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96

안녕 프리다,

네게 편지를 쓰는 일은 정말 오랜만이구나.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우리가 서로 만나길, 그리고 서로 대화하길 보다 많이 즐겼기 때문일거라 생각해.

내게 지난 겨울은 동굴 속을 걷는 것 마냥 너무 길고, 어두웠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저 놓여진 한가지 길을 따라가야하는 것처럼..
하지만, 겨울은 곧 끝날거야. 그리고 봄이 우리를 다시 미소짓게 하겠지.

프리다, 나는 왜, 그리고 얼마나 너가 결혼을 걱정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혼자 걱정하지마. 프리다, 내가 나의 최선으로 너와 함께 할게.

어떤 날, 우리가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널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거야.

친구로서, 그리고 인생의 동반자로서, 네가 원하는 순간까지 너와 함께 할거야.

지금까지 내 삶은 지독히 힘들고, 어두웠어. 내가 병원에서 있었던 일, 정치적인 것들, 너도 그 이야기들 잘 알거야. 어둠 속에 혼자 갇혀있지만, 눈물조차 보여서는 안 되었고,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들.

나는 내 삶은 끝났다고 생각했어. 한 사람으로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생각했어. 내 인생은 마구 난도질 당한 채, 아무도 가까이 가길 꺼려하는 시궁창에 쳐박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의 외침은 아무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난 <어떤 이의 일생>이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갑자기 내 결정 없이는 그 무엇도 내 인생을 끝장낼 수 없다는걸 깨달았지.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이 어둡고, 추운 동굴을 걷되, 출구를 향해 걷는 것이라고,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어.

내가 앞으로 더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즐길 것이라고 네게 약속할게.

그러니 네가 슬프고, 힘들 때, 언제든 내게 오길 주저하질 말아줘.

네가 슬프고, 힘들다며, 내게 찾아와서 웅크릴 때, 정말로 고마웠어.

왜냐면 그 의미는 네게 나는 편안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적어도 화나는 사람은 아니겠지.

내 방은 언제나 네게 열려있어.

그리고 너와 함께 어떤 것들을 하고 싶어.
여행, 수영, 그리고 호수 옆에서 와인을 드는 일.

내게 그런 기회를 줄래?

겨울은 곧 끝날거야. 봄이 오고 있어..

그 전에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노래를 듣고 싶네.

너도 이 노래를 즐기곤 했니? 나 오늘밤에 너랑 이 곡을 듣고 싶어.
Eliott Smith – Between the bar.

너의 민주가..

 

ㅡ 2016년 3월 21일, 이른 아침..

정어리 – 95

“내가 모든 일을 나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소망컨데 나는 당신의 절망을 머금고 살아가는 일을 하고 싶소. 나의 소망이 당신의 절망보다 조그마한 것이 비통하오.. 하지만, 약속하오. 우리가 꿈꾸어왔던 이 모든 일들이 단지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지 않게 하겠다고. 나는 여기 약속하오.”

“If I can make all things to my own things, I hope and I would to filled your despair in my life. So grieving, because my hope is smaller than your despair. But I promise. The dream what we had, I will not make it just like a midnight summer’s dream. I promise here.”

 

ㅡ 2016년 3월 19일, 길을 걷다 양귀비를 보다

 

FB_IMG_1458428663591

정어리 – 94

SPEECHLESS, FUCK! HAVE NO TIME TO SAY WHAT I DOING NOW!
SHIT, EVEN I HAVE NO SPARE TIME TO SICK!
* missing child, missing child!

 

 

ㅡ 2016년 2월 24일, 아침 8시 반.

 

정어리 – 92

…어머니, 어머니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어진 대로만 살아야하는 걸까요?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나의 인생을 내가 만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상당히 호전적인 사람이기 때문인지 빌어먹을 운명따위 따르고 싶지 않아 나는 거스르기로 했습니다, 어려우면 손을 내밀어 주세요. 내 힘껏 손을 내밀게.

 

ㅡ 2014년 2월 10일, 바람소리가 거친 새벽 4시.

지난 열흘 동안 생각한 일들, 다시 기억하기

||: 지난 열흘 동안 생각한 일들, 다시 기억하기 :||
 
 
x. ☹ ㅡ 메갤: 메갤에 대해 마지막 정리글로 하여금 더이상 코멘트 남길 일이 없을 것 같다. 나는 워마드는 물론, 메갤을 더이상, 조금도, 페미니즘 운동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믿고 싶었고, 나아가길 바랐지만, 메갤은 도리어 반여성주의적인 행동들을 보여왔으며, 여성의 권리 쟁취, 젠더 간의 수평적 사회를 바라기보다 여성의 권력화가 가장 주된 동력이었다. 반년 가까이 메갤을 보면서, 그들의 시작을 응원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비판적 지지를 보냈지만, 이제는 더이상 아쉬움도 남지 않는다. 더욱이 젠더학을 연구하는 선생님들이나 메갤을 매개로 ‘자칭’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분들이 메갤에 대해 단 한마디의 비판도 하지 못하는 것에 크게 실망했고, ‘기계적 중립’, ‘피해자 중심주의’ 같은 유사과학 수준의 엉터리 수사학에 더이상 함께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여기에 아무런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며, 본인들의 권력화를 바라는. 심지어 그 마이너 사회, 가운데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권력투쟁, 혹은 인정투쟁, 이들에게 과연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기나 한가 싶다.
 
 
x. ㅡ 함께 하는 것: 사유와 향유. 무엇인가를 할 때, 이 둘 중 한가지라도 빠졌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둘 중 한가지에 심취하다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맹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x. ㅡ 방법론: 직설화법은 대개 정치와 교육에서, 간접화법은 문화와 예술에서 온당하게 사용 되어야 한다. 만약 정치인이, 교육자가 직접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기보다 감상적인 수사를 다량 사용하는 화법을 구사한다면, 우리는 그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다른 경우로 아재의 풍유법, 알레고리. 그것들이 우리에게 핵노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아재들이 간접화법을 가장한 직설화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같은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하고 싶은 미생의 오상식 과장과 그를 자처하는 현실세계의 과장님. 반대의 경우로 이해가 가능한 것은 안티파들의 히틀러 풍자를 예로 들 수 있는데, 히틀러를 그대로 묘사하는 것 같은 직설화법을 가장하면서 파시스트들을 비꼬는 간접화법이 바로 그 예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아재들의 말들이 조금도 풍자적 비판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 아재들이 실제로 여성을 차별하거나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구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러한 행동에 긍정하지 않기 때문. 미러링 또한 일시적일 때에는 간접적으로 풍자적 비판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일상화 될 때에는 더이상 간접적 풍자가 아니라 일상화된 폭력이 되어 버린다. 박근혜 대통령을 두고, 위안부나 되어버리라는 그런 믿기지 않는 농담들처럼.
 
 
x. ☹ ㅡ 바로 1년 전, 오늘과 같을 날을 맞이하기: 오한, 고열, 두통, 근육경련, 마른기침, 편도선염, 연하곤란, 구토, 괜찮은 척 수 편의 영화를 보다 기절하듯 잠에 들고나선 신들린 사람처럼 헛소리하며 잠에서 깨어나기. 이것이 지난 며칠간, 내가 한 모든 일.
 
 
x. ㅡ 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 같다. 이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지만, 왜 이들이 스스로를 고통으로 내모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들이 정말 저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도망치는지 모르는걸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스스로 고통을 우리의 원죄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x. ㅡ Disease is not their weapon,
Our fear and our interests are their weapons: 우리가 해야할 일들은 서로를 억압하는 곳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정체성을 익히고, 그들과 함께 억업을 넘어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축제에 도취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야 말로 압제자가 우리들로부터 원하는 것이다.
 
 
x. ㅡ 타인의 도덕을 저울질 하는 사람들: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타인의 도덕을 저울질 하는 것을 보면 몸서리가 쳐진다. 타인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양심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의 금기를 부수며, 자유를, 권리를, 다양성을, 예술을, 더 나은 내일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것이 과연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란 말인가. 경험과 위치, 기억, 느낌, 이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늠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정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정합하지도, 부정합하지도 않는다.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움도 자유로움도 없다.
 
 
x. ㅡ 20대의 그 고민들, “나는 누구인가”: 직접 확인컨데.. 나라를, 대륙을 막론하고 절대 다수의 20대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하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조차. 이 시기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 앞을 결정한다. 심지어 예술가들까지도. 특히나 20대의 남성들은 세상 모든 것을 아는 80대 노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찾으면서도 오랜 흥미를 못 느끼는 것처럼, 이미 아는 지루한 것처럼 여긴다. 마초적인 성향이 짙을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며, 방어적인 성향을 띈다. 서른 살이 넘어서랄까, 이러한 것들이 보이는 관점에서 이들을 볼 때마다 나오는 것은 William B. Yeats의 <A drinking song, 술 노래>(http://dx3.a-revolt.org/2016/01/22/william-b-yeats-a-drinking-song-with-korean-translate/)를 읊조리며 나오는 실소와 같을뿐.
 
 
x. 영화 <The Way We Were>, 1973: 3년 전, 썼던 리뷰를 다시 읽으며..
혼자 술잔을 홀짝이며, 영화를 보는 일은 너무 좋다. 먹먹함에 콧등이 시큰 거릴 때 혼자가 되어야만 마음껏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으니까. 물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면서도 여전히 그것들에 의구심을 갖는다. 애써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여기저기에 감상을 남겨두기엔 난 충분히 긍정적 사고의 배신을 맛보았고, 나는 불온한 회의론자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도 된다. 통속적이긴 해도, 그런 감상은 짧으니까.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어제 친구들과의 밤마실 역시 좋았다. 낯선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낯설게 무엇인가를 대할 수 없다면, 그처럼 비통한게 또 있을까.
 
그런 느낌을 이어 보자면 나는 영화 ‘The Way We Were’, 1973. 응, 그래 이 영화를 보고 꽤나 찔끔거렸다. 물론 Barbra Streisand 때문에라도 다시 볼 이유가 충분했다. 의도와 상관없이 요즘 다시 보고 있는 고전들 중 썩 괜찮은 느낌. 극 중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학생운동을 하는 반전주의자. 아니 한술 더 떠, 프랑코 왕정의 폭거를 비난하고 소비에트를 열렬히 지지하다 못해.. 집 안에 레닌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물론 이 영화는 할리우드가 타겟이기 때문에 좀 물렁한 표현들이 있지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인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도 흥행을 위해 애정전선이 한 부분을 자리 하는데, 이 부분이 다른 로맨스 영화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해군장교이자 반정치적인 남자친구를 예술의 세계로 끌어내는데 힘을 주는 것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안일한 삶을 선택하지 않고, 매카시즘이 미국을 강타하는 시대 속에서도 늘 힘겨운 투쟁 속에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냥 포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자친구와의 갈등. 이 것이 이 영화의 엔딩을 빛내 주는 중요한 요소인데,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과 사랑 사이에서 결국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우연찮은 재회. 남자친구는 결국 상업 예술 작가로서 다른 여자를 만나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끝까지 운동 속에 남아 혼자가 되었다. 여러분 끝까지 혁명을 추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도 그런가 봅니다. 우왕ㅋ 이런 식의 끝맺음은 그리 나쁘지 않지.
 
 
x. ㅡ 지난 주 베르그하인, 클룹나핰트: 주문하지 않아도 기억해주는 바텐더. 펑크, 테크노,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또 죽였나를 생각하던 중 새로 만난 사운드 아티스트들. 새 작업, Urban Shamanism에 대해 이야기 하는 동안, 이 친구들은 흥미를 보이며, 당장이라도 샤머니스트가 될 수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1차원적으로 샤머니즘을 대입하여, 우리 스스로 샤머니스트가 것이 아니라 구조적 접근을 해야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이후 생각치 못했는데, 오히려 영감을 얻었고, 바로 잡아 고맙다며, 함께 작업하고 싶다 의사를 밝혀왔다.
 
 
x. ㅡ Reason of bike pants: 단벌신사. 언제나 검은 와이셔츠에 딱 붙는 나시, 넝마같은 커다란 크러스티 셔츠, 7부로 잘린 블랙진, 바이크 팬츠, 그리고 등산화. 그 중에서도 바이크 팬츠에 대해서 오해와 묻는 사람이 많아 이야기 해볼까 하면, 으레 사람들은 “저기, 죄송한데.. 왜 스타킹 신으시는거에요?”부터 시작해서 “조깅, 트레킹, 혹은 바이크 라이등을 좋아하시는군요?”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활동량이 많은 내게 바이크 팬츠가 조여주는 그 탄력감은 다리 근육을 조금 더 긴장되게 만들어주기 때문. 오해마세요. 가끔 여자친구들 파티에서 친구들 따라 치마를 입기도, 잘 벗기도 하지만, 스타킹은 아니랍니다.
 
 
x. ☹ ㅡ 빈곤한 삶: 우리의 주머니가 아니라 우리의 사상이, 사고와 철학이 빈곤해졌다는 것이 슬프게 한다. 서투른 것은 늘 괜찮다. 하지만, 목적으로 가기 위한 방편이 목적보다 중요시될 때, 우리는 목적과 더욱 멀어진다. 야구선수의 취미는 야구가 야구가 아니라 낚시이거나 야구와 다른 무언가들이다. 요리사의 취미는 요리가 아니라 역사이거나 또 다른 무언가들이다.
 
 
x. ☹ ㅡ 캐쥬얼 섹스, 다자간 연애: 보통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다자간 연애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해 받는 것에 익숙하지만, 피곤한 것이 사실이기에 잠깐 이야기 해보자면, 다자간 연애를 한다고 해서 모두와 자고 싶거나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자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거나, 캐쥬얼 섹스를 즐길 수 있는 그러한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즘 시쳇말로 케미도 있겠지만, 나는 우연성에 더 큰 부분을 두고 있다. 누구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것을 찾으러 다니지 않는다. 나는 나와 다른 사람과 만나 좀처럼 마주할 수 없었던 그런 것들을 나누고 싶다.
 
 
x. ㅡ 도발과 압도의 역사: 미명 속에 함몰 되지 않도록.
 
 
x. ☹ ㅡ 내가 화나 보였나요? 하지만 나는 그저 당신을 놓치지 않고 싶었을 뿐이에요.
 
 
x. ㅡ 사람들을 바라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새로운 내일은 바라면서 어떻게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살려하나.’, 그리고 작은 외침을 전해주고 싶다. “여러분 그에게 키스하세요, 그녀에게 키스하세요. 뭔가 어제와 다른 무엇인가라도 하세요.”
 
 
쓰기로 했던 글은 거의 마쳤거나, 아직 정리중입니다.

정어리 – 91

https://www.youtube.com/watch?v=VmO_0tIGo-4

 

x. 요 며칠동안 끄적여 파편화된 것들을 나열하는 일, Nina Simone의 Feelings를 들으며 적어내려가는 오랫만의 잡글. 혼자가 되는 일이 그리 낯설진 않지만, 익숙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혼자가 되는 일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커다랗게 열린 캄캄한 그 곳에서, 그 유대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곳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위해 두리번 거리고 있다는 그 유대감. 그것이 나의 고립을 해체한다.

 

x. 해가 질 무렵까지 허우적거릴 정도 알싸한 독주. 요즘에는 저녁을 압생트로 시작하는 취미가 생겼다. 취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언제부턴가 꾸준히 하게 되었으니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x.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열리는 가능성들.

 

x. 요즘 친구들과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늘면서, 사람들이 몇 가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 페미니스트 여성이라고 해서 페미니스트 남성만을 만나야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사고는 단지 사람을 믿지 않겠다며, 페미니즘을 고립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 하나의 공동 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x. 최근 들어 메갤에서의 어떤 의견, 이를테면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라던가 더 나아가서 ‘남성은 모두 잠재적 가해자’, 심지어 ‘남성은 전부 적’ 같은 것들이 오래된 것들을 상기 시킨다. 캐나다 친구에게 “양키 고 홈”이라고 외치던 사람들, 그리고 반자본주의, 민중메탈을 자처하던 이스크라 같은 밴드를 두고, 미제의 음악이라며 멸시하던 NL들이 생각난다. 퇴행.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벽을 만들고선 그 벽을 향해 왜 무너지지 않느냐며 구원을 구하며, 무릎 꿇고, 눈물을 쏟으며 기도 하는 사람들. 아무도 당신을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x. Urban Shamanism, 5년 만에 새로운 전시를 결정했다. 지난 작업 ‘앞, 뒤 없는 세계’를 확장시키기도 하겠지만, 나는 정치, 예술, 문화, 철학이 현대 사회의 주술과 종교적 제의라는 관점으로 이번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이를테면 베를린, 노동절에는 크로이쯔베르그, 노이쾰른, 그리고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에 수 십개의 펑크, 힙합, 테크노 오픈 에어 스테이지가 열린다. 그리고 수 만명의 사람들이 이 음악들을 중심으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환각에 빠지기도 하며, 불과 1~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시위대가 화염병과 투석전으로 경찰들과 격렬한 대치를 하며 쟁의를 벌인다. 단지 하루동안의 사육제에 불과해보일지 모르는 이 일들을 나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종교적 제의라고 생각한다. 은행에 벽돌이 던져지고, 유리창이 파손된다 한들 군대가 투입되지 않고, 경찰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종교적 제의이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의 목적도 실제 은행-자본의 붕괴가 아니며,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목적도 은행-자본을 붕괴시키려는 범죄자 검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밤, 베를린의 수 많은 클럽에서 열리는 테크노, 락, 메탈, 재즈, 블루스 공연들도 마찬가지의 종교적 제의이다. 이 제의들은 다양한 의견을 가진 열린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 선’을 제시한다.

 

x.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절대 정의 또한 없다. 나의 정의가 어떤 이에게는 악일 수 있으면, 그 어떤이의 진실된 정의가 나에게 악일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규정하길 지양하고, 우리 ‘공동체의 공동 선(the common good)’을 향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몰아내려고 해서는 이 싸움을 끝낼 수 없어, 끝없는 전쟁만이 우릴 기다릴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한다. 전쟁은 언제나 정의를 찾아 시작 되었고, 희생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다. 독일 아나키스트들이 말하던 ’War starts here, Let’s stop it here’가 같은 맥락에 읽힐 수 있다. 전쟁을 종식시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 또한 폭력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어떤 관점에서 ‘만들어진 정의’를 추구하기 하지않고, 공동 선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이 된다.

 

x. Gesture와 Act를 구분하지 못하고, 진담과 농담의 경계를 가리기 어렵다면, 이토록 어렵게 사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x. 뭔가를 시작하면,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외롭다는 느낌이 멀어지면서 사소한 발걸음조차 힘차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고립감이 도리어 스스로를 냉소적으로 만든다. 그 가운데 우리가 해야할 것은 동요하지 않고, 꾸준히 그 가치를 지켜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만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얻는 것은 작은 신문의 기사뿐이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너 없이 세상은 돌아간다. 최고의 복수는 살아 남아서 증명 하는 것이다.”는 에디 베더의 말에 매번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을 희생시켜, 순교시켜 얻을 수 있는 세상은 없다. 사람들을 돕고 싶다면 스스로부터 행복해져야한다. 질투하지 않아야한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 당신의 지금이 미래가 될 것이다. 비젼, 네가 슬퍼하면, 미래 또한 슬퍼진다. 그러니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x. 그래, 나도 어제와 같이 매일 요리하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같은 낡고 오래된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떻게 감히 생각에 잠기는 가장 고전적인 이 방법을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요리를 하다보면,
모든 것들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만약 네가 누구인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다면,
이내 곧 잘못된 느낌을 갖겠지.

만약 네 마음 속에 올바른 것을 두고 있다면,
분명 크게 기뻐하게 될거야.

 

x.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듣기 좋은 겨울밤이다. 비록 추울지라도.

 

ㅡ 2015년 11월 29일, 아침이라 말하기엔 너무도 이른 아침.

정어리 – 91

“나는 진실되니 아무 말 말고, 믿고, 지지 해달라”는 식의 ‘감정에 호소하는 아마츄어리즘’은 체제가 휘두르는 폭력과 다를 바 없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도 진실된 동기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가려내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이 갈등이 어디서 시작되는 지를 바라보고 이야기 해야한다.

 

 

ㅡ 2015년 10월 14일 이른 새벽, 폭력에 대하여..

정어리 – 90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 가서 펑크로 살 수 없다면, 너는 펑크라 불리우는 그따위거 하지마. 너한테는 그런거 필요 없어. 친구들끼고 펑크왕 놀이 하지마. 너 혼자서 할 수 없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거야. 그건 운명을 거스르는 일도 아니고, 그냥 네가 네 자신을 속이며 시간 낭비하는거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시간 낭비하지마.

 

부탁인데, 내가 없는 곳에서 날 비난을 할 때는 지금까지 하던 것보다 좀 더 크게, 최선을 다 해서 날 폄훼 해줘. 그렇게 없는 말을 지어서라도 말이지.

 

ㅡ 2013년 10월 5일, 오후 1시 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