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마드, 백남기 농민 비하

종종 사람들이 내게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다고 하는데, 나의 관점은 그다지 새로운 관점이 아니다. ‘배제의 정치’와 ‘방향 잃은 분노’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극한의 대립보다는 (서로 다른 주체가) 공동체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가치, 공동선을 향해 가야한다는 것뿐.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오갔던 몇 매체들이 생각난다. 구독자를 얻기 위함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메갤에 대한 비판적 논지가 곤란하다며, 보류나 거절했던 그 매체들. 해당 그 매체들의 논쟁적 소재를 다루는 방법은 언제나 ‘답정너’ 상태, 편집논지가 이미 정해져있고, 그 방향에 맞춰서 레토릭만 새로 정리해줄 기고자를 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런 편집 방식을 맞추어놓은 매체들의 관련 기사들은 끝까지 읽지 않아도 전체적인 기사의 구조가 보인다. 이를테면, 최근 이슈가 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원인을 바라보기보다 어느 한편을 비난하고, 어느 한편의 손을 드는 식으로 접근해 한편에는 모멸감을, 한편에는 조롱의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그친다. 결국 해당 기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양측 이해당사자간 극한의 대립구도뿐.

메갤과 워마드를 비판하지 말라며, 옹호하던 ‘넷페미니스트’분들은 오늘 어디에 계실까. 워마드까진 아니어도 메갤 내에서 꽤나 네임드로 활동하며, 일종의 완장효과를 누리던 분들은 지금까지의 반여성주의적인 발언들과 본인 스스로의 헛발질들을 어떻게 회고 하실지. 그 분들은 지금까지 남녀대결구도가 아닌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가 모두 주체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투쟁해온 페미니즘 역사와 이론마저 부정하고, 마초이즘에 부역하는 여성보호주의를 내세웠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견과 다르면, 악으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차단하고, 거부해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분들 역시도 한국사회의 보수성과 가부장제에 학습되어 보호주의에 부역하고 계시는 분들이면서도 그것들을 비판하고, 대중운동을 하겠다고 하고 있으셨다. 배제의 정치를 펼치면서 한국사회가 바뀌길 바라는 대중운동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생각해보셨을까.

본인들의 주장을 페미니즘 포럼, 학회에서 영어로 발제해달라 하면, 모두 한결같이 대답을 피하거나, 한국적 특수성이 있다며 논지를 돌리셨고, 대개는 불같이 화를 내며 도망가셨었다.

Q: Mr., answer the question.
A: Nah, I’m not gonna answer your question.
’cause you guys have already made up your minds.
I’m an expert in rejection. And I can see it on your face.

살면서 ‘답정너’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 써봤습니다.

 

 

+ 저는 오히려 평화시위에 대한 강요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비폭력 방식만을 강요하는 주장들이 폭력적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비폭력/직접투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원래 비폭력/직접행동을 하는 활동가들도 폭력투쟁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끌어내리지 않습니다.

수 많은 비폭력 직접행동 활동가들이 본인들 스스로는 비폭력 투쟁을 하더라도 타인에게는 자신의 방법을 강요하기는 커녕, 연대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쿠르드 반군에 연대하는 유럽의 좌파들과 비폭력 활동가들을 보세요. 사파티스타의 무장봉기에 지원을 하는 수많은 비폭력 활동가들이 어떻게 연대를 하는지를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결말이 예상되는 물리적 충돌을 피해야하는 것이 맞겠지만, 투쟁 방식에 있어서는 아무도 그 방법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법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에서 경찰이 법을 지키고 있지 않은데, 시위대가 굳이 경찰의 편의를 봐주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백만명이 무엇을 바꾸었는지 한번 보세요. 정부의 태도는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3000명이 화염병을 던지며 청와대로 진격했다고 가정해보세요. 폭력적인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가 없고, 오로지 국민을 보호하고, 봉사할 의무만 있는 정부가 헌법을 유린하고, 불법적으로 사적이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나서서 이 사태를 해결하려하기는 커녕 증거를 인멸하고, 조직적으로 사건을 은폐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왜 법을 지켜야할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한국 국민은 그런 정부를 향해 저항권으로서 폭력투쟁도 불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정부를 세계 주요 언론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2016년에 국민을 향해 총을 발포하고, 탱크를 서울 한복판에 배치할 수 없습니다.

헌법에 저항권은 명시 되어있지 않지만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저항권이 인정 되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위헌심판(97.9.25 97헌가4)에서 저항권을 상세히 규정한 바도 있습니다.

1. 침해의 중대성: 국가권력의 헌법의 개별조항이나 법률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 아니라, 민주적, 법치국가적 기본질서나 기본권 체계를 전면 부인 내지 침해하는 경우에만 행사 가능하다.

2. 침해의 명백성: 국가권력의 불법이 객관적으로 명백해야 한다.

저항권이 아니라하더라도 모든 시민에게는 자신의 방법으로 투쟁할 권리가 있습니다. 주류집단이 소수집단의 행동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비폭력을 외치는 분들이 많은데, 어떻게 비폭력의 이름으로 다른 이의 투쟁을 폄훼하는지 모르겠군요.

2015년 프랑크푸르트의 ECB의 긴축안과 신청사 개관식에 맞춰 독일의 9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블록쿠피는 2001년 비폭력투쟁 노선을 뒤엎고, “폭력 없이는 답도 없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프랑크푸르트의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차를 불태우며, 투석전을 벌였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평화행진도 이어졌죠. 당시에 보수 언론들은 ‘제도 안에서 의견을 조율해야한다’며, 시위대의 폭력성을 맹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슈피겔의 야곱 아우그슈타인은 이러한 논평을 남깁니다.

“시위대의 폭력은 만장일치로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는 체제의 폭력을 무시하고 있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시위대의 폭력은 경멸하면서, 왜 우리는 체제의 폭력은 허용하는 것일까.”

+ 참고로 2001년 블록쿠피가 비폭력 노선을 선언했지만, 2007년 25만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등록금 반대’ 운동에서는 경찰차 전소, 투석전, 대학 총장실 점거는 물론 철도 점거까지 광범위하게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외에도 노동절에는 투석전과 화염병들이 으레 등장했음에도 독일 경찰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집행을 해야하기 때문에 물리적 충돌을 되도록이면 피하고, 살수차를 제한적으로 사용했죠. ECB의 긴축안 때문에 작년 베를린의 도이치방크들이 공격을 받고, 결국 몇 지점을 폐지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도이치방크는 공격한 시위대에 유감을 표명하긴 했지만, 시위대를 발본색출해서 책임을 묻겠다는 식의 대처는 하지 않았습니다.

https://www.facebook.com/ParkGHOut/posts/585580054961532

 

++ 저는 2008년에서 비슷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명박 산성을 넘겠다고 스티로폼을 가져와 올라서는 분들에게 “비폭력”을 외치며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끌어내려 앉힌 시위대 말이죠. 대체 이들을 누가 비폭력 시위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들에게서야말로 집단의 광끼, 파시즘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지난 시위에서 충돌은 법원에서 효자동 사무소, 청와대 앞길까지 허가가 났는데도 경찰이 내자동 사거리를 막으면서 일어났습니다.

그에 반해 발포 명령에 항명하고, 거부한 경찰도 있었습니다.

(법원의 허가를 이행하지 않은 경찰에게 잘못이 있음에도) 시위대의 위법성을 따지기 보다 무엇이 더 이 사태를 만들었는지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bsch7vUU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