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mO_0tIGo-4
x. 요 며칠동안 끄적여 파편화된 것들을 나열하는 일, Nina Simone의 Feelings를 들으며 적어내려가는 오랫만의 잡글. 혼자가 되는 일이 그리 낯설진 않지만, 익숙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혼자가 되는 일을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하지만 커다랗게 열린 캄캄한 그 곳에서, 그 유대감,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곳에서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위해 두리번 거리고 있다는 그 유대감. 그것이 나의 고립을 해체한다.
x. 해가 질 무렵까지 허우적거릴 정도 알싸한 독주. 요즘에는 저녁을 압생트로 시작하는 취미가 생겼다. 취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언제부턴가 꾸준히 하게 되었으니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한 것인지 모르겠다.
x.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열리는 가능성들.
x. 요즘 친구들과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늘면서, 사람들이 몇 가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 페미니스트 여성이라고 해서 페미니스트 남성만을 만나야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사고는 단지 사람을 믿지 않겠다며, 페미니즘을 고립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기 위해 하나의 공동 선을 제시하는 것이다.
x. 최근 들어 메갤에서의 어떤 의견, 이를테면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라던가 더 나아가서 ‘남성은 모두 잠재적 가해자’, 심지어 ‘남성은 전부 적’ 같은 것들이 오래된 것들을 상기 시킨다. 캐나다 친구에게 “양키 고 홈”이라고 외치던 사람들, 그리고 반자본주의, 민중메탈을 자처하던 이스크라 같은 밴드를 두고, 미제의 음악이라며 멸시하던 NL들이 생각난다. 퇴행.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벽을 만들고선 그 벽을 향해 왜 무너지지 않느냐며 구원을 구하며, 무릎 꿇고, 눈물을 쏟으며 기도 하는 사람들. 아무도 당신을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x. Urban Shamanism, 5년 만에 새로운 전시를 결정했다. 지난 작업 ‘앞, 뒤 없는 세계’를 확장시키기도 하겠지만, 나는 정치, 예술, 문화, 철학이 현대 사회의 주술과 종교적 제의라는 관점으로 이번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이를테면 베를린, 노동절에는 크로이쯔베르그, 노이쾰른, 그리고 프리드리히샤인 지역에 수 십개의 펑크, 힙합, 테크노 오픈 에어 스테이지가 열린다. 그리고 수 만명의 사람들이 이 음악들을 중심으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환각에 빠지기도 하며, 불과 1~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시위대가 화염병과 투석전으로 경찰들과 격렬한 대치를 하며 쟁의를 벌인다. 단지 하루동안의 사육제에 불과해보일지 모르는 이 일들을 나는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빠질 수 없는 종교적 제의라고 생각한다. 은행에 벽돌이 던져지고, 유리창이 파손된다 한들 군대가 투입되지 않고, 경찰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종교적 제의이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시위대의 목적도 실제 은행-자본의 붕괴가 아니며, 시위대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목적도 은행-자본을 붕괴시키려는 범죄자 검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밤, 베를린의 수 많은 클럽에서 열리는 테크노, 락, 메탈, 재즈, 블루스 공연들도 마찬가지의 종교적 제의이다. 이 제의들은 다양한 의견을 가진 열린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 선’을 제시한다.
x.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절대 정의 또한 없다. 나의 정의가 어떤 이에게는 악일 수 있으면, 그 어떤이의 진실된 정의가 나에게 악일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규정하길 지양하고, 우리 ‘공동체의 공동 선(the common good)’을 향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고, 몰아내려고 해서는 이 싸움을 끝낼 수 없어, 끝없는 전쟁만이 우릴 기다릴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야한다. 전쟁은 언제나 정의를 찾아 시작 되었고, 희생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다. 독일 아나키스트들이 말하던 ’War starts here, Let’s stop it here’가 같은 맥락에 읽힐 수 있다. 전쟁을 종식시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 또한 폭력에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서 어떤 관점에서 ‘만들어진 정의’를 추구하기 하지않고, 공동 선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법이 된다.
x. Gesture와 Act를 구분하지 못하고, 진담과 농담의 경계를 가리기 어렵다면, 이토록 어렵게 사는 방법도 없을 것이다.
x. 뭔가를 시작하면,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진다.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외롭다는 느낌이 멀어지면서 사소한 발걸음조차 힘차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고립감이 도리어 스스로를 냉소적으로 만든다. 그 가운데 우리가 해야할 것은 동요하지 않고, 꾸준히 그 가치를 지켜가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만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얻는 것은 작은 신문의 기사뿐이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너 없이 세상은 돌아간다. 최고의 복수는 살아 남아서 증명 하는 것이다.”는 에디 베더의 말에 매번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을 희생시켜, 순교시켜 얻을 수 있는 세상은 없다. 사람들을 돕고 싶다면 스스로부터 행복해져야한다. 질투하지 않아야한다. 당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 당신의 지금이 미래가 될 것이다. 비젼, 네가 슬퍼하면, 미래 또한 슬퍼진다. 그러니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x. 그래, 나도 어제와 같이 매일 요리하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같은 낡고 오래된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떻게 감히 생각에 잠기는 가장 고전적인 이 방법을 그만둘 수 있단 말인가?
요리를 하다보면,
모든 것들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만약 네가 누구인가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다면,
이내 곧 잘못된 느낌을 갖겠지.
만약 네 마음 속에 올바른 것을 두고 있다면,
분명 크게 기뻐하게 될거야.
x.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듣기 좋은 겨울밤이다. 비록 추울지라도.
ㅡ 2015년 11월 29일, 아침이라 말하기엔 너무도 이른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