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어리 – 31

종종 한글 번역을 첨부하기도 하지만,
이 대화는 번역을 달지 않겠다.
건조했던 대화는
2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이었다.

 

이 것이 나와 k에게 어떤 것이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다.

 

k에게 전화를 했다.

Me: “What are you doing today?”

Kv:”I’m here with my dad.”

M: “I thought you alread went to f’s party.”

K: “No, yesterday my mom is dead.”

M: “O.. So sorry.”

K: “But she died while sleep, it’s good.
…./There was no pain.”

M: “I wish you and your dad be well.”

K: “Now we have share one more thing.”

M: “Yes, we are.”

K: “See you soon.”

M: “Okay, take care.”

 

ㅡ 27. September. 2014, evening.

TAZ – Hans-Christian Ströbele über Flüchtlinge with korean translate

This music isn’t related with this article.

 

Today, my evening appointment was canceled, then I just sat on 3rd kitchen and listened house music with house friends, and I translated a TAZ article by a leeeeeeeeeeeeeeeeegendary politician (maybe?) of german green-party as well-known as Hans-Christian Ströbele talk about Refugees in Germany. This is how I learn german myself.

오늘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고, 하우스 거실에 앉아 하우스 음악을 들으며,
녹색당의 전설적인 정치인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가 망명자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번역했다.

 

 

 

//// 아래는 번역문, 원 기사는 여기(Hans-Christian Ströbele über Flüchtlinge ㅡ http://taz.de/Hans-Christian-Stroebele-ueber-Fluechtlinge/!146630/)를 클릭! ////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가 망명자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명자들의 온당한 거처를 위해 150만 유로가 승인 되어야만 합니다. 녹색당 정치인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의 주장입니다.

 

 

타쯔: 스트뢰벨레씨, 독일은 망명자들의 늘어가는 숫자를 과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 아니오. 당연히 많은 망명자들이 있고, 공동체를 위해서는 그게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것은 아닙니다. 90년대 초반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40만 명을 상회하는 망명자들이 있었어요. 시리아와 이라크에 끔찍한 전쟁을 안겨주었던 우리는 그보다 더 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얼마나 더 많은 망명자들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건 아마도 지금 숫자와 상한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지중해에서 수 백명이 익사하고 있다면, 유럽과 특히나 독일에 상대적인 번영을 받은 우리는 단지 그것을 추모하는 시간만을 갖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최소한만이라도 유럽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인도적인 대우 속에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 세르비아, 보스니아와 마케도니와 같은 국가들이 안전해질 수 있도록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가고 있긴 하죠.

맞습니다. 그게 바로 반루마니아인 법의 핵심입니다. 브란덴부르그 개선문 가까이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는 Sinti와 로마에서 살해 당한 사람들에 대한 승전 기념식을 했다는 것이 끔찍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선문 가까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로마와 Sinti는 매우 나쁘게 다루어졌죠.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좀 더 인도적인 망명자 정책을 맞을 수 있을까요?

EU 국가들은 그들의 경제적 힘에 따라 그 열쇠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추가로 그리스나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망명자들은 어디서든 그리고 어떻게든 망명을 하거나 거주할 수 있도록 적용되어야 합니다. 더 많은 정보들과 그들이 불행하게도 돌려보내지게 되어 망명자들이 어떻게든 알프스를 넘어로 숨어버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독일 연방 정부는 더 많은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도록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하며, 지역 주민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대우해야 합니다.

 

인터뷰:
한스-크리스티앙 스트뢰벨레

그는 201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크로이쯔베르그 지역의
’90년 동맹/녹색당’을 위해 세 번째 ‘직접 위임직’을 지냈으며,
법률사무위원회와 국회통제정보위원회의 회원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게 무엇입니까?

그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나쁘지 않도록하며, 시민사회에 가능성을 열어주고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죠.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로 더 적은 사람들이 오도록 노력하는 것과 실용적인 것에만 노력하는 것들 때문에 말씀하신 일들은 줄어들게 될 겁니다.

이거 왠지 막연한 불안감이 드는군요. 사람들을 불명예스럽게 셋방에서 간신히 잠만 자도록 몰아 붙이는거네요. 그리고 독일의 비 따위가 그 위에 내리면 이 사람들은 그냥 더러워지고, 그 지역 안에서만 그들의 비용을 지불하는거구요.

 

바덴-뷰어템베르그 장관 크렛쉬만의 협상안에 의해 이렇게 해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다 적은 사람들을 깨끗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거기에 있어요, 우리는 그것보다 좀 더 효과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클렛쉬만 역시 녹색당 정치인이지만, 망명자 문제에 있어 보수적이며 같은 당 정치인 스트뢰벨레와 대립하고 있다)

그건 이미 충분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온당한 거처와 치유를 달성하기 위한 돌파구가 아니라구요.

 

녹색당은 클렛쉬만의 투표를 막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주장관에게는 그럴수가 없겠죠.

 

다른 많은 좌파 정당들 역시 망명자들의 기금 역시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 직면 했습니다.

나는 여기 베를린-크로이쯔베르그 지역의 망명자들을 위해 시위했고,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협하고 양보했습니다. 거기엔 많은 원-거주민들의 연대가 있었어요. 문제는 ㅡ 클렛쉬만과 같이 망명자 문제에 보수적인 ㅡ 사람들이 서로 간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왜냐면 거기에 너무 적은 돈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컨데 베를린 프리드리히샤인-크로이쯔베르그 지역은 곧 망명자들이나 청년들 혹은 교육을 위해 쓸 예산을 결정해야 하는 ㅡ 녹색당 내부 ㅡ 선거에 직면했습니다. 물론 베를린 사람들에게 맡겨질 일이죠. 시민사회는 망명자들과 청년들, 교육을 위해 쓸 돈이 더 필요합니다. 그 후엔 더 많은 분노들이 이 지역민들에게 돌려질거에요.

 

하지만, 만약 좌파-자유주의자들이 망명자들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한다면, 이 정책에서 압력이 어디로 가해질까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청년 프로젝트들은 망명자들의 인도적인 대우에 반대하고 있는 꼴이라구요! 그건 거대한 액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독일은 무엇인가를 위해 더 많은 돈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망명자들의 거주를 위해 150만 유로를 승인해야만 하기 때문 입니다. 거기엔 어떤 재정상의 문제도 없어요.

 

그래서 그게 단지 정치적 의지에 관한거란겁니까?

맞습니다.

 

혹시 독일에 남 돕길 그만두자는 유행 같은게 있나요?

아니오. 90년대와 비교하면 망명자들의 권리에 대한 녹색당의 의지에 반하는건 아닙니다만, 지금은 망명자들이 처한 공경을 더 이해가 더 있습니다. 거의 다다랐어요. 만약 어떤 저녁에 이라크와 시리아의 수전, 수백 망명자들의 끔찍한 이미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게 베를린이라면, 그 다음엔 400명은 당연히 충당할 수 있을거고, 그 다음엔 누구든지 호의를 베풀거에요.

 

그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이네요.

물론, 사람들은 화를 낼겁니다. 만약 거기에 경찰과 도로봉쇄 같은 문제들이 있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 문제들 모두 스스로 만든 것뿐이에요. 내가 말했듯이, 당신은 조금의 돈으로 그 문제를 피할 수 있어요.

 

어떤걸 예측하고 계시죠?

저 너머에는 아직도 많은 망명자들이 독일로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부정적 의견입니다. 오로지 시리아를 위해서 다른 예외를 만들 수 있어요.

만약 우리가 이라크나 시리아, 리비아의 전쟁에 문제제기를 한다면, 그 다음엔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없겠죠: 그래, 서구는 전쟁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도왔어 – 하지만 당신은 지금 집에 돌아가려 하지. 당신은 그래선 안돼.

 

정부는 그 나라들이 정말로 안전하면 돕지 말아야 합니까? 독일은 발칸반도 국가들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코소보에서는 많은 루마니아 사람들이 독일과 나토가 배치된 곳으로 피신하고 있으며, 다인종 사회에 필요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 사람들의 상황은 재앙이에요. 그들의 집들은 불 타버렸고, 여기저기로 팔려가며 모욕 당하고 있습니다. 헝가리나 루마니아와 같은 나라들 역시 EU 회원국이에요. 여기서 독일은 차별금지조약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요.

아나키스트 Renzo Novatore

아나키스트 Renzo Novatore

베를린의 ‘Tempest’ 라는 아나키스트 인포샵에서 Renzo Novatore 라는 1890년, 이탈리아 출신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사상을 담은 <Toward The Creative Nothing>이라는 책을 가져왔다. 아직 본격적으로 본문을 읽진 않았지만, 렌조 노바토레, 그의 이력은 정말 특이하다. 한국에 아나키스트 서적이 적은 점 등을 고려해 겸사 겸사 한글로 번역할 계획이다. ‘이 달의 아나키스트’ 같은 기획 연재를 하면 재미있겠지만, 혼자 모든 것을 손대기엔 역부족이라 천천히 하나 하나 해나가겠다. 일단 렌조 노바토레의 사상을 담은 이 소책자를 번역하기 이전에 그의 격렬했던 삶을 소개해보겠다.

 

렌조 노바토레는 배움에 대한 그의 의지와 달리 초등학교 1학년 몇 달만을 다니다 기초 문법만을 조금 뗀 채 가난을 이유로 학업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는 앎, 지식에 대해 강한 열망을 느끼고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며 밤에는 홀로 독학으로 시와 철학자들을 공부하게 되는데 그의 청년기는 Max Stirner, Friedrich Nietzsche, Oscar Wilde, Henrik Ipsen, Charles-Pierre Baudelaire, Arthur Schopenhauer 등을 중심으로 작가, 철학자들의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비판적 사고를 훈련했다.

1908년, 그가 18세가 되던 해, 고심 끝에 그는 스스로 아나키스트가 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종교가 사회에 끼치는 해악들에 분노하고 그가 사는 지역의 교회를 불태우고, 3달간 징역형에 처해진다. 출소한지 1년 후, 몇 달간 도주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강도및 절도 혐의 였다. (왜 강도와 절도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1911년(21세) 9월 30일, 그는 반달리즘의 혐의로 그는 경찰에 체포 된다. 1914년(24세)에는 처음으로 아나키스트 인쇄물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 1 차 세계 대전 동안 징집 되었으나 전쟁에 거부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18년 4월 26일에(28세) 그의 연대를 버리고 탈영하였다. 같은 해 10월 31일 탈영및 반역죄로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 의미는 피의자가 법정에 서지도 않았음에도 재판이 진행 되었고, 재판정 마음대로 형을 선고했다는 의미이다.) 이 때 그는 그의 집을 버리고 도주하여 국가에 대한 무장 봉기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1919년 6월 30일(29세), La Spezia 지방의 무장 봉기가 시작된 후 한 농부가 그를 경찰에 팔아넘겼고, 10년 형을 추가로 선고 받고 형을 시작했으나 Amnesty가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사면 요청함에 따라 몇 달 후에 풀려났다. 그는 다시 아나키스트 운동에 합류했으며, 다양한 반란과 폭동을 노력했다. 1920년, 경찰은 다시 그를 ‘Val di Fornola 해군 기지 내의 무기 보관소에 대한 무장 공격’ 혐의로 체포한다. 몇 달 후, 그는 자유가 되었으나 한 밀고자에 의해 여러 차례 그가 시도했던 반란과 폭동이 실패하고 만다.

1922년 여름(32세), 세 트럭에 가득 찬 파시스트들이 그의 집을 급습 했는데, 그 때 그는 그녀의 부인,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있었다. 파시스트들은 그의 집을 애워싸 공격을 했지만, 그는 수류탄을 사용하여 역공하며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 때부터 그는 다시 지하 저항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22년 9월 29일, 그와 그의 동지 Sante Pollastro는 Teglia의 한 여관에 묵고 있을 때였다. 3명의 Carabinieri(이탈리아 군경)이 여관 안으로 급습하자 그와 그의 동지는 발포가 시작되기 전에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는 곧 담당 경찰관에 의해 죽고 말았고, 그를 죽인 경찰관은 그의 동지 Pollastro에 의해 죽었다. 그에 놀란 다른 경찰은 도망치다 Pollastro에 붙잡혀 목숨을 구걸했고, Pollastro는 그를 쏘지 않고, 빠져나왔다.

Renzo Novatore는 많은 아나키스트 인쇄물들을 남겼는데, 그의 몇몇 글은 정식 허가를 받아 인쇄 발행 되었다.

 

이 소책자 맨 뒷 장에는 그가 바라본 신, 인간 인류애, 국가, 가족, 사회, 조직, 연대, 우정, 사랑, 남자, 여자 등에 대해 간결하게 정리 해놓은 글이 있는데, 이 글을 보면 노바토레는 회의론자임이 분명해보인다. 그는 ‘공산주의자가 만약 혁명 통해 지금의 사회체제를 부수고자 한다’ 면 그도 “기꺼이 지금의 사회체제를 부수는데 함께할 것”이라 말하며, “그 공산주의자가 혁명 이후에 또다른 사회체제를 건설한다면, 그 사회 또한 부술 것”이라고 피력할 정도로 억압에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대안이라던가 인류애에 회의적이었으며, 조금의 희망도 걸지 않았다.
그는 여자에 대해 ‘가장 잔인하게 부림 당하는 노예-짐승이며, 지구 위에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가장 큰 피해자’ 라고 표현했다. 모든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렌조 노바토레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여성에게 키스할 때,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지나는지 알고 싶다” 라고 말했다.

크.. 로맨티스트…

2014 국제 기후 행동 – 베를린과 그 여파, 그리고 오늘의 한국

* 사진을 클릭하면 확대 됩니다.

** 이번 기후 행동이 국제 행동이고, 많은 시민들이 참가하긴 하였지만, 베를린에서는 시위에서 사진 찍는 것이 자발적으로 제한 되어있다. 경찰에 의한 무분별한 수사를 막기 위해서고, 집회 참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많은 사진이나 영상을 넣을 수 없었고, 과거 그리고 앞으로의 기사도 그렇다. 이 글에 담긴 사진들은 공개된 사진들. 당신이 만약 베를린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연대 활동을 한다면, 절대 카메라를 꺼내지 마라. 그 순간 제지를 당할거고, 계속 한다면 누군가 당신의 카메라 혹은 스마트폰을 바닥에 집어던질 수 있다. 별개로 상대의 동의를 얻지 않고 사진을 찍는 것은 연대를 깨는 일이고, 기록을 위해서라 할지라도 무례한 일이다. 당신이 아무리 우리의 친구라 할지라도.

 

기후 행동 네트워크(Climate Action Network – International, 이하 CAN-I)는 기후 변화 쟁점에 대한 환경-비정부기구(NGOs)의 포괄적 그룹 행동이다. 유엔기후협약(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ge, 이하 UNFCCC)의 활동적 회의로서 녹색 NGO 공동체들의 관점으로 “ECO, 생태” 라는 뉴스를 매일 발행한다.

CAN-I 의 회원들은 국제, 지역및 국가 기후 쟁점들에 대한 정보 교환 및 전략적 조정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CAN-I는 다음과 같은 아프리카, 중부-동부 유럽, 유럽, 라틴 아메리카, 북미, 남아시아, 동남 아시아 지역에 일곱개의 사무국을 두고 활동한다.
CAN-I의 회원들은 우선 순위로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미래 세대의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 (Brundtland Commission)”에 가치를 두고, 전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하며 공정한 개발을 위한 분위기를 보호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2014 기후행동, 뉴욕

2014년, 올해에도 많은 국가의 주요도시들이 이 기후 행동 네트워크의 집단 행동에 참가 하였는데, 특히나 뉴욕에서는 40만명이나 참여하여 큰 이슈가 되었다. 이 곳 인구 300만에 불과한 베를린 역시 1만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이 국제 기후 행동을 추진한 Avaaz에 따르면, G20 가입국을 위시로 최소 170만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한다. 베를린은 기후 행동의 하부 시위로서 ‘침묵 기후 행동 퍼레이드(Silent Climate Parade Berlin 2014)’와 ‘오늘: 빨리 세계를 구하자 – 베를린 행동(Heute: Mal schnell die Welt retten – Berlin)’, 그리고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자전거-디스코 행동(Tour de 2°C – Fahrrad-Disko gegen den Klimawandel)’ 등등을 조직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위 영상은 2013 침묵 기후 행동 퍼레이드, 베를린 ㅡ Open air DJ protest
(다음 링크에서 올해 사진들 일부를 볼 수 있다: http://www.ekvidi.net/global-denken-lokal-tanzen/)

‘침묵 기후 행동 퍼레이드(Silent Climate Parade Berlin 2014)’ 는 우리 세대에 가장 큰 문제인 기후 변화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기 때문에 이 시위를 조직한다고 밝히며, 우리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춤을 출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이 디스코는 사람들에게 다그치기보다 영감을 나눠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13시, 베를린의 광화문 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더 광장’ 에서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매개로 무료로 와이어리스 헤드폰을 나누어 주었고, 15시에는 네 명의 DJ들이 음악을 틀며 침묵의 디스코 퍼레이드를 시작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와이어리스 헤드폰을 통해 DJ들의 음악을 듣고, 춤추며 베를린의 서울광장이라고 할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 으로 행진하였다.

 

1795317_10152788187797704_3488095951271790993_o2014 기후 행동, 베를린 ㅡ 자전거-디스코 행동 (클릭하면 확대)

인도의 델리, 호주의 시드니, 브라질의 리오,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 등등과 달리 베를린은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자전거-디스코 행동(Tour de 2°C – Fahrrad-Disko gegen den Klimawandel)’ 이라는 색다른 시위를 조직하였다. 14시 30분, 서울의 홍대에 해당하는 크로이쯔베르그의 마리아넨 광장의 베타니엔 아트 하우스 앞에 모여 사운드시스템을 장착한 차량을 필두로 수 많은 자전거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브란덴부르그 문’ 을 향해 디스코 행진을 펼쳤다. 또한 마리아넨 광장의 한 켠에서는 ‘VOKÜ(Volks Küche, 민중의 식탁)’ 이 있었다.

 

10679829_1544823445753409_1771644882615536246_o2014 기후 행동, 베를린 ㅡ 자전거-디스코 행동의 민중의 식탁

또한 16시 30분에는 서울의 종로라고 할 수 있는 ‘포츠다머 광장’에 많은 아이들과 가족들이 모여 시위를 한 후에 ‘브란덴부르그 문’ 으로 행진하였다.

 

10275496_872573339420509_5572372402424559219_o2014 기후 행동, 베를린 ㅡ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세개의 스테이지가 만들어져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 브란덴부르크 문 양쪽으로 보이는 가장 큰 건물이 미국 대사관과 프랑스 대사관이 있고, 그 옆으로 독일 국회가 있다.
주말은 물론, 일주일에 서너차례씩 시위가 있다. 당연히 시위대는 집회, 결사 자유에 따라 경찰의 안전한 보호를 받는다.
지난 박근혜 대통령의 방독 당시 이 곳에서 한국 교민들의  항의 집회가 있었는데, 주독한국대사관이 개입한 반대 집회가 있었고,
독일 경찰은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교민들의 시위를 보호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호원들도 시위를 저지시킬 수 없다. 집회, 결사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 시위들을 물리적으로 방해할 수 없다. 그랬다간 독일 경찰이 방해하는 사람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할 것이다.

‘침묵 기후 행동 퍼레이드(Silent Climate Parade Berlin 2014)’ 와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자전거-디스코 행동(Tour de 2°C – Fahrrad-Disko gegen den Klimawandel)’, 포츠다머 광장에서 행진한 아이들과 가족들이 17시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합류하여 ‘오늘: 빨리 세계를 구하자 – 베를린 행동(Heute: Mal schnell die Welt retten – Berlin)’ 라는 시위-페스티발이 열렸다. 특히나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시위에서는 ‘2raumwohnung’ 과 같이 독일의 젊은 세대에 인기 많은 일렉트로-팝 그룹들이 대거 참여하여 세개의 스테이지에서 디스코 파티를 하였고, 열린 예술 전시와 WWF(세계야생동물기금협회), 그린피스 독일지부, 기후 동맹(Climate Alliance), Atmosfair(온실가스 배출량에 대한 공동 연구프로젝트), VCD – Organic Traffic Club(친환경 교통 클럽) 등과 함께 토론이 펼쳐졌다.

 

위 영상은 Leonardo DiCaprio 의 2014 UN 기후 정상회의 연설

이번 국제 기후행동은 지난 기후행동보다 참여인원부터 그 규모, 행동 방식에서 고무적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나 뉴욕 시위에서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에 따른 중대한 결정을 해야할 시점이라는 인상 깊은 연설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베를린의 또 다른 소규모 활동가들은 이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 이유로는 이 국제 기후 행동이 정치가들과 기업가들에게 우리의 의지와 요구를 보여주고, 급변하는 기후 변화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갖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번 행동이 즐기고 끝나버리는 페스티발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월스트리트 오큐파이 시위 때보다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요구를 실제로 관철시키는 데에 있어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10714215_872574049420438_8261964264055870435_o2014 기후 행동, 베를린 ㅡ 브란덴부르그 문 앞에서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풍선을 날리고 있다.
누군가 환경 보호 집회에 플라스틱 오염물질을 버리고 있다고 조롱하며 방해하려고 했지만,
이 풍선들은 친환경적으로 분해가 되는 플라스틱이다.

한편, 시애틀 타임스에 의하면,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는 ALEC(American Legislative Exchange Council, 미국법안대체협의회의)과 관계되어 있으며 실리콘 밸리에서 두번째로 큰 영향력을 펼치는 ‘Menlo Park’ 의 회원 자격을 그만 둘 것이라고 밝혔으며, 월요일 페이스북은 23일, 화요일 기후 변화에 보수적인 단체, ALEC과의 유대관계를 끊을 것을 발표했다. 비교적 새로운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자유- 보수주의 정치인들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가운데, 미국 인터넷 업계의 양대산맥인 구글과 페이스북이 ALEC과의 단절을 천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Exxon, Koch Industries 과 같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과 300개가 넘는 주요 화석 연료회사 그리고 2000개의 법률적 연관 관계에 있는 회원사들이 에너지 쟁점에 대해 ALEC의 로비를 통하여 친기업 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으며, 기후 변화 캠페인은 Coca-Cola, Kraft, General Electric and Motors 등을 이 그룹에서 나가게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Microsoft가 지난 8월 회원자격을 명시적으로 종료하게 만들었지만, 실제로 기후변화-환경문제에 심각성을 인지하고 함께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때문에 구글과 페이스북이 보여준 ALEC과의 단절이 큰 의미로 작용할지는 불투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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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구 독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가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과연 언론에 보도 되는 것만큼 이번 집단 행동이 내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2015 UN 기후 변화 회의’ 에서 기업들과 정치인들의 정책 변화에 효과가 있었을까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적 관점은 줄어들기 어려워 보인다.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과 직접행동은 계속 되어야 한다. 하지만, 단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리를 높이는 것 이외에 직접적으로 정치인과 기업들을 압박하지 않고, 단지 페스티발과 사람들이 모인 것에만 주목한다면, 외관상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정책은 변화된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내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10517438_10152376657217896_1786033887065110482_o2014 기후 행동, 베를린 ㅡ 브란덴부르크 문 앞
해가진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은 시위를 이어간다.
해가 졌다고 해서 집회,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려 시도했던 한국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안타까운 사실은 국제도시로 급부상하는 인구 천 만의 메트로 도시, 서울에서는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 지난 세계 경제의 심장부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시작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street, 이하 OWS) 운동만 돌이켜보자면, 유럽을 거쳐 국제적 운동으로 뻗쳐나가 82개국, 1500개 도시에서 수 백만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물론 “OWS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에는 성공했지만, 뚜렷한 전략적 목표나 지도자, 정치력이 없어 월가의 대형은행을 바꾸는데 실패했으며, 고작해야 현금카드 수수료를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성취였다” 는 비판을 받지만, 미국에서는 시위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름 없는 150만 달러를 모아 빚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개인 채무들을 대신 갚아주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등록금, 무상급식, FTA비준안상정 등의 쟁점으로 산발적인 있었기야 하지만, 여의도에서 있었던 OWS 시위는 단지 300여명의 참가자들 밖에 없었다.

 

2011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뉴욕 ㅡ OWS 시위가 일어난지 몇달이 지났음에도 계속되었던 시위
그 해 10월, 시위대가 브루클린 다리를 점거하였다

왜 한국에서는 이러한 국제 행동에 함께하지 못할까? 단지 한국 사회가 우경화 되었기 때문일까? 국내-외 정서가 달라서?
하지만, 한국은 이미 경제적으로도 OECD(34개국으로 조직된 경제협력개발기구)와 G20의 의장국으로서 국제 경제에서 영향을 받는다. 또한 미국과 유럽 등 46개국의 FTA 발효를 앞두고 있으며, 3개국 타결, 16개국 협상 준비 진행중인 국가인데, 어째서 이런 국제 쟁점들에 대해 행동이나 조직은 커녕 아무런 의견조차 없는 것일까.

앞서 다루었던 베를린의 기후행동을 생각해보면, 다소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다하더라도 그 조직력과 시민들의 참여만큼은 한국에서 바라볼 때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단언하기엔 이르다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시점에선 한국의 정치적 행동들이 상투적이고, 정형화 되어 있으며, 그렇게 경직된 것이 아닐것일까 생각한다. 한국의 대중들이 바라보는 정치적 행동 또는 시위, 집회라는 것은 굉장히 교조적, 폐쇄적으로 보이는게 사실이고, 이러한 비판은 젊은 활동가들도 부단히 문제 제기해오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보니, 젊은 세대의 사회 참여율은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정치적 무관심이 커지고 있다.

자본에 의해 지금 젊은 세대들의 문화가 상당히 휘발성 짙고, 소비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정치적 조직및 저항이라는 것에 아무래도 문화라는 것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는 인천에서 저항예술제가 열리기도 했다. 다행스럽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정치가 우리의 삶을 관통하듯이 문화 또한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단지 정치적 요구만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누려야할 문화, 이것이 자본과 결별하면서도 앞으로의 삶을 열 수 있는 열쇠일거라 생각한다.

 

이번 주말, 세계 각국 주요 도시는 물론 베를린에서도 ‘Critical Mass’ 라는 이름의 자전거 집단 행동이 있다.
다음에는 그에 관한 글을 약속하겠다.

 

 

 

영화 ‘러브앤 아나키’

Love and Anarchy (Film D’amore E D’anarchia, 1973) opening

 

73년 영화, <러브앤 아나키> 입니다. 이 부분은 이 영화의 오프닝 파트. 아나키스트가 뭐하는 사람들이냐는 꼬마의 질문에 어머니는 담담히 “왕을 죽이고, 폭탄을 던지다 처형을 당하는 무정부주의자란다.” 라고 이야기 하고, 꼬마의 아버지는 “무정부주의보다 사회주의가 급선무야, 세계가 하나가 되려면 죽여야 해. 우린 모두 형제, 자매로 동등하게 태어났어.” 라고 소리를 높인다.

주인공 튜닌은 1930년대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를 암살하기 위해 로마로 온 무정부주의자로 본인의 과업을 잊은채 창녀 트리폴리나와의 사랑에 빠진다. 무솔리니를 죽여야 한다는 과업과 사랑 사이에서 고민을 하는데, 그러던 튜닌은 트리폴리나가 아닌 다른 창녀, 살로메를 가슴 깊이 사모하게 된다.
이 영화는 펠리니 감독의 부감독 출신이며 60년대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다가 70년대 할리우드로 넘어간 이탈리아 거장 감독 리나 베르트뮬러의 작품으로 영화는 사적인 욕망과 대의명분 사이의 갈등을 희극적으로 드러내다 튜닌이 엉뚱한 경찰을 저격하면서 비극적인 상황으로 끝이 나고만다. <러브 앤 아나키>는 잔악한 현실은 잊혀진 채 영웅이나 성인으로만 기억되는 순박한 아나키스트를 위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고전 무성영화의 연출을 오마쥬하기도 하였으며 <러브 앤 아나키>는 잔악한 현실은 잊혀진 채 영웅이나 성인으로만 기억되는 순박한 아나키스트를 위한 영화. 이 영화는 1973년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주연 배우 지안카를로 지아니니는 최고 배우로서 상을 받았다.

영화 ‘램페이지 2’

나온지 얼마안된 우베 볼의 ‘램페이지 2’ 중 일부입니다. 영화 중반부에 주인공 빌 윌리엄스가 왜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이목을 끌었는지는 이 연설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스피치가 빠지거나 이해를 못하면 우베 볼의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평하길, “정신나간 사람이 아나키즘을 핑계로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며 비난을 하게 되는거죠.

재미있는건 하우스 친구들과 이걸 같이보려고 모든 인터넷 스트리밍 사이트를 다 뒤졌는데, 오로지 한국어 자막 삽입 버젼 밖에 못 찾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 하우스 친구들도 강제로 한국어 자막버젼으로 봤ㅇㅇ

영화 밖 이야기: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사람들은 항상 자막과 함께 보냐고 묻더군요. 더빙도 있기야 한데, 더빙 보면 의역이 너무 많거나 영화가 죽어버리기도 하고, 특유의 인터넷 다운로드(토탈 일레갈!!!!) 문화 덕분에 자발적으로 자막을 만드는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독일은 자막보다 대부분 정식 수입을 해서 더빙을 하거든요. 아마 대부분의 서구권 국가들이 그럴겁니다. 근데, 저는 어떤 언어던간에 더빙이 정말 싫어요. 며칠 전에 죠니 뎁 주연의 영화 ‘Blow’ 를 어렵사리 다운 받았는데, 시ㅂ 불어 더빙. 내용도 떨어지는데, 미국영화를 불어더빙에 한국어 자막으로 보는게 너무 고역이었습니다. 게다가 나오는 배우들도 한결같이 유명한 헐리웃 배우들인데..

정어리 – 30

“Coffee and Cigarette”
In the dream last night, I tasted sweet things.
From this morning, took coffee and cigarette. Thought that sweet recipe from the dream. Coffee and cigarette. Read some articles. Coffee and cigarette. Coffee and cigarette. Thought move ass to market with my bike. Coffee and cigarette. Thinking sip some strong things with bit sweet smokie things. Coffee and cigarette. Who want hang out with me? Maybe you have to bring some alcohol things and blanket or jacket. I want to see sundown with feeling tipsy and silly shy.
..I still thinking with coffee and cigarette.

ㅡ 20. August, 2014

 

 

 

“커피와 담배”

 

간밤의 꿈에서 달콤한 것들을 맛보았다.
아침엔 커피와 담배. 꿈에서 맛보았던 달콤한 레시피를 생각했다. 커피와 담배. 기사들을 좀 읽었다. 커피와 담배. 커피와 담배. 자전거를 타고 마트에 갈까 생각했다. 커피와 담배. 독주와 달콤하고도 자욱한 연기들을 생각중이다. 커피와 담배. 누구 나와 같이 나갈 사람 있나요? 아마도 당신은 알콜 따위들과 담요 혹은 자켓을 가져와야할거에요. 약간의 취기와 바보같은 부끄러움과 햇살을 받고 싶다.
..나는 아직도 커피와 담배를 생각하고 있다.

ㅡ 2014년 8월 20일

정어리 – 29

철학부터 시작해서 예술을 지나 가벼운 대중 문화까지 섭렵하고자 욕망하는 인문학 씹새들 중,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무릎을 꿇고 빌건데, 빌어먹을 논문 말고, 개인적인 에세이 하나 잘 써보길 바란다. 타인에게 휘둘리길 바라지 않으면서 가장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커리어 페이퍼 한장에 충실한 놈들, 이 놈들이 무너지는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의 숭고했던 삶들을 자신에게 마구 쳐바른다. 백화점에 진열된 색 옷처럼. 숭고란 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이런 새끼들 때문에 루쉰의 잡문들을 거꾸로 읽어야할 판이다. 권위주의적인 편집증자들. 성가신 일들. 내가 왜 네가 싫은지 알기 위해, 잠시라도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요가, 필라테스, 단전호흡 등등, 그러한 프로그램이 만연한 이 시간에 기대어 네 삶을 합리화 시키지 않길 바란다.

 

ㅡ 2014년 2월 16일 새벽

a-revolt 서버관련 긴급 공지

dx3에 무료로 서버 공간을 제공해주는 아나키스트들의 웹사이트인 a-revolt.org가 9월 13일에 공격을 받고, 사용자들의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서비스를 잠정적으로 중단했습니다. 현재까지 웹마스터가 추적한 결과 극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과 좌파들의 연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별개로 dx3 는 심각한 공격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계속 열려있습니다. 약간 느리더라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곧 소식이 업데이트 되는데로 추가로 공지하겠습니다.
ㅡ dx3.a-revol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