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긴 글입니다. 본 링크에서 읽을시에는 댓글도 함께 읽길 권합니다. ㅡ via 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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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딸과 메갈리아의 아들들>
0. 일베의 사상 3쇄를 찍은 기념으로 씁니다.
1. 한국에서 시사적인 문제나 문화에 대한 비평은 넘치지만 지나고 나면 사실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혼자 열심히 노력한다고 바뀌는 구조도 아니다. 예전부터 ‘비평’과 ‘논객’의 무용성에 대해서 인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비평의 목적은 사건의 일회성에서 반복성과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비평의 형식이 시작되었던 문학작품이든, 혹은 시사적인 사건이든 마찬가지이다. 일회성과 우연성 그리고 정보소음은 현대의 대중사회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럴수록 그 배후의 구조와 반복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비평의 역할은 필자 개인의 (과잉된) 자의식과 주관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사건 자체의 참신함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정보소음에 소음을 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참신하다고 생각되는 작품과 사건은 알고 보면 진부한 것들이 많다. 어찌 보면 그 진부함이 새삼스레 참신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단지 시의성이 지나면 아무도 다시 비평의 대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이다.
2.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리로 나온 일베’ 사건이다. 작년 일베회원 일부가 폭식시위를 전개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들을 조롱한 바 있다. 개인적으로도 그 사건을 통해 알지 못하는 기자들로부터 전화공세를 받아야 했고, 언론지면상에서도 ‘드디어 넷우익이 거리로 나왔다’는 사실에 커다란 의미가 부여되었다. 물론 SNS도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환기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큰 의미가 없는, 불모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오히려 폭식투쟁에 나선 ‘일베’에서 바뀐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드러내고 무언가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다. 공론장에서 누군가가 내세우는 이념과 당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것을 조롱하는 일베 특유의 행동방식은 여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일본의 재특회나 프랑스의 국민전선처럼) 그들이 내세우는 적극적인 이념이나 강령상의 주장 따위는 없다. 당시 폭식시위가 단지 ‘세월호 사건’이라는 커다란 상징성 때문에 더욱 더 조명을 받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에서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 하나하나의 이력과 자격을 문제삼는 인터넷 여론공세를 보면서, 이곳에서 진지한 주의주장을 공론장에서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유가족들이 교황 정도는 되어야 말할 자격이 생기는가, 하는 부분이 더 인상적이었다. (교황방한으로 정신승리하는 진보좌파들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일베가 행한 퍼포만스는 그러한 일상적인 ‘정치혐오’의 차원이 아니라, 그것을 제기하는 ‘미학’적인 방식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적었고, 기사화되기에 좋은 멘트도 아니었다.
3. <일베의 사상>에서 누차 반복했듯이, 일베의 멘털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애국보수’라는 슬로건이나 ‘행동하는 일게이’라는 정치적 자기표상을 동원하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유행했던 메갤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언급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그들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고 ‘너의 페미니즘은 잘못되었다, 악용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일베라는 커뮤니티 내에서도 애국보수에 대한 내용상의 합의는 의식적인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빌리면 n개의 애국보수, 혹은 복수의 애국보수들이 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사실 은 애국보수 따위는 자신의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일베의 미학은 바로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타인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생활방식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문제제기를 해 보았자, 알다시피 그들에게서 되돌아오는 대답은 ‘그런 조롱어린 퍼포먼스는 진보진영에서도(혹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많이 하지 않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도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정투쟁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에 안 것이지만, 자신이 무언가에 분노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그러한 인정투쟁의 형식은 메갤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4. 이른바 디씨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잘못된 정보(홍콩에서 젊은 여성 보균자들이 보건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감염을 확산시켰다는)와 관련하여 여성혐오 언행이 일고, 이후 정정보도를 통해 역풍이 불자, ‘씹치남’, ‘실좆’, ‘자들자들’이라든가, ‘삼일한’ 등 종래의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그대로 패러디하는 언행들이 만연했다. 혹자는 이것을 기존의 혐오의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전사하고 ‘미러링’하여 그 혐오의 가해자들에게 되돌려주는 획기적인 ‘퍼포먼스’로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메갤에서 시작된 여성혐오의 ‘미러링’의 방식은 애초에 일베에서 시작된 것이다. 일게이들이 자칭하는 ‘애국보수’나 ‘행게이’는 진보진영의 깨시민 담론에 대한 ‘패러디’에 불과하다. 그 슬로건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일베 내에서도 바보취급을 당한다. 한편 메갤과 메갈리아 페이지에서는 ‘혐오범죄에 상처입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조롱을 되돌려주는 멋진 사람(혹은 여성)이 되겠다’는 인상적인 신앙고백과 선언들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획기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과거 ‘깨시민’이었다가 일베로 전향하게 된 계기를 토로한 같은 형식의 고해성사와 신앙고백을 검색만 하면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오히려 그 ‘미러링’의 방식은 일베의 미학이기도 했다. 예컨대 일베 유저들이 ‘애국보수’를 자칭하고 ‘행동하는 일게이들’이라고 자평하는 것은 사실,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진보진영의 자기표상에 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는 것 자체가 일베프레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인터넷 일각의 그 진보적인 위선에 대한 환멸도 환멸이지만, 그 보다는 그러한 위선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오히려 일베 유저들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는 중요하는 기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상처를 입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주는 쪽이 되겠다는 결의. 그것을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물론 매겔의 탄생배경은 이해할만하다. 복수의 여신이 그들의 편에 서 있다고 평해도 딱히 반론할 여지는 없다. 게다가 그들의 조롱은 (일부에게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 같아 보이면서도 재미있기까지 하다. 확실히 인터넷은 오래전부터 여성혐오의 진앙지였다. 늦게 잡아도 군가산점제 폐지 이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와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그러나 실은 아무 위협도 안되는) 여성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하필 이 시점에 메갤이 등장했느냐이다. 그 열쇠는 일베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 동안 있었던 여성혐오 일변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일베의 새로운 점은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차라리 (자기들끼리의)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유희했던 데 있다. 그들은 여성에 관한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도 자신의 혐오정서를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작 ‘된장녀’, ‘고추장녀’, ‘스타벅스녀’ 등등 몇 개의 단어들이 유명세를 떨쳤던 2005~2012년의 과거와 달리 일베라는 커뮤니티 단독으로만 여성혐오 언어들의 사전을 따로 만들어도 될 지경이다. (메갤은 그 혐오사전을 여성에게도 호환가능한 번역사전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더 이상 오늘날의 젊은 남성들이 가부장제에 대한 호교론을 설파하면서(내가 남자로서 얼마나 인생을 책임있게 열심히 사는지 어필하면서) 여성혐오를 표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는 내가 “일베를 하는 잉여ㅂㅅ이지만”하는 정서가 주류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여성혐오는 가부장제의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가부장제의 일반적인 붕괴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한편 만일 메갤이 어쨌든 이해할만한 현상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똑같은 논리로 일베의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지역에 대한 경멸과 혐오의 언어가 만연했고, 특정인의 블로그 계정등에 몰려가 악플을 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논객문화에서 자주 반복되어왔던 상대의 지적수준에 대한 경멸과 무시는 매우 고질적이었다. 그러한 것을 침묵 속에서 견디다가 이후에 ‘나는 더 이상 그러한 것으로 상처 입지 않는다’며 더 심각한 위악으로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무장한 집단이 출현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6. 현실에서 젊은 남녀가 처한 권력관계는 그때그때의 장소마다 다르다. 어쨌든 어떤 형태로든 일상에서도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드러나는 권력관계는 현실과 전혀 다르다. 우선 커뮤니티 내의 권력관계를 특징짓는 것은 관리자 혹은 유명닉을 둘러싼 ‘친목질’이다(여초 커뮤니티 한정으로 말하면 여시나 ㅇㄷ의 관리자 친목질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친목질 금지나 닉언급 등의 금지가 적용되기 시작하면 좋을대로 떠드는 분위기가 되고 커뮤니티 내 권력관계는 형해화된다. 단지 분란이나 법적인 시비를 피하기 위해 룰을 제정하는 사람이 있을뿐 그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가시적인은 커뮤니티 간의 권력다툼이라고 할만한 것인데,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내가 (가라타니의 말을 빌려) “부정적인 호수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쉽게 말해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원칙이다. 가령 커뮤니티 간에는 거의 영구적 반목과 항쟁의 상태가 존재한다. 홉스의 ‘자연상태’라고 할만한 것이다. 예전에는 없이 못살 것만 같았던 여시와 오유간의 우호관계가 (다소 신뢰하기 힘든 오유회원을 상대로 한 여시회원의 성폭력 사건 폭로 및 잠수사건 이후) 틀어지게 된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그 반목의 계기는 여성혐오나 가부장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되로 주고 말로 되받는다는 것이 인터넷의 유일한 도덕적 현실원칙이다.
6-1. 무엇보다 인터넷은 그 자체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아즈마 히로키)로서 타인의 신상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해 말했듯이 “망각을 모르는”, 그러면서도 “시간적 논리적 관계도 모르는” 공간이다. 인터넷에서도 타인의 신상을 털때 그 전후관계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이것은 이미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꿈에 대해 진단을 내린 바이다. 인터넷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의식이 꿈에서 그렇듯이) 타인에 대한 “공격충동”의 무궁무진한 ‘내용상’의 소재를 제공하는 보고이다. 그리고 ‘형식상’으로 인터넷의 관계망은 패러디에 무한한 영감을 부여하는 곳이다. 예컨대 일베의 방약무인한 혐오언어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일베의 언어를 미러링하며 당사자에게 되돌려주었던 최초의 방식은 과거 2012년에 일어났던 ‘일베대첩’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일베가 여러 커뮤니티에서 조롱글(일명 어그로)을 일삼은 것이 공분을 사서 여러 커뮤니티가 연합해서 일베의 ‘산업화’를 비꼰 ‘농업화’ 글로 일베 게시판을 도배하며 테러를 가한 바 있었다. 그때에는 일반인들에게 일베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다. 타인의 사상을 제멋대로 “응축하고 전치”해서(프로이트) 패러디에서 미러링하는, 그러한 무의식적인 방식은 커뮤니티 간 분쟁에서 자주 쓰였던 방식이고 메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6-2. 일베대첩과 같은 일회성 사건과 달리 메갤이 새로워 보이는 것은 무의식에서 출발한 혐오정서가 일베와 유사하게 ‘애국보수’와 짝을 이루는 ‘여성주의’의 이념으로, 다시 말해서 “현실원칙(프로이트)”으로 스스로를 차츰 무장하기 시작한 데 있다. 그러나 일베와 마찬가지로 이념의 정당성은 그 내용상의 허술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가령 ‘김치녀 프레임’이 여성을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처럼 ‘개념녀’와 ‘김치녀’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일방의 잣대라고 비평하는 인상적인 게시글을 보았지만, 실은 그러한 (보통 여성과 다르고 깨어 있다는) ‘개념녀’ 프레임은 ‘삼국카페’ 등의 여초커뮤니티에서 오히려 만연했던 것이고, 그것이 ‘나꼼수 비키니’ 논란을 낳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메갤 신드롬에 숟가락을 얹었던 일부 페미니스트들 생각과 달리 일베에서의 김치녀 프레임은 (과거 가부장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규범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김치녀에 대응되는 개념녀라는 칭찬 같은 것은 애초에 일베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그녀들에게 열녀문을 하사하면서 개념녀의 모범을 사회규범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일베어서 본질적인 것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사상을 공격하는 데서 얻는 ‘재미’이다. 사실여부와 별개로 재미있고 상대를 성공적으로 패러디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일베의 사상=미학이다. 메갤도 일베의 사상=미학을 미러링 하는데서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 보자. 넷상의 ‘여성혐오’는 결코 결코 현실의 규범적인 가부장적인 권력관계 같은 것이 아니다. 재미만 있다면 다른 혐오코드에 의해 얼마든지 역전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이처럼 인터넷에는 현실의 젠더와 지역 그리고 계급에 입각한 일방의 권력관계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러한 현실의 권력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실질적인 임금차별을 당하고, 유리천장을 겪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터넷 상의 논란은 오히려 현실의 권력관계에서 눈을 돌리고 여흥을 즐기게 하는 좋은 맥거핀일 따름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7. 인터넷 커뮤니티 간에 존재하는 이 ‘부정적 호수성’이라는 기제는, 특히 커뮤니티 내 친목질과 결합되면서 어떻게 일상에서 하지 않을 짓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인터넷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평등한 공간(일베왈, 너도 나도 똑같은 ㅂㅅ다)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지름길임을 납득하게 할 수 있다. 특히 매겔의 주된 유입경로인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일부의 인식과 달리 여시는 오히려 메갤의 유입경로가 아니라 그 영향에 감화받은 쪽이라고 보는 것이 낫다)의 담화와 관계망, 그리고 “페페페” 내에서 있었던 그들끼리의 분란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이제는 어느 정도 시들해진) 메갤 신드롬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리라 생각한다. 일베를 과거의 정사갤과 촛불시위에 대한 반동 그리고 그 내부의 반목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성주의자들의 교훈대로 페미들이 동질적인 집단이라고 가정하지 않듯이(오오 여성주의는 복수의 n개의 여성주의로 존재한다! 마치 Thousands of Marxism들이 존재하듯이!), 일베, 남성 섹슈얼러티, 여성혐오가 결코 동질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간주할 따름이다. 하지만 여성주의는 일반적으로 자신에 대해 요구하는 예민함을 타인에 대해 발휘하는 데는 인색한 것으로 보인다.
8.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국처럼 누군가가 분노와 혐오에 취약한 사회일수록, 그 탈출구를 박탈당한 채 그것을 어떤 형태로든 발산할 기회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그 방식의 새로움을 찾고 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차라리 해당 커뮤니티에서 일상적으로 댓글을 달면서 노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 유익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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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차분하고 이성적인 반론글에 감사드립니다. 요새는 메갈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하면 죄다 씹치남이 되어버리더라고요(웃음). 각설하고. 데이터 부분에 대한 지적은 확실히 뼈아픕니다. 저도 각종 커뮤니티 폐인질을 하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습득한 것을 기반으로 대충 졸글을 썼습니다.
제가 필력이 모잘라서, 본문을 좀 더 부연하자면 제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메갈이 옳다, 틀리다’도 아니고, ‘혹은 일베와 동급이다’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물론 결국은 동급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또 역으로 ‘그래서 동급이어서 뭐 어떻다는 건가, 둘 다 따지자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는 심정도 있습니다. 근데 그건 지금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제가 저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미러링’이란 그다지 참신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화법을 비꼬고 패러디하고 사안마다 진영을 나눠서 병림픽을 벌이고 다수의 관객들이 팝콘을 먹으면서 그것을 즐기는, 그런 통상의 커뮤니티 문화가 미러링의 기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느 순간 폭주하기도 하고요. 메갈은 그러한 커뮤니티 문화의 일반적인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일종의 사회신드롬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그것이 신드롬화된 데에는 커뮤니티 외부의 요소(이 사회의 불평등한 성문화 등등)를 간과할 수 없고, 그 부분을 제가 축소해서 다룬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메갈도 기본적으로 커뮤니티 문화의 동학에 입각해서 바라봐야 쓸데 없는 환상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베에 참신함이 있다면 커뮤니티의 일반적 병림픽 문화와 조롱 등에 정치적 대의를 가미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일베의 사상>에서 주장했듯이) 일종의 ‘인터넷 미학’일뿐, 사실 거기에는 어떠한 진지한 주의 주장 내용도 없습니다. 애국보수라고 해도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도 없고 정작 일베충들도 그것을 진지하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메갈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메갈이 내세우는 여성주의는 일종의 ‘미학’일뿐입니다. 결국 자신의 (물론 지금까지는 공공연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공격적인 성적 판타지와 평소의 증오의 대상에 대한 발화를 쏟아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묘한 공동체감, 일체감이 있지요. 메갈=일베 이런 등식을 내세우기보다는 저는 오히려 일베가 형성한 일종의 인터넷 문화지형이라고 해야 할까요. 메갈=일베 라기보다는 메갈은 그런 지형 속에서 나타난 포스트-일베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메이즈둠님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관해서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글에서 겨냥하는 대상은 님께서 말씀하시는 “일베라는 방패 뒤에 숨어 여성 혐오를 소비하는” 그런 형편없는 인간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메갈의 남혐 미러링”이 님께서 말씀하신 도촬과 강간 데이트 폭력과 강간 염산뿌리기 증오발언 등을 없애냐, 이 사회를 보다 성평등한 곳으로 만드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 메갈의 공식입장처럼 일종의 충격요법으로써 유효하다.
(2) 메갈은 오히려 혐오를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정치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제가 잠정적으로 택한 답변은 세번째 (3) 애초에 메갈을 그런 여성주의적 고민을 하는 주체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메갈에 여성주의나 운동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우병 시위를 겪은 이후의 젊은이들은 이미 냉소적 주체들입니다. 메갈의 기본적인 입장은 ‘왜 지금까지 여혐에는 침묵하면서 이제 와서 선생질’이냐는 냉소주의입니다. 그런데 그게 일베를 포함한 젊은세대의 화법인 것 같습니다. 절대 바뀌지 않아요. 따라서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애초에 운동일 필요도 없고 그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철이 지난 이야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메갈이 ‘잘못되었다’, ‘또 다른 일베이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메갈은 그저 새로운 파자마 파티식 여성 커뮤니티 문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할뿐입니다. 거기에 이념을 부여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저 한국에 결핍된 또래 공동체 문화를 대체하는 현상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국 어떤 결핍의 증상에 불과한 것에,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커뮤니티부심을 형성하는 것인데. 바로 그런 과정이 일베를 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커뮤니티부심은 정신건강에 해롭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문제의 증상을 치료책이나 해법으로 오인하기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님께서 지적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고 저도 조금 더 저 스스로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지적하신 메갈 페이스북 페이지는 제가 봐도 메갈 저장소와 결이 다르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그 둘이 (정신분석에 거칠게 비유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조야하게 말하면, 의식은 자신의 무의식을 때로는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듯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