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페미니즘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흑인민권운동을 떠올렸다. 그 가운데 제임스 메러디스가 떠올랐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더라도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연방병력까지 투입한 케네디 정부, 미국은 이런 사건들을 통해 국가의 변혁을 이루어냈다. 차별받는 흑인들을 바라본 ‘착한 백인’들이 그저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메러디스가 어떻게 투쟁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언급이야기를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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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의 미시시피 대학및 미 남부의 여러 교육시설들은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차별정책을 철폐해야만 했다. 1962년, 기나긴 법정 투쟁 끝에 연방법원은 미시시피 대학교가 퇴역 공군인 James Meredith, 제임스 메러디스의 입학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실제로는 인종차별적이었던 보수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시민위원회의 주도로 판결 집행에 대한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케네디의 당선을 위해 애썼던 로스 바넷 주지사는 초기 케네디의 편에 섰으나 자신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남부의 차별금지정책에 반발해 1954년 미시시피 인디애놀라에서 처음 발족된 인종차별적인 시민단체, ‘시민위원회’의 손을 들고, 차별정책폐지를 거부했다. 이후 로스 바넷 주지사는 9월 13일 TV에 출연을 필두로 공공연히 법원이 명령한 차별 폐지를 거부하고, 이에 들고 일어날 것을 선동했다. “인종차별을 철폐하느니 주립대학의 문을 죄다 닫아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로스 바넷 주지사와 존 케네디 대통령, 존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오랜 시간동안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연방정부가 개입해 강제로 법원 판결을 집행하기로 결정한다.
집행관의 호위를 받으며 메러디스가 옥스퍼드에 등교하려 하자, 라디오에서 연신 KKK, 백인우월주의 발언을 떠들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물리적 반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어버이 연합외 몇 개 극우단체의 스멜이 난다) 메러디스가 입학 등록을 하기 하루 전, 9월 29일, 연방 법원 집행관이 대학 교정에 진입해 본관을 포위했다. 2,500명 정도의 인종차별주의적 시민단체들은 결국 폭동으로 사태를 몰고 갔는데, 연방정부 집행관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지만, 시위대들은 곧 바로 총을 쏘며 연방정부 집행관들을 공격했다.
결국 같은 날, 로스 바넷 주지사가 메러디스의 입학을 막으면서, 주정부군을 철수 시키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시위대를 선동하자, 존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인 로버트 케네디의 결단 아래, 연방 정부가 개입, 연방군이 투입되어 강제로 법원 판결을 집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 투입된 연방군만 2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었고, 1만 1,000명의 주 방위군이 옥스퍼드로 재투입되었다. 시위대 중 300명이 체포되었다. 시위가 진압된 뒤에도 메러디스는 학업을 결심해, 등교하는 내내 살해 협박을 당하면서도 연방 법원 집행관과 군인, 총인원 300명의 보호를 받으며 결국 정치학 학사를 따냈다.
이후 2년 동안, 아프리칸 미국인 학생들이 차례로 대학에 입학하여, 1963년 6월, 클리브 맥도웰은 법률 학교에 등록하고, 그는 메러디스의 룸메이트가 되었다. 메러디스가 수업을 마친 7월 이후, 연방 보안관은 학교를 떠났다. 클리브 맥도웰은 자신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호신용 무기 소지 권한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했다. 어쨌거나 맥도웰 또한, 법학 학사를 따고, 미시시피주에서 민권 변호사와 국선 변호사가되었다. 결국 맥도웰은 19세 백인 청년의 총에 맞고 1997년에 죽고 만다.
1963년의 맥도웰 입학 당시와 달리, 1964년 클리블랜드 도널드 주니어는 연방 정부의 보호 명령과 함께 대학에 입학하여, 1966년 역사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 1978년, 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이후 흑인 역사, 문화사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가 되었다.
메러디스는 정치과학에 초점을 두고 학업에 열중해, 장학금을 받고 나이지리아의 대학 수업에 참여하다 1965년 돌아와 콜럼비아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다. 1966년부터 메러디스가 시작한 민권투쟁행진은 15000회가 넘는 민권투쟁행진으로 이어졌고, 미시시피 주 역사사 최고의 민권행진이 되었다. 이는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운동으로도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러디스는 1967년 공화당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민권운동을 하는 정치인의 삶을 살게 된다. 표를 의식한 공화당이 메러디스를 민주당에 뺏기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2002년, 미시시피 대학은 메러디스의 입학 4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열었고, 그의 가슴이 조각되어 캠퍼스 명예의 전당에 설치되었다. 당시 메러디스는 “인권의 개념보다 나에게 모욕적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 인권이 나와 같은 흑인들을 영원한 2등 시민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유인 즉, 메러디스는 스스로를 “전쟁에 참전한다는 마음이었다”라며, “자신의 목표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것인데, 미정부의 군사력에 의해 강제로 보장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12년, 미시시피 대학은 역사적인 입학 50주년을 기념해 예술, 강의, 강연, 세미나 등으로 확대해 행사를 치뤘다. 같은 해, 메러디스는 하버드 교육 대학원’에서 교육에 영향을 준 인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