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

일요일 저녁.

 

온몸이 찌뿌둥하던 찰나에 p가 사우나를 하자고 했다. 크, ‘일요 사우나’! 사우나가 종종 그리웠는데, p가 숲 속에 지어놓은 핀란드식 사우나 덕분에 무엇인가를 그리워 할 일이 하나 줄었다.
핀란드식 사우나. 매번 이야기 하지만, 오븐에 물을 뿌릴 때 마다 피어오르는 증기가 피부에 닿을 때는 피로에 지쳐 죽어있던 신경들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작은 사우나 안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며, 피부 위로 송글송글 맺힌 땀들이 흘러내리며, 지난 며칠 간의 피로도 그렇게 사라진다. 어두운 숲 속에서 달 빛에 실루엣으로 비치는 남, 녀들의 모습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 할 수 없게 만든다. 사우나를 하고 잠시 풀 밭에 누워 가슴과 어깨 위로 피어오르는 열기 사이로 숲을 바라다보면,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숲을 보는 것만 같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풀 밭에 누워 보름달에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들을 바라보면, ‘문명의 이기’ 라는 말이 실재함을 다시 상기 시키게 한다. 담장 너머 여우들이 서성이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 수풀 사이로 부딪히는 바람 소리들을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은 예술에서 만날 수가 없다.

 

본래는 어제도 평소처럼 7시에 가기로 하였는데,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겨울에도 숲 속에서 사우나를 즐길 수 있도록, 일종의 월풀인 Jacuzzi 를 만드는 계획을 이야기 하기 위해 서두르기로 했다. 도착하고나니 숲 속, 농장 콜렉티브에는 아이들이 놀 시설을 만들기 위해 사우나를 해체해서 300m 가량 떨어진 곳으로 사우나를 옮기는 계획이 있었다. 그렇게 4명이 시작한 이 일은 중간 중간 합류한 다른 친구들이 함께 하였다. 오븐이나 여러 장비들, 산더미 같이 쌓인 나무들을 나르는 것은 순조롭게 진행 되었지만, 사우나 웨건을 인력을 끄는 일은 예상 밖의 난점을 맞았다. 목표 지점을 5m 남겨둔 채 바퀴 한쪽이 웅덩이에 빠진 것. 결국 5t의 무게를 들 수 있는 유압펌프를 사용해 동시에 사방에서 끌고 밀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아. 1시간이면 완료할 것 같았던 이 일은 3시간이나 지속 되었고, 완료한 이후엔 이미 대부분의 친구들은 지쳐버려 사우나를 포기한채 돌아갔다.

 

그러나 나와 p, k는 거기에 남아 3시간 가량의 사우나를 즐겼다. 평소보다 친구들이 적었기 때문에 70~ 80도를 유지하는 사우나 안은 온도가 떨어지지 않아 더욱 후끈했고, 측백나무 향으로 가득한 사우나에 k가 가져온 유칼립투스 오일로 지난 며칠 비염 증세는 말끔히 사라졌다. 아마 어젯 밤부터 유칼립투스와의 사랑앓이를 시작한 듯, 그 향은 잊혀지지 않는다.
친구들은 한국에 사우나 문화가 널리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남녀가 함께 하지 않는 다는 것과 남녀가 서로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서길 꺼려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암묵적으로는 성을 파고 사는 일을 흔하게 벌어지지만, 공개적으로는 성을 적극적으로 숨기고 수치스러워 하는 문화. 어쩌면 p와 k가 놀란 것은 이제는 일본에서도 사라져가는 혼욕 문화가 서구에는 아직도 흔한 일상처럼 알려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이야기를 이어가다보니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게 되었는데, 여성의 노출이라던가 성차별, 그리고 어제 친구들과 이야기 했던 결혼이라는 계약제도들에 대해서 이야기 했었다.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이 여성의 주체성보다는 수동적으로 권리를 쟁취하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한국의 가부장적인 제도가 지금은 사라져가는 과거 유럽의 가족 구조에서 발견된다는 것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소득이 적고, 또한 결혼 이후에는 대부분 남성이 소득을 위한 노동을 하며, 여성이 전적으로 가사 노동을 한다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독일의 경우는 2차 대전 직후부터는 그러한 문화가 사라져가기 시작했는데, 이에는 육체노동에 있어서도 여성들이 나서며, 여성의 주체성을 남성과 동등한 위치로 위치 시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으로도 결혼제도라는 것이 여성의 주체의식을 소극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금 독일의 성평등을 향한 움직임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들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한국의 남성연대에 대해 이야기 꺼냈고,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자로서의 k나 남자로서의 p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하지만 1대 1 교제에 대한 강박과 자기구속, 남성 권력의 여성 구속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보수적인 한국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아니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터키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거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고, 남편이 아내의 사회적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 흔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더욱 쉽다. 환경과 교육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진보 안에서도 남성들은 자신들의 권력적인 위치를 쉽게 포기할 수 없으며, 여성들도 여성의 주체성보다는 단지 막연한 해방에만 초점을 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제 해방이 주어진다고 하여도 그 해방감이 오히려 자신의 무력함으로, 다시 주체성을 상실하도록 만들어진다. 한국 운동권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쉬쉬하는 문화도 상당부분 여기서 기인하고, 영향 받은 것이다. 때문에 남성연대가 느끼는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이나 일베의 공개적인 여성 혐오는 조금도 새롭지 않다.

 

분단을 겪고 있고, 공산주의로 시작해 독재로 전락한 북한과 자본주의를 적극 수용한 남한 사회에 대해 분단의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독일의 관심은 굉장히 높다. 때문에 남한에서 다루는 한반도 정치보다 독일에서 다루는 한반도의 정치 관점이 더 다양하기도 하다. 때문에 지금 김정은을 둘러싼 무성한 루머. 한달 가량 미디어에 나타나지 않는 김정은과 북한의 권력 3인이 남한테 방문한 것이 쿠데타라던가 어떤 변화의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에 대해 친구들은 한국사람으로서 어떻게 읽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아직은 아무 것도 단정 내릴 수 없다.” 고 이야기를 열었다. 하지만, 지금 남한을 방문한 실세들 중 특히나 최룡해는 굉장히 잔인한 인물이기 때문에 내 관점에서는 적어도 서유럽 자본주의를 즐기며 성장했던 김정은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이 통일에 더 가까울거라 이야기 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내게서 유칼립투스 향이 났다. 바람을 타고, 풀잎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거실에 앉아 조용히 차를 한잔 마시고 잠에 들었다.

 

ㅡ 2014년 10월 6일

노동이란 무엇인가

선요약: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말하며 더러워진 영혼을 맥주와 노이즈로 씻어내었다.
내일부터는 차라리 일 안하고, 밥 안 쳐먹고, 남이 흘린 빵부스러기나 주워먹으며 살거여요. 밥은 먹어서 뭐하나요, 먹고서 이따위 일만 하는데.. 영화만 있ㅇ어도 됩니다! 선지맛 페인트 같으ㄴ 꿈을 꿀테다! 치즈맛 플라스틱 내일을 맞이 해야지! 애환으로 점철된 애시드 필름 크럽… 크……….”

 

 

 

어제 한국 여행객들의 가이드 일을 했다.

 

x. 본인이 영국에서 공부중인 학생이라며 가이드 비용을 절충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 주로 내가 가이드하는 사람들은 주로 유럽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들이거나 작가들로 현대 예술의 중심지인 베를린의 로컬 씬의 분위기를 익히고, 독일과 베를린의 정치, 예술, 문화, 철학을 중심으로한 가이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일종의 수업형태를 띄기도 한다. 종종 한국에서 문화 관련 사업차 레퍼런스를 찾기 위해 오는 사람들도 있다.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성향에 맞추어 개별적으로 여행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때문에 여행객과 미리 대화를 하고, 여행객이 원하는 지점을 파악및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한 주에만 수 백개의 공연, 파티, 전시, 페스티발 등의 로컬 이벤트가 열리는 베를린의 스케쥴을 전부 확인한다. 때문에 비용이 적진 않은데, 사실 독일에서의 관련 수업이나 가이드 비용을 고려할 때는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학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대개 비용을 절충해준다. 학생들에게 제시된 본래의 페이를 받아본 적은 드물다. 실제로 만났던 어제의 여행객은 문화 관련 사업 일을 하다가 1년 정도 영국에 연수를 간 30대 중후반의 사람이다. 학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 일에 충실하기로 했고, 비용은 약속대로 절충해주기로 했다.

 

x. 친구랑 같이 하고 싶은데, 친구는 존재감 없이 있을테니 1인 가이드 같은 2인 가이드를 물었다.
– 나는 가이드 내용에 충실하기 위해 최대 4명까지만 받는다. 내가 가이드하는 공간들도 단지 관광명소가 아니라 로컬 문화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여행객 다수를 데리고 다니는건 내게도 무리이며, 가이드 중간에 로컬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기게 되면 나를 가이드 말고, 친구로 소개하라고 당부한다. 베를린은 투어리스트들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심각히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단순 여행객이라고 하면 로컬 사람들에게 상당한 반감이 뒤따르며 적어도 불친절해지기 쉽다. 이 이야기는 물론 가이드 중간 중간, 어떤 곳이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고, 지금의 베를린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변화와 그에 관한 정치적 현상들을 이야기 해준다. 서울로 예를 들자면, 10년 전의 홍대와 오늘 날의 홍대의 변화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한번에 4명까지만 여행객을 받고, 몇 명이 가이드를 필요하냐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는데, 아무래도 한명보다는 두명, 두명보다는 세명 그런 식으로 4인이 되었을 때 상대적으로 비용이 낮게 든다. 그런데 이번에는 1인 가이드 비용으로 2인을 가이드해달라고 했다. 친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테니 다른 1인은 신경쓰지 말아달란다. 알았다고 했지만, 신경 쓰인다. 옆에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무시하겠나. 결국 만남에 있어서도 다른 1인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찾느라 시간을 보냈다.

 

x. 약속 3일 전에 여행 경비 때문에 프로그램을 반으로 잘라서 반 값에 진행하면 안되겠냐 하더라.
– 한 프로그램은 기본 8시간이고, 추가로 발생하는 시간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추가비용으로 계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요구는 한번도 없었는데, 프로그램을 반으로 자르면, 그만큼 가이드의 맥이 끊겨 제대로된 가이드를 기대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학생이라 그렇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셔널 갤러리 소개도 부탁했다. 네셔널 갤러리라면 베를린 시 웹사이트에도 모두 정보가 있는데, 영국에서 유학중이라는 학생이 왜 이런 것도 읽어볼 생각을 안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쩌겠나, 일단 학생이라는 단서를 계속 붙이기에 이해해주기로 했다. 대신에 나는 평소보다 더 빡센 일정을 짜야했다. 평소에도 시간 낭비하지 않도록 동선이나 프로그램 시간들을 고려하지만, 고작 4시간동안 가이드에서 무엇인가 얻게 해주려면 평소보다 더 빨리 걷고, 이동시간도 더 철저하게 분 단위로 계산을 해야한다. 좀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들이 왜 4시간을 고집했는지 약간 알 수 있게 되었다.

 

x. 에이전시와 비용 문제를 처리해야하니 절차를 밟아달라했다.
– 원래 에이전시를 통해 비용처리를 하지 않으면, 내 가이드 자리가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이 사람은 편법을 써서 내게 직접 비용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래서 직접 만나 가이드 후에 준다고 하였다. 원래는 여행 당일 이전에 비용처리가 모두 끝나야 하는데, 당일 새벽에 일방적으로 이런 답장이 온 것이다.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받고나서, 에이전시에 수수료를 직접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x. 여행 전날 일정과 비용문제로 연락하기로 약속한 시간 이후에도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새벽까지 기다리다 잠에 들었다.
– 일요일인데 오전에 베를린에 있는 한인 교회에 가고 싶다고 했다. 순간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에 아차했다. 아무튼 만날 시간, 프로그램 등을 확정짓기 위해 마지막으로 9시에 연락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가이드가 무슨 동전 몇개 넣으면 콜라 하나 툭 떨어지는 자판기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이해 되지 않았으나, 수 차례 자신이 학생이라고 강조하는 점을 미루어 보아 아직 이런 일에 미숙한 어린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어쩌겠나, 더 잘 아는 사람이 이해해주는 수 밖에. 그래서 연락 기다리다 잠든다고 메세지를 보내고, 어떻게 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 이 상황까지도 가이드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가이드 비용, 프로그램 내용 전부 확정되지 않았으니까.

 

x. 다음날 점심께 전화가 울렸다.
– 이 때,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 했다. 우리는 아직 비용이라던가 약속시간, 프로그램 모두 확정지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전화하더니 무슨 이런 경우가 있냐면서 나한테 화를 내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정짓기 위한 연락할 약속 시간을 어겼고, 만날 시간도 약속 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약속 시간이 정해져있지 않더라도 내가 자기한테 먼저 연락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화를 내더라. 순간 밤새 기다리다 겨우 잠든게 기억이 나서 짜증이 치밀었는데, 하루 시작부터 나쁘게 시작하지 않기 위해 내가 금방 바로 잡겠다고 했다. 만날 곳을 정해주니 20분이면 도착한다며 빨리 나오라더라. 나는 부랴부랴 마지막으로 프로그램과 동선, 교통편 만일에 해당 갤러리가 임의로 닫았을 경우에 준비해둔 프로그램까지 갖추어 나갔다. 나가면서 보니 전화한지 1시간이 지났었다. 아차하는 마음이 들어 더 빨리 페달을 밟아 갔더니.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연락도 안되고 해서 혹시 내가 늦어 화가 나서 취소한건가 하고 허탈해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는 나한테 어디냐고 화를 내더라. 결국 만나긴 만났다. 그러면서 내게 하는 말이 내가 늦을 것 같아서 늦게 왔다고 했다. 전화한지 2시간쯤 되던 때였다. 그 지역 누구에게나 물어도 알만한 약속 장소도 정확히 알려주었는데, 어딘지 자기가 어떻게 아냐면서 화를 냈다. 학생이라던 이 사람은 30대 중후반처럼 보였다.

 

x. 가이드가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조용해졌다.
– 쉬지 않고 설명을 해야하기 때문에 구취에 더 신경을 써야 하므로 가이드 할 때는 나는 담배를 되도록이면 줄이고, 수시로 작은 유칼립투스 캔디를 입 한쪽에 물고 있는다. 아무튼 간혹 질문을 해줄 때면, 보람을 좀 느낀다. 가이드 중간에 갤러리 하나가 임의로 문을 닫았지만, 다른 차선책을 마련해둔지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한 문화센터에 계속 가고 싶다고 고집하는 것은 들어주기 어려웠다. 독일어 통역을 해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1년 째 영국 유학중이라던 이 사람은 영어도 거의 하지 못했고, 사전방문 요청도 없이 무슨 권한으로 내가 문화센터의 직원과 센터장과 대담을 시켜줄 수 있겠나. 이건 유학이 아니라 문화 사업에 답사온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도와주려고 했는데, 내가 속도 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계속 주지시켰는데도 너무 느려서 결국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식사할 곳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이 여행객의 요구는 너무 비싼 레스토랑도 아니고, 한남동의 뭐 어떤 분위기가 어떻게 있는 너무 저렴하지도 않으면서 너무 비싸지도 않고.. 장황하게 늘어놓길래 서울의 가로수길과 비슷한 곳이라며 어느 지역으로 데려갔다. 사실 가이드 시간이 끝날 때가 다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 지하철도 혼자 잘 못 타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비용 관계없이 더 가이드 하기로 했다. 사실 이 때, 시간 다 된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기어코 페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더라.

 

x. 대체 내가 왜 일을 하기로 했지.
– 내가 뭐하러 그 비싼 레스토랑에서 빵덩어리를 씹고 싶겠나, 하우스만 돌아와도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식사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아무튼 거리 위로 나열된 레스토랑들을 소개하며 걸었다. 까탈스럽다고 해야할까, 음식과 전혀 관계되지 않은 조건들을 보며 레스토랑들을 선택하는 것보고 어떻게 해야할까 순간 고민이 또. 마늘이 그려진 간판이 마음에 든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한 레스토랑을 선택했다. 안에 걸려있는 그림들이나 인테리어가 터키 느낌이 많이 났는데, 메뉴도 채식으로만 구성된 터키-독일 레스토랑이었다. 그런데 메뉴를 보더니 독일 음식이 하나도 없다고 불평. “아니 이 사람아, 여기 있는 메뉴 절반이 독일 음식이에요!”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참고, 독일 메뉴들을 소개 해주었다. 나는 터키 음식들을 꽤나 좋아하는데, 좁쌀로 채워진 고로케 타입의 쾨프테와 샐러드,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고, 그 분들은 내 설명 하에 터키식 빵과 여러 소스, 그리고 샐러드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오니 내 요리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어, 뭐야 나도 이거 먹고 싶어!” 하는 순간 뒷 목이 땡기더라. ‘제가 뭘 어쨌다고, 손가락질 좀 하지 마세요.’ 하고 속으로 되내이는 수 밖에. 식사 중간에 독일 교회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술을 마시냐고 하길래, 나는 “마틴루터 성지 비텐베르그 도시에 가면, ‘마틴루터 맥주’, ‘마틴루터 브랜디’를 팔며, 교회 내부에 재떨이도 있다” 이야기 해주더니 안색이 변하더라. 수도승들이 포도주를 마시는건 이해하지만, 교인들이 왜 맥주를 마시는지 이해 못 하시겠다고. ‘한국에 개신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조선인들을 미개하게 보았던 미국 선교사들이 술, 담배, 도박을 금지시켰다’ 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었으나, 동심파괴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내버려뒀다. 하지만 개신기독교의 발원 국가에 와서 개신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삶을 부정하면 내가 대체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할까.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할 때, 겉치레로라도 내 식비를 내주려고 하지 않더라. 더욱이 팁을 줘야 하는데, 나한테 대놓고 “얘네한테 꼭 팁 줘야해요? 어차피 시급도 받을텐데..” 라고 하더라. 내가 먼저 팁을 주면서 “독일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팁을 주고, 시급은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며, 팁을 받아야 ‘그날 돈을 벌었다’ 라고 생각한다” 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니 50센트 주면서 자기는 정말 최고의 음식 아니면 팁을 안 준다고 하였다.

 

x. 페이.
– 식사가 끝나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데도 페이를 안 주는거다. 오히려 자기 아침에 먹을 빵을 사고 싶다며, 베이커리를 찾아달라는데, 상식적으로 저녁 9시 넘은 시각에 빵 굽는 베이커리가 대체 어디있나. 그러더니 카페를 가르키며 베이커리라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케잌이나 크로와상 몇개 파는 카페일 뿐이었다. 아침에 먹을 빵을 산다더니 왜 카페에 떨이로 남은 케잌을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일단 첫째로 비싸기 때문에 아침에 숙소 근처 빵집을 찾아보길 권했다. 둘째로 아침에 빵 굽는 냄새는 가히 일품이다. 떨이로 남은 케잌을 굳이 사먹을 이유가 없다. 결국 그 케잌을 사고서 지하철로 향하는데, 지하철에 타고서도 페이 이야기를 안 꺼낸다. 그러면서 내게 “로컬 갤러리 정보를 보내주면 계좌로 나머지 붙쳐주겠다” 라며 하얀 봉투를 내민다. 순간 암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보는 보내주겠다고 이야기하고, 받고서 내렸다. 다른 국가의 여행객들은 하나 가르쳐주면, 고생했다고 팁까지 쥐어주며 서너개씩 하던데.. 다수의 한국 여행객들은 다 줘도 팁은 커녕 계약했던 돈 받기도 죄송스러워진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피폭 환자처럼 방구석에 쳐박히게 될 것 같아 나는 쾨피 AGH로 향해 83년에 결성되어 아직도 활동하는Systematic Death공연을 보러갔다. 역시나 친구 여럿이 있었고,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친구들에게 말하며 더러워진 영혼을 맥주와 노이즈로 씻어내었다.

 

내일부터는 차라리 일 안하고, 밥 안 쳐먹고, 남이 흘린 빵부스러기나 주워먹으며 살거여요. 밥은 먹어서 뭐하나요, 먹고서 이따위 일만 하는데.. 영화만 있ㅇ어도 됩니다! 선지맛 페인트 같으ㄴ 꿈을 꿀테다! 치즈맛 플라스틱 내일을 맞이 해야지! 애환으로 점철된 애시드 필름 크럽… 크……….

 

한국 영화 ‘미스터 콘돔’ 을 보다 잠에 들었다.

 

근데 왜 이 분들 아직도 제 계좌를 안 물어보는걸까요. 저 떼인건가요?

 

정어리 – 33

“스스로도 추스릴 수 없는 네게 내가 뭘 바라겠니.
필요 없어. 외롭다고 울지나 마.
넌 아마 함께했던 그 날들을 잊지 못하게 될거야.
그 때쯤엔 네 옆에 무엇이 있었는지 깨닫게 되겠지.

부끄러워할거 없어, 실수는 누구나 하니까.”

 

ㅡ 2014년 10월 17일, Boddinstraße 에서 Hermannplatz 로 향하는 내리막에서 페달질을 하며.

정어리 – 32

나는 일찍이 학업을 때려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낯선 것들을 마주하고 쏘다니길 좋아했다. 그러다보니 나를 보고 자극받은 어린 친구들이 학업을 그만두고 싶다고 조언을 구하며, 그 친구들의 부모님과 대면할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너는 학교로 돌아가” 라 했다. 어린 친구들은 “왜 형은 그만 두었으면서 나를 지지해주지 않아?” 라며 내게 왕왕거렸다. “학교 다니면서도 충분히 다 할 수 있어.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부모님께 잘 말씀 드리면 지지해주실거야” 라며 타일렀다. 친구들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기도 했지만, 부모님과 다시 이야기 해보겠다며 결국 다들 돌아갔다. 그리고 열성적인 지지는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지원 아래 학업과 함께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언젠가 그 친구들이 내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학교 다닐거야?” 라 물었다.
이렇게 사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과 같은 선택을 다시 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무엇이던 할 수 있는 사람만 하게 된다는 것을.

ㅡ 2014년 10월 17일, 맑은 하늘 밑에서 지나간 날을 기억 하였다.

 

 

 

“You can’t beat death but you can beat death in life, sometimes.”
“너는 운명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수도 있다”

ㅡ <The Laughing Heart> by Charles Bukowski

정어리 – 31

종종 한글 번역을 첨부하기도 하지만,
이 대화는 번역을 달지 않겠다.
건조했던 대화는
2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이 것이 나와 k에게 어떤 것이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k에게 전화를 했다.

Me: “What are you doing today?”

Kv:”I’m here with my dad.”

M: “I thought you alread went to f’s party.”

K: “No, yesterday my mom is dead.”

M: “O.. So sorry.”

K: “But she died while sleep, it’s good.
…./There was no pain.”

M: “I wish you and your dad be well.”

K: “Now we have share one more thing.”

M: “Yes, we are.”

K: “See you soon.”

M: “Okay, take care.”

 

ㅡ 27. September. 2014, evening.

정어리 – 30

“Coffee and Cigarette”
In the dream last night, I tasted sweet things.
From this morning, took coffee and cigarette. Thought that sweet recipe from the dream. Coffee and cigarette. Read some articles. Coffee and cigarette. Coffee and cigarette. Thought move ass to market with my bike. Coffee and cigarette. Thinking sip some strong things with bit sweet smokie things. Coffee and cigarette. Who want hang out with me? Maybe you have to bring some alcohol things and blanket or jacket. I want to see sundown with feeling tipsy and silly shy.
..I still thinking with coffee and cigarette.

ㅡ 20. August, 2014

 

 

 

“커피와 담배”

 

간밤의 꿈에서 달콤한 것들을 맛보았다.
아침엔 커피와 담배. 꿈에서 맛보았던 달콤한 레시피를 생각했다. 커피와 담배. 기사들을 좀 읽었다. 커피와 담배. 커피와 담배.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 갈까 생각했다. 커피와 담배. 독주와 달콤하고도 자욱한 연기들을 생각중이다. 커피와 담배. 누구 나와 같이 나갈 사람 있나요? 아마도 당신은 알콜 따위들과 담요 혹은 자켓을 가져와야할거에요. 약간의 취기와 바보같은 부끄러움과 햇살을 받고 싶다.
..나는 아직도 커피와 담배를 생각하고 있다.

ㅡ 2014년 8월 20일

정어리 – 29

철학부터 시작해서 예술을 지나 가벼운 대중 문화까지 섭렵하고자 욕망하는 인문학 씹새들 중,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무릎을 꿇고 빌건데, 빌어먹을 논문 말고, 개인적인 에세이 하나 잘 써보길 바란다. 타인에게 휘둘리길 바라지 않으면서 가장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커리어 페이퍼 한장에 충실한 놈들, 이 놈들이 무너지는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의 숭고했던 삶들을 자신에게 마구 쳐바른다. 백화점에 진열된 색 옷처럼. 숭고란 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런 새끼들 때문에 루쉰의 잡문들을 거꾸로 읽어야할 판이다. 권위주의적인 편집증자들. 성가신 일들. 내가 왜 네가 싫은지 알기 위해, 잠시라도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요가, 필라테스, 단전호흡 등등, 그러한 프로그램이 만연한 이 시간에 기대어 네 삶을 합리화 시키지 않길 바란다.

 

ㅡ 2014년 2월 16일 새벽

정어리 – 28

x. 지나간 메모를 뒤져보니 2009년 8월 6일 ㅡ 사유: 희귀성·난치성 질환자, 질병코드 F20.0, Paranoid schizophrenia 로 산정특례가 등록되었다는 것을 찾았다. 더욱이 담당주치의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나를 최소 2등급 장애로 지정하여 한달 48만원정도 되는 장애수당을 받게 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게을렀다.
y. I found a memo from 6, August, 2009 ㅡ Cause: Rare and incurable disease, Disease code, F20.0 – Paranoid schizophrenia by National Health Insurance Service register me on NHIS calculate exemption patient list. Even my attending doctor tried to register on B grade disabled person list by NHIS, but I was so lazy to make some paper then take at least 300euro per month from government.

 

x. 편집증적 정신분열이라는 판정을 받고 폐쇄병동에 입퇴원 반복 끝에 현재까지 약을 처방 받다 지난 금요일 새벽에는 20세의 조증환자로부터 소주병 네병을 연달아 머리에 가격 당하고 쓰러져 수 차례 허리를 걷어 차이고 이미 두차례 부러졌던 왼발 발목과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밟힌 뒤 그 자식을 붙잡아 넓은 대지를 달리는 장군과 같은 기백으로 일어서 경찰관 두명에게 인계하고 경찰서에 그 자식과 함께 형사 앞에서 조서를 작성하던 때, 합의 해달라는 그 자식 말에 “너 님 진짜 고소영”을 외치고 집에 돌아와 어두운 방구석을 지키는 나를 아끼어주는 친구 인터넷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은 뒤 며칠 술잔을 핥다 생각해보니 도저히 안되겠어 이번 주는 술잔을 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나가는 도중 불현듯 생각난 처방전에는 본인이 복용하는 정신과 약들중 리스페달, 아빌리파이에 대한 부작용을 대처하기 위해 먹는 간질과 괴저 등에 처방되는 약을 두가지 모두 햇빛이 해로우니 썬크림을 주간 시간 외출시 항시 챙기고 햇빛에 노출을 삼가라는 주의사항을 일러주지 않은 담당 주치의 신상은 이 못된 년!

 

ㅡ 2010 5월 10일 새벽 찬공기와

못 박기

벽에 못을 박으려면 왼손이 못을 잡고, 오른손이 망치질을 해야하는데, 한국에선 왼손이 못을 잡으면, 정치적 논란에 휩쌓이고, 오른손이 “빨갱이!” 를 외치며 왼손을 망치로 내려친다. 왼손이 오른손에게 “여기 못 밖기로 한거 맞지?” 라고 물으면 왼손에게 관계 장애라도 있다는 듯이 오른손은 왼손을 미친놈 취급한다. 대체로 오른손들이 제일 멀쩡한 척하고, 왼손들을 못도 모르는 그러한 놈이라 치부한다. 오른손들은 대체로 그러하다! 대체로!

 

ㅡ 2014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