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갤, 그리고 pc도착증

 

오케이큐피트를 보다가, 또 페이스북에서 일어나는 pc, 메갤에 대한 논쟁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서는 내가 6년 전, 베를린에 처음 와서 활동가들, 펑크들과 만났을 때부터 주로 다루던 이야기인데, 그 필요성, 중요성, 당위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독일, 스웨덴 등, 국가를 막론하고,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pc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경쟁적으로 다가서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한 용어는 없지만, 나는 베를린서 이에 대해 처음 논의하던 때부터 일종의 ‘자위’, ‘pc도착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 젊은 친구들을 설명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독일 안티파 시위에서도 보인다. 10대~ 20대 초반의 젊은 친구들이 시위에서 계획된 시위들을 무시하고, “경찰, 이 돼지, 나치, 파시스트놈들 다 죽여버린다”면서 거꾸로 솓는 젊은 피를 주체하지 못한 채, 정의감에 불타 투석전, 화염병을 던진다. 물론, 투석전과 화염병이 전략상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이 어린 친구들은 그걸 놀이문화로 소비한다. 이들을 단순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꾸준히 싸워온 친구들도 아니며, 이제 연대한지 고작 1~ 2년 뿐이 안 되어, 운동의 역사는 물론, 방향도 이해하지 못한채 ‘보수주의자들만 없으면 세상은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다’라고 단순하게 믿는 친구들이다.

시위에서만이 아니다, 평소에도 ‘반자본주의’와 ‘혁명’이라는 단어를 수시로 언급하는 이들의 방에는 제 3세계 국가의 아동들을 착취해 수익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들의 제품들이 때묻지 않은 채있고, 그 중 몇은 나이키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는 것으로 혁명에 가까워졌다고 착각하기 일쑤, 또한 부모님을 마치 ‘보수, 괴물, 꼴통’으로 그려넣기도 일쑤다. ‘나이키 대신 반스(Vans)를’ 소비하는 것을 지적한 Joseph Heath와 Andrew Potter가 <The Rebel Sell: Why the Culture Can’t be Jammed>에서 밝힌 반문화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레토릭으로 소비된다.

이에 독일 안티파는 일찍이 “War starts here” Camp 등을 통해 시위에서 투석전, 화염병을 던지는 것 이상으로 나 스스로부터 바뀌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해왔다. 하위문화 등을 통해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저항적인 삶들을 소개해왔다. (한국의 많은 좌파들이 막연히 기성제품-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 이런 점에서 부족하다) 그리고, 운동이 하위문화와 만났던 뜨거운 80년대 이후, 90년의 3세대 페미니즘과 함께 대중문화에서도 운동의 두각을 드러냈으며, 더 많은 지지자들과 연대를 하게 되었다.

다시 ‘메갤 이후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분’들, 마치 ‘외로이 세상을 변혁 시키고 있다’며 정의감에 불타 계신 분들의 문제로 돌아와서 생각해보자.

지금의 메갤이 그다지 새로운 일도 아닌 것은 2008년 여시, 밀덕, 그리고 진중권-진보신당 등등 여러 주체가 급격히 관심 받으며, 확산된 촛불집회에서 전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앞에 거론된 주체보다 더 큰 곳에서 “독재타도, 이명박은 하야하라”를 외친 ‘꼬꼬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처음은 마치 대한민국이 뒤집혀, 혁명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들 기억하듯, 2008년의 그 일은 차후에 일베의 시발점이 되었다.

본인들께서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청년활동가’라고 믿는데, 내 눈에는 ‘인권감수성’ 같은 수사에 경도된 감성적이신 분들일 뿐이다. 이 분들의 레토릭은 노인층의 보수성 운운하다 대선 빠이빠이한 정동영이나 며칠 전의 문재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히 새누리당 때려부수고, 여혐종자들 때리면, 대한민국에 좌파가 집권하고, 여혐이 사라질거라고 믿는 존~~~나 단순한 친구들. 그게 그렇게 간단했으면, 왜 세상이 이모양, 이꼬라지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온라인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프랑스 국기를 걸고, 무지개 프로필을 장식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소개하고, 여혐에 반대한다며, 남성을 조롱하는 농담들, 짤방들을 올리고 낄낄거리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니 조심해라,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여성의 말에 ‘우선적으로’ 귀기울여라라고 말하는 것, 그저 ‘반자본주의’, ‘혁명’이란 단어를 외치는 것만으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너무 나이브한 것은 아닐까?
당신 부모 세대, 68세대만 하더라도 싸이키델릭 음악에, 애시드, 대마를 피우며,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며, 나체로 뒹굴고, 시위에서 경찰들에게 꽃을 건내주었고, 때로는 연행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지, 그런데도 왜 이 세상은 이모양인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안 될까.

오케이큐피트, 그 데이트 웹사이트를 왜 연관짓냐고? 나는 이 데이트 웹사이트를 종종 이용하는 편인데,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이 요즘의 어떤 사람들과 정확히 겹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케이큐피트에서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에 거주하며, 사회불평등 이슈에 관심을 두고 있고, ‘베를리너를 희망하는 미국인’이라고 밝히는 것과 ‘메갤 이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부르는 사람’들이 놀랄만치 같은 레토릭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Christian Lander가 <Stuff white people like>에서 말한 ‘도덕적이고 진보적인 백인으로 이해되고 싶어 그러한 백인 문화를 소비하는 백인’과 ‘도덕적이고 진보적이며, 보수적인 한국 문화를 비판할 줄 아는 이성적인 한국인’으로 인정받는 것, 그 둘 모두 그 좁은 세계에서만의 도덕성을 확보해 쿨해지고 싶어하는 힙스터이기 때문이다. 이 들의 바람은 힙스터, 그 자체로 현실세계에서 그 이미지로 소비되길 바라는 것이지, 실제 변혁이 아니기 때문.

만약 실제 변혁을 바란다면, 그 소비하는 이미지에 대한 재고가 진작에 있었겠지. 오직 주어진, 한정된 미디어 소비를 통해 “Sex, Drug, and Rock’n Roll”를 외치는 록스타 워너비는 향유자가 아니라, 소비자일뿐이다.

아무튼, 나는 1월, 50 Weapons의 마지막 공연과 Siouxsie & The Banshees를 만나러 갈 것이라네. 그리고 혹여라도 오케이큐피트에서 날 만나면, 가볍게 말을 걸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