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벽

 [youtube=://www.youtube.com/watch?v=v9mB0wgwv0Q&w=420&h=315]

 

x. 한국에 있을 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2달간 임권택 특별전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영화 ‘개벽’을 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임권택 영화중 단연 최고로 뽑는 작품이다. 동학혁명에 관한 작품으로 동학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에 대한 내용도, 그리고 녹두장군 전봉준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동학의 1대 교주 수운 최제우가 혹세무민죄로 처형당하고,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덕화 분)은 관아의 추적을 받으면서도 동학을 널리 알리는 이야기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관아 놈들을 피해 밥 먹다 밥상 걷어차고 도망치고, 동지들이 잡히는 와중에 도망치고, 인사하다 도망치고, 때로는 꽃이 피고, 시내가 흐르는 때로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눈내리는 강산을 배경으로 수도 없이 도망치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한국의 자연을 다룬 미장센이 여지 없이 쏟아진다. 도망치는 씬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보면, 무엇인가에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x. 개벽 (開闢) [개벽]
[명사] 1. 세상이 처음으로 생겨 열림. 2. 세상이 어지럽게 뒤집힘.

 

x. 개벽.
{사백년을 이어 내려오던 조선왕조는 19세기에 이르러 봉건제의 모순이 심화되며 국정은 문란해갔다. 한편, 아편 전쟁에서 중국이 서구 열강에 굴복하자, 조선 민중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할 새 사상을 갈구하였다. 이에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그러한 깨우침의 하나로서 동학(東學) 운동이 나타났다.}

민중의 지지를 받던 동학이 계속 탄압 당하자, 해월 최시형은 혼자 태백산으로 숨고, 부인 손씨와 네 딸들은 한심한 위정자들과 우민들로부터 전국적인 조리돌림을 당하는 수모를 겪던 때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해월은 손씨 부인이 죽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더 깊은 산중에 숨은 해월은 그를 돌봐주던 노인의 혼자된 며느리 안동 김씨와 결혼한다. 그러던 중 강시헌 선생과 재회한 해월은 다시 도주해서 동학의 경전을 출판한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손씨 부인과 재회하지만, 기쁨보다는 안동 김씨를 생각하며 고민한다. 훗날 이 두 부인은 자매처럼 지내게 된다.

정부의 삼정문란은 날이 갈 수록 심화되었다. 1894년 민중들의 분노는 결국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외치며 동학난으로 이어진다. ‘척양척왜’는 단순하게 “양놈들과 왜놈들을 배척하자” 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청나라 군사와 일본 군사를 불러들여 핍박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은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라는 가치로 시작했으나, 동학난이 일어나자 최시형은 이것을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 로 바꾸어 사용한다. 사실 동학 거사를 두고서, 해월은 거사가 이르다며 전봉준에게 기다릴 것을 요구했지만, 전봉준은 민중이 탐관오리들 손에 죽어가는 이것을 보며, 이 하늘의 뜻을 늦출 수 없다하여 거사를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민중의 절규를 본체 만체한 조선 관군은 일본군과 함께 신식무기로 무장하여 동학농민군을 격파한다. 이 때 일본군이 무장한 신식무기는 개틀링 기관포였다.

충남 출신의 신동엽 시인은 ‘우금티의 그날’을 이렇게 적었다. ‘공주 우금티, 황토 속 유독 아카시아가 많은 고개였어/ 그 우금티 고개에서 동학군은 악전고투했다. 상봉 능선에 일렬로 배치/ 불을 뿜는 왜군 제5사단의 최신식 화력/ 야전포, 기관총, 연발소총, 수류탄/ 꽃이 지듯 밑 없는 어둠으로 수백 명씩 만세 부르며 흰 옷자락 나부껴 수천 명씩 차례차례 뛰었다. ‘(「금강」, 20장) ‘.

통한의 우금티 전투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만다. 이 전에 승승장구하던 농민군은 2차에 걸쳐 전개된 공주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데, 당시 전투에 참가한 3만여 농민군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이 싸움 후 재기를 노린 전봉준은 12월 말 순창 땅에서 체포되어 이듬해인 1895년 3월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동학군은 일본군에 의해 거의 진압된 상황이었지만, 접주급 등 동학군 핵심간부 등 26명은 항복이나 해산을 거부하고 대둔산 자락의 미륵 바위(형제바위)로 들어왔다.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에 대항하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살아남은 일부는 대둔산에 들어가 1895년 2월 18일까지 마지막까지 항거하다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전원 바위벼랑에서 모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문석봉의 『의산유고』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따르면, 1894년 11월 초 우금티에서 패전한 동학 농민군 50여 명이 대둔산 절벽 위에 3채의 집을 짓고 화승총으로 항전을 계속했고, 1895년 2월 18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진지가 함락됐다고 한다.

그리고 1898년 수 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해월은 참형 당한다. 동학 경전 출판에 도움을 주었던 강시헌 선생도 이 때 사형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국안민’을 위시로한 동학의 난은 일본군에게 격파당하지만, 훗날 3.1운동에서 일제로부터의 해방운동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보국안민’의 기치로 거리로 나선다.

동학은 한없이 낮은 세상을 원했다. 천지를 개벽하여 높은 곳에 오르길 원한 것이 아니다. 땅이 요동치고 하늘이 뒤집히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 관계가 요동치고 뒤집혀서 고르게 낮고 평평해지는 것을 바랬다. 대동 세상. 천지 만물이 사람이요, 사람이 만물의 일생이라. 바야흐로 생명사상의 새로운 싹(맹아)이였고 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