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확증편향
한국에서는 사람의 한 단면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어떤 면과 대치되면, 그 사람의 모든 면을 적대시한다. 갈등을 통해 서로 다름을 인식하고 공존의 방법을 찾기보다 파괴해버리는데 능하다. 누구나 작은 부조리를 갖을 수 있고, 그 부조리의 주체는 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부조리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는 순간 자신 또한 부조리의 주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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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한국과 같이 다양성이 없는 사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일.
그러한 일은 집단주의 문화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일로는 가치비판을 하는 개인에 대한 집단의 인격살인이다. 이런 일들은 작은 사회일수록 더욱 심각해지는데, 운동가, 좌파, 혹은 진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는 더욱 작기 때문에 마이너 집단 안에서의 린치는 보다 강도가 높다. 집단 내의 공공 선을 반영하는 규율이 권력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그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비단 정치로 하여금 박근혜 대통령에게 성적인 모욕과 이쟈스민 의원에게 인종차별적 모욕을 쏟아내는 좌파 아재들 뿐만 아니라 바로 며칠 전의 메갤 내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다름을 인정하자고 수시로 말하는 좌파 커뮤니티들에서조차 수시로 행해지는 일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다양성이 없는 곳에서 마이너, 펑크로 살아가면, 외모, 취향, 정치성향은 물론 반집단주의적 삶의 태도 등의 이유로 하여금 집단주의의 폭력과 차별은 일상적으로 만나게 된다. 반면 독일에 와서 가장 편한 것은 교수라던가 관공서를 찾는다고해서 나의 정체성을 숨길 필요가 다는 것, 아니 심지어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에 대해 존중을 받기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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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메갤의 성소수자 때리기.
짧게 잘라 이야기 하자면, 지금까지의 엉터리같은 일들을 차치하더라도 이번과 같은 메갤의 성소수자에 대한 조롱을 보면, 미국의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트랜스젠더들의 여자화장실 사용을 반대할 것이 뻔하다. 페미니즘이 80년대 들어 녹색운동, 성소수자운동과 함께 약자와 연대한 것을 모조리 부정하고, ‘권리투쟁’이 아닌 본인들의 ‘권력투쟁’이 되고 있다. 그것이 종전에 메갤에서 심심찮게 보였던, 남성페미니스트 부정, 남성혐오 등과 맥락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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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시위, 좌파 문화 담론.
며칠 전, 시위 문화를 꼬집는 목소리가 나왔다. 누구는 동의했고, 누구는 힐난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투쟁방식이 경직되고, 오래된건 사실이다. 독일처럼 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을 이야기 해보자하면, 독일 시위대가 브레히트 작사, 한스 아이슬러 노래의 ‘Der heimliche Aufmarsch’ 같은걸 부르지 않은지는 오래됐다. (가사및 비디오:http://goo.gl/KGaThQ)
지금 독일의 시위들은 투석전과 화염병도 등장하지만, 한편에서는 테크노, 힙합, 펑크, 포크 등의 음악이 울려퍼지며 행진하기도 한다. 반면에 한국의 좌파운동이 아직도 오래된 텍스트, 경직된 구호에 집착하는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오늘, ‘민중’이란 말이 딱딱하고, 후지게 들리는 것도, 우리에게는 민중 말고는 다른 이름으로 각자를 호명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철의 노동자, 민중의 노래, 비정규직철폐가, 농민가 등등을 좋아한다고 해서 지금 젊은이들이 ‘오직 민중가요’만을 시위에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의 취향과 관계 없이 후지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민중 부르짖으면서도 화염병이나 벽돌을 던지지 못하는데, 또 다시 독일을 이야기 해볼까하면, 종종 경찰차를 불태우기도하고, 2009년 등록금 투쟁에서는 25만명의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철도조차 점거를 했다. 노동절에는 으레 은행유리창도 까부수는데, 그러면서도 바로 근처에서는 펑크, 힙합 공연 등과 테크노 등이 펼쳐진다.
나는 사실 쥐벽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왜냐면, 쥐벽서가 G20에 대한 조롱을 담고는 있지만, 외모에 대한 비하가 예술로 둔갑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시절의 반전 시위의 행진에서 나와 친구들은 스텐실을 하다 제지당했다. 처음에는 사복경찰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더 깜짝 놀란 것은 경찰이 아니라 시위대였다. 순간 욱했는데, 참았다. 그러다가 쥐벽서가 이슈화 되면서 한국의 좌파운동이 얼마나 문화담론과 거리가 먼지 알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자”고 한다. 민중의 노래를 부르면서. 대체 그 민중에는 내가 있을 수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를린에서 여러 시위를 보고, 또 참여하면서 생각을 달리갖게 되었다.
노동절 경찰 폭력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된 베를린의 마이페스트(비디오:https://www.youtube.com/watch?v=SaXSJ6xk8Fc)는 공식적으론 십여개의 스테이지이지만, 주변의 운동 거점 지역들이 만드는 자발적인 스테이지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생각해봐도 40~ 50여개는 족히된다. 이런 스테이지들에서는 Fat Wreck Chords 같이 세계적인 레이블의 밴드들이나 디제이들이 와서 무료로 공연을 한다.
물론 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이페스트가 투쟁을 가볍게 만든다는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불과 1~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화염병과 투석전이 난무하고, 으레 은행 유리창이 파손되곤 한다. 바로 옆에서 테크노 파티가 벌어지면서, 또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기도 한다.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I-2CPLZCxDo)
하지만, 마이페스트 이후, 경찰의 진압 방식이 언론에 뭇매를 맞아온게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 이벤트가 경찰폭력진압을 저지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라는건 베를린 시 전체가 증명한다.
10년 전쯤 되었을까, 이런 기획을 친구들과 하고 싶어 이야기중이었는데, 시위를 진중치 못하게 한다고 비난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서울에서 다시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다.
마이페스트에 동기를 부여한 99년, Atari Teenage Riot이 99년 WTO반대 공연(https://www.youtube.com/watch?v=Y2NY5bGBFKg)을 한 것도 유명하다. 공연 중에 폭력적인 진압이 자행되었으며, 멤버 전원이 연행되었지만, 이후로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며 언론의 뭇매를 맞고,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진압 방식으로 선회하게 된다. ATR은 이에 그치지 않고, 확장하여 1년에 한번씩 드레스덴에서 있는 네오나치 결집 데모 건너편에서 카운터 데모및 공연을 조직하기도 한다. 네오나치랑 안티파가 뒤엉켜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이 개입하는데, 결국 네오나치들의 행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다.
작년 나도 참여했던 시위의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u8ZdYIEx5hs)에서 보이는 것처럼 80여명의 네오나치들이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결집하는 것을 경찰이 막지 못했기 때문에 6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고, 영상에는 충돌하는 장면뿐이지만, 사실 이 날 나는 네오나치를 구경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안티파-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해 디제잉 하는 차량들을 중심으로 수 천명의 시민들이 다양하고 폭넓게 참여한 무척 평화로운 카운터 데모였다. 이러한 하위문화들을 통해 수 만명이 모여 저항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젊은 청년 좌파 문화가 없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모든 주류문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좌파 청년들이 대체로 성상품화된 아이돌 음악을 듣는다는게 나로서는 실망이 크다. 또한 기성패션과 같은 주류문화에서 벗어날 수조차 없으면서 ‘반자본주의’ 같은 구호를 외치고, 다양성을 요구하는 것은 공허하게만 보인다.
노동당 당수 코빈이 당선 직후, 적기가를 불러도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영국엔 공산주의-, 아나키즘을 위시로한 펑크, 하드코어, 테크노 등의 하위문화가 넘치고 넘친다는 것 아닐까.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직된 좌파운동을 한두번 경험한게 아니다. 한번은 The Explode의 곡이 Deadly Taekwondo Boy와 함께 plsong.com에 올랐을 때, 웹사이트 생긴 이래로 유래가 없을 정도의 시끌한 토론 게시판이 생기더니, 펑크음악이 너무 폭력적이라면서 결국 음악은 삭제 되었다. 이게 10년 전쯤 일이다.
하위문화를 위시로한 문화담론이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감 정도로 취급되는 것을 보면, 사실 그 문화담론이 없었으면, 브레히트도 없었고, 한스아이슬러도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좌파운동이 문화적으로 후지다는데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이건 내가 최도은의 곡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시위에서 전농아저씨들이랑 막걸리 마시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랑은 별개의 이야기다. 물론 지금은 별 미친놈들이 시위에서 술 마시지 말라며, 술병을 강제로 채가기도 하는데.. 그거 다 별개로 후지긴 진짜 후졌다. 명박 산성을 넘겠다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외치면서, 멱살 잡고 강제로 끌어내리는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이 외치는 다양성은 대체 무얼까?
영화감독, 윤성호가 그랬다. “이런 사람들이랑 어떻게 혁명을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