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 자아와의 만남

 

우연히 또래 아이를 키우는 엄마중 하나가

미술심리치료가 과정을 꽤 깊게 공부하던 사람이다.

그 친구가 내게 오늘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는, 자신의 생각 없이 그냥 내 말 뒷부분만 따라서 하는 것 같아.”

사실 그랬다.

다른 엄마들에 비해 나를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고,

생각과 사상이 아주 불순하다 여겼다.

그런 내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꼭꼭 숨기고 있었다.

가족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나의 생각과 사상을 드러내는 순간

대화의 단절과 분열을 일으켰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때때로 어떤 가족은 분명한 문제가 있는데

정확한 문제점을 보지 않고 말 안듣는 한 자식을 비난함으로써

일시적인 다수결 의견일치로 평화를 유지한다는 위로도 해주며,

자존감이 크면, 다른사람과 사상이 다르더라도 그걸 애써 숨기지 않는다며,

“오늘 온김에 한번 그려봐. 내가 전체적으로 한번 보게.”

내게 반 강제로 종이 한장, 연필 하나, 지우개 하나 쥐어주었다.

나무, 집, 사람을 그려보라고 했다.

최대한 내 그림실력을 발휘하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만 충실하고 빠르게 그려냈다.

그림속의 풍경은 대강

해질녘 산 중턱의 집

그 근처 한 그루의 나무와 그 옆의 비슷하게 생긴 나무

팔짱끼고 쪼그리고 앉아 하늘을 보는 작은 여자아이

아이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입은 웃고있었다.

“언니 내가 몇가지 물어볼거야. 이 나무는 건강해?”

“응 건강해.”

“물을 주는 사람이 있어?”

“아니, 없어. 그냥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고 자랐어.”

“나무에게 친구가 있어?”

“응, 옆에 있는 나무가 친구겠지? 저 뒷산에 있는 모든 나무들도 친구일거고..”

“이 집안엔 누가 살아?”

“강아지 한마리.”

“그럼, 강아지 한마리랑 아이랑, 이 둘이서만 살아?”

“응.”

“찾아오는 누군가는 있어?”

“아니.”

그 친구가 바라본 나의 심리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꽤 건강한 편이다.

나의 나무는 풍성한 잎과 튼튼한 땅을 가지고 있다.

나의 나무 옆에는 남편 나무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던

“어린 아이가 외딴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 살아.”는

그 친구가 보기에 참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괜찮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나도 기억한다.

그 무렵부터 그냥 혼자였다.

언니오빠들은 학교에, 엄마는 언제나 바빴다.

집에 살며 오가는 가족들은 많았지만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들은 나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엉뚱한 상상에 핀잔과 비난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을 부정적으로 여긴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두려워하고 외로워해야 했기에

혼자서 즐겁게 지냈다.

만화를 보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하늘을 보면 거인이 나타나는 상상을 했고

땅을 보면 아스팔트가 갈라지고 용암이 흘러나오는 상상을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간접 경험을 하며 자라온 것이다.

그래서 영화속 재앙, 만화속 종말에 비교해 보면

나의 삶은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살만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보여준 나의 자아는 너무나 어렸다.

큰 집안에 대화할 상대없이 혼자 지내는 어린아이가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상상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이제야 내가 무엇이던 프로가 되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

쓸데 없는 것에 고집피우며 남은 안되고 나는 되는 이유도,

연애할 때마다 상대방의 마음과 정성을 무시한 이유도,

내 아이들의 응석과 투정을 병적으로 싫어한 것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는 것도,

결국 여섯살 짜리 아이가 내 속에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아를 보여주기 싫어서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교과서를 읽는 듯한 말투로

주변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둔 것이다.

나는 한참동안 눈물이 났다.

오랜 세월 괜찮아 하고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실은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슬펐다.

눈을 반짝이며 희망을 그리는 아이가 불쌍했다.

한참 말 못하고 눈물만 짓다가,

둘째 아이 낮잠 재워야 할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친구가 말했다.

 

“아마,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나중에 그리는 그림 속 아이는 자라있을거야.

신기하게도, 자라더라고.”