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석습, 朝花夕拾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루쉰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해 1926년 쓴 산문집의 제목이다. 쉽게 풀어본다면, ‘아침에 떨어진 꽃을 바로 쓸어내지 않고 해가 진 다음에 치운다’ 는 것으로 떨어진 꽃에서도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보는 여유를 갖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대응하기 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처리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가 있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한국 가이드 에이전시 회사에서 전화를 받아야했다. 한국 시간에 맞춰 전화를 받아야 했으므로 새벽까지 잠들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까지 자고 있지 않았는데, 잘 정리가 되었고 가벼운 인사도 나누었다.

 

그리고, 여행 에이전시 직원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 라고 남겨진 내 카카오톡 프로필 소개가 혹시 루쉰의 것이냐고 물었고, 생각하신게 맞다고 대답해주었다. 그 직원은 자신도 루쉰을 좋아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전화기 너머의 그 목소리가 왠지 나를 설레이게 하였다.

 

ㅡ 2014년 11월 19일 새벽 4시.

젊은 아새끼들과 애어른

x. 얼마 전, 보수 논객이라 하는 한정석이라는 애어른과 논쟁을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게으르고 참을성이 없다, 우리 때는 어땠는지 아는가?” 같은 무책임한 말을 보고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아새끼들이 게으르고 참을성 없어서 지금 이모양 이 꼴” 이라는 사람들이 어른이라며 거드름을 피운다. 그 분들이 어른 대접을 받고 싶다면, 이모양 이 꼬락서니가 되도록 내버려둔 어른들은 젊은이들 앞에서 석고대죄해야 온당할 것이다.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배운다. 어른들이 잘못하면, 우리는 그걸 똑같이 따라하는 것 이외에도 “이거 잘못된거 아닌가요?” 정도는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른들께 묻고 싶다.
왜 수 십년 전과 똑같은 대한민국을 원하는지.
당신, 당신들보다 우리 자식세대들이 잘 살면 배 아픈가요?
대체 대한민국의 어른, 당신들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의 이름입니까?”

 

 

사랑, 혼자가 되는 법

x. 사랑은 혼자하는 일이 아닌데, 누가 더 나쁜가를 가늠하는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 의미없음 앞에서도 헤어진 상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의 혼자가 되는 법은 모른다. 하지만, 완연히 혼자가 되고 나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이 무색해진다. 대체로 그것은 아무도 모르거나 알아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 사람들은 혼자라는 느낌이 무엇인지 상상만 해봤을 뿐, 혼자가 무엇인지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기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엉뚱함 뿐. 부디 모든 이들의 확고한 선택이 엉뚱하길 바란다.

 

지난 사랑을 원망하며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 생각이 나거나 외로울 때 먹는 음식

x. 한국 생각이 나거나 외로울 때 먹는 음식.
무거운 마음을 풀어볼까 하여 아시아 마트에 다녀왔다. 평속 20킬로로 1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비와 함께 맞바람이 심하게 불어 20분이나 걸렸다. 게다가 Elsenbrücke부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옆으로 나있는 대로 Mühlenstraße는 길이 쭉쭉 뻗고 신호가 별로 없어 달리기 좋을 것 같지만, 어느 방향으로도 맞바람이 부는 마의 구간이다. 슈프레 강을 옆에 끼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위로 별다른 건물들 없이 뻥뻥 뚫린 이 대로의 특성일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양방향의 맞바람.

이 원인 불명의 맞바람은 사방에서 휘몰아쳐 몸을 감고 비틀거리게 하지만, 가끔 운좋게 바람을 탈 수 있다. 그럼 평속이 무려 5킬로나 늘어나고, 힘도 들지 않는다. 라면 너댓개와 교자만두, 터키식 고추절임, 베트남 고추를 집어들고 비에 쫄딱젖어 물에 빠진 생쥐같은 몰골로 “라면 생각이 너무 나서요.” 라며 사장님께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스턴트 음식을 정말 싫어했다. 우는 아이 입에 물려주면 울음도 뚝 그친다는 소세지나 전지전능한 반찬 스팸은 물론이고, 밥대신 라면이 나오면 차라리 끼니를 거르는 그런 골치덩어리였다. 2008년 상수동에 살면서 처음으로 내 스스로 라면을 찾아 먹었다. 그리고 하루 저녁은 씹다만 라면을 우물거리며 서럽게 울었더랬다.
2014년이 끝나가는 지금 나는 인스턴트 라면을 먹기 위해 비바람을 헤쳐가며 달렸다. 이 매운 인스턴트 맛을 조근조근 천천히 음미 하고나면,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히고 코를 훌쩍인다. 먼지 알러지로 종종 고생하는데, 고춧가루는 면역력을 증대하고, 알러지에 효과가 있으며 울쩍할 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여러분 고춧가루는 http://www.zazimusic.com/ 에서 구입하세요.

정어리 – 46

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렇담, 이 소란은 사라지겠지.

우리의 고뇌는 고작 공해에 불과했다.

안녕, 안녕.

 

ㅡ 2014년 12월 20일 이른 새벽까지 술잔을 들이키다 돌아와..

Being a young artist who get art residencies in south korea

한국에서 예술 레지던스 작가로 산다는 것.

1. 대기업, 재벌들의 탈세를 돕는다.
2. 그들의 비자금 조성 수단이 된다.
3. 그들의 돈세탁 수단이 된다.
4. 갤러리 오너의 사교파티 들러리가 된다.
5. 새 작업에 열중한다.
6. 새 작업 모두 혹은 상당 부분의 권리가 갤러리에 귀속된다.
7. 정부 행정 차원의 예술가 지원 프로젝트에 끼어 이도 저도 아닌 것을 양산한다.
8.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원로 작가의 욕구를 채우는 어린이 예술가가 되어있다.
9. 작업비에 쪼들리고 작업실 쓰레기통은 인스턴트 식품들과 술병으로 가득차 있다.
10. 갤러리 대관료도 안드는데다가 전시 하다 보면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음을 갖는다.
11. 위의 것들을 지인들에게 자랑한다.
12. 엄마는 내가 뭘 하는지 모른다.
13. “엄마는 너만 잘 되면 걱정 없이 좋겠다. 밥은 먹고 다니니?” ㅡ 엄마의 전화
+ 13. 나와 영화 <수면의 과학, The Science of Sleep>, 2005

Being a young artist who get art residencies in South korea.
1. Supporting to evade Tax of Major Companies, Riches and Politicians.
2. To be a device of their Slush Fund.
3. To be a device for their Money Laundering.
4. To be a Sidekick for Private Party of Galleries Owner.
5. To be a Manic and Intend on New Artwork.
6. All or big part of Copyrights belongs to Gallery.
7. Making Bullshit with Artist Support Policy by Government.
8. Be a Kindergarten Artist for fill the Desire of Elder Artist.
9. You find easily Instant Foods Package and Empty Bottles in Garbage Can of Your Studio. Also No Money for Shit.
10. But You believe that People will know Your Fine Talent. Because You can make Exhibition without Venue Rental Fee.
11. Be Proud and Boast as Stickup Artist about All Those Things.
12. But Your mom never knows what are you doing.
13. “Mom is okay, if You gonna Well. Did you eat Something?” ㅡ Mom’s Phone Call
+ 13. Me and Film <The Science of Sleep>, 2005
MOM: isn’t working?
ME: my job is shit. a piece of shit!

2014년

”맙소사. 어젯밤 TV에서 섹스 피스톨스 봤어?”하고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나는 일하러 가기 위해 플랫폼에 서 있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섹스 피스톨스가 머릿기사를 장식한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신문에는 ‘TV에서 퍽(fuck)이라고 하다!’라고 쓰여 있었죠. 마치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입니다. 대단한 아침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사람들 혈압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 1976년 12월 2일 엘비스 코스텔로의 회상(나중에는 펑크 뮤지션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컴퓨터 엔지니어였다)
이 인터뷰에서 인터뷰이 엘비스 코스텔로는 76년 12월의 무뢰배들의 무례한 행동에 감화된 듯 해보인다. 그리고 이후로 마치 혁명이라도 일어난듯 해보인다. 그게 혁명이었는지 무의미한 시간이었는지는 각자 다른 해석을 두고 있겠고, 혁명의 본질에 대한 의미는 뒤로 미뤄둔채 이 인터뷰는 2014년의 우리들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동시에 14년에는 할 수 있는게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76년 12월 이후로 사람들은 더욱 가열차게 벗고, 토하고, 뱉고, 싸고, 빨며, 핥고, 걷어차다 던지고, 부스고, 넣고, 빼고, 먹고, 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허버트의 곡선에 근거한 피크 오일처럼 우리가 할 일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 하고 싶다. 그 이유에 대한 근거는 비오는 금요일 밤의 디오니소스가 되길 자청하는 나를 두고 여기서 생략하여 이후에 다루겠다. XDXD

정어리 – 45

“낙후된 삶”

 

며칠을 집 밖서 지내다 어제 집에 돌아왔다. 씻지도 않은채 그대로 잠을 청했는데, 옆에서의 옹알거림 때문에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렵사리 병원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병원에서는 평소보다 부쩍 더 늘어난 환자들로 나는 1시간 가량 기다려 주치의를 만나러 진료실에 들어갔다. 주치의는 진료실에 들어선 나를 보자마자 화난 말투로 “민주씨, 다시 입원 하는게 좋겠어요.” 라며 입원 수속 관련 이야기들을 꺼냈다. 안 그래도 힘이 들었는데, 어머니 가게 소송 문제 때문에 다시 병원에 들어갈 여력이 안된다고 대꾸하니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왜 이렇게 병원에 오질 않느냐” 라고 물었다. 나는 잃어버린 소책자 한권에 대한 이야기로 대답을 했다. 누가 빌려간지 도통 기억할 수 없다하니 날 위로하려 했다. 주치의의 일상적인 공감시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그 위로를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진료 받기로 약속했던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가 아버지 제사 였는데, 계속 무거웠다” 며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지난주 토요일에 갑작스런 이모부의 부고에 혼자 있을 수가 없어 선생님 보러 왔다” 이야기 했다. 오랜만에 주치의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나니 마음이 편했다.
“병원 오는 길의 웅성거림, 그것이 힘들다” 이야기 하였다. 마지막 처방에선 아빌리파이와 수면유도제, 혈압약, 항간질제 따위들을 받았는데, 두달 넘도록 병원을 찾지 않아 힘들테니 아빌리파이 대신 리스페달로 바꾸고, 다른 약들도 줄였다가 다시 시작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경제적 여력이 되는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일 할 수가 없다. 한참 일해야할 나이의 스물 다섯의 청년에게 약을 처방해주며 주치의의 당부였다. 그 당부를 듣던 때의 어머니 표정,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과 꽉 깨문 입술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주치의는 내가 장애인 등록이 되고나면면 보조금도 나오고 한결 편해질거라 말했었다.
주치의는 꼬질꼬질한 내 손을 가리켰다. 어디서 온 녀석인지 1주일 넘게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박힌채로 있던 가시가 있었다. 빼내보려고 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긴 가시는 빠지지 않았다. 주치의는 진찰비와 약값을 정산하고, 1층 가정의학과에서 치료 받으라며 걱정해주었다.
진찰비, 약값 정산. 다행히도 지난 여름 주치의가 난치성 질환자로 등록해주어 진료비 2000원에 일주일치 약값 1300원만 내어도 되었다. 가정의학과의 간호사는 낯익은 얼굴이라 했더니 내가 입원했을 때 종종 보았던 얼굴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약을 받아 돌아오니 어린 아이가 변 조절을 못해 힘들어 한다며, 먼저 진료하게 하자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또 1시간을 기다렸다. 간호사는 내게 무척 미안해 했다. 나를 잊고서 다른 업무들을 보러 갔다 오는 길에 1시간째 기다리던 날 본것이다. 일주일간 쓰렸던 검지는 매쓰로 살을 째 4cm나 되는 가시를 빼냈다. 간호사는 어떻게 이렇게 긴 가시가 박혔는지 물었지만, 나도 알 수 없었다. 약간의 통증이 남아있긴 했지만, 손을 움켜쥐었다 펼쳤다를 반복하며 한결 편해진 손을 바라보았다.

 

집에 오는 길, 문뜩 오래전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어머니는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울부짖으며 말했던 것이 이해 되기 시작했다. 그 말이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가슴에 비수처럼 남아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나를 속이지 않으려 했던 것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ㅡ 2009년 10월 21일 밤 23시 31분.

정어리 – 3

x. 상수동 반지하, 방 2개, 보증금 300에 월세 30.

앞, 뒤 없는 전철 노가다. 오늘도 새벽 5시 일어나 십장에게 허리 숙여 일해 한대가리, 일당 8만원. 일비 8,000원 인력소장한테 떼주고, 먼지 뒤집어 쓴채 평범한 사람인 척 사람들 사이 섞여 귀가 하는 길, 친구 놈 집으로 불러 술 한잔 하려하니 상수동 보족세트 35,000원 같은 세상…

/2010년 3월 13일

정어리 – 2

 x. 헬로, 미스터 서울
 ‘되도록이면 쓰지 말아야 한다.’
 코트 안 쪽에 만원짜리 한 장 쑤셔 넣은 채 거리로 나왔다. 그깟 만원짜리 한 장이라 생각하고 써버렸다간 일주일간 식사시간은 고역이 될 것이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써야 한다는 것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최대한 아껴야만 하는 상황에서 교통카드에 3000원 가량이 남아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지하철 역 쪽으로 걷는 동안에도 최소 환승 경로를 찾기 위해 머리 속으로는 어지러운 지하철 노선도를 떠올렸다. 잠시 쇼윈도 너머로 보인 뉴스에서 이상기후라 떠들었다. 정말 매스꺼운 뉴스가 아닐수가 없다. 매일 같이 지구 어딘가에서는 비가 멈추지 않아 강이 범람해 홍수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 식수가 모자라 큰일이라는 보도가 쏟아진다. 물론 오늘의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적인 한파 덕분에 온 도시가 난리였다. 나와 같은 녀석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하철과 버스가 모든 것을 해결해줌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한파니 폭우니 하는 것들 전부 고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위에 지하철 역에 들어서면 좀 나아질까 했더니 <고유가 시대, 에너지 낭비를 줄입시다!>라는 뻘건 글씨가 크게 적힌 포스터가 보이면서 역사내의 난방이 꺼져있었다.
 “빌어먹을 추워죽겠는데.. 내가 낭비할 에너지가 어디 있다고…”
 누구든 들으라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코트 안 주머니에 넣어둔 교통카드를 센서 위로 스치며 2120원 밖에 남지 않은 카드 잔액을 보니 더욱 울화가 치밀었지만 서둘러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서 신문 가판대 쪽으로 향했다. 온갖 신문들은 서로 무엇이 더 문제인가 앞다퉈 1면을 장식했다. 정면에 석장이나 연달아 걸린 신문들은 ‘이상기후, 한파로 도시 마비’, ‘기상청, 한파 예보할 수 없었다’, ‘전무후무한 기상재난 대책 미비’ 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얼어 붙은 도심 사진, 반면 북극에서는 빙산이 무너지는 사진과 익사 직전의 망연자실한 북극곰 사진이 온 신문을 도배했다.
 아연실색.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신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금융위기 강타, 자동차 판매량 급감’, ‘국산 자동차 내수시장마저 타격 받아..’, ‘자동차 산업 구제할 금융 구제 정책 시급’ 따위의 헤드라인을 내걸며 자동차가 팔려야 경제가 살고, 사람이 산다고들 마치 미친 전도사 마냥 두 팔 벌려 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늦은 점심시간 나와 같은 지하철 플랫폼 위에서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모든 일에 무관심해 보였다. 마치 ‘Pulp’의 ‘common people’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홍대 방향 전철이 도착했다.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아 사람은 비교적 적었지만, 폭설로 열차 내 앉을 자리는 없었다. 실은 그다지 안고 싶지도 않았다. 유독 서울의 전철 풍경만이 그러한 느낌인지는 나로서 알 수가 없다. 허나, 전혀 모르는 이들과 삶의 지친 얼굴들을 마주 바라보면 비참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다. 졸고 있는 사람, 영어 단어를 외우는 사람, pmp를 보는 사람, 종로부터 거하게 취한 노인들..
 ‘헬로 미스터 서울. 너란 녀석은 사람들의 휴식을 몹시도 싫어해.’
 몇 분전 2120원이 남았다며 붉게 표시된 LED만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2010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