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135

사실 최근 보류해온 페미니즘 관련 기사들 모두 준비 되었는데, 망설이고 있다.. 왜 망설이는지야 나조차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지점은 메갤과 워마드의 레토릭이 의도를 막론하고, 정확히 반여성주의적이란 것과 이들이 벗어야한다는 그 빌어먹을 코르셋, 비판을 아끼지 않는 핀업걸은 오늘 페미니즘의 레토릭으로 재전유되어 페미니스트들과 작가들에게 여성을 주체로 하는 작업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체, 성기를 통해 주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제발 본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시기 전에는 구글링 한번이라도 하세요. 왜 본인도 모르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인 것 마냥 거짓말을 합니까?)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썅년(bitch)들이 필요한 것은 응당 사실이나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배제의 정치를 펼치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호명하는 이들에게는 유감이지만, 부탁컨데 “본인께서 하시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셨으면 좋겠다” 이야기 드리고 싶다.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 태도가 정당한 요구마저 보채기(pestering or nagging)로 전락토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기사가 나가고 나면, 누구는 낄낄거리고, 누구는 멘붕에 빠지거나 내게 방향 잃은 분노를 쏟아낼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 협업하지 않고, 관계를 바라보지 않으며, 분열만을 초래하는 배제의 정치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비단 페미니즘뿐 아니라 모든 정치/문화운동에서.

 

 

ㅡ 2016년 9월 15일 오전 11시 23분, 배제의 정치, 방향 잃은 분노로는 아무 것도 없을 수 없다.

 

sign-open-to-close-to-open-a-to-d-1 sign-open-to-close-to-open-a-to-d-2 sign-open-to-close-to-open-a-to-d-3 sign-open-to-close-to-open-a-to-d-4

정어리 – 134

“얼마나 기다렸나 지금 이순간을 고대하면서
낮엔 그리움이 밤엔 외로움이 가슴 가득히 있었네
다지나 버린 고통들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
이젠 그대와 나 어느 누구라도 갈라 놓을수는 없어
슬피울던 새 들도 웃음으로 우리 사랑축하해주네
무정하게 보였던 저달님도 밝은 미소를 주네
난 이제부터 영원까지 오직 그대만을 사랑할 거야
이젠 그대와나 어느 누구라도 갈라 놓을수는 없어” ㅡ 홍세봉 –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왠지 시큰거리는 가사. 친인척들에게 전화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그 날의 안녕을 물었고, 그 때의 서울은 다들 외환위기로 살아남기 위해 모두들 치열했었다. 길 하나를 두고, 잘 사는 동네로 이사를 왔었는데, 없이 살던 내가 외롭지 않게 해주던 친구들도 몇 있었다. 이제는 한 녀석과만 간간히 메세지를 나누고, 기약 없이 만남을 약속하며, 서로의 안녕을 물을 뿐이지만.

+ 주인공 김변호사(김세윤 분)의 실제모델은 홍세봉 변호사로 주제곡인 “이제부터 영원까지”의 작사 작곡도 직접했다고 한다.

 

ㅡ 2016년 9월 10일 오전 8시 29분, 그 때는, 그리고 오늘은..

New Order – Blue Monday with korean translate

 

How does it feel to treat me like you do?
어떤 기분일까? 당신이 하는 것처럼 날 대하면
When you’ve laid your hands upon me and told me who you are
네 손이 나에게 닿을 때 네가 누구인가를 말해주지
I thought I was mistaken, I thought I heard your words
내 실수였다고, 네 말을 들었다고 생각 했어
Tell me how do I feel. Tell me now, how do I feel
내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 지 말해줘, 말해줘 지금 내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Those who came before me lived through their vocations
내 앞에 왔던 사람들은 소명을 갖고 살았지
From the past until completion, they’ll turn away no more
과거부터 완성될 때까지 그들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을 거야
And still I find it so hard to say what I need to say
여전히 난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는 게 어렵다는 걸 알아
But I’m quite sure that you’ll tell me just how I should feel today
그러나 내가 오늘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네가 말해줄 거라는 건 알지

 

I see a ship in the harbor. I can and shall obey
항구에 배가 보여, 난 복종할 수 있고 복종해야 해
But if it wasn’t for your misfortune, I’d be a heavenly person today
네가 불행하지 않다면 난 오늘 천국에 있게 될 거야
And I thought I was mistaken and I thought I heard you speak
내 실수였다고, 네가 하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 했어
Tell me, how do I feel. Tell me now, how should I feel
말해줘 내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이제 말해줘, 내가 어떻게 느껴야만 하는지

 

Now I stand here waiting…
지금 여기 서서 기다리고 있어…

 

I thought I told you to leave me when I walked down to the beach
내가 해변으로 걸어 내려갈 때 너에게 날 떠나달라고 말했다고 생각 했어
Tell me how does it feel, when your heart grows cold, grows cold, cold
말해줘 기분이 어떤지, 네 맘이 식으면, 식게 되면, 차가워지면

설리, 구하라, 그리고 로타 사진 작가에 대한 함영준씨의 비판에 대해 유감

함영준: [문화비평] 로타 사진 유감, 순수하다고? 수상하다고!

 

설리, 구하라, 그리고 로타 사진 작가에 대한 함영준씨의 비판에 대해 유감:

멀리 나가신 의견. 페미니즘이 언제부터 ‘자기성결정권, 또는 성적자기결정권, Sexual self-determination’을 불인정했는가 되묻고 싶다. 최소 구글에서 ‘Lorita on feminism’이라도 검색해보셨으면 좋았을텐데, 그러시기엔 너무 바쁘신 듯하다. 페미니즘은 각 노선에 따라 섹시즘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하며, 어떤 노선은 ‘Sex-positive’를 말하기도 한다. 또한 페미니즘은 주체가 자율적으로 발화하는 자기성결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나 긍정적으로도 다룬 적이 없다. 개인의 자기성결정권에 타인이 관여하는 그 자체가 페미니즘의 가치에 반하기 때문.

차라리 섹시즘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부분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생겼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은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적, 예술적 가치에만 면책권을 주는 이율배반이 되지는 않은가? 적어도 자기성결정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설리와 구하라에게 압박을 가하진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로타를 비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설리와 구하라에게 ‘관종’이라느니 따위의 모욕을 하고, 사진을 내리게 압박을 가했다. 설리가 자율적으로 주체가 되는 행동을 했음도. (집단 안에서 한 개인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계도적인 폭력에 가깝다)

사실 설리의 티셔츠 사진은 논란거리도 안되지만, 굳이 한국 정서를 고려한다면, 레즈비언 논란이 있었으면 모를까. 존슨즈 베이비 오일 광고 사진에서 서로에게 성적 제스쳐도 아닌, 그저 전방을 함께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수동적이라고 단정 내리는 근거는 무엇일까. 게다가 ‘존슨즈 베이비 오일’은 사용자가 거의 여성이고, 광고도 여성을 상대로 하는데. 구글에서 존슨즈 베이비 오일을 7페이지까지 검색해본 결과, 현재 이 논란을 공유하는 페이지들과 단 한개의 남성 중심의 매거진에서 모터바이크에 존슨즈 베이비 오일을 써서 망가트려 곤란했다는 기사를 제외하고, 모두 맘스다이어리, 레이디경향, 82쿡, 여성매거진에서 다루고 있는데도 설리, 구하라, 그리고 로타 작가의 존슨즈 베이비 오일 광고를 로리타와 연관짓는 분들의 성적 취향이 궁금할 정도. 존슨즈 베이비 오일의 이 광고사진은 남성들을 향한 광고도, 제품도 아닌데.

정두리씨의 80년대 일본도색잡지 카피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젖은잡지’는 되고, 설리와 구하라, 그리고 로타 작가의 존슨즈 베이비 오일 광고는 왜 안된단 말인가? 그 기준은 너무나도 자의적이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재생산 하고 계시거나 한류에 맞춰 K-Feminism이라도 개척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면 존슨즈 베이비 오일이 무슨 제품인지 전혀 모르시거나.

존슨즈 베이비 광고들:



뉴욕에서 여성페미니스트들이 공원에서 토플리스 책읽기 모임 한지 벌써 6년이 지났고, 토플리스 프라이드 퍼레이드도 3년차.. 대체 한국은 20세기 초반 신여성이라도 소환하려는걸까: https://www.youtube.com/watch?v=6ZY2e6UYIIg

혹시나 한국에서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하기 때문에 안된다 말씀하시는 분들께 지금 뉴욕에서도 그 지점을 항의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토플리스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씀드리고 싶다. 참고로 뉴욕시의 법에 따르면, 남성은 완전한 상의 탈의가 가능하지만, 여성은 금지되어 있다.

결국엔 이런 관점이야말로 타인의 욕망까지 본인의 기준에 맞춰 검열하려는 편집증, 혹은 모든 것을 성적인 것과 연관 짓는 도착증이다. 소위 말하는 꼰대.

+ 별개로 나는 로타작가의 작업에 큰 흥미를 못 느낀다.

++ 로리타는 곧 소아성애로 이어진다고 하는 주장은 60년대 메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당시, 게이트 이론으로 대마에 대해 엄격히 통제를 주장하던 공화주의자들과 하등 다를바 없다. 게이트 이론은 허구로 밝혀졌고, 2016년 오늘 한국에서는 게이트 이론을 주장하는 ‘넷페미’들이 있다.

+++ 이쯤에서 루쉰의 글을 나누지 않을 수가 없네요. 루쉰이 찬사?!한 중국인들과 꼭 같은 얼굴의 한국인들.

“반팔만 봐도 하얀 윗팔을 상상하고,
곧 나체를 상상하고,
곧 성기를 상상하고,
곧 성교를 상상하고,
곧 난교를 상상하고,
곧 사생아를 상상한다.
중국인의 상상력은 이 분야에서 만큼은 이렇게 약진적이다.”
ㅡ 루쉰, 1927년, <소잡감> 중에서

 

 

ㅡ 2016년 9월 3일 오후 10시 44분, 진보 꼰대들과 음흉한 넷페미들에게 유감.

정어리 – 132

run-though-the-time

저들의 자유가 스스로, 침묵 속으로 행진하여 자취를 감추려하는 것이, 어둠의 바다로 침몰하려는 것이 대체 왜 나의 슬픔이 되는 것일까. 처음 콘체티를 처음 보았을 때, 안녕이라 말하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안녕이라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안녕.

ㅡ 통신규약, 중략..

아마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거야. 아무런 기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내 잘못이야. 나를 원망해다오.

이른 아침 연락을 받자마자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쳐박고 토를 했다. 아무 것도 안 나왔지만, “끄윽, 끄윽-” 거리는 소리가 필요했다.
문이 쿵쿵거리면서 “민주, 알레스 클라?” 라는 누군가의 물음에 “나튀어리쉬, 알레스 클라. 베어 빈 이쉬? 이쉬 빈 슈타케 데모크라티!” 라고 끄윽 거렸다. 헤헤.. 거짓말쟁이. 그 거짓말 다 진짜야.

 

ㅡ 2015년 9월 3일 늦은 10시 6분, 저들의 자유가..

정어리 – 131

새벽 길 위에서 마법의 주문을 발견하였다.

“anjatda il-eoseossda, eut- sha, eut- sha.”

 

ㅡ 2016년 9월 3일 아침 7시 36분, 선글래스, 댄스, 누부신 베를린 선라이즈..

정어리 – 130

%ea%b0%81%ec%9e%90%ec%9d%98-%ec%8a%ac%ed%94%94%ec%9d%80-%ec%88%a8%ea%b8%b0%ea%b3%a0-%eb%a7%a5%ec%a3%bc-%ed%95%9c%ec%9e%94%ec%9d%84-%eb%8d%94-%ec%8b%9c%ec%bc%b0%eb%8b%a4

지난 일 년간 배우고 있는 수 많은 것들 중 가장 어려운 것,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 나 자전거 타고, 그리고 또 병날 때까지 걷는 사람인 것 알고 계실까, 아님 모르고 주셨을까.

김민주씨 물웅덩이 위를 걷던 달은 집에 갔구요, 너는 왜 그 진흙탕 위를 지날 비구름을 기다리나요.

 

ㅡ 2016년 9월 3일 오전 6시 38분, Griessmuhle 앞에 혼자 앉아서.

 

시사인 사태를 지켜보며

시사인 기사 포스트: “당장의 위기는 허리띠를 졸라매 극복할 수 있지만 당장 후배들이 기획안을 낼 때 자기검열을 할까봐,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고제규 시사IN 편집국장)

 

시사인 사태를 이야기 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썅년(bitch)들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의 ‘절독운동?!’을 보는 마음도 안타깝지만, 시사인이 과연 반응을 예상하고 쓴 기사 맞긴한가 싶다. 이정도 위기 알고도 강행해놓고, 억울하다고 절독만은 하지말아달라 부탁하는데 수긍할만한 근거가 있을까 싶다. 적어도 시사인은 첨예한 논쟁 속에서 기사를 조금 더 미루더라도 여성혐오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으며, 페미니즘을 말하기 위해 남녀간 대결구도를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양측 의견의 타당함과 별개로 절독에 대한 고제규 편집장의 볼멘소리는 스스로 자격을 박탈했다. 그가 밝혔듯 ‘절독 3선’이란 단어까지 써가며, 예상했음에도 강행했기 때문. 이미 알았다면, 본인들의 논지를 견지하는 기사를 내더라도 다른 각도에서, 이를테면 도발적인 접근만은 자제했어야 하는게 맞다. 그게 ‘언론사 편집장’이 할 일이고.

추측컨대, ‘분노/한남/자들’은 도발을 의도한 것이 맞을 것이다. 이미 ‘절독 3선’까지 고려하면서 상쇄를 하려고 했던 것이 이 라임으로 메갤로부터 구독지원, 소위 ‘화력지원’을 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분노를 사는데 성공은 했지만, 화력지원을 받는데는 실패했다. 그것은 시사인이 아직 메갤의 성격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사인이 너무 순수하게?! 혹은 유아적으로 손가락 계산을 했다. 계획한 분노를 사는데 성공은 했으니 자업자득이라 할 수 밖에..

안타깝게도 시사인의 메갤 기획 기사는 일베, 메갤, 워마드나 정의당, 시사인, 그리고 그에 분노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성혐오 프레임에 완벽하게 말려 들어가버렸다. 이 곳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공동선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커녕,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논쟁조차 열지 못하고 있다. 일베는 말할 것도 없고, 평등을 말한다는 범진보진영 내에서조차 메갤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메갤을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배제의 정치’만이 정확히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다루어야겠지만, 시사인이 페미니즘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자 기사를 썼다기보다는 메갤이란 논쟁적인 현상에 서둘러 기사를 내려다 자신까지 그 현상에 그대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전자도 쉽진 않겠지만, 후자는 결과가 뻔하다. 후자의 경우, 어느 쪽으로 논지가 흘러가더라도 특정 성향의 구독자만 남게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고, 지금 시사인이 곤란해하는 것 또한 후자를 택했기 때문이다. (메갤을 옹호하거나, 메갤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양측 의견 모두 후자에 해당된다)

이것이 만약 무규칙 격투기라면, 시사인의 문제는 링 위의 경기에 대해 속기를 하고, 기사를 써야할 기자가 난데없이 링 위로 뛰어들어 심판을 자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여기서 미디어오늘이 신중해져야 하는 일은 시사인이 했던 것처럼 심판이 되려 자처하지 않는 것이다. 미디어오늘이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이 현상에 대해 다양한 필자를 섭외해 논의의 장을 만들고, 차차 논쟁적인 사안의 폭을 좁혀 포커싱 하는 것이다. (현재 말하고 있는 필자들의 글은 계속 반복되어 재생산 되기 일쑤고, 논의 진전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양측을 대변하며, 대결구도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건데, 나는 페미니즘이 이 사회의 기본 아이디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썅년(bitch)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 계층, 성별,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부당한 일에 항의하는 것에 그치지 않아야한다.

우리는 여성을 전통적인 성역할에 따라 나약한 존재로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 전통적인 성역할(gender roll)을 방해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는 과거에 매몰되지 않기위해 “우리가 사는 모습이 곧 우리가 바꾸려는 세상의 모습이다” 라는 말과 함께 여성을 남성과 함께 나란히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위치 시키는 상(image)을 그려 제시해야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썅년(bitch)들이 필요하다”

 

 

ㅡ 2016년 8월 31일 오전 2시 23분, vision으로..

주체의식, 권리

“한국 이민자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이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평생 대다수의 일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소수라는 그 개념조차 없습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봤을 뿐 자신들이 소수민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ㅡ 인구통계학자, Leo Estrada

 
독일 유학생들의 네트워크나 내 최근 글에 대한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 스스로의 인식을 생각해보면, 일련의 일들이 다 설명되기는 한다. 그 중 확실한 것 한가지는 한국인들은 대개 우리가 서로 동등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등하지도 같은 위치에 서있지도 않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차별 받지도, 행하지도 않는, 폭력의 고리를 끊는 일에 대해 말하고,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평등이나 권리는 권력자가 어느날 갑자기 피권력자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가 주체의식을 갖고, 자신의 권리만큼 다른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것 또한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

한국은 공동체 사회라고들 한다. 하지만 여기에 공동체란 없다. 이들의 사회는 특정 권력이나 계층이 집단을 통제하고, 개인이 집단에 속하기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헌신해야만 하는 사회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집단들이 형성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홀롭티시즘은 권력에 동화되어 특정 권력을 위한 복종의 임무를 ‘대의’라는 이름으로 매우 성실히 수행한다. 이 곳에 개인의 주체는 없다.

유럽에서는 나, 개인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규범, 규약, 또는 관습의 형태로 남았다. 하지만, 이 것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또는 통제하는데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전자의 예가 바로 ‘얀테의 규범’이며, 후자는 ‘독일의 관료주의’이다. 후자로 인해 좌절되는 개인들을 보면서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비판하였는데, 그 말이 현재에는 ‘Kafkaesk’라는 단어로 남았다.

“프라하의 한 엔지니어가 런던의 학술 토론에 초청되었다. 그는 런던으로 가 학회에 참석한 후 프라하로 돌아온다. 돌아온 지 몇 시간 후 그는 사무실에서 당 기관지 <루데 프라보>를 읽는다. 거기에는 런던의 학술 대회에 파견되었던 한 체코인 엔지니어가 서방 신문들에 사회당을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서방 세계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러한 성명과 결부된 비합법적 망명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십여 년의 감옥 살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그 엔지니어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사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그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가 말한다. 맙소사, 당신이 돌아오시다니! 현명하지 못한 처사예요. 당신에 대한 글을 읽었죠?

엔지니어는 비서의 겁에 질린 눈을 보았따. 그는 <루데 프라보>편집장을 찾아간다. 편집장은 미안해하지만, 기사 내용은 내무성에서 보내왔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엔지니어는 내무성을 찾아간다. 그들은 런던 주재 대사관 비밀 정보원으로부터 이 보고서를 받았다고 말하며 정정 기사를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엔지니어의 생활은 이제 조용해질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엄중하게 감시당하며, 전화를 도청당하고 길에서는 미행당한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이제 그는 잠조차 잘 수 없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불법적으로 자신의 조국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진짜 망명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ㅡ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중에서..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첫째,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는 관료들의 착오로, 십 년 전의 초청장을 받고 성에 도착한다. 그의 실존 전체가 하나의 착오이다. 카프카적 세계에서 서류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흡사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서류상 착오의 그림자.

셋째, 벌 받는 자는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부조리를 감당할 수 없어서 벌 받는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합리화한다. 벌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벌은 죄를 찾아낸다. 카프카의 <심판>에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발당했는지 모르는 K는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아주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모두’면밀히 검토해보기로 결심한다. 피고가 자신의 죄를 찾는 것이다. <성>에서 아밀리아는 성의 고관으로부터 음란한 편지를 받고 그것을 찢어버린다. 성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밀리아의 가족을 피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변호하고자 하지만 누가 선고를 내린지 알 수 없거니와 사실상 선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성에다가 딸의 죄를 선고해달라고 청한다.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는 먼저 죄인이 되어야 하므로 벌받는 자가 사람들에게 죄를 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벌은 죄를 찾아낸다.

넷째, 프라하의 엔지니어 이야기나, 카프카의 이야기는 농담 같은 성격을 띤다. 카프카적인 것은 우리를 코믹한 것의 무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것은 비극적인 것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것을 알의 상태에서 깨뜨려버린다. 엔지니어는 조국을 잃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모두 웃는다.”

“무서운 것은 카프카적인 것이 전체주의나 관료적인 상황 아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늦잠을 잔 아들로 인해 지나치게 상심하고 화가난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의 아들이 말한다.

“어머니가 심한게 아니에요. 그래요. 제가 늦잠을 잤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나무라시는 것은 더 깊은 이유 때문이에요. 저의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꾸짖으시는 겁니다.”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매우 일상적이고 더할 수 없이 인간적이며 친숙한 상황을 지배하는 메커니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많이 봤는데, 사람들은 싫어하기로 한 사람에게서는 싫은 이유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것은 괜찮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싫다는 것과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꼭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대신 상대에게서 기어코 어떤 원인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정말로 벌은 죄를 찾아내고야 만다. 일상적이고 친숙한 상황에서 매우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가정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직장 동료에게서 흔한 일이다. 아이를 실수로 혼내놓고, 아이로부터 잘못을 고백하도록 했던 일이 나만해도 몇 번 있었으니까. 이런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인 것 같다.” ㅡ 출처: http://blog.naver.com/snowclose/220421352392

 

ㅡ 2016년 8월 29일 오후 4시 57분, 권리로의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