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식, 권리

“한국 이민자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이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평생 대다수의 일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소수라는 그 개념조차 없습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봤을 뿐 자신들이 소수민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ㅡ 인구통계학자, Leo Estrada

 
독일 유학생들의 네트워크나 내 최근 글에 대한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 스스로의 인식을 생각해보면, 일련의 일들이 다 설명되기는 한다. 그 중 확실한 것 한가지는 한국인들은 대개 우리가 서로 동등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등하지도 같은 위치에 서있지도 않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차별 받지도, 행하지도 않는, 폭력의 고리를 끊는 일에 대해 말하고, 함께 고민해야만 한다. 평등이나 권리는 권력자가 어느날 갑자기 피권력자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 스스로가 주체의식을 갖고, 자신의 권리만큼 다른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는 것 또한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

한국은 공동체 사회라고들 한다. 하지만 여기에 공동체란 없다. 이들의 사회는 특정 권력이나 계층이 집단을 통제하고, 개인이 집단에 속하기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헌신해야만 하는 사회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집단들이 형성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홀롭티시즘은 권력에 동화되어 특정 권력을 위한 복종의 임무를 ‘대의’라는 이름으로 매우 성실히 수행한다. 이 곳에 개인의 주체는 없다.

유럽에서는 나, 개인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규범, 규약, 또는 관습의 형태로 남았다. 하지만, 이 것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또는 통제하는데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전자의 예가 바로 ‘얀테의 규범’이며, 후자는 ‘독일의 관료주의’이다. 후자로 인해 좌절되는 개인들을 보면서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비판하였는데, 그 말이 현재에는 ‘Kafkaesk’라는 단어로 남았다.

“프라하의 한 엔지니어가 런던의 학술 토론에 초청되었다. 그는 런던으로 가 학회에 참석한 후 프라하로 돌아온다. 돌아온 지 몇 시간 후 그는 사무실에서 당 기관지 <루데 프라보>를 읽는다. 거기에는 런던의 학술 대회에 파견되었던 한 체코인 엔지니어가 서방 신문들에 사회당을 비방하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서방 세계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러한 성명과 결부된 비합법적 망명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십여 년의 감옥 살이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그 엔지니어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기사에서 문제가 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오다가 그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녀가 말한다. 맙소사, 당신이 돌아오시다니! 현명하지 못한 처사예요. 당신에 대한 글을 읽었죠?

엔지니어는 비서의 겁에 질린 눈을 보았따. 그는 <루데 프라보>편집장을 찾아간다. 편집장은 미안해하지만, 기사 내용은 내무성에서 보내왔고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엔지니어는 내무성을 찾아간다. 그들은 런던 주재 대사관 비밀 정보원으로부터 이 보고서를 받았다고 말하며 정정 기사를 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엔지니어의 생활은 이제 조용해질 수가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엄중하게 감시당하며, 전화를 도청당하고 길에서는 미행당한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이제 그는 잠조차 잘 수 없다. 그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불법적으로 자신의 조국을 떠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진짜 망명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ㅡ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중에서..

“카프카적이라는 것은
첫째, 보이지 않는 미로의 성격을 가진 권력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카프카의 <성>에서 측량기사 K는 관료들의 착오로, 십 년 전의 초청장을 받고 성에 도착한다. 그의 실존 전체가 하나의 착오이다. 카프카적 세계에서 서류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흡사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서류상 착오의 그림자.

셋째, 벌 받는 자는 자기가 왜 벌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부조리를 감당할 수 없어서 벌 받는 사람은 자기의 고통을 합리화한다. 벌이 잘못을 만드는 것이다. 벌은 죄를 찾아낸다. 카프카의 <심판>에서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발당했는지 모르는 K는 자신의 생애와 과거를 ‘아주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모두’면밀히 검토해보기로 결심한다. 피고가 자신의 죄를 찾는 것이다. <성>에서 아밀리아는 성의 고관으로부터 음란한 편지를 받고 그것을 찢어버린다. 성은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밀리아의 가족을 피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자기 가족을 변호하고자 하지만 누가 선고를 내린지 알 수 없거니와 사실상 선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는 성에다가 딸의 죄를 선고해달라고 청한다. 자비를 구하기 위하여는 먼저 죄인이 되어야 하므로 벌받는 자가 사람들에게 죄를 청하는 것이다. 이렇게 벌은 죄를 찾아낸다.

넷째, 프라하의 엔지니어 이야기나, 카프카의 이야기는 농담 같은 성격을 띤다. 카프카적인 것은 우리를 코믹한 것의 무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것은 비극적인 것을 견딜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것을 알의 상태에서 깨뜨려버린다. 엔지니어는 조국을 잃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모두 웃는다.”

“무서운 것은 카프카적인 것이 전체주의나 관료적인 상황 아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늦잠을 잔 아들로 인해 지나치게 상심하고 화가난 어머니를 대신해 그녀의 아들이 말한다.

“어머니가 심한게 아니에요. 그래요. 제가 늦잠을 잤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나무라시는 것은 더 깊은 이유 때문이에요. 저의 이기주의적인 태도를 꾸짖으시는 겁니다.”

커다란 역사적 사건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매우 일상적이고 더할 수 없이 인간적이며 친숙한 상황을 지배하는 메커니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많이 봤는데, 사람들은 싫어하기로 한 사람에게서는 싫은 이유를 찾아내고야 만다. 그것은 괜찮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싫다는 것과 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가, 꼭 그의 잘못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대신 상대에게서 기어코 어떤 원인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정말로 벌은 죄를 찾아내고야 만다. 일상적이고 친숙한 상황에서 매우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가정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직장 동료에게서 흔한 일이다. 아이를 실수로 혼내놓고, 아이로부터 잘못을 고백하도록 했던 일이 나만해도 몇 번 있었으니까. 이런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인 것 같다.” ㅡ 출처: http://blog.naver.com/snowclose/220421352392

 

ㅡ 2016년 8월 29일 오후 4시 57분, 권리로의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