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라는 국가, 조성진, 그리고 오늘의 영웅주의

바다가 4면

 

타임라인을 보니, 뉴스들을 훑어보니 국제쇼팽콩쿠르에서 조성진씨가 ‘한국인 최초’ 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고 한다. 클래식 언급 한번 없던 사람들이 이제는 온통 클래식을 이야기 하길래 무슨 소란인고 싶어 위키를 뒤져보니 지금까지 상은 폴란드와 소비에트(러시아)가 상을 휩쓸었더라. 사람들은 또다른 박지성과 김연아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 축구와 피겨스케이팅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다. 사람들은 이제 피아노를 외치고 있다.

며칠 전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 응원 영상을 보았다. 사람들은 즐거워하며 환호를 질렀지만, 당시 그런 사람들에게 질려버렸던 나, 그리고 오늘은 그런 사람들이 측은하면서도 두렵게 느껴진다. 집단 광끼는 소리없이 일상을 삼키지만, 정작 우리의 삶을 휘두르는 정치는 날로 듣기 어려울 정도의 작은 소음을 낼 뿐이다. TV를 켜면 모두 즐거워하고, 떠오르는 미디어에선 모두 최근의 요리 이슈에 몰두하고, 우리의 삶을 휘두르는 정치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언제나 나의 최고 관심사 중 하나로 주방을 두고 있지만, 우리의 주방은 언제나 미디어에 실려있는 요리들 같지 못 하다. 우리의 식탁은 대개는 시간에 쫒겨서,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천정부지로 치솟는 월세와 물가로, 허나 너무나 작은 화분 탓에 성장을 멈추고, 생기를 잃은 꽃을 닮아가는 우리의 임금처럼.. 우리의 식탁은 대개는 빈곤하다. 왜 우리가 인스턴트를 즐겨 찾게 되고, 엄마의 밥을 그리워하는지, 왜 유학생들이 파스타나 스테이크가 아닌 그저 물에 말은 누룽지 밥에 신김치를 그리워하는지.. 우리는 말하지 않았고, 말할 곳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 “잘 지내냐, 밥은 먹고 다니냐”는 어머니의 안부전화가 반갑지 않다.

제 3제국 집권 당시, 히틀러는 스포츠를 활성화 시켰다. 국민의 관심을 정치가 아니라 스포츠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체력은 국력”이라며 씨름을, 전두환은 야구에 모든 이들의 눈을 주목 시켰다. 88올림픽을 보면서 우리는 굴렁쇠 좀 굴려봤고, 영문도 모른채 또래 남자애들과 태권도장을 다니고, 여자애들은 피아노, 바이올린 학원을 다녔다. 장영주의 첼로를 모두 숨죽여봤고, 부모님들은 우리를 또다른 황영조, 이봉주, 박세리로, 박찬호로, 박지성으로, 박태환으로, 장미란으로, 김연아로 혹은 활이나 탁구라켓을 우리 손에 쥐여주고 싶어했다.

그리고 몇 년째,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한다. 우리 가운데 몇몇은 또다른 황영조, 이봉주, 박세리나 박찬호, 박지성, 박태환, 장미란, 혹은 김연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MTV는 북미 젊은이들에게 누구나 락스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주었다. 하지만 이젠 우리 모두가 락스타가 될 수 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또다른 박지성과 김연아가 필요한 걸까?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싫다고 하면서도 백년 전, 일본이 생각하고 말하던 ‘탈아입구’에 목을 매고 있다. ‘한강의 기적’ 같은 서사와 ‘세계 속의 한국’ 같은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우리는 못 나지 않았어!” 하고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철저히 타인의 욕망을 충족하려 하지만, 타인들의 욕망은 이 한국 사람들이 욕망하는 바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하야하라” 외쳤던 이명박 대통령 이전에는 바다가 3면이었지만, 이명박 이후 바다가 4면이 된 한국은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감동실화나 기적 같은 것으로 포장된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고, 구원자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구원은 없다. 아무도 이들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