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Gaspar Noé의 LOVE

 

내용을 스토리, 비쥬얼, 음악 모두 스포일링 하고 싶지않은 영화라 엉터리 리뷰지만, 그래도 나누어 봅니다.

 

 

x. Gaspar Noé의 <LOVE>
(독일 트레일러: https://www.youtube.com/watch?v=PrgGTQNOB6Q)

며칠 전, 논란이 되고 있는 가스파 노에의 영화 <LOVE>를 보았다. 자랑할게 좀 있다면, 한국에서는 절대 상영될 수 없는 수준의 영화. 왜냐면 2시간 20분 내내 대부분이 섹스 씬인데, 실제 정사이며, 성기의 디테일이 굉장히 살아있다. 한국은 물론, 북미 정서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유럽에서나 이해가될 수준. 한국에서 개봉한다면 19금은 물론이거니와 모조리 삭제되어 1시간 정도 밖에 상영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독일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 처음으로 본 3D영화였는데, 빌어먹을 3D안경이 작아서 보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자막이 없는 독어 더빙이었는데, 섹스 씬이 하도 많아서일까, 아니면 대화가 쉬워서일까, 90퍼센트 이상 무리 없이 이해가 가능했다.

쓰리썸으로 시작하는 초반부의 섹스 씬들, 그리고 특히나 세 남녀의 혀가 닿는 씬은 굉장히 좋았는데, 뒤로 가면서 늘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갈수록 섹스 씬들이 지루해진다.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면서 내용 전개는 단조로워서 영상미와 음악에만 치중한.. 아쉬운 느낌.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ㅇㅇ화 섹스 씬들이 고루하므로 나는 섹스 씬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 LOVE의 초반부의 섹스 씬은 결코 상업 포르노처럼 같은 저렴한 느낌이 아니면서 동시에 포르노보다 훨씬 디테일있고, 자극적이다. 지금까지 본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섹스 씬이랄까. 헤도니스트에게 추천하는 영화.

며칠 전, 논란이 되고 있는 가스파 노에의 영화 <LOVE>를 보았다. 자랑할게 좀 있다면, 한국에서는 절대 상영될 수 없는 수준의 영화. 왜냐면 2시간 20분 내내 대부분이 섹스 씬인데, 실제 정사이며, 성기의 디테일이 굉장히 살아있다. 한국은 물론, 북미 정서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유럽에서나 이해가될 수준. 한국에서 개봉한다면 19금은 물론이거니와 모조리 삭제되어 1시간 정도 밖에 상영되지 않을 것 같다.

사실 독일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 처음으로 본 3D영화였는데, 빌어먹을 3D안경이 작아서 보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자막이 없는 독어 더빙이었는데, 섹스 씬이 하도 많아서일까, 아니면 대화가 쉬워서일까, 90퍼센트 이상 무리 없이 이해가 가능했다.

쓰리썸으로 시작하는 초반부의 섹스 씬들, 그리고 특히나 세 남녀의 혀가 닿는 씬은 굉장히 좋았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단조로운 전개의 느낌과 함께하는 섹스 씬들, 때문에 영상미와 음악이 이를 커버.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ㅇㅇ화 섹스 씬들이 고루하므로 나는 섹스 씬을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인데, LOVE의 섹스 씬, 특히나 초반부의 섹스 씬은 상업 포르노의 저렴함은 찾아볼 수 없고, 동시에 포르노 보다 더 디테일하며, 자극적이다. 막판 전개의 지리멸렬함에 아쉽지만, 헤도니스트들에게 추천하는 영화.

확증편향, 다양성, 소수자, 시위, 좌파, 문화담론, 마이페스트

x. 확증편향

한국에서는 사람의 한 단면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어떤 면과 대치되면, 그 사람의 모든 면을 적대시한다. 갈등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공존의 방법을 찾기보다 파괴해버리는데 능하다. 누구나 작은 부조리를 갖을 수 있고, 그 부조리의 주체는 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부조리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는 순간 자신 또한 부조리의 주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x. 한국과 같이 다양성이 없는 사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일.

그러한 일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일로는 가치비판을 하는 개인에 대한 집단의 인격살인이다. 이런 일들은 작은 사회일수록 더욱 심각해지는데, 운동가, 좌파, 혹은 진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는 더욱 작기 때문에 마이너 집단 안에서의 린치는 보다 강도가 높다. 집단 내의 공공 선을 반영하는 규율이 권력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그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비단 정치로 하여금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적인 모욕과 이쟈스민 의원에게 인종차별적 모욕을 쏟아내는 좌파 아재들 뿐만 아니라 바로 며칠 전의 메갤 내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다름을 인정하자고 수시로 말하는 좌파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수시로 행해지는 일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다양성이 없는 곳에서 마이너, 펑크로 살아가면, 외모, 취향, 정치성향은 물론 반집단주의적 삶의 태도 등의 이유로 하여금 집단주의의 폭력과 차별은 일상적으로 만나게 된다. 반면 독일에 와서 가장 편한 것은 교수라던가 관공서를 찾는다고해서 나의 정체성을 숨길 필요가 다는 것, 아니 심지어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 대해 존중을 받기까지도.

x. 메갤의 성소수자 때리기.

짧게 잘라 이야기 하자면, 지금까지의 엉터리같은 일들을 차치하더라도 이번과 같은 메갤의 성소수자에 대한 조롱을 보면, 미국의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트랜스젠더들의 여자화장실 사용을 반대할 것이 뻔하다. 페미니즘이 80년대 들어 녹색운동, 성소수자운동과 함께 약자와 연대한 것을 모조리 부정하고, ‘권리투쟁’이 아닌 본인들의 ‘권력투쟁’이 되고 있다. 그것이 종전에 메갤에서 심심찮게 보였던, 남성페미니스트 부정, 남성혐오 등과 맥락을 같이한다.

x. 시위, 좌파 문화 담론.

며칠 전, 시위 문화를 꼬집는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는 동의했고, 누구는 힐난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투쟁방식이 경직되고, 오래된건 사실이다. 독일처럼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을 이야기 해보자하면, 독일 시위대가 브레히트 작사, 한스 아이슬러 노래의 ‘Der heimliche Aufmarsch’ 같은걸 부르지 않은지는 오래됐다. (가사및 비디오:http://goo.gl/KGaThQ)

지금 독일의 시위들은 투석전과 화염병도 등장하지만, 한편에서는 테크노, 힙합, 펑크, 포크 등의 음악이 울려퍼지며 행진하기도 한다. 반면에 한국의 좌파운동이 아직도 오래된 텍스트, 경직된 구호에 집착하는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오늘, ‘민중’이란 말이 딱딱하고, 후지게 들리는 것도, 우리에게는 민중 말고는 다른 이름으로 각자를 호명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철의 노동자, 민중의 노래, 비정규직철폐가, 농민가 등등을 좋아한다고 해서 지금 젊은이들이 ‘오직 민중가요’만을 시위에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취향과 관계 없이 후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민중 부르짖으면서도 화염병이나 벽돌을 던지지 못하는데, 또 다시 독일을 이야기 해볼까하면, 종종 경찰차를 불태우기도하고, 2009년 등록금 투쟁에서는 25만명의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철도조차 점거를 했다. 노동절에는 으레 은행유리창도 까부수는데, 그러면서도 바로 근처에서는 펑크, 힙합 공연 등과 테크노 등이 펼쳐진다.

나는 사실 쥐벽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왜냐면, 쥐벽서가 G20에 대한 조롱을 담고는 있지만, 외모에 대한 비하가 예술로 둔갑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시절의 반전 시위의 행진에서 나와 친구들은 스텐실을 하다 제지당했다. 처음에는 사복경찰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더 깜짝 놀란 것은 경찰이 아니라 시위대였다. 순간 욱했는데, 참았다. 그러다가 쥐벽서가 이슈화 되면서 한국의 좌파운동이 얼마나 문화담론과 거리가 먼지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민중의 노래를 부르면서. 대체 그 민중에는 내가 있을 수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에서 여러 시위를 보고, 또 참여하면서 생각을 달리갖게 되었다.

노동절 경찰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된 베를린의 마이페스트(비디오:https://www.youtube.com/watch?v=SaXSJ6xk8Fc)는 공식적으론 십여개의 스테이지이지만, 주변의 운동 거점 지역들이 만드는 자발적인 스테이지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생각해봐도 40~ 50여개는 족히된다. 이런 스테이지들에서는 Fat Wreck Chords 같이 세계적인 레이블의 밴드들이나 디제이들이 와서 무료로 공연을 한다.

물론 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이페스트가 투쟁을 가볍게 만든다는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불과 1~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화염병과 투석전이 난무하고, 으레 은행 유리창이 파손되곤 한다. 바로 옆에서 테크노 파티가 벌어지면서, 또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기도 한다.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I-2CPLZCxDo)

하지만, 마이페스트 이후, 경찰의 진압 방식이 언론에 뭇매를 맞아온게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 이벤트가 경찰폭력진압을 저지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라는건 베를린 시 전체가 증명한다.

10년 전쯤 되었을까, 이런 기획을 친구들과 하고 싶어 이야기중이었는데, 시위를 진중치 못하게 한다고 비난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서울에서 다시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다.

마이페스트에 동기를 부여한 99년, Atari Teenage Riot이 99년 WTO반대 공연(https://www.youtube.com/watch?v=Y2NY5bGBFKg)을 한 것도 유명하다. 공연 중에 폭력적인 진압이 자행되었으며, 멤버 전원이 연행되었지만, 이후로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며 언론의 뭇매를 맞고,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진압 방식으로 선회하게 된다. ATR은 이에 그치지 않고, 확장하여 1년에 한번씩 드레스덴에서 있는 네오나치 결집 데모 건너편에서 카운터 데모및 공연을 조직하기도 한다. 네오나치랑 안티파가 뒤엉켜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이 개입하는데, 결국 네오나치들의 행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다.

작년 나도 참여했던 시위의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u8ZdYIEx5hs)에서 보이는 것처럼 80여명의 네오나치들이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결집하는 것을 경찰이 막지 못했기 때문에 6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고, 영상에는 충돌하는 장면뿐이지만, 사실 이 날 나는 네오나치를 구경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안티파-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해 디제잉 하는 차량들을 중심으로 수 천명의 시민들이 다양하고 폭넓게 참여한 무척 평화로운 카운터 데모였다. 이러한 하위문화들을 통해 수 만명이 모여 저항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젊은 청년 좌파 문화가 없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모든 주류문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좌파 청년들이 대체로 성상품화된 아이돌 음악을 듣는다는게 나로서는 실망이 크다. 또한 기성패션과 같은 주류문화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으면서 ‘반자본주의’ 같은 구호를 외치고, 다양성을 요구하는 것은 공허하게만 보인다.

노동당 당수 코빈이 당선 직후, 적기가를 불러도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영국엔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위시로한 펑크, 하드코어, 테크노 등의 하위문화가 넘치고 넘친다는 것 아닐까.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직된 좌파운동을 한두번 경험한게 아니다. 한번은 The Explode의 곡이 Deadly Taekwondo Boy와 함께 plsong.com에 올랐을 때, 웹사이트 생긴 이래로 유래가 없을 정도의 시끌한 토론 게시판이 생기더니, 펑크음악이 너무 폭력적이라면서 결국 음악은 삭제 되었다. 이게 10년 전쯤 일이다.

하위문화를 위시로한 문화담론이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감 정도로 취급되는 것을 보면, 사실 그 문화담론이 없었으면, 브레히트도 없었고, 한스아이슬러도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좌파운동이 문화적으로 후지다는데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이건 내가 최도은의 곡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시위에서 전농아저씨들이랑 막걸리 마시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랑은 별개의 이야기다. 물론 지금은 별 미친놈들이 시위에서 술 마시지 말라며, 술병을 강제로 채가기도 하는데.. 그거 다 별개로 후지긴 진짜 후졌다. 명박 산성을 넘겠다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외치면서, 멱살 잡고 강제로 끌어내리는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외치는 다양성은 대체 무얼까?

영화감독, 윤성호가 그랬다. “이런 사람들이랑 어떻게 혁명을 해!”

메갤에 대한 단상, 퇴행, 공동 선

x. 요즘 친구들과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늘면서, 사람들이 몇 가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 페미니스트 여성이라고 해서 페미니스트 남성만을 만나야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사고는 단지 사람을 믿지 않겠다며, 페미니즘을 고립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 하나의 공동 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x. 최근 들어 메갤에서의 어떤 의견, 이를테면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라던가 더 나아가서 ‘남성은 모두 잠재적 가해자’, 심지어 ‘남성은 전부 적’ 같은 것들이 오래된 것들을 상기 시킨다. 캐나다 친구에게 “양키 고 홈”이라고 외치던 사람들, 그리고 반자본주의, 민중메탈을 자처하던 이스크라 같은 밴드를 두고, 미제의 음악이라며 멸시하던 NL들이 생각난다. 퇴행.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벽을 만들고선 그 벽을 향해 왜 무너지지 않느냐며 구원을 구하며, 무릎 꿇고, 눈물을 쏟으며 기도 하는 사람들. 아무도 당신을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x. Urban Shamanism, 5년 만에 새로운 전시를 결정했다. 지난 작업 ‘앞, 뒤 없는 세계’를 확장시키기도 하겠지만, 나는 정치, 예술, 문화, 철학이 현대 사회의 주술과 종교적 제의라는 관점으로 이번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이를테면 베를린, 노동절에는 크로이쯔베르그, 노이쾰른, 그리고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에 수 십개의 펑크, 힙합, 테크노 오픈 에어 스테이지가 열린다. 그리고 수 만명의 사람들이 이 음악들을 중심으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환각에 빠지기도 하며, 불과 1~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시위대가 화염병과 투석전으로 경찰들과 격렬한 대치를 하며 쟁의를 벌인다. 단지 하루동안의 사육제에 불과해보일지 모르는 이 일들을 나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종교적 제의라고 생각한다. 은행에 벽돌이 던져지고, 유리창이 파손된다 한들 군대가 투입되지 않고, 경찰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종교적 제의이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의 목적도 실제 은행-자본의 붕괴가 아니며,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목적도 은행-자본을 붕괴시키려는 범죄자 검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밤, 베를린의 수 많은 클럽에서 열리는 테크노, 락, 메탈, 재즈, 블루스 공연들도 마찬가지의 종교적 제의이다. 이 제의들은 다양한 의견을 가진 열린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 선’을 제시한다.

x.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절대 정의 또한 없다. 나의 정의가 어떤 이에게는 악일 수 있으면, 그 어떤이의 진실된 정의가 나에게 악일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규정하길 지양하고, 우리 ‘공동체의 공동 선(the common good)’을 향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몰아내려고 해서는 이 싸움을 끝낼 수 없어, 끝없는 전쟁만이 우릴 기다릴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한다. 전쟁은 언제나 정의를 찾아 시작 되었고, 희생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다. 독일 아나키스트들이 말하던 ’War starts here, Let’s stop it here’가 같은 맥락에 읽힐 수 있다. 전쟁을 종식시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 또한 폭력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어떤 관점에서 ‘만들어진 정의’를 추구하기 하지않고, 공동 선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이 된다.

x. Gesture와 Act를 구분하지 못하고, 진담과 농담의 경계를 가리기 어렵다면, 이토록 어렵게 사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x. 뭔가를 시작하면,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외롭다는 느낌이 멀어지면서 사소한 발걸음조차 힘차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고립감이 도리어 스스로를 냉소적으로 만든다. 그 가운데 우리가 해야할 것은 동요하지 않고, 꾸준히 그 가치를 지켜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만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얻는 것은 작은 신문의 기사뿐이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너 없이 세상은 돌아간다. 최고의 복수는 살아 남아서 증명 하는 것이다.”는 에디 베더의 말에 매번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을 희생시켜, 순교시켜 얻을 수 있는 세상은 없다. 사람들을 돕고 싶다면 스스로부터 행복해져야한다. 질투하지 않아야한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 당신의 지금이 미래가 될 것이다. 비젼, 네가 슬퍼하면, 미래 또한 슬퍼진다. 그러니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최근 베를린 소식

x. 그제 프리드리히샤인의 리가어슈트라쎄, 리빅슈트라쎄 전체가 경찰들의 과잉대응으로 난리였다. 리가우어슈트라쎄는 2000년대 초반까지 전부 스쾃이었지만, 재개발 때문에 이제 몇 채의 스쾃만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가어슈트라쎄는 명실공히 프리드리히샤인의 펑크-아나키스트-안티파들의 주요 거점이다. 그걸 경찰이 노리고 고립 시키기위해 길 전체를 통제해 모든 사람들을 검문했으며, 이에 항의하는 사람들과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화염병과 투석전이 있었다. 경찰들은 본인들의 무리한 단속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이 충돌과 무관한 사람이 체포되었다. 설사 그가 잘못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무리한 단속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덮기위해 사건과 이해가 다른 사람을 부당한 방법으로 검문하고 연관지으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 되었기 때문에 많은 지역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심지어 베를린 메트로, BVG가 런던의 한 회사에게 잘못된 투자로 큰 돈을 잃은 것을 충당하기 위해 내년 1월 1일부터 요금을 올릴 계획에 이제는 무리한 표검사, 심지어 며칠 전에는 헤르만플랏쯔에서 수십명의 검표원들이 모든 승객을 내리게 해서 검사하는 일이 있었던 것을 상기해볼 때, 지금 치안당국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매우 분명해진다. 법이란 것은 사회의 기본규약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목적은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공동체가 불안해할만큼 법을 강제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x. 집 근처 1889년 건설되었다가 버려진 유리공장이 곧 철거 된다고 한다. 법정분쟁으로 한동안 비어져 있어, 언더그라운드 클럽 역할을 하던 이 공장은 칼 맑스가 종종 슈프레 강을 산책할 때 들렀던 곳이기도 하며, 공장주가 노동자들의 집 임대료를 70퍼센트까지 지원하기도 했던 곳이다. 그런 역사가 곧 사라진다. 때문에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의 친구들 사, 오백명이 모여 파티를 만들었다. 낮부터 2개의 스테이지에서 재즈밴드가 연주, 퍼포먼스 아트,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오픈 마이크, 스윙, 서프 펑크, 그리고 밤에는 딥테크하우스와 해피 하드테크노가 공장을 전체를 뒤흔들었다. 입장료는 내고 싶은 만큼이지만, 다들 동전을 한꾸러미씩 내놓았다. 수익은 당연히 지역 난민운동에 사용될 것이다. 역사가 기록으로, 그리고 기억의 저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 격정적이었던 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ㅡ 2015년 11월 29일 작성됨

이의제기, 조서연의 여성도 군대가라는 심리에 부쳐..

본글: [정리뉴스][페미니즘이 뭐길래]2회 여군 예능으로 본 “여자도 군대 가라”는 심리

조서연 선생님의 글에 대체로 동의합니다만, 남성의 강제징집, 군복무로 인한 불평등에 대해서는 조금도 서술하지 않으셨군요. 국방부는 여성이 강제징집 능력도 없고, 추진한다하더라도 ‘신체적 차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징병을 반대해 역차별 할 것이기 때문에 여성의 징병제는 조금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오히려 현실화가 되면, 남성들, 국방부가 반대할 것입니다.

선생님, 여성은 사회 공동체의 일부가 아닙니까? 남성들 중 일부는 개인적 사유로 그에 맞는 기준으로 공익근무, 병역특례, 산업기능요원으로 배치되거나 장애의 경중에 따라 면제가 되고 있는데, ‘한국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는 인간’이란 말입니까?

군대에 대한 사회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다분히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들이 왜 여성복무를 주장할까요? 강제징집으로 인해 2년이나 신체가 구속되는 차별과 노동착취를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군복무가 부당하다고 이야기 하시려면 적어도 반전주의적인 태도로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노동력이 국방의 의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착취되고 있음을 함께 목소리 내야합니다. 여성징집은 이유도 없이 그냥 안된다뇨. 이를 빼놓고서 군대로 하여금 한국여성이 2등시민이 된다고 하시는 말씀은 앞뒤가 맞지도 않거니와 페미니즘 논리와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추가된 댓글 일부입니다.

 

+ 1세대 페미니즘 참고해보세요. 왜 여성들이 전선으로 갔는지. 후방이 아닌 전방으로 자원을 했는지. 여성을 약하다는 이유로 사회 공동의 책무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2등 국민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여성의 징병을 반대하지만, 여성의 징병여부는 다뤄져야할 분명한 가치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시는 분들중 한국 남성들이 신체의 자유가 구속 당하고,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이야기 하시는 분이 있기는 한가요? 여성이 약하니까 징병의 대상에서 제외 되야 한다는 논리가 페미니즘에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가 어떠냐구요? 장애는 부끄러워할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장애인 딱지를 차에 붙이고 세금을 감면 받고, 주차 우대를 받으면 안 되는거죠. 혜성님은 여성들이 전부 장애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여성들은 주차도 못하는 머저리들이라 핑크색으로 주차공간을 1.5배나 크게 그려서 주차 시켜야 하는?

+ 지금과 같은 논리로 여성 징병제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남성의 징병제의 부당함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해야한다는 겁니다. 물론 저는 남성 강제징병 또한 반대하며, 징병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가산점과 같은 것으로 보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산점 보다는 병영환경 개선및 최저임금과 생명수당을 보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성은 사회 공동체로서의 책무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부분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2등 시민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들 중 하나인데요. 그게 페미니즘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구요. 한국여성은 한국시민이 아니에요?

+ 굴절된 체제에 참여하라는게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성이 징병 대상이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남성 복무의 부당함에 목소리를 높이기는 했나요? 지금 상황은 도리어 자칭 페미니스트라는 작자들이 남성만 강제징집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는데요. 대체 어떤 페미니즘 이론에서 이런 주장을 볼 수 있나요? 아니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긴 하나요?

+ 저는 징병제 자체에 회의를 갖고 있지만, 여성이 일시적으로 참여하는 (사실은 실현 가능성 없는) 징병제를 찬성합니다. 더불어 양성이 모두 지금의 강제징병에 심각성을 느끼고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성만 강제징병의 대상에서 빠져야 한다는건,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에요.

별개로 이다지 강사를 후들겨까는 매갤들이 많은데, 이다지 강사가 잘못한게 아니라, 실제 유럽에서 시작한 페미니즘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제가 이다지 강사였으면, 메갤이고 뭐고 다 고소했을거에요. 비난이라고도 보기 역겨운 그 저열한 조롱들 보면 말이죠.

+ 메갤이 뭐든지 일베, 여성혐오의 미러링이라고 핑계대는 것들 보면, 이제는 역겨워요. 내가 일베입니까? 내가 언제 여성혐오한 적 있습니까? 왜 메갤에 대한 비판은 모조리 여성혐오라는 라벨링을 하는거죠? 일베는 당연히 상대 가치도 없지만, 메갤도 그보다 약간 나을 뿐이에요. 왜냐구요? 메갤이 일베, 여성혐오의 레토릭을 사용하는 ‘미러링’이란 전술을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제 담벼락에서 메갤이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조직해야한다고 했던게 한 두번이 아닌데 말이죠. 자기들이 무슨 열사인지 아는데, 지금 메갤이 하는건 사실 1세대 페미니즘이라고 말하기도 모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