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호소함’ – 한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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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우리는 1948년도의 냉소적인 전후의 비관주의와 함께 크로포트킨을 만난다. 이 소책자들 처음 읽으면 이 책의 내용이 19세기 급진주의자들의 곤혹스런 낙천주의와 관념주의에 절망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는 가장 저주할 만한 반대의 내용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들의 인도적인 감수성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호소, 이성적인 사람은 부정을 영원히 참지는 않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 ― 그의 주체적인 생각들이 이 세상의 현실적인 배경에서 조명된다면 이러한 생각들은 참으로 이상한 개념들처럼 보인다. 비록 우리들이 세파에 물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처음 읽으면 ― 우리들은 원자폭탄을 알지 못했던 과거 인간들을 향하여 약간의 우월성에 대한 느낌과, 그리고 그들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만 생각해보면, 크로포트킨의 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잇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미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유하여 크로포트킨이 살고 있었던 유럽의 사람들만큼 가난하고 병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세계의 다른 10분의 9의 사람들은 미국인과 반비례하여 훨씬 더 가난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러한 “재산”은 잔인한 전쟁과, 세계정복과 그리고 전쟁과 돈벌이를 위해 인간적인 감정과 연민을 희생시킴으로서 얻어진 것임을 기억나게 한다. 전문가가 어떤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는가를 크로포트킨은 지적하였다. 과학자가 죽음의 공장에서 일하고, 학생이 군징집을 기다리며, 그리고 의사, 기계공 심지어 예술가들 모두가 전쟁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면, 우리 시대는 어떻게 되겠는가? 문제는 반세기 전 못지 않게 의미 깊고 또 비극적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능력과 훈련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민감한(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세상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심어 주기 위해 어디에 헌신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크로포트킨의 호소가 그다지 어리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분명히 혁명적 변화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나리라는 크로포트킨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확실한 낙천주의에 우리는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에게 낙천주의를 거부하는 바로 그 비참함(재난)이 아나키즘을 더욱 긴박하고 진실되게 만든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정확하게 정의되지 아니한 때에,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은 그가 아나키즘을 나타내고 싶을 때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 운동”을 이야기하였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급진주의는 공통된 목표와 공통된 기본적 신념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크로포트킨은 이 소책자에서 구체적으로 아나키즘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결론이 이해되지 않으면, 섬세한 열정과 그리고 가장 순수한 분노가 다만 더 나쁜 폭정에 종사할 뿐임을 우리는 배워왔다.

19세기의 급진적 사상인 아나키즘만이 그 진실성과 응용가능성을 유지해 왔다. 오늘날에는 아주 소수만이 자유의지론자의 사회가 중앙집권화된 정부 관료정치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소련과 영국의 노동당이 활동하는 것을 보아 왔다. 전체주의와 전쟁은 우리에게 자유를 위한 운동이 개개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어떠한 사회적인 변화도 “지도자”, “엘리트” 혹은 “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 자유와 개인의 발달의 진정한 보상을 위해 너그러운 독재하의 잘못된 안전의 보상을 무시해야만 한다는 것도 배웠다.

이러한 생각들이 아나키즘적인 사고의 핵심이다. 아나키즘은, 가령 우리들이 우리들만 고립되어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우리 모두를 위해 합리적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자유와 협동의 사고들을 지금 당장 적용시킬 필요성을 강조한다. 아나키즘은 우리에게 방법―우리들의 삶을 의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즉각적 행동의 방법―을 제공해 준다.

비록 미래가 핵전쟁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감정을 가진 사람을 위한 다른 가능한 방법은 없다. 모든 사람들의 인류 속에 있는 최고의 것을 억누르려는 분명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직과 친절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이 남아 있다고 크로포트킨은 깊이 믿는다. 그는 인간의 희망이 무엇인지를 표현해 주고 서로서로에 대한 우리들의 감정이 아직 죽지 않았음과, 혹은 죽었던 감정이 일깨워 질 수 있음을 표현해 준다.

– David Thorean Wieck

오늘 내가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상대는 바로 바로 청년들이다. 나이든 사람―물론 마음과 이성이 늙은 사람을 의미한다―은 이 소책자로 그들의 눈을 피곤하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이 18세 혹은 20세, 여러분이 여러분의 훈련이나 교육을 막 끝마쳤던가, 혹은 여러분이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새로운 삶의 첫 단계에 들어섰다고 가정해 본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강요한다고 해서 미신을 믿지는 않을 것이고, 여러분은 지옥을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그리고 목사나 신부의 호언장담을 들으러 가지도 않는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더 나아가서 공원에서 그들의 바지나 원숭이 같은 얼굴을 과시하는, 쇠퇴하는 사회의 슬픈 산물인 맵시꾼들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라도 쾌락을 쫓으려 하지만, 반대로 여러분들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때문에 나는 여러분 청년들에게 호소한다.

여러분에게 던질 첫 번째 질문은 여러분이 자신에게 종종 물었던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젊었을 때, 사회의 비용으로 무역 또는 어떤 학문을 공부한 것은 그가 획득한 학식을 약탈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지성, 능력과 지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도울 날이 있을 것을 꿈꾸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악덕으로 침식된 타락한 인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은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가? 좋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나는 여러분이 어떠한 계층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아마 운명에 행운이 깃들어 여러분은 과학적 연구를 해 왔는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의사, 변호사, 문학가, 혹은 과학자가 되려는지도 모른다 : 여러분 앞에 폭넓은 분야가 펄쳐져 있다. 여러분은 광범위한 지식과 훈련된 지성으로 삶을 시작할 것이다. 혹은 아마도 여러분의 학문적 지식이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작은 것에 국한되는 정직한 노동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힘들게 수고하는 노동자들이 체험하여 얻는 삶의 직접적 지식의 장점을 가졌다.

나는 이제 첫 번째 가정을 접어두고 두 번째 가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나는 당신이 학문적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가정한다. 당신이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내일 누더기 옷을 입은 여자가 당신을 아픈 여자에게 모셔가기 위해 올 것이다. 그가 당신을 통행자의 머리 위로 반대편 이웃이 악수라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가난한 좁은 뒷골목으로 데려갈 것이다. 당신은 작은 등불이 깜박거리는 계단을 하나, 둘, 셋 올라가고, 그리고 차갑고 어두운 방에 더러운 이불을 덮고 보료 위에 누워 있는 아픈 여자를 발견한다. 흙빛의 창백한 이이들이 엷은 옷을 입고 떨면서 큰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남편은 그의 평생동안 하루 12시간 혹은 13시간 일해 왔고, 이제 그는 3개월 동안 실직이 된 상태이다. 그의 직업에서 실직은 흔하다. 매년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가 실직되었을 때, 그의 부인이 파출부일로 가계를 도왔다. 하루에 30 수우(프랑스 화폐단위)를 받고 당신의 셔츠를 빠는 것 등의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두 달간 아파 누워서 그 가족은 이제 참담한 곤경에 빠져 있다.

의사인 당신은 그 아픈 여자를 위해 어떻게 처방을 내릴 것인가? 한 눈에 그녀의 질병이 영양부족과 신선한 공기의 결핍으로 인한 빈혈증임을 알았을 때 당신은 어떤 처방을 할 수 있겠는가? 매일 좋은 식사를? 시골에서 약간의 운동을? 환기가 잘되는 침실을 당신이 처방할 것인가?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만약 그녀에게 그러한 것이 제공되었더라면, 당신의 충고를 기다리기 위해 그렇게 누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친절한 마음, 훌륭한 언변, 정직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족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칸막이 저편의 여자가 가난에 찌든 냉소주의자라는 것, 계단을 좀 내려가면 모든 아이들이 열이 있다는 것, 1층 여자가 내년 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옆집에는 상황이 더욱 나쁘다는 이 모든 것들을 얘기해 줄 것이다.

이 모든 환자들에게 당신은 무지하다고 말할 것인가? 그들에게 훌륭한 식이요법, 기후(환경)의 변화, 과로를 피할 것 등을 추천할 것인가? 당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슴 아픈 채로 나오며, 당신의 입술에 저주를 담을 것이다.

다음날 당신이 아직도 그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의 부인이, 전하기를 어떤 하인이 당신으로 모시러 왔었다는 것과, 이번에는 마차를 갖고 모시러 올 것임을 알려 준다. 그는 훌륭한 집의 소유자이고, 그의 처는 그녀의 전 생애를 의상, 방문, 무도회, 어리석은 남편과의 말다툼으로 보내고 불면의 밤 때문에 병이 났다. 당신의 친구는 그녀를 위해 좀 덜 불합리한 생활습관, 저지방 다이어트, 신선한 공기, 적절한 노동, 침실에서 약간의 미용체조를 처방해 주었다.

한 사람은 그녀의 생애동안 충분한 음식과 충분한 휴식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을 태어난 이래로 노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수척해진다……

만약, 당신이 아무 것에나 지신을 적응시키는 가장 경멸할 만한 순간에도 부드러운 한숨과 맥주 한 잔으로 자신을 달래는 개성 없는 인간들 중의 하나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점차 그러한 대조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다. 쾌락을 선호하는 동물을 본성을 갖고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쾌락추구의 흐름의 대열에 참여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실한 인간이라면, 만약 당신 안의 동물성이 아직 지성을 말살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어서는 안 돼. 질병을 고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우리는 그것을 예방해야만 해. 약간의 좋은 생활과 지적인 발달이 환자와 질병의 반을 감소시켜줄 것이다.” 약은 악마에게나 줘라! 신선한 공기, 좋은 음식, 과로하지 않을 것―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모든 의사란 직업은 기만과 술수에 불과하리라.

그날에 당신은 사회주의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사회주의(아나키즘)를 좀더 철저하게 알기를 원하게 되고, 만약 당신이 자연주의적 사회주의자의 서막인 이 사회적인 문제들을 연구하게 된다면, 당신은 서서히 우리들(아나키즘)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고, 그리고 사회적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일하고 있는 그대로, 당신도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 실천적인 일은 악마에게나 맡겨라! 천문학자, 심리학자, 화학자로서 나는 나 자신의 학문에만 전념할 것이다. 순수과학이 만약 미래 세대만을 위한 것이라면, 항상 어떤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당신이 학문에 전념함으로서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이해하도록 우선 노력해보자. 그것은 다만 쾌락인가―의심할 바 없이 상당한 쾌락이다― 우리들의 정신적 능력을 이용해서 자연의 신비를 연구함으로써 주어지는 상당한 쾌락인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인생을 유쾌하게 지내기 위해 과학을 추구하는 과학자가 포도주를 마심으로 만족을 얻는다면, 만족을 추구하는 술주정뱅이와 어떻게 다른지 나는 묻는다. 의심할 바 없이 과학자는 그의 즐거움을 좀더 현명하게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훨씬 더 깊고 큰 지속적인 기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이다! 술주정뱅이와 과학자는 둘 다 똑같은 이기적인 목적, 개인적 만족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당신은 이런 이기적인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에 종사함으로써 당신은 인류를 위해 일하고 싶어하고, 이러한 생각이 당신의 탐색을 지도해 줄 것이다.

매력적인 인생! 우리가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할 때 한 순간이라도 이러한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만약 당신이 참으로 인류를 염려한다면, 당신이 참으로 당신의 학문에서 인류의 번영을 꾀한다면, 굉장한 질문이 야기될 것이다. 당신의 비판적인 정신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과학은 소수의 삶을 더 기쁘게 만들 뿐이지 인류 전부에게는 미칠 수 없는 사치한 종목임을 당신은 단번에 관찰해야만 한다.

1세기 전에 과학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건전한 가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섭렵하였거나 혹은 비판적인 참된 과학적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가? 야만인 같은 편견과 미신을 소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 천명은 방향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사기꾼의 꼭두각시로서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혹은 과학이 신체적 도덕적 건강을 위한 이성적 기초를 세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살펴보자. 과학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신체의 건강을 유지할지를 말해 주고, 그리고 도덕적 지적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왜 그런가? 왜냐하면 오늘날 과학이 몇몇 특권층 사람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불평등, 임금 노동자와 자본주의 주인들의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 사회가, 이성적 삶의 원칙의 모든 가르침을, 인류의 10분의 9를 위해 아픈 아이러니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더 많은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단하게 끝내려고 한다. 다만 파우스트의 책장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먼지 가득한 창문이 그의 책으로 가득한 책장에 햇빛을 통과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둘러보라. 매순간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는 신선한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과학적 진실과 발견을 축적할 필요가 없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이미 얻은 진실을 퍼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또 그것들을 공동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인류가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기초가 될 것이다. 정의가 이것을 요구한다.

더욱이 고학의 바로 그 관심이 이것을 요구한다. 과학은 그 진리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진보를 하게 된다. 하른과 클라우슈스가 오늘날 공식화시킨 열역학 이론은 비록 19세기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학 지식의 전파가 그것을 대중이 받아들이도록 할 때까지 80년 동안 학문적 기록에서 사장되어 있었다. 에라스무스 다윈의 종의 변이에 대한 이론이 그의 손자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고 대중이론의 압박없이 학문적 과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까지 3세대가 흘러가야만 했다. 과학자는 시인이나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항상 그가 활동하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이러한 생각을 고취하게 되면 당신은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이 과학자들의 5세기 혹은 10세기 이전의 상태―확립된 진리를 완성할 수 없는 노예나 기계의 상태―에 머무르는 반면에, 과학자들이 과학적 진실들에 가득 둘러싸여져 있다는 것을 비난하는 상태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주어져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폭이 넓고 깊은 인간적인, 그리고 심오하게 과학적인 생각을 고취하게 되는 날, 그날에 당신은 순수과학에 대한 당신의 취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변화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일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탐색에다 당신의 과학적 연구를 이끌어 준 객관성을 부여하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대의명분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궤변론적인 추론을 그만 두게 될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 몫을 가진 소집단을 위해 일하는데 지쳐서, 당신은 당신의 정보와 헌신을 억압받는 자를 위해 곧바로 바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무가 성취된다는 느낌과 당신의 감성과 행동간에 진정한 조화가 당신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힘으로 드러날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언젠가―교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그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학은 그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연대된 노동자들의 강력한 힘과 집단 및 과학적 노동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어서 진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진보는 오늘날의 느린 진보가 초보자의 기초연습이었던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과학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쁨이 될 것이다.

당신이 이제 법률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면, 아마도 당신 역시 당신의 미래 활동에 대해 약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나는 당신이 이타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가정한다. 당신은 아마 생각할 것이다. 나의 삶을 부정에 대한 끊임없는 항거에 바치는 것―이 어느 직업보다 더 숭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이 선택한 직업에 자신을 갖고 인생의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좋다. 법의 보고서를 사심없이 한 번 살펴보고 실제 생활이 당신에게 뭘 말해 주는지 한번 고찰해 보자.

여기에 한 부유한 토지소유자가 있다고 하자. 그의 소작인이 세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를 쫓아낼 것을 요구한다. 법적으로 이 사건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소작료 지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전답을 빼앗겨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토지소유주는 그가 소작세 받은 것을 쾌락 추구에 탕진하였다. 소작인은 항상 일만 하였다. 토지소유주는 그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땅은 50년만에 3배로 값이 올랐다. 철도건설, 새 고속도로 건설, 택지의 배수시설, 황무지 건설과 공유지의 사유화 등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땅값 상승의 상당 부분에 헌신한 소작인은 파산을 하였다. 그는 관리인의 손에 넘어가고, 빚더미에 앉게 되어, 더 이상 땅주인에게 아무 것도 지불할 수가 없게 되었다. 법이 부자의 편에 있음은 명백하다. 땅주인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정의감이 법적인 허구에 의해 아직 질식되지 아니한 당신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그 농부가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야 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그것이 법이 주장하는 것이다― 혹은 당신은 그 땅주인이 농부에게 농부의 수고로 인해 땅값이 올라간 만큼 농부에게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 이것이 평등이 요구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편을 들 것인가? 법의 편에서 정의를 거역할 것인가? 혹은 정의의 편에서 법을 거역할 것인가?

혹은 15일간 노동자들이 예고 없이 파업을 할 때, 그때 당신은 어느 편을 들 것인가? 위기의 순간에 가공할만한 이익을 취한 고용주를 편드는 법의 편에 설 것인가? 혹은 그들의 처자식이 여위어 가는 걸 보며 하루에 2.5프랑만을 지불받은 노동자의 편에 서서 법을 거역할 것인가? 당신은 ‘계약의 자유’란 허구 편에 설 것인가? 혹은 당신은 좋은 성찬을 먹는 사람과 그리고 먹기 위해 그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 사이 ― 강자와 약자의 사이 ―의 계약이 아예 계약이 될 수 없다는 평등을 주장할 것인가?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 파리에서 한 남자가 식육점 가까이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비프스테이크를 훔쳐서 그것을 갖고 달아났다. 체포해서 심문한 결과 그는 실직 노동자임이 판명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이 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다. 식육점 주인은 그를 용서해 줄 것을 요청받지만 그러나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는 고소를 하고 그 실직 노동자는 6개월형을 받는다. 눈먼 정의의 여신이 그렇게 원한 것이다. 당신이 매일 이와 비슷한 판결을 들을 때 당신의 양심은 법과 사회에 대한 반항을 느끼지 않는가?

혹은 다시, 어린시절부터 학대받고 조롱받은 이 남자가 자라면서 한 마디 동정의 말도 듣지 못했고, 그리고 끝내는 일백수우를 훔치기 위해 그의 이웃을 살인함으로써 그의 생애를 마치게 된 이 사람에 대해 법의 집행을 요구할 것인가? 당신은 그가 범죄행위 이상으로 병들어 있음을 잘 알고, 또 이러한 경우에 우리 사회가 그의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야 한다는 것을 요구할 것인가? 혹은 그 대신에 20년간의 징역을 요구할 것인가?

당신은 분노의 순간에 제분소에 불을 지른 직공이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왕관을 쓴 암살자에게 총을 쏜 사람이 유죄라고 주장할 것인가? 바리케이트 뒤에 미래의 깃발을 꽂은 반정부 운동가들에게 총을 쏘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만약 당신이 배운 것을 되풀이 하지 않고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이 법을 분석하고 법의 기원을 가리는 허구의 연막을 벗긴다면, 이 법의 허구는 강자의 권리가 되고 또 피의 역사로 얼룩지게 만든 인류에게 전승된 모든 독재자들을 위해서 계승되어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법에 대한 당신의 경멸을 심각할 것이다.

당신이 법률의 봉사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은 매일 양심의 법에 반대하고 양심을 깍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불분명하게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의 양심에 대해 침묵하고 악한이 되거나, 혹은 전통을 깨뜨리고 모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부정을 폐지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회주의자가 되고,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을 산업에 적용시킴으로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선하려는 꿈을 가진 젊은 엔지니어인 당신에게 얼마나 슬픈 환상이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젊은 에너지를 가파른 절벽을 깍아내리고 커다란 산에 터널을 만들어서 자연으로 나누어진 두 나라를 하나로 연결하는 철도계획에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일이 시작되었을 때 전노동자들 가운데 이 힘든 터널 작업에서 질병와 궁핍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또 몇몇 사람은 몇 푼의 돈과 결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그 작업의 곳곳에서 사악한 탐욕이 가져온 인간 시체의 흔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철로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이 침입자들의 포병대를 위한 물자수송로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당신은 생산을 단순화시키기 위한 한 발명품을 만드는데 당신의 젊음을 바친다. 그리고 충분히 수면도 취하지 못한 수많은 노력 뒤에 마침내 이 가치 있는 발명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하자. 당신은 그것을 작업장에서 실제로 사용한다. 그 결과가 당신의 희망을 깨트려 버린다. 왜냐하면 10명, 20명, 혹은 수천명이 실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대부분은 어린아이이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기계적인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3명, 4명, 10명의 자본주의자가 재산을 모으고는 샴페인을 가득 들이킨다…. 그것이 당신의 꿈이었던가?

마지막으로 당신은 최근 산업의 진보를 연구한다. 그리고 재봉틀의 발견으로 재봉사가 아무 것도 벌지 못한다는 것,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벌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이아몬드 시추기에도 불구하고, 성 고타르(St. Gothard)의 노동자들은 관절이 마비되어 죽어간다. 지파르(Giffard) 승강기 앞에서 석공과 일일 노동자가 실직이 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기술을 인도해준 독립정신을 갖고 사회적 문제를 토론한다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사유재산과 임금노동제 하에서는 모든 새로운 발명이 노동자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기는커녕, 그의 노예상태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그의 노동을 더욱 헐값으로 만들고, 약간이라도 여유있었던 노동을 더욱 숨가쁘게 만들고, 그의 불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자는 바로 다름 아닌 이미 그 자신을 위해 모든 쾌락을 가진 자본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당신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될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아마 그럴싸한 논쟁으로 당신의 양심을 침묵시킴으로써 묵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에 당신은 당신의 젊은 시절의 정직한 꿈에 안녕을 고하고, 당신 혼자 힘으로 기쁨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 당신은 개발자의 진영으로 들어갈 것이다. 혹은 당신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당신 자신에게 말할 것이다 : “아니야, 지금은 발명을 위한 시간이 아니야, 우선 먼저 생산 체계를 바꾸도록 일해보자,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모든 새로운 산업의 진보가 인류 모두에게 혜택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계가 되어 버린 노동자 대중이 연구와 기술로 강화된 지성을 산업에 적용하는 생각(사고)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계적 생산이 더욱 앞서가게 되고 50년 내에 우리가 오늘날 꿈꾸어보지도 못한 것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학교 교사에게는 내가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의 직업을 지루한 잡일로 여기지 아니하고, 유쾌한 어린아이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생기있는 시선과 행복한 웃음 가운데서 편안함을 느끼고 이들 작은 머리 속에 그 자신이 어렸을 때 품었던 인류에 대한 생각을 심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나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나는 종종 당신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또 나는 무엇이 당신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지를 안다. 오늘날 당신의 생도가 라틴어에 능숙하지 못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마음을 갖고 있고, 열정적으로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낭송하기도 한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그는 그곳의 모든 독재자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러한 열정으로 쉴러의 정열적 싯귀를 읊조린다.

노예 앞에서, 그가 그의 쇠사슬을 부러뜨릴 때,

자유인 앞에서, 떨지 말라.

그러나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엄마, 아빠, 삼촌이 목사나 경찰에게 그가 존경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꾸중을 한다. 그들은 그에게 “전제, 권위에 대한 존경, 복종”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쉴러를 옆으로 비켜 놓고 “세상을 사는 법”을 읽게끔 만든다.

그리고 어제 다시 당신은 당신의 훌륭한 생도들이 모두 나쁘게 변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사람은 유니폼을 꿈꾸기만 한다 : 또 다른 사람은 그의 고용주와 연합해서, 노동자들에게서 빈약한 임금을 빼앗는다 : 그리고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품었던 당신은 이제 삶과 이상 사이의 슬픈 대조를 생각하게 된다.

당신은 아직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 2년이 지나, 실망과 실망을 거듭한 끝에, 당신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을 선반에 올려 두고, 텔은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결국 조금 정신이 나갔다고 말할 것이다 : 또 시가 특히 하루 종일 복리법에 관해 가르친 후에 난로가에서 읽기는 최상의 것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항상 구름 속에 있고, 또 그의 시는 삶이나 학교 검열관의 다음 방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혹은 한편 젊은 시절의 꿈이 성숙한 사람의 확고한 신념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은 학교 안에서 또는 바깥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폭넓은 인간적인 교육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것이 불가능함을 보고, 당신은 부르조아 사회의 근본적인 토대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교육부에 의해 해고되고, 학교를 떠나 우리들에게로 와서 동참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인류가 무엇을 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칠 것이다. 당신은 사회의 완전한 변화를 위해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고, 평등, 진정한 형제애, 세계의 끊임없는 자유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젊은 예술가, 조각가, 화가, 시인, 음악가인 당신은, 당신의 선조에게 영감을 고취시켰던 신성한 불이 오늘날의 사람에게는 부재함을 관찰하지 못하는가? 예술이 일반적이고 평범한 영역임을 보지 못하는가?

그것이 다를 수 있겠는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위해 참조되었던 고대 세계를 재발견하는 기쁨, 자연의 원천에 의해 다시 불붙는 기쁨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적 이상이 지금까지 그것을 차갑게 버려 두었고, 이상이 부족하여 현실 속에서 그 기쁨을 찾는다. 식물 앞에서 이슬방울을 칼라로 사진 찍을 때, 소다리의 근육을 모방할 때, 혹은 하수구의 숨막히는 오물이나, 창녀의 침실 따위를 운문으로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 등에서 기쁨을 찾게 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고 당신은 말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잇다. 만약 당신이 소유하고자 하는 신성한 불이 연기를 내는 심지보다 못한 것이라면 그러면 당신이 하고 있던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예술은 빠르게 가게장식인이나 삼류 오페레타의 연예소설 혹은 크리스마스 기념행사 이야기나 조달업자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당신들은 이미 그러한 단계까지 충분히 타락해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마음이 인류애의 사랑으로 고동친다면, 만약 진정한 시인처럼 당신이 삶에 대한 귀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둘레에 파도치는 이 고통의 바다 가운데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들, 광산에서 쌓여진 시체들, 바리케이트 위에 더미로 놓여진 손발이 잘려진 시신들, 시베리아 벌판(눈판)이나 열대섬에 자신을 묻으려고 가는 망명의 행렬들 가운데서, 정복된 자의 고통과 승자의 향연의 외침, 이 커다란 전투 가운데서, 또 영웅이 될 것인가 겁쟁이가 될 것인가의 와중에서 불의에 앞서려는 고귀한 결단력 앞에서 당신은 중립인 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와서 억압받은 자의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삶 그 자체―이 빛을 위해, 인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의 편에 서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마침내 나를 가로막는다.

“도대체 무엇을!”

당신은 말한다.

“그러나 만약 추상적 과학이 사치이고, 그리고 의술이 기만에 불과하다면, 만약 법이 부당하고 기계공의 발명이 착취의 수단에 불과하다면, ‘실천’인 지혜를 거부하는 학교가 극복되어야 한다면, 그리고 혁명적 생각이 없는 예술이 타락된 것이기만 하다면, 내가 해야 할 일로 무엇이 남을까?”

나는 대답할 것이다 :

광대하고 흥미있는 일, 당신의 활동이 당신의 양심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작업,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열적인 자연을 일으키는 작업.

어떤 작업? 이제 나는 당신에게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당신은 당신의 양심에게 뇌물을 주어(매수하여) “내가 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또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도록 내버려둘 만큼 어리석은 한에 있어 인류는 멸망해도 좋다”라고 말하며 끝낼 수도 잇다. 혹은 당신이 사회주의자의 대열에 동참해서 사회의 완전한 개혁(변화)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분석해본 결과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것이 또 그의 주위의 사물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리고 중산층 교육에 의해 제시된 궤변과 그의 친구들의 관심있는 견해를 무시하는, 모든 지성인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면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노동자를 야만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 당신의 환경을 떨쳐 버리고, 사람들 가까이로 가라. 그러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특권층과 억압받는 자가 있는 곳에서 당신은 노동자 계층의 엄청난 개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개혁은 자본주의 봉건제도의 노예제도를 영원히 파괴하고 그리고 정의와 평등에 기초를 둔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들의 슬픔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의 노래 속에서 표현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8세기 농노들의 노래나 오늘날 여전히 노래하는 슬라브 농부들의 노래로도 충분하지 못하다.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삶이 인류의 4분의 3에게 저주인 상태에서 벗어나 인류 모두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다. 그는 사회의 가장 힘든 문제들을 공격하고, 그리고 그의 상식, 관찰, 그리고 그의 힘들었던 경험을 갖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불행한 그의 동료들과의 공통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그룹을 형성하거나 조직한다. 그는 조직을 형성하는데, 기부금이 빈약하여 난관에 부딪친다. 그는 국경을 넘어 이해 받기를 노력하고, 이 땅에서 국가간에 전쟁이 불가능한 날이 서둘어 올 수 있도록 모든 인도주의적인 수사학자보다 그 이상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의 형제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그들과 더 잘 친숙해지기 위해, 그의 사상을 완전하게 만들고 또 전파시키기 위해―그는 그의 빈곤과 희생을 대가로 노동신문을 출판한다.

마침내 그날이 올 때 피로 붉게 물들어진 바리케이트의 보루 위를 그는 분연히 일어나서, 부자와 강자가 그들의 특권을 위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꿔놓은 자유를 정복하는데 투신한다.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인가! 얼마나 끊임없는 투쟁인가! 얼마나 쉼없이 다시 시작되는 노동인가. 때로는―지쳐서, 타락해서, 혹은 박해 때문에― 떠났다가 생겨난 갭을 메우기 위해, 때로는 조총사격대나 대포에 의해 감소된 대열을 재조직하기 위해, 때로는 대량학살로 중단된 연구를 회복하기 위해 노동은 끊임없이 새로 시작되었다.

그 신문들은 그들 자신에게서 음식과 수면을 빼앗아감으로써 사회로부터 지식 조각들을 낚아채야만 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려운 때는 빈곤한 사람들이 마른 빵을 먹고 모은 푼돈으로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인이 그의 노동자가, 그의 노예가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노동자들은 그들 가족들의 궁핍을 끊임없이 염려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당신이 그 사람들 사이로 가게 되면 보게 될 것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끝없는 투쟁 가운데서 얼마나 자주 노동자는 난관에 부딪치고 또 헛되이 외쳐보는가. “우리들의 희생 위에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공부할 동안에 우리가 옷을 입혀 주고 먹여준 젊은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거운 짐에 등이 굽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집을 지으며, 학교를 짓고, 박물관을 지었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우리가 읽을 수도 없는 이 멋있는 책을 창백한 얼굴로 인쇄하였는가? 인류의 학문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교수들은 어디에 있는가? 또 누구를 위해 인류는 그 희귀한 착취자 만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자유를 설교하며, 매일 짓밟히는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눈에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우리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 작자들, 시인들, 화가들 이 모든 위선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몇몇 사람은 수치스런 무관심 속에서 그들의 상황에 순응하며 즐긴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민을 경멸하고 그리고 서민들이 그들의 특권을 건드리면 갑자기 공격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 장면에 센세이션을 찾는 혹은 북소리와 바리케이트를 꿈꾸는 젊은이가 때때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리케이트로 가는 길이 멀고, 일은 힘들며, 그가 기대하는 면류관이 가시밭길임을 알고는 사람들은 대의명분을 저버린다. 대개 이러한 젊은이들은 야망에 가득찬 모험가들이다. 그들은 첫 번째 시도에 실패한 후에, 사람들의 표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이 그들(지도자)의 선포한 원칙을 감히 적용하면 제일 먼저 그 원칙을 적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다. 또 아마도 그들 지도자들이 명령을 내리기 전에 감히 움직이면 그 노동자 계층에게 포를 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에 덧붙여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만한 경멸과 비겁한 중상모략을 듣게 되고, 그리고 당신은 이제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강력한 사회적 전개 속에서 사람들에게 주는 그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 당신은 물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모든 젊은이가 그들이 시작한 그들의 광범위한 기업에서 사람들을 도와줄 그들의 젊은 혈기와 지성과 쓸 수 있는 많은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과학의 애호가인 당신이, 만약 사회주의의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였다면, 모든 과학이 새로운 원칙과 조화를 이루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당신이 여기에서 성취해야 할 과학적 혁명이 18세기의 과학적 혁명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임을 알지 못하겠는가? 당신은 역사가―오늘날 위대한 왕,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국회의원들에게 동의받은 후― 쓰여진 것임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역사 그 자체가 인간 발달에서 대중의 성취의 관점에서 쓰여져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경제학―오늘날 자본주의 약탈의 (신)성화인―이 그것은 수많은 적용과 마찬가지로 그 근본적 원칙에 있어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인류학, 사회학, 윤리학이 완전히 개조되어야 하고 그리고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진 자연과학 그 자체도, 자연현상의 개념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 크게 수정되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하라! 당신의 능력을 좋은 대의명분의 처분에 맡기자. 특히 우리들이 편견과 싸우고 더 나은 조직의 기호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당신의 분명한 논리로 우리를 도우라. 나아가서 우리에게 우리들 일상의 투쟁(논쟁)에서 진정한 과학적 연구의 두려움이 없음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우라. 그리고 예를 들어 설교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사람이 어떻게 진리의 승리를 위해 생명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라.

의사인 당신들은 쓰라린 경험에 의해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배웠다. 그러나 인간이 만약 이 상태로 계속한다면 인류가 서둘러 멸망할 것임을, 오늘, 내일, 매일 그리고 모든 기회에 지치지 말고 얘기하자. 인류의 99%가 과학의 충고에 정반대되는 상태에서 무기력하게 지내는한 당신의 처방(약)이 효과가 없을 것임을 얘기하라. 질병의 원인이 제거되어야 함을 얘기하라. 그리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얘기하라.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이 사회에 메스를 가하라. 이성적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얘기하라. 진정한 의사로서 회저병에 걸린(병든) 사지를 온몸이 전염되기 전에 잘라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라.

과학을 산업에 적용하기 위해 일한 당신은, 당신이 발견한 결과를 우리에게 와서 솔직하게 얘기하라. 미래를 향해서 용감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자에게 현재 우리의 지식이 어떠한 새로운 발명을 태동시킬 수 있으며, 더 좋은 조건하에서 산업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만약 인간이 항상 생산을 증가하고 싶을 때 인간이 무엇을 쉽게 생산할 수 있는가를 확신시켜 주라.

화가, 시인, 조각가, 음악가 당신들이 당신들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이고, 예술 그 자체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면, 우리들에게로 오라. 당신의 펜, 연필, 끌, 사상들을 혁명을 위한 봉사로 사용하라. 당신들의 우아한 문체와 인상적인 그림으로 압제자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거인적 항거에 대해 얘기하라. 당신들의 마음에 우리 조상들에게 영감을 고취시켰던 훌륭한 혁명적 열정으로 불을 붙이라. 아내들에게 사회적 해방의 위대한 대의명분에 생명을 바치는 남편들의 헌신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얘기해 주라. 사람들에게 실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추한가를 보여주고 왜 그것이 추한가를 설명해 주라(정확히 지적해 주라). 만약 모든 단계에서 현재 사회적 질서의 불합리가 없다면 삶이 어떠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얘기하라.

마지막으로, 지식과 재능을 가진 여러분 모두가, 만약 당신이 심장을 갖고 있다면, 당신과 당신의 모든 동료들이 와서 당신들의 능력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온다면, 당신이 주인으로서 오는 게 아니라, 미래를 정복하기 위해 나아가는 새로운 삶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당신 혼자서 힘을 얻기 위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가르치기보다 많은 자의 열망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그들을 신성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서두르거나 쉬지 않고 젊음의 모든 열정으로 일하기 위해, 그리고 삶 속에 있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때에 그리고 그때에만이 당신은 완전한, 고귀한, 이성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길 위에서 당신의 모든 노력이 풍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 번 성취되기만 하면 당신의 양심의 명령과 행동간의 숭고한 조화가 당신에게 당신이 결코 꿈꾸어보지 못한 힘을 가져다 줄 것이다.

진리, 정의 그리고 사람간의 평등을 위한 투쟁 ― 삶에서(인생에서)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당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앞의 세 장에서 인생이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딜레마의 관점에서, 부유층인 여러분이 용기있고 진지하다면, 와서 사회주의자와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사회적 혁명의 대의명분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 그러나 부르조아 환경의 영향을 느낀 사람들에게 얘기를 해보면, 또 얼마나 많은 궤변론과 투쟁을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편견을 극복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개입된 반대를 물리쳐야 하는가?

오늘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간단하게 얘기하기는 쉽다. 여러분이 사고하고 행동할 만한 조그마한 용기라도 가지고 있다면, 사건의 긴박감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만들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주의는 사람들의 깊은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만약 부르조아계급(유산계층)에 의해 나타난 몇몇 사상가가 과학을 신성화시키고 철학을 지지한다면, 그들이 발표한 사상의 기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연합된 정신의 산물이다. 이성적 국제 사회주의는 직접적인 대중의 영향하에서 노동자 조직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이 사업에 동참한 문필가들은 이미 노동자들 사이에 일어난 열망을 단지 명료하게 공식화한데 불과하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승리에 헌신함이 아니고 노동자계층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그 사람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오해하는 것이고 그의 대의명분과 역사적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렸을 때, 어느 겨울날 어두운 안마당에 놀기 위해 내려갔을 때를 기억하는가? 냉기가 당신의 엷은 옷을 뚫고 들어와 어깨가 움츠려지고, 닳아빠진 신발 속으로는 진흙이 들어왔었다. 그때에 멀리서 화려하게 옷을 차려 입은 부유한 아이들이 경멸의 눈초리로 당신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것을 봤을 때 당신은 이들 예쁘게 차려 입은 원숭이들이 지성, 상식, 에너지에 있어서 당신과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당신이 더러운 공장에서 아침 5시나 6시부터 12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훌륭한 학교, 학원, 대학에 교육을 받기 위해 편안히 다니고 있다. 또 당신보다 덜 지성적이지만 더 잘 교육을 받은 바로 이 아이들이 당신의 주인이 되고 모든 삶의 기쁨과 문명의 이익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당신에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좁은 평수에 5, 6명이 웅크리고 모여 사는 어둡고 습기찬 좁은 아파트로 당신은 돌아간다. 그곳에서 당신의 어머니는 세우러보다는 근심에 나이들고 삶에 지쳐서, 당신에게 당신의 유일한 식사인 마른 빵과 감자와 커피를 준다. 그리고 당신은 끊임없이 똑같은 질문을 갖고 당신의 생각을 괴롭힌다. 내일 빵값은 어떻게 지불하지, 그리고 다음날은 주인에게 집세를 어떻게 지불하지?

당신의 부모가 30 – 40년 동안 힘들게 살아온 똑같은 삶을 당신이 또 그렇게 살아야 하다니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빵 한 조각을 위해 영원히 걱정해야 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번영, 지식, 예술의 기쁨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신의 평생을 수고함이 옳은가? 극소수의 상전에게 모든 사치를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을 헌신하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영원히 포기함이 옳은가? 곤경의 때가 올 때에 노동에 지쳐서 고통과 비참으로 끝날 것인가? 이것이 당신이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인가? 아마 당신은 포기할 것이다 :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이 똑같은 운명을 살아왔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도 역시 또한 복종해야만 한다. 열심히 일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잘살려고 노력해보자!”라고.

아주 좋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삶 그 자체가 당신을 계몽시키는데 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어느날 불경기의 날이 올 것이다. 예전처럼 일시적인 불경기가 아니라 전 산업을 파괴하고, 노동자를 비참 속에 빠트리고 그 가족들을 빈곤 속으로 몰고 가는 불경기의 날이 올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지금 그러한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눈 앞에서 당신의 아내, 아이들, 친구들이 어떻게 서서히 궁핍에 찌들려서, 또 여위어 가는지를 보게 된다. 음식이 부족하고, 보살핌과 의료시설이 부족하여, 그들은 비참한 고통 속에서 운명을 다한다. 그러나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들과(당신들과) 상관없이 대도시의 햇빛 가득한 거리에는 유쾌한 삶들이 즐겁게 영위된다. 그때에 당신은 이 사회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이 불경기의 원인을 생각하게 되고 또 극소수 상전들의 탐욕에 수백만 인간이 희생되는 이 혐오의 깊이를 세밀하게 조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회학자들이 우리의 현사회가 밑바닥부터 꼭대기 끝까지(하층에서부터 상층까지) 재조직되어야 하고, 또 재조직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들일 옳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한번은 당신의 고용주가 자신의 재산을 더욱 늘리기 위해 그리고 당신에게서 몇푼이라도 더 착취해 내기 위해 임금 감소를 시도할 때, 당신은 항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 대답할 것이다 : “만약 내가 제안하는 임금으로 일하지 않으려면, 가서 풀을 먹고 살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주인이 양의 털을 깍듯이 당신을 착취하고, 또 당신을 마치 열등한 종류의 동물인 것처럼 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만족하지 않고, 그는 모든 면에서 당신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 당신은 그의 앞에 엎드려 인간의 고귀함을 다 포기하고 모든 굴욕의 고통을 감내하거나, 혹은 피가 솟구쳐 당신을 쓰러뜨리는 그 노동에 몸을 떨고, 거리에 나와 사회개혁자들이 “반역하라! 경제노예제도에 항거해서 반역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노예제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얼마나 옳은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에 당신은 와서 사회주의자들의 대열에 자리를 잡고, 경제적․정치적․사회적 ― 모든 노예제도의 완전한 파괴를 위해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또 언젠가 당신이 그렇게 좋아했던 한 젊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걸이에, 솔직한 태도와 유쾌한 대화를 소유한 자였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세상 모든 고통과 싸운 뒤에, 그녀는 마을을 떠나 대도시로 간다. 그녀는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러나 벌어서 최소한도로 정직하게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이 어떠했는지 아는가? 어떤 자본주의자의 아들에게 구애를 받고 그의 꾀임에 넘어가 자신을 내맡겨 버린다. 젊음의 열정으로 자신을 내던지지만 1년 뒤 아이를 가진 채 버림을 받고 만다. 그녀는 더욱 용감하게 투쟁하지만, 추위와 굶주림의 이 부당한 싸움에서 패배하고,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게 된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어리석은 말로 이 불쾌한 기억을 쫓아낼지도 모른다. “1등도 아니자만 꼴찌도 아니야.”라고 당신은 말하고 그리고 어느날 저녁 한 카페에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는 가운데서 그 젊은 여자가 모욕 받는 것을 듣게 된다. 한편 이 기억이 당신의 심장을 사로잡고, 당신은 그 저주받을 유혹한 남자를 찾아내어, 그녀의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당신은 이와 같은 매일의 사건들의 원인들을 통해 깊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한편에는 비참한 자들이, 또 다른 한편에는 그럴싸한 사탕발림의 말과 짐승같은 욕구를 가진 플레이 이들이 있는 한 ― 즉 사회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한 그러한 불행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이제 이 나뉘어져 있는 불평등을 종식시켜야 할 시간임을 깨닫고, 서둘러서 사회개혁자들에게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 여자들은 냉정하게 방관만 할 수 있는가? 당신 옆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예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만약 사회 조건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운명이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을지 당신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의 막내 동생이나 당신의 자식들의 미래가 어떠할지 생각해 보지 않는가? 당신 아들도, 당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루하루 빵 얻는 것 외에는 다른 걱정없이, 술집 외에는 다른 기쁨없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당신은 원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남편이 재산을 물려받은 유산자의 처분에 맡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남편이 재산을 물려받은 유산자의 처분에 맡겨지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그들이 주인을 위한 노예, 단순한 전투에서 대포에 희생되는 병사, 부자의 목초지를 비옥하게 하는 비료가 될 것을 원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하다! 당신의 남편이 결단력을 갖고 열정적으로 파업을 하다 손에 수갑을 차고 따라서 그의 삶은 끝장이 나며, 그 오만한 자본가가 몇 년 형일 지를 결정한다는 것을 당신이 들을 때 당신의 피가 끓을 것임을 안다. 당신은 스페인 민중봉기 때 군인의 총칼에 자신을 내맡긴 스페인 여자를 존경할 것임을 나는 안다. 또 감히 사회주의자 죄수를 분노케 한 간수의 가슴에 총알을 박은 한 여자의 이름을 경탄하며 언급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파리의 여자들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총알들 속에서 그들의 남편들을 어떻게 격려했는가를 읽을 때 당신의 가슴이 뛸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도 결국은 미래를 정복하기 위해 일하는 자들과 동참하기 위해 우리의 운동에 합류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진지한 젊은이, 남녀, 농부, 노동자와 군인,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권리를 생각하고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 당신은 당신의 형제와 함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것이고, 그 혁명은 모든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고, 옛 전통을 깨뜨리며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선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혁명은 마침내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자유를 마침내 성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라. 그들 노동의 열매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그들 능력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또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일하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유익한 것을 성취하기에는 우리 집단이 너무 연약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

부정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농부들, 그들 자신은 왕겨를 먹고 주인을 위하여 곡식을 남기는 농부들 ― 우리 자신이 바로 이 수많은 대중인 것이다. 우리는 넝마를 입고 비단과 벨벳을 짜는 노동자들 ― 우리도 또한 대중인 것이다. 공장이 고동을 울릴 때 우리는 거리로 나가 성난 바다처럼 달려들 수 있다. 우리들의 장교가 십자훈장이나 리본을 받을 수 있도록 총알받이가 되는, 엄한 훈련을 받는 우리 군인들은, 어리석게 우리 형제를 쏘기도 하는 우리 어리석은 군인들은 ― 우리는 다만 방향을 바꾸어(전향하여) 우리에게 명령하고 이 리본을 멘 장교가 창백하게 되도록 만들기만 하면 된다. 고통받으며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대중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바다(대양)인 것이다. 우리가 뜻만 가진다면, 정의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영어 번역문 ‘Appeal to young’ 링크’;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_Archives/kropotkin/appealtoyou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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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대한 논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방인 알자스에 사는 프란츠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랑스어 수업에 지각을 한다. 혼이라도 나지 않을까 하고 조바심에 교실을 들어서는데, 선생님도 평소와는 달랐고, 교실 뒤 쪽으로는 프랑스어 책을 보는 마을 주민, 어른들이 있었다. 어리둥절한 프란츠에게 선생님은 “오늘이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이다”라고 말한다. 이유인 즉, 알자스 지방이 프로이센(지금의 독일)과 분쟁중인데, 1871년 당시 프랑스가 패배해 독일이 알자스를 점령하였고, 더이상 알자스에서 프랑스어를 쓰지 못 하도록 법이 제정되어 마지막 수업이 된 것이다. 결국 프로이센군의 나팔이 울리는 12시에 선생님은 ‘프랑스 만세!’라고 칠판에 쓰고 교실을 나가며 소설이 끝난다.

이 소설은 한국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나라와 말, 이름, 전통 등을 규제 당한 경험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항간에서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한국어 버젼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내용은 대략, 일제 강점기 시절 한글 수업에 들어가니깐, 선생님이 오늘이 마지막 한글 수업이라고 한다. 뒤에서는 동네 주민들이 개화기 국어학자 주시경 같은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며, 아름다운 한글을 잃어버림에 대해 비통히 운다.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이제 한글을 쓰지 말라고 했던 것이고, 선생님은 ‘조선 만세!’라고 쓰고 교실을 나가버린다.

설움이 담긴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는 논란거리가 있다.

사실 알자스 지방은 원래 독일 영토였다는 것. 알자스-로렌지방은 독일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독일의 영토였는데, 프랑스가 그걸 잠시 뺏었다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해서 내줘야 했던 영토였다. 게다가 ‘마지막 수업’, ‘별’등을 통해 서정작가로 알려진 알퐁스 도데는 사실 왕당파에 내놓으라는 지독한 우파중 한명이다.

알자스어에 대해 알아보면 좀 더 세밀하게 역사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다.
알자스어는 프랑스의 북동부 알자스(Alsace)지방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의 지역 방언중 하나로서, 그러나 알자스가 지금의 프랑스 영토로 자리 잡은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이고, 지리적으로는 알자스 동쪽에 흐르고 있는 라인강만 건너면 독일이 나온다.

알자스어는 프랑스어로는 ‘알자시앙(Alsacien)’, 알자스어로는 ‘엘제시슈(Elsässisch)’라고 불리는데, 알자스어는 프랑스의 영토의 방언으로 구분하고 있다지만,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프랑스어보다는 독일어에 훨씬 가깝다. 아니, 실제로 독일어의 방언이라고 볼 수 있다. 알자스어는 프랑스에서 프랑스어 다음으로 두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방언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어학상으로는 프랑스어와는 관련이 없고, 고지독일어(haut-allemand, Hochdeutsch)에 속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재 독일어와는 차이점이 있는데;

1. Génitif(속격)에 차이가 있다.
– 독일어의 des(남성 및 중성 속격), der(여성 및 복수 속격)에 해당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2. 어느 독일 방언 구사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 방언을 구사한다.
– 수 세기 전부터 프랑스와 독일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알자스 지방은 독일의 여러 방언을 쓰는 지역과 상대적으로 소통이 적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독일어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 중세 독일 어휘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3. 많은 프랑스 어휘를 차용하였다.
– 독일 또한 상당수의 프랑스 어휘를 차용하였으나, 알자스는 여러 차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었고, 현재는 완전히 프랑스의 영토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현재의 독일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다.

* 프랑스어-독일어-알자스어 비교

 

또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동부에 있는 슈바벤 지방에서 사용되는 방언보다 서부에 있는 슈바르츠발트 (검은숲)를 포함한 바덴 지역에 속하는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방언에 가깝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들로는 실제로 스위스와의 왕래가 잦은 편이고, 스위스에 거주하는 한인 또는 유학생들이 알자스 지방과 언어에 대해 문화적인 접근 차원에서 유사함을 언급하는 사례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알자스가 프랑스어를 적극 받아들이던 또다른 계기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반독(反獨) 감정으로 오랫동안 알자스는 초등교육 단계에서 독일어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 뿐 만아니라 프랑스어 교육이 강화되고, 알자스 지역 내에서 유통되는 신문의 초등학생용 지면과 어린이와 젊은 층을 겨냥한 출판물에서는 오직 프랑스어만 사용되는 등 공공 장소에서 독일어와 알자스어의 배타 풍조가 이어졌다.

1999년, 지역 언어를 중시하고, 지역 문화를 배척하는 문화 풍조에 비판과 함께 이른바 ‘조스팽 개혁’은 유치원과 초등 교육 단계에서 독일어 교육을 하게 되었지만, 그 이전의 흔적도 있고 지금도 세대가 내려가는 만큼 알자스어을 모국어로 하지 않고,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경향이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 지도
 위 지도에서 알자스와 로렌이 얼마만큼 벨기에와 독일과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참고로, 로렌 지방과 맞닿아있는 벨기에는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를 함께 사용하는 국가이다.

또한 알자스 지역의 와인은 특이하게도 프랑스식 라벨 표기와 다르게 Riesling(리즐링) 또는 Gewurztraminer(게부어츠라미너) 등의 독일식 품종 라벨 표기를 한다. 와인의 풍미, 깊이 또한 품종 때문인지 독일 와인의 풍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강한 느낌의 바디감과 드라이한 맛을 갖고 있어 독일 와인의 장점을 가지면서도 프랑스 와인의 표현을 잘 보여주는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독일의 화이트 와인에 물을 섞어 마시는 Weinscholle(바인숄레)와 비교하며 마시는 것이 와인 팬층에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와 달리 민족(Nation)의 개념에서 다른 관점이 있다.
유럽에서 발생한 민족의 개념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30년 전쟁과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데, 30년 전쟁은 유럽의 변방인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계승 분쟁에서 시작 됐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인 팔츠 백작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다툼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강대국인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배후 조작및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의 개입 등으로 전쟁은 30여년에 걸친 국제전으로 발전한다. 30년 전쟁 이전 까지는 중세시대 귀족들 간의 소규모 전투나 국제전이라고 해도 소규모의 국지전 외에는 없었다. 그 이유인 즉, 민족 개념이 존재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들은 자신 바로 위에 있는 왕과 무시 못할 권력층인 종교인들에게 잘 보이면 되었기 때문에 군주들간의 소규모 전쟁만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 절대왕정이 수립됨과 동시에 지방 분권적인 체제에서 중앙집권적인 통합국가들이 등장하면서 민족의 개념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왕권이 강화되고, 비로소 30년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근대 유럽사에서 30년 전쟁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전쟁을 통해서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유럽의 기본 틀이 잡혔기 때문이다.
30년 전쟁은 1618년에 시작해 1648년에 끝남과 동시에 프랑스가 협정을 맺으면서 알자스-로렌을 뚝 떼어간다.
또한 프랑스가 18세기 경, 독일의 민족 개념을 흔들어 놓으면서 독일이 분란에 쌓이는 동안 프랑스가 민족의 개념을 먼저 정립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도 민족의 개념이 생기면서 영토를 하나된 국가로 통일 할 수가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보다 민족 개념을 쟁취하는 그 증거로는 1879년에 있었던 프랑스의 혁명,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 쓰였던 암구호가 ‘민족’이었다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독어와 영어로 불어 사이트를 통해 확인 해보려 했던 시도는 무의미 하게도 바스티유에 있는 포커 사이트 암호를 묻는 결과만 잔뜩 찾게 되었다)
보불전쟁은 1871년에 끝난다. 영토 점유기간을 보면, 224년 동안 프랑스가 점유했던 셈이고, 그 사이의 알자스-로렌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혁명과 독일의 민족개념에 저항했던 프랑스 국민들과 함께 하며 스스로 본인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었다고.
결국 이 이야기는 독일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독일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갈취한 프랑스는 당연히 침략자이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수 세기 간 걸쳐던 복잡한 역사를 배제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독일로 반환 되어야 할 영토이겠다. 하지만 정작 알자스-로렌인들은 근대와 현대를 거쳐오며 자신들이 프랑스인으로 살고 있다.

참조;
Franz의 <The Triumph of freedom> 중 ‘[알자스어] 프랑스어 알자스어에 대해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_hofbauer&logNo=140191364854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알자스어 페이지
–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C%9E%90%EC%8A%A4%EC%96%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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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관련 기사들을 읽다가 작성하게된 게시글인데, 작성하는데는 서너 시간 이상 걸린 반면에 노력에 비해 읽기 편한 글 같진 않네요. 어쨌든, 감기 조심하세요. 새해 정초부터 감기로 고생.. 작년에는 편도선 염증까지 여덟번이나 걸렸..

Ke$ha – Take it off (Ukulele Punk Cover)

There’s a place downtown, where the freaks all come around.
시내에 이런데가 있어, 모든 미친사람들이 들르는.
It’s a hole in the wall, it’s a dirty free for all.
거긴 허름한 술집이야, 모두에게 더러운 걸 공짜로 주지

When the dark of the night, Comes around,
밤의 어둠이 찾아오면
that’s the time.
바로 이때야
That the animal comes alive.
동물이 살아나는 시간
Looking for somethind wild
무언가 사나운것을 찾으면서

N-now we lookin’ like pimps in my gold Trans-Am
이제 우리는 내 금색 trans-am차를 타면서 매춘업자처럼 보이고 있지
Got a water bottle full of whiskey in my handbag
내 핸드백 안에는 위스키로 꽉 채운 물병이 있지
Got my drunk text on, I’ll regret it in the mornin’
술취한 문자를 받았어, 아침에는 그걸 후회하겠지
Bur today, I don’t give a, I don’t give a, I don’t give a
하지만 오늘은, 난 쥐뿔도, 난 쥐뿔도, 난 쥐뿔도

There’s a place downtown, where the freaks all come around.
시내에 이런데가 있어, 모든 미친사람들이 들르는.
It’s a hole in the wall, it’s a dirty free for all.
거긴 허름한 술집이야, 모두에게 더러운 걸 공짜로 주지
And they turn me on, when they take it off
그리고 그들은 날 흥분하게 해, 그들이 벗어던질때
When they take it off, everybody take it off
그들이 벗어던질때, 모두다 벗어던져

There’s a place I know if you’re looking for a show
만약 네가 쇼를 찾고 있다면 내가 아는 데가 있어
Where they go hardcore and there’s glitter on the floor
사람들이 하드코어까지 가고 바닥에는 반짝이가 있는 곳
And they turn me on, when they take it off
그리고 그들은 날 흥분하게 해, 그들이 벗어던질때
When they take it off, everybody take it off
그들이 벗어던질때, 모두다 벗어던져
Lose your mind, lose it now
정신을 잃어버려, 지금 잃어버려
Lose your clothes in the crowd
군중속에서 네 옷을 잃어버려
We’re delirious, tear it down
우리는 혼수상태야, 찣어부숴버려
‘Til the sun comes back around
해가 다시 돌아 떠오를 때까지

Now we’re getting so smashed, knocking over trash cans
이제 우리는 너무 취해서 쓰레기통위에 넘어지고 있지
E’erbody breaking bottle it’s a filthy hot mess
모두 술병을 깨뜨리고, 이건 더럽고 뜨거운 난장판이야
Gonna get faded, I’m not the designated driver
곧 바래버릴거야, 난 designated driver(*파티에서 술취한 사람들을 집에 차로 대려다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가 아니니까
So I don’t givea, I don’t give a, I don’t give a
그러니까 난 쥐뿔도, 난 쥐뿔도, 난 쥐뿔도

There’s a place downtown, where the freaks all come around.
시내에 이런데가 있어, 모든 미친사람들이 들르는.
It’s a hole in the wall, it’s a dirty free for all.
거긴 허름한 술집이야, 모두에게 더러운 걸 공짜로 주지
And they turn me on, when they take it off
그리고 그들은 날 흥분하게 해, 그들이 벗어던질때
When they take it off, everybody take it off
그들이 벗어던질때, 모두다 벗어던져

There’s a place I know if you’re looking for a show
만약 네가 쇼를 찾고 있다면 내가 아는 데가 있어
Where they go hardcore and there’s glitter on the floor
사람들이 하드코어까지 가고 바닥에는 반짝이가 있는 곳
And they turn me on, when they take it off
그리고 그들은 날 흥분하게 해, 그들이 벗어던질때
When they take it off, everybody take it off
그들이 벗어던질때, 모두다 벗어던져

Oh, oh, oh
Everybody take it off
모두다 벗어던져
Oh, oh, oh
Everybody take it off
모두다 벗어던져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Oh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Right now, take it off
지금당장, 벗어던져

There’s a place downtown, where the freaks all come around.
시내에 이런데가 있어, 모든 미친사람들이 들르는.
It’s a hole in the wall, it’s a dirty free for all.
거긴 허름한 술집이야, 모두에게 더러운 걸 공짜로 주지
And they turn me on, when they take it off
그리고 그들은 날 흥분하게 해, 그들이 벗어던질때
When they take it off, everybody take it off
그들이 벗어던질때, 모두다 벗어던져

There’s a place I know if you’re looking for a show
만약 네가 쇼를 찾고 있다면 내가 아는 데가 있어
Where they go hardcore and there’s glitter on the floor
사람들이 하드코어까지 가고 바닥에는 반짝이가 있는 곳
And they turn me on, when they take it off
그리고 그들은 날 흥분하게 해, 그들이 벗어던질때
When they take it off, everybody take it off
그들이 벗어던질때, 모두다 벗어던져

The Templars – Carry On (with korean translate)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UXoc8ruOoAM?rel=0]

뉴욕의 스킨헤드 밴드, 템플러스. 그들에 대한 소개는 이 곡으로 생략한다.

Carry On
계속해

I’m sitting here with an empty glass
난 여기 비어있는 유리잔과 함께 앉아있어
Wondering how long the night will last
이 밤은 얼마나 오래갈까 생각해
And I’m sitting here and I wonder
그리고 내가 여기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지 생각하지
If it’s worth the effort at all
이게 모두에게 노력할 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I get up from the table
난 테이블에서 일어나
And head out through the door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And I’m standing, looking back and wondering
일어서, 뒤돌아 보고 생각해
What is this all for
대체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위해서일까?

I get home to my bed
난 내 집에 침대에 누웠다가
I lie there awake
잠에서 깨어났어
And I’m lying there I wonder
그리고 내가 누워서 생각했지
How will I carry on
얼마나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Carry on, Carry on ? gotta keep moving, gotta get on
계속해, 계속할까 멈추지 말아야해, 그래야만 해
Carry on, Carry on ? put the world behind me and keep looking on
끝까지 계속해 네 뒤에 세계를 두고 지켜 봐
Carry on, Carry on ? I’ll never be stopped if I just push on
계속하자 계속해 만약 내가 밀쳐졌다해도 난 절대 멈추지 않을거야.
Carry on, Carry on ? I’ll never be beaten if I just stay strong
지치지 말고 계속해 가만히 앉아 두들겨 맞고 있진 않을거야.

I awaken to a new day
난 새로운 아침에 일어났지
But I know it’s just the same shit as yesterday
하지만 알고 있어. 이건 단지 어제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I’m not looking forward to the things I have to do
난 앞으로 내가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기대 하지 않아

I go on with my daily routine
난 판에 박힌 일상을 살고 있지
Feeling like a God damn machine
아주 좆 같은 기계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And I’m thinking to myself and wondering what is this all for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해

I’m sitting here with an empty glass
난 여기 비어있는 유리잔과 함께 앉아있어
Wondering how long the night will last
이 밤은 얼마나 오래갈까 생각해
And I’m sitting here and I wonder
그리고 내가 여기에 얼마나오래 앉아 있었는지 생각하지
If it’s worth the effort at all
이게 모두에게 노력할 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CHORUS
It all seems too much, when I think about the days
그 때를 생각 하다보면, 난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
I spent in misery, wondering what the end will bring
이 결말이 무엇을 가져올지 생각하다보면 난 지치고 고통스러워
I look out through the window and I know that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 보이는 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
Tomorrow will be like yesterday
내일은 어제와 같을것이야..
2 x CHORUS

In to the Scene, 1 – Frei.Wild and With Full Force

 x. to english reader.
 this post talking about a neo-nazi band frei.wild, with full force festival, 2013 what happend and why people boycott them at the last year. also i’m so sorry that i wrote only korean. if you want to know about this post, please ask to use ‘문의하기’ mail-form that put name, email and your sentences in regular sequence of right frame.
 x. 이 포스트는 이탈리아 밴드 Frei.Wild 가 많은 이로부터 보이콧을 받고, With Full Force 페스티발, 2013 에서 취소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이, 노약자는 이 포스트를 읽어도 상관 없지만, 빨갱이-아나키스트 알러지가 있는 극우 어린이들은 이 포스트를 멀리 피하고, 자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래 전부터 줄곧 한국은 록음악의 불모지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이제는 페스티발이 많아지다 못해 대기업들 마저 뛰어들어 우후죽순으로 락페스티발이 늘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음악 씬에서 다양성이란 아직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이다. 한국 펑크/하드코어 씬은 탄생을 이제는 거의 20년 쯤으로 어림잡을 수 있을만큼 시간이 지났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이것을 어딘가에 씬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망설여진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시장이라는 이유도 존재하겠지만, 클럽을 운영하는 사람, 밴드, 관객, 그루피, 헤비리스너, 그리고 평론가들을 둘러싼 문화들에 결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클럽은 밴드에게 페이를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고, 밴드가 공연 기획부터 홍보까지 도맡아 클럽을 먹여살리는 일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밴드는 계속해서 자립하기 어려운 환경이 반복되는 틀 안에서 밴드 마다의 독자적인 개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다양성이 사라지고 이도 저도 아닌 모습으로 변형 되어갔고, 차츰 그 시작할 때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관객은 공연에 올 때만 펑크로 변하는 이른바 주말 펑크 같은 것이 되가고 있었고, 속된 말로 어느 정도 이 바닥을 구르면 사회로 돌아가 직장인이 되어 자신이 사랑했던 이 바닥의 기억들을 어린 날의 치기처럼 취급하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뭉갰다. 이런 흐름 속에 그루피라는 것은 언제 한번 제대로 생겨보기도 전에 poser, 포저라는 비판을 받으며 씬이 커질 다른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요인이었다. 평론가들 마저도 대부분 20년 내내 섹스 피스톨스, 클래쉬, 댐드, 블랙 플랙, 데드 케네디스, 미스핏츠, 그린데이, 오프 스프링, 랜시드, 노에프엑스, 에이브릴 라빈 등을 순으로 열거하며, 펑크는 이것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절하시켰다. 그게 고의적인 직무유기였던지 아니면, 고의가 아니라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감추고 싶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개 잘 쓰여진 블로거들의 포스트보다 못한 평론들이 줄을 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생각했고, 몇 년이나 길게 생각했던 그 이야기를 이제 시작 해보려한다.

글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알린다. 나는 단지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첨언들을 달아, 이야기가 다소 매끄럽지 않음을 감수하면서라도 적어도 펑크를 접해봤지만 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 한다.

유럽의 어느 록페스티발

첫 이야기로는 독일의 Frei.WIld 라는 밴드의 이야기를 통해 음악과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한다.

 Frei.Wild 는 이탈리아의 브릭센 지방 밴드로서 원래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로 귀속된 지방의 밴드다. 브릭센은 아직도 오스트리아-독일의 정서와 문화가 남아있고, 때문에 Frei.Wild는 많은 곡들을 독일어로 혹은 영어로 노래 한다. 이들은 가사에서 정직함과 유럽이 건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외롭게 투쟁하는 이야기들을 서정적인 감성들을 정치적인 가사로 풀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팬들이 대개 우파 성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사가 신념, 정직, 삶, 희망 등에 대한 이야기고 네오 나치와 직접적으로 연루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없어보였다. 적어도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Frei.Wild 가 이전에 전혀 의심을 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신념 따위를 강조하는 밴드들은 대개 우파-민족주의 성향이거나, 마초 밴드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유럽의 네오나치들이나 일본의 재특회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려는 저항적인 투쟁가, 레지스탕스, 애국 투사, 영웅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 부여한다. 때문에 타 인종에 대한 차별과 폭력, 테러 등으로 경찰에게 연행되거나 유죄가 인정되어 중형으로 교도소에 사는 것, 더더욱이 출동한 경찰특공대와의 총격전에서 죽기라도 하면 영웅이 되어 죽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애국 보수를 자처하는 어버이 연합이나 일베와도 매우 닮아있다.
신념은 나치가 강조했던 것들 중 하나인데, 2차 대전 이후 지도자와 같은 단어처럼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졌는데 아직도 몇 펑크/하드코어 밴드들이 쓴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펑크/하드코어는 스포츠나 게임, 패션과 이슈 등과 같은 것이 아니고, 삶을 마주하는 태도로서 태어났기에 그간의 저항적인 록음악들과는 분명히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시 Frei.Wild 이야기로 넘어가 이들은 이들의 모호한 가사로 보수적 감성을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대부분 우파 팬들이이라는 이유로 극우 세력을 지지하는 밴드로 간혹 의심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데드 케네디스는 ‘Nazi punks fuck off’를 불렀고,
이후 Napalm Death 와 같은 그라인드 밴드는 물론, 폭넓게 다시 불리고 있다.

Frei.Wild 이야기로 가기 전에 몇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음악은 정치적 올바름과 관계없이 듣기에 좋기만 하면 된다고?
그들의 사상은 관심없지만, 네오 나치들이 음악만큼은 잘 만들어서 가끔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려서 괜찮다고?
큰일 날 소리. 단언컨데 유럽에서는 절대 용인 받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북유럽의 노르웨이에서 유럽의 NSBM, 네오 나찌들의 블랙메탈을 이끌던 Burzum의 바르그 비켄네스가 중형으로 유죄를 선고 받고, 감옥 생활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럽에서 맹위를 떨칠 것 같던 NSBM은 마치 사회를 등지고 방 구석에 쳐박힌 히키코모리들이 게임상에서 아이템을 뺐겼다며 현피를 신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유아적인 발상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지금 유럽에서 RABM(Red and Anarchist Black Metal)이 일어서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극우 네오나치들의 유아적인 발상과 중2병 말이다. 아무튼 크러스트 펑크는 블랙메탈의 교류가 커지면서 80년대 말부터 블락켄드 크러스트, Blackened Crust 에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이는 80년대 중반부터 Discharge류의 크러스트와 데스메탈이 만나 시동이 걸린 그라인드 코어와 함께 성장했다. 때문에 이전과 달리 종종 크러스트/그라인드 밴드들과 블랙/데스 메탈 밴드들이 함께 공연하며 씬을 공유하는 일이 많아졌다. 스웨디쉬 크러스트/그라인드 밴드들이 독보적인 활동을 보인건 80년대 말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비켄네스의 살인 이후에는 정말로 북유럽의 씬은 정리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지금도 크러스트들이 블랙/데스 공연장에 가거나, 블랙/데스 메탈 팬들이 크러스트/그라인드 공연에서 자주 보인다. 유럽에서 가장 그 정신을 잘 지키고 있는, Obscene Extreme Festival 이 바로 그 살아있는 증거이다. 네오 나치들은 대부분의 공연장 무대에 설 수도 없고, 사회적인 비판은 물론이거니와 관련해 문제를 일으킬 시에 법적 처벌을 받는다. 나치 옹호는 정치적 올바름을 넘어서서 지난 차별과 폭력, 살인, 학살로 물든 중범죄 그 자체, 이상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반기를 든 펑크에 있어 이러한 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유럽 어느 공연장에서 그리고 바에서 스크류 드라이버와 같은 인종차별적이고 극우적인, 네오 나치들이 찬양하는 류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그 곳은 단연 네오 나치들의 공간 뿐일 것이다.

크러스트 펑크에 대한 소개는 이 그림 한 장을 대신하고, 다음으로 미루겠다.

 “Wir haben immer gesagt, dass wir das Land hier von Herzen lieben/ Balsam für die Seele, wie wir euch damit provozieren/ Ihr seid dumm, dumm und naiv/ Wenn ihr denkt, Heimatliebe = Politik/ Dumm geboren” – aus “Das Land der Vollidioten”
 “우리는 언제나 말해왔어, 우리 마음 속으로부터 이 땅을 사랑한다고 / 우리가 너희를 울리는 영혼의 안식처 / 너희들은 멍청해, 멍청하고 너무 순진해 / 너희가 향토애(우리의 땅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는 정치야 / 멍청하게 태어났어” – Frei.Wild 의 노래 ‘멍청이들의 땅’ 중에서
가사만 봐도 극우, 네오나치의 냄새가 난다. 한국에도 이런 류의 노래로 극우,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몇 펑크/하드코어 밴드가 있다는 것을 가사만 봐도 단번에 알 수 있다.

크러스트 펑크

왜 2001년에 결성된 Frei.Wild 가 2013년, 독일의 With Full Force라는 큰 락페스티발을 앞두고, 보이콧 대상이 된 것일까? 더군다나 그 보이콧의 주체가 단지 좌파 계열의 정치적 단체 뿐만이 아니라 펑크/하드코어 씬은 물론, 청년 문화 그룹들(Jugendkultur-verein), 독일어를 사용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의 주요 록 음악 매거진에서 보이콧을 선언하게 된 것일까? 그들은 독일어로 단결된 유럽을 위한 투쟁의 노래를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에는 최소 3만명 이상이 찾는 With Full Force 페스티발 2013년의 라인업이 굉장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와중에 참가하기로 한 Frei.Wild 를 나치 씬 전문 르포타쥬 기자 토마스 쿠반의 폭로가 기폭제였다. 그들이 자주 네오나치를 찬양하는 공연에 참가해왔는데, 이것이 단순히 루머가 아니라 완연히 나치를 옹호함을 보여왔다는 것. 그 폭로 이후로 곤란해지자 보컬 필립 부르거는 이는 본인만의 입장이며, 자신의 인터뷰 내용이 100퍼센트 밴드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Kurz gesagt, ich dulde keine Kritik/ An diesem heiligen Land, das unsre Heimat ist/ Drum holt tief Luft und schreit es hinaus/ Heimatland, wir geben dich niemals auf” – aus “Südtirol”
“짧게 말해, 나는 비평이 없는걸 참았어/ 이 신성한 나라에, 우리의 고향에 대해서/ 그것에 관해 깊은 공허함과 밖으로 외쳤지/ 모국(고국), 우리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 Frei.Wild의 노래 ‘남쪽 티롤’ 중에서
독일에서는 조국, Vaterland 이란 단어는 나치로 보일 오해의 소지가 큰 단어다. 이 곡 역시 화자가 청중에게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요구하고 있다.

극우정당 NPD 놈의 비장의 각오에 찬 피켓
“깜둥이놈들이 여자들을 다 뺏어가서 아직까지 섹스를 못해봤어”

하지만, 명백히 민족주의, 인종차별, 우익록밴드, 우익 포퓰리즘, 네오나치를 옹호및 찬양하는 그들의 범죄를 사람들은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보이콧 선언은 점차 늘어났고, 급기야 WFF에 참가 하는 밴드는 물론, 후원하는 기업들 특히나 독일 내에서 주요 록음악 매거진 중 하나인 VISIONS에서 공식적으로 WFF 후원을 취소하고, 보이콧을 선언했다. 여러 유명한 음악 잡지와 후원사들, 단체, 씬들이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VISIONS의 후원 철회및 보이콧 선언은 확실히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 VISIONS 하나에 그치지 않고, 여러 주요 후원사들이 연이어 후원 취소와 보이콧을 선언했다.

“Nichts als Richter/ Nichts als Henker/ Keine Gnade und im Zweifel nicht für dich/ Heut gibt es den Stempel, keinen Stern mehr” – aus “Wir reiten in den Untergang”
“판사가 아니고서 / 사형집행자가 아니고서 / 무자비와 널 위한 의심이 아닌 / 오늘 거기에는 스탬프가 찍혀있고, 더이상 별이(유대인의 별) 없다” – Frei.Wild 의 ‘우리는 파멸로 달리고 있다’ 중에서

With Full Force Festival, 2013 – Poster

사실 WFF는 이 폭로 이후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분노하고 운동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졌는데, 폭로가 터진 직후 온라인 상에서 시작된 개인들의 보이콧 선언 WFF는 사과는 커녕 “마녀사냥을 하지 말자” 며, 보이콧 선언에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에 보이콧이 가속화 되자, “이미 스케쥴이 만들어져있어 취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관객들에게 이해를 당부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사람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보이콧이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매년 최소 3만명 이상이 찾는 유럽의 주요 록페스티발 중 하나인 WFF의 예매된 티켓이 연이어 취소되기 시작했다. 이런 큰 규모의 록페스티발이 무너지는 순간이 눈 앞에 다가왔다.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여러 도시의 음악 씬과 펑크/하드코어 씬들에서 이에 대해 온-오프라인으로 성토를 더 해나갔고, 결국 WFF는 사실을 인정하듯 Frei.Wild 의 공연을 취소하고, “어떠한 형태든 민족주의, 인종차별, 우익록밴드, 우익 포퓰리즘, 네오나치와 함께 하지 않을 것” 임을 약속하는 공개 사과의 글을 올렸다.

시위대 속의 어느 크러스트

음악은 인간의 슬픔을, 아픔을, 자유를, 희망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행동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 이용 되어왔다. 음악은 사람을 움직인다. 이 것은 음악을 통해 자유로워지되, 불관용에 대해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음악이 민족주의, 인종차별, 성차별, 우익 포퓰리즘, 네오나치, 백인우월주의, 호모포비아를 옹호하거나 찬양을 한다면 이것은 더이상 음악이 아니라 반인륜적인 범죄인 것이다. 적어도 사회의 부조리함이 반복되는 것에 복종하지 않으며, 동참하지 않고, 거부하고, 맞서 싸워 저항하거나 또는 도주하려 했던 펑크/하드코어라면 이런 일에 침묵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게임을 하는 것 혹은 좋은 기록을 세우기 위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태도를 간직하고,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려한다면 더더욱 이러한 움직임에 단호하게 “더이상은 안된다” 고 말해야한다.
나는 누가 펑크를 만들었는지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때로는 학교나 사회, 또는 직장 등의 권위적인 억압에 억눌린다하더라도 펑크/하드코어라면, 무엇이 옳지 않은지에 대해 입을 열고, 부조리에 대항해 저항의 주먹을 쥘 수 있어야 할 것이다.

x. 후기
– 글 쓰는게 이렇게 귀찮다니. 정말 정말 귀찮은데, 크롬에 이미 관련 여러 개의 탭을 띄워놨기 때문에 이 몇 창을 닫고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서는 얼른 포스트를 작성하고, 탭을 끄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계속 여러가지를 주제로 연재할 ‘In to the Scene’ 의 첫번째는, 최소 3만명 이상의 관객이 몰리는 유럽의 유명한 록페스티발 With Full Force, 2013에서 Frei.Wild 라는 밴드가 공연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보이콧을 선언하고, 결국 취소된 이야기 전말을 다뤘다. 시간을 내어 더 잘 쓰고 싶었지만, 저 망할 탭들을 끄고 싶은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는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아 급하게 작성된 것. 이해 부탁바라며, 대신 혹여나 등장할 질문 만큼은 성실히 답할 것을 약속하겠다. 그리고 귀찮아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Frei.Wild의 뮤직비디오나 음악은 링크하지 않았다. 한마디 더 하자면, 우파 펑크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자꾸 어떤 사람들이 우파 펑크를 자부하는데, 애국이라던가 민족주의를 이야기 하며 스스로를 우파라 말하는 펑크는 나치 외에는 없다.

Schande Europa in berlin. 23. Oct. 2013

여덟시 경 göli bahnhof 방향 oranienstr.에서 목격.
(경찰 폭력에 반대해 꺼내들고 찍었던 영상이 있었는데, 지금 업로드가 불가능하다)

베를린 저항 네트워크 Stressfaktor 에도 데모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채, 8시경부터 kotti에서 산발적으로 모인 안티파, 아나키스트들이 얼마전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망명 보트 침몰 사고에 대해 기습 시위를 벌렸다. 보통의 망명자 지원 데모들은 Stressfaktor라는 베를린의 비영리 저항 네트워크에 정보를 공유하여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류의 시위나 문화행사, 페스티발 등은 경찰들이 시위 장소 주변을 조금은 한가로이(?!) 질서 유지를 하는 반면, 어제의 시위는 온라인 네트워크에 전혀 공유되지 않은채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로 조직된 시위 였기 때문에 경찰들이 당황해 여기 저기 뛰어다녔고, 평소보다 강경히 연행을 시도 했다.

이 시위는 유럽의 망명 운동은 계속 되어왔지만 진전이 없었고, 더욱이 10월 3일 아침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람페두사 섬 앞에서 아프리카인 망명자 500여 명을 태운 보트가 전복되는 사고로 수백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망명자 보트 침몰의 근본 원인은 많은 사람이 배에 타서가 아니라, 유럽의 나토군들의 전쟁과 유럽 국가들의 아랍-아프리카 전쟁 지원이 망명자들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에 인도적인 대우는 커녕, 그 원인에 대해 유럽의 국가들이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했기에 발생한 인재라는 것이다. 이번 사고 이후에 성토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탈리아는 무슨 수를 내던 망명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게 되었다. 이 것은 유럽 전역의 망명자 운동, 특히 최근 독일의 망명자 지원 운동을 더욱 거세게 하였다.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이주자이며, 이탈리아 첫 흑인 장관인 세실 키엥게 이탈리아 통합부 장관은 시신 수습 과정을 침통하게 지켜보며 “죽은 자들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또한 키엥게는 “이민법 및 불법체류자에 대한 규정이 개정돼야 한다”고 역설하였는가 하면, 죠르죠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망명은 이민과는 다른 문제다. 우리는 이들이 합법 이민이냐 불법 이민이냐를 따질 이민자들이 아니라 망명자들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라며 공식 입장을 발표하며, 10월 4일을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하지만, 이 또한 이 문제를 두고 사실상 뾰족한 수가 없음을 자인한 셈이 되었고, 마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은 “유럽연합에서 지금까지 이탈리아 홀로 망명자 문제를 처리하게 내버려뒀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말했다.

이 갑작스러운 시위에 옆에서는 스크럼을 짜고 블랙블록이 이어졌고, 한켠에서는 한가로이 와인을 마시는 관광객들이 한 장소에 있는 광경이 만들어졌는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300명 정도의 많지 않은 시위대 였고, 이 시위대를 보고 환호를 하고, 경찰들에게 “이 파시스트 자식들아, 부끄러운줄 알아라! 너희들은 조직적인 살인을 도모하고 있다!”라고 외치며, 시위 대열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보통의 경우면 비디오건 사진이건 찍지 않지만, 갑작스러운 시위였기에 경찰들이 강경히 대응하려고 했고, 때문에 경찰의 불법적인 폭력 진압을 포착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호기심에 가득찬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했다. 본인의 경우에도 그러했는데, 사정상 대열에는 합류할 수 없었고, 촬영하는 동안에 제지 당하지는 않았지만 경찰들이 굉장히 경계하였다. (늘 검은 상하의, 검은 신발, 검은 외투를 입기 때문에 시위대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

kotti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oranienstr.와 adalbertstr.의 교차로의 건물들 외벽에는 프로젝터를 통해 “Schande Europa, 비열한 유럽” 라는 텍스트가 벽에 펼쳐졌고, 사람들은 그에 지지 의미의 환호를 보냈다. 나는 이 때 중요한 약속이 있어 끝까지 할 수 없었는데, 하우스에서 같이 사는 친구들과 다른 하우스 프로젝트, 스쾃의 친구들이 연대하기 위해 왔고, 친구들은 마구잡이로 연행할 것이 예상되니 내게 피해 있기를 당부했다. 이후에 경찰은 지나가던 사람들도 야유를 속에 연행을 하겠다며, 해산 방송을 다시 했다. 시위대는 자진 해산 하는 척하며 둘로 나뉘어 행진을 계속해 luft der brücke 주변으로 이동했고, 최소 수 십명이 연행 되었고, 여러 명의 망명자들이 연행되었다며, 경찰서 항의 방문 등의 긴급 연대 소식을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를 통해 알렸다.

독일 경찰? 한국 경찰과 절차상 달랐던 것이 있긴 했다. 한국은 해산 방송 3번 대충 하고서 해산 하는 시위대들 마저 죄다 연행 하고, 종종 전의경들이 사복경찰, 기자,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을 몰라보고 죄다 연행하거나 두들겨 팬다면, 여기 독일은 해산 방송을 더 많이 하긴 한다. 그리고 시위대가 아닌 사람들 앞에서 두들겨 패는 장면을 보일 수 없기 때문에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폭력을 자제하는 편이다. 어쨌거나, “Wir sind berliner Polizei.. 우리는 베를린 경찰입니다..” 따위의 말로 말문을 열고, ‘시위 중인 시민들께 해산을 부탁드리며, 해산하지 않을 시 연행할 것’ 이라는 내용의 해산 방송을 하니 시위대는 물론이거니와 근처의 와인바나 레스토랑에 있던 일반 사람들까지 나와 경찰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구차하게 경찰의 직무를 들먹거리며, 이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외면한 채,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핑계로 체제에 부역하는 것은 한국이나 독일이나 사실 다를게 없다.

defiance – no future, no hope (korean translate)

DEFIANCE LYRICS

“No Future No Hope”

every day that goes by it all seems the same
매일 그것들은 같아져 가는것처럼 보여.
people work and people slave and piss their lives away
사람들은 일하고, 노예되는 그들의 삶따위 집어치워.
people taking and never getting it’s all the same old shit
사람들이 무언갈 얻거나 절대 얻지 못하거나, 그건 오래된 엿같은 이야기일뿐이야.
while everything around us is crumbling bit by bit
모든 것들이 우리들 주변에서 조금씩 부서져 가는 동안..

you fuck right off if you think that i’ll play a part
만약 네가 나도 그 시스템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꺼져버려.
in this system that was doomed right from the start
저것들은 이 체제와 함께 태초부터 오로지 파멸뿐이었어.
a system built on slavery, domination, and degradation
이 체제는 노예들을 만들고, 지배하고, 강등하고..
production and consumption and over all corruption
생산하고, 소비하고, 그 모든게 모두 다 썩어넘칠거야.

fuck right off if you think you have a say
이래도 네게 뭔가 할 말이 있다면, 당장 꺼져버려.
in this system that takes your life away
저것들은 이 체제 속에서 너의 삶을 뺏아가려 할거야.
you can rock the boat or rock the vote the choice is up to you
너는 이 체제를 뒤흔들어 엎어버리던가, 널 위한 투표를 할 수 있지.
but i won’t put faith in those who are fucking me and you
그러나 나는 너와 나를 엿먹였던 저들 안에게 믿음을 주지 않을거야.

i don’t give a shit if the system falls to peices
만약 시스템이 조각조각 부서져버린다면, 난 더이상 좆같은 짓 안하겠어.
if it all stops if it all ceases
만약 그모든 것들이 멈춘다면, 그것들이 모두 중단 된다면..
it’s not getting any better and it couldn’t get much worse
그건 전혀 좋아지지 않을거고, 그것보다 나쁠 수도 없어.
the only hope and dream i have is to watch it all destroyed
나는 유일한 희망과 꿈이 내 앞에서 모두 산산히 부숴지는걸 보았어.

[Chorus:]
there ain’t no future and there ain’t no hope
거기엔 미래가 없고, 거기엔 희망조차 없어.
for humankind or change within the system
인류를 위하거나 시스템과 함께 변하거나
there ain’t no future and there ain’t no hope
그곳엔 미래가 없어 그곳엔 희망이 없어.
in a fucked up system that takes your life away
저것들은 이 좆같은 체제 속에서 너의 삶을 뺏아가려 할거야.

there ain’t no future and there ain’t no hope
거기엔 미래가 없고, 거기엔 희망조차 없어.
rules and regulations getting in our way
법과 규칙은 우리의 삶을 방해할 뿐이야.
there ain’t no future and there ain’t no hope
거기엔 미래가 없고, 거기엔 희망조차 없어.
the only hope and dream i have is to watch it all destroyed
나는 유일한 희망과 꿈이 내 앞에서 모두 산산히 부숴지는걸 보았어.

정어리 – 3

x. 상수동 반지하, 방 2개, 보증금 300에 월세 30.

앞, 뒤 없는 전철 노가다. 오늘도 새벽 5시 일어나 십장에게 허리 숙여 일해 한대가리, 일당 8만원. 일비 8,000원 인력소장한테 떼주고, 먼지 뒤집어 쓴채 평범한 사람인 척 사람들 사이 섞여 귀가 하는 길, 친구 놈 집으로 불러 술 한잔 하려하니 상수동 보족세트 35,000원 같은 세상…

/2010년 3월 13일

잡글 – 유럽 유학 열풍

요즘 따라 부쩍 유럽 유학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요즘 따라 독일, 프랑스의 학비를 한국과 비교하며 유학 준비하는 학생들도 많고, 관련 글도 많다. 나도 상담을 계속 해줄 정도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안 되던게 여기서 될거라고 생각하지마.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얼마나 호구처럼 시간을 보내는지 직접 나와 1년정도 있어보면 알겠지만, 유학-졸업 이후에 막연히 좋은 일자리가 생길거라는 환상 좀 깼으면 한다. 아니 시발, 무슨 대학이 직업 소개소도 아니고 돈 내고 몇 년 다니다 졸업 했으니 대강 어영부영 중산층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을 구할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개같은 노예 마인드는 대체 어디서 생기는거냐? 특히나 예술 하는 사람들은 네 작업부터 다시 봐라. 그걸 누가 왜 내 시간을 쪼개가며 봐줘야 하나. 내가 그런 작업들, 전시들 보면서 줄곧 느끼는게.. ‘내가 여기 왜 왔을까, 친구가 오늘 술 마시자 했는데.. 차라리 떡되도록 마시고 잠이나 잘걸….’ 석박사라고 크게 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석박사들도 졸업 논문 하나 힘겹게 던져 놓고 한국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투성이니까.. 그걸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빤히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논문을 많이 내는 나라 한국. 그리고, 논문 인용율 바닥권 한국.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 해결 방법이 유학일 수 없다. 유학-졸업 하면 직업이 생길거라고 믿지 마라. 유학 나와도 똑같다. 오히려 돈, 시간 왕창 날리고 가는 케이스 허다하다. 내가 요즘 유학을 준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건 당장 대학을 때려치고,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뒤, 불온한 상상과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부도덕한 행동 그리고 목적 없는 여행을 해라.

박원순 그리고 시민인권헌장

보통은 최근 이슈, 통속적인 이슈에 대해 포스팅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박원순 시장의 시민인권헌장 논란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 해볼까 한다.

 

시민인권헌장 제정위원회의 일부가 빠져나갔지만, 3분의 2이상, 과반수의 표결을 얻어 채택을 결정했음에도 박원순 시장은 시민인권헌장을 채택하지 않았고, 이것이 다수의 동의를 통해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읽는다면 다수가 동의하면 소수가 무조건 따라야한다는 논리가 동시에 성립되므로, 다수가 결정했다는 논리만으로 무엇인가를 추진하는 것은 이후에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차별의 소지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정책을 결정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해보는 지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함께 사는 사회인지, 어떤 것이 차별인지, 그 함의에 대한 논의를 선행해야만 한다. 그런 후에 비로소 다수의 결정만으로 소수에게 가해져왔던 구조적 폭력들로부터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헌장은 법적구속력이 조금도 없는 ‘시민헌장’ 일뿐이고, 채택된다 하더라도 차별에 대한 법적분쟁에 있어 고작 참고사항이 될 뿐,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내용이다. 때문에 정치인 박원순에게, 민선시장 이후 서울시장의 자리가 대권에 미치는 큰 영향을 고려할 때, 과반수의 동의를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헌장을 통해 보수세력의 역풍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만약 이 헌장을 채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DDP와 세빛둥둥섬(세개의 빛나는 섬이라고 쓰고, 稅빚이라고 읽는다), 무상급식 문제로 고꾸라진 오세훈 전 시장의 케이스를 볼 때, 박원순 시장은 언제든 역풍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이 헌장의 채택은 이후 어떤 파급을 갖게 될까?
저열한 의미에서의 ‘정치공학’ 적으로 읽더라도 박원순이 이 헌장을 채택하지 않고 시장 자리를 확고히 하는 것이 결코 비판만할 수 없는 이 상황은 현재 야당에 그 뒤를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 고자들은 듣고 있나?)

 

‘차별을 금지해낼 사회적 근간을 만들 헌장에 제동을 걸었다’ 는 식의 주장과 함께 합당성을 논하려면, ‘시민인권헌장’ 이 아닌 ‘차별금지법’ 을 추진하며 주장해야 옳다. 차별에 반대해 인권을 도모할 윤리 기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차원에서 차별금지법안으로 법적구속력이 있는 준수조항을 만들 때, ‘합의’ 의 명분은 더욱 명백해진다.

 

우리는 물거품이된 이 시민인권헌장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회의장에서 빠져나간 일부를 제외하고도 회의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3분의 2 이상의 과반수로 反차별에 대한 사회적 합의 의지를 확인하였다. 이것은 추후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나아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명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이 목사들 앞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 유감이다만, 시장으로서 꼭 동성애 지지 발언을 해야할 의무가 없다. 최근 몇 년 뉴욕 시의 시장을 비롯해 미국의 공직자들이 동성애 지지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기사화 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 있다. 또한 박원순은 실제로 호모포비아는 커녕 신촌 LGBT 퍼레이드와 성미산 LGBT 영화제를 시 차원에서 지원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수 단체들의 맹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한국 주요 정치인 중에 유일하게 동성결혼 지지 발언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 박원순 시장을 향한 사람들의 비난이 지나쳐 보인다.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렇게 된 원인은 박원순 시장이 아니라 회의 자체를 깽판치러 간 보수 기독 단체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비판 해야하는 것 아닐까? 지금 보면 그 깽판 친 보수 기독 단체보다 박원순 시장이 더 까이고 있는걸 보니 뭐가 잘못되도 확실히 잘못된 기분이 드는건 정말 나뿐이란 말인가?

 

박원순이 시민인권헌장을 채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박원순이 지지자를 잃었을거라는 생각은 대체 무슨 근거로 하는 주장인지 되묻고 싶다. 박원순 지지자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봐야 누구한테 갈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긴 있을까?

 

한국에서 좌파라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짧아?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