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 정신분열

 

 

살인범이 정신분열증이란 것을 왜 간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서구에서는 정신질환자, 그 중에서도 특히나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자가 벌인 살인사건에 대한 판례가 많은 편인데, 대개는 살인범이 쾌락을 위해 살인하지 않았다는게 증명되고, 동기가 정신분열 때문이라고 판결나면, 사형은 커녕, 징역도 보내지 않고, 병원에 치료감호 시킨다. 때문에 살인죄에 대해서 아예 무죄판결이 나는 경우도 있다. 대신 수 십년 단위의 치료감호거나, 무기감호를 받는다.

너무 결론 지어놓고 몰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건 정말 나뿐인가?

약 20년 동안의 중증 정신분열증자. 게다가 임의로 치료를 중단하고, 행려병자와 다를바 없이 지내던 살인범. 그 살인범이 경찰에게 진술한 몇 마디. 그 진술을 경찰로부터 전해들은 기자가 쓴 살인범에 대한 정보 몇 줄. 그것만 가지고 바로 여성혐오가 범죄동기라고 진단 내린 서천석씨. 다들 서천석씨 주장만 보고, “전문가가 맞다고 하니까 맞는거다” 식의 주장을 하는데, 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그래, 모두가 저 살인범이 정신분열증자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정신분열증자가 “여자가 날 무시해서”라는 진술 한마디까지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정신분열증자의 말을 전적으로 수용해 여성혐오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정신분열증자의 말을 그대로 납득하기 어렵다. 어떤 정신분열증자가 “이게 다 주님 때문이야!” 라고 한다고해서 우리가 기독교 교회들을 둘러싼 불신과 혐오에 대해 각성을 촉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프로파일러, 오윤성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여성혐오를 너무 강조하는 것이 사건의 본말이 전도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별개로 나는 서천석씨가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정신분열증자에 대한 심리를 하는지 그 새로운 심리기술에 대해 학계에 보고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기술이 한국인 특유의 관심법은 아닌지 의심스럽지만, 그 부분은 서천석씨가 학계에 보고해야겠지.

아무튼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자가 진술한 몇마디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더라도 상대를 향해 무자비한 칼날을 휘두르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정신분열증자의 정신분열이 아닌, 여성혐오가 범행동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아무리 누군가가 혐오스러워도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또한, 모든 정신분열증자가 피해망상 장애에 빠져있다고 해서 살인을 하진 않는다.

+ 공교롭게도 나는 지금 정신병원 불법감금, 강제입원을 다루는 <추적 60분: 7년간의 감금, 나는 미치지 않았다>을 보았다.

 

 

누가 여성을 2등시민으로 만들고 있는가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 같은 자극적인 언사를 하며 ‘여성들을 위한’ 무엇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주장이 미숙한 사람들을 상대로 선동하는 것, 넷-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은 반페미니스트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먼저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동일한 주장을 하는 젠더학자나 페미니스트, 또는 논리적 근거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유사한 것으로는 경찰학, 또는 경찰예방학, 경찰수사학, 경찰범죄예방학에서 부모들의 유아학대에 대한 징후를 찾기위해 잠재적 가해자를 규정하기 위한 연구가 있었을 뿐이고, 다른 일례로는 캘리포니아의 공공교육 캠페인이 알콜을 위시로한 성범죄가 일어나는 바의 화장실과 대중교통센터에 “It’s not sex when she’s wasted, 그녀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다면, 그건 섹스가 아니다”와 “It’s not sex when he changes his mind, 그가 마음을 바꾸었다면, 그건 섹스가 아니다”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경각심을 주는 캠페인이 있었을 뿐. 남성 전체를 가해자로 확증편향 시키는 주장에는 근거나 사례가 없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어떤 연구나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주장들을 뒷받침해야 하는 것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다를바 없는 이런 엉터리 주장을, 어떤 남성들이 계속해서 한다면, 같은 논리로 내가 그들을 ‘잠재적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에도 그들은 감수해야만 한다)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 같은 주장은 실제로 남성운전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운전자들이 미숙한 경우가 두드러진다고 하여, 여성운전자 모두를 ‘김여사’라고 일반화 시켜 조롱하는 것이나 같은 논리이다. 이를테면, 꽃뱀과 같은 범죄 유형처럼 여성범죄자가 남성을 노리는 특정된 범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여성을 꽃뱀으로 상정하는 것이 억지 논리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하는 페미니즘의 본질을 흐리고, 오히려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 시선을 불러모으는 반여성주의적인 주장일 뿐이다.

‘여성들을 위한’ 무엇을 주장하는 것 또한 페미니즘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지난 수 십년 동안 남성과 여성의 동등함을 말해왔다. 따라서 여성이 ‘배려 받아야할 존재’, ‘보호 받아야할 존재’같은 약자화 프레임을 극복해야할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며,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서 인식하도록 남성, 여성 모두에게 이야기 해온 것이다. 여성을 도와야할 대상, 특혜를 주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을 2등시민으로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Lady first”와 같은 과잉친절 같은 맥락에서 근절되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반여성주의적이고, 때로는 악랄한 의도까지 보이는 이런 주장을 근절해야한다고 작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번 사건과 맞물려 정치적 주장이 미숙한 사람들을 상대로 관심을 모으기 위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유감이다. 부디, 사람들을 속이지 말라.

정말로 당신이 여성차별과 혐오에 분노를 한다면, 사람들의 인식 이전에 여성을 약자로, 2등시민으로 규정하는 당신의 인식부터 다시 재고 해보길.

강남역 살인사건, 살인의 동기가 밝혀지기 전 우리가 고민해야할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공개된 정보는 한정 되어있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벌써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렸거나 너무 많은 의견을 낸 상태라 생각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살인범의 정신병력이 드러났고, 여성을 특정했다고 이야기 했다지만, 이것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신병력의 문제인지, 여성혐오라는 사회적 현상으로 이루어진 범죄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정밀하고, 예리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뤄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살인범의 동기가 여성혐오 때문이라면,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해결방안일 수 있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 사건을 둘러싼 우리의 해석은 더욱 끔찍한 길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사회의 벌어지는 일상적인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는 사회전반에서 노력하여야할 지점이다. 그러나 내가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경찰이 발표한 내용중 ‘2008년 여름부터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이래 2008년 수원 모 병원에서 1개월, 2011년 경기 부천 모 병원에서 6개월, 2013년 충남 조치원 모 병원에서 6개월, 지난해 8월부터 올 1월까지 서울 모 병원 6개월 등 4번 입원치료’라는 것이다.

내가 놀란 점은 입원치료 횟수와 기간(너무 잦은 거주지 이전, 불안정한 거주지가 이상한 것은 나뿐인가?). 아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신병원 입원은 보통 2개월로 하고 있으며, 치료를 목적으로한 입원은 대개 3개월을 초과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3차례나 6개월 입원치료를 받을 정도라면 심각한 중증 정신분열환자라는 것이다.
(물론, 입원 최대기간은 법적으로 6개월이지만, 최근 법 개정을 통해 3개월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병원은 감금죄로 처벌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인신구속이나 마찬가지인 폐쇄병동 입원 중, 행려자를 제외한 강제입원이 가족이나 친인척 등의 사적인 과정에서 결정되고, 이의제기 장치가 사실상 없는데, 지자체 심판 위원회가 치료내용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으면서 6개월마다 기계적으로 퇴원이냐 연장이냐를 심사만한다. 이마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퇴원 신청자의 5%만이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기 때문.)

일단 정신분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정신분열은 갑자기 등장한 검색어인 싸이코패스와 완전히 다르다. 정신분열은 기본적으로 망상장애를 갖는데, 이중 피해망상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살인범이 자백한대로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은 확실하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 살인범은 3월말 가출하면서 임의로 치료를 중단한 상태라고 하는 지점에서 나는 정신분열일 가능성이 높다는데 조금 더 기울게 되었다. (정신분열증자는 감정을 느낀다. 그 말은 즉 죄의식 또한 느끼는데. 내 생각에는 살인범이 벌써 죄의식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살인범은 경찰에게 여성을 혐오했음을 말했음에도 기자의 질문에는 일체의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 물론 이 살인범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시킬 논리 또한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정신병과 달리, 정신분열은 완치되는 병이 아니다. 환자가 스스로의 문제를 인지하고,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는다면, 일상생활이 가능하고 아무 문제 없어보이지만, 재발률을 기록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 재발은 거의 확실한 병이다. 투약을 중단할 경우, 1년 후의 재발률은 약 70%에 육박하며, 지속적으로 항정신성약물을 투여 할 때도 30~ 40%의 재발율을 보인다. 하지만, 25~30년의 치료 추적기간 동안의 조사에 따르면 환자의 1/3만이 회복 또는 증상이 소실된 병이고, 그 밖의 환자는 주증상이 지속되고 있거나 여전히 입원치료를 하고 있는 병. 때문에 정신분열증은 보통 333룰로 대변되는데, 전체 환자의 3분의 1은 약물과 상담 치료만으로 일상생활이 가능해지고, 다른 3분의 1은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병원을 주기적으로 들러야만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약조차 듣지 않아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고, 심하면 병원입원조치를 반복해야만 한다.

원인 또한, 선천적, 후천적으로 규명하려 신경정신학계에서 노력하고 있음에도 원인을 유추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실체를 알 수 없는 병이기도 하다. 때문에 지금의 정신분열 약들은 실제로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신체적, 정신적 동기를 떨어트리는 효과를 갖는, 일종의 사회적 감옥에 넣는 수준이라 말하여도 과한 비유라 비난할 수는 없다. 현재 정신분열증은 정부에서 희귀성, 난치질환으로 등록하여, 특별관리대상으로 두고 있는 그런 질병.

이택광 선생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미국 버지니텍 총기난사 사건의 조승희도 “여자가 나를 무시했다”라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희생자들은 남녀가 따로 없었다. (정신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는 조승희에 대해서 신경정신학자들은 편집증적 정신분열일 것이라 의견을 모았다) 살인범에게 칼이 아니라 총이 범인에게 들려 있었다면, 조승희와 마찬가지로 힘 없는 여성 한 명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차별 살인을 벌였을지 모른다.

때문에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여성혐오만으로’ 범행동기를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증환자가 망상장애, 피해망상을 보이며, “링컨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환자의 정신분열이 링컨을 말미암아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존파가 부자들을 원망하며, 살인을 하고 인육을 먹었을 때, 우리는 부자들이 밤길을 조심해야할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정상적이지 않은 분노표출을 하려는 사람들을 사회적 불만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격리하려하지 않았고, 이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할 방법을 전사회적으로 고민했다. 이외에도.. 정신분열은 재발 1~ 2주 전에는 재발징후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경찰수사과정 이외에도 신경정신학자가 이 부분에 대한 심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제 한국과 일본의 문화, 정치에 대해서, 베를린서 조직되는 세월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참여하는 독일 친구와 이야기를 했는데,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로만 보기 어려운 불편한 공백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 즉, 피해의식과 피해망상,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된 사건들이 급격히 압축성장 한 나라에서 두드러진다는 것인데, 일본은 80년대, 90년대부터 겪고 있으며, 아직 해결 방법을 못 찾았고, 지금 홍콩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이제 그런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존파를 포함할 수 있지만, 빈도 측면에서 2000년 이후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의 개인주의적인 사회와 달리 집단주의적인 사회다. 이 사회가 행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 한국의 집단주의 사회가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있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극단적으로 이번 살인사건처럼 타인을 향한 잘못된 분노를 터트리는 비극이 되고, 또다른 극단으로는 일개 연예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몰랐다며, 대마초를 피웠다며, 연애를 숨겼다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내밀고, 질타하고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1년 365일, 집단주의의 광끼, 분노의 카니발. 타인의 잘못을 찾아 광장에 매달고 전시하고, 비난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책임이냐를 강박적으로, 한편으로는 도착증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살인범의 동기여부가 무엇이던, 이번 일은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여성차별과 혐오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계기가 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를 분노의 카니발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현실을 인지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단순히 전시되는 것만으로는 바뀌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변화의 동기가 주어지고, 함께 사는 공동체라는 인식이 생기길 바라본다. 범죄와 차별, 혐오에 대한 이 분노가 대립항을 만들거나 방향을 잃지 않길. (그녀가 겪었을 극한의 공포를 생각하니 손발이 떨리고, 잠을 이룰 수가 없다)

ㅡ Am Tag, als Conny Kramer starb 중.. 일부…..

Am Tag, als Conny Kramer starb
코니 크라머가 죽던, 그 날
Und alle Glocken klangen
모든 종이 울려요
Am Tag, als Conny Kramer starb
코니 크라머가 죽던, 그 날
Und alle Freunde weinten um ihn
그리고 모든 친구들이 그를 위해 울었죠
Das war ein schwerer Tag
정말 힘든 날이었어요
Weil in mir eine Welt zerbrach
왜냐면 내 안의 세계가 부서졌거든요

Beim letzten Mal sagte er
마지막에 그는 말했어요
“Nun kann ich den Himmel sehen”
“마침내 지금 하늘을 볼 수 있어”
Ich schrie ihn an: “Oh komm zurück!”
내가 그에게: “오 돌아와!”라고 외쳤죠
Er konnte es nicht mehr verstehen
그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Ich hatte nicht einmal mehr Tränen
나는 더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었죠
Ich hatte alles verloren, was ich hab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어요
Das Leben geht einfach weiter
삶은 계속 될거에요
Mir bleiben nur noch die Blumen auf seinem Grab
나는 그의 무덤 위에 있는 꽃들과 머무를 뿐이죠

x. 불특정 다수가 공유하고, 제게 욕설이나 협박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 불편해서 부득이하게 포스팅에 음악이나 비디오 링크를 포함하여 포스팅하고 있습니다. 공유를 원하시면, 내용을 복사하시면 되고, 태그만 따로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ㅡ 본 글은 살인범의 동기가 밝혀지기 이전에 작성된 글 입니다.

ㅡ 본 글은 직썰에도 편집되어 실렸습니다.

정어리 – 108

제가 여기에 말을 얹어도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마디 얹어봅니다. Andrew Jinwoo Kim 님이 이야기 하시는 것의 기준점은 동서양으로 나누는 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기준점으로 좌파 스펙트럼 안에서 나누자면, 구좌파와 신좌파로 구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신좌파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영화를 보다가 혼자 곧잘 울고,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 앞에 항의하는 평균이상의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때문에 감정적인 판단을 유보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 유효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그 지점은 제외 시켜놓더라도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요 며칠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정리 중이었는데, 짧게 이야기를 이어볼까 합니다. 제 입으로 스스로 얼마나 활동해왔다고 말하기는 우습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또 친구들과 연대활동을 한지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폭력과 차별에 대해,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해 발을 구르고, 끅끅 소리를 내며, 가슴을 쿵쿵 내려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과 향유하고자 하던 예술가들은 굶어죽거나 말라비틀어져 사라지고, 함께 사유하고자 했던 활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 활동가들은 누군가로부터 직접적으로 목숨을 끊으라 협박 당하지 않았는데도, 왜 활동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사회로부터, 그리고 스스로부터 각오를 강요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페미니즘을 둘러싼 여러 갈등에서, 또 세월호를 통해서, 이 밖에 것들을 통해서 이제 정치활동에 눈을 뜬 사람들이 pc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처음 활동을 시작하면서 무엇이 옳은 일일까 고민해왔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옳은 일만하고 살 수 없음에도, 서로를 재고,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또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이 글 읽으시는 분들은 최근 관심을 두는 논쟁들을 지켜보면서 일상 생활에 지장이 될만큼 피로감을 느끼신 적 없으신가요? 아니면, 일상적으로 자신이 해야하는 일에 영향을 받거나 스트레스, 불면, 두통 같은 영향을 느끼신 적 없으신가요? 쟁점이 되는 인물들 이외에 논쟁 이상으로 누구를 적대적으로 증오하는 느낌을 갖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리고, 오늘의 한국 사회는 일개 연예인에게 역사적 사실을 몰랐다며, 대마초를 피웠다며, 연애를 숨겼다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며,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내밀고, 질타하고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집단주의 사회는 개인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습니다. 타인의 잘못을 찾아 광장에 매달고 전시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가 아니라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지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모두 이야기할 수 없지만, 저는 위에 열거한 것들이 위험한 징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으로부터 신체절명의 아포리즘을 봅니다. 자율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전에, 스스로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함에도, 스스로에게는 속박을, 그리고 타인에게는 자유를 외치고 있지 않는지를 잊지 말라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제 주장과 달라 충돌했던 분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절망의 아포리아 속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같지만, 아포리즘을 향해 가는 방법론의 충돌이었다 생각합니다.

저는 제 감정을 해소하거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이들을 무너트리고, 부숴버리는데 열중하기보다 즐기며, 변화를 모색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공감, 혹은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와 덧붙이자면, 감수성 트레이닝이 있지만, 이에 대한 효과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누가 누구의 감수성이 옳다, 그르다를 가르치고, 지적하면서 도덕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감수성 트레이닝은 기술적으로 심리적 기술, 세뇌를 사용한 비윤리및 균등한 기회를 뺏는 다양성 교육에도 상반된 내용이라 비판 받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한국에서는 인권위에서 인권 감수성 트레이닝을 주장합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금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살인범을 잡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정부-경찰은 사후처벌-전시에만 신경을 쓰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원인을 찾아 예방하는 일에 손을 놓고, 민간인들이 하고 있다는 것말이죠. 세월호부터 시작해서 모든게 정부가 존재하는지 다시 물어야할 정도..

 

ㅡ 2016년 5월 18일, 오전 8시 17분 앤드류님께..

정어리 – 107

 

 

베를린의 노동절과 Air BnB,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를 며칠 째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알게된 모 언론사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도 준비하고 있다니.. 24~ 34문단 정도의 기사를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기사는 더 길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야기 드렸다.

어제 기자님이 공유하시며 남기신 멘트에 이의를 제기했고, 상당한 설전?! 아닌 설전이 오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양해를 구하신다는 메세지를 보내시곤 나를 그냥 차단해버리셨다.

준비중인 페미니즘 기사를 잠깐 이야기 해보자면, 그 기사는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밝힐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아는 언론에서 처음에 약속했던 조건, 기획기사와 달리 “독자기고 형식으로 기고하면 어떻겠나” 하고 갑자기 말을 바꾸셔서 아무 답변 안 드렸다. 말은 않으셨지만, 의도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예상컨대 편집부에서… 이유도 알겠지만, 생략….. (…)

차단하신 기자님이나 페미니즘 기획 기사를 구두로 약속한 언론사나 대체 왜 본인들 의견과 다른 주장을 하면,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정말 사람들 앞에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나는 비판일색도 아니었고, 오류를 바로 잡고, 당신들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싣는 논리와 사실들을 가져왔을 뿐인데.

아마도 내가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어서겠지. 어제는 리 선생님이 독일 관용어 ‘Schlenker’, ‘괜히 여기 저기 (해찰하고) 짧은 길 냅두고 일부러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주셨다. 허공에 떠다니는 것들까지 채집해서 가슴에 얹고 사는, 나는 그렇게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라서일까.

아포리아, 아포리즘.

모든게 무의미하지만, 절망을 깨닫는 것은 초월이니까요.

루쉰 선생은 길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한 명, 두 명, 열 명, 그렇게 사람들이 걸어 길이 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절망을 피하려 말아요.

 

 

 

ㅡ 2016년 5월 8일, 오전 7시 48분, 이 불면도 곧 사라질거야, 찾아왔을 때처럼.

정어리 – 106

이 고요함이 슬픈걸까, 행복한걸까.
 
지난 밤의 공포영화를 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스릴러라는 이름으로 옆집 사람이 앞집 사람의 머릴 짖이기길 즐기는데.
ㅡ 2016년 5월 5일, 오전 6시 24분, 창문 너머 집에서 번쩍이는 빛을 바라보다..

정어리 – 105

anxiety is so silence, and fear doesn’t cry.

그래, 놈들아ㅡ

불안은 고요하고, 공포는 울지 않는다.

 

 

ㅡ 2016년 5월 5일, 오전 5시 29분

정어리 – 104

 

Yeah, I heard that ‘Mehr Politik, weniger Besucher’ around MyFest. That seems like a last day of MyFest. Last few years, I enjoyed well sometime within’. But I know that part of enjoyment on MyFest is not for Mayday. It’s like a Pseudo-happiness as Carnival of Every single years.

I would to drop some short writes about history of MyFest, why that’s not longer, and what happened both of cities.. Berlin and Seoul. (Yes, especially Gentrification..) And what we should to do both of cities.. Suddenly I thought this song is right for this moment. I will listen this song whole night until Sun rises again.

Against Me – Searching for a former clarity

No the doctors didn’t tell you,
어떤 의사들도 네게 말하지 않았지,
that you were dying.
네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They just collected their money,
그들은 그저 그들의 돈을 챙기느라 바빴고,
And sent you on your way.
죽어가는 널 내버려뒀어.
But you knew all along,
하지만 넌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went on pretending nothing was wrong,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은 척 하고,
you said “I will keep my focus, till the end”.
“나는 마지막까지 내 길을 갈테야” 라 했지.

And in the journal you kept,
그리고 네가 붙잡은 신문지 뭉치,
by the side of your bed.
네 침대 옆에 있던.
You wrote nightly in aspiration,
넌 밤새도록 열망 속에서
of developing as an author.
어느 작가처럼 성장시키며 적어내렸지.
Confessing childhood secrets,
어린 시절의 비밀들을 고백하면서
of dressing up in women’s clothes,
여자 옷들을 입은 일들,
Compulsions you never knew the reasons to,
네가 절대 알지 못했던 충동에 대한 이유들;

Well everyone, you ever meet or love,
그래 모두들, 너는 지금까지 만나거나, 사랑하는 일들,
be just relationship based on a false presumption,
그 일들은 단지 잘못된 가정에 기초한 관계일 뿐이야.
despite everyone, you ever meet or love,
모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지금까지 만나거나 끝까지 사랑하길,
in the end, will you be all alone?
너는 혼자 되고 싶은거니?

As the disease spreads slowly through your body,
질병이 서서히 네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pumped by your heart to the tips of your arms and your legs,
너의 심장으로부터 너의 팔과 다리 끝까지 뿜어져 나가고,
your greatest fear was that your mind wouldn’t last,
너의 가장 큰 공포는 네가 뜻한 바가 끝이 아니길 바라는 것이었고,
your coherency and alertness would be the first things to fade,
네 일관성과 조심성은 사라질 제일 첫번째 것이 될 것이고,
as your hair thinned, as the weight fell off, as your teeth blackened,
가늘어진 네 머리칼처럼, 줄어든 몸무게처럼, 검게 퇴색된 치아처럼
as the lesions spotted your skin,
생리적 장애가 네 피부에서 발견되고,
as you fell to your knees in the center of the stage,
네가 무대 한복판에서 풀썩 주저 앉는 것처럼,
as you offered witness to mortality in exchange for the ticket price,
네가 제안 받은 피할수 없는 죽음의 증인이된 것처럼,
as the lights blended into the continuing noise,
빛들이 지속적인 소음 속에 섞여버린 것처럼,
as all hope was finally lost.
모든 희망들을 결국에 잃어버린 것들처럼.
Adrenaline carried one last thought to fruition.
아드레날린은 결실을 위한 마지막을 가져왔어.

Let this be the end.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자.
Let this be the last song.
이 곡이 마지막 곡이 되도록하자.
Let this be the end.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자.
Let all be forgiven.
모두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ㅡ 2016년 4월 28일, 이른 저녁, 오후 10시 37분..

정어리 – 103

“Wer einen Freund sucht ohne Fehler, bleibt ohne Freund,
실수 없이 친구를 찾는 이에게는 친구가 남지 않는다”

 

 

 

ㅡ 2016년 4월 28일, 술이 덜 깬 오전 12시 7분, 리선생님이 주신 빵 봉투를 벽에 붙이며..

정어리 – 102

so beautiful world.. people destroying the bottle on bike road.. and speak loud about financial cricis in europe. this primates are also nothing different with any other ape.. well, enjoy your crisis….. that belongs to you.

감기 기운에 육개장, 와인의 호사를 누리던 것도 잠시, 인간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ㅡ 2016년 4월 20일, 저녁 10시 반, 술을 시작하러 나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