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베를린, 그리고 EU

Graffitisprayer sprühen EU-Kritik auf U-Bahnzug in Berlin

Sprayer lasten offenbar der EU den Tod von Flüchtlingen im Mittelmeer an – großflächig auf einem U-Bahn-Waggon.

Der Waggon wurde komplett mit Graffiti besprüht

Der Waggon wurde komplett mit Graffiti besprüht

Foto: Facebook/Hände weg vom Wedding

 

“EU”, “2014년부터 1만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지중해를 건너려다 죽는다” ㅡ 난민에 대한 유럽의 태도에 대해 베를린의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비판을

+ 이 가운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베를린이 오늘날 유럽의 문화중심지가 되는데에는 하위문화, 그래피티, 펑크, 테크노, 스쾃, 하우스프로젝트, 다문화 등 다양성과 열린 정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활동과 모든 거래에서 주목당하고, 기록당하고, 명부에 기입당하고, 세금부과당하고, 짓밟히고, 측정받고, 번호매겨지고, 평가받고, 인가받고, 허가받고, 경고받고, 금지당하고, 교정받고, 시정받고,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공의 편익이라는 구실로 그리고 보편적 이익이라는 미명하에 기부당하고, 훈육당하고, 배상당하고, 착취당하고, 독점당하고, 왜곡당하고, 압착당하고, 미혹당하고, 강탈당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에 대해 약간이라도 저항의 조짐을 보이기만 하면, 불평의 첫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억압당하고, 벌금물리고, 경멸당하고, 괴롭힘당하고, 추적당하고, 학대당하고, 곤봉세례당하고, 무장해제당하고, 질식당하고, 투옥당하고, 재판받고, 선고받고, 총살당하고, 추방당하고, 희생당하고, 매매당하고, 배반당하며, 결국에 가서는 비웃음당하고, 조롱당하고, 분노와 불명예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정부란 것이다. 이것이 정부의 정의이며 도덕이다.
ㅡ 푸르동이 말하는 ‘지배받는다는 것’에서 인용

++ 내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난민지지 시위는 게릴라 시위였다. 크로이쯔베어그, 코티에서 괼릿쩌반호프로 향하는 오라니엔슈트라쎄의 번화한 바, 레스토랑들 위로 „Schande Europa, 수치스런 유럽“이라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경찰들은 “베를린 시민들을 보호하는 경찰입니다. 신고 되지않은 불법적인 시위에서 해산해주십시오. 해산에 불응할시 연행하겠습니다” 라며 연신 확성기로 경고하고, 사이렌을 울려대면서도,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양 길거리의 퇴로를 차단. 검은 마스크와 후디를 푹 눌러쓰고, 스크럼을 짠 백여명의 블랙블록 시위대를 구석으로 몰아넣었지만, 한가로이 초여름 저녁을 와인으로, 맥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던 시민들이 바에서 나와 시위대를 향한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경찰들은 양 옆으로 시위대가 온전히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었고, 그 자리에서 아무도 수치스러운 비난을 듣거나 위협을 당하지도, 연행되지도 않았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도쿄 야스다 강당 점거농성 당시 강당 벽에 적혀있었다던 ‘타니가와 간’의 글귀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뜨겁게 머리 속을 맴돌았다.

x. “내-일은 젊은이들을 위하여 시인들의 열정이 폭탄처럼 폭발하고, 호숫가를 걷고, 몇 주 동안 완전한 친교를 나눈다. 내일은 여름날 저녁에 교외를 통과하는 자전거 경주를 한다. 하지만 오-늘은 투쟁.” ㅡ 위스턴 휴 오든의 ‘스페인’ 中, 1937년

“To-morrow for the young the poets exploding like bombs, The walks by the lake, the weeks of perfect communion; To-morrow the bicycle races Through the suburbs on summer evenings. But to-day the struggle.” ㅡ ‘Spain’ by Wystan Hugh Auden,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