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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원문 링크;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104094006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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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월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년.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연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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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영화 ‘소음과 저항(noise and resistance, 2011)’ +한글자막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9mOYOOCdj4o]

DIY (Do It Yourself) 운동! 한글자막 포함 다큐 [소음과 저항]을 번역해봤습니다

스폐인, 바르셀로나와 카탈로니아에서의 스쿼팅. 모스크바에서 반 파시스트 운동, 네덜란드 반-자본주의 밴드 씬 레드(Seein Red), 아나코 펑크의 시초 크라스(CRASS). 베를린 아나키스트, 스웨덴의 라이엇걸! 여성 패미니즘 운동…. 등등을 다룬 독일 다큐영화

감독: 줄리아 오스타탁 (Julia Ostertag), 프란체스카 아라이자 안드라데 (Francesca Araiza-Andrade)

즐감하세요-

에드워드 스노든 바른생활상 수여

 

12월 1일, 내부고발자 에드워드 스노든이 국가 감시에 대한 전반적인 폭로에 바른생활상(The Right Livelihood Awards)를 수여받은 직후에 스웨덴 의회로부터 여러 차례의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본상 수상자로는 파키스탄의 인권운동가 아스마 자한기르, 아시아 인권위원회의 바실 페르난도, 미국의 환경운동가 빌 맥키번 3명이 선정되었으며, 본상 수상자 3명은 총 150만 크로나(약 2억2천만원)의 상금을 나눠 갖게 됩니다. 명예상 수상자인 스노든에게 돌아갈 상금은 없지만 재단 측은 스노든에게 법률 비용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습니다.

* The Right Livelihood Awards, 바른생활상:
독일계 스웨덴인 우표수집전문가, 자선가 야콥 폰 윅스큘이 1980년대 제정한 상으로서 제 2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며, 인권과 환경보호및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한 공로자들에게 수여된다.
노벨상이 인류미래에 긴요한 업적과 지식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생각한 그는 소장한 우표를 매각한 기금으로 이 상을 마련하였으며, 해마다 가난추방과 환경파괴방지, 부정타파 등의 분야에서 실질적이고 탁월한 공헌을 한 사람을 선정해 수여한다. 수상자들은 11명의 국제심사단에 의해 선정된다.
특히, 이 상은 기존 노벨상이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며, 강대국의 입장과 정치적인 문제들에 지나치게 영향받는 인식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대안노벨상(Alternative Novels)’로도 불린다.
매년 노벨상 시상식 하루 전날인 12월 9일에 스웨덴 의회에서 150만 크로나(약 2억 2천만원, 약 20만 달러)의 상금이 수상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전달되며, 이 상금은 수상자들이 나누어 갖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러시아에 망명중인 스노든은 모스크바에서 비디오로 의회에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상징적인 제스쳐로 그의 가족과 지지자들은 그가 속히 자유의 몸으로 스웨덴에 여행하여 직접 수여받길 바라는 희망 속에서 이 상을 수여 받을 다른 사람은 없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감정적인 세레모니를 위해 의회 회의실에 자리한 그의 아버지 론은 “바른생활상과 스웨덴 의회의 지지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상은 조만간 혹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스노든이 직접 스톡홀름으로 수여받으러 오기 전까지의 기대 속에 여기에 남아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스노든은 미국의 간첩법 현의에 따라 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미법무부와의 거래를 통해 러시아에서 체류하는 것이지만, 상당히 희박해 보입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스웨덴 등의 서유럽 국가가 그에게 망명의 자격을 부여할 수 있길 바라고 있으며, 녹색당은 스웨덴에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웨덴 또한 미국과 친밀한 사이이기 때문에 망명에 대해서는 눈치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죠.

1980년, 이 상을 설립한 자선가 야콥 폰 윅스큘씨는 “그래서 스도든씨, 당신의 바른생활상 수여를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수상자 개인의 자격으로 이 곳 스톡홀름으로 와서 수상하도록 스웨덴 정부가 일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급 배심원들 또한 스노든의 명예를 치하하며 “스노든이 기본적인 민주 절차와 헌법상 권리를 침해한 전례 없는 규모의 국가 감시 실태를 폭로하는 용기를 보여줬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의회 회의실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 지지자들,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자리를 했습니다.

스노든의 폭로를 처음으로 보도한 가디언지 편집장 알란 러스브릿저 또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배심원들은 그의 수상을 축하하며 “기업과 정부의 비리를 노출에 겁내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책임질 저널리즘을 위해 만들어질 지구적 미디어 조직 구축”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루스브릿저는 그의 연설에서 “우리를 위한 스노든의 도전중 한가지가 그것들은 사회적 관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식 시킨 것입니다. (…) 테러리스트들로부터의 보안은 중요한 것이지만,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권리 또한 이 사회의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 것 하나가 아니라 더 많은 투쟁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ㅡ 참고: 스노든의 폭로를 처음 보도한 가디언지의 기사

그리스, 아덴에서 아나키스트 니코스 로마노스에 연대 시위

 

한국시간, 어제 2014년 12월 2일

11월 10일부터 단식투쟁을 한 그리스의 아나키스트 니코스 로마노스에 연대하기 위해 그리스 아덴에서 최소 8000명에서 10000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연대 시위와 행진을 했습니다.

니코스 로마노스에 연대하기 위해 다른 세명의 아나키스트도 단식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니코스 로마노스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시험에 임할 자격을 획득 하는 동안 그가 대학 진학 시험에 임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재소자들에게는 대학 진학 시험 자격권리를 부여하면서 로마노스에게만 거절한 것이 이 시위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왜냐면 로마노스의 아나키스트로서 정치적 신념을 거론삼아 정부가 로마노스의 시험 자격을 박탈한 것이죠. 또한 그리스 정부는 법무부 장관이 대학 입학 시험에 성공한 교도소 수감자에 상을 건네는 시상식에 참석하려는 것을 부정한 태도가 괘씸하다며 처벌했습니다.

니코스는 현재, 아덴의 겐니마타스 공공 병원에서 경찰의 삼엄한 격리를 받고 있습니다. 11월 28일 니코스를 진료한 의료진 판텔리아(리나) 베르고푸루에 의하면, 그는 현재 생면이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합병증으로 매우 위독한 상태라고 합니다.

아나키스트 수감자 야니스 미샤일디스 또한, 지난 11월 17일 단식투쟁에 들어섰습니다. 니코스 로마노스의 투쟁을 연대하기 위해서 말이죠. 결국 며칠 전 야니스 미샤일디스마저 위중한 상태에 빠져 병원 치료가 필요 했는데, 오로지 받은 것은 맥박 진단 뿐이었습니다. 야니스 역시 현재 쨔니오 피에루스 공공 병원에서 경찰의 삼엄한 격리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 1일부터 아나키스트 폴티스와 므푸쿠코스 역시 단식 투쟁에 연대하였습니다.

이 비디오는 카터리나 이글레찌에 의해 촬영 되었습니다.

스크랩/ 日기자 ‘일베, 韓사회 일부, 방관 말아야’

(서울=News1) 정윤경 기자 = 일본의 프리랜서 기자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베(일간베스트)’에 대해 “‘일베’는 한국 사회의 일부다”며 현실을 인정하고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재일(在日)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이라는 일본의 반한(反韓) 넷우익 단체에 관한 책 ‘거리로 나온 넷우익’을 펴낸 야스다는 지난 3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서 강연회를 열고 “‘일베’는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일지도 모르지만 많은 한국인들의 본심 중 일부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라며 이같이 말했다.
‘넷우익’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애국, 반 한국, 반 좌익’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인종차별적 주장까지 펼친다. 재특회는 지난해 배우 김태희를 광고 모델로 기용한 화장품 회사에 위협을 가해 그녀가 나온 광고를 중단시킨 바 있다.
재특회가 생겨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야스다는 2002년 월드컵과 고이즈미 전 총리의 북한 방문을 꼽았다. 일부 일본인은 일본의 단독 개최에 한국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2002년 고이즈미 전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0~80년대 일본인 13명을 납치한 사건을 인정하면서 일본인들은 북한에 반발했다고 설명했다.
야스다는 “월드컵 전까지는 일본의 온라인 게시판에서 한국을 비판하는 글은 별로 없었다”며 “(월드컵 이후)’한국인의 강제 연행은 거짓말이다’, ‘종군 위안부는 없었다’는 등의 글이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언론은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무시했다”라며 “언론은 이들을 ‘소수의 이상한 사람들’, ‘바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커다란 세력이 됐다. 언론도 무척 후회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야스다는 또 ‘넷우익’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매우 평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재특회 회원들의 대부분은 과격한 언동을 제외하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거리에서 ‘죽여’라고 외치지만 단 둘이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은 애니메이션이나 노래방을 좋아하고 동물을 좋아하는 착한 젊은이들이다”라고 했다.
야스다는 ‘무시’가 아닌 ‘관심’을 통해 그들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민의 힘으로 그들을 무너 뜨려야 한다”며 “그런 폭언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 시민 운동이 앞으로 활발해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언론에서도 (그들에 맞서는)목소리를 내야한다”며 “나는 재특회 항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어리 – 2

 x. 헬로, 미스터 서울
 ‘되도록이면 쓰지 말아야 한다.’
 코트 안 쪽에 만원짜리 한 장 쑤셔 넣은 채 거리로 나왔다. 그깟 만원짜리 한 장이라 생각하고 써버렸다간 일주일간 식사시간은 고역이 될 것이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써야 한다는 것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최대한 아껴야만 하는 상황에서 교통카드에 3000원 가량이 남아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지하철 역 쪽으로 걷는 동안에도 최소 환승 경로를 찾기 위해 머리 속으로는 어지러운 지하철 노선도를 떠올렸다. 잠시 쇼윈도 너머로 보인 뉴스에서 이상기후라 떠들었다. 정말 매스꺼운 뉴스가 아닐수가 없다. 매일 같이 지구 어딘가에서는 비가 멈추지 않아 강이 범람해 홍수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비가 오지 않아 식수가 모자라 큰일이라는 보도가 쏟아진다. 물론 오늘의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록적인 한파 덕분에 온 도시가 난리였다. 나와 같은 녀석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하철과 버스가 모든 것을 해결해줌에도 불구하고 빌어먹을 한파니 폭우니 하는 것들 전부 고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위에 지하철 역에 들어서면 좀 나아질까 했더니 <고유가 시대, 에너지 낭비를 줄입시다!>라는 뻘건 글씨가 크게 적힌 포스터가 보이면서 역사내의 난방이 꺼져있었다.
 “빌어먹을 추워죽겠는데.. 내가 낭비할 에너지가 어디 있다고…”
 누구든 들으라는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코트 안 주머니에 넣어둔 교통카드를 센서 위로 스치며 2120원 밖에 남지 않은 카드 잔액을 보니 더욱 울화가 치밀었지만 서둘러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서 신문 가판대 쪽으로 향했다. 온갖 신문들은 서로 무엇이 더 문제인가 앞다퉈 1면을 장식했다. 정면에 석장이나 연달아 걸린 신문들은 ‘이상기후, 한파로 도시 마비’, ‘기상청, 한파 예보할 수 없었다’, ‘전무후무한 기상재난 대책 미비’ 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얼어 붙은 도심 사진, 반면 북극에서는 빙산이 무너지는 사진과 익사 직전의 망연자실한 북극곰 사진이 온 신문을 도배했다.
 아연실색.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신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금융위기 강타, 자동차 판매량 급감’, ‘국산 자동차 내수시장마저 타격 받아..’, ‘자동차 산업 구제할 금융 구제 정책 시급’ 따위의 헤드라인을 내걸며 자동차가 팔려야 경제가 살고, 사람이 산다고들 마치 미친 전도사 마냥 두 팔 벌려 외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늦은 점심시간 나와 같은 지하철 플랫폼 위에서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모든 일에 무관심해 보였다. 마치 ‘Pulp’의 ‘common people’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홍대 방향 전철이 도착했다. 아직 퇴근시간이 되지 않아 사람은 비교적 적었지만, 폭설로 열차 내 앉을 자리는 없었다. 실은 그다지 안고 싶지도 않았다. 유독 서울의 전철 풍경만이 그러한 느낌인지는 나로서 알 수가 없다. 허나, 전혀 모르는 이들과 삶의 지친 얼굴들을 마주 바라보면 비참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다. 졸고 있는 사람, 영어 단어를 외우는 사람, pmp를 보는 사람, 종로부터 거하게 취한 노인들..
 ‘헬로 미스터 서울. 너란 녀석은 사람들의 휴식을 몹시도 싫어해.’
 몇 분전 2120원이 남았다며 붉게 표시된 LED만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2010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