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124

 

 

머리가 터질듯이 들이키고, 허공을 움켜쥐고, 고요를 외치고, 이내 평온을 찾다 다시 “대체 왜..!” 라 반문하기. 그리고선 다시 비워진 잔을 채워넣고, 비워내고, 또 다시 채워넣고, 비워내고. 이번에는 넘치도록 채워 잔을 움켜진 손등을 타고 술이 흘러, 팔꿈치로 흘러, 새카만 옷을 적시고, 들이키고, 소매로 입술을 훔치고. 이내 끄덕끄덕 무엇이라도 알겠다는듯 얕으막히 잔을 채우고, 들이키고. 하지만 결국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염두해둔 일들이 모두 자리를 찾아가는데, 왜 나는 이렇게 허전한 걸까.

그 화난 목소리가 좋았었나보다. 빨리 손전화 사라 하시던데, 일을 놓치고서 간신히 맥주 들이킬 돈만 달랑 움켜쥐고, 텅빈 주머니로 걷다보니, 길가에 놓인 맥주병을 서성이는 벌이된 마냥 좋아서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퀘퀘한 방에 쳐박힌 자전거를 바라보며, 혼자 마시던 어느 저녁의 글을 가만히 다시 읽어본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만들고, 자전거 타고 호수로, 따사로운 햇살과 흠뻑 젖은 머리칼로 와인을 들고서 노을을 옆에 끼고 집 근처 철도 위 다리로. 손을 꼭 잡은 채 돌아와, 푹 꺼진 카우치로 돌아와, 몸을 포개고선 수 없이 보았던 영화 <조찬클럽>. 창 밖으로 쌀쌀한 바람이 보이고, 별이 들려온다. 두 눈을 감고, 일렁이는 초를 흠향하고, 마른 물 비릿내를 맛본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맛본다. 너는 벌써 풀벌레 소리를 내고 있다. 소나기 한번 쏟아지면 바랄게 없으련만.”

마치 병이라도 난 사람처럼, 고장난 사람처럼, 부러진 것 같은 때.

방에 틀어박혀 글을 읽는 것이 좋다고, 되도록이면 시일수록 좋다며, 모두가 좋아함에도 아직 번역 시집 한권 출간된 적 없는 부코우스키를 생각하며, 한국어로 옮기던 때를 생각했다. 그래, 그 때처럼 싸구려 와인 한병에 거짓말 같은 밤 하루, 그리고 아침의 냉랭한 목소리로 “꿈 같았다”하면 될 줄 알았다.

이른 아침 바닥이 푹 꺼질듯 한숨을 쉬고서, 다- 여섯시간동안 시들을 읽고, 마지막으로 <Nobody, but you>를 읽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누구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누구에게도, 그 어떠한 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일전에 어두웠던 밤을 보내고, 옮겨두었던 그 시를 다시 가져와야지.

맥주 마실 돈이 떨어져가니 한글로 옮겨둔 부코우스키의 글이 마음에 드시면, 시큰거리게 취할 수 있도록 소일거리를 주시거나, 맥주를 사주세요. 하지만 손전화는 아직 갖고 싶지 않네요.

Charles Bukowski – Alone with everybody
모두와 함께 혼자가 되는 것

살가죽이 뼈를 덮고
사람들은 마음을
거기에 둬
종종 영혼조차도,

그리고 여자들이 벽에
꽃병을 던져 깨고

남자들은 역시 너무 많이
마시고

아무도 그것을 찾지 못하지만

계속 바라보아
침대 안밖으로 기어오르는
것을.
살가죽이 덮어
뼈를 그리고 그
살가죽은 보다
더 많이
찾아

기회가 전혀
없어:
우리 모두 덫에 걸렸어
기묘한
운명으로.

아무도 그것을 찾지 못해.

도시가 버려진 것들로 가득해

폐품처리장들이 가득해

정신병원들이 가득해

병원들이 가득해

묘지들이 가득해

가득하지 않은 것들이
없어.

그래, Skeeter Davis의 The End Of The World를 베를린의 목소리, Anika로부터 듣고 싶어졌다.

Anika – The End Of The World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Cause you don’t love me any more
태양은 왜 저렇게 계속 빛나는 걸까
파도는 해변으로 왜 밀려드는 걸까
그대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끝나 버렸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게..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Why do the stars glow above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왜 저 새들은 계속 노래 부르는 걸까
왜 저 별들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걸까
내가 그대의 사랑을 잃어 버렸을 때
이 세상은 끝나 버렸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게..

I wake up in the morning and I wonder
Why everything’s the same as it was
I can’t understand
No I can’t understand
How life goes on the way it does
아침에 일어나 모든 일들이
예전과 다름이 없음에 놀랄 뿐이야
이해할 수 없어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똑같은 방법으로 삶이 계속될 수 있는 걸까

Why does my heart go on beating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It ended when you said goodbye
내 가슴은 왜 계속 뛰는 걸까
왜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올까
그대가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
이 세상은 끝나 버렸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게..

 

 

 

ㅡ 2016년 7월 29일 오후 2시 20분, 시큰거리게 취할 수 있도록 소일거리를 주시거나, 맥주를 사주세요.

정어리 – 123

 

 

해야하는 일과 노력해야할 가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ㅡ 2016년 7월 25일 오후 7시 5분, dolly patton의 노래를 disorder에게서 듣다..

베를린, 관계, 슬로우뉴스 기고 후폭풍

 

글을 읽지도 않고, 반론부터 가능한 어떤 능력을 가진 분들께 놀라고 있습니다. 내일 낮에 마실 그 카페의 커피와 케이크가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고 품평할 수 있다는 그 어떤 분들의 능력이 매우 놀라울 따름인데요. 배우고 싶습니다, 한수 가르쳐 주십시요.

그런데 글은 제발 읽고 반론을 하셔야 제가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습니다” 하고 반박을 하죠. 본인께서들 뭘 읽고, 말하는지조차 기억 못하시면 제가 어떻게 반론을 합니까.

또한 반론을 하시기 전에는 본인께서 알고 계신 것이 맞는지 어느정도 검색정도라도 하셔서 시간낭비를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거론한 내용 중 상당 수가 롤링스톤즈나 바이스와 같은 유명 음악, 문화 매거진은 물론이거니와 베를린에서 유명한 커뮤니티, 블로그들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거나 아예 인식조차 하고 있지 못해 마찰, 문제를 겪고 있는걸 지켜보면서 저는 더욱 친절하게 쓰고자 했던 것 뿐이구요.

링크한 몰리 닐슨은 베를린 노이쾰른서 데뷔한지 10년이 되어 이제는 유명한 싱어이자 디제이, 프로듀서입니다. 아픔을 같이했기 때문에 노이쾰른, 크로이쯔베르그, 프리드리히샤인에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더욱 애틋한 사람이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이 곡 제목만 보고, 제가 고의로 여자를 비하했다고 말하실까봐 미리 이야기 드리는데, 글을 못 읽겠으면, 듣기라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ㅡ 2016년 7월 20일 오전 7시 20분, 글을 읽지 않아도 해당 내용에 대한 반박이 가능하다는 분들께.

베를린, 관계, 그리고 슬로우뉴스 기고에 대한 비판

슬로우뉴스 페이스북 페이지의 댓글에서 나에게 쏟아지는 질투와 원망 섞인 구질구질한 댓글들에 일일히 대답하고 싶진 않았다. 믿기 싫으면, 믿지 않는 수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들의 배타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열린 베를린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26년을 서울에서만 살아가면서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웠던 그런 것들. 나의 정체성, 이를테면 정치와 사상, 성적 지향성, 문화담론, 삶의 태도, 윤리, 또는 라이프 스타일, 심지어 패션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나는 늘 비난을 받아왔다. 비난을 받는데 익숙하다고 해서 그 비난을 늘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런 내게 베를린은 손을 내밀어주었고, 나는 그런 베를린을 사랑한다.

내게 서울은 술에 취해 내 모호크를 잡아당기고,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하던 무례한 사람들을 만나기 일쑤였고, 심지어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맥주병에 얻어맞고, 병원에 실려가던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의 행색 때문일까, 경찰은 언제나 가장 먼저 내게 잘못을 추궁하였었다.

나는 어디서나 소수자였고, 소수자로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나는 펑크고, 문신이 있고, 피어스가 있고, 사람들과 다른 헤어스타일을 갖고 있고, 오래도록 입어 넝마처럼 된 검은 옷들을 기워입길 좋아한다. 이것만 하여도 구직 인터뷰에서 1분조차 대화를 잇지 못하고 쫒겨난 적이 허다했다. 그래서 나는 한여름에도 언제나 검은 와이셔츠를 입어야만 했다.

내가 하는 밴드를 위해 제발 토요일만이라도 야근하지 않게 해달라고 사장에게 부탁을 하다 결국 주제 넘는다며 따귀를 맞고 해고 당해야만 했다. 물론 사장도 젊었을 때는 좀 놀았다며 스스로를 소개하던, 요즘 속된 말로 ‘열린 마음을 가진 아재’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철이 없다며 조롱을 받아야했다.

나의 정치성은 어떠한가? 어린 시절 펑크를 접하면서 아나키즘에 관한 서적을 읽고, 여러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펑크가 말하는 변화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만으로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집 앞 까르푸 불매운동에 엄마와 함께했고, 평택, 새만금에서 공연하고, 여러 시위들에 참여했다. 여러 진보정당 당원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지만, 한국에서의 아나키스트는 베를린에서 ‘자율주의자(Autonomen: 오래된 맑시스트에서 포스트-구조주의자가 된 좌파들과 아나키스트들)’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나 허약한 이상주의자이고, 조롱의 대상이다. 나의 정치성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는 다수의 좌파,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존재와 활동을 조롱당해야만 한다. 그런 가운데 페이스북에서 ‘페이스북 프로필-아나키스트’를 만나는 일은 굉장히 지치는 일이다.

나는 성매매에 반대하면서도 더 직접적인 폭력을 막기위해 성노동을 인정할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도 진보정당원들과 부딪혀야했고, 이런 운동에 대해 상대적으로 인식이 없는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한남충이라고 매도 당해야만 했다. 내가 베를린서 여성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굳이 말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래도 돌아온 말은 역시나 한남충이라는 단어뿐이었다. 굳이 운동이 아니더라도 도덕을 비난 받는 일은 늘 흔했다. 한국의 회식문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성매매에 참여하지 않아 회사를 다니면서도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야만 했는데, 결국 자진퇴사 해야만 했다.

사실 회사를 다니기 보다는 일용직을 전전하면서도 가끔은 일용직에서마저 쫒겨나길 반복하는 삶을 살아야 했는데, 나에게 가장 끔찍한 시기는 2000년 말쯤 석면해체 일을 할 때였다. 석면(Asbestos)은 그 입자가 보석처럼 아름답다하여 그리스어 ‘불멸’에서 유래된 단어로 폐암, 석면폐증, 악성중피종 등으로 죽음을 불러온다. 석면의 위험이 대두 되면서 서구에서는 70년대말, 80년대 초쯤 석면해체 사업이 완료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그 끝을 알 수 없다. 약 10년 째, 석면해체 사업이 활발히 진행중이고, 그 해체 작업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많은 석면해체 노동자가 천식과 진폐증으로 고통 받고 있고, 산재 인정도 잘 되지 않아 투쟁 중에 있다. 나는 일용직조차 구하기 어려워 석면해체 일을 시작했는데, 결국 나는 천식 때문에 세레타이드, 벤톨린을 달고 살아야했고, 점점 불어나는 약값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다시 석면해체 일을 해야만 했다. 매일 밤, 잠에 드는 일은 끔직할 정도로 기침을 했었고, 그럴 때마다 작업반장은 끝나고 “기름칠 하면 다 괜찮아진다”며 으레 “우리 팀 오늘 삼겹살 하러 갈까?”를 이야기 했었다. 당시 만나던 친구는 고통스러워 하던 나 때문에 함께 힘들어했었고, 나는 석면해체 일을 그만두고, 더 가난해지길 선택했다. 나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그 친구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2009년 여름에는 또다른 질병코드를 가진 희귀성 난치질환자가 되었다. 주치의가 일하지 말고, 집에서 요양하기 만을 권하는 그런 환자. 그럼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고. 얼마나 일상적 가난에 시달려야 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열살쯤 현장사고로 평생 일만하다 떠나버린 아버지, 그 이후로 차별적 임금을 받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익숙한 경제적 어려움. 나는 초등학교 사무보조원으로 한달 월급 55~ 60만원쯤을 받으며, 힘겹게 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밑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나마도 방학이 되면, 월급이 없어서 어머니는 쩔쩔매곤 하셨다. 나는 그래서 안다. 편부모 가정에 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지, 그리고 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필요한지. 어쨌거나 빚을 져서 대학을 가는 일은 내게 무책임한 일처럼 보였고, 바보 같은 일로 보였다. 이 경제적 어려움이 나를 요즘의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처럼 빚에 허덕이지 않게 하였다고 좋아해야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대학 나오지 않은 사람은 일종의 투명인간이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과 또 대출이 거절되어 창 밖으로 던져 훔쳐 읽던 책들을 놓을 수 없었다. 오직 대학 도서관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논문과 책들은 나의 친구들과 내게 선의를 베풀어주신 몇 선생님들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이 갖는 학벌주의로부터 멸시는 물론, 학벌사회에 반대한다는 진보정당들조차 고등교육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책임하거나 멸시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도.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학벌이 조금 부족해도 경제적 성공, 즉 돈만 있으면 학벌에 대해서는 큰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좌파들 틈에서는 경제적 빈곤도, 학벌에 대한 것도 같이 생각해야만 했다. 나는 분명 빈곤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닌데도.

오늘까지도. 오늘까지도.

며칠 전 만해도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사실로 날 더러 누구의 장학생 아니냐며 빈정거리시던 분이 있으셨는데, 아는 것만 말씀하시라 하였더니 날 차단하셨다. 물론 그 분께서는 평소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하시며, 자신의 고급 취미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력과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좋은 집안인지를 이야기 하시던 분이었다. 몇 달 전의 학벌없는 사회의 논란을 잠깐 복기해보자면, 그 분들은 자신들의 학벌이 존중받지 못함에 학벌주의의 부당함을 이야기 하셨지만, 교육의 기회를 갖을 수 없었던 소수자를 대변하지는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학벌없는 사회의 자진 해산에 대하여 어떠한 단서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배제된 사람이었으므로.

키가 반만하던 시절, 여자친구건 남자친구건 손잡고 이야기하길 좋아했던 내가, 기쁠 때면, 누구에게든 키스하길 좋아했던 내가 받았던 조롱에 대해서까진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이만큼 사생활을 드러냈으면 됐지, 내가 더 새상활을 드러내야할 의무가 있으랴. 하지만 소수자는 나 혼자만도 아니고, 당신 혼자만도 아니란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당신의 권리도 소중한 것처럼. 배제하고 배척하는 정치는 자멸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베를린은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6년 전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친구들은 나를 안아주며, 포기하지 않아 고맙다고 했다. R 교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에 대한 글을 보시고선 나를 석사수업에 초대 작가로 불러주시고선 학생으로 받아주겠다 하셨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입학 자격이 없는 미수능생이었고, 고등학교 자퇴생이었다. 아시아 정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셨기 때문에 약간의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그리고 영어, 독어에 능한 교수님께서는 한국과 같이 상당히 발달한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을 모르셨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감사했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와 일들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 베를린은 내게 태어나 자랐던 서울과 완연히 다르다. 누구나 기쁜 일을 함께 즐거워들 하고 싶어하지만, 베를린은 기쁜 일은 물론, 힘든 일을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련 기사는 아니었지만, 슬로우뉴스 페이지의 댓글에서는 메갤 내지는 워마드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떤 베를리너들의 자유로운 관계와 성소수자들을 조롱하는 그 배타성, 그 자신들의 배타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이 기사가 쓰여진 그 이유, 베를린의 다양성과 관용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본인들이 관용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소수자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주류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문화라고 이해하지 않고, 범죄라고 단정 짓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 사회는 집단의 이해가치에 따른 보편적 정서에 동화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집단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나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나는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에서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와 보편적 정서, 위계질서에 대해 이야기를 했음에도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내가 이들의 폐쇄성에 대해서 분명히 짚은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혹은 내가 너무 경박스러운 것일지도.

이른 아침, 잠시 잡스러운 생각을 적어본다. 나의 생각을 누구에게 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멈추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은 이제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므로.

 

ㅡ 2015년 7월 20일 수요일 오전 8시 23분, 저들의 자유가 침몰하는 것을 보면서..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

아래는 종전에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기사인데, 이제서야 공개합니다.

이 글은 필자가 경험한 베를린의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주의에 관해 서술한 글입니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몇몇 분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하고 소수의견으로 매도됐던 필자의 경험 등이 그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최종 발행이 됐습니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토론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반론과 보론, 비판 기고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 MASAYOSHI SUKITA

데이빗 보위가 사랑했던 도시 베를린. 그는 베를린의 한 지역구인 노이쾰른(Neukölln)을 위해 노래를 남기기도 했다. © MASAYOSHI SUKITAㅡ Time to put Masayoshi Sukita in the limelight.

작년부터 연이은 여성혐오 때문인지 분노에 이글거리는 ‘페이스북-혁명가’들이 너무 많아서 오랜만에 우리가 가진 편견, 혹은 시차적 관점에 대해서 가벼운 잡글을 나눠볼까 한다.

한 달 전쯤, 독일 한국 유학생 그룹에서 룸메이트를 구하는 독일인에 대한 분노의 글이 올라왔었다. 룸메이트를 구하는 독일인이 한국인 유학생분께 메일을 보내 왔다. 그 메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이름, 나이 등을 밝혔다.
  2. 룸메이트에게 월세는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3. 더불어 잠자리를 같이하는 섹스 파트너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당연히 그 독일인이 룸메이트 겸 ‘섹스 파트너’를 한국 여성을 대상으로 구했기 때문이다. 이 메일을 읽으신 몇 분께서는 성희롱, 혹은 명예훼손을 거론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명예훼손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본다.

독일에서는 이런 조건으로 동거인을 구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계약 이후가 아닌 계약 이전, 계약 조건에 대해 조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동거조건일 뿐이다. 더불어 아무런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며, 고소 사유가 될 수가 없다고 본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주류문화에 익숙하게 살았다면, 이러한 것들을 문화라고 이해하지 않고, 범죄라고 단정 짓기 쉬우리라 생각한다. 왜냐면 한국 사회는 집단의 이해가치에 따른 보편적 정서에 동화되지 않으면, 나쁜 것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없는 집단주의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은 집단주의의 위계질서를 해치는 나쁜 것으로 오인되기 쉽다. (최근에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신자유주의 때문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 명제 1. 독일은 성매매가 합법이고, 성노동자가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 명제 2. 공개적으로 스윙어클럽, 스와핑클럽, 섹스 혹은 페티쉬 클럽들이 있다.
  • 명제 3. 베를린과 함부르크는 유명한 섹스 관광지며, 함부르크는 관광상품엽서에 섹스와 관련된 상품을 판다.
  • 명제 4. 함부르크의 점거운동으로 유명한 하펜슈트라쎄 바로 옆에 홍등가가 있고, 독일 안티파들과 함께 권리를 위한 연대 투쟁을 한다.
  • 명제 5. 베를린의 번화가인 놀렌도르프플랏쯔에는 나치 때 학살당한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추모비와 게이클럽, 게이호스텔들이 즐비하다. 베를린은 LGBT들의 성지다. LGBT 없는 베를린은 상상하기 힘들다.
  • 명제 6. 베를린은 또한 유럽 헤도니스트(hedonist, 쾌락주의자)의 성지다.

2003년 베를린이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을 당시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섹시하다(Berlin ist arm, aber sexy)” 라는 한마디로 베를린을 구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시장도 게이고, 그 역시 베를린의 그 악명 높은 섹스 프렌들리, 페티쉬 클럽인 벨카인(Berghain)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베를린 시의 공식 관광 프로그램에 퀴어들을 위한 투어리즘이 포함되어 있다)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게이,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 (출처: abbilder, Klaus Wowereit, CC BY) https://flic.kr/p/9HEcbh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인, 게이,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전 시장. (출처: abbilder, “Klaus Wowereit”, CC BY)

나는 베를린의 자랑인 다문화, 다양성, 관용주의를 이야기하며, 한국 사람들이 베를린의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베를리너의 정신을 느끼길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베를린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을 구석 구석으로 인도하지만, 오픈릴레이션쉽(Open relationship: 자유로운 연애, 다자간 합의된 연애)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벨카인(Berghain)이나 킷캣(Kitkat)같은 곳을 권하지 않는다.

LGBT, 헤도니즘(Hedonism, 쾌락주의)과 오픈릴레이션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런 공간에 있다면, 서로를 존중하는 암묵적인 약속들이 파괴되어 일차적으로는 해당 공간에서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공간 자체가 갖는 공동체에 균열이 가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클럽들은 보안요원들이 방문자 입장을 거부하고 돌려보내는 경우가 클럽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을 훌쩍 넘는다. 대략 벨카인에서 하루에 돌려보내는 관객만 적어도 500명에서 1천 명쯤 될 것이다. 인종차별이 아니냐는 많은 방문자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이것은인종차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 테크노 퍼레이드에서 여성을 괴롭힘으로부터 지켜낸 그 유명한 테크노 바이킹도 베를리너다.

베를린의 클럽 문화 

Nicola Napoli, "벨카인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Vom Berghain zum Inferno)

Nicola Napoli, “벨카인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Vom Berghain zum Inferno)

1.

이곳은 클럽이 아니라 테크노사원 벨카인이다. 벨카인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 반이 좀 넘어서였는데 200여 명 이상이 줄을 서고 있었다. 한국 사람이 둘 보였고, 아시아 사람은 대개 일본이나 홍콩 사람이었다. 그 한국 사람들은 너풀거리는 옷을 실로 매어 물감을 들인 옷을 입고, 홍대에 자주 드나들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들어갈 수 없다고 확신했고, 그 예상은 맞았다.

1-1.

물갈이로 악명이 높은 클럽, 벨카인. 대체 어떻게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비EU는 물론 EU시민들로부터까지 인종차별 오해를 사고 있는 베르그하인과 어바웃 블랭크 등의 클럽 입장 및 내부 정책,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갈망토록 만드는 이 빌어먹을 것에 대해 그리고 클럽 내부 규칙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 아마도 한국어 사용자에게 열광 받을만한 친절한 가이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신이 이 가이드를 가지고서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누구도 탓할 수 없고, 들어가서도 벨카인을 온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나는 거의 매주 가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주 만나 친해진 친구들이 있고, 누가 자주 오는지, 가끔 한국 관광객이 와서 적응하지 못하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즐기는지는 완벽하게 글로 서술할 수 없다. 혹여라도 당신이 베를린서 나와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날이 되겠지.

a) 술 취하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당히 흥을 돋우는 정도는 좋다. 하지만 벨카인은 당신이 없어도 충분히 잘 돌아간다. 고주망태가 될 정도로 술 취한 당신이 망쳐 놓을 분위기는 사양한다.

b) 너무 많은 약은 안돼.

a)와 같은 이야기다. 당신이 약에 취해 분위기를 타지 못할 것이라면 당신이 얼마나 잘 나가는 사람인지 그런 것은 관계없다. 그냥 사양한다. 에고이스트는 집에 돌아가 당신의 빈 잔이나 채워라.

당신이 당황하거나 두리번거리거나 흥분에 도취해 있다면, 보안요원들은 약에 취한 당신의 동공을 주시할 것이다. 아무리 벨카인이 섹스, 마약, 술로 물든 곳이라고 하더라도 열린 공간에서 약을 하는 일은 공개적으로 “나를 쫒아내 주세요”라고 하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은 속인주의 법을 통용하는 국가이므로 독일에서 약을 했을지라도 한국에 돌아가면 엄연히 범법행위이다.

c) 4명 이상은 안 돼.

사실 3명도 너무 많다. 당신이 LGBT이고, 섹스에 대해 개방되고 우호적인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떤’ 특혜가 따르겠지만, 여성-남성 조합이 좋다. 혹은 남성, 여성, 여성 정도의 3인 조합은 괜찮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친구들끼리 클러빙을 할 생각이라면 다른 클럽을 알아봐라. (들여보내 줄 일도 없겠지만, 제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꺼져줘) 한국인은 물론 모든 국가의 클러버들에게 다소 낯설거나 불쾌할 수 있는 정책이지만, 베를린 몇 클럽들이 고수하는 이 정책은 매우 타당한 이유가 있다.

생각해보자. 여럿이 입장한다면, 그들끼리 한구석에서 쑥덕거릴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무리 지어 놀게 된다. 그럼 자유로운 대화 같은 것은 애초에 사라진다. 그런 친목을 즐기는 관객들은 오히려 클럽 분위기를 망친다. 낯선 이와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라.

d) 지나치게 알려 하지 마라.

안의 분위기가 어떤지 묻지 마라. 이러한 무례한 행동이 클럽의 분위기를 망친다. 상대를 평가하려 하지 마라.

e) 사진 촬영은 안 돼.

베를린의 몇몇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벨카인 내의 사진 촬영은 금물이다. 입장 시 당신의 카메라 핸드폰에 스티커를 붙인다. 발각 시 강제 퇴장된다. 경고는 없다. 그래도 당신이 항변하며 정황을 남기겠다고 찍으려고 한다면, 당신의 카메라 렌즈는 이미 부서져있을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클럽은 사적소유 재산이고, 그 클럽 내부에 몇몇 규칙이 있다. 이에 법적 하자는 없다. 그래 보상받는다고 해도 당신이 얻을 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사실과 몇 주 후에 수리받는 스마트폰 정도? 카메라는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가져오지 마라. 반입 자체가 불가능하다.

f) LGBT.

사실 이 부분은 크게 말할 것이 없다. LGBT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당장 베를린을 떠나는 것이 좋다. 베를린이 어떤 도시냐고? LGBT 시위해봐야 백여 명 단위밖에 안 온다. 드레스덴이었다면 천 단위의 시위대가 있었을 것이다. 베를린은 그런 도시다. 전 베를린 시장도 게이였으며, 베를린은 게이들의 성지다.

또한, 베를린의 게이들은 여성스럽고 허약한 것이 아니라 근육질에 경제적으로도 약자가 아니다. LGBT 없는 베를린은 상상하기 힘들다. 따라서 게이인 경우 입장이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자동적으로 입장이 허용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베르그하인 관객의 10~20%는 건장한 근육질의 대머리 게이들이다. 이들은 언더웨어만 입거나, 상반신을 탈의하고 노는 편인데, 나보다 약간 크니까, 185cm에서 2m가량 되는 근육질 대머리들이 몰려다닌다. 정신없이 놀다 이들 가운데 갇힌(?!) 적이 있는데, 힘이 세더라. 힘이 세다. 그것만 알아두자.

g) 건강한 마인드.

이들은 멋진 사람들을 원한다. 열린 마음, 그러니까 외모로 상대를 평가하는 행동은 물론, 발언하면 들어간다 하여도 온전히 살아남기 어렵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며, 건방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없다. 입구에서부터 센척을 하는 친구들은 벨카인의 보안요원들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조심히 집에 들어가세요.”
“Pass auf, wenn du nach Hause gehst.”

h) 나이?

나이 같은 것은 상관없다. 당신의 마음이 중요할 뿐. 독일에서 크라프트베어크 이외에도 수많은 일렉트로닉, 테크노뮤지션들은 80년 대부터 활동해왔다.

베를린에서는 하다못해 동네 호프집에 준하는 크나이페(Kenipe, 동네 선술집), 게다가 40~ 50대 아저씨, 아줌마들이 가는 곳에서도 크라프트베어크나 큐어, 모터헤드를 들으며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i) 뒷돈은 안돼.

당신이 조금 더 수월하게 들어가기 위해 보안요원에게 돈을 주려고 했다간 당신은 영원히 벨카인에 들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이라면 예의를 갖춰라, 지폐 몇 장 말고.

j) 스탬프 복사.

혹시 지난번에 사용했던 스탬프를 보여준다든가 이미 입장한 친구로부터 팔을 맞대 스탬프를 복사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모험은 포기하는 것이 좋다. 영구 입장 불가가 될 수 있다.

k) 피크 시간.

베를린의 클럽들은 일반적으로 새벽 2시부터 5시 사이가 가장 피크 시간이다. 따라서 이 시간을 피하는 것이 좋다. 벨카인과 마찬가지로 밤새, 아침, 낮까지 하는 클럽들은 오전 5시~ 오전 8시가 입장이 수월하며, 음악 또한 보장할 수 있다. 또한, 벨카인은 토요일 밤 12시부터 월요일 점심 12시까지 쉬지 않는다.

하드코어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Hardcore will never die.

l) 섹스.

베를린에는 둥켈라움(Dunkel Raum: 어두운 방) 이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화장실에서의 섹스는 물론, 어둡지만, 열려있는 좁은 박스에서 섹스를 한다. 그것이 베를린의 문화.

종종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하면, 베르그하인, 킷캣 등의 클럽에서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며 서로를 끌어안기도 한다. 게다가 벨카인을 비롯한 몇 유명 클럽들은 악명 높은 섹스 파티를 하는 곳이다.

게이, 레즈비언은 물론 헤도니스트들의 파티다. 당신의 연인과 다자간 연애가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누군가 당신의 연인에게 키스할 때, 질투를 느낀다면, 다른 클럽을 추천한다.

물론 섹스를 거절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절하는 것도 당신의 능력이다. 불쾌하다는 듯이, 불편하다는 듯이 거절하면, 모두 당신과 미소 짓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선 이와의 키스를 두려워한다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거절하면 다시 시도 하지 않는다.

다 떠나서 베르그하인은 섹스에 대해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클럽이므로 종종 우발적으로 낯선 이가 당신의 가슴이나 성기를 만지는 일이 있다. 특히나 서구 남성들은 동양 여성에 대한 성적 판타지가 크다. 고분고분하며, 복종하는 그런 판타지 말이다. 여성들은 이를 유념해두는 것이 좋다.

m) 드레스 코드.

드레스 코드는 아주 중요하다. 몇 가지 단어들을 나열해 본다.

  • 펑크
  • 사이버펑크
  • 크러스트
  • BDSM
  • 구속복
  • 비키니
  • 수영복
  • 속옷
  • 젖이 드러나는 옷
  • 몸이 드러나는 옷
  • 가죽
  • 라텍스
  • 개목걸이
  • 부츠
  • 오컬트
  • 아방가르드
  • 모피
  • 상반신탈의
  • 하의 속옷 외 전신탈의
  • 검은색
  • 약간의 네온컬러
  • 찢어진 스타킹
  • 망사
  • 편한운동화
  • 문신
  • 피어싱
  • 닭머리
  • 독특한 헤어컷
  • 스카프
  • 중절모
  • 털모자
  • 비유행성 패션 등

이 단어들을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캐릭터가 분명할 것. 유행을 따르지 말 것. 따라서 브랜드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옷이나 정장, 구두 등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n) 언어.

베를린의 몇 유명한 클럽들은 젠트리피케이션(Getrification: 낙후된 지역이 고급화되는 현상) 현상이 가속화됨에 따라 이에 연대하고 항의하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다.

당신이 운이 좋다면, 벨카인에 들어갈 능력이 되는 좋은 로컬 친구가 있을 것이고, 함께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이러한 클럽들은 예의상 포기하는 게 좋다. 현지인이라고 하여도 언어가 잘되지 않는다면, 혹은 이러한 로컬 클럽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아주 좋은 생각은 아니다.

심지어 다른 도시에서 베를린의 테크노를 즐기러 왔다가 입장이 거절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신 거주지가 베를린이라고 해서 로컬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유념해야 한다. 인종차별할 필요 없다. 베를린에서는 아무도 당신을 차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별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관광객일 것이다.

o) 입장이 불가능해질 때.

친구가 안에 있다고 호소하지 말자. 구질구질한 인상으로 다시는 못 들어가게 될 수 있다. 낙심하지도 말자. 가까이 Tresor, Watergate, Ritter Butzke, Club Weekend 등 입장이 무난하면서도 재미있는 클럽들이 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그리고 또 나쁜 의미에서 그 클럽들과 벨카인은 비교될 수 없다.

  • 안에서의 인연이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클럽을 나서게 되면 되도록 클럽 안의 일을 모두 잊는 것이 좋다. 베를린에서는 클럽에서 연락처를 주거나 받는 일이 흔하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대답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당신과 섹스를 몇 차례 했다는 것이 당신과 사귀고 싶어라는 뜻도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났다간 다치는 건 당신뿐이다. 스스로 상처받지 말라. 규칙이란 것은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스스로 하는 약속일 뿐,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킷캣 클럽. (출처: Kit Kat Club / Berlin) http://euro-clubs.blogspot.de/2013/05/kit-kat-club-berlin.html

킷캣 클럽. (출처: Kit Kat Club / Berlin)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클럽들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공간 자체가 가져오는 안락함, 그리고 그 말 없는 약속들이 잘 지켜지기 때문이고, 무례한 관객이나 관광객들이 없기 때문이다.

베를린 클럽에 간다면서 가장 멍청한 놈들은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클럽이라고 해서 섹스만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이런 곳을 찾으면, 섹스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와서는 춤도 추지 않고, 그저 등대처럼 두리번거리며 섹스 상대만 찾는 사람들이다. (사진 찍는 놈들은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쫓겨난다/)

WIMDU에서 만든 베를린 클럽 지도. 지도는 유명 클럽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언더그라운드 클럽까지 하면, 수 백개에 달한다. http://wimdu.de/berlin

WIMDU에서 만든 베를린 클럽 지도. 지도는 유명 클럽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언더그라운드 클럽까지 하면, 수백 개에 달한다. (출처: WIMDU)

그런 곳이 베를린이다. 테크노의 도시, 베를린의 클럽에서 진짜 즐긴다는 것은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다. 모든 클럽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베를린의 악명 높은, 그리고 가장 핫한 클럽들은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다른 도시의 클럽들과 차별된 베를린 클럽의 가치를 표상하기도 한다.

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 서구 문화 전반으로 신문 지면상이나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단기, 장기, 데이트 상대를 구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혹여 어학원을 다닌다면, 어학원 선생에게 물어봐도 같은 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문화는 한국에서 돈을 주고 음성적으로 성을 거래하는 것과 달리 취향이 맞는 사람들 간의 합의된 건전한 관계라고 통용된다. 그 유명한 줄리안 어샌지도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큐피트’에서 자신을 ‘위험한 사람’이라며 스스로 소개하기도 했다.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큐피트에서 활동했던 줄리안 어샌지.

데이트 웹사이트, 오케이큐피트에서 활동했던 줄리안 어샌지.

줄리안 어샌지처럼 이러한 웹사이트들은 단순한 성적 교제만이 아닌 자신의 기호, 철학, 정치성, 주체성, 삶의 태도 등을 반영한다. 베를린을 예로 들자면, 도시 특성상 성적 기호에 대해 범성욕주의(pansexual), 양성애, 다자간 연애라던가, 채식, 혹은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조건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만나는 일들이 흔하게 벌어진다.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되길 거부하면서도 페미니스트 남성만을 찾겠다는 메갤의 그 이율배반적인 글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럽 게이들의 성지로 불리우는 클럽 고야(출처: Goya Berlin) http://www.ue30-party-portal.de/event-location/Goya-Berlin

유럽 게이들의 성지로 불리우는 클럽 고야 (출처: Goya Berlin)

돌아와 정리해보자면, 룸메이트를 구할 때, 자신의 기호, 취향, 라이프 스타일 등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독일에서 룸메이트를 구하기 위해 인터뷰해본다면 누구나 익히 알겠지만, 학업, 삶의 태도 등을 목표 지향성이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일반적이다.

함께 살면서도 서로 자주 마주치지 않길 원하는 사람도 드물게 있기야 하지만, 일단 룸메이트라는 정서는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반자적 관계를 의미하므로 같이 자주 식사하고, 같이 놀러 다니고,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이다.

이런 것들을 싫어하는 사람을 비사교적, 혹은 반사회적(A-Social)으로 보기도 한다. 관심사에 대해 서로 이해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독일인, 혹은 유럽 사람들과 룸메이트가 되는 일은 한국인들에게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비EU 문화권인 사람들만 힘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일에서 룸메이트를 구해본 사람이라면, 이 일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일인지, 까다로운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룸메이트 하나 구하는데 10명 정도의 인터뷰는 정말로 정말로 흔한 일이다. ‘룸메’ 하나 구하려고 인터뷰를 수십 명씩 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클럽을 가는 젊은 친구들도 있다. 그렇게 잘 놀고도 룸메이트가 못 되는 일도 허다할 정도로 그들과 호흡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과 룸메이트가 되는 일이 드물지만, 집 하나 구하려고 이런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렇다면, 해당 유학생의 이야기 같은 일에 대한 대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매우 간단하다.메일을 받고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안 하던가 그냥 거절하면 된다.

그분께서는 처음이라 놀라셨을 거라 생각한다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지구는 둥글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많다. 그중에서 자신과 맞는 누군가를 찾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 아닐까.

좋은 친구를 찾고, 진탕 마시며, “널 너무 찾아다녔어!”라고 말하는 게 진짜 재미지! 내가 사는 하우스 프로젝트는 어떤 정치적 이상향을 함께하는 공동체지만, 스무 개가 넘는 각자의 방에서 서로 각기 다른 기호,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 함께 살아간다.

누군가 공동체의 독점하지 않고, 수평적이며 능동적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수많은 토론과 회의 통해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아니라면 아닌 거야! 강간은 절대 재미있지않아.

아니라면 아닌 거야!
강간은 절대 재미있지않아. (출처: No Means No)

+ No means No.

이 글은 여성혐오나 여성차별에 동의하는 글이 아닙니다. 누구든 ‘안된다’, 혹은 부정의 의사를 표현했는데도 관계를 이어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폭력입니다.

나의 관점이나 누군가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때로 유효한 결론과 거리가 먼 곳으로 귀결된다. 내가 어떤 곳에 서 있냐에 따라 나무 그림자 방향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베를린의 디제이 아다나 트윈스(Adana Twins)가 더 도어스(The Doors)의 ‘사람들은 이상해(People are strange)’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곡, ‘Stranger.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베를린의 아주 유명한 테크노 할아버지 두 분 중 한 분, 올해 68세의 베른하르트 엔스테(Bernhard Enste). 아주 와일드한 언더그라운드 파티를 즐기시는데, 웬만한 젊은 친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매력 터짐 때문에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시다.

실제로 만나보면 왜 그런지 단번에 이해하게 됨! 최근 미국에서 테크노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우리 동네 할아버지 베른하르트 엔스테를 모시고 싶어서 야단이라고 한다.

이 글 본문 중 독일의 클럽 문화에 관한 서술 부분(특히 ‘벨카인’)은 ‘긱가이드(코리아)’에 필자가 썼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편집자)


  1. Kraftwerk: 테크노 음악의 아버지,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
  2. Cure: 78년 결성된 영국 밴드로 고딕 음악의 시초
  3. Mötörhead: 75년 결성된 영국 헤비메탈밴드

정어리 – 122

 

1392년, 고려의 장수 이성계가 공양왕을 양위시키고, 새 왕으로 등극하여 이후 조선을 건국합니다.  1790년,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 저술서인 <국부론>의 저자이자 영국의 경제학자 Adam Smith가 사망합니다.  1793년에는 자코뱅당이 인민주권론에 기초해 직접보통선거와 선거인회에 의한 의원 소환, 생존권·노동권·봉기권의 보장 등을 담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고, 물가 안정을 위해 최고가격제를 실시했고, 미터법을 제정하였습니다.  1918년,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8번째 군주이자 마지막 황제와 차르 일가가 모두 처형당합니다.  1936년에는 파시스트 프랑코 군에 대항하여 아나키스트들이 투쟁을 하여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며,  1945년에는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포츠담 회의를 합니다.  1947년에는 전자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Kraftwerk의 멤버 Wolfgang Flür가 태어났습니다.  이듬해인 1948년 대한민국은 헌법을 공포하며, Iggy Pop and the Stooges의 기타리스트 Ron Asheton이 태어났습니다.  1954년에는 현 독일의 총리 앙겔라 메르켈 태어났고,  1958년에는 홍콩의 영화 감독 Wong Kar-wai(왕가위)가 태어났습니다.  1967년에는 Miles Davis Quintet의 John Coltrane이 사망하였습니다.  1992년 슬로바키아가 체코 슬로바키아로부터 독립을 하였으며,  2010년 국제 사법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1985년 7월 17일에는 오늘날 온 유럽을 유리걸식하고 있는 김민주가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납니다. 하아아아ㅏㅏㅏㅏㅏㅏ 그리고 2011년 7월 17일에는 1975년 7월 17일 핀란드 태생의 Trance DJ ‘DARUDE’가 2002년 스페인 이비자 섬(Ibiza)을 중심으로 세계를 뒤흔든 곡 <Sandstorm>을 친구들과 우연히 방문한 바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ㅡ 2016년 7월 16일 오후 5시 30분, 역사 속의 7월 17일을 읽다.

페이스북 활동가 앤드류씨께 전함

앤드류씨도 이렇게 갔군요. 본인 스스로 아나키스트, 활동가로 지칭하면서 타인의 도덕을 품평하는데 그쳤던 그 분에게 제가 대체 무슨 활동을 하시냐 몇차례 물었건만, 단 한번도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뚜렷이 이야기 하지 못하셨죠. 이해합니다. 어찌 무슨 염치로 스스로 “나는 어떤 도덕적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라고 선전하고 다니겠습니까. (물론 본인은 몇 메갤러, 워마드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추궁하여 베를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이번에는 본인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는 말을 여러가지 하셨습니다. 제가 누구 장학생이라구요? 공교롭게도 저는 학교와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오스트리아 교수님이 독일서 저를 받아주시겠다 하실 때도, 그 교수님은 제가 진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걸 모르셨고, 저는 만나뵙고 돌아와서 감사하지만, 죄송하게도 혼자 공부하겠다고 이야기 드렸습니다. 그게 무려 5년도 더 되었습니다. 제가 홍대에서 무얼했다구요? 실제 당사자의 이야기는 들어보셨나요? 무슨 이야기를 들으신지 모르시지만, 상상하고 계신 일을 사실인 마냥 하시길래, 누가 그런 이야기 했는지는 이름 거론하지 않아도 좋으니 무슨 이야기인지 이야기 해보시라니까, 결국 차단하고 도망 하셨군요. (증거를 내놓으라면, 증거를 드릴수도 있고, 당사자와도 최근 만나 그간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둘다 베를린에 살고 있고, 서로를 격려했지요. 그 자리에 함께하던 여러 사람들은 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시나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시면서 페미니즘의 가치에 역행하는 이야기들을 종종하시던데.. 저는 앤드류씨, 당신이 왜 버릇처럼 스스로를 “나는 아나키스트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로 종종 글 시작을 해왔는지 압니다. 본인 스스로께서도 아시겠죠. 왜냐면, 본인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그건 당신이 얻고 싶은 부활절 달걀과 같은 것이니까요. 야구는 잘 모릅니다만, 우리는 누군가 공을 던지거나 받거나, 또 쳐내는 모습만으로도 이 사람이 취미로 야구를 하는지, 혹은 그보다 높은 가치를 두는 리그에 참여하는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앤드류씨, 당신이 어떤 꿈에 잠겨 사는지는 내 알바 아닙니다만, 본인이 하지도 않은 일에 한 것처럼..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타인의 이야기를 아는 것마냥 뒤에서 수근 거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타인의 도덕을 논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조차 모르는 것을 태연히 아는척 내뱉지는 마세요. 당신이 내게 ‘참는다’느니 뭐니 하셨는데, 당신이 아는 바에 확신 하신다면, 참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신도 모르는 이야기, 확인도 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내 뒤에서 수근거린, 그 부끄러운 일을 얼떨결에 자백한 자체가 한심스럽고, 부끄러우시겠죠.

나는 서울에 가게 되면, 만나뵙고 싶다고 이야기 드렸었는데, 당신은 만나보지도 않은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군요. 당신을 믿고 있는 당신의 친구들이 안쓰럽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만 그러겠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있겠지요. 당신 덕에 당신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그런 혐의 속에 함께 합니다. 스스로 외로운 사람 되지 마시길.. 진심으로 전함.

ㅡ 페이스북 활동가 앤드류씨께 전함.

정어리 – 121

 

 

“신체절명의 아포리아. 쓸모없는 일에 코를 쳐박고 허우적거리는 매력없는 사람. 수족관 유리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돌고래.”

“여러분 마그네슘을 섭취하세요”

지난 2주 간, 식사를 거르고, 잠을 거르지 않으면 일을 마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가운데 잊지 않으려, 잃지 않으려 수 십여개의 메모들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딱 이 두 문장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리고 듣는다. 6년 만에. 젠조라마, 에시트 짜이트.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후회없이.

 

ㅡ 2016년 7월 6일 오후 5시 59분, 젠조라마, 에시트 짜이트를 꺼내 들으며..

정어리 – 120

what-i-found-near-schlesiches-tor

 

what i found near schlesiches tor. i know that feeling. don’t be sad. it’s the life, as sisyphus. struggling and conflict, make you stronger.

 

ㅡ 2016년 7월 3일 오전 8시 13분, 슬퍼 말아요

정어리 – 119

 

 

브렉시트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탈-브리튼을 이야기할 때, 나는 사실 런던에 가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나를 이상성욕-, 페티쉬라며 나무라도 좋다. 70년대 말 펑크 붐 세대가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고, 그들이 지금의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브렉시트 결정 후에는 인종혐오가 무차별적, 공개적으로 드러난다는데, 나는 이 스스로의 억압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억압이 우리를 자유로 이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 아닌가. 앞으로 20년 안에 영국 어디 촌구석에서 분노를 집어삼킨 굉장한 작가가 나올 것이라 감히 추측해본다.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다면, 영광이겠지. 나를 이상성욕-, 페티쉬라며 나무라도 좋다. 그가 분노를 집어삼키며 어떻게 토악질을 할지 몹시도 궁금하다.

내가 베를린을 향했던 이유는 베를린이 망하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신체절명의 소리 없는, 그 간절한 절규가 무엇을 가져올지는 우리 너무도 익숙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허니문을 그리스로 생각했었다. 기만적이지 않기 위해서, 목도하고 함께 절규하기 위해서. 무엇이든 다가오라. 아, 낯선이여, 이방인이여ㅡ

+ 요즘 축구 시즌 때문에 독일 국기 갖고 다니는 놈들이 부쩍 늘었는데, 진짜 촌스러워서 못 봐주겠다. 왜냐고? 나는 2002 한일 월드컵 때도 국기 달고 다니는 놈들을 정신줄 놓은 멍청이들이라고 생각했거든. 공 차기 좋아하는 애들은 뭔가 좀 다르다. 너무나도 심심한 인생이라 그거 아니면 풀 데가 없는거지 내 주변에 공 놀이 좋아하는 독일 친구는 단 한명인데, 다행히 혼자 보기 좋아한다고..

저도 심심한 인생 맞아요. 저는 그 심심함을 숙취와 함께 즐기고 있는거고.

 

ㅡ 2016년 7월 2일 오후 4시 57분, 함께 절망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