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 호세 무히카

* 1935년 출생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냄.
1. 1960년대,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서 활동하며 쿠바 혁명을 지원한 탁월한 지도자로 알려졌으며,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로빈후드 게릴라라는 별명을 얻었음
2. 1970년대, 군사정권과 싸우다 여러차례 투옥되고, 총상을 입었으며 결국 14년간 수감됨. 그러나 옥중에서 정치활동을 계속함.
3. 1985년, 민정 이양후 석방 이후, 민중참여운동 활동.
4. 1994년, 하원의원 선출
5. 1999년, 상원의원 선출
6. 2004년, 광역전선 후보 대통령 선출에 기여 – 총선에서도 과반 이상의석 확보
7. 2005년~ 2008년, 농업 분야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목축수산부 장관 취임
8. 2008년, 높은지지도로 대통령후보 선출
9. 2009년, 대통령 당선
10. 2010년, 대통령 취임 – 넥타이 없는 대통령의 행보
11. 우루과이 정부 관보에 의하면 소유 재산이 집, 트랙터, 87년 폭스바겐 한대 뿐. 매달 월급의 90%를 사회에 기부.
12. 취임하자마자 대통령궁을 개방해서 노숙자들의 쉼터로 써버리고 대통령 별장 매각
13. 무히카 집권이후 우루과이는 꾸준히 5퍼센트의 경제성장을 보임
14. 정치적 노선 – 실용주의자, 채식주의자, 무신론자, 낙태 찬성, 동성결혼 합법화
15. 마리화나 합법화및 개인적 재배 허용. 반면 대기업의 담배산업 강력한 규제. 담배 광고 규제및 모든 담배회사의 담뱃값 디자인을 똑같이 하는 ‘담배단순포장법’ 시행 -> 필립 모리스가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WHO와 함께 국제분쟁재판소에 제소.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MIT 경제학 박사, 클린턴행정부 경제자문회의 의장인 스티글리츠 교수마저 “필립 모리스가 우루과이 국민을 죽일 권리를 달라고 제소했다. 미국과 무역하지 말라” 며, 무히카 대통령을 지지함.
16. 개인생활 – 2005년 결혼 당시, 상원의원 생활을 하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공동거주. 이후 외곽지대에 국화농장을 열어 현재까지도 국화 농장을 하고 있음.
17. 2013년 12월, 세르비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무히카에 대한 다큐 <정치의 마지막 영웅>을 촬영에 들어감.
18. VICE 리포터와 호세 무히카의 인터뷰 당시, 리포터 앞에서 마리화나를 흡연. 피델 카스트로에게 받은 것이라며 리포터에게 시가를 선물함: http://www.youtube.com/watch?v=1BwVxmJPies
19. 우루과이에 태풍이 왔을 때, 동네 사람들 집 고쳐주러 다니다 나무쪼가리에 얼굴 찢어짐
20. 트랙터 운전중 실수로 개를 치어, 개가 다리 하나를 잃음. 너무 미안해서 개와 같이 살기로 함
21. 브라질 월드컵때 우루과이선수단이 패하고 들어오니까 공항에 나가서 카메라 앞에서 피파개썌끼들 하고 욕했다고 함.
22. 며칠 전 무히카의 폭스바겐을 100만엔에 파는데 제안 받아 경매에 올려 노숙자를 지원하는 주택 제공 프로그램을 위해 쓰기로 함.
23.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무히카 대통령의 연설 전문: http://www.huffingtonpost.kr/2014/04/15/story_n_5150195.html
24. 현재 거주하는 집: 방 1개, 부엌 1개, 거실 1개. 가정부 고용 안함, 직접 가족과 개의 식사를 준비함. 일흔 여덟임에도 트랙터 몰아 농사지음. 농장, 밭, 트랙터 등은 모두 부인 소유이고, 개인 재산은 200만원대의 87년형 폭스바겐 한대뿐.

 

https://www.youtube.com/watch?v=EzaBW8iSztE

 

‘색상 충돌’ 한국 – 미국 관점에서 1992 로스 앤젤레스 폭동

https://www.youtube.com/watch?v=_FkZEStvIEo&feature=youtu.be

<Clash of COLORs – LA RIOTS OF 1992> speak and subtitle – korean / english

 

 

I recommend this documentary, if you interesting about LA RIOTS of 1992 between korean american and black american. Also this docu shown us few things.
1. Power battle between police and city government.
2. What yellow journalism did in that time.
3. Between Korean american and Black american, there was no racial hate.
4. What could be happen when government and police are failed?
 

13:35 ㅡ Leo Estrada as Demographer said: “It’s also important to realize, that koreans coming from Korea don’t think it themselves at minorities. Really grown up all their lives in the as part of a majority so the topic the other concept is any even sensible. When come United States you learn after a while that there’s with majority whose minority groups people color committees a color ethnic racial categories. The Koreans were just koreans they didn’t see themselves as part of that other larger group both minorities”

 

Indeed, I feel. Very important point of most Korean mentality. They never thought about living multiethnic society in their life. They learned about racial discrimination and multiethnic society from conservative public education. So when Koreans did racial discrimination, most of them can’t recognize. You know that some hollywood movies exaggerating sensational presentation and taking suggestive remarks for develop a dramatic scene. But part of Koreans learned about racial discrimination like an amusement from hollywood movies.
How happened like this in South Korea, NOT! North Korea? Actually, most Koreans couldn’t travel to another country before 1989. South Korean government made a level for a law as ‘Overseas country travel Liberalization Law’ from 1981. Then 1989, that law passed totally for all people. But still poor people (include most young generation) can’t dream a travel oversea country.
Who could able to travel to another country before 1989?
There is 3 standards for qualification.
1. Workers (Their bank account had under control by South Korean government.
2. People related their family in another country.
3. Only middle upper or upper class and high public official could have their private travel.
Because of how abled to all this all happened, that korea was under military dictatorship very long time.

 

만약 한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칸 미국인 사이에 벌어졌던 1992년 LA 폭동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또한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몇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경찰과 시 정부의 권력다툼.
둘째, 돈에 눈이 멀어 사실을 왜곡하고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은 언론들.
셋째, 한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칸 미국인 사이에는 인종 혐오가 없었다는 것.
넷째, 정부와 경찰이 좆같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13분 35초 ㅡ 인구통계학자, 리오 에스트라다가 말하길: “한국 이민자들 스스로가 자신들 스스로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봤을 뿐 자신들이 소수민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대다수의 일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소수라는 그 개념조차 없습니다.”

많은 한국인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이야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다인종 사회에서 사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한국 사람들은 인종차별과 다인종 사회에 대해 배운것은 보수적인 성향의 공교육이 전부였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하였더라도, 대다수의 그들은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 모두 알겠지만, 몇몇 할리우드 영화들은 극적인 전개를 위하여 과장해 선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외설적인 말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어떤 한국 사람들은 그 할리우드 영화들로부터 인종차별에 대해 오락처럼 체득한다.
어떻게 북한도 아니고 남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사실은 1989년까지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다. 한국정부는 1981년부터 단계적으로 ‘해외여행자유화’ 법을 시작했고, 1989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사람을 위한 법이 완전히 제정되었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을 포함한)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해외여행을 꿈도 꿀 수 없다.
그럼 1989년 이전에는 누가 여행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행이 가능했던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노동자들 (물론 그들의 은행 계좌는 한국 정부 관리 하에 있었다.
둘째, 외국에 가족이 거주하는 사람.
셋째, 적어도 중상위계급이나 상류층 그리고 고위공직자.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국이 수 십년간 군사독재자의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 프리덤라이드

https://www.youtube.com/watch?v=_JHDoNr8Bpg

미국 내슈빌의 미래 자유버스 활동가들(당시 내슈빌 전역의 대학생들)이 비폭력 트레이닝(역할극 등)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이 트레이닝을 이용, 학생들은 내슈빌 시내 레스토랑 등의 흑백분리정책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영국 : 희망의 씨앗(SEEDS OF HOPE)

https://www.youtube.com/watch?v=wvuf4qJ-Vu4

 

희망의 씨앗(SEEDS OF HOPE)은 삶과 정의를 위해 망치를 든 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이 비디오는 1996년 영국에서 있었던 유명한 직접행동의 과정 및 이들이 마침내 무죄평결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기까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행동을 위해 함께 뭉친 사람들의 조직이자 운동 플라우셰어(plowshare)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4명의 여성이 영국항공우주산업(British Aerospace) 공장에 들어가 호크전투기를 파괴한다. 이 전투기는 동티모르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수출될 계획이다….

외화,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한국 방영을 둘러싸고

<트윈 픽스, Twin Peaks> 관련 정보를 찾다가 재미있는 정보를 발견했다. 트윈 픽스가 한국으로 수입되 방영되기 전에는 한겨례, 경향이 왜 트윈 픽스 같은 예술 작품을 방영하지 않냐며 프로그램 편성을 비판했고, KBS2에 의해 트윈 픽스가 방영되자 한겨례, 경향 신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간통, 친족살해, 근친상간 등을 소재로한 트윈 픽스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비판을 했었다. 반면 매일 경제와 동아일보 등만이 드디어 미국의 젊은 영화 감독 데이빗 린치의 화제작 트윈 픽스가 방영된다며 기사를 써내렸다는 사실. 빨갱이는 이래서 안된다. 홍대 학생회장이었던 한아름이도 지금쯤이면 망가졌겠지?

 

ㅡ 2012년 8월 1일

독일 : 수천 번 드러눕기

https://www.youtube.com/watch?v=iGwjBi9levQ

1997년 3월 독일 핵폐기물 수송 저지를 위한 대규모 직접행동.
독일어. 한국어 자막. 재생시간 43:50
1997년 3월. “수천 번 드러눕기” 캠페인 참가자들이 5일 동안 핵폐기물 수송용 크레인이 있는 다넨베르크의 목초지에 캠프를 차렸다. 이는 3차 핵폐기물 운송을 막기 위해 활동가들이 차린 12개의 캠프 중 하나이다.
“수천 번 드러눕기” 캠페인은 비폭력 활동가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국가폭력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참가자들 내부의 갈등에 대해서도 비폭력을 견지했다.
모든 결정은 전 참가자들의 민주적이고 합의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캠프 안에서는 동아리가 구성되었고 각 동아리는 대변인회의로 대변인을 파견했다.
캠프구성:
대형텐트 14동, 의사 2명, 구급요원 5명, 15개의 구역
의사소통 : 휴대폰 15대, 컴퓨터 2대(팩스, 모뎀, 프린터), 라디오 수신기 8대,
공동식당 : 하루 4,000명x3끼
의류준비 : 물대포에 대비한 옷 세트 700벌
물품 준비 : 물대포에 대비한 2000제곱미터 너비의 방수시트

잡글 – 베를린, 오바마, 금융 카를텔, 경제위기

데이빗 린치가 5년 전에 베를린을 방문, 베네핏 파티를 크게 열었었다. 마치 이명박의 강령을 받은 마냥 베를린 북서쪽의 낮은 언덕에서 삽집을 한번 한 후.. “훗날 나의 이름을 걸고 이 곳에 영화 학교를 만들겠다.”라고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그 날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 중 베를린의 유명 갤러리스트라던가 예술을 애호하는 거부들이 들뜬 마음으로 데이빗 린치에게 엄청난 기부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화 학교의 건립은 커녕 이야기조차 사라졌다. 웃지못할 사건이었다고 전해지는 가운데 정작 데이빗 린치는 어떤 성격의 베네핏 파티였는지 모르고 참석해 술과 베를린에 들뜬 마음이었을 뿐이고, 에이젼시가 기획한 행사였다는 후문이 있다.

 

이와는 좀 다른 베네핏 파티가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인공은 조지 클루니. 조지 클루니는 대외적으로 민주당 지지자이며, 반전주의자임을 알리며 현재 민주당의 대선자금을 위한 베네핏 파티를 열고 있다고 한다. 파티가 한번 열릴 때 마다 최소 200억원 이상의 기부금이 모이는데 재미있는 점은 조지 클루니가 반전주의자임을 말하면서도 민주당의 오바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자마자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을 한 바 있다.

 

오바마와 고 김대중 전대통령도 받은 노벨평화상에 대해 한가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바로 201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다름 아닌 EU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금융 카르텔과 메르켈의 합작쯤으로 여겨지는 EU의 금융문제는 그리스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국가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지금 이 네 나라의 사람들은 tv를 끄고 거리로 나가 피를 흘리며 금융범죄자들의 문제를 왜 무고한 사람들에게 전가 시키는지 그리고 왜 무고한 사람들이 아닌 금융 범죄자들에게 다시 돈을 지원해주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이 나라들에서는 여러차례 총파업을 열리고 있는데 이 총파업에는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교사, 군인 장교, 소방수와 같은 공무원들까지 참가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한국이 세계 경제 불황 속에서도 세계 9번째의 무역 1조달러및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디폴트 즉, 국가부도를 선언하기 직전에 있는 스페인보다 더 심각한 가계부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은 140.6%, 한국은 158%로 실제로는 한국에서 저러한 시위들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이상히 여길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거리로 나오지 않으며,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ㅡ 2012년 10월 15일

본래 글: 본인과 친구관계가 아닌 사람은 읽을 수 없음

제4장 1930년대 중반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출처: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1558
제4장 1930년대 중반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운동
민족전선운동과 임시정부의 참가
1. 비밀결사운동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은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분열을 지양하고 연합을 도모하였지만 세력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아나키스트운동 전반을 검토하고 새로운 노선을 수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은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을 제창하고 혁명을 지도할 조직을 결성하는 등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했다.

1. 일본무정부공산당의 참여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일본의 아나키스트운동은 쇠퇴기에 들어갔다. 이에 일본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는 아나키스트운동 쇠퇴의 원인이 강력한 지도조직의 부재에 있다고 보고, 아나키스트운동을 재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도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933년 12월 초기 무렵 이견민웅二見敏雄·상택상부相澤尙夫·입강범入江汎·식촌체문植村諦聞·사미실寺尾實등은 회합을 가지고, 아

나키스트운동 쇠퇴의 원인이 무조직·무계획의 조직과 활동방침에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결점을 극복하고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운동 전 전선을 지도·통제할 중앙집권적 전국적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이후 이들은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비밀결사체로서 평상시에는 아나키즘을 선전·계몽하는 것과 함께 노동자·농민 등의 경제투쟁을 조직·지도하여 그것을 정치투쟁으로까지 끌어올리도록 노력하고, 사회혁명 시기에는 노동자·농민·무산시민 등을 일거에 무장봉기시켜 현 사회제도를 파괴하고 일시적으로 독재정치를 행함으로써 반혁명세력으로부터 혁명을 방어하며, 민중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도우면서 점차 자신의 권력을 폐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이는 공산주의 이론을 차용하여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당면의 방침을 전선의 정비강화에 두고 먼저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와 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의 합동을 추진하였다.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은 1934년 1월 30일 일본무정부공산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을 제기하였다.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은 종래의 아나키스트운동에서의 자유연합주의, 무조직·무계획 방침을 버리고, 강제력 있는 중앙집권적 전국적 조직을 갖추어야 하며, 계획적 집중적 활동방침으로써 아나키스트운동의 전 전선을 정비·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 사회정세가 절박해져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을 경우에는 노동자·농민·무산시민 등을 선동·지도하여 일거에 무장봉기시켜 현 사회제도를 파괴하고, 또 일시적으로 변혁사회에서의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독재정치를 통해 반혁명세력의 공격을 배제하고,

민중의 이상사회 건설활동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독재정치는 장기간 지속되어서는 안되고, 이상사회 건설이 진척되면 적극적으로 자기의 권력을 폐기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아나키스트의 이상인 일체의 권력이 없고 사유·착취가 없는, 자유코뮨을 기간으로 하는 자주·자치·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1)간단히 말해서 중앙집권적 조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의 지도 아래 정치투쟁을 전개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민중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할 동안 반혁명세력의 반격을 분쇄하기 위하여 ‘민중독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무정부공산당은 아나키스트 전선통일운동을 전개하여 각 노동조합들을 통합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운동자금 확보와 무기 구입 등을 위한 방도를 모의하였다.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와 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를 통합하고자 노력한 결과, 1934년 4월 정식으로 결합되었고, 이로써 오랫동안 양분되어 있던 일본 아나키스트운동계는 통합되었다. 조직확대 작업 또한 전개하였는데, 이를 통해 1934년 8월 말 관동지방위원회, 1935년 2월 초 관서지방위원회준비회가 각각 결성되었다. 그리고 1934년 9월 8일 제16회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권력정치와 자본제 폐지, 완전한 지방자치제 확립, 사유제 폐지, 생산수단과 토지 공유, 임금제도 철폐, 노동자·농민에 의한 생산관리, 교육문화 향유, 인위적 국경 철폐 등의 8개조의 강령과 자본제 폐지 외 10개조의 테제와 함께 약 30개조의 규약을 제정하였다. 하지만 1935년 11월 6일 자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고전농상은행高田農商銀行을 습격하였던 사건으로 인해 당원들은 일제히 검거되어 일본무정부공산당은 붕괴되고 말았다.2)

일본무정부공산당에 참여한 이동순의 활동

일본무정부공산당은 재일본 한국인 사이에도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입당시키는 한편, 재일본 한국인 3단체 즉 조선동흥노동동맹·조선일반노동조합·조선노동자합동조합을 통합시켜 전선통일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3단체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에 일본무정부공산당은 이등열태랑伊藤悅太郞을 책임자로 하는 조선인부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통해 3단체 합동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다.3)이등열태랑은 1935년 9월 28일 『재일 조선 동지 제군에게 고한다』라는 제목의 팜플렛 약 50부를 집필·발행하는 한편, 당원인 이동순과 함께 재일본 한국인 3단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당조직을 확대할 목적으로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대책, 한국에서의 아나키스트운동 재건, 재상해 한국인 아나키스트와의 연락 등에 대해서도 협의하였다.4)대서정웅大西正雄도 이등열태랑과 연락하에 전선통일을 위해서 재일본 한국인 3단체 합동을 기도하고, 조선일반노동조합원 이종문·오우영 등을 설득하고자 노력하였지만,5)결국 실패하

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무정부공산당의 조직확대 작업에 의해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 중 일부가 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조선동흥노동동맹의 한국동韓國東은 1934년 11월 3일 당원 전소무남田所茂男·매본영삼梅本英三등의 권유로 입당하였으며, 동월 하순 이후 일본무정부공산당 관서지방위원회 확립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입당시킨 지기의청志岐義晴및 관서지방 오르그 입강범入江汎과 함께 관서지방위원회준비회를 결성하고, 1935년 10월까지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1월 11일 대검거 때 대판에서 체포되어, 12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대판지방검사국에 송치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6)

이동순은 1933년 이후 자유연합신문사, 이등열태랑, 기타 일본 아나키스트와 연락하여 아나키스트운동 전선통일을 위해 재동경 아나키스트계 한국인 단체를 연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35년 10월 15일 이등열태랑의 권유에 의해 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일본무정부공산당 관동지방위원회 식민지부에 소속되었다. 이등열태랑 등과 수차의 회합을 거듭하여 한국인 아나키스트계 3단체 통일, 재일본 한국인 유학생에 대한 선전·선동, 한국 내에서의 운동방침 확립, 재상해 동지와의 연락, 아나키즘으로서의 민족운동과 식민지대책 등에 대한 강령, 기타 등을 협의·결정하는 등 당을 확대·강화하는데 전념하였다. 재상해 한국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간부 이달·양자추 등과도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들로부터 보내져온 이달과 양자추의 원고 등을 『흑색신문』에 게재하고, 양자추의 요청에 의해 이종봉李鐘鳳

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이처럼 해외 동지와의 연락과 동지 획득을 위해 노력하던 중 1935년 11월 6일 경시청에 검거되었다.7)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한 한국인은 이들 외에 홍성환洪性煥·이수룡李壽龍·진녹근陳綠根외 수명이 있었다.8)

이처럼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자신들이 주체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본무정부공산당에 참가하여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을 차용하였던 비밀결사운동은 선전활동·노동운동·반공산주의활동 등과 함께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의 한 조류를 이루었으며, 1940년대 건달회建達會결성으로 이어졌다.

2. 건달회 결성

중일전쟁 발발 이후 객관적 정세의 불리와 당국의 철저한 탄압으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은 계속 쇠퇴하여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대부분 자유노동·잡업 등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곤란하였으며, 단체적 행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는 1935년 무렵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1938년에 들어 조선노동자합동조합이 해체한 것을 비롯하여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의 해체가 줄을 이었다. 1938년 1월 31일 흑기노동자연맹黑旗勞動者聯盟을 최후로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는 완전히 해체되었다.9)

이처럼 아나키스트운동을 포함한 재일본 한국인의 사상운동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하여 1939년까지 침체일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재일본 한국인들은 국제정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일본의 패전을 필지의 사실로 여겼다. 그리하여 사상운동은 1940년에 들어서서 다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검거인원이 말해준다. 1930년대의 검거 인원은 1933년 1,802명, 1934년 884명, 1936년 193명, 1938년 117명, 1939년 50명으로 급속히 감소하였다. 하지만 1940년은 165명으로 1939년의 3배를 능가하였으며, 1941년은 257명으로 급증하였다.10)이 사실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재일본 한국인들의 사상운동이 활발해졌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재일본 한국인 사상운동이 활성화되는 것과 함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 또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문성훈文成勳등은 아나키스트단체들을 해산시킨 기존 활동가들의 운동태도를 임시방편적인 것이라 비판하고 비밀리에 운동 재건을 꾀하였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까지 발발하자, 국제정세는 갈수록 일본에 불리하게 나아가고 있으며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1940년 3월 무렵부터 아나키스트 조직 재건을 기도하였다.

문성훈·이종문李宗文·정갑진鄭甲振등은 1940년 3월 31일 회합을 개최하여 다음의 사실에 합의하였다. 즉 일본이 패전하면 필연적으로 일본 국내에는 혼란이 생길 것이고, 이때 한국인 특히 사상운동 전력자는 학살 또는 감금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오히려 이것을 호기로 하여

재일본 무정부주의자의 단체 건달호의 취조내용

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 건설을 위해 봉기하고, 이때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면 볼셰비키계에 기선을 제압당하여 그들의 지배에 굴복당하기 쉬울 것이므로 속히 활동을 개시해야 할 것으로 보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을 결집하여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일본이 패전하면 일본에는 혁명적 상황이 전개될 것이고, 그 혁명적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장봉기를 계획·지도할 전위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전위조직으로서 결성된 것이 건달회이다. 건달회는 이종문·문성훈·정갑진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1940년 5월 하순 이들은 회목현栃木縣염곡군鹽谷郡율산촌栗山村소재 귀노천수력전기발전鬼怒川水力電氣發電공사장 빈본합숙소濱本合宿所로 이주하여 인부로 취로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누차 협의를 거듭한 결과, 동년 6월 상순에는 대체적으로 다

음의 사항을 결정하고 동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① 이종문·문성훈·정갑진이 중심이 되어 조직계획을 수립하고, 도쿄 동지를 설득하여 일단 본 직장으로 옮겨와 살게 할 것

② 동지 결집은 인부 모집으로 위장할 것

③ 계획의 비밀과 조직 확충을 완수하기 위해 동지들로 하여금 조선주장朝鮮酒場을 설립케 하고, 동 주장에서 회합하고 표면을 위장하는 것과 함께 이익금은 운동자금으로 충당할 것

6월 11일 빈본합숙소 부근의 옥외에서 문성훈·이종문·정갑진 등 중심인물 5명이 비밀회합을 가지고, 일단 조직을 재건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회의 명칭은 건은 아나키스트계 조직 재건과 달은 목적달성의 의미로 정하였다. 건달회는 일본무정부공산당의 무장봉기 전술을 채택하였으며, 6월 중순 무렵부터 폭력봉기 계획을 수립하여 습격목표, 폭력봉기의 시기, 습격방법 등을 결정하였다. 건달회의 폭력봉기 계획은 다음과 같다.

① 습격목표:ㄱ. 궁성宮城이중교二重橋를 습격하여 천황제를 타도하고 일본 국내를 완전히 무정부주의 상태에 빠뜨리는 것, ㄴ. 참모본부·육군성·해군성을 습격하여 군대의 최고 지휘기관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것, ㄷ. 내무성·경시청을 습격하여 경찰력의 발동을 정지시키는 것, ㄹ. 대장성·일본은행을 습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

② 폭력봉기의 시기:일본 국내의 물자결핍으로 일반 대중이 빵을 구하러 가두에 밀집할 1941년 3·4월 무렵

③ 습격방법:동원할 수 있는 인물을 확보하고, 봉기시 그들을 일정 장소에 집합시키고 목적을 명시하여 강제적으로 폭동에 참가시킬 것

건달회원들은 폭력봉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무기를 입수하고 자금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에서 1940년 12월 24일 검거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문성훈文原成勳·이종문岩本宗文·정갑진佐久間辰雄·이종식李鐘植, 李宗植·김동륜金東輪, 金村東輪·김석영金錫永, 金村錫永·김완金莞, 金瑬昌, 金岩瑬昌등이 공판에 회부되었다.11)

하지만 정철鄭哲에 의하면, 건달회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무죄석방되었다. 그는 태평양전쟁 전야라는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일망타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건달회사건을 조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12)이로 보아 건달회 결성은 사실일지라도 폭력봉기 계획은 일제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건달회의 폭력봉기 계획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1930년대까지의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단체들은 공산주의단체와는 달리 공개단체로서 합법적 잡지를 통한 선전활동 등 공개활동에 전념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건달회는 일제의 전시체제하 극도의 탄압 속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면서 결성된, 이들 단체들과는 다른 전위조직을 지향한 비밀결사체였다. 그리고 일본무정부공산당에 이어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추구하면서 재일본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의 한 조류를 형성하였다. 건달회가 경찰에 의해 검거됨으로써 일본에서의 한국인 아나키스트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註 1]「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高麗書林, 1991, 21~22쪽).
[註 2]이상의 日本無政府共産黨에 대한 서술은 「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에 근거하였음.
[註 3]「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59쪽).
[註 4]「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122~123쪽).
[註 5]「日本無政府共産黨事件第1審及第2審判決」(1940年 8月)(奧平康弘, 『昭和思想統制史資料』 1(共産主義·無政府主義篇), 135쪽).
[註 6]內務省警保局, 「在留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5年)(『資料集成』 3, 360쪽) ; 『朝鮮人の共産主義運動』(吉浦大藏 報告書), 33쪽 ;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420쪽.
[註 7]『朝鮮人の共産主義運動』(吉浦大藏 報告書), 33~34쪽 ; 內務省警保局, 「海外不逞鮮人と連絡する朝鮮人の檢擧」, 『特高月報』, 1936년 4월, 499쪽(『資料集成』 3, 629~630쪽) ; 內務省警保局, 在留朝鮮人の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5年)(『資料集成』 3, 362~363쪽).
[註 8]내무성경보국, 「在留朝鮮人の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5年)(『資料集成』 3, 360~361쪽).
[註 9]내무성경보국,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38年)(『資料集成』 4, 1976, 102~103쪽) ; 內務省警保局, 「在京アナ系朝鮮人團體の解消」, 『特高月報』, 1938년 1월, 108쪽(『資料集成』 4, 153쪽).
[註 10]내무성경보국,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0年)(『資料集成』 4, 399쪽) ; 內務省警保局,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1年)(『資料集成』 4, 612쪽).
[註 11]內務省警保局,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1年)(『資料集成』 4, 652~658쪽) ; 內務省警保局, 「內地在住朝鮮人運動」, 『社會運動の狀況』(1940年)(『資料集成』 4, 442쪽) ; 內務省警保局, 『特高月報』, 1940년 12월, 443쪽(『資料集成』 4, 564쪽) ; 內務省警保局, 「朝鮮人運動の狀況」, 『特高月報』, 1943년 11월(『資料集成』 5, 1976, 261~263쪽).
[註 12]鄭哲, 「建達會事件の眞相」(農村靑年社運動史刊行會, 『農村靑年社事件資料集』 3, 黑色戰線社, 1994, 394~3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