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107

 

 

베를린의 노동절과 Air BnB,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를 며칠 째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알게된 모 언론사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도 준비하고 있다니.. 24~ 34문단 정도의 기사를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기사는 더 길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야기 드렸다.

어제 기자님이 공유하시며 남기신 멘트에 이의를 제기했고, 상당한 설전?! 아닌 설전이 오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양해를 구하신다는 메세지를 보내시곤 나를 그냥 차단해버리셨다.

준비중인 페미니즘 기사를 잠깐 이야기 해보자면, 그 기사는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밝힐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아는 언론에서 처음에 약속했던 조건, 기획기사와 달리 “독자기고 형식으로 기고하면 어떻겠나” 하고 갑자기 말을 바꾸셔서 아무 답변 안 드렸다. 말은 않으셨지만, 의도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예상컨대 편집부에서… 이유도 알겠지만, 생략….. (…)

차단하신 기자님이나 페미니즘 기획 기사를 구두로 약속한 언론사나 대체 왜 본인들 의견과 다른 주장을 하면,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정말 사람들 앞에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나는 비판일색도 아니었고, 오류를 바로 잡고, 당신들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싣는 논리와 사실들을 가져왔을 뿐인데.

아마도 내가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어서겠지. 어제는 리 선생님이 독일 관용어 ‘Schlenker’, ‘괜히 여기 저기 (해찰하고) 짧은 길 냅두고 일부러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주셨다. 허공에 떠다니는 것들까지 채집해서 가슴에 얹고 사는, 나는 그렇게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라서일까.

아포리아, 아포리즘.

모든게 무의미하지만, 절망을 깨닫는 것은 초월이니까요.

루쉰 선생은 길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한 명, 두 명, 열 명, 그렇게 사람들이 걸어 길이 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절망을 피하려 말아요.

 

 

 

ㅡ 2016년 5월 8일, 오전 7시 48분, 이 불면도 곧 사라질거야, 찾아왔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