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38

오늘 내가 약속이 있어, 집을 나서야 하는데, 술이 깨지 않아.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니 약속을 위해서라도 저 비를 걷어차고, 페달질을 해야할텐데 지금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싶어. 한발짝도 나서지 말고 커피를 홀짝이며 담배를 태우라는 이 비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하지만 이 비를 맞으며 길을 나설 것이라선지 나, 그대 생각 나네. 이 비를 함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대가 생각나네. 그러니까 오늘은 부대찌개ㅇㅇ

ㅡ 2014년 10월 10일, 창 밖의 비를 물끄러미.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 호세 무히카

* 1935년 출생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냄.
1. 1960년대,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에서 활동하며 쿠바 혁명을 지원한 탁월한 지도자로 알려졌으며, 부자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로빈후드 게릴라라는 별명을 얻었음
2. 1970년대, 군사정권과 싸우다 여러차례 투옥되고, 총상을 입었으며 결국 14년간 수감됨. 그러나 옥중에서 정치활동을 계속함.
3. 1985년, 민정 이양후 석방 이후, 민중참여운동 활동.
4. 1994년, 하원의원 선출
5. 1999년, 상원의원 선출
6. 2004년, 광역전선 후보 대통령 선출에 기여 – 총선에서도 과반 이상의석 확보
7. 2005년~ 2008년, 농업 분야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목축수산부 장관 취임
8. 2008년, 높은지지도로 대통령후보 선출
9. 2009년, 대통령 당선
10. 2010년, 대통령 취임 – 넥타이 없는 대통령의 행보
11. 우루과이 정부 관보에 의하면 소유 재산이 집, 트랙터, 87년 폭스바겐 한대 뿐. 매달 월급의 90%를 사회에 기부.
12. 취임하자마자 대통령궁을 개방해서 노숙자들의 쉼터로 써버리고 대통령 별장 매각
13. 무히카 집권이후 우루과이는 꾸준히 5퍼센트의 경제성장을 보임
14. 정치적 노선 – 실용주의자, 채식주의자, 무신론자, 낙태 찬성, 동성결혼 합법화
15. 마리화나 합법화및 개인적 재배 허용. 반면 대기업의 담배산업 강력한 규제. 담배 광고 규제및 모든 담배회사의 담뱃값 디자인을 똑같이 하는 ‘담배단순포장법’ 시행 -> 필립 모리스가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WHO와 함께 국제분쟁재판소에 제소.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MIT 경제학 박사, 클린턴행정부 경제자문회의 의장인 스티글리츠 교수마저 “필립 모리스가 우루과이 국민을 죽일 권리를 달라고 제소했다. 미국과 무역하지 말라” 며, 무히카 대통령을 지지함.
16. 개인생활 – 2005년 결혼 당시, 상원의원 생활을 하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공동거주. 이후 외곽지대에 국화농장을 열어 현재까지도 국화 농장을 하고 있음.
17. 2013년 12월, 세르비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에밀 쿠스트리차는 무히카에 대한 다큐 <정치의 마지막 영웅>을 촬영에 들어감.
18. VICE 리포터와 호세 무히카의 인터뷰 당시, 리포터 앞에서 마리화나를 흡연. 피델 카스트로에게 받은 것이라며 리포터에게 시가를 선물함: http://www.youtube.com/watch?v=1BwVxmJPies
19. 우루과이에 태풍이 왔을 때, 동네 사람들 집 고쳐주러 다니다 나무쪼가리에 얼굴 찢어짐
20. 트랙터 운전중 실수로 개를 치어, 개가 다리 하나를 잃음. 너무 미안해서 개와 같이 살기로 함
21. 브라질 월드컵때 우루과이선수단이 패하고 들어오니까 공항에 나가서 카메라 앞에서 피파개썌끼들 하고 욕했다고 함.
22. 며칠 전 무히카의 폭스바겐을 100만엔에 파는데 제안 받아 경매에 올려 노숙자를 지원하는 주택 제공 프로그램을 위해 쓰기로 함.
23.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무히카 대통령의 연설 전문: http://www.huffingtonpost.kr/2014/04/15/story_n_5150195.html
24. 현재 거주하는 집: 방 1개, 부엌 1개, 거실 1개. 가정부 고용 안함, 직접 가족과 개의 식사를 준비함. 일흔 여덟임에도 트랙터 몰아 농사지음. 농장, 밭, 트랙터 등은 모두 부인 소유이고, 개인 재산은 200만원대의 87년형 폭스바겐 한대뿐.

 

https://www.youtube.com/watch?v=EzaBW8iSztE

 

‘색상 충돌’ 한국 – 미국 관점에서 1992 로스 앤젤레스 폭동

https://www.youtube.com/watch?v=_FkZEStvIEo&feature=youtu.be

<Clash of COLORs – LA RIOTS OF 1992> speak and subtitle – korean / english

 

 

I recommend this documentary, if you interesting about LA RIOTS of 1992 between korean american and black american. Also this docu shown us few things.
1. Power battle between police and city government.
2. What yellow journalism did in that time.
3. Between Korean american and Black american, there was no racial hate.
4. What could be happen when government and police are failed?
 

13:35 ㅡ Leo Estrada as Demographer said: “It’s also important to realize, that koreans coming from Korea don’t think it themselves at minorities. Really grown up all their lives in the as part of a majority so the topic the other concept is any even sensible. When come United States you learn after a while that there’s with majority whose minority groups people color committees a color ethnic racial categories. The Koreans were just koreans they didn’t see themselves as part of that other larger group both minorities”

 

Indeed, I feel. Very important point of most Korean mentality. They never thought about living multiethnic society in their life. They learned about racial discrimination and multiethnic society from conservative public education. So when Koreans did racial discrimination, most of them can’t recognize. You know that some hollywood movies exaggerating sensational presentation and taking suggestive remarks for develop a dramatic scene. But part of Koreans learned about racial discrimination like an amusement from hollywood movies.
How happened like this in South Korea, NOT! North Korea? Actually, most Koreans couldn’t travel to another country before 1989. South Korean government made a level for a law as ‘Overseas country travel Liberalization Law’ from 1981. Then 1989, that law passed totally for all people. But still poor people (include most young generation) can’t dream a travel oversea country.
Who could able to travel to another country before 1989?
There is 3 standards for qualification.
1. Workers (Their bank account had under control by South Korean government.
2. People related their family in another country.
3. Only middle upper or upper class and high public official could have their private travel.
Because of how abled to all this all happened, that korea was under military dictatorship very long time.

 

만약 한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칸 미국인 사이에 벌어졌던 1992년 LA 폭동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또한 이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몇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경찰과 시 정부의 권력다툼.
둘째, 돈에 눈이 멀어 사실을 왜곡하고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은 언론들.
셋째, 한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칸 미국인 사이에는 인종 혐오가 없었다는 것.
넷째, 정부와 경찰이 좆같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13분 35초 ㅡ 인구통계학자, 리오 에스트라다가 말하길: “한국 이민자들 스스로가 자신들 스스로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봤을 뿐 자신들이 소수민족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생을 대다수의 일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소수라는 그 개념조차 없습니다.”

많은 한국인에게 해당되는 중요한 이야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다인종 사회에서 사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한국 사람들은 인종차별과 다인종 사회에 대해 배운것은 보수적인 성향의 공교육이 전부였다. 그래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인종차별을 하였더라도, 대다수의 그들은 그것을 인지할 수 없다. 모두 알겠지만, 몇몇 할리우드 영화들은 극적인 전개를 위하여 과장해 선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외설적인 말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어떤 한국 사람들은 그 할리우드 영화들로부터 인종차별에 대해 오락처럼 체득한다.
어떻게 북한도 아니고 남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사실은 1989년까지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다. 한국정부는 1981년부터 단계적으로 ‘해외여행자유화’ 법을 시작했고, 1989년에 이르러서야 모든 사람을 위한 법이 완전히 제정되었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을 포함한)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해외여행을 꿈도 꿀 수 없다.
그럼 1989년 이전에는 누가 여행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행이 가능했던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노동자들 (물론 그들의 은행 계좌는 한국 정부 관리 하에 있었다.
둘째, 외국에 가족이 거주하는 사람.
셋째, 적어도 중상위계급이나 상류층 그리고 고위공직자.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국이 수 십년간 군사독재자의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 프리덤라이드

https://www.youtube.com/watch?v=_JHDoNr8Bpg

미국 내슈빌의 미래 자유버스 활동가들(당시 내슈빌 전역의 대학생들)이 비폭력 트레이닝(역할극 등)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이 트레이닝을 이용, 학생들은 내슈빌 시내 레스토랑 등의 흑백분리정책을 철폐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영국 : 희망의 씨앗(SEEDS OF HOPE)

https://www.youtube.com/watch?v=wvuf4qJ-Vu4

 

희망의 씨앗(SEEDS OF HOPE)은 삶과 정의를 위해 망치를 든 4명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이 비디오는 1996년 영국에서 있었던 유명한 직접행동의 과정 및 이들이 마침내 무죄평결을 받고 감옥에서 풀려나기까지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행동을 위해 함께 뭉친 사람들의 조직이자 운동 플라우셰어(plowshare)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4명의 여성이 영국항공우주산업(British Aerospace) 공장에 들어가 호크전투기를 파괴한다. 이 전투기는 동티모르 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수출될 계획이다….

외화,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한국 방영을 둘러싸고

<트윈 픽스, Twin Peaks> 관련 정보를 찾다가 재미있는 정보를 발견했다. 트윈 픽스가 한국으로 수입되 방영되기 전에는 한겨례, 경향이 왜 트윈 픽스 같은 예술 작품을 방영하지 않냐며 프로그램 편성을 비판했고, KBS2에 의해 트윈 픽스가 방영되자 한겨례, 경향 신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간통, 친족살해, 근친상간 등을 소재로한 트윈 픽스는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며 비판을 했었다. 반면 매일 경제와 동아일보 등만이 드디어 미국의 젊은 영화 감독 데이빗 린치의 화제작 트윈 픽스가 방영된다며 기사를 써내렸다는 사실. 빨갱이는 이래서 안된다. 홍대 학생회장이었던 한아름이도 지금쯤이면 망가졌겠지?

 

ㅡ 2012년 8월 1일

독일 : 수천 번 드러눕기

https://www.youtube.com/watch?v=iGwjBi9levQ

1997년 3월 독일 핵폐기물 수송 저지를 위한 대규모 직접행동.
독일어. 한국어 자막. 재생시간 43:50
1997년 3월. “수천 번 드러눕기” 캠페인 참가자들이 5일 동안 핵폐기물 수송용 크레인이 있는 다넨베르크의 목초지에 캠프를 차렸다. 이는 3차 핵폐기물 운송을 막기 위해 활동가들이 차린 12개의 캠프 중 하나이다.
“수천 번 드러눕기” 캠페인은 비폭력 활동가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국가폭력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참가자들 내부의 갈등에 대해서도 비폭력을 견지했다.
모든 결정은 전 참가자들의 민주적이고 합의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캠프 안에서는 동아리가 구성되었고 각 동아리는 대변인회의로 대변인을 파견했다.
캠프구성:
대형텐트 14동, 의사 2명, 구급요원 5명, 15개의 구역
의사소통 : 휴대폰 15대, 컴퓨터 2대(팩스, 모뎀, 프린터), 라디오 수신기 8대,
공동식당 : 하루 4,000명x3끼
의류준비 : 물대포에 대비한 옷 세트 700벌
물품 준비 : 물대포에 대비한 2000제곱미터 너비의 방수시트

잡글 – 베를린, 오바마, 금융 카를텔, 경제위기

데이빗 린치가 5년 전에 베를린을 방문, 베네핏 파티를 크게 열었었다. 마치 이명박의 강령을 받은 마냥 베를린 북서쪽의 낮은 언덕에서 삽집을 한번 한 후.. “훗날 나의 이름을 걸고 이 곳에 영화 학교를 만들겠다.”라고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그 날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 중 베를린의 유명 갤러리스트라던가 예술을 애호하는 거부들이 들뜬 마음으로 데이빗 린치에게 엄청난 기부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영화 학교의 건립은 커녕 이야기조차 사라졌다. 웃지못할 사건이었다고 전해지는 가운데 정작 데이빗 린치는 어떤 성격의 베네핏 파티였는지 모르고 참석해 술과 베를린에 들뜬 마음이었을 뿐이고, 에이젼시가 기획한 행사였다는 후문이 있다.

 

이와는 좀 다른 베네핏 파티가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인공은 조지 클루니. 조지 클루니는 대외적으로 민주당 지지자이며, 반전주의자임을 알리며 현재 민주당의 대선자금을 위한 베네핏 파티를 열고 있다고 한다. 파티가 한번 열릴 때 마다 최소 200억원 이상의 기부금이 모이는데 재미있는 점은 조지 클루니가 반전주의자임을 말하면서도 민주당의 오바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자마자 아프가니스탄에 재파병을 한 바 있다.

 

오바마와 고 김대중 전대통령도 받은 노벨평화상에 대해 한가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바로 201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다름 아닌 EU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금융 카르텔과 메르켈의 합작쯤으로 여겨지는 EU의 금융문제는 그리스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금융시장뿐만 아니라 국가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지금 이 네 나라의 사람들은 tv를 끄고 거리로 나가 피를 흘리며 금융범죄자들의 문제를 왜 무고한 사람들에게 전가 시키는지 그리고 왜 무고한 사람들이 아닌 금융 범죄자들에게 다시 돈을 지원해주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이 나라들에서는 여러차례 총파업을 열리고 있는데 이 총파업에는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교사, 군인 장교, 소방수와 같은 공무원들까지 참가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금 한국이 세계 경제 불황 속에서도 세계 9번째의 무역 1조달러및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디폴트 즉, 국가부도를 선언하기 직전에 있는 스페인보다 더 심각한 가계부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은 140.6%, 한국은 158%로 실제로는 한국에서 저러한 시위들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이상히 여길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거리로 나오지 않으며,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ㅡ 2012년 10월 15일

본래 글: 본인과 친구관계가 아닌 사람은 읽을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