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노동절과 Air BnB,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를 며칠 째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알게된 모 언론사 기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도 준비하고 있다니.. 24~ 34문단 정도의 기사를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내가 생각하는 기사는 더 길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야기 드렸다.
어제 기자님이 공유하시며 남기신 멘트에 이의를 제기했고, 상당한 설전?! 아닌 설전이 오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양해를 구하신다는 메세지를 보내시곤 나를 그냥 차단해버리셨다.
준비중인 페미니즘 기사를 잠깐 이야기 해보자면, 그 기사는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 밝힐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아는 언론에서 처음에 약속했던 조건, 기획기사와 달리 “독자기고 형식으로 기고하면 어떻겠나” 하고 갑자기 말을 바꾸셔서 아무 답변 안 드렸다. 말은 않으셨지만, 의도가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예상컨대 편집부에서… 이유도 알겠지만, 생략….. (…)
차단하신 기자님이나 페미니즘 기획 기사를 구두로 약속한 언론사나 대체 왜 본인들 의견과 다른 주장을 하면, 눈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정말 사람들 앞에서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나는 비판일색도 아니었고, 오류를 바로 잡고, 당신들의 주장에 더욱 힘을 싣는 논리와 사실들을 가져왔을 뿐인데.
아마도 내가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어서겠지. 어제는 리 선생님이 독일 관용어 ‘Schlenker’, ‘괜히 여기 저기 (해찰하고) 짧은 길 냅두고 일부러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주셨다. 허공에 떠다니는 것들까지 채집해서 가슴에 얹고 사는, 나는 그렇게 유별나게 피곤한 사람이라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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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 아포리즘.
모든게 무의미하지만, 절망을 깨닫는 것은 초월이니까요.
루쉰 선생은 길이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한 명, 두 명, 열 명, 그렇게 사람들이 걸어 길이 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절망을 피하려 말아요.
ㅡ 2016년 5월 8일, 오전 7시 48분, 이 불면도 곧 사라질거야, 찾아왔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