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기사: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항하는 뉴욕
지난 10년 간의 서울을 돌이켜보자면, 결국 이 책은 한국에서 ‘담론(재)생산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소비될 수 밖에 없다. 서울에서 ‘Abc no rio’ 같은 움직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빌어먹는’ 운동과 권위주의, 교조주의에 의해 새로운 시도들이 무참히 부서졌다.
인디팝이나 펑크 밴드 몇개 듣는 ‘문화/예술/철학 담론(재)생산자’들이 모든 걸 망쳐놨다. 냉정하게 보자면 많은 이들이 펑크의 공격적인 면을 논하면서 동시에 음악산업을 하고자 했고, 펑크 애티튜드를 논하면서 한거라곤, 고작 “Support your local scene”을 외치며 머천다이즈 몇개 판 것 밖에 없다. 그들이 머천다이즈 팔아서 생긴 돈으로 뭐했겠나.. 고작 술 몇 잔 더 마시고, 안주 조금 더 먹은 것 뿐이 없다.
가난하지만, 구걸하는 거지처럼 굴어선 안 된다. 마땅히 받아야할 것을 내놓으라고 해야한다. 내놓지 않으면 따귀라도 때리고, 주먹으로 부러진 코를 볼 기세로 달려 들어야한다. 우리는 좀도둑이나 길거리 강도가 아니고, 길 위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홍대가 망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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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식이 사라진 상황에서 마녀사냥처럼 ‘무엇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그루피 몰아내기는 그런 면에서 제 손에 망치질 마냥 어리석었다. 홍대 씬이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항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주체의식이 결여되면서 결속력이 사라졌다. 나는 그 날들의 ‘담론(재)생산자’들이 아직도 원망스럽지만, 그 날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잊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없고, 다시 시작하는 친구들이 있다.
서퍼(surfer)들이 파도에서 떨어져 다시 다음 파도에 오르고, 보더(boarder)들이 다시 널판지에 오르고, 소음민원신고에 출동한 경찰들에게 보란듯이 다시 윽박지르며 무대를 구르는 펑크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