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의 첫 날들

 

※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된 3박 4일간의 기록입니다. 글의 내용을 너무 상상하거나 깊이 몰입하게 되면 독일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될 수 있으니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어려우신 분들은 읽기를 자제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9월 30일 금요일.

 

수화물 검색대에서 제가 매고 있던 가방에서 노트북, 프로젝터, 10m 전선 2개와 칼, 니퍼, 옷핀, 케이블타이, 군용벨트 등이 나와 가방 엎고 모두 꺼내 조사하고 최종적으로 칼과 니퍼를 폐기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 했습니다! 공항에서조차 옷을 벗고 가방을 엎었습니다! 허리에 뭔가를 숨기는 것으로 오해하던 직원은 벨트가 문제인지 왜 늦게 알았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아무튼 저는 가방을 엎고 옷을 벗ㅇ어!

 

서울 시각 낮 12시 40분. 뮌헨행 Lufthansa 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Scorpions 를 좋아할 것 같은 장발, 근육질, 문신 남성을 비롯해 십 수명의 남성들이 스튜디어스들이 서빙하며 여러 음식, 음료들을 준비하는 곳 점거하다시 피하여 위스키를 거덜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아니라 bar에 온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기내 바닥에 앉아서 졸고 있는 애들도 한 두명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새봄은 맨 뒤에서 두번째 자리라 소음에 견딜 수가 없었으나 우리도 위스키 + 독일 맥주 거덜내기에 힘을 보태다 기내에 준비된 Radiohead 의 Kings of Rims Live dvd 를 보고 잠에 들었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뮌헨에 거의 다 다르러 창밖을 보니 작은 산들이 굉장히 많고 형형색색의 논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밀, 보리, 포도등의 농사 때문일거라 생각했습니다. 내리면서 보니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뮌헨 공항에서 베를린 행 비행기 게이트를 확인한 후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햄버거와 에딩거 바이쓰비어를 섭취했습니다. 햄버거 빵이 무슨 바게트 빵인줄 알았습니다. 고기보다 질겼고 고기는 큰 삼겹살 같았습니다. 잠이 올 쯤 뮌헨에서 베를린 행 비행기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된듯하여 게이트로 향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경직 되어있던 저는 피곤함과 맥주에 쩔어 갑자기 영어 + 독일어가 술술 나오더니 수화물 검색대에서 아무 일 없이 나왔습니다. 게이트에 가보니 우리 둘은 술에 약간 취해 한시간 일찍 도착한 거였더군요. 아무튼 기다리니 2차례 연착 사실을 통보 받았습니다. 원호 동지에게 연락을 취하려니 공중전화 사용법을 모릅니다. 열심히 해볼까 했습니다만 몸은 피곤하고 취해있습니다.

 

뮌헨 시각 밤 10시 25분. 드디어 베를린행 Lufthansa 에 몸을 실었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다가 Pan sonic 의 음악을 들으며 슬그머니 잠에 들었습니다. 자는 도중 몸이 굉장히 피로했는지 심한 기침을 하였습니다. 독일인들은 공공장소에서 기침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데 신경이 쓰였지만 내가 어쩌겠습니까? 정신 차려보니 옆에 독일인이 이제 내려야 한다며 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저는 괜히 Entschuldigung 을 연발하고 있었죠. 연착으로 인해 원호 동지가 도착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원호 동지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원호 동지가 오는 길에 공항 앞에서 사고가 있어 늦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16시간만에 베를린에 입성했습니다.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실제 소요시간과 현지 시각과의 차이가 좀 있습니다. 베를린은 현재 서울보다 7시간가량 느립니다. 그러고서 Hermannstrasse 에 있는 원호 동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전철역 안에서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게다가 여기 전철문은 내릴 때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티켓을 검사하는 사람이 돌아다니기는 합니다만, 티켓이 없어도 탈 수는 있습니다. 암묵적으로 부랑자들의 탑승을 허락한다는 느낌이 들어 독일에서의 교통수단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멍청한 생각이란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원호의 집에 도착해 맥주 마시다 새벽 3시쯤 잠에 들었습니다.

 

10월 1일 토요일.

 

아침 7시. 베를린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서 집주인과의 계약을 서둘러야 했기에 피곤함을 뒤로 한채 일어섰습니다. Berlinerstrasse 에 있는 계약할 집을 향해 갔습니다. 독일인 집주인 할머니는 나와 원호 동지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지만 새봄에게는 첫 인사가 “You can not live here” 이라고 말했습니다. 커피와 케잌을 꺼내주시며 집의 주의사항들을 설명 해주었습니다. 그 전 한국인이 잘 씻지 않아 1주일만에 내쫒았다구요. 그러나 할머니가 주신 커피잔과 접시, 포크는 굉장히 더러웠습니다. 가구들은 상당히 투박해보였으나 사용에는 별 무리가 없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세탁은 할 때마다 1Euro 씩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여자친구를 데려오기 전에 미리 주인 할머니에게 알리고서 데려올 것과 무슨 변동 사항이 생기면 방문에 쪽지를 붙이기로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신지 말하는 것도 좀 힘겹게 느껴졌고, 우유를 따르며 쏟으실 정도 였고 다리도 절고 계셨습니다. 좀 의아스러웠지만 별 개의치 않고 넘겨버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350Euro 에 계약을 하고, 새봄의 집을 계약하러 갔습니다.

 

새봄의 집은 굉장히 가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많은 가족 사진들과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새봄의 방은 밝은 느낌이었고, 창 밖으로 나무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옷장의 창에는 레이스가 달려있었고, 4개씩이나 되는 스탠드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집도 크고 굉장히 깔끔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Vietnam Restaurant 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후 나는 선불제 Handy 를 구입하고서 원호 동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나와 새봄은 Markt 를 들러 장을 봤습니다. 일요일은 가게가 열지 않고 월요일엔 통일절이었기 때문에 긴 주말을 보내려면 준비할 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새봄의 집에 그렇게 짐을 두고 새봄이 씻는 동안 원호 동지에게 7시에 있을 전시에 가자는 약속과 집주인 할머니께 새봄과 집에 갈 것을 SMS 로 보내고 나와 새봄은 다시 Berliner Str. 로 향했습니다.
낮 3시의 충격. Berlin Str.에 도착해 나와 새봄은 처음 Euroqida 라는 Markt 를 들어갔는데 아랍인들을 위한 마트였는지 온갖 향신료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물 한병만을 들고 나왔습니다. 다시 다른 Markt 를 찾아 새봄을 위한 맥주 몇 병과 불면증이 심해질 때 한잔씩 꺼내 마시고 잠들 위스키 한병, 그리고 소세지, 고기, 야채와 과일, 샴푸, 물 등을 샀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주인 할머니는 새봄에게 나가라고 화를 냈습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잘못한 느낌이 들어 연신 미안하단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가 계속 화내기에 나는 SMS 를 보냈으니 확인 해달라고 했으나 여전히 화를 내기에 열쇠만 들고 나와야했습니다. 새봄은 할머니에게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내가 혼자 다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노크를 하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주인 할머니가 티셔츠 한장만을 입고 반나체로 내 방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 문을 반쯤 닫으며 주인 할머니가 욕실로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쯤 닫힌 문 사이로 나는 주인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며 내가 사온 음식들을 가져갈 수 있냐고 물었으나 답은 없었습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계속 되는 신음 소리 이후로 “Scheisse”, “Fick da”, “Ich glaube nie” 와 같은 말을 되풀이 해서 들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리다 다시 음식을 가져나오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Okay”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들어가면서 본 할머니는 욕조에서 가로로 넘어져있는 듯 했고 얼굴만이 보였습니다. 저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몇 가지 음식들을 챙긴채 빠져나왔습니다.

 

나오자 마자 원호 동지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원호 동지는 나에게 너무 걱정 하지 말라며 자신의 집으로 올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원호 동지의 집으로 향하며 새봄이와 저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몇 정거장을 지나쳤었습니다. 그러나 금새 다시 갈피를 잡았습니다. 6시가 살짝 넘은 시각에 원호 동지의 집에 도착 하자마자 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맥주를 단숨에 두병이나 들이켰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집에는 침대가 한개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며 수상한 점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모두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가 약간 넘은 시각. 우리는 전시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Schokoladen 이라는 곳에서 포스트 펑크 밴드의 공연이 있다고 하였는데 공연장과 전시장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앰뷸런스가 와 있었습니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한국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오늘의 전시는 중앙대 회화과 ‘김 교만’ 교수님의 전시였습니다. Berlin UDK 를 졸업하신 분과 워싱턴에서 오신 분 등.. 그리고 Yisang Sohn 의 친구 Remi 를 만났습니다. 한국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서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하시며 350Euro 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독일에서의 생활이 좋아질 수 있도록 격려의 말도 주셨습니다.

 

전시가 끝날 무렵 우리는 Schokoladen 에서 공연을 볼까 했으나 5Euro 나 하는 입장료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 아래 근처 2Euro 짜리 피자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Remi 의 집으로 향해 매실와인과 맥주를 조금 마시고 공부를 좀 하다 나와 새봄, Remi, 원호 동지는 Herrmann Platz 에 있는 좌파들을 위한 저렴한 주점으로 알려진 Tristeza로 가 1.5Euro의 가장 싼 맥주, Stern 을 마셨습니다. 가게 입구에는 Rumpen 과 proletariat 의 합성어인듯한 Rumpenletaria 로 시작하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새봄은 피곤해 했고 택시를 나 역시 피곤했기에 택시를 타고 새봄을 집에 바라다 주고 다시 나는 가게로 돌아와 일을 마치고 합류한 원호 동지의 부인인 Eli와 함께 맥주를 마시다 원호 동지의 집에서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잠에 들었습니다.

 

 

10월 2일 일요일.

 

완전한 도망. 오전 10시쯤 늦게 일어나 일단 한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집주인이 나와는 차원이 다른 Alcohol-licker 인데다 옷을 죄다 벗고 나를 덥치려 해 도망쳤다고. 집을 중개해준 곳과는 화요일부터 연락이 되어 조치를 취해줄테니 일단 짐을 가지러 가고 돌발 상황이 생기면 경찰을 대동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결 상태가 안 좋아 거기까지만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원호 동지가 만들어준 계란 후라이와 빵, 베이컨 그리고 두유를 먹고선 둘이서 Berlin Str. 로 향했습니다.

 

75Euro 짜리 Monatskarte 를 구입하고 카페인 음료를 마셨습니다. 도착해서는 더 두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첫 아침에 한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독일인 할머니의 축 늘어진 보지와 뱃살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먼저 벨을 눌렀습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저는 긴장을 해 호흡이 거칠어지니 원호 동지가 제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 말해주었습니다. 문을 열고 “Halo” 를 연신 말해보았으나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 짐과 장보고 난 것들을 모두 챙겨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제가 현관문을 다시 잠그고 원호 동지가 먼저 내려가는데 긴장을 해서인지 잘 잠기지 않았고 속으로 저는 “원호야! 같이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새봄과 합류하여 원호 동지의 집에 짐을 내려놓고선 근처 벼룩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제서야 조금씩 진정이 되는 듯 했습니다. 그 벼룩시장에는 어디서 주워다 놓은 부서진 것들까지 팔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 구경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원호 동지가 추천하는 2.5Euro 짜리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고기가 너무 크고 빵은 거의 손잡이 수준이었는데 소스도 없어 맛이 없을 줄 알았다가 한입 먹고서는 굉장히 맛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선 Neuköln의 미술관, 공원으로 가 그리스 출신으로 추정되는 작가의 전시를 보고서 야외 까페에서 맥주 한잔씩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완전히 편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후에 원호 동지의 부인 Eli 와 합류하여 공항이었다가 아주 큰 공원으로 바뀐 곳으로 갔습니다. 아주 커다란 잔디밭에서 공부하다 눕고서 어느 독일사람들이 날리는 연, 글라이더를 보고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아마 굉장히 취했었나 봅니다. 원호 동지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 했는데 먼저 원호 동지의 집으로 와 잠에 들었습니다.

 

 

10월 3일 월요일.

 

아, 베를린. 아침엔 원호 동지가 대접한 닭고기와 소세지를 먹고서 이른 점심엔 새봄이와 근처에서 케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후 2시 30분. 원호 동지는 일을 하러 나갔고, 원호의 부인 Eli는 내일부터 있을 박사과정 심사를 위해 준비중입니다. 저는 서울에서부터 독일에 도착해 있었던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큰 일도 겪었지만 독일이 낯설고 무섭고 하진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짐을 풀 곳이 없어 원호 동지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미안합니다. 아마 원호 동지가 없었다면 나는 그 집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까요? 글을 끝내기에 앞서 원호 동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ㅡ 2011년 10월 3일

위험한 곳으로 가라

“병1신들 대유행”

베를리너 짜이퉁의 어떤 기사, 독일에도 병1신들 대유행인가. 내가 느낀 바로 여기서 말하는 베를린의 위험한 지역들은 안 위험하다. 물론 내가 경험하지 못한 2006년의 베를린이란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할 내용이더라도, 저 곳들을 ‘위험하다’ 로 치부하는 것은 “주말의 홍대, 신촌에 취객이 많아 위험하므로 가지 않는 것이 좋다.” 라 말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심지어 저 곳들 중 어떤 곳은 오히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까지한데 이런 식의 기사를 쓰다니. 말 통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위험하니 가지말라 했던 곳들 중에서 두 곳 빼고 다 가봤는데, 모두 위험하지 않았다. 그 두 곳은 네오나치 네트워크가 탄탄한 곳이라는데 그나마 이 두 곳도 네오나치 반대 시위에 참여를 통해 직접 가볼 생각이다. 네오나치들이 모여 사는 그 두 곳들을 일단 제외한다면, 그 어떤 곳보다 내가 더 위험해!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한 말:
“Geh gefährliche Orte. Da sind die sichersten Orte.
위험한 곳으로 가라. 그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다.”

 

어제 Thomas와 Oranienburger Tor부터 시작해서 Hackesher Markt, Rosenthalerplatz, Mauerpark를 찍고 Weinmeisterstraße까지 하루종일 걸었다. 아, 잠시 Rosenthalerplatz 쪽의 Weinbergwegpark에 머물렀을 때, 잔디 밭 위에서 비누방울 놀이를 하며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우리는 새 작품을 구상했다. ‘커다란 비누방울이 천천히 기계에 의해 공중에 띄여지고,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큰 칼이 그 비누방울을 내려쳐 펑! 하고 터져버리는 것’ 을 말이다. 아마 당신의 꿈도, 인류의 희망도 저런 비누방울 같은 것이겠지.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큰 칼이 고장나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또 하나, 나와 토마스 이렇게 둘이서 베를린을 활보하고 다니면 사람들이 쉬이 웃는다.
그것이 조롱인지, 호기심인지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룬다.
하지만 독일에서 백인과 흑인, 백인과 동양인의 조합은 흔하더라도
흑인과 동양인의 조합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위험하고 힘든 일을 피하고 있다.
그 것으로 우리가 잃을 것은 자유와 미래,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안전한 죽음뿐이다.

 

 

 

ㅡ 2012년 6월 29일, 오후 세시 반.

나의 태도

x. 나의 태도

종종 나의 직선적인 태도가 공격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또 어떤 사람들이 나를 둘러싼 루머를 만들어 내는지 조차 대략 알고 있다. 나는 대화를 통해, 또 작업을 통해 서로의 불편한 것들과 갈등을 드러내려고 한다. 갈등을 숨기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 분명하게 잘라 이야기 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사실과 달리 종종 비난을 받왔다. 그래서 그 비난들을 즐기려고 한다. 그 사람들에게는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지만, 나에게는 그들에게 항변할 의무가 없다.

나는 2011년 작업 <Meltdown> 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도망치는 것 뿐이다. 때때로 도망을 권유하면 사람들을 소통을 요구하며 나를 두고 고립된 사람이라 말한다.” 라고 이야기 하였다.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부터 돌이켜 보았으면 한다. 타인에게는 물론 본인 스스로에게까지 어떤 억압을 가하는지. 나는 이 사람들에게서 대한민국 군대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내면화를 간접 경험한다.

어른

 

아픔은 잠시라 한다.

강한 사람이 되라 한다.

참고 이겨내라 한다.

패배하지 말라한다.

 

“미숙했던 당신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짖누르고 있다!”

 

참 편하다.

“미안하다” 한마디면 되니까.

 

 

 

토요명화

x. when i was half smaller than now, i learned the world from the movie. i believed there is equality, but peaple told me that’s not real. then i realized what is life and reality. i miss when my father slapt on my face, because that time i only afraid my father and my fault. but now i afraid myself, ’cause i know what is beyond of there. i grew up with this <토요명화, Saturday Night Movies> in korea. just i remember in this moment, and i still love so much films. and this signal music makes me close my eyes. there was no loud, only loud was in my mind.

x. 지금보다 제 키의 반만 하던 때에 저는 영화들을 통해 세계를 배웠습니다. 저는 거기에 평등 따위가 있을거라고 믿었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건 진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삶과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제 따귀를 때리던 날들이 그리워요. 왜냐면 그 때 두려웠던건 오로지 아버지와 제 실수였거든요.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두렵습니다. 왜냐면 이제 나는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거든요. 나는 한국에서 ‘토요명화’ 와 ‘주말의 명화’ 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지금 그 때를 기억해요, 나는 영화들을 너무 사랑했고, 이 시그널 음악을 들을 때면 조용히 눈을 감았다는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전쟁이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정어리 – 35

“언제든 후회의 눈물과 전화 한통이면 모든걸 해결할 수 있는 당신이 어떻게 나의 삶을 알 수 있겠습니까?”

ㅡ 2014년 5월 16일, 새벽

Acid Film Club – 2

* 경고: 술 마시러 가기 위해 프린트 중인 프린터의 전원 코드를 뽑아 버리듯 글을 마쳐버렸습니다.

 

 

x. 며칠 간의 영화 이야기와 <정어리>

 

– <Dragnet, 드라그넷>, 1987: 80년대 여피들을 상대로한 코미디 범죄물, 80년대의 향수는 언제든 좋다.

– <Lucy, 루시>, 2014: 최민식의 연기가 생각보다 돋보이지 않았다. 중반부터 노골적 중2병 스타일. 결말로 향할수록 아이디어 부족이 눈에 보인다. 매트릭스, 맨 프롬 어스, 스페이스 오딧세이 + 뻔하디 뻔한 아시안 갱스터 클리쉐를 섞어다가 황급히 “손님! dvd 대여기간 만료요!” 하며 영화를 끝냄. 뤽 베송 개새끼야.

– <22 Jump Street, 22 점프 스트리트>, 2014: 전편인 <21 점프 스트리트> 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다소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요새 나오는 어지간한 코메디보다는 나은 편. 후속편에 대한 엔딩이 깨알 같은 재미로 요즘 헐리웃 영화들의 후속편에 대한 세태를 조롱했다.

–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2006: 박광정, 정보석 같은 괜찮은 배우들을 캐스팅 하고서도 실망시킨 영화. 어딘가 홍상수의 느낌이 베어있는데, 시도 자체를 조롱하고 싶진 않다.

– <The Devil’s Path, 흉악 – 어느 사형수의 고발>, 2013: 흉악하게 못 만든 영화.

– <족구왕>, 2013: ㅈ같은 사랑아, 빌어먹을 청춘아!!!!!!! 근데 나는 한국의 대학 문화를 모른다는게 함정.

– <Tamako in Moratorium,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2013: 이런 류의 일본 영화들 이제 그만 나올 때 되지 않았나. 아.. 내 시간. 왠만한 중2병 영화들조차도 영상미는 갖추는데, 이건 아무 것도 없다.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들.

– <Haywire, 헤이와이어>, 2011: 좋은 배우들로 계속 잠이 오게 만드는 쓰레기 영화.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말로리 케인’은 미국 정부에 고용된 고도로 훈련된 여성 첩보요원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그녀는 억류되어있던….”.

– <Black Angel, 블랙 엔젤>, 2002: 틴토 브라스, 이 놈의 영감탱이ㅋㅋㅋㅋㅋㅋ 에로의 거장이 아니라, 코메디의 거장ㅋㅋㅋㅋㅋㅋㅋ

– <Into the White, 대공습>, 2012: 실화 영화들이 대개 노골적으로 눈물을 쥐여짜는데 초점을 두는 반면, Into the white는 그렇지 않아 보기 편했다. 각국 언어로 연기를 해 더욱 몰입감이 있었다. 한국제작사들의 한국어 타이틀 작명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전쟁영화.

– <스톤>, 2013: 화려한 캐스팅이 아니더라도, 정우성이 출연한 <신의 한수> 와 비교해도 아깝지 않은 영화다. <신의 한수> 가 2014년 작품임에도 말이다. 다소 낮은 예산의 영화들에서 완성도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썩 괜찮은 완성도도 보여주었다.

–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4: 호화캐스팅에 이케아 같은 영화다. 물론 이케아 같다는 의미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망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액션 영화임에도 계속 졸았기 때문에 두번이나 봐야만 했다.

– <Grudge Match, 그루지 매치>, 2013: 드 니로와 스탤론의 만남에서 중후한 무엇인가를 기대했지만, 70’s, 80’s 스타들을 인스턴트식으로 재활용한 영화. 뻔하디 뻔한 서사. ‘환전 해달라는 할아버지에게 은행 여직원이 “애나(엔화) 드릴까요? 딸나(달러) 드릴까요?” 하는 식’ 의 개그가 생각난다.

– <청아>, 2010: 제발 이런 영화 만들고 예술 영화라고 둘러대지 마라. 기본적인 전개의 개연성도 없어 딱히 악평을 주기도 어려울정도.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으면 꼭 함께 볼 것.

– <All Things Fair, 아름다운 청춘>, 1995: 크흑, 2시간 8분의 크흑…. 사랑이란 누구의 이름인가. 감히 별 다섯개를 드린다.

– <Falling Down, 폴링다운>, 1993: 조엘 슈마허는 반자본주의적 작품을 다루는 감독이 아니다. 허나 공교롭게도 마이클 더글라스의 <폴링 다운> 은 올리 에델 감독의 <Last Exit to Brooklyn, 부르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1989 처럼 자본주의 민살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모두 낙원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감히 별 네개 반을 드린다.

–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2005: 별 반개 준다.

– <원 나잇 스탠드>, 2010: 형편 없다는 말 밖에 못하겠다. 시나리오부터 연기까지.

– <Borgman, 보그만>, 2013: 개봉부터 기괴한 영화 열 손가락에 든다고 악평이 자자했던 영화. 욕하지 마라, 나는 종종 웃으며 재미있게만 봤다.

 

 

– <On The Road, 온 더 로드>, 2012: 영화 <컨트롤> 에서 불후의 밴드 ‘조이 디비젼’ 의 싱어 이안 커티스를 연기한 ‘샘 라일리’, 영화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트> 의 ‘가렛 헤드룬드’, 영화 <락앤롤 보트> 의 톰 스터리지, 영화 <인 투더 와일드> 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영화 <멜랑콜리아> 의 ‘커스틴 던스트’, 영화 <Her, 그녀> 의 에이미 애덤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의 ‘비고 모텐슨’, 영화 <레이> 의 ‘테렌스 하워드’, 영화 <아임 낫 데어> 의 ‘래리 데이’, 영화 <염소들> 의 ‘리카도 안드레스’, 영화 <커피와 담배>, <위대한 레보스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망각의 삶>, <아트 스쿨 컨피덴셜>, <뉴욕 스토리>, <판타스틱 소녀 백> 의 ‘스티브 부세미’, 그리고, ‘킴 붑스’. 이런 캐스팅만 보더라도 이 전에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나 <그들 각자의 영화관> 같은 영화를 감독한 월터 셀러스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만든다. (배우 ‘킴 붑스’의 이름은 ‘Kim Bubbs’ 인데, 왠지 ‘Boobs’ 드립을 치고 싶어 캐스팅한 느낌이 들 정도)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세 작가.

 

이 영화 <온 더 로드> 는 잭 케루악의 자전적 소설 <길 위에서> 영화화한 것이다. 사실 대개 이런 영화들은 좋은 평을 받기 어려운데, 썩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 원작의 힘이랄까. 이 모든 것들이 잭 케루악의 진짜 이야기라서 그럴까.

 

영화 속, 한 대사가 나를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함께 해온 누군가가 떠나며, “I’m on way for me, 나는 길 위에서 나가려구요” 라고 남겼다. 왜 번역이 이따위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저 씬의 앞뒤 문맥을 함께 읽으면 되려 괜찮은 의역이라 생각한다. 그 절망감을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이 말을 들었던 잭 케루악의 나이는 딱 내 나이쯤이었고, 정처없이 목적도 없이 글을 쓰며 3년 째 여행 중이었으며, 여행이 시작된지 4~ 5년 가량 지난 뒤에 그의 책 ‘길 위에서’ 를 출판했다. 더구나 1951년 4월 2일에서 4월 22일 사이에 일종의 암페타민인 벤제드린에 취한 삼 주 동안, 단 하나의 구두점 없이 타자기에 끼운 36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종이띠에 이 소설을 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6 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종이띠는 마치 그가 말하던 길과 같다. 이 압도적인 비트 세대 작가들의 글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 버리는 것이다. 며칠이나 굶다 겨우 음식을 맞이했던 잭 케루악의 친구들이 저녁 만찬에서 예의따위 생각할 겨를 없이 게걸스럽게 요리들을 먹어치웠듯이 이 책들에 담긴 문장을 게걸스럽게 읽어 치우는 것이다. 마치 스피드를 할 때처럼 생각 같은 건 나중으로 미루어야만 한다. 생각하는 동안, 새로운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가 출판 된 이후, 이 책은 마치 페이지 마다 LSD를 잔뜩 적셔놓은 것처럼 팔려나갔고, 서점에서 가장 자주 도둑 맞는 책 중 하나가 되었으며, 잭 케루악은 이 소설 하나로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 모두를 길 밖으로 내몰았다. 잭 케루악은 ‘비트, Beat’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고선, 음악의 박자가 아니라 단지 ‘세상의 모든 관습에 대한 지겨움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했고, 젊은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비트닉(Beatnik, 비트족)이 되었다. 밥 딜런부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같은 뮤지션은 물론, <이지라이더>, <델마와 루이스>, <브로큰 플라워> 같은 로드 무비들도 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 뿌린 씨앗(크, 정액이라고 표현하려다 참았다)에서 태어났다.

길 위에서 그들은 모두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었다. 차를 운전하다 기름이 떨어지거나 여비가 떨어지면, 같으 길을 지나는 여행자에게서 기름값을 받고 태웠다. <길 위에서> 에 담긴 내용처럼 종종 몸을 팔기도 했고, 먹을 것과 술, 담배들을 훔치기도 일쑤였다. ‘히치하이킹’ 이란 것도 이 시절에 생겨난 문화라 할 수 있고, 몰래 화물열차에 올라타 미 대륙을 횡단하거나 중간 중간 일하던 공장 혹은 농장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고,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전쟁의 혜택을 받은 미국은 모든 것이 풍족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1959년 한 해에 미국 여자들이 립스틱에 쓴 돈이 당시 돈으로 무려 2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국은 권태로울 만큼의 안락함을 영위하면서도, 젊은이들은 이러한 소비지상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이들에게는 어디론가 폭발할 것이 필요했지만, 그런 구실이 없었다. 매카시즘의 광풍만이 불고 있었다. 당시 <길 위에서> 의 책 광고 문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밤새 거친 파티를 열고, 앉아서 정열적인 비밥재즈를 듣고, 항상 어딘가로 움직이며 마시며 사랑을 나눈다. 그 어떤 새로운 경험에도 그들은 무조건 예스다!” 그리고 그들은 잭 케루악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소설 <길 위에서> 같이 폭발했다.

 

 

다시,
“나는 길 위에서 나가려구요”.

 

그래서 나는 결국 와인을 열었다.
그들을 향한 나의 애정도 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열정을 잊지 않겠다’ 맹세를 서슴치 않던 이들이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나는 여행중이진 않지만, 혹은 여행이라고 해도 상관 없지만, 지금 시점에서 베를린에 있는 내게 저 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떠날 때 남기는 말이다. 아직 내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은데, 내게 남겨진 저 한마디를 마주할 일이 꽤나 많았다. 올해에만도 두 번이나 들어야만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으나, 그 답은 언젠가 그 모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 알게될 것이라며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dx3 sardine cover original

내가 <정어리> 를 쓰기로 한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나 비트 세대들 때문이 아니었다. 20대의 절반 이상을 병원에 매여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 처방약들에 의해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약이 너무 세서 내가 무엇을 한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고, 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을 택했다. 내가 나를 잊지 않도록 그래야만 했다. 두 차례에 걸친 병원 생활은 가혹했다. 혼자서 눈물, 콧물을 흘리고 토해가며 좌절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것일까’ 하고 자책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안했다. 퇴원 이후에도 1년이 넘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입원 당시, 약물 때문에 책 읽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나는 슬라보예 지젝의 <What’s up totalitarianism?> 과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를 독본하기에 위해 노트에 배껴써가며 읽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복용하는 약물과 종종 맞는 주사의 양과 이름을 기록했으며, 그에 대한 효과, 부작용들과 내 기분을 비롯한 상태, 하루종일 무엇을 했는지 기록을 했다. 복용하는 약물의 양이 늘어갈 수록 일기는 짧아져 갔으며, 퇴원하고 나서 다시 읽은 일기를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퇴원 직전에는 단 한줄도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 세 권으로 엮인 이 노트들은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오기 직전 모두 불태웠다. 그 시간들을 기억하기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 노트들은 불탔음에도 기억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차려입고, 젊잖게 무엇인가 대하는 것은 나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보다 공격적인, 화염병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보다 불편한 글을 쓰고 싶다. 갈등을 드러내고 싶다. 미로 같은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글 <정어리> 는 전혀 그런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차분한 것이다. 지진이 났다면 테이블 밑에 웅크려 머리를 쳐박지 말고, 집 밖으로 나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황망한 결론:
비트 세대 작품들을 보다 보면,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친구 녀석이 생일이다. 나가서 싸구려 위스키라도 한 병 사와야겠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들

다시 쓸 것이다. 하지만, 짧게 써보겠다. 독일 생활 3년차,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은 참 못 됐다. 정말 계산적이고, 이기적이고,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러니까 선민(選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선민의식을 갖고 산다. 어제 한 독일 친구가 전-한국여자친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이 친구는 그 여자친구와 결혼하기로도 약속했었다. 그런데 혼사 이야기가 시작된지 2주 만에 재산이나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 친구는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 받고 어떻게 된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힘들어 하고 있다. 내가 미안한 마음까지 들어 위로를 했다. 친구는 고맙다며, 언제든 뒤셀도르프로 오라고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이런 한국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심지어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상황을 돕기는 커녕, 이들에게 안전을 담보로 무엇인가 파는 브로커 짓까지 한다. 한 두명이 아니다. 다소 인종주의적인 성향의 독일 중산층과 붙어먹고 그런 일을 하는 한국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빌어먹는 행동들 때문에 한국 사람이 되리어 차별 당하는지도 인지를 못한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차별인데, 그 차별에 대해 독일 사람들에게 ‘네오나치’, ‘인종주의자’ 라며 손가락질 한다.
이 이야기는 다시 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일 쓰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독일에서 사는 한국 사람들과 유학생들의 악랄함과 부조리에 대해서 꼭 이야기 할 것이고, 지금까지만의 이야기로도 책 한권으론 부족할 것이다.

 

ㅡ 10월 16일, 뒤셀도르프로부터 온 메세지를 받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