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행적 좌파, 그리고 페미니즘

방금 전에 기사 하나 보내면서 메갤, 워마드 이후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대체 페미니즘이 가고자 하던게 어디였냐고. 페미니스트라면서 메갤, 워마드가 가져오는 1950년대 북미의 과격주의와 반여성주의 레토릭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인지부조화를 보면 가슴이 턱 막힌다. 어떻게 1990년대까지만해도 그러지 않았던 한국의 페미니즘이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되려 수십년을 뒤로 퇴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오늘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사회가 퇴행한다며 저주하는 당신이야말로 이들을 따라 퇴행하는 것 아닌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괴물로써 자멸로 향하는 것 이외에 누구와 어떤 연유로 싸워야한단 말인가.

르몽드에 실린 이영희 선생님의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한다. 만약 당신이 페미니스트며, 여성은 물론 모든 이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원한다면,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투쟁해서 이루어낸 오늘의 시계를 뒤로 감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나.

“주디스 버틀러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 둘 사이에 감추어진 계약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 즉 ‘노예에 대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구성된다. 너는 나의 육체이나, 너의 것인 그 육체가 나의 육체라는 것은 내게 알려서는 안 된다’. 따라서 주인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부인은 이중적이다. 우선 주인은 자신의 육체를 부정하며, 탈육화된 욕망으로 남고자 하며, 노예가 자신의 육체로 행하기를 강요한다. 둘째, 노예는 마치 주인을 위해서 행하는 자신의 육체적 노동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활동이라는 듯 주인의 육체로 행동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율적인 행위자로서 행동해야만 한다.
In her reading of the Hegelian dialectics of Lord and Bondsman, Judith Butler focuses on the hidden contract between the two: “the imperative to the bondsman consists in the following formulation: you be my body for me, but do not let me know that the body that you are is my body”.(2) The disavowal on the part of the Lord is thus double: first, the Lord disavows his own body, he postures as a disembodied desire and compels the bondsman to act as his body; secondly, the bondsman has to disavow that he acts merely as the Lord’s body and act as an autonomous agent, as if the bondsman’s bodily laboring for the lord is not imposed on him but is his autonomous activity.” ㅡ 2004년 2월, Cine21에 실린 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3] – <최초에 아버지와 딸이 있었다> 중에서”

(2)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p.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