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116

 

우리는 정말 이상한 시간 속에 만났지.

 

ㅡ 2016년 6월 23일, 아침 8시 19분, 밤새 너와 마시다 들어와 Roberta Flack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을 듣다가

정어리 – 114

What I got from yesterday: Tons of hugs and kisses with old friends, Tons of beer and hangover, tear up lips, teeth ache, few bruise, left ankle sprain, back bone sprain, ridden lung from tabaco, beer washed my soul, and Earth Crust Displacement, Sex Dwarf and Scumraid, and Dance Violence of Arryam.

Thank you all, and I love you all guys so much ♥♥♥

어제로부터 얻은 것들: 오랜 친구들과의 백만번이 넘는 포옹과 키스들, 수백병의 맥주와 숙취, 찢어진 입술, 시린 이, 몇개의 멍들, 왼쪽 발목 염좌, 요통, 타박에 찌든 폐, 맥주로 씻겨진 영혼, ECD, 섹스 드워프, 그리고 스컴레이드, 그리고 아얌의 댄스 바이올런스.

다들 고맙고, 정말 사랑합니다

 

ㅡ 2016년 6월 14일, 스컴레이드와의 질펀한 하룻밤을 뒤로하고.

 

정어리 – 113

“너에게 지금 기후변화 같은 것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ㅡ 2011년 8월 4일 오후 11시 7분, 남산 Göthe, ZD 하루 전날

정어리 – 110

 

문화운동을 하려면, 서퍼(surfer)들이 파도에서 떨어져 다시 다음 파도에 기어오르고, 보더(boarder)들이 다시 널판지에 올라 바퀴를 굴리고, 소음민원신고에 출동한 경찰들에게 보란듯이 다시 쿵쾅거리고, 윽박지르며 무대를 구르는 펑크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하였는데.. 끼니걸러 새로 넣은지 고작 4일 밖에 안 된 타이어가 또 찢어졌다.

 

속상하다, 속상해.
지멋대로 구르는 타이어에 마음이 아프다.

If it makes you happy
그게 당신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It can’t be that bad
그건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If it makes you happy
그게 당신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Then why the hell are you so sad
그런데 왜 슬퍼하나요?

 

 

ㅡ 2016년 5월 31일, 오전 4시 54분.

정어리 – 109

13239942_10206694692661996_4223981622646300570_n

 

i have to keep my words first, in my life.

독일와서 처음 생각했던 것. 부끄럽다. 나의 말과 생각을 아직 지키고 있지 못해서. 달빛처럼 살아야지, 달빛처럼.

 

“Der Mond ist auf dem Wasser aufgegangen.
Aber auf dem Wasser ist nichts übriggeblieben.”
ㅡ 2012년 5월 22일, 오전 12시 37분
ㅡ 2016년 5월 22일, 오후 8시 1분

정어리 – 108

제가 여기에 말을 얹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마디 얹어봅니다. Andrew Jinwoo Kim 님이 이야기 하시는 것의 기준점은 동서양으로 나누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기준점으로 좌파 스펙트럼 안에서 나누자면, 구좌파와 신좌파로 구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신좌파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영화를 보다가 혼자 곧잘 울고,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 앞에 항의하는 평균이상의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때문에 감정적인 판단을 유보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 유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그 지점은 제외 시켜놓더라도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요 며칠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정리 중이었는데, 짧게 이야기를 이어볼까 합니다. 제 입으로 스스로 얼마나 활동해왔다고 말하기는 우습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또 친구들과 연대활동을 한지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차별에 대해,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해 발을 구르고, 끅끅 소리를 내며, 가슴을 쿵쿵 내려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과 향유하고자 하던 예술가들은 굶어죽거나 말라비틀어져 사라지고, 함께 사유하고자 했던 활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활동가들은 누군가로부터 직접적으로 목숨을 끊으라 협박 당하지 않았는데도, 왜 활동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사회로부터, 그리고 스스로부터 각오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페미니즘을 둘러싼 여러 갈등에서, 또 세월호를 통해서, 이 밖에 것들을 통해서 이제 정치활동에 눈을 뜬 사람들이 pc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활동을 시작하면서 무엇이 옳은 일일까 고민해왔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옳은 일만하고 살 수 없음에도, 서로를 재고,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또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이 글 읽으시는 분들은 최근 관심을 두는 논쟁들을 지켜보면서 일상 생활에 지장이 될만큼 피로감을 느끼신 적 없으신가요? 아니면, 일상적으로 자신이 해야하는 일에 영향을 받거나 스트레스, 불면, 두통 같은 영향을 느끼신 적 없으신가요? 쟁점이 되는 인물들 이외에 논쟁 이상으로 누구를 적대적으로 증오하는 느낌을 갖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리고, 오늘의 한국 사회는 일개 연예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몰랐다며, 대마초를 피웠다며, 연애를 숨겼다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내밀고, 질타하고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집단주의 사회는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찾아 광장에 매달고 전시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저는 위에 열거한 것들이 위험한 징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으로부터 신체절명의 아포리즘을 봅니다. 자율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전에, 스스로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함에도, 스스로에게는 속박을, 그리고 타인에게는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는지를 잊지 말라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 주장과 달라 충돌했던 분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절망의 아포리아 속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같지만, 아포리즘을 향해 가는 방법론의 충돌이었다 생각합니다.

저는 제 감정을 해소하거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이들을 무너트리고, 부숴버리는데 열중하기보다 즐기며, 변화를 모색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공감, 혹은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와 덧붙이자면, 감수성 트레이닝이 있지만, 이에 대한 효과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누가 누구의 감수성이 옳다, 그르다를 가르치고, 지적하면서 도덕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감수성 트레이닝은 기술적으로 심리적 기술, 세뇌를 사용한 비윤리및 균등한 기회를 뺏는 다양성 교육에도 상반된 내용이라 비판 받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인권위에서 인권 감수성 트레이닝을 주장합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금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살인범을 잡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정부-경찰은 사후처벌-전시에만 신경을 쓰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원인을 찾아 예방하는 일에 손을 놓고, 민간인들이 하고 있다는 것말이죠. 세월호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정부가 존재하는지 다시 물어야할 정도..

 

ㅡ 2016년 5월 18일, 오전 8시 17분 앤드류님께..

정어리 – 107

 

 

베를린의 노동절과 Air BnB,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를 며칠 째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알게된 모 언론사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도 준비하고 있다니.. 24~ 34문단 정도의 기사를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기사는 더 길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야기 드렸다.

어제 기자님이 공유하시며 남기신 멘트에 이의를 제기했고, 상당한 설전?! 아닌 설전이 오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양해를 구하신다는 메세지를 보내시곤 나를 그냥 차단해버리셨다.

준비중인 페미니즘 기사를 잠깐 이야기 해보자면, 그 기사는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밝힐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아는 언론에서 처음에 약속했던 조건, 기획기사와 달리 “독자기고 형식으로 기고하면 어떻겠나” 하고 갑자기 말을 바꾸셔서 아무 답변 안 드렸다. 말은 않으셨지만, 의도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예상컨대 편집부에서… 이유도 알겠지만, 생략….. (…)

차단하신 기자님이나 페미니즘 기획 기사를 구두로 약속한 언론사나 대체 왜 본인들 의견과 다른 주장을 하면,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정말 사람들 앞에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나는 비판일색도 아니었고, 오류를 바로 잡고, 당신들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싣는 논리와 사실들을 가져왔을 뿐인데.

아마도 내가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어서겠지. 어제는 리 선생님이 독일 관용어 ‘Schlenker’, ‘괜히 여기 저기 (해찰하고) 짧은 길 냅두고 일부러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주셨다. 허공에 떠다니는 것들까지 채집해서 가슴에 얹고 사는, 나는 그렇게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라서일까.

아포리아, 아포리즘.

모든게 무의미하지만, 절망을 깨닫는 것은 초월이니까요.

루쉰 선생은 길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한 명, 두 명, 열 명, 그렇게 사람들이 걸어 길이 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절망을 피하려 말아요.

 

 

 

ㅡ 2016년 5월 8일, 오전 7시 48분, 이 불면도 곧 사라질거야, 찾아왔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