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54

월요일.

 

아침 일찍 맞춰놓은 알람은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로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요새 짧게 두세번씩 자는 통에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다.

 

12시 반에 슈필테마트 인근의 아파트로부터 가구들을 나르는 일을 돕는 대신 스탠드형 램프를 받기로 처자 e와 약속. 하지만 그 아늑함을 선사할 램프는 누군가 차지해버려 처자 e가 미안해했다. 하지만 그래도 돕겠다 나섰다. 슈필테막트 역은 약간의 비가 섞인 강한 돌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해서보니 생각보다 할 일은 많지 않았다. 닥치는대로 일을 했던 지난 10년을 생각하면 가구 분리해서 트럭에 싣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처자 e는 아무런 댓가 없이 도와주는 나에게 무엇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생각찮게 고급 커튼과 식기들, 서랍장 두 개를 얻을 수 있었다. 트럭에는 운전자를 포함해 세명 밖에 탈 수 없었고, 케서방은 자전거를 타고 왔기에 우리는 라우짓쩌슈트라쎄에서 만나기로 했다.

 

10분이면 충분히 도착하는 그곳이련만 월요일, 악천후로 길거리는 번잡했고 프린쩬슈트라쎄를 지날 무렵 길에서 미스터리 영화에서 나올 법한 분위기의 10살쯤 됨직한 꼬마 셋을 지나쳤다. 그 꼬마들은 검은 후디를 뒤집어 쓰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스칼릿쩌슈트라쎄에서 코티 방향으로 가던 길 갑자기 모든 차가 정차해있었다. 저 멀리서는 폭스바겐사의 구형 밴이 가로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케서방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괼리에서 쉴레지셰스토어역 방향 스칼릿쩌슈트라쎄 길에서 거리를 청소하는 차량과 사고가 나서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처자 e는 보다 속력을 내기 위해 앞선 차량 운전자에게 “경찰 기다리는 동안에 사진을 찍고, 차를 옆으로 치우자”며, 비를 뚫고 저 너머 밴으로 갔다. 5분가량 지났을까 처자 e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했냐면, 운전자와 탑승자들은 이 구형 밴을 탈취해 운전을 하다 차량 세대를 들이 받고서 도망 갔다는 것이다. 피해 차량 운전자들도 평소 같으면 사진을 찍고 차후에 신고를 하겠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경찰을 기다려야만 한다고. 아무래도 그 밴의 운전자와 탑승자들은 약을 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의 경우라면 추돌사고, 마약투약은 각기 달리 처벌해 그다지 중한 형벌이 내려지지 않지만, 마약을 투약하고 운전을 하다 사고를 낸 경우라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진다. 경찰이 오길 기다리던 처자 e와 n, 그리고 나는 그 차량사고를 낸 가해자들이 약에 흠뻑 취해 마구 웃으며 도망갔을걸 생각하니 덩달아 웃게되었다. 비디오게임 ‘GTA’가 떠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라우짓쩌슈트라쎄에 도착했고, 케서방은 터덜터덜 걸어와 굉장히 부은 손과 휘어진 휠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일단 바쁘기 때문에 나와 처자 e가 소파를 빨리 내려주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로 했다. 소파를 들고 가보니 이 집은 2년전 여름, 새봄의 새 집을 찾기 위해 방문했던 집이었다. 당시에 집을 열 곳도 넘게 돌아다녔지만,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아무튼 본격적인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케서방을 병원에 데려다 주어야 하는데, 트럭에는 운전자를 포함해 세 명 밖에 탈 수 없었으므로 처자 e가 몰래 짐칸에 웅크려 타기로 했다. 경찰에 들키기라도하면 꽤 무거운 벌금을 내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기로 했다. 케서방은 아픔을 참기가 어려운지 보드카를 연신 들이키며, 평소보다 빠르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길은 미끄러웠고, 갑작스레 끼어든 청소차량을 피하느라 넘어져 청소차량 밑으로 깔렸는데, 미친 운전자가 내리기는 커녕 그대로 수 미터를 끌고 갔고, 청소기계 작동을 멈추지 않아 자동 빗자루가 온몸을 쓸어내었다고. 또한 운전자가 내려서 도와주기는 커녕 그대로 50미터쯤 혼자 가버리더니 돌아와서 연락처를 알려주고 가버렸다고. 어느새 우리는 헤르만슈트라쎄 인근의 병원에 도착했고, 치료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동하는 동안 다른 차량들의 접촉사고를 두차례 목격 했다.

 

큰 길이었기 때문에 뒤에 타고 있는 처자 e를 내리기 보다는 빨리 다음 목적지인 쉴러 산책길로 향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차를 돌리고 나가는 바데슈트라쎄와 헤르만슈트라쎄의 교차로, 꽉 막힌 길 위에서 우리가 다른 차량의 범퍼를 긁고만 것이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범퍼가 완전히 망가질 수 있으므로 피해차량에게 조금만 뒤로 후진해달라고 했는데, 피해차량이 너무 빠른 속도로 후진하는 바람에 그 뒷차량을 또 들이 받고 말았다. 맙소사.. 일단 차를 옆으로 대고서 합의를 하려 했는데, 피해차량 운전자는 이런 이중 추돌은 처음이라 경찰을 불러야겠다 했다. 때문에 처자 n이 대화를 하는 동안 트럭으로 돌아가 처자 e를 짐칸에서 내리고, 이 사건에서 떨어지기로 했다. 왜냐면 트럭에 탑승자는 분명 둘이었기 때문에..

 

예버 맥주 한병에 한참 근처를 걷다보니 다시 연락이 되어 처자 e와 n을 쉴러프로메나데에서 만났다. 풀이 죽은 처자 n, 그리고 기운이 붓돋으려 꽤나 비싼 초콜렛을 내밀던 처자 e. 아무튼, 처자 e는 페미니스트 콜렉티브에서 살고 있었는데, 짐을 나르기 위해 집에 들어서니 금남의 집에 들어선 것 같이 기분이 묘했다.

 

더이상 지체가 할 수 없어 처자 n의 집으로 바로 향했다. 처자 n의 집에는 케서방이 손가락 뼈가 십자 모양으로 두번 부러졌다며 깁스를 하고 있었다. 짐을 내리고선 우리 모두 나와 케서방이 사는 하우스로 향했다. 이번에도 처자 e는 짐칸에 타야만 했는데, 살살 운전해달라 부탁을..

 

기나긴 하루와 지친 몸으로 하우스에 도착했다. 케서방은 더이상 일을 할 수 없어 쉬기로 했고, 처자 e와 n은 날더러 많이 수고했다며 나도 이제 쉬라 했으나 나는 마지막 목적지까지 함께 하겠다했다. 여자가 남자보다 일을 못한다는게 아니라 남아있는 것들 중, 책장 두개와 옷장 두개가 여자 둘이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자 e는 내 친절을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을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것도 맞는 사실이긴하지만, 하지만, 결코 여자 둘이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고, 케서방이 다쳤기 때문이다.

 

마지막 목적지는 2차대전, 나치에게 희생당한 독일인들의 묘지들을 끼고 있는 집이었다. 겉으로는 볼품 없는 집 같지만, 안으로는 정말 근사했다. 내가 살고 싶을 정도. 처자 n은 아까의 사고로 풀이 죽어 트럭을 주차하는 것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당분간은 이 사고가 트라우마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나와 처자 e는 n을 독려하며 어려운 난이도의 주차를 도왔다. 그리고선 e가 내게 개를 무서워하냐 물었다. 딱히 무서워하지 않지만, 나는 그 질문의 의미를 몇 초 뒤에 알게 되었다. 집 문을 열자마자 무섭게 짖으며 뛰쳐나온 중형견 두마리. 한마리는 아직 훈련이 덜 되었는지 입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순간 흠칫 놀랬긴 했지만, 오히려 천천히 다가가서 쓰다듬으니 이 녀석들은 낯선 내게 볼을 부비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꽤나 장난꾸러기였는지, 이렇게 얌전해지는 것은 처음본다 했다. 짐을 내리면서 처자 e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따라나섰는지 이해가 되었다며 발그란 볼로 미소를 지었다. 짐은 무거웠고, 구식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리는 일은 만만찮았다. 그럴수록 속으로 처자 e를 바라보며 괜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짐을 다 내리고선 식사를 대접 받았는데, 심지어는 이 녀석들이 식사시간 동안 내 발을 배게 삼아 잠들었다. 하우스에 돌아와 해야할 일이 또 남아있었으므로 이 녀석들을 깨워야했는데 어찌나 미안한지…

 

그렇게 길고도 짧은 6시간의 일이 끝났다. 보통은 한달에 모두 일어나기도 힘든 일이 지난 6시간 동안 모두 일어났다. 나는 케서방에게 곡 ‘월요일’을 써야한다 이야기 했다.

 

 

 

ㅡ 2015년 3월 30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