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하우스 파티 알림

2013년 12월 6일, 금요일에 우리 Bödi9 에서 하우스 파티한다.

 

초대 받은 인원만 올 수 있기 때문에 Stressfaktor 에는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 파티. 이유는 마지막 하우스 파티를 했을 때 Stressfaktor에 공개하지 않았음에도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인원이 하우스를 방문에 집의 복도는 물론, 계단에까지 쪼그려 앉아 술 마시고, 춤추며, ㅍㅍㅅㅅ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심각한 수준의 소음에 경찰이 여러번 출동했으나 어떻게 막을 수 없었다고. 더구나 약물을 사랑하시는 몇 분들이 문제가 되어 이번 하우스 파티에서는 하드드럭은 강력히 금지된다. 물론 이러한 공지가 없어도 Bödi9의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주사가 발견되는 것을 우리 모두 반대하고 있다. 약물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다른 스쾃 네트워크 등을 통해 방문하는 우리 게스트들 중에서는 5세 가량의 귀여운 아기들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강아지나 고양이의 경우에도 예방 접종을 하지 않았을 경우, 출입이 금지 되기도 한다. 이 밖에 인종차별, 망명자는 물론이거니와 더이상의 교제를 중단하고 싶어하는 남녀, 그리고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대상들은 특별히 하우스 거주자 네트워크를 통해 출입 금지 리스트를 갖고 있다. 하우스 출입문 비밀번호는 지난 몇 달전 게스트들로 불거진 문제 이후, 하우스를 자주 찾는 친구들에게도 공개하고 있지 않다.

 

아무튼 하우스에서는 펑크, 아일리쉬, 아방가르드, 포크 등의 공연과 2 스테이지로 나뉘어 drum n bass, psy/goa, digital hardcore 등의 테크노 파티, chill out room에서는 말 그대로 chill out 디제잉과 어두운 조명 등이 준비 되고, 판토마임 공연, VOKÜ, lounge 음악과 술 마시는 곳, 펑크/하드코어 음악이 들려지는 바 등이 열릴 계획이고, 이번에는 특별히 Dunkel Raum, Dark Room을 만들어 ㅍㅍㅅㅅ할 수 있는 곳까지 준비한다는 예정이다. 당연히 “콘돔은 개인이 알아서 구비, 그럴 능력이 안되면 하지마” 라는 모토. 나는 이 날 베간 버거를 만든다. 도난 사고에 대비해 방들은 따로 격리 시키는 형태로.

 

ㅡ 1년에 단 한번 있는 2013년 파티에 대한 소개글이었습니다. 2014년 파티는 며칠 뒤에 정해질 것 같습니다.

Party Review: Antifa techno-party, very underground scene

몇 주전 동베를린 외곽 고속국도 근처 숲 속 폐공장에서 있었던 공연 이후에 어제 또 다른 파티에 다녀왔다.

 

개인적으로는 베를린에서의 첫 psy/goa 파티였는데, 밤 12시에 출발해 북베를린 외곽지역 역에서 내려 국도를 따라 30분 정도 걸어 숲 속에 있던 공동체/클럽. 깜짝 놀란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이 가로등만 덩그러니 있는 깡촌 같은 곳에 밤 1시에 수 백명이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이라는 것과 이 곳에 들어가니 정말 말도 안되는 규모의 클럽이 존재했고, 어림잡아 200명~ 300명쯤 되는 인원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안티파/아나키스트들이 공유하는 커뮤니티이고, 안에서는 두 개의 커다란 스테이지, 바, 옷 맡기는 곳, 대형 난로 오븐 등이 있었다. 입장료는 7유로로 나에겐 꽤나 비싼 편이었지만, 사실 베를린에서 보통 클럽 입장료가 10유로~ 20유로 사이기 때문에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고, 나는 하우스 친구들과 같이 갔는데 한 친구가 우리 모두 게스트로 넣어주었기 때문에 좋았다.

 

그리고 안에는 베간들이 기부금을 통해 간단히 식사 할 수 있는 빵과 과일, 야채, 페이스트 등이 있었고, psy/goa 파티 또한 뜨거웠다. 그냥 이런 말도 안되는 곳에 이런게 있다는게 신기할 뿐이었고, 이 곳에 있던 다른 독일 애들도 어떻게 여기 왔냐며 다들 신기해했다.

 

아, 크러스트들도 몇 보였는데 아무래도 psy/goa 파티다 보니까 자신감 넘치는 여성분들께서 비키니를 입고 춤을 추거나, 서로를 쭉쭉 빨고, 핥으며, 부비는 광경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남ㅂㄹㅇㅇ/독일 차도녀ㅂㅂ 커플 친구가 있는데, 이 ㅂㄹㅇㅇ이 다른 아일랜드 출신 여성을 만나 정신줄을 놓고, 둘이 사라져서 항상 차가운 도시여자 스타일을 유지하고 술을 잘 마시지 않던 여성 동무 ㅂㅂ가 술에 잔뜩 취해 나를 끌어안고, “아까 ㅂㄹㅇㅇ이 아까 다른 아일랜드 여자를 만났다며, 반가워서 이야기 좀 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지금은 둘이 아예 없어졌어! 나는 이게 뭔지 알아.. 나 어떻게 해!”라며 나를 부여잡고 하소연을 했다. ㅂㄹㅇㅇ은 완전히 봉인 해제되서 난리였고, 같은 날 술 봉인 해제 되었던 ㅋㅂ의 여자친구 ㄴㄹ도 완전히 봉인 해제 되어 내게 칵테일을 붓고, 비틀거렸다. 나는 알았다며 계속해서 빵 쳐묵 쳐묵..

 

뜨거운 밤이었다.

 

ㅡ 2013년 12월 2일

Concert Review: Crowskin, Wolfbrigade

<Wolfbrigade와 Crowskin의 Flyer>

전 날까지 Staatlichen Akademie der Bildende Kunst Stuttgart의 Rainer Ganahl 교수님과 Kontak을 위해 시간을 보냈는 데, 몇 일 고생 끝에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Wolfbrigade의 공연을 보기 위해 Potsdam을 찾았다. Black Fleck이라는 클럽은 Potsdam의 펑크들에게 사랑받는 공연장으로 알려져 있다. Potsdam은 생각보다 굉장히 작은 도시였고, 주변에 무너진 건물들이 거의 복구 되지 않은 채 방치 되어있었다. Mitfahren 웹사이트에서 단 35유로에 Stuttgart에서 Berlin까지 가는 친구를 찾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일반 왕복 버스가 찾기 어렵고 그마저도 최소 330유로에서 400유로 이상 하는 데에다가 기차도 이와 마찬가지 혹은 더 비싼 가격이니 나에게 Mitfahren 웹사이트는 독일 생활에 필수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Stuttgart에서의 Rainer Ganahl 교수님과의 Kontak에 대해서도 이야기 더 하고 싶지만, 많은 사람들의 요청 속에서도 나의 귀찮음과 이 포스팅의 본연의 의도로 돌아가 후 일을 기약하겠다.
아무튼 Crowskin과 Wolfbrigade의 이 공연이 단 돈 5€라는 사실이 믿겨지는가!

<Die Straße vor Black Fleck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이 날 공연은 Potsdam을 Local Scene으로 활동하는 Cyness라는 Grind Band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공연이 열려야만 했을 것 같은 Berlin이 아닌 Potsdam에서 열렸다. 물론 이 포스팅도 Cyness와 Crowskin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만 하겠지만, 나는 사실 Crowskin에 대해서 그다지 잘 알지 못하므로 그에 대한 포스팅은 나중에 Potsdam의 Crustie, Punks 모임인 Cancer Clan 친구들과 만난 이후에 하겠다.

 

 아무튼 이 엄청난 공연을 앞두고 Black Fleck을 찾아가는 길에서 나와 새봄이는 많은 무리의 Berlin 펑크들이 무리지어 Black Fleck을 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길 찾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고, ㅡ 사진에 보일지 모르겠지만 ㅡ 도착한 그 곳에서는 공연 시간이 멀었는데도 어림잡아 100명 이상의 펑크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냥 딱봐도 아시안은 나와 새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고, 우리가 가진 커다란 등산 가방들을 대뜸 바에다 맡겨달라고 부탁했다. 보통은 이럴 때 팁을 요구 하는데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Wolfbrigade의 Merchandise를 뒤적뒤적, 과거의 앨범 CD와 LP들 티셔츠들을 보고 곧장 새 앨범 <Damned>와 Wolfpack 시절의 티셔츠를 구매! 그러나 바로 입는건 좀 오타쿠 같은 짓이라 느껴져서 여행자 차림의 모습으로 놀기로 결정하고 맥주를 퍼마셨다.
 이윽고 여성 보컬을 필두로한 Crowskin의 공연이 시작 되었는데 Crowskin은 상당히 질척거리며 절규하는 음악을 기반으로 Potsdam에서는 꽤나 알려진 밴드였다. 나도 좁은 공연장에 가득찬 무리들 속에서 맥주병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놀기야 했지만, 사전에 미리 좀 알아보지 않고 간 것이 밴드에게 미안.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땀에 흠뻑 젖어 보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ejlK5ki428s&fs=1&source=uds]
<Crowskin의 영상은 찍지 못했기 때문에 2년 전 라이브>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과 티셔츠.. 맥주 한병 들고 잠시 열기를 식히기 위해 공연장 앞으로 나갔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키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이는 왠지 친근한 모습의 아시안이 보였다. 무작정 다가가서 독일어로 말을 걸었는데 잘 하지 못했다. 독일에 가족과 함께 Potsdam에 온지 몇 달 안 되어 아직 독일어를 배우는 중이라 하였고, 우리 또한 독일어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Dodi. 그의 이름은 Dodi였다. 인도네시아 Crust Scene에서 날라온.. 우리는 베를린에 산다며 자주 보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는 밴드들 이야기를 했다. 당연히 R.A.M.B.O 의 투어 이야기를 조금 했고, Clust Bomb Unit 의 투어 이야기도 나누었다. 금새 친해진 이 친구와 맥주를 몇 병 마시고 담배를 몇 개비 연거푸어 피웠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갑자기 작은 공연장이 좀 전의 Crowskin 공연 때보다 더 미어터진다. 한번 나가면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상황. 어떻게 보게 된 공연인데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생각으로 밀고 들어갔다. 안에서 Köpi와 Tommyhaus에서 만난 크러스트들과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누고선 당연히 Berlin을 제치고 Wolfbrigade를 위해 Potsdam에 와야하지 않겠냐며 서로 씨익 웃었다. 이윽고 Wolfbrigade가 시작하고.. 비좁은 공연장에서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어졌다. 흔들리는 관중의 물결 속에서 가만히 힘을 빼고 있어보니 발이 공연장 바닥에 안 닿았다. 한미FTA 반대 시위에서 겪었던 일을 Potsdam에서 다시 겪었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괜스레 울컥했다. 비장한 Wolfbrigade의 음악이 나를 더욱 때리기 때문이었을까?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z9wNMqFvgFw&version=3&f=user_uploads&c=google-webdrive-0&app=youtube_gdata]
<Wolfbrigade in Potsdam>
ㅡ 아쉬운 19초.
<Wolfbrigade in Potsdam>
ㅡ 공연장의 앞부분 밖에 찍지 못했다.
뒤쪽으로는 사람들이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할정도.

 

<Wolfbrigade in Potsdam>
ㅡ Micke.

 

<Wolfbrigade in Potsdam>
ㅡ Erik이 늑대 무리들을 선동하고 있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이 때쯤 나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고 있었음.
 공연은 굉장했다. 아쉽게도 나는 놀아야만 했고, 내 Handy에는 Mape 작업 때문에 용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 19초의 영상과 사진 몇 장 밖에 찍지 못했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누가 Wolfbrigade의 공연을 보면서 멍하니 영상이나 찍고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어두운 공간에서 저들은 사냥을 앞둔 늑대떼들처럼 으르렁 대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 대부분이 흔들렸고, 어쩌다 나도 모르게 터진 플래시가 전부.. 나도 아쉽지만, 그 순간의 살아있는 사진은 새봄이 찍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Erik, Johan.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Potsdam Scene에 반가이 화답하는 Erik, Johan, Micke.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대장 늑대 Micke의 포효에 왼쪽 하단에서 Tom Götz가 함께 으르렁 거리고 있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Micke 앞의 가운데 친구는 나와 새봄이 Obscene Extreme Festival에 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
친구인데 온라인에서 본명을 쓰지 않으므로.. Hammerheadphil이라고만 밝혀둔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직업이 Tattooist인 드러머 Dadde.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이 좁은 곳에서 사람들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은 자유이지만, 내려올 때는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왼쪽이 Cyness 드러머, 마치 늑대 대장의 growling에 함성을 외치는 늑대무리 같은.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잠시 멈추고 세팅중에 Johan.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뜨거운 피가 끓는 Micke와 드럼치는 Dadde.
 위 사진들은 새봄이가 필름으로 찍어낸 순간들이다. 나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사진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 모양. 어떻게 찍은 사진 모두가 이렇게 굉장한지.. 아무튼 마지막 곡인 것처럼 잠시 Wolfbrigade가 연주하지 않을 때 다른 녀석들이 벌써 끝나면 안된다고 동요할 때쯤 나는 당연히 <Awakening>을 기다리며 “Awaken me! Awakening us! Please!” 를 외치며 growling.. 역시나 Wolfbrigade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고 Awakening을 포효!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OtK5y4iSedc&fs=1&source=uds]
<Wolfbrigade의 Awakening과 가사>
 공연이 끝나고 나와 새봄 Dodi는 모두 지쳤다. 특히나 나는 땀에 온 몸이 젖었다. 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있는데, Berlin 사는 펑크들이 차가 끊길새라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간다. 나와 새봄은 그냥 노숙하기로 작정한터라 남아서 술을 더 마시기로 했는데, 새봄은 별로 마시지 않았고 나는 맥주를 두세병 더 비워버리며 취하기 시작했다. 내가 새봄이에게 오늘은 취하지 말자는 약속을 다 마셔버렸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였다는 핑계를 대보지만 결국 나에 대한 반성과 새봄이에게 미안한 마음만이 든다.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Jocke와 Erik.. “뭐 오늘 공연은 괜찮았어..” 라는 듯.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Dadde가 Johan과 Micke에게 “나 오늘 드럼 치는거 봤어?”라고 자랑하는 듯.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단란한 늑대가족.. Dadde는 어디가고, Johan, Jocke, Erik, Micke.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다음 일정을 이야기 중인듯 한.. Johan, Micke, Erik
 그 사이에 Wolfbrigade 사진을 새봄이가 찍었는데, 실수로 기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하니 기타가 조금 당황 했었다고 한다. Wolfbrigade는 역시 크러스트들의 살아있는 전설답게 주르륵 넷이 벽에 기대 앉아 팔짱 끼고 입을 다문채 맥주만 마셨다. 나는 Dodi와 Wolfbrigade와 함께 사진을.. 그러나 드럼은 공연장을 찾은 다른 여자 펑크와 이야기하느라 바빳기 때문에 네 멤버만이 사진에 나왔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진탕 취한 나는 Wolfbrigade를 앞에 두고 필름이 끊겼다. 집에 어떻게 온지 잘 기억도 안 나는데 Potsdam 친구들이 도와주고, 새봄이는 진땀을 뺐다고..
<Wolfbrigade in Potsdam ㅡ Fotografie von Saebom Lee>
ㅡ 문제의 사진..
사진만 보면 내가 공연을 하고, Wolfbrigade가 나의 공연을 보러온 것 같지 않은가?
Johan, Jocke, Erick, 나, Micke, Dodi.
다시는 이렇게 취하면 안 될 듯하다.
 이 사진 찍은 후에 새봄이가 Neonazi에 대한 플라이어를 몇 장 줏었고, 나는 당연히 아닐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새봄이가 궁금해 함에 따라 그곳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는데 Potsdam은 매우 작은 도시라 펑크들이 공연할 만한 곳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Black Fleck 공연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크러스트 공연 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했다.
공연은 정말로 굉장했으나..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지만 강렬했던 순간의 기억들을 나누고 싶은 욕심을 이렇게나마 아쉬움으로 드러내본다. 그러나 나는 추억하지 않겠다. 우리의 시간은 과거에 묻혀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포스팅을 쓰는데만도 거의 한시간 반이 걸렸으므로.. Obscene Extreme Festival과 Schöneweide에서의 Anti-Neonazi 시위에 관한 포스팅은 뒤로 미뤄둔다.

Handy로 찍은 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은  Saebom Lee 의 사진이므로 사진의 상업적 사용및 편집, 재가공 등의 2차 저작은 Saebom Lee에게 문의할 것.

ㅡ 2012년 5월 17일

인물 소개: 호머 헐버트

호머 헐버트(미국 1863~1949)

 

미국 버몬트 주에서 태어나 1886년 대한 제국의 초청으로 왕립 영어학교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어 1889년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출판했다. 1903년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의 연례보고서에 14쪽의 기고문 <한국어The Korean Language>를 통해 ‘발음기호가 별도로 필요한 영어와 달리 한글은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쉬워 조직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평가하고 대중연설의 수단으로 한글이 더 우수하다고 설명했다.

고종 황제의 외교 자문관으로서 활동하면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뒤 미국 전역에서 조선의 독립을 역설했다. 1949년 7월 29일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려 내한했다가 6일만에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생전의 바람대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195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그리고 호머 헐버트는 한글의 띄어쓰기를 고안해냈다.

Concert Review: Bambix, The Stattmatratzen

 

독일 애들이 원래 그런건지 아님 얘네가 별 관심이 없는건지 플라이어 좀 달라는 말에 “나도 플라이어 없어”라는 답변들이 좀 무성의하게 돌아오는데, 그래도 자주 오는 유일한 아시안이라고 꽤 친절하긴 하다.

 

어쨌던 베를린의 스쾃에서 본 공연들 중 대부분이 그 날 공연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공연 리스트에조차 오르지 않은 밴드들이 허다하다. 밴드 이름 좀 알려달라고! 알려달라고.. 알려달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스티커를 쥐어주는 애들도 있긴 한데… 아무튼 이 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Bambix라는 밴드의 베를린 투어. 밴드는 89년에 결성했고, 풀랭쓰 앨범만 무려 9개 이상이 된다. 보컬/기타 아줌마는 40대 초중반인데 불구하고 미친 듯이 점프했다. 게다가 팬이 가져다 준 예거마이스터를 단숨에 들이키고 벽에 빈잔을 집어던지며 “밤새도록 파티!(Party! Ganzen Nacht!)”를 연신 외쳐댔다. 이 밴드가 공연할 때는 애들이 과격하게 하도 과격하게 놀고 미칠듯이 커서 사운드가 너무 커서 이틀동안 이명현상을 겪었다. (..앞으로 그 대역대의 주파수는 못 듣겠지ㅠ 상관없샤!)

 

아무튼 같은 날 두번째 밴드였던 The Stattmatratzen이라는 밴드를 봤는데.. 진짜 좀 짱. 이 밴드 이름 알고 싶어서 사방에 묻는데, 애(새1끼)들이 술에 취하고, 약에 취해서 비틀대고 답변은 커녕 몸도 잘 못 가누는 애들도 많고, 북적대고 사람들이 죄다 흥분해서인지 “Wie heißt diese Band?(이 밴드 이름 뭐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물었는데, 이 (미7)놈들이 내게 “Prost!(건배!)”라고 대답한다. 이 망할 자식들! 그게 아니고 밴드 이름 물어본거라고 하며 나는 잔이 비었다고 하니까, 지 잔을 내게 넘겨준다. 하아아아ㅏㅏㅏ 펑크들 술 사랑은 세계 공통이구나..

 

펑크들 술 사랑은 이쯤 각설하고, 당연히 멤버 전원이 Antifa인 Riot grrrl 밴드다. 중간에 ‘Eiszeit’라는 곡을 할 때에 “Katastrophe! Kellerkind! Oh Oh Oh!(대재앙! 히키코모리! 오오오!)”가 적힌 피켓 같은 걸 들면서 공연 하는데, 그러면서도 연주는 틀리지 않고 대단했다. 그 노래는 독일판 히키코모리에 대한 비판적인 노래였다. 이 밴드가 모두에게 사랑 받는 가운데 특히 왼쪽의 모호크 머리의 기타가 귀엽게 생겨서인지 인기가 굉장했다. 멘트들은 뭐 안티파 밴드들이 늘 줄줄 외듯 스쾃(Besetzer Haus)을 철거로부터 막아내자고 이야기하고, 관용주의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 날 내가 본 공연만한 영상이 없어 아쉽지만 첨부한 링크의 영상을 보면 조금이나마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전원이 여자 멤버인데 오프닝 걸펑크 밴드에 비해 딱히 귀척도 하지 않는데, 새봄이도 멋지기도 귀엽다고 말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Tommyhaus에서 본 공연 중 가장 큰 공연. 사람이 너무 꽉차서 한번 나갔다 오면 다시 들어오기도 힘들정도. 물론 더 큰 공연은 Koepi의 20주년 공연이었다. 그 때는 거의 천여명이 공터에 불 피우고, 가득찬 공연장 3개와 댄스홀, 아나키스트들이 운영하는 인포샵.. 아무튼 그랬습니다. 하아ㅏㅏㅏ

 

ㅡ 2012년 3월 29일

알프레드 자리, ‘우부 대왕’ 1896년 작

『알프레드 자리, ‘우부 대왕’ 1896년 작.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갑자기 “똥이나 처먹어라!” 하고 외쳤다. 그 이후 미래파 행위예술가 들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약을 올렸다. 화가난 관객들은 감자나 오렌지를 잡히는 데로 무대를 향해 집어 던졌으며, 일부 다혈질의 관객들은 근처의 상점을 습격하여 꺼내온 물건들을 무대 위의 행위자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때 카를로 카라는 이렇게 외쳤다. “감자 대신 너희들의 사고 방식을 던져라, 멍청이들아!” 그 공연 이후 대부분의 행위자들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하루나 이틀씩 구류를 살았다.』

베를린에서의 첫 날들

 

※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된 3박 4일간의 기록입니다. 글의 내용을 너무 상상하거나 깊이 몰입하게 되면 독일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게 될 수 있으니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어려우신 분들은 읽기를 자제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9월 30일 금요일.

 

수화물 검색대에서 제가 매고 있던 가방에서 노트북, 프로젝터, 10m 전선 2개와 칼, 니퍼, 옷핀, 케이블타이, 군용벨트 등이 나와 가방 엎고 모두 꺼내 조사하고 최종적으로 칼과 니퍼를 폐기하는 걸로 일단락 지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응 했습니다! 공항에서조차 옷을 벗고 가방을 엎었습니다! 허리에 뭔가를 숨기는 것으로 오해하던 직원은 벨트가 문제인지 왜 늦게 알았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아무튼 저는 가방을 엎고 옷을 벗ㅇ어!

 

서울 시각 낮 12시 40분. 뮌헨행 Lufthansa 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Scorpions 를 좋아할 것 같은 장발, 근육질, 문신 남성을 비롯해 십 수명의 남성들이 스튜디어스들이 서빙하며 여러 음식, 음료들을 준비하는 곳 점거하다시 피하여 위스키를 거덜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아니라 bar에 온듯한 분위기였습니다. 기내 바닥에 앉아서 졸고 있는 애들도 한 두명씩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새봄은 맨 뒤에서 두번째 자리라 소음에 견딜 수가 없었으나 우리도 위스키 + 독일 맥주 거덜내기에 힘을 보태다 기내에 준비된 Radiohead 의 Kings of Rims Live dvd 를 보고 잠에 들었습니다. 정신 차려보니 뮌헨에 거의 다 다르러 창밖을 보니 작은 산들이 굉장히 많고 형형색색의 논들이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밀, 보리, 포도등의 농사 때문일거라 생각했습니다. 내리면서 보니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뮌헨 공항에서 베를린 행 비행기 게이트를 확인한 후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햄버거와 에딩거 바이쓰비어를 섭취했습니다. 햄버거 빵이 무슨 바게트 빵인줄 알았습니다. 고기보다 질겼고 고기는 큰 삼겹살 같았습니다. 잠이 올 쯤 뮌헨에서 베를린 행 비행기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된듯하여 게이트로 향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경직 되어있던 저는 피곤함과 맥주에 쩔어 갑자기 영어 + 독일어가 술술 나오더니 수화물 검색대에서 아무 일 없이 나왔습니다. 게이트에 가보니 우리 둘은 술에 약간 취해 한시간 일찍 도착한 거였더군요. 아무튼 기다리니 2차례 연착 사실을 통보 받았습니다. 원호 동지에게 연락을 취하려니 공중전화 사용법을 모릅니다. 열심히 해볼까 했습니다만 몸은 피곤하고 취해있습니다.

 

뮌헨 시각 밤 10시 25분. 드디어 베를린행 Lufthansa 에 몸을 실었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다가 Pan sonic 의 음악을 들으며 슬그머니 잠에 들었습니다. 자는 도중 몸이 굉장히 피로했는지 심한 기침을 하였습니다. 독일인들은 공공장소에서 기침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는데 신경이 쓰였지만 내가 어쩌겠습니까? 정신 차려보니 옆에 독일인이 이제 내려야 한다며 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저는 괜히 Entschuldigung 을 연발하고 있었죠. 연착으로 인해 원호 동지가 도착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원호 동지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원호 동지가 오는 길에 공항 앞에서 사고가 있어 늦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16시간만에 베를린에 입성했습니다. 지구를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실제 소요시간과 현지 시각과의 차이가 좀 있습니다. 베를린은 현재 서울보다 7시간가량 느립니다. 그러고서 Hermannstrasse 에 있는 원호 동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사람들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전철역 안에서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게다가 여기 전철문은 내릴 때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티켓을 검사하는 사람이 돌아다니기는 합니다만, 티켓이 없어도 탈 수는 있습니다. 암묵적으로 부랑자들의 탑승을 허락한다는 느낌이 들어 독일에서의 교통수단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멍청한 생각이란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원호의 집에 도착해 맥주 마시다 새벽 3시쯤 잠에 들었습니다.

 

10월 1일 토요일.

 

아침 7시. 베를린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서 집주인과의 계약을 서둘러야 했기에 피곤함을 뒤로 한채 일어섰습니다. Berlinerstrasse 에 있는 계약할 집을 향해 갔습니다. 독일인 집주인 할머니는 나와 원호 동지를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지만 새봄에게는 첫 인사가 “You can not live here” 이라고 말했습니다. 커피와 케잌을 꺼내주시며 집의 주의사항들을 설명 해주었습니다. 그 전 한국인이 잘 씻지 않아 1주일만에 내쫒았다구요. 그러나 할머니가 주신 커피잔과 접시, 포크는 굉장히 더러웠습니다. 가구들은 상당히 투박해보였으나 사용에는 별 무리가 없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세탁은 할 때마다 1Euro 씩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여자친구를 데려오기 전에 미리 주인 할머니에게 알리고서 데려올 것과 무슨 변동 사항이 생기면 방문에 쪽지를 붙이기로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으신지 말하는 것도 좀 힘겹게 느껴졌고, 우유를 따르며 쏟으실 정도 였고 다리도 절고 계셨습니다. 좀 의아스러웠지만 별 개의치 않고 넘겨버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350Euro 에 계약을 하고, 새봄의 집을 계약하러 갔습니다.

 

새봄의 집은 굉장히 가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많은 가족 사진들과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새봄의 방은 밝은 느낌이었고, 창 밖으로 나무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옷장의 창에는 레이스가 달려있었고, 4개씩이나 되는 스탠드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집도 크고 굉장히 깔끔했습니다. 밖으로 나와 Vietnam Restaurant 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후 나는 선불제 Handy 를 구입하고서 원호 동지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나와 새봄은 Markt 를 들러 장을 봤습니다. 일요일은 가게가 열지 않고 월요일엔 통일절이었기 때문에 긴 주말을 보내려면 준비할 것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새봄의 집에 그렇게 짐을 두고 새봄이 씻는 동안 원호 동지에게 7시에 있을 전시에 가자는 약속과 집주인 할머니께 새봄과 집에 갈 것을 SMS 로 보내고 나와 새봄은 다시 Berliner Str. 로 향했습니다.
낮 3시의 충격. Berlin Str.에 도착해 나와 새봄은 처음 Euroqida 라는 Markt 를 들어갔는데 아랍인들을 위한 마트였는지 온갖 향신료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물 한병만을 들고 나왔습니다. 다시 다른 Markt 를 찾아 새봄을 위한 맥주 몇 병과 불면증이 심해질 때 한잔씩 꺼내 마시고 잠들 위스키 한병, 그리고 소세지, 고기, 야채와 과일, 샴푸, 물 등을 샀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주인 할머니는 새봄에게 나가라고 화를 냈습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잘못한 느낌이 들어 연신 미안하단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 할머니가 계속 화내기에 나는 SMS 를 보냈으니 확인 해달라고 했으나 여전히 화를 내기에 열쇠만 들고 나와야했습니다. 새봄은 할머니에게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내가 혼자 다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노크를 하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주인 할머니가 티셔츠 한장만을 입고 반나체로 내 방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 문을 반쯤 닫으며 주인 할머니가 욕실로 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반쯤 닫힌 문 사이로 나는 주인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 하며 내가 사온 음식들을 가져갈 수 있냐고 물었으나 답은 없었습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계속 되는 신음 소리 이후로 “Scheisse”, “Fick da”, “Ich glaube nie” 와 같은 말을 되풀이 해서 들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기다리다 다시 음식을 가져나오겠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Okay” 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들어가면서 본 할머니는 욕조에서 가로로 넘어져있는 듯 했고 얼굴만이 보였습니다. 저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몇 가지 음식들을 챙긴채 빠져나왔습니다.

 

나오자 마자 원호 동지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원호 동지는 나에게 너무 걱정 하지 말라며 자신의 집으로 올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원호 동지의 집으로 향하며 새봄이와 저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몇 정거장을 지나쳤었습니다. 그러나 금새 다시 갈피를 잡았습니다. 6시가 살짝 넘은 시각에 원호 동지의 집에 도착 하자마자 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맥주를 단숨에 두병이나 들이켰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집에는 침대가 한개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며 수상한 점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모두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시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가 약간 넘은 시각. 우리는 전시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근처에 있는 Schokoladen 이라는 곳에서 포스트 펑크 밴드의 공연이 있다고 하였는데 공연장과 전시장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앰뷸런스가 와 있었습니다. 전시장에 도착하니 한국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오늘의 전시는 중앙대 회화과 ‘김 교만’ 교수님의 전시였습니다. Berlin UDK 를 졸업하신 분과 워싱턴에서 오신 분 등.. 그리고 Yisang Sohn 의 친구 Remi 를 만났습니다. 한국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서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하시며 350Euro 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독일에서의 생활이 좋아질 수 있도록 격려의 말도 주셨습니다.

 

전시가 끝날 무렵 우리는 Schokoladen 에서 공연을 볼까 했으나 5Euro 나 하는 입장료는 너무 비싸다는 생각 아래 근처 2Euro 짜리 피자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Remi 의 집으로 향해 매실와인과 맥주를 조금 마시고 공부를 좀 하다 나와 새봄, Remi, 원호 동지는 Herrmann Platz 에 있는 좌파들을 위한 저렴한 주점으로 알려진 Tristeza로 가 1.5Euro의 가장 싼 맥주, Stern 을 마셨습니다. 가게 입구에는 Rumpen 과 proletariat 의 합성어인듯한 Rumpenletaria 로 시작하는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새봄은 피곤해 했고 택시를 나 역시 피곤했기에 택시를 타고 새봄을 집에 바라다 주고 다시 나는 가게로 돌아와 일을 마치고 합류한 원호 동지의 부인인 Eli와 함께 맥주를 마시다 원호 동지의 집에서 새벽 3시가 조금 넘어 잠에 들었습니다.

 

 

10월 2일 일요일.

 

완전한 도망. 오전 10시쯤 늦게 일어나 일단 한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집주인이 나와는 차원이 다른 Alcohol-licker 인데다 옷을 죄다 벗고 나를 덥치려 해 도망쳤다고. 집을 중개해준 곳과는 화요일부터 연락이 되어 조치를 취해줄테니 일단 짐을 가지러 가고 돌발 상황이 생기면 경찰을 대동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결 상태가 안 좋아 거기까지만 이야기 할 수 있었습니다. 원호 동지가 만들어준 계란 후라이와 빵, 베이컨 그리고 두유를 먹고선 둘이서 Berlin Str. 로 향했습니다.

 

75Euro 짜리 Monatskarte 를 구입하고 카페인 음료를 마셨습니다. 도착해서는 더 두근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첫 아침에 한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독일인 할머니의 축 늘어진 보지와 뱃살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먼저 벨을 눌렀습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저는 긴장을 해 호흡이 거칠어지니 원호 동지가 제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 말해주었습니다. 문을 열고 “Halo” 를 연신 말해보았으나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제 짐과 장보고 난 것들을 모두 챙겨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제가 현관문을 다시 잠그고 원호 동지가 먼저 내려가는데 긴장을 해서인지 잘 잠기지 않았고 속으로 저는 “원호야! 같이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새봄과 합류하여 원호 동지의 집에 짐을 내려놓고선 근처 벼룩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그제서야 조금씩 진정이 되는 듯 했습니다. 그 벼룩시장에는 어디서 주워다 놓은 부서진 것들까지 팔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 구경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원호 동지가 추천하는 2.5Euro 짜리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고기가 너무 크고 빵은 거의 손잡이 수준이었는데 소스도 없어 맛이 없을 줄 알았다가 한입 먹고서는 굉장히 맛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리고선 Neuköln의 미술관, 공원으로 가 그리스 출신으로 추정되는 작가의 전시를 보고서 야외 까페에서 맥주 한잔씩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완전히 편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후에 원호 동지의 부인 Eli 와 합류하여 공항이었다가 아주 큰 공원으로 바뀐 곳으로 갔습니다. 아주 커다란 잔디밭에서 공부하다 눕고서 어느 독일사람들이 날리는 연, 글라이더를 보고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아마 굉장히 취했었나 봅니다. 원호 동지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 했는데 먼저 원호 동지의 집으로 와 잠에 들었습니다.

 

 

10월 3일 월요일.

 

아, 베를린. 아침엔 원호 동지가 대접한 닭고기와 소세지를 먹고서 이른 점심엔 새봄이와 근처에서 케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오후 2시 30분. 원호 동지는 일을 하러 나갔고, 원호의 부인 Eli는 내일부터 있을 박사과정 심사를 위해 준비중입니다. 저는 서울에서부터 독일에 도착해 있었던 2박 3일간의 이야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큰 일도 겪었지만 독일이 낯설고 무섭고 하진 않습니다. 다만 아직 짐을 풀 곳이 없어 원호 동지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미안합니다. 아마 원호 동지가 없었다면 나는 그 집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까요? 글을 끝내기에 앞서 원호 동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ㅡ 2011년 10월 3일

Concert Review: Life

x. 토요일, Life.
물론 베를린 로컬씬의 터줏대감 Pig//Control 과 베를린 로컬 2인조 하드코어-펑크 Mülltüte, 처음 보는 Absurd S.S., 그리고 함부르크에서 날아온 하드코어 Argh Fuck Kill 도 볼 수 있었다.
10시에 칼시작한다고 했지만, 나는 전 날의 세련된 숙취를 즐기며, 11시까지 방구석에 있다가 슬슬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보니 11시 15분인데 시작도 안함. 역시 펑크타임은.. 범지구적 현상인 것이다. 누가 나보고 시간 약속 안 지킨다고 막 까면서 시간 약속 지키라 잔소리 대따했는데, 그 친구는 펑크타임과 같은 범지구적 현상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지 “일찍 나온 놈이 병1신!”

 

이 날 존나 빡친게 두가지 있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거. 왜 Life 의 공연을 AGH 가 아닌, Koma F 에서 했냐는거다. Koma f 작다. 존나 더럽게 작다. 50명 들어가면 못 움직인다. 근데 내가 보기론 어제 최소 150명은 왔다. AGH 에서 했더라도 150명이 오면 간신히 수용할텐데, 대체 얘네는 뭐가 문제라서 AGH 를 개방하지 않은 것일까. 페이스북 이벤트 페이지는 당연히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이 고작 50명이라고 되어있었지만, 살아있는 일본 크러스트의 전설 Life 가 베를린에서 공연 한다고 하면 당연히 포츠담은 물론이고 함부르크 같은 도시에서도 올텐데 말이다. 쾨피 내부의 일은 더이상 이야기할 수 없지만, 진짜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큰 문제였는지는 Life 공연할 때 터지고 만다.

 

이전에 다른 밴드들이 할 때도 공연장이 가득찼고, 답답함을 느끼는 애들은 밖에서 불 쬐고 있었다. 나는 스테이지 앞 쪽에서 Life 의 투어를 돕기 위해 Augsbrug 에서 온 아스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공연 시작하니까 밀려들어오는 관객에 아예 움직일 수 없었고, 더이상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밀고 들어오려 했다. 그렇다고 어떻게 관객을 탓하랴. 아무튼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술렁이고 있었다. 따닥따닥 붙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데 Life 의 음악은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고 있었고, 나와 몇 남자애들이 돌아가며, 스테이지 앞을 막으면서 놀아야 했다. 몸으로 버티기야 하는데, 결국 일이 터진게 중간에 케이블로 고정시켜놓은 스피커들이 Life 의 기타 멤버 쪽으로 무너졌다. 다른 멤버들은 공연을 중단시키지 않고 계속 했는데, 일단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나와 몇 친구들이 스피커를 다시 올리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지만, 케이블이 잔뜩 엉켜있는데다 스피커의 무게도 상당해 쉽지 않았다. 다행히 곧 공연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해맑게 웃는 Life 의 멤버들을 보니 공연 기획한 친구에게 더 짜증이 났다.

 

또 달리 빡쳤던 일, 어떤 미친놈 하나가 과격한 모싱을 하는거다. 여긴 펑크 공연장이고, 크러스트 공연장이다. 과격한 모싱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러 친구들이 그 놈에게 자제할걸 이야기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Koma f 에서 벌어질 수 있냐는 사실이다. 결국 다른 한 친구가 그 놈을 쓰러트려 물리적으로 제압했다. 사람들은 싸움이 난 줄 알고 말리려 했지만, 펑크들은 쾨피에서 주먹질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우리들의 자율주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놈을 밖으로 끌어내고 여럿이 달라붙어 진정시켜 돌려 보냈다.

 

공연이 끝난 이후에는 Life 와 아스카와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에 Scumraid 와 같이 소중히 지켜주고 싶은 밴드가 있는데, 투어 어떠냐 물었다. 게다가 좀 유치할지 몰라도 내가 일부러 신경써서 Scumraid 티셔츠 입고 갔었다! 근데 Scumraid 티셔츠가 어두운데서는 잘 안보여서 말해주기 전엔 아무도 못 알아봄.. (시무룩..) 아무튼 System Fucker 도 한국 투어 하지 않았냐며, 관심을 드러내보였다.

 

일단 공연이 끝났으니 한잔 할겸 그런 이야기는 후일로 미루고 맥주 한잔하자며, 연락처만 받았다. 사실 유럽 펑크/하드코어나 아나키스트 씬에 아시안이 워낙 없다보니 신기해서 아스카와 이야기 하다 연락처를 받아두었는데, 아스카가 고맙게도 아일랜드의 Easpa Measa 와 본인의 밴드 Nemetona 스플릿 7인치를 주었다.. (독일 아나코 펑크 Nemetona 아니고, 일본 크러스트 Nemetona)

 

같이 이야기 하며 마시다보니 나도 너무 치했고, Life 는 바로 다음날 덴마크 공연이 있어 갔다가 다시 라이프찌히 공연을 하러 온다고 하길래 금방 일어나야지 생각을 했다. 게다가 운전해서 간다길래, 크.. 코펜하겐까지만 최소 7~ 8시간은 운전해야 가는데 걱정이 되었다. 코펜하겐서 라이프찌히까지 또 10시간… 작년 2월 베를린서 예테보리까지 17시간 버스 탔던게 기억났다.

 

어제 존나 웃겼던 일, Life 가 공연하기 전에 독일애들 몇몇이 날 힐끔 힐끔 쳐다보더니 “혹시 Life 멤버?” 하고 물어봄. “미친놈아! 아니라고! 나도 그냥 Life 좋아서 온거라고!” 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으나 “아님, 아님. 나 베를린 산지 3년 됐음.” 이라며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해주었다. 왜냐면, 한 손으로도 셀 수 있는 베를린 씬의 아시안인 날 모르는거보니 다른 도시에서 온 애들 같은 생각이 들어서.. (’12 OEF 때, Yuying 이가 Wormrot 으로 오해받고 사진 찍히던게 기억났다)

 

그리고 Life 의 공연이 끝나고 내 일본어가 짧아 생각나는 말이 단 하나 밖에 없어 “아리가토” 라며 악수를 청했었다. 그러자 멤버들이 날 일본인으로 생각했는지 일본어로 몇마디 대답을 받았다. 알아듣는 척 해볼까 했다. 그런데 되돌려줄 말이 없었다. 잠깐 벙쪄 ‘뭐… 뭐라고 해야하지?’ 생각하다 “미안, 나 한국사람.. 아는 일본어가 ‘아리가토’ 밖에 없음ㅠ” 이라 대답하자 다들 끌어안고 진탕 웃었다.
결론: Life, 크.. 형님들 사랑합니다!

 

펑크 공연들은 다른 음악과 다르다. 단지 내게만 그럴지 모르지만, 펑크 공연에 있을 때는 많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다. 특히나 어제 라이프 공연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얻어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 특히나 전자 음악과 함께할 내 새 작업도 펑크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펑크를 단지 한낱 흥미거리로 보는 먹물들이나 힙스터들이 이래서 불쾌한 것이다. 차별을 반대한다는 이 사람들은 여전히 본인의 관념 속에서만 대상을 활자화 시키며, 마음을 열고, 눈을 뜨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 속에서 우리는 함께 공존할 수 없으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파괴는 승리하면서 전진한다.

Concert Review: Cockschlag

x. 금요일, Cockschlag

 

 
친구 덕택에 Cockschlag 공연 봄. 존나 좋았음. 가사 때문에 더 좋았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가사 전부를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웠으나 사운드를 강조하는 북미 펑크에 비해 가사에 큰 의미를 두고, 전달력이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독일 펑크는 언제나 흥미롭다. 때문어 비독일어권 사람들이 독일 펑크를 접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Cockschlag 은 굉장했고, 고정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링크하고 싶어도 인터넷에서 아무런 자취도 찾을 수 없다. 다행이도 친구가 LP를 갖고 있어 가사를 설명해주겠다고 씨익 웃더라. 그래서 그냥 빌려주면 내가 읽어보겠다고 하니, 독일어 자체가 그렇겠지만, 독일 좌파/펑크/아나키스트들이 자주 사용하는 정치/사회들을 둘러싼 관용표현이 굉장히 많은데 그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저 독일어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예전에 번역한 것들 중 Ernst Busch 같은 정도야 독일에서 공부하는 인문학도들은 다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Ton Steine Scherben, DAF, Grauzone, Across the border 같은 것은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가능하며, Die Ärzte, Gleitzeit, Ratten 07 같은 것은 배경을 모르면 조금도 이해할 수 없거나 정반대로 이해하게 된다.

아무튼 목요일은 글 따위를 읽고 구석에 끄적거리느라 밤을 샜고, 금요일 저녁은 민중의 식탁을 위해 4시간 동안 혼자 20명 분의 요리했기 때문에 조금 지쳐있었다. 게다가 자전거가 또 말썽이라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향기로운 그 애가 나가자고 며칠 전부터 일러둔지라 아무 기대 없이 따라 나섰다.

내가 얼마나 피곤하고 공연에 관심이 없었냐면, 심지어 첫 밴드가 시작한지 10분 만에 구석에서 졸고 있는 것이 친구들에게 발견되었다. 용케 맥주는 안 떨어트리고 들고 있었다. 향기로운 애가 날 더러 피곤해보이는데 끌고나와 미안하다길래, “ㄴㄴ너때문 아님. 내가 왜 널 위해서?” 라고 변명을 내던지고선 곧바로 스피드를 조금 했다.

공연 이후에는 디스코 파티가 있었는데, 나는 춤추는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자꾸 그 애가 날 일으켜 세웠다. 아무튼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웃고 떠들며 시간 보내다 잠시 둘이 빠져나왔다. 밖에 있던 다른 친구놈들이 “오.. 너 혹시?ㅎㅎ” 이러길래 “ㄴㄴ아님, 그냥 친구임” 이라 말하고, 여긴 아니다 싶어 결국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꽤나 추운 새벽이라 누구의 방에서 마실까 하다 결국 “나는 더 마시고 싶어” 라며 내 방으로 돌아와 두어병 더 비우다 잠듬.
한줄요약: 과연 이것이 공연리뷰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