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id Film Club – 2

* 경고: 술 마시러 가기 위해 프린트 중인 프린터의 전원 코드를 뽑아 버리듯 글을 마쳐버렸습니다.

 

 

x. 며칠 간의 영화 이야기와 <정어리>

 

– <Dragnet, 드라그넷>, 1987: 80년대 여피들을 상대로한 코미디 범죄물, 80년대의 향수는 언제든 좋다.

– <Lucy, 루시>, 2014: 최민식의 연기가 생각보다 돋보이지 않았다. 중반부터 노골적 중2병 스타일. 결말로 향할수록 아이디어 부족이 눈에 보인다. 매트릭스, 맨 프롬 어스, 스페이스 오딧세이 + 뻔하디 뻔한 아시안 갱스터 클리쉐를 섞어다가 황급히 “손님! dvd 대여기간 만료요!” 하며 영화를 끝냄. 뤽 베송 개새끼야.

– <22 Jump Street, 22 점프 스트리트>, 2014: 전편인 <21 점프 스트리트> 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다소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요새 나오는 어지간한 코메디보다는 나은 편. 후속편에 대한 엔딩이 깨알 같은 재미로 요즘 헐리웃 영화들의 후속편에 대한 세태를 조롱했다.

–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2006: 박광정, 정보석 같은 괜찮은 배우들을 캐스팅 하고서도 실망시킨 영화. 어딘가 홍상수의 느낌이 베어있는데, 시도 자체를 조롱하고 싶진 않다.

– <The Devil’s Path, 흉악 – 어느 사형수의 고발>, 2013: 흉악하게 못 만든 영화.

– <족구왕>, 2013: ㅈ같은 사랑아, 빌어먹을 청춘아!!!!!!! 근데 나는 한국의 대학 문화를 모른다는게 함정.

– <Tamako in Moratorium,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2013: 이런 류의 일본 영화들 이제 그만 나올 때 되지 않았나. 아.. 내 시간. 왠만한 중2병 영화들조차도 영상미는 갖추는데, 이건 아무 것도 없다.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들.

– <Haywire, 헤이와이어>, 2011: 좋은 배우들로 계속 잠이 오게 만드는 쓰레기 영화.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말로리 케인’은 미국 정부에 고용된 고도로 훈련된 여성 첩보요원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그녀는 억류되어있던….”.

– <Black Angel, 블랙 엔젤>, 2002: 틴토 브라스, 이 놈의 영감탱이ㅋㅋㅋㅋㅋㅋ 에로의 거장이 아니라, 코메디의 거장ㅋㅋㅋㅋㅋㅋㅋ

– <Into the White, 대공습>, 2012: 실화 영화들이 대개 노골적으로 눈물을 쥐여짜는데 초점을 두는 반면, Into the white는 그렇지 않아 보기 편했다. 각국 언어로 연기를 해 더욱 몰입감이 있었다. 한국제작사들의 한국어 타이틀 작명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전쟁영화.

– <스톤>, 2013: 화려한 캐스팅이 아니더라도, 정우성이 출연한 <신의 한수> 와 비교해도 아깝지 않은 영화다. <신의 한수> 가 2014년 작품임에도 말이다. 다소 낮은 예산의 영화들에서 완성도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썩 괜찮은 완성도도 보여주었다.

–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4: 호화캐스팅에 이케아 같은 영화다. 물론 이케아 같다는 의미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망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액션 영화임에도 계속 졸았기 때문에 두번이나 봐야만 했다.

– <Grudge Match, 그루지 매치>, 2013: 드 니로와 스탤론의 만남에서 중후한 무엇인가를 기대했지만, 70’s, 80’s 스타들을 인스턴트식으로 재활용한 영화. 뻔하디 뻔한 서사. ‘환전 해달라는 할아버지에게 은행 여직원이 “애나(엔화) 드릴까요? 딸나(달러) 드릴까요?” 하는 식’ 의 개그가 생각난다.

– <청아>, 2010: 제발 이런 영화 만들고 예술 영화라고 둘러대지 마라. 기본적인 전개의 개연성도 없어 딱히 악평을 주기도 어려울정도. 여자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싶으면 꼭 함께 볼 것.

– <All Things Fair, 아름다운 청춘>, 1995: 크흑, 2시간 8분의 크흑…. 사랑이란 누구의 이름인가. 감히 별 다섯개를 드린다.

– <Falling Down, 폴링다운>, 1993: 조엘 슈마허는 반자본주의적 작품을 다루는 감독이 아니다. 허나 공교롭게도 마이클 더글라스의 <폴링 다운> 은 올리 에델 감독의 <Last Exit to Brooklyn, 부르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1989 처럼 자본주의 민살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모두 낙원에 대한 생각이 달라요.” 감히 별 네개 반을 드린다.

–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2005: 별 반개 준다.

– <원 나잇 스탠드>, 2010: 형편 없다는 말 밖에 못하겠다. 시나리오부터 연기까지.

– <Borgman, 보그만>, 2013: 개봉부터 기괴한 영화 열 손가락에 든다고 악평이 자자했던 영화. 욕하지 마라, 나는 종종 웃으며 재미있게만 봤다.

 

 

– <On The Road, 온 더 로드>, 2012: 영화 <컨트롤> 에서 불후의 밴드 ‘조이 디비젼’ 의 싱어 이안 커티스를 연기한 ‘샘 라일리’, 영화 <프라이데이 나잇 라이트> 의 ‘가렛 헤드룬드’, 영화 <락앤롤 보트> 의 톰 스터리지, 영화 <인 투더 와일드> 의 ‘크리스틴 스튜어트’, 영화 <멜랑콜리아> 의 ‘커스틴 던스트’, 영화 <Her, 그녀> 의 에이미 애덤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 의 ‘비고 모텐슨’, 영화 <레이> 의 ‘테렌스 하워드’, 영화 <아임 낫 데어> 의 ‘래리 데이’, 영화 <염소들> 의 ‘리카도 안드레스’, 영화 <커피와 담배>, <위대한 레보스키>,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망각의 삶>, <아트 스쿨 컨피덴셜>, <뉴욕 스토리>, <판타스틱 소녀 백> 의 ‘스티브 부세미’, 그리고, ‘킴 붑스’. 이런 캐스팅만 보더라도 이 전에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나 <그들 각자의 영화관> 같은 영화를 감독한 월터 셀러스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만든다. (배우 ‘킴 붑스’의 이름은 ‘Kim Bubbs’ 인데, 왠지 ‘Boobs’ 드립을 치고 싶어 캐스팅한 느낌이 들 정도)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세 작가.

 

이 영화 <온 더 로드> 는 잭 케루악의 자전적 소설 <길 위에서> 영화화한 것이다. 사실 대개 이런 영화들은 좋은 평을 받기 어려운데, 썩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 원작의 힘이랄까. 이 모든 것들이 잭 케루악의 진짜 이야기라서 그럴까.

 

영화 속, 한 대사가 나를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함께 해온 누군가가 떠나며, “I’m on way for me, 나는 길 위에서 나가려구요” 라고 남겼다. 왜 번역이 이따위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저 씬의 앞뒤 문맥을 함께 읽으면 되려 괜찮은 의역이라 생각한다. 그 절망감을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이 말을 들었던 잭 케루악의 나이는 딱 내 나이쯤이었고, 정처없이 목적도 없이 글을 쓰며 3년 째 여행 중이었으며, 여행이 시작된지 4~ 5년 가량 지난 뒤에 그의 책 ‘길 위에서’ 를 출판했다. 더구나 1951년 4월 2일에서 4월 22일 사이에 일종의 암페타민인 벤제드린에 취한 삼 주 동안, 단 하나의 구두점 없이 타자기에 끼운 36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종이띠에 이 소설을 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6 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종이띠는 마치 그가 말하던 길과 같다. 이 압도적인 비트 세대 작가들의 글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 버리는 것이다. 며칠이나 굶다 겨우 음식을 맞이했던 잭 케루악의 친구들이 저녁 만찬에서 예의따위 생각할 겨를 없이 게걸스럽게 요리들을 먹어치웠듯이 이 책들에 담긴 문장을 게걸스럽게 읽어 치우는 것이다. 마치 스피드를 할 때처럼 생각 같은 건 나중으로 미루어야만 한다. 생각하는 동안, 새로운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가 출판 된 이후, 이 책은 마치 페이지 마다 LSD를 잔뜩 적셔놓은 것처럼 팔려나갔고, 서점에서 가장 자주 도둑 맞는 책 중 하나가 되었으며, 잭 케루악은 이 소설 하나로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 모두를 길 밖으로 내몰았다. 잭 케루악은 ‘비트, Beat’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고선, 음악의 박자가 아니라 단지 ‘세상의 모든 관습에 대한 지겨움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했고, 젊은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고, 비트닉(Beatnik, 비트족)이 되었다. 밥 딜런부터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같은 뮤지션은 물론, <이지라이더>, <델마와 루이스>, <브로큰 플라워> 같은 로드 무비들도 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 뿌린 씨앗(크, 정액이라고 표현하려다 참았다)에서 태어났다.

길 위에서 그들은 모두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었다. 차를 운전하다 기름이 떨어지거나 여비가 떨어지면, 같으 길을 지나는 여행자에게서 기름값을 받고 태웠다. <길 위에서> 에 담긴 내용처럼 종종 몸을 팔기도 했고, 먹을 것과 술, 담배들을 훔치기도 일쑤였다. ‘히치하이킹’ 이란 것도 이 시절에 생겨난 문화라 할 수 있고, 몰래 화물열차에 올라타 미 대륙을 횡단하거나 중간 중간 일하던 공장 혹은 농장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고,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1950년대 한국은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전쟁의 혜택을 받은 미국은 모든 것이 풍족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1959년 한 해에 미국 여자들이 립스틱에 쓴 돈이 당시 돈으로 무려 20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국은 권태로울 만큼의 안락함을 영위하면서도, 젊은이들은 이러한 소비지상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이들에게는 어디론가 폭발할 것이 필요했지만, 그런 구실이 없었다. 매카시즘의 광풍만이 불고 있었다. 당시 <길 위에서> 의 책 광고 문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밤새 거친 파티를 열고, 앉아서 정열적인 비밥재즈를 듣고, 항상 어딘가로 움직이며 마시며 사랑을 나눈다. 그 어떤 새로운 경험에도 그들은 무조건 예스다!” 그리고 그들은 잭 케루악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소설 <길 위에서> 같이 폭발했다.

 

 

다시,
“나는 길 위에서 나가려구요”.

 

그래서 나는 결국 와인을 열었다.
그들을 향한 나의 애정도 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삶과 열정을 잊지 않겠다’ 맹세를 서슴치 않던 이들이
포기하고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콧잔등이 시큰거린다.

 

나는 여행중이진 않지만, 혹은 여행이라고 해도 상관 없지만, 지금 시점에서 베를린에 있는 내게 저 말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떠날 때 남기는 말이다. 아직 내 인생은 그리 길지 않은데, 내게 남겨진 저 한마디를 마주할 일이 꽤나 많았다. 올해에만도 두 번이나 들어야만 했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으나, 그 답은 언젠가 그 모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 알게될 것이라며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dx3 sardine cover original

내가 <정어리> 를 쓰기로 한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나 비트 세대들 때문이 아니었다. 20대의 절반 이상을 병원에 매여있어야 했는데, 나는 그 처방약들에 의해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약이 너무 세서 내가 무엇을 한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고, 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을 택했다. 내가 나를 잊지 않도록 그래야만 했다. 두 차례에 걸친 병원 생활은 가혹했다. 혼자서 눈물, 콧물을 흘리고 토해가며 좌절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것일까’ 하고 자책하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안했다. 퇴원 이후에도 1년이 넘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입원 당시, 약물 때문에 책 읽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던 나는 슬라보예 지젝의 <What’s up totalitarianism?> 과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를 독본하기에 위해 노트에 배껴써가며 읽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복용하는 약물과 종종 맞는 주사의 양과 이름을 기록했으며, 그에 대한 효과, 부작용들과 내 기분을 비롯한 상태, 하루종일 무엇을 했는지 기록을 했다. 복용하는 약물의 양이 늘어갈 수록 일기는 짧아져 갔으며, 퇴원하고 나서 다시 읽은 일기를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퇴원 직전에는 단 한줄도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 세 권으로 엮인 이 노트들은 서울에서 베를린으로 오기 직전 모두 불태웠다. 그 시간들을 기억하기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 노트들은 불탔음에도 기억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차려입고, 젊잖게 무엇인가 대하는 것은 나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보다 공격적인, 화염병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보다 불편한 글을 쓰고 싶다. 갈등을 드러내고 싶다. 미로 같은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글 <정어리> 는 전혀 그런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차분한 것이다. 지진이 났다면 테이블 밑에 웅크려 머리를 쳐박지 말고, 집 밖으로 나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황망한 결론:
비트 세대 작품들을 보다 보면, 괜스레 생각이 많아진다.
친구 녀석이 생일이다. 나가서 싸구려 위스키라도 한 병 사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