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관계, 그리고 슬로우뉴스 기고에 대한 비판

슬로우뉴스 페이스북 페이지의 댓글에서 나에게 쏟아지는 질투와 원망 섞인 구질구질한 댓글들에 일일히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들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린 베를린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26년을 서울에서만 살아가면서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웠던 그런 것들. 나의 정체성, 이를테면 정치와 사상, 성적 지향성, 문화담론, 삶의 태도, 윤리, 또는 라이프 스타일, 심지어 패션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나는 늘 비난을 받아왔다. 비난을 받는데 익숙하다고 해서 그 비난을 늘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 내게 베를린은 손을 내밀어주었고, 나는 그런 베를린을 사랑한다.

내게 서울은 술에 취해 내 모호크를 잡아당기고,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하던 무례한 사람들을 만나기 일쑤였고, 심지어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맥주병에 얻어맞고, 병원에 실려가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의 행색 때문일까, 경찰은 언제나 가장 먼저 내게 잘못을 추궁하였었다.

나는 어디서나 소수자였고, 소수자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나는 펑크고, 문신이 있고, 피어스가 있고, 사람들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고, 오래도록 입어 넝마처럼 된 검은 옷들을 기워입길 좋아한다. 이것만 하여도 구직 인터뷰에서 1분조차 대화를 잇지 못하고 쫒겨난 적이 허다했다. 그래서 나는 한여름에도 언제나 검은 와이셔츠를 입어야만 했다.

내가 하는 밴드를 위해 제발 토요일만이라도 야근하지 않게 해달라고 사장에게 부탁을 하다 결국 주제 넘는다며 따귀를 맞고 해고 당해야만 했다. 물론 사장도 젊었을 때는 좀 놀았다며 스스로를 소개하던, 요즘 속된 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아재’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철이 없다며 조롱을 받아야했다.

나의 정치성은 어떠한가? 어린 시절 펑크를 접하면서 아나키즘에 관한 서적을 읽고, 여러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펑크가 말하는 변화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만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 앞 까르푸 불매운동에 엄마와 함께했고, 평택, 새만금에서 공연하고, 여러 시위들에 참여했다. 여러 진보정당 당원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지만, 한국에서의 아나키스트는 베를린에서 ‘자율주의자(Autonomen: 오래된 맑시스트에서 포스트-구조주의자가 된 좌파들과 아나키스트들)’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허약한 이상주의자이고, 조롱의 대상이다. 나의 정치성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는 다수의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존재와 활동을 조롱당해야만 한다. 그런 가운데 페이스북에서 ‘페이스북 프로필-아나키스트’를 만나는 일은 굉장히 지치는 일이다.

나는 성매매에 반대하면서도 더 직접적인 폭력을 막기위해 성노동을 인정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도 진보정당원들과 부딪혀야했고, 이런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인식이 없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한남충이라고 매도 당해야만 했다. 내가 베를린서 여성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굳이 말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래도 돌아온 말은 역시나 한남충이라는 단어뿐이었다. 굳이 운동이 아니더라도 도덕을 비난 받는 일은 늘 흔했다. 한국의 회식문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성매매에 참여하지 않아 회사를 다니면서도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했는데, 결국 자진퇴사 해야만 했다.

사실 회사를 다니기 보다는 일용직을 전전하면서도 가끔은 일용직에서마저 쫒겨나길 반복하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나에게 가장 끔찍한 시기는 2000년 말쯤 석면해체 일을 할 때였다. 석면(Asbestos)은 그 입자가 보석처럼 아름답다하여 그리스어 ‘불멸’에서 유래된 단어로 폐암, 석면폐증, 악성중피종 등으로 죽음을 불러온다. 석면의 위험이 대두 되면서 서구에서는 70년대말, 80년대 초쯤 석면해체 사업이 완료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 끝을 알 수 없다. 약 10년 째, 석면해체 사업이 활발히 진행중이고, 그 해체 작업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많은 석면해체 노동자가 천식과 진폐증으로 고통 받고 있고, 산재 인정도 잘 되지 않아 투쟁 중에 있다. 나는 일용직조차 구하기 어려워 석면해체 일을 시작했는데, 결국 나는 천식 때문에 세레타이드, 벤톨린을 달고 살아야했고, 점점 불어나는 약값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시 석면해체 일을 해야만 했다. 매일 밤, 잠에 드는 일은 끔직할 정도로 기침을 했었고, 그럴 때마다 작업반장은 끝나고 “기름칠 하면 다 괜찮아진다”며 으레 “우리 팀 오늘 삼겹살 하러 갈까?”를 이야기 했었다. 당시 만나던 친구는 고통스러워 하던 나 때문에 함께 힘들어했었고, 나는 석면해체 일을 그만두고, 더 가난해지길 선택했다.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그 친구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2009년 여름에는 또다른 질병코드를 가진 희귀성 난치질환자가 되었다. 주치의가 일하지 말고, 집에서 요양하기 만을 권하는 그런 환자. 그럼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고. 얼마나 일상적 가난에 시달려야 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열살쯤 현장사고로 평생 일만하다 떠나버린 아버지, 그 이후로 차별적 임금을 받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익숙한 경제적 어려움. 나는 초등학교 사무보조원으로 한달 월급 55~ 60만원쯤을 받으며, 힘겹게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밑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도 방학이 되면, 월급이 없어서 어머니는 쩔쩔매곤 하셨다. 나는 그래서 안다. 편부모 가정에 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필요한지. 어쨌거나 빚을 져서 대학을 가는 일은 내게 무책임한 일처럼 보였고, 바보 같은 일로 보였다. 이 경제적 어려움이 나를 요즘의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처럼 빚에 허덕이지 않게 하였다고 좋아해야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대학 나오지 않은 사람은 일종의 투명인간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과 또 대출이 거절되어 창 밖으로 던져 훔쳐 읽던 책들을 놓을 수 없었다. 오직 대학 도서관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논문과 책들은 나의 친구들과 내게 선의를 베풀어주신 몇 선생님들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이 갖는 학벌주의로부터 멸시는 물론, 학벌사회에 반대한다는 진보정당들조차 고등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책임하거나 멸시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학벌이 조금 부족해도 경제적 성공, 즉 돈만 있으면 학벌에 대해서는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좌파들 틈에서는 경제적 빈곤도, 학벌에 대한 것도 같이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분명 빈곤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도.

오늘까지도. 오늘까지도.

며칠 전 만해도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사실로 날 더러 누구의 장학생 아니냐며 빈정거리시던 분이 있으셨는데, 아는 것만 말씀하시라 하였더니 날 차단하셨다. 물론 그 분께서는 평소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하시며, 자신의 고급 취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력과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좋은 집안인지를 이야기 하시던 분이었다. 몇 달 전의 학벌없는 사회의 논란을 잠깐 복기해보자면, 그 분들은 자신들의 학벌이 존중받지 못함에 학벌주의의 부당함을 이야기 하셨지만, 교육의 기회를 갖을 수 없었던 소수자를 대변하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학벌없는 사회의 자진 해산에 대하여 어떠한 단서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배제된 사람이었으므로.

키가 반만하던 시절, 여자친구건 남자친구건 손잡고 이야기하길 좋아했던 내가, 기쁠 때면, 누구에게든 키스하길 좋아했던 내가 받았던 조롱에 대해서까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이만큼 사생활을 드러냈으면 됐지, 내가 더 새상활을 드러내야할 의무가 있으랴. 하지만 소수자는 나 혼자만도 아니고, 당신 혼자만도 아니란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당신의 권리도 소중한 것처럼. 배제하고 배척하는 정치는 자멸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베를린은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6년 전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친구들은 나를 안아주며,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고 했다. R 교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대한 글을 보시고선 나를 석사수업에 초대 작가로 불러주시고선 학생으로 받아주겠다 하셨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입학 자격이 없는 미수능생이었고, 고등학교 자퇴생이었다. 아시아 정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셨기 때문에 약간의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 독어에 능한 교수님께서는 한국과 같이 상당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을 모르셨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감사했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와 일들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 베를린은 내게 태어나 자랐던 서울과 완연히 다르다. 누구나 기쁜 일을 함께 즐거워들 하고 싶어하지만, 베를린은 기쁜 일은 물론, 힘든 일을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련 기사는 아니었지만, 슬로우뉴스 페이지의 댓글에서는 메갤 내지는 워마드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떤 베를리너들의 자유로운 관계와 성소수자들을 조롱하는 그 배타성, 그 자신들의 배타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이 기사가 쓰여진 그 이유, 베를린의 다양성과 관용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본인들이 관용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주류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문화라고 이해하지 않고, 범죄라고 단정 짓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 사회는 집단의 이해가치에 따른 보편적 정서에 동화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집단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나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나는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에서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와 보편적 정서, 위계질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에도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내가 이들의 폐쇄성에 대해서 분명히 짚은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혹은 내가 너무 경박스러운 것일지도.

이른 아침, 잠시 잡스러운 생각을 적어본다. 나의 생각을 누구에게 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은 이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므로.

 

ㅡ 2015년 7월 20일 수요일 오전 8시 23분, 저들의 자유가 침몰하는 것을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