토로 자리 잡은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이고, 지리적으로는 알자스 동쪽에 흐르고 있는 라인강만 건너면 독일이 나온다.

알자스어는 프랑스어로는 ‘알자시앙(Alsacien)’, 알자스어로는 ‘엘제시슈(Elsässisch)’라고 불리는데, 알자스어는 프랑스의 영토의 방언으로 구분하고 있다지만,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프랑스어보다는 독일어에 훨씬 가깝다. 아니, 실제로 독일어의 방언이라고 볼 수 있다. 알자스어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어 다음으로 두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방언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어학상으로는 프랑스어와는 관련이 없고, 고지독일어(haut-allemand, Hochdeutsch)에 속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재 독일어와는 차이점이 있는데;

1. Génitif(속격)에 차이가 있다.
– 독일어의 des(남성 및 중성 속격), der(여성 및 복수 속격)에 해당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어느 독일 방언 구사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 방언을 구사한다.
– 수 세기 전부터 프랑스와 독일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알자스 지방은 독일의 여러 방언을 쓰는 지역과 상대적으로 소통이 적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독일어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중세 독일 어휘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3. 많은 프랑스 어휘를 차용하였다.
– 독일 또한 상당수의 프랑스 어휘를 차용하였으나, 알자스는 여러 차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었고, 현재는 완전히 프랑스의 영토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현재의 독일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다.

* 프랑스어-독일어-알자스어 비교

 

또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동부에 있는 슈바벤 지방에서 사용되는 방언보다 서부에 있는 슈바르츠발트 (검은숲)를 포함한 바덴 지역에 속하는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방언에 가깝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들로는 실제로 스위스와의 왕래가 잦은 편이고, 스위스에 거주하는 한인 또는 유학생들이 알자스 지방과 언어에 대해 문화적인 접근 차원에서 유사함을 언급하는 사례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알자스가 프랑스어를 적극 받아들이던 또다른 계기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반독(反獨) 감정으로 오랫동안 알자스는 초등교육 단계에서 독일어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 뿐 만아니라 프랑스어 교육이 강화되고, 알자스 지역 내에서 유통되는 신문의 초등학생용 지면과 어린이와 젊은 층을 겨냥한 출판물에서는 오직 프랑스어만 사용되는 등 공공 장소에서 독일어와 알자스어의 배타 풍조가 이어졌다.

1999년, 지역 언어를 중시하고, 지역 문화를 배척하는 문화 풍조에 비판과 함께 이른바 ‘조스팽 개혁’은 유치원과 초등 교육 단계에서 독일어 교육을 하게 되었지만, 그 이전의 흔적도 있고 지금도 세대가 내려가는 만큼 알자스어을 모국어로 하지 않고,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경향이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 지도
 위 지도에서 알자스와 로렌이 얼마만큼 벨기에와 독일과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참고로, 로렌 지방과 맞닿아있는 벨기에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를 함께 사용하는 국가이다.

또한 알자스 지역의 와인은 특이하게도 프랑스식 라벨 표기와 다르게 Riesling(리즐링) 또는 Gewurztraminer(게부어츠라미너) 등의 독일식 품종 라벨 표기를 한다. 와인의 풍미, 깊이 또한 품종 때문인지 독일 와인의 풍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강한 느낌의 바디감과 드라이한 맛을 갖고 있어 독일 와인의 장점을 가지면서도 프랑스 와인의 표현을 잘 보여주는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독일의 화이트 와인에 물을 섞어 마시는 Weinscholle(바인숄레)와 비교하며 마시는 것이 와인 팬층에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와 달리 민족(Nation)의 개념에서 다른 관점이 있다.
유럽에서 발생한 민족의 개념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30년 전쟁과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데, 30년 전쟁은 유럽의 변방인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계승 분쟁에서 시작 됐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인 팔츠 백작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툼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강대국인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배후 조작및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의 개입 등으로 전쟁은 30여년에 걸친 국제전으로 발전한다. 30년 전쟁 이전 까지는 중세시대 귀족들 간의 소규모 전투나 국제전이라고 해도 소규모의 국지전 외에는 없었다. 그 이유인 즉, 민족 개념이 존재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들은 자신 바로 위에 있는 왕과 무시 못할 권력층인 종교인들에게 잘 보이면 되었기 때문에 군주들간의 소규모 전쟁만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 절대왕정이 수립됨과 동시에 지방 분권적인 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통합국가들이 등장하면서 민족의 개념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왕권이 강화되고, 비로소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근대 유럽사에서 30년 전쟁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전쟁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유럽의 기본 틀이 잡혔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은 1618년에 시작해 1648년에 끝남과 동시에 프랑스가 협정을 맺으면서 알자스-로렌을 뚝 떼어간다.
또한 프랑스가 18세기 경, 독일의 민족 개념을 흔들어 놓으면서 독일이 분란에 쌓이는 동안 프랑스가 민족의 개념을 먼저 정립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도 민족의 개념이 생기면서 영토를 하나된 국가로 통일 할 수가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보다 민족 개념을 쟁취하는 그 증거로는 1879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혁명,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 쓰였던 암구호가 ‘민족’이었다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독어와 영어로 불어 사이트를 통해 확인 해보려 했던 시도는 무의미 하게도 바스티유에 있는 포커 사이트 암호를 묻는 결과만 잔뜩 찾게 되었다)
보불전쟁은 1871년에 끝난다. 영토 점유기간을 보면, 224년 동안 프랑스가 점유했던 셈이고, 그 사이의 알자스-로렌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혁명과 독일의 민족개념에 저항했던 프랑스 국민들과 함께 하며 스스로 본인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고.
결국 이 이야기는 독일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독일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갈취한 프랑스는 당연히 침략자이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수 세기 간 걸쳐던 복잡한 역사를 배제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독일로 반환 되어야 할 영토이겠다. 하지만 정작 알자스-로렌인들은 근대와 현대를 거쳐오며 자신들이 프랑스인으로 살고 있다.

참조;
Franz의 <The Triumph of freedom> 중 ‘[알자스어] 프랑스어 알자스어에 대해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_hofbauer&logNo=140191364854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알자스어 페이지
–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C%9E%90%EC%8A%A4%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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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련 기사들을 읽다가 작성하게된 게시글인데, 작성하는데는 서너 시간 이상 걸린 반면에 노력에 비해 읽기 편한 글 같진 않네요. 어쨌든, 감기 조심하세요. 새해 정초부터 감기로 고생.. 작년에는 편도선 염증까지 여덟번이나 걸렸..

In to the Scene, 1 – Frei.Wild and With Full Force

 x. to english reader.
 this post talking about a neo-nazi band frei.wild, with full force festival, 2013 what happend and why people boycott them at the last year. also i’m so sorry that i wrote only korean. if you want to know about this post, please ask to use ‘문의하기’ mail-form that put name, email and your sentences in regular sequence of right frame.
 x. 이 포스트는 이탈리아 밴드 Frei.Wild 가 많은 이로부터 보이콧을 받고, With Full Force 페스티발, 2013 에서 취소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이, 노약자는 이 포스트를 읽어도 상관 없지만, 빨갱이-아나키스트 알러지가 있는 극우 어린이들은 이 포스트를 멀리 피하고, 자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래 전부터 줄곧 한국은 록음악의 불모지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이제는 페스티발이 많아지다 못해 대기업들 마저 뛰어들어 우후죽순으로 락페스티발이 늘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음악 씬에서 다양성이란 아직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이다. 한국 펑크/하드코어 씬은 탄생을 이제는 거의 20년 쯤으로 어림잡을 수 있을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이것을 어딘가에 씬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망설여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시장이라는 이유도 존재하겠지만,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 밴드, 관객, 그루피, 헤비리스너, 그리고 평론가들을 둘러싼 문화들에 결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클럽은 밴드에게 페이를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밴드가 공연 기획부터 홍보까지 도맡아 클럽을 먹여살리는 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밴드는 계속해서 자립하기 어려운 환경이 반복되는 틀 안에서 밴드 마다의 독자적인 개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다양성이 사라지고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변형 되어갔고, 차츰 그 시작할 때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관객은 공연에 올 때만 펑크로 변하는 이른바 주말 펑크 같은 것이 되가고 있었고, 속된 말로 어느 정도 이 바닥을 구르면 사회로 돌아가 직장인이 되어 자신이 사랑했던 이 바닥의 기억들을 어린 날의 치기처럼 취급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뭉갰다. 이런 흐름 속에 그루피라는 것은 언제 한번 제대로 생겨보기도 전에 poser, 포저라는 비판을 받으며 씬이 커질 다른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요인이었다. 평론가들 마저도 대부분 20년 내내 섹스 피스톨스, 클래쉬, 댐드, 블랙 플랙, 데드 케네디스, 미스핏츠, 그린데이, 오프 스프링, 랜시드, 노에프엑스, 에이브릴 라빈 등을 순으로 열거하며, 펑크는 이것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절하시켰다. 그게 고의적인 직무유기였던지 아니면, 고의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감추고 싶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개 잘 쓰여진 블로거들의 포스트보다 못한 평론들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생각했고, 몇 년이나 길게 생각했던 그 이야기를 이제 시작 해보려한다.

글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알린다. 나는 단지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첨언들을 달아, 이야기가 다소 매끄럽지 않음을 감수하면서라도 적어도 펑크를 접해봤지만 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 한다.

유럽의 어느 록페스티발

첫 이야기로는 독일의 Frei.WIld 라는 밴드의 이야기를 통해 음악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한다.

 Frei.Wild 는 이탈리아의 브릭센 지방 밴드로서 원래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로 귀속된 지방의 밴드다. 브릭센은 아직도 오스트리아-독일의 정서와 문화가 남아있고, 때문에 Frei.Wild는 많은 곡들을 독일어로 혹은 영어로 노래 한다. 이들은 가사에서 정직함과 유럽이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외롭게 투쟁하는 이야기들을 서정적인 감성들을 정치적인 가사로 풀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팬들이 대개 우파 성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사가 신념, 정직, 삶, 희망 등에 대한 이야기고 네오 나치와 직접적으로 연루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없어보였다. 적어도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Frei.Wild 가 이전에 전혀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신념 따위를 강조하는 밴드들은 대개 우파-민족주의 성향이거나, 마초 밴드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유럽의 네오나치들이나 일본의 재특회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려는 저항적인 투쟁가, 레지스탕스, 애국 투사, 영웅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때문에 타 인종에 대한 차별과 폭력, 테러 등으로 경찰에게 연행되거나 유죄가 인정되어 중형으로 교도소에 사는 것, 더더욱이 출동한 경찰특공대와의 총격전에서 죽기라도 하면 영웅이 되어 죽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애국 보수를 자처하는 어버이 연합이나 일베와도 매우 닮아있다.
신념은 나치가 강조했던 것들 중 하나인데, 2차 대전 이후 지도자와 같은 단어처럼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졌는데 아직도 몇 펑크/하드코어 밴드들이 쓴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펑크/하드코어는 스포츠나 게임, 패션과 이슈 등과 같은 것이 아니고, 삶을 마주하는 태도로서 태어났기에 그간의 저항적인 록음악들과는 분명히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시 Frei.Wild 이야기로 넘어가 이들은 이들의 모호한 가사로 보수적 감성을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대부분 우파 팬들이이라는 이유로 극우 세력을 지지하는 밴드로 간혹 의심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데드 케네디스는 ‘Nazi punks fuck off’를 불렀고,
이후 Napalm Death 와 같은 그라인드 밴드는 물론, 폭넓게 다시 불리고 있다.

Frei.Wild 이야기로 가기 전에 몇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음악은 정치적 올바름과 관계없이 듣기에 좋기만 하면 된다고?
그들의 사상은 관심없지만, 네오 나치들이 음악만큼은 잘 만들어서 가끔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괜찮다고?
큰일 날 소리. 단언컨데 유럽에서는 절대 용인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북유럽의 노르웨이에서 유럽의 NSBM, 네오 나찌들의 블랙메탈을 이끌던 Burzum의 바르그 비켄네스가 중형으로 유죄를 선고 받고, 감옥 생활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럽에서 맹위를 떨칠 것 같던 NSBM은 마치 사회를 등지고 방 구석에 쳐박힌 히키코모리들이 게임상에서 아이템을 뺐겼다며 현피를 신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유아적인 발상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지금 유럽에서 RABM(Red and Anarchist Black Metal)이 일어서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극우 네오나치들의 유아적인 발상과 중2병 말이다. 아무튼 크러스트 펑크는 블랙메탈의 교류가 커지면서 80년대 말부터 블락켄드 크러스트, Blackened Crust 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는 80년대 중반부터 Discharge류의 크러스트와 데스메탈이 만나 시동이 걸린 그라인드 코어와 함께 성장했다. 때문에 이전과 달리 종종 크러스트/그라인드 밴드들과 블랙/데스 메탈 밴드들이 함께 공연하며 씬을 공유하는 일이 많아졌다. 스웨디쉬 크러스트/그라인드 밴드들이 독보적인 활동을 보인건 8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켄네스의 살인 이후에는 정말로 북유럽의 씬은 정리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도 크러스트들이 블랙/데스 공연장에 가거나, 블랙/데스 메탈 팬들이 크러스트/그라인드 공연에서 자주 보인다. 유럽에서 가장 그 정신을 잘 지키고 있는, Obscene Extreme Festival 이 바로 그 살아있는 증거이다. 네오 나치들은 대부분의 공연장 무대에 설 수도 없고, 사회적인 비판은 물론이거니와 관련해 문제를 일으킬 시에 법적 처벌을 받는다. 나치 옹호는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서서 지난 차별과 폭력, 살인, 학살로 물든 중범죄 그 자체, 이상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반기를 든 펑크에 있어 이러한 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유럽 어느 공연장에서 그리고 바에서 스크류 드라이버와 같은 인종차별적이고 극우적인, 네오 나치들이 찬양하는 류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그 곳은 단연 네오 나치들의 공간 뿐일 것이다.

크러스트 펑크에 대한 소개는 이 그림 한 장을 대신하고, 다음으로 미루겠다.

 “Wir haben immer gesagt, dass wir das Land hier von Herzen lieben/ Balsam für die Seele, wie wir euch damit provozieren/ Ihr seid dumm, dumm und naiv/ Wenn ihr denkt, Heimatliebe = Politik/ Dumm geboren” – aus “Das Land der Vollidioten”
 “우리는 언제나 말해왔어, 우리 마음 속으로부터 이 땅을 사랑한다고 / 우리가 너희를 울리는 영혼의 안식처 / 너희들은 멍청해, 멍청하고 너무 순진해 / 너희가 향토애(우리의 땅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는 정치야 / 멍청하게 태어났어” – Frei.Wild 의 노래 ‘멍청이들의 땅’ 중에서
가사만 봐도 극우, 네오나치의 냄새가 난다. 한국에도 이런 류의 노래로 극우,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몇 펑크/하드코어 밴드가 있다는 것을 가사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다.

크러스트 펑크

왜 2001년에 결성된 Frei.Wild 가 2013년, 독일의 With Full Force라는 큰 락페스티발을 앞두고, 보이콧 대상이 된 것일까? 더군다나 그 보이콧의 주체가 단지 좌파 계열의 정치적 단체 뿐만이 아니라 펑크/하드코어 씬은 물론, 청년 문화 그룹들(Jugendkultur-verein),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의 주요 록 음악 매거진에서 보이콧을 선언하게 된 것일까? 그들은 독일어로 단결된 유럽을 위한 투쟁의 노래를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는 최소 3만명 이상이 찾는 With Full Force 페스티발 2013년의 라인업이 굉장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와중에 참가하기로 한 Frei.Wild 를 나치 씬 전문 르포타쥬 기자 토마스 쿠반의 폭로가 기폭제였다. 그들이 자주 네오나치를 찬양하는 공연에 참가해왔는데, 이것이 단순히 루머가 아니라 완연히 나치를 옹호함을 보여왔다는 것. 그 폭로 이후로 곤란해지자 보컬 필립 부르거는 이는 본인만의 입장이며, 자신의 인터뷰 내용이 100퍼센트 밴드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Kurz gesagt, ich dulde keine Kritik/ An diesem heiligen Land, das unsre Heimat ist/ Drum holt tief Luft und schreit es hinaus/ Heimatland, wir geben dich niemals auf” – aus “Südtirol”
“짧게 말해, 나는 비평이 없는걸 참았어/ 이 신성한 나라에, 우리의 고향에 대해서/ 그것에 관해 깊은 공허함과 밖으로 외쳤지/ 모국(고국), 우리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 Frei.Wild의 노래 ‘남쪽 티롤’ 중에서
독일에서는 조국, Vaterland 이란 단어는 나치로 보일 오해의 소지가 큰 단어다. 이 곡 역시 화자가 청중에게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요구하고 있다.

극우정당 NPD 놈의 비장의 각오에 찬 피켓
“깜둥이놈들이 여자들을 다 뺏어가서 아직까지 섹스를 못해봤어”

하지만, 명백히 민족주의, 인종차별, 우익록밴드, 우익 포퓰리즘, 네오나치를 옹호및 찬양하는 그들의 범죄를 사람들은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보이콧 선언은 점차 늘어났고, 급기야 WFF에 참가 하는 밴드는 물론, 후원하는 기업들 특히나 독일 내에서 주요 록음악 매거진 중 하나인 VISIONS에서 공식적으로 WFF 후원을 취소하고, 보이콧을 선언했다. 여러 유명한 음악 잡지와 후원사들, 단체, 씬들이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VISIONS의 후원 철회및 보이콧 선언은 확실히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VISIONS 하나에 그치지 않고, 여러 주요 후원사들이 연이어 후원 취소와 보이콧을 선언했다.

“Nichts als Richter/ Nichts als Henker/ Keine Gnade und im Zweifel nicht für dich/ Heut gibt es den Stempel, keinen Stern mehr” – aus “Wir reiten in den Untergang”
“판사가 아니고서 / 사형집행자가 아니고서 / 무자비와 널 위한 의심이 아닌 / 오늘 거기에는 스탬프가 찍혀있고, 더이상 별이(유대인의 별) 없다” – Frei.Wild 의 ‘우리는 파멸로 달리고 있다’ 중에서

With Full Force Festival, 2013 – Poster

사실 WFF는 이 폭로 이후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분노하고 운동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졌는데, 폭로가 터진 직후 온라인 상에서 시작된 개인들의 보이콧 선언 WFF는 사과는 커녕 “마녀사냥을 하지 말자” 며, 보이콧 선언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에 보이콧이 가속화 되자, “이미 스케쥴이 만들어져있어 취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관객들에게 이해를 당부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보이콧이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매년 최소 3만명 이상이 찾는 유럽의 주요 록페스티발 중 하나인 WFF의 예매된 티켓이 연이어 취소되기 시작했다. 이런 큰 규모의 록페스티발이 무너지는 순간이 눈 앞에 다가왔다.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여러 도시의 음악 씬과 펑크/하드코어 씬들에서 이에 대해 온-오프라인으로 성토를 더 해나갔고, 결국 WFF는 사실을 인정하듯 Frei.Wild 의 공연을 취소하고, “어떠한 형태든 민족주의, 인종차별, 우익록밴드, 우익 포퓰리즘, 네오나치와 함께 하지 않을 것” 임을 약속하는 공개 사과의 글을 올렸다.

시위대 속의 어느 크러스트

음악은 인간의 슬픔을, 아픔을, 자유를, 희망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행동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 이용 되어왔다. 음악은 사람을 움직인다. 이 것은 음악을 통해 자유로워지되, 불관용에 대해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음악이 민족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우익 포퓰리즘, 네오나치, 백인우월주의, 호모포비아를 옹호하거나 찬양을 한다면 이것은 더이상 음악이 아니라 반인륜적인 범죄인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부조리함이 반복되는 것에 복종하지 않으며, 동참하지 않고, 거부하고, 맞서 싸워 저항하거나 또는 도주하려 했던 펑크/하드코어라면 이런 일에 침묵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게임을 하는 것 혹은 좋은 기록을 세우기 위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를 간직하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한다면 더더욱 이러한 움직임에 단호하게 “더이상은 안된다” 고 말해야한다.
나는 누가 펑크를 만들었는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학교나 사회, 또는 직장 등의 권위적인 억압에 억눌린다하더라도 펑크/하드코어라면, 무엇이 옳지 않은지에 대해 입을 열고, 부조리에 대항해 저항의 주먹을 쥘 수 있어야 할 것이다.

x. 후기
– 글 쓰는게 이렇게 귀찮다니. 정말 정말 귀찮은데, 크롬에 이미 관련 여러 개의 탭을 띄워놨기 때문에 이 몇 창을 닫고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는 얼른 포스트를 작성하고, 탭을 끄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계속 여러가지를 주제로 연재할 ‘In to the Scene’ 의 첫번째는, 최소 3만명 이상의 관객이 몰리는 유럽의 유명한 록페스티발 With Full Force, 2013에서 Frei.Wild 라는 밴드가 공연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보이콧을 선언하고, 결국 취소된 이야기 전말을 다뤘다. 시간을 내어 더 잘 쓰고 싶었지만, 저 망할 탭들을 끄고 싶은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급하게 작성된 것. 이해 부탁바라며, 대신 혹여나 등장할 질문 만큼은 성실히 답할 것을 약속하겠다. 그리고 귀찮아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Frei.Wild의 뮤직비디오나 음악은 링크하지 않았다. 한마디 더 하자면, 우파 펑크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자꾸 어떤 사람들이 우파 펑크를 자부하는데, 애국이라던가 민족주의를 이야기 하며 스스로를 우파라 말하는 펑크는 나치 외에는 없다.

Schande Europa in berlin. 23. Oct. 2013

여덟시 경 göli bahnhof 방향 oranienstr.에서 목격.
(경찰 폭력에 반대해 꺼내들고 찍었던 영상이 있었는데, 지금 업로드가 불가능하다)

베를린 저항 네트워크 Stressfaktor 에도 데모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8시경부터 kotti에서 산발적으로 모인 안티파, 아나키스트들이 얼마전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망명 보트 침몰 사고에 대해 기습 시위를 벌렸다. 보통의 망명자 지원 데모들은 Stressfaktor라는 베를린의 비영리 저항 네트워크에 정보를 공유하여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류의 시위나 문화행사, 페스티발 등은 경찰들이 시위 장소 주변을 조금은 한가로이(?!) 질서 유지를 하는 반면, 어제의 시위는 온라인 네트워크에 전혀 공유되지 않은채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로 조직된 시위 였기 때문에 경찰들이 당황해 여기 저기 뛰어다녔고, 평소보다 강경히 연행을 시도 했다.

이 시위는 유럽의 망명 운동은 계속 되어왔지만 진전이 없었고, 더욱이 10월 3일 아침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람페두사 섬 앞에서 아프리카인 망명자 500여 명을 태운 보트가 전복되는 사고로 수백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망명자 보트 침몰의 근본 원인은 많은 사람이 배에 타서가 아니라, 유럽의 나토군들의 전쟁과 유럽 국가들의 아랍-아프리카 전쟁 지원이 망명자들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에 인도적인 대우는 커녕, 그 원인에 대해 유럽의 국가들이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했기에 발생한 인재라는 것이다. 이번 사고 이후에 성토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탈리아는 무슨 수를 내던 망명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게 되었다. 이 것은 유럽 전역의 망명자 운동, 특히 최근 독일의 망명자 지원 운동을 더욱 거세게 하였다.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이주자이며, 이탈리아 첫 흑인 장관인 세실 키엥게 이탈리아 통합부 장관은 시신 수습 과정을 침통하게 지켜보며 “죽은 자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또한 키엥게는 “이민법 및 불법체류자에 대한 규정이 개정돼야 한다”고 역설하였는가 하면, 죠르죠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망명은 이민과는 다른 문제다. 우리는 이들이 합법 이민이냐 불법 이민이냐를 따질 이민자들이 아니라 망명자들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라며 공식 입장을 발표하며, 10월 4일을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하지만, 이 또한 이 문제를 두고 사실상 뾰족한 수가 없음을 자인한 셈이 되었고, 마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유럽연합에서 지금까지 이탈리아 홀로 망명자 문제를 처리하게 내버려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이 갑작스러운 시위에 옆에서는 스크럼을 짜고 블랙블록이 이어졌고, 한켠에서는 한가로이 와인을 마시는 관광객들이 한 장소에 있는 광경이 만들어졌는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300명 정도의 많지 않은 시위대 였고, 이 시위대를 보고 환호를 하고, 경찰들에게 “이 파시스트 자식들아, 부끄러운줄 알아라! 너희들은 조직적인 살인을 도모하고 있다!”라고 외치며, 시위 대열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의 경우면 비디오건 사진이건 찍지 않지만, 갑작스러운 시위였기에 경찰들이 강경히 대응하려고 했고, 때문에 경찰의 불법적인 폭력 진압을 포착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호기심에 가득찬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했다. 본인의 경우에도 그러했는데, 사정상 대열에는 합류할 수 없었고, 촬영하는 동안에 제지 당하지는 않았지만 경찰들이 굉장히 경계하였다. (늘 검은 상하의, 검은 신발, 검은 외투를 입기 때문에 시위대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

kotti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oranienstr.와 adalbertstr.의 교차로의 건물들 외벽에는 프로젝터를 통해 “Schande Europa, 비열한 유럽” 라는 텍스트가 벽에 펼쳐졌고, 사람들은 그에 지지 의미의 환호를 보냈다. 나는 이 때 중요한 약속이 있어 끝까지 할 수 없었는데, 하우스에서 같이 사는 친구들과 다른 하우스 프로젝트, 스쾃의 친구들이 연대하기 위해 왔고, 친구들은 마구잡이로 연행할 것이 예상되니 내게 피해 있기를 당부했다. 이후에 경찰은 지나가던 사람들도 야유를 속에 연행을 하겠다며, 해산 방송을 다시 했다. 시위대는 자진 해산 하는 척하며 둘로 나뉘어 행진을 계속해 luft der brücke 주변으로 이동했고, 최소 수 십명이 연행 되었고, 여러 명의 망명자들이 연행되었다며, 경찰서 항의 방문 등의 긴급 연대 소식을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를 통해 알렸다.

독일 경찰? 한국 경찰과 절차상 달랐던 것이 있긴 했다. 한국은 해산 방송 3번 대충 하고서 해산 하는 시위대들 마저 죄다 연행 하고, 종종 전의경들이 사복경찰, 기자,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을 몰라보고 죄다 연행하거나 두들겨 팬다면, 여기 독일은 해산 방송을 더 많이 하긴 한다. 그리고 시위대가 아닌 사람들 앞에서 두들겨 패는 장면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폭력을 자제하는 편이다. 어쨌거나, “Wir sind berliner Polizei.. 우리는 베를린 경찰입니다..” 따위의 말로 말문을 열고, ‘시위 중인 시민들께 해산을 부탁드리며, 해산하지 않을 시 연행할 것’ 이라는 내용의 해산 방송을 하니 시위대는 물론이거니와 근처의 와인바나 레스토랑에 있던 일반 사람들까지 나와 경찰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구차하게 경찰의 직무를 들먹거리며, 이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외면한 채,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핑계로 체제에 부역하는 것은 한국이나 독일이나 사실 다를게 없다.

잡글 – 유럽 유학 열풍

요즘 따라 부쩍 유럽 유학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요즘 따라 독일, 프랑스의 학비를 한국과 비교하며 유학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고, 관련 글도 많다. 나도 상담을 계속 해줄 정도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안 되던게 여기서 될거라고 생각하지마.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얼마나 호구처럼 시간을 보내는지 직접 나와 1년정도 있어보면 알겠지만, 유학-졸업 이후에 막연히 좋은 일자리가 생길거라는 환상 좀 깼으면 한다. 아니 시발, 무슨 대학이 직업 소개소도 아니고 돈 내고 몇 년 다니다 졸업 했으니 대강 어영부영 중산층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을 구할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개같은 노예 마인드는 대체 어디서 생기는거냐? 특히나 예술 하는 사람들은 네 작업부터 다시 봐라. 그걸 누가 왜 내 시간을 쪼개가며 봐줘야 하나. 내가 그런 작업들, 전시들 보면서 줄곧 느끼는게.. ‘내가 여기 왜 왔을까, 친구가 오늘 술 마시자 했는데.. 차라리 떡되도록 마시고 잠이나 잘걸….’ 석박사라고 크게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석박사들도 졸업 논문 하나 힘겹게 던져 놓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투성이니까.. 그걸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빤히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논문을 많이 내는 나라 한국. 그리고, 논문 인용율 바닥권 한국.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 해결 방법이 유학일 수 없다. 유학-졸업 하면 직업이 생길거라고 믿지 마라. 유학 나와도 똑같다. 오히려 돈, 시간 왕창 날리고 가는 케이스 허다하다. 내가 요즘 유학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건 당장 대학을 때려치고,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뒤, 불온한 상상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부도덕한 행동 그리고 목적 없는 여행을 해라.

박원순 그리고 시민인권헌장

보통은 최근 이슈, 통속적인 이슈에 대해 포스팅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박원순 시장의 시민인권헌장 논란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해볼까 한다.

 

시민인권헌장 제정위원회의 일부가 빠져나갔지만, 3분의 2이상, 과반수의 표결을 얻어 채택을 결정했음에도 박원순 시장은 시민인권헌장을 채택하지 않았고, 이것이 다수의 동의를 통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읽는다면 다수가 동의하면 소수가 무조건 따라야한다는 논리가 동시에 성립되므로, 다수가 결정했다는 논리만으로 무엇인가를 추진하는 것은 이후에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차별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정책을 결정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지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함께 사는 사회인지, 어떤 것이 차별인지, 그 함의에 대한 논의를 선행해야만 한다. 그런 후에 비로소 다수의 결정만으로 소수에게 가해져왔던 구조적 폭력들로부터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헌장은 법적구속력이 조금도 없는 ‘시민헌장’ 일뿐이고, 채택된다 하더라도 차별에 대한 법적분쟁에 있어 고작 참고사항이 될 뿐,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내용이다. 때문에 정치인 박원순에게, 민선시장 이후 서울시장의 자리가 대권에 미치는 큰 영향을 고려할 때, 과반수의 동의를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헌장을 통해 보수세력의 역풍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만약 이 헌장을 채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DDP와 세빛둥둥섬(세개의 빛나는 섬이라고 쓰고, 稅빚이라고 읽는다), 무상급식 문제로 고꾸라진 오세훈 전 시장의 케이스를 볼 때, 박원순 시장은 언제든 역풍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이 헌장의 채택은 이후 어떤 파급을 갖게 될까?
저열한 의미에서의 ‘정치공학’ 적으로 읽더라도 박원순이 이 헌장을 채택하지 않고 시장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이 결코 비판만할 수 없는 이 상황은 현재 야당에 그 뒤를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 고자들은 듣고 있나?)

 

‘차별을 금지해낼 사회적 근간을 만들 헌장에 제동을 걸었다’ 는 식의 주장과 함께 합당성을 논하려면, ‘시민인권헌장’ 이 아닌 ‘차별금지법’ 을 추진하며 주장해야 옳다. 차별에 반대해 인권을 도모할 윤리 기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에서 차별금지법안으로 법적구속력이 있는 준수조항을 만들 때, ‘합의’ 의 명분은 더욱 명백해진다.

 

우리는 물거품이된 이 시민인권헌장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회의장에서 빠져나간 일부를 제외하고도 회의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3분의 2 이상의 과반수로 反차별에 대한 사회적 합의 의지를 확인하였다. 이것은 추후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나아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명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목사들 앞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유감이다만, 시장으로서 꼭 동성애 지지 발언을 해야할 의무가 없다. 최근 몇 년 뉴욕 시의 시장을 비롯해 미국의 공직자들이 동성애 지지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기사화 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또한 박원순은 실제로 호모포비아는 커녕 신촌 LGBT 퍼레이드와 성미산 LGBT 영화제를 시 차원에서 지원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수 단체들의 맹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한국 주요 정치인 중에 유일하게 동성결혼 지지 발언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 박원순 시장을 향한 사람들의 비난이 지나쳐 보인다.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렇게 된 원인은 박원순 시장이 아니라 회의 자체를 깽판치러 간 보수 기독 단체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비판 해야하는 것 아닐까? 지금 보면 그 깽판 친 보수 기독 단체보다 박원순 시장이 더 까이고 있는걸 보니 뭐가 잘못되도 확실히 잘못된 기분이 드는건 정말 나뿐이란 말인가?

 

박원순이 시민인권헌장을 채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박원순이 지지자를 잃었을거라는 생각은 대체 무슨 근거로 하는 주장인지 되묻고 싶다. 박원순 지지자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봐야 누구한테 갈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긴 있을까?

 

한국에서 좌파라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짧아? 그거..?

에드워드 스노든 바른생활상 수여

 

12월 1일,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이 국가 감시에 대한 전반적인 폭로에 바른생활상(The Right Livelihood Awards)를 수여받은 직후에 스웨덴 의회로부터 여러 차례의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본상 수상자로는 파키스탄의 인권운동가 아스마 자한기르, 아시아 인권위원회의 바실 페르난도, 미국의 환경운동가 빌 맥키번 3명이 선정되었으며, 본상 수상자 3명은 총 150만 크로나(약 2억2천만원)의 상금을 나눠 갖게 됩니다. 명예상 수상자인 스노든에게 돌아갈 상금은 없지만 재단 측은 스노든에게 법률 비용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 The Right Livelihood Awards, 바른생활상:
독일계 스웨덴인 우표수집전문가, 자선가 야콥 폰 윅스큘이 1980년대 제정한 상으로서 제 2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며, 인권과 환경보호및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한 공로자들에게 수여된다.
노벨상이 인류미래에 긴요한 업적과 지식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생각한 그는 소장한 우표를 매각한 기금으로 이 상을 마련하였으며, 해마다 가난추방과 환경파괴방지, 부정타파 등의 분야에서 실질적이고 탁월한 공헌을 한 사람을 선정해 수여한다. 수상자들은 11명의 국제심사단에 의해 선정된다.
특히, 이 상은 기존 노벨상이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강대국의 입장과 정치적인 문제들에 지나치게 영향받는 인식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대안노벨상(Alternative Novels)’로도 불린다.
매년 노벨상 시상식 하루 전날인 12월 9일에 스웨덴 의회에서 150만 크로나(약 2억 2천만원, 약 20만 달러)의 상금이 수상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되며, 이 상금은 수상자들이 나누어 갖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러시아에 망명중인 스노든은 모스크바에서 비디오로 의회에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상징적인 제스쳐로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은 그가 속히 자유의 몸으로 스웨덴에 여행하여 직접 수여받길 바라는 희망 속에서 이 상을 수여 받을 다른 사람은 없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감정적인 세레모니를 위해 의회 회의실에 자리한 그의 아버지 론은 “바른생활상과 스웨덴 의회의 지지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상은 조만간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스노든이 직접 스톡홀름으로 수여받으러 오기 전까지의 기대 속에 여기에 남아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노든은 미국의 간첩법 현의에 따라 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미법무부와의 거래를 통해 러시아에서 체류하는 것이지만, 상당히 희박해 보입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스웨덴 등의 서유럽 국가가 그에게 망명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길 바라고 있으며, 녹색당은 스웨덴에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 또한 미국과 친밀한 사이이기 때문에 망명에 대해서는 눈치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1980년, 이 상을 설립한 자선가 야콥 폰 윅스큘씨는 “그래서 스도든씨, 당신의 바른생활상 수여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수상자 개인의 자격으로 이 곳 스톡홀름으로 와서 수상하도록 스웨덴 정부가 일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급 배심원들 또한 스노든의 명예를 치하하며 “스노든이 기본적인 민주 절차와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 전례 없는 규모의 국가 감시 실태를 폭로하는 용기를 보여줬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의회 회의실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 지지자들,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자리를 했습니다.

스노든의 폭로를 처음으로 보도한 가디언지 편집장 알란 러스브릿저 또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배심원들은 그의 수상을 축하하며 “기업과 정부의 비리를 노출에 겁내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책임질 저널리즘을 위해 만들어질 지구적 미디어 조직 구축”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루스브릿저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를 위한 스노든의 도전중 한가지가 그것들은 사회적 관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식 시킨 것입니다. (…) 테러리스트들로부터의 보안은 중요한 것이지만,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권리 또한 이 사회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 것 하나가 아니라 더 많은 투쟁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ㅡ 참고: 스노든의 폭로를 처음 보도한 가디언지의 기사

Concert Review: Catharsis

 

공연 후기라는거 정말 쓸데없는 일이란거 잘 알지만, 어제를 다시 기억하고 싶어서 몇자 적어본다. 월요일 밤, 쾨피에서의 카타르시스 공연. 사실 나는 카타르시스를 전혀 알지 못했고, 두 친구가 꼭 가자고 했다. 잠시 망설이다 이유가 있을듯 싶어 가기로 했다. (머저리 같은 위키피디아는 이 밴드가 해체했다고 이야기 한다.)
사실, 첫 밴드가 끝날 쯤 도착한 나는 별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다. 조용한 월요일 밤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멍청하게도 나는 이들의 공연이 시작하면서 이들의 사운드에 주목을 했었다. 연주도 굉장히 좋기야 했지만, 공연에서 한번도 눈을 떼지 않으면서 알게된 것은 공연만이 다가 아니였다. 물론, 드러머 Alexei Rodriguez 한국에도 잘 알려진, Walls of Jericho 는 물론 Prong 과 KMFDM 같은 쟁쟁한 밴드들을 했던건 사실이지만, 보컬의 멘트를 들으면서 나는 눈시울이 젖어버렸다. 모두 다 이야기 할 수 없겠지만, 보컬은 모든 시위에서 싸우는 사람들 특히 지금 이 순간 베를린 올라우어슈트라쎄의 학교를 점거하고 싸우는 망명자들을 잊지 말고, 도와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이 싸움은 몇 달전에 시작되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경을 없애야만 한다고.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의 한 월마트에서 한 소년이 부당하게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마이클 브라운과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목이 졸려 숨진 에릭 가너를 잊지 말자고도 이야기 했다. 보컬 브라이언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멘트를 잊지 않았는데, 종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는지도 이야기 했으며, 우리는 신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삶이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면도칼로 손목을 자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고 이 곳에 모여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감사한다고 이야기 했다. 모두 혼자가 아니라고.
공연장에 빗다운이나 쳐 들을 것 같은 미친 하드코어 씨발놈들이 마초 모쉬핏을 만들었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불쾌해했다. 왜 빗다운이냐고? 빗다운 하는 애새끼들 치고 풍선 근육이나 멍청한 그 브랜드 옷 따위를 과시하는 놈들이 한둘인가? 그래, 이건 모두 각자의 취향이라고 하자. 아무튼 보컬은 공연장의 친구들에게 잠시 마이크를 넘겼고, ‘마초 모쉬핏’ 을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 했다. 애석하게도 그 멍청한 놈들은 자기를 이야기 하는지도 모르고 계속 해서 그 따위 짓을 했고, 결국 보컬이 ‘우리가 서로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고 다시 한번 이야기 했다. 그럼에도 그 놈들이 계속해서 그 따위 짓을 했는데, 결국 몇몇 친구들이 그들을 핏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밀어넣으며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탁컨데 뉴욕 하드코어, 빗다운 흉내 내고 싶은 애들은 제발 뉴욕 가서 해라. 그런 취향의 애기들은 다 뉴욕에서 놀면 되잖아? 얘네가 진짜 멍청한건 카타르시스 공연을 보면서 카메라를 들었고, 게다가 그 장소가 쾨피였다. 물론 당장 애들이 카메라 든 손을 내리게 만들면서 더 촬영하는 일은 없었지만, 관객이 공연장에서 촬영하는 일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공연이 끝날 때 쯤 보컬이 내 친구에게 마이크를 쥐여줬고, 친구는 공연이 끝나면 우리 다 망명자들이 점거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연대를 하자고 외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했고, 보컬 브라이언도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쳤다. 안타깝게도 나는 거기에 함께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어 바에 남아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베이스 치는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 했다. 오늘 알게된 사실은 카타르시스가 CrimethInc. 의 멤버라는 것과 아침에 깨보니 하우스로 돌아오는 빗길에 넘어져 턱이 찢어져 친구들이 응급조치를 해놨다는 것.

 

ㅡ 2014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